'Tony La Russa'에 해당되는 글 27건

  1. 2021.05.24 Cardinals Game Thread: at White Sox (미국시간 5/24~26) 152
  2. 2015.02.15 Revisiting TLR ERA [19] Ryan Franklin 19
  3. 2015.01.31 Revisiting TLR ERA [18] Mike Matheny 32
  4. 2014.05.21 Cardinals Game Thread: vs Diamondbacks (미국시간 5/20-22) 472
  5. 2014.02.23 Revisiting TLR ERA [13] Rick Ankiel - Part II 17
  6. 2014.02.06 Revisiting TLR ERA [12] Rick Ankiel - Part I 21
  7. 2014.01.21 Revisiting TLR ERA [10] Scott Rolen 28
  8. 2013.03.02 Revisiting TLR ERA [9] David Eckstein 14
  9. 2013.02.21 Revisiting TLR ERA [8] Woody Williams 9
  10. 2013.02.13 Revisiting TLR ERA [7] Brian Jordan 26
  11. 2013.01.31 Revisiting TLR ERA [5] J.D. Drew - Part I 8
  12. 2013.01.25 Revisiting TLR ERA [4] Steve Kline 26
  13. 2013.01.07 Walt Jocketty Years: 들어가며 13
  14. 2012.01.09 Dave Duncan 사임하다: LaDunc 시대의 종말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시작 22
  15. 2011.11.10 당신이 Tony La Russa에 대해 모르는 10가지 사실 26
  16. 2011.11.03 Cardinals 감독 후보 명단 공개 16
  17. 2011.11.02 Tony La Russa, 전격 은퇴 선언 28
  18. 2011.10.26 World Series Game Thread : Cardinals vs Rangers, Game 6 582
  19. 2011.07.29 Colby Rasmus 트레이드 분석 및 Cardinals 로스터/페이롤 현황 6
  20. 2011.05.03 Game Thread : Cardinals vs Marlins (미국시간 5/2-5) 141
  21. 2010.10.05 Cardinals 단신(10/6) : 86승 76패로 정규시즌을 마무리하다. 11
  22. 2010.09.17 Cardinals 단신(9/17) : Ludwick/Eckstein 다시 St. Louis에 돌아오다.
  23. 2010.09.15 Cardinals, 그들은 요즘 왜 맨날 지는 것일까? 9
  24. 2010.08.31 Colby Rasmus vs Tony La Russa : 막장드라마의 끝은 어디인가 6
  25. 2009.10.26 Cardinals 단신: Mark McGwire 타격코치로 복귀!? La Russa 감독 계약 연장?? 4
  26. 2009.09.28 Cardinals 단신 : La Russa 감독의 Cardinals 플레이오프 로스터 구상 외 2
  27. 2009.07.23 Chris Ducan(STL) - Julio Lugo(BOS) 트레이드 12

by 주인장

Cubs Series Recap

5/21  Cubs 12, Cardinals 3
5/22  Cardinals 2, Cubs 1
5/23  Cubs 2, Cardinals 1

 

Padres에는 스윕당하고 해적떼는 스윕하는 양학의 정석을 보여준 뒤 Cubs와의 대결이어서 무척 흥미로웠는데, 결국 곰탱이들에게 1승 2패로 시리즈를 내줬다.

뒤의 두 경기는 늪야구의 정수를 보여주는 게임들이었는데... 사이좋게 1승씩 나눠 가졌다. 1차전을 이쪽에서 갖다 바친 걸 제외하면, 사실 양 팀 타선의 후짐은 거의 비등했다고 본다. Mikolas가 4이닝 던지고 내려가고, Zach Davies가 5이닝을 던지는 경기들에서 이렇게 점수가 안 나기도 쉽진 않을 것이다.

 

O'Neill, DeJong, Carlson이 다 빠지고 나니 Arenado나 Yadi가 뭐 하나 쳐 주기만 기대하게 되는 타선도 문제지만(Sosa가 뜬금없이 잘 치고 있다만 이게 얼마나 가겠는가?), 앞으로 투수진이 더욱 우려되는 상황이다. 불펜은 시즌 초부터 계속해서 마구 갈리는 중인데, Mikolas가 기껏 복귀했다가 4이닝만에 다시 IL로 돌아가면서 앞으로도 변함없이 쭈욱 갈릴 전망이다. 설상가상으로 스케줄은 6/7까지 휴일이 없다. 과연 투수들이 6월까지 버텨줄 수 있을까?

 

 

NL Central

 

Cardinals 26-20
Cubs      24-22  -2

Brewers  23-23  -3

Reds      20-25  -5.5
Pirates    18-28  -8

 

한때 전 구단 개싸움의 양상을 보이던 중부지구는 아래쪽 두 팀이 처지기 시작하면서 3팀 레이스로 재편되는 모습이다.

 

 

Series Preview: Cardinals at White Sox (시즌 전적 없음)

팀 성적 
Cardinals  26승 20패 .565 (NL Central 1위)  Run Diff. +11
White Sox 26승 19패 .578 (AL Central 1위)  Run Diff. +64

AL 중부지구 1위 White Sox와의 인터리그 원정 3연전이다.

 

주인장은 20년 넘게 이 팀 야구를 보고 있는데, 이렇게 TLR을 적장으로 마주하는 날이 올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 못 했다. 2011년 WS 우승 후 은퇴했을 때만 해도 그렇게 끝일 줄 알았다. 이후 DBacks의 프런트에 임원으로 합류했을 때도  그건 어디까지나 프런트였을 뿐, 설마 감독으로 필드에 복귀할 줄은 몰랐는데... 정말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다.

 

복귀한 TLR은 연장전 규칙을 잘 몰라서 비웃음을 사기도 하고, unwritten rule을 찬양하는 꼰대짓을 해서 또 욕을 먹었지만, 그러나 저러나 White Sox는 AL 최고의 팀 득실차(+64)를 자랑하며 지구 1위를 달리는 중이다. 야구는 결국 선수가 하는 것이고, 그만큼 White Sox의 전력은 막강하다. 심지어 Eloy Jimenez와 Luis Robert가 다 빠지고 대형 신인 Andrew Vaughn이 기대에 못 미치고 있는데도 이 정도이다.

 

그나저나, 저 Mercedes의 unwritten rule 사건 때 같은 팀 선수들인 Lynn이나 Giolito가 대놓고 TLR의 발언을 까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예전에 여기서 감독하던 시절에 선수가 저렇게 TLR에게 개기면 으레 벤치에 처박히다가 트레이드 당하곤 했는데... 역시 시대는 변했고 TLR은 나이를 먹었다. 예전같이 선수들 위에 군림하지는 못하나 보다.


Probable Starters 
Game 1: 김광현 at Lance Lynn                5/24 20:00 EDT (5/25 9:00 KST)
Game 2: Jack Flaherty at Lucas Giolito      5/25 20:10 EDT (5/26 9:10 KST)
Game 3: John Gant at Carlos Rodon        5/26 14:10 EDT (5/27 3:10 KST)

상대 감독이 TLR인데다 심지어 1차전 상대 선발은 무려 Lance Lynn이다. 2011 우승팀의 멤버 둘을 상대하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갬성에 젖기에는 상대가 너무 세다. Lynn은 그 때의 루키 투수가 아니고 이미 리그 TOP 20 급의 에이스이다.

 

매치업을 보면 볼 수록 뭘 적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그나마 우리 투수들은 투승타타에 강한 면모를 보이고 있으니 법력에 기대는 수밖에... 이런 기도메타 식의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하고 싶은데, 상대 투수진이 막강한 반면 우리 타선은 고구마 그 자체라 도무지 뾰족한 수가 보이질 않는다. Lynn의 K/9가 10.15 인데 이게 셋 중에 제일 후진 수치이다. Giolito는 K/9가 11.05 이고, Rodon은 무려 13.08 이다. 요즘 메이저리그에 노히터가 유행인데, 다음 번 노히터의 제물이나 되지 않기를 빈다.

 

쟤들은 뉴욕에서 스윕 당하고 오는 거다!! 분위기는 우리가 우위다!! 라고 우기기엔 우리도 홈에서 곰탱이들한테 1승 2패로 시리즈를 내준 뒤라 그것도 좀..... ㅠㅠ

 


White Sox Lineup 예상
 
1. Tim Anderson, SS        297/333/432, 115 wRC+
2. Adam Eaton, RF          203/306/359, 92 wRC+
3. Yoan Moncada, 3B      287/413/413, 141 wRC+
4. Jose Abreu, 1B           255/339/483, 129 wRC+
5. Yermin Mercedes, DH  347/400/531, 162 wRC+
6. Yasmani Grandal, C     141/395/376, 130 wRC+

7. Andrew Vaughn, LF    220/320/376, 100 wRC+

8. Leury Garcia, CF         228/262/293, 56 wRC+
9. Nick Madrigal, 2B       276/316/379, 96 wRC+
  
벤치
Zack Collins, C
Jake Lamb, 3B

Danny Mendick, 2B
Billy Hamiton, CF
 
불펜 
Liam Hendriks (CL, R)

Aaron Bummer (L)

Garrett Crochet (L)

Matt Foster (R)

Codi Heuer (R)

Evan Marshall (R)

Jose Ruiz (R)

 

확실히 Jimenez와 Robert의 빈자리가 느껴진다. Leury Garcia나 Adam Eaton은 주전감으로는 부족한 선수들이다. 하지만 나머지 선수들도 꽤, 충분히 위협적이다. 상대 타선은 공을 많이 보고 출루에 능한 타자들이 많이 포진하고 있어 상대하기가 무척 까다로울 것이다.

 

아아... 어떻게 되겠지...;;;;;;;

 

Go Cardinals...!!!

Posted by FreeRedbird
:

여러분들이 생각보다 너무 많은 아이디어를 주신 덕에 (?) 조연 모듬 리스트를 확정을 하지 못했다. 대신 불판도 갈을 겸 해서 조연 모듬에 넣으려던 다른 선수 하나를 준비했다. 사실 시리즈를 20편에서 종결할 생각이었으나, 필자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선수들을 많이 깨우쳐주신 덕에 몇 편은 더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어차피 추억팔이를 할 수 있는 시간도 이제 얼마 안남았다!


Ryan Franklin


Starter / Reliever

DOB: 1973년 3월 5일

Birth: Fort Smith, Arkansas

Time with Cardinals: 2007-2011

Draft and Minors

1992년 드래프트 23라운더인 Franklin은 "유망주" 와는 거리가 멀었다. 별볼일없는 구위를 다양한 레퍼토리와 그나마 쓸만한 커맨드로 메우는 (매우 낮은 Upside의 ) 허접한 투수였는데, 주니어 칼리지 (Seminole Junior College) 시절 2년간 20승 무패의 기록을 세운 점과 상당히 간결하고 안전한 투구폼을 지녔다는 점을 높이 평가받아 그래도 23라운드 전체 642번으로 지명을 받았다.[각주:1] 프로 입문 5년만에 AAA볼 Tacoma까지 진입하긴 했는데, 90-92마일대의 평범한 패스트볼 + 다양하지만 자신없는 브레이킹볼 + 전무한 플러스피치로 ML레벨에 들어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Franklin은 97~99시즌 3년간 AAA볼에서 꾸준히 선발수업을 받으며  350이닝을 넘게 던졌고 평균자책 4.55를 기록했다. 이 당시 PCL의 경기당 평균 득점이 5.7을 넘었으며, 리그 평균 타율이 3할에 육박하고 리그 평균 OPS가 8할이 훌쩍 넘었음을 생각하면 Franklin 이 꽤나 선방했다고 봐야 하겠으나, "잘해봐야 스윙맨" 프로젝션을 받을만큼 Stuff가 너무 실망스러웠다. 심지어 Franklin 본인도 훗날 "마이너 시절 내가 ML에서 승격될 수 있을 거라고 낙관하지 않았다" 고 회고했다.

"I never considered myself to have the best talent in the world, but I was always a fierce competitor and I worked really hard. If you told me in the minor leagues that I would have 10 years in the big leagues and be an All-Star, I would have said, 'Whatever,' because I never really had high expectations for myself. It's crazy what hard work and competing can do for you."

-Ryan Franklin, ESPN interview with Jerry Crasnick (03/28/2010)


Ryan Franklin's Minor League Track Record

YearTmLevWLERAGSIPHERHRBBSOWHIPBB9SO9SO/W
1993BellinghamA-532.921474.07224227551.3383.36.72.04
19943 TeamsA-A+-AAA1383.2527185.11756713321391.1171.66.84.34
1995Port CityAA6104.3220146.01537013431021.3422.76.32.37
1996Port CityAA6124.0127182.01868123371271.2251.86.33.43
19972 TeamsAAA-AA973.7322149.21426215381081.2032.36.52.84
1998TacomaAAA564.5116127.2148641832901.4102.36.32.81
1999TacomaAAA694.7119135.2142711733941.2902.26.22.85
2000TacomaAAA1153.9022164.01477128351421.1101.97.84.06
10 Seasons61603.921681170.211695101292778611.2352.16.63.11

AAA볼에서 4년째 정체중이던 Franklin은 2000 시즌 전환점을 마련했다. 소속팀 Tacoma에서 11승 ERA 3.90으로 커리어 최고 성적을 찍었고, 무엇보다 수년째 2점대에 머물던 BB/SO 비율이 갑자기 4.0을 넘기면서 ML 승격을 부르짖었다. Franklin은 커리어 내내 그럭저럭 괜찮은 제구력과 커맨드를 자랑했는데 (거의 유일한 장점이라고 본다), 이 시즌에 딜리버리에 디셉션을 가미하면서 갑자기 K/9이 무려 7.8까지 올라갔고 (물론 이 해를 마지막으로 Franklin은 다시 이 수준으로 탈삼진을 잡아내지 못했다), 이 활약을 크게 인정받아 시즌 막판에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Ryan Franklin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미국 대표팀 출신이다. 당시 미국 대표팀 로스터를 파헤쳐보면 대략 1) AAAA레벨 쩌리들, 2) BA Top 100에 수준의 고급 마이너 유망주들 (Sean Burroughs, Kurt Ainsworth, Adam Everett), 3) ML급 엘리트 탤런트 (Roy Oswalt, Ben Sheets) 들로 대략 구성되어 있었는데, 27세의 나이로 Mariners 산하 AAA 소속이던 Franklin은 당연히 1번 유형에 속하는 케이스였다. 이 대회는 Ben Sheets의 속칭 "하드캐리"[각주:2] 로 잘 알려져 있기에 Franklin을 기억하시는 분은 아마 없겠지만, 나름 3경기에서 8이닝 무실점으로 대표팀 밥값은 충분히 했다.

시애틀 시절의 Franklin

Mariners 시절 (2000-2005)

올림픽에서의 선전 덕분일까. 28세의 늦은 나이에 ML에 자리를 잡은 Franklin은 2001시즌 불펜에서 Mop-up 으로 아주 좋은 활약을 했고 (78.1이닝 ERA 3.56), 2002시즌에는 스윙맨 (선발 12경기, 구원 29경기) 으로 뛰었으며, 2003년 Mariners 선발진에 진입해 기회를 제대로 살렸다. 커리어 최다인 212이닝을 던지면서 평균자책 3.57로 실점을 억제했는데, 이는 타고투저 시대였던 당시 리그 ERA 탑 10에 드는 수치였다.[각주:3]  지역 언론에서는 이 해 "Jamie Moyer 를 제외하면 Mariners 로테이션에서 가장 믿을만한 투수"로 Franklin을 뽑았고, 특히 그가 득점지원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Run Support 4.66, 리그 하위권) Franklin이 15승은 넉넉히 했어야한다는 지원사격을 보냈다. 덕분에 Franklin은 Mariners로부터 2년간 4.3M의 꽤나 짭짤한 계약을 받았는데, 예상대로 이는 양측에게 좋은 일이 아니었다.

괜찮아보였던 2003시즌도 뚜껑을 열어보면 불안요소가 한두개가 아니었다. 일단 삼진을 잘 잡지 못하니 FIP와 ERA와의 괴리는 끔찍한 수준이었고[각주:4] (FIP 5.17, ERA 3.57),  공이 느린 플라이볼 피처이다보니 (FB 44%, GB/FB 0.77) 피홈런 리그 1위 (34개)의 영광도 차지했다. 체인지업이 구리다보니 좌타자들에게만 홈런을 23개나 두들겨맞았고 K/9은 고작 4.2에 그쳤으니, 이 정도면 차세대 흑마술사의 등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스카우팅 리포트를 보면 Franklin의 레퍼토리는 "패스트볼 + 슬라이더 + 커브 + 체인지업 + 스플리터 + 싱커 + 에다가 2003시즌에 커터를 도입했다" 고 써있는데, 구위가 부족하니 레퍼토리를 확장해서 그 갭을 메워야했던 Franklin의 부단한 노력이 안쓰럽다.  결국 2004년, Franklin은 우악스럽게 패스트볼을 존에 찔러넣다가 우타자들에게 호되게 당했고, 7~8월에는 무려 선발 11연패를 당하기도 했다. 거기에 Mariners 특유의 리그 최하위 득점지원이 계속되면서 (Run Support 3.1, 리그 최하위) 4승 16패라는 끔찍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다.

"He has so many weapons. We'll be in the bullpen saying, 'He's going to throw this now,' and then he throws something else for a strike. Last year it seemed like he was 0-1 or 0-2 against everybody. It's tough to hit down 0-2 no matter who you are." 

-Jason Motte, on Franklin's repertoire (03/28/2010)

7개의 구질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하나 Franklin은 결국 운이 많이 필요한 홈런 프론, Finesse-Flyball pitcher 였다. 이런 투수들은 Sustained Success를 이어가기가 힘들고, Franklin의 선발투수로써의 가치는 2003시즌에 정점을 치고 아주 급격히 거품이 빠졌다. Franklin이 Cardinals로 이적해온 것은 2007년인데, 그 때 Franklin의 나이는 이미 34세로, 대체 뭘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던 상황이었다. 두들겨 맞는 걸로는 자신있었으며 (투수구장 홈으로 쓰면서 4년간 피홈런 100+개), Mariners에서 뛴 6년간 K/9이 4.7에 불과했던 투수를 영입했던 것이었기에 영입 당시만해도 이 투수가 향후 Izzy의 뒤를 잇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후 Franklin은 Cardinals에서 무려 5시즌을 뛰었고, TLR 시대에서 가장 많은 경기에 등판한 선수로 남게 된다.  

TLR ERA (1995-2011) 최다 경기 등판 순위

  1. Jason Isringhausen (401)
  2. Ryan Franklin (285)
  3. Kyle McClellan (245)
  4. Matt Morris (237)
  5. Chris Carpenter (195)

"It’s good to know (about closing), because I want to be prepared. It’s not going to be any different than the job I’ve been doing, really — I have to get three outs, under pressure. It just changes when I start getting ready."

-Ryan Franklin, upon getting the closer gig (2007, STL Post Dispatch, Derrick Goold)


2007-2008년: (35세에) 클로저 전환

Cardinals 유니폼을 입고 나서 Franklin은 "피홈런을 줄여라" 는 특명 아래 TLR+Dunc 의 조련을 받으며 커터와 싱커를 가다듬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다지 좌/우 스플릿이 없었던 Franklin이 땅볼 유도용 구질을 제대로 장착하면서 TLR이 가장 좋아하는 노예가 되었고, 2007년에 무려 69게임에 등판해 80이닝을 소화한다. 특히 2007년 전반기 Franklin은 보는 사람들을 의아하게 할만큼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는데, 38경기에서 3승 무패 ERA 1.23, .204/.230/.280으로 상대 타자들을 완벽하게 봉쇄했다.

2007 전반기 Ryan Franklin : 38경기, 3-0, ERA 1.23, .204/.230/.280, 44IP 17K 4BB

2011 전반기 Edward Mujica : 41경기, 26 S, ERA 2.21, .188/.197/.315, 41IP 34K 2BB

불펜투수로써는 희귀한 5+-pitch 레퍼토리를 자랑하는 Franklin은 플러스 피치의 부재를 1) 무식하게 달려드는 승부욕, 2)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공격적 성향, 3) 타고난 연투능력으로 메웠고, 이런 메카니즘 덕분에 굉장히 빠른 속도로 릴리버로의 전환에 성공했다. 평균 패스트볼 구속은 91-92마일 수준이었지만, 필요할 때는 최고 94.5마일까지 구속을 늘릴 수 있었으며, 원할 때는 86마일짜리 패스트볼도 던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싱커/커터의 비중을 늘리면서 선발 시절 35% 근처였던 GB%가 구원 전환 후 45%대로 크게 올라간 것이 피홈런 문제를 완화시키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다시 보기 힘든 5+ pitch Closer


2008년 5월, Isringhausen이 DL에 올라가자 TLR은 별 망설임 없이 Franklin을 차기 클로저로 내세웠다. Franklin은 당시 시즌 첫 한 달간 무려 5차례의 연투를 했을만큼 팀에서 가장 꾸준한 노예였으며, 이미 불펜에서 Franklin의 위상은 Izzy 다음이었다. 물론 당시 Cardinals의 차기 클로저 재목으로 지목되던 Chris Perez에게 빨리 경험치를 몰아줘야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베테랑 투수들의 경험을 존중하는 TLR의 취향과 고집은 Franklin을 우선시했다.  Franklin은 담담하게 보직을 받아들였고, 그럭저럭 역할을 소화하는 듯 보였으나 7월 말에 3경기 연속 피홈런 + 블론을 자행하며 TLR을 머쓱하게 했다. (상대 타자들은 Bill Hall, Ryan Braun, Fernando Tatis) 

2009년: 마법같은 시즌

엄청난 운이 작용하긴 했지만, 그래도 Franklin의 2009시즌은 Cardinals 클로저 역사상 가장 효과적인 시즌 중 하나였다. 개막 이후 13경기 연속 무실점 (9세이브)을 기록하던 Franklin은 5월 10일 Reds전에서 Hairston과 Micah Owings에게 2피홈런을 허용하며 리드를 날렸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의 블론 이후 다시 정신을 차리고 전반기 내내 단 1실점만을 더 허용했다 (이후 20경기 19.1이닝 1실점, 팀 17승 3패). 그리고 후반기에도 이 페이스를 꾸준히 이어가며 2009년 8월에는 11경기 11이닝 무실점 11세이브로 Reliever of the Month 상을 수상했다. 

2000년대 단일시즌 Sub 2.00 ERA, 35+ Saves (2000-2009)

  1. John Smoltz (2003, ERA 1.12)

  2. Eric Gagne (2003)

  3. Armando Benitez (2004)

  4. Takashi Saito (2007)

  5. Robb Nen (2000)

  6. Billy Wagner (2005)

  7. Derrick Turnbow (2005)

  8. Billy Wagner (2003)

  9. Chad Cordero (2005)

  10. Ryan Franklin (2009, ERA 1.92)

8월 30일까지 Franklin의 성적은 35세이브 ERA 1.05에 리그 구원 1위. 이렇게 능력 이상의 페이스로 스탯을 쌓아가는 선수들이 시즌을 무난히 마무리하는 경우가 거의 없듯이, 월간 마무리 상을 수상하자마자 Franklin은 급격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특히 시즌 내내 그를 버티게 해준 패스트볼 제구가 엉망이 되면서 9.1이닝동안 상대타자들에게 .405/.521/486로 두들겨맞았고, 볼넷 10개를 내주며 3블론세이브를 기록했다. 자기 공은 멀쩡한데 등판간격이 들쭉날쭉해서 결과가 안좋았다고 말을 돌렸지만, 이도 없고 잇몸도 사실상 없는 Franklin 입장에서는 제구가 되지 않으면 임무를 절대 수행할 수 없었다. 우려는 현실이 되서 2009 NLDS 2차전에서 Franklin의 제구 난조는 결국 결정적인 블론세이브와 시리즈 패배로 이어졌다.

넌 나 아니었으면 진작 은퇴했어


총평: TLR이 살린 5-pitch Closer

불펜 분업화 패러다임을 갈고 닦은 TLR에게 클로저 역할의 중요성이야 두말하면 잔소리. 그런데 클로저를 뽑는데 있어서 TLR의 취향은 몹시 분명했다; 첫째는 제구였고, 둘째는 (클로저 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Make-up 이었다. 커리어 내내 제구는 그럭저럭 쓸만했으며, 상대 타자를 물어뜯고 싶어하던 Franklin은 이 두 가지 조건에 잘 부합했으며, 그랬기에 허접한 공으로도 Izzy의 후계자로 낙점되어 TLR의 클로저로 활약할 수 있었다. 다른 감독, 다른 구단이었다면 Franklin은 Mop-up guy 혹은 잘해봐야 비컨텐더 팀의 4~5선발로 뛰다가 은퇴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수순인 투수였다. 허나 어린 시절부터 팬이었던 (Franklin이 자란 Oklahoma도 Cardinal Nation이다) 고향팀과 계약 후 TLR을 만나 성공적으로 릴리버로 전환했으며, 이후 생각지도 못했던 영광까지[각주:5] 누리게 되었으니 선수 본인에게는 정말 소중한 인연이다. 어쩌면 그걸 너무 잘 알고 있기에 Franklin도 은퇴 이후 Cardinals 프론트 오피스에서 일을 도우기로 한 게 아닐까?

은퇴 이후 Mozeliak의 Special Assistant 라는 직명으로 구단 운영일을 시작한 Franklin은, 일단 본인의 고향 Oklahoma 지역에서 스카우팅 일을 돕고 Mozeliak의 선수 평가 (Player Evaluation)을 보조하는 것으로 직무를 시작했다. 사실 허울뿐일 수도 있는 이런 비공식적인 포지션을 소화하면서 Franklin의 현장감있는 시야와 근면함으로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며 순식간에 Mozeliak의 측근으로 자리를 잡았다.  Cardinals 측에서도 Franklin을 애리조나 지역에 있는 Scout School에 보내 본격적인 스카우트로써의 교육을 받게 했으며, 드래프트에서 Cardinals를 대표해 드래프티들을 발표하기도 했다. 올 해 드래프트에서도 큰 이변이 없다면 Cardinals 수뇌부를 대표해서 선수 이름을 호명하는 Franklin을 보게 될 것이다. 

"You keep an open mind and look for two things. Can he control his emotions, and can he locate? And when he locates, is it good enough to avoid hard contact? You have to have enough stuff where the ball is tough to center, and makeup is critical. If you get too emotional and throw balls [out of the strike zone] or balls down the middle, that doesn't work."

-Tony La Russa, on what he wants from his closers (ESPN, 2010)

통산 Contact Rate이 84%를 넘는 Franklin은 결코 컨텐더 팀의 "최종 보스" 에 어울리는 인물은 아니었다. 헛스윙을 유도할 수 있는 능력이 턱없이 부족했고 (커리어 7.2%), 당연히 클로저의 기본인 탈삼진도 기대할 수 없었다 (릴리버 전환 후 5.7 K/9). 맞춰잡는 마무리의 최대 단점은 "페이스가 한창 좋을 때도 운이 필요하다"는 점일텐데[각주:6], 2009년 NLDS에서 이 우려가 현실이 되어버렸다. 절대 잊을 수 없는 몇 차례의 재앙같은 경기들을 제외하고 나면, Franklin은 준수하게 자기에게 주어진 보직을 능력 이상으로 소화해냈다고 본다. 좀 취향이 변태스럽지만, 리그에서 가장 Underwhelming 한 구질들을 보유했으며 Strikeout Pitch가 전혀 없는 만 36세 투수가 절묘하게 9회의 긴장감을 소화해내며 어찌어찌 리드를 지켜내는 모습은 꽤나 볼만했다.



흔한 일 같지만 사실 커리어 중간에 Starter --> Closer 전환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John Smoltz와 Dennis Eckersley 같은 "뭘 시켜도 잘할 역대급 탤런트"를 갖춘 투수들을 제외하고 나면, 커리어에서 선발투수와 클로저로 따로 따로 밥값을 한 케이스는 사실상 전무하다. 그것도 투수로써 모든 능력치가 전반적으로 떨어질 시기인 35세의 나이에, 아주 허접한 패스트볼을 지닌 투수가, 갑작스럽게 클로저로 전환해서 성공한 케이스는 정말 드물다. 

35세 이후 Saves 랭킹 (Source: Elias Sports Bureau)

PitcherSaves after 35
Ryan Franklin

81

Tim Worrell

64

Woodie Fryman53
Al Reyes29
Mark Leiter29

그래서 Ryan Franklin의 케이스는 상당히 특이한 것이다. 혹시나 해서 Baseball-Reference의 도움으로 찾아보니 60승 / 80세이브 / 100 GS / 200 GF 를 모두 기록한 선수는 1961년 이후 고작 6명 뿐이며, 여기서 Franklin이 당당하게 이름을 올렸다. 

Career 60W, 80S, 100GS, 200GF, 1000 IP 클럽 (...)

  1. John Smoltz
  2. Dennis Eckersley
  3. Tom "Flash" Gordon
  4. Ron Reed
  5. Dave Giusti
  6. Ryan Franklin (!!!) 

Ryan Franklin's 3대 블론

워낙 많이 등판했으니 Franklin 의 이름을 들으면 생각나는 경기들이 있긴 하다. 그런데 좋은 기억들보단 안좋은 기억들이 훨씬 많다. Franklin의 3대 블론을 필자 재량껏 추려보았다.

블론 #1 (10/8/2009)

NLDS 2차전, Dodgers 원정에서 Kershaw와 Wainwright의 맞대결. 27세의 Wainwright은 지금처럼 "신선같은" 모습은 없었으나 싱싱한 어깨로 강한 패스트볼과 커브를 구사했으며, 8이닝 3피안타 1실점으로 Dodgers 타선을 봉쇄했다 (그리고 이후 5년간 포스트시즌에서 Waino가 이런 모습을 보여준 적은 거의 없다).  2:1 리드에서 9회, Trevor Miller가 좌상바 Ethier를 무난히 내야 팝업으로 잡아내고 나서 시리즈 초반부터 Cardinals의 구멍 취급을 받던 Franklin이 마운드에 올랐다. Franklin이 선두타자 Manny 를 중견수쪽 큼지막한 플라이볼로 잡아내는 순간 Cardinals의 산술적 승률은 무려 96%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사단이 났다.

Inn Score RoB Pit(cnt) Batter Pitcher wWE Play Description
b9 1-2 --- 5,(2-2)  J. Loney R. Franklin 14% Reached on E7 (Line Drive); Loney to 2B
b9 1-2 -2- 9,(3-2)  C. Blake R. Franklin 17% Walk
b9 1-2 12- 1,(0-0)  R. Belliard R. Franklin 61% Single to CF (Fly Ball); Pierre Scores/unER; Blake to 2B
b9 2-2 12- 3,(2-0)  R. Martin R. Franklin 63% Passed Ball; Blake to 3B; Belliard to 2B
b9 2-2 -23 4,(3-0)  R. Martin R. Franklin 66% Walk
b9 2-2 123 2,(0-1)  M. Loretta R. Franklin 100% Single to CF (Line Drive); Blake Scores/unER; Belliard to 3B; Martin to 2B

James Loney의 타구를 놓친 Holliday의 유명한 "낭심캐치" 를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나, 이 플레이 이후 Franklin이 Casey Blake 정도의 타자에게 볼넷을 내준 것은 극히 실망스럽다. Franklin은 우투수임에도 불구하고 우타자에게 전혀 강점을 보이지 못했으며 (통산 .266/.310/.447), 가장 큰 이유는 Franklin의 패스트볼이 너무 Hittable 했기 때문이다. 결과론이지만 여기서 Mitchell Boggs, Jason Motte 등 우타자들에게 패스트볼만 작정하고 던질 줄 아는 투수를 투입했더라면...그랬더라면...

블론 #2 (07/06/2010)

쿠어스필드에서 9:3으로 Cardinals가 Rockies를 상대로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8회말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은 Dennys Reyes가 경기를 마무리 지으러 올라왔는데, 안타 2개와 패스트볼로 실점을 하더니  1사  1,2루를 만들어놓고 5점차 리드에서 Franklin에게 경기를 넘겼다. 그리고 나서 생긴 일들이 아주 가관이다.

2013시즌 초 Mitchell Boggs의 핵실험들을 겪으신 분이라면 어느 정도 클로저 Melt-down에 있어서 면역력 향상 주사를 맞은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러나 Franklin의 Melt-down은 차원이 달랐다. 비교적 안정적인 커맨드를 자랑하는 Franklin이었으나 완벽과는 거리가 멀었고, 제구가 안잡히는 날에는 7가지 구질 중 어느 공을 던져도 미트볼이었다. 2010년 7월 6일은 필자가 본 Melt-down 중 가장 끔찍한 케이스 중 하나였다. Franklin이 등판하자마자 첫 타자에서 쓰리런을 허용하더니 이후 4안타 허용 후 다시 끝내기 쓰리런으로 5점차 리드를 날리는 모습은 (4:9 -> 12:9) 아마겟돈 수준의 대서사시였다. 당시 U. Colorado 에 있던 필자의 친구는 (이 분도 Cards팬) 쿠어스필드에서 이 경기를 직관한 뒤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 방금 있을 수 없는 일을 목격했다고 진술했으며, 그 해 가을부터 필자가 누차 설득했던대로 Anti-Franklin 캠프로 돌아섰다. 

잘잘못을 따질 순 없지만, 또 동시에 잘잘못을 안 따질 수도 없다. 2009년 NLDS는 두고두고 아쉽다.


블론 #3 (04/17/2011)

이미 이 경기 전에 Franklin의 클로저 수명은 사실상 다했다고 봐야한다. 그는 4월 8일 Giants전에서 4:3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Sandoval에게 적시타를 맞아 경기를 연장으로 몰고갔고, 다음 날인 9일에는 2:1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Tejada에게 끝내기 2타점 2루타를 허용했다.[각주:7] 14일 Dodgers 전에서는 5점차 상황 (9:4) 에서 등판해 Kemp에게 솔로 홈런을 맞았었다. 이미 4차례 세이브 기회 중 3번을 날리고 받은 5번째 기회에서 Franklin은 선두타자 Kemp에게 2-2에서 패스트볼을 한 가운데로 떠먹여주었고, 이게 경기를 끝내는 역전 투런이 되어버렸다. 경기 전 수염까지 깎고 나와서 분위기 전환을 노렸던 Franklin 입장에서는 끔찍한 결과였다.

Franklin은 경기 후 "1) 내 공은 별 문제 없다, 2) 구위가 문제가 아니라 구질 선택이 문제였다, 3) 이런 건 별일 아니다" 를 외쳤는데, 하도 여러 경기를 짧은 시간에 말아먹었던 터라 이런 대응은 오히려 화를 불러왔다. 특히 며칠 전에 홈런을 허용했던 Kemp에게 2타석 연속 홈런을 허용한 터라 팬들의 인내심은 한계점에 이르렀던 상태였고, Franklin이 Kemp에게 던졌던 공이 워낙 한 가운데로 들어온 탓에 "my stuff's fine" 이라는 변명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들렸다. 

"My stuff's fine, everything in the arsenal's still there. I haven't lost anything. Sure, if you're human it's going to affect you, but you can't let it affect you on the mound. What it boils down to is I've got blood going through my veins, so sure it affects you. I'm not going to lie."

-Ryan Franklin, after 4th BS in 5 SVO (ESPN, 04/20/2011)

이 경기를 기점으로 Franklin은 St. Louis 에서 상당히 드문 일인 "홈팬들의 야유"를 받기 시작했으며, 4월 20일에는 TLR이 직접 Franklin을 클로저 자리에서 내린다고 발표했다. 이후 열흘이 지난 4월 30일, Franklin은 공식적으로 롱 릴리프 역할로 강등되었다. 어쩌면 Franklin에게 가장 어울리는 자리일지도 모르는 그 위치에서 Low-leverage 상황만 골라 등판했으나 전혀 투구 내용이 나아지지 않았고, 2달 후인 6월 28일에 Cardinals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게 된다. 방출 통보를 받고도 Franklin은 선수생활 연장에 강한 의지를 표출했으나, 그의 선수 생명은 사실상 끝난 것과 다름 없었다.


by Doovy













  1. 나름 1992년 드래프트 동기들인 Rich Aurilia, Geoff Jenkins 같은 선수들보다 높은 순위이다. [본문으로]
  2. Ben Sheets는 올림픽에서 22이닝 1자책점을 기록했다. [본문으로]
  3. AL ERA 10위는 3.60으로 시즌을 마감한 Indians의 C.C. Sabathia였고, Franklin은 3.57로 9위에 랭크되었다. 극히 허접한 stuff의 소유자인 Franklin이 200이닝을 소화하면서 CC만큼 실점을 억제했다는 점은 존중해줄만 하다. (한편 ERA라는 스탯의 허점이 격하게 느껴진다) [본문으로]
  4. Franklin이 기록한 단일시즌 ERA-FIP 괴리 수치는 -1.61로, 2000년대에 이보다 더 FIP에 ERA를 잘 받은 투수는 없었다 (2위 1.58 Elmer Dessens, 2002) [본문으로]
  5. 2009년 올스타, 2009 Sporting News 선정 Reliever of the Year [본문으로]
  6. 심지어 2009년 8월에 월간 마무리상을 수상했을 때도 11이닝을 던지혀 삼진 4개, 볼넷 6개에 그쳤다. 세이버매트리션들이 극히 혐오할 투수이다. [본문으로]
  7. 물론 이 경기에서 Tejada의 2루타는 사실 Colby Rasmus가 놓치지 않을 수 있던 타구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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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ovy

이번 편에서는 블로그 출범 후 가장 욕을 많이 먹은 인물, Mike Matheny 를 돌아보도록 한다. 사실 현 감독 위치에 앉아있는 인물을 옛 사람처럼 돌아보는게 좀 꺼려지긴 했으나, TLR 시대 (더 정확히는 Pre-Yadi 시대의) 포수 Matheny는 2000년대 초 Cardinals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었기에 도저히 뺄 수가 없었다. Teammate로써, 인간으로써, 리더로써의 Matheny는 TLR 시대가 추구했던 가치관을 가장 잘 반영하는 선수였기에 비난(?)을 무릅쓰고 Matheny의 커리어를 돌아본다. 



Michael "The Toughest Man Alive" Matheny

Catcher

DOB: 1970년 9월 22일

Birth: Reynoldsburg, Ohio

Time with Cardinals: 2000-2004


Pre-Draft

Matheny가 자란 Ohio 주 Reynoldsburg는 주도 Columbus 근처의 황량하고 특징없는 Mid-west Suburb 동네로, 가족 모두가 OSU (Ohio State Univ) 풋볼 팬이었다. 이에 당연히 Matheny도 OSU 진학을 꿈꾸며 자랐고, 8년간의 리틀리그 경험을 쌓으면서 점차 동네를 대표하는 선수가 되어갔다. 집에서 4년제 대학을 나온 사람이 없었던 Matheny 가문에서는 늘 "운동도 운동이지만 일단 교육"을 중시했고, 이에 Matheny 는 학창시절 내내 운동선수치고 상당히 학점관리를 훌륭히 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고교시절 Matheny는 풋볼 팀과 야구 팀에서 모두 캡틴을 지냈으며, 철저한 Christian 가정에서 자라서 사생활도 깨끗했다. 무엇보다 리더로써의 자질은 Mike를 만난 사람 모두 칭찬하는 바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MidWest Elite Athlete의 교과서라고 볼 수 있는 Scott Rolen의 유년기가 생각난다. 


그러나 2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첫번째는 일단 타격이 너무 안됐으며 (본인도 인정), 두번째는 키가 작았다 (고교 마지막 학년 당시 177cm). 이 명백한 약점 때문에 OSU, University of Ohio 등 지역 연고학교에서는 Matheny에게 크게 신경쓰지 않았고, Matheny 본인도 고교 졸업반이었던1988년 드래프트에 본인의 이름을 넣기는 했으나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무렵, Michigan 야구팀의 전설적인 감독인 Bud Middaugh[각주:1]가 Matheny에게 선뜻 장학금을 제시하면서 Matheny는 (학벌과 운동을 모두 잡을 수 있는) Michigan으로 진학하기로 결정한다. 프로 선수를 목표로 하고 있던 Matheny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드래프트 3일 내내 전화기 옆에서 기다렸으나, 한 통의 전화도 오지 않았다.

드래프트가 다 끝나고 나서 이틀 후, 뒤늦게 Blue Jays 측에서 Matheny를 뽑았다고 연락이 오긴 왔으나, Matheny는 이미 Michigan 진학으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1988년 여름 끝자락, Ohio 집을 떠나 Ann Arbor (Michigan 대학 소재지) 로 떠나기 이틀 전, Matheny의 집으로 당시 Blue Jays 단장 Pat Gillick이 직접 찾아왔다. 능수능란한 Gillick은 "우리가 너를 드래프트에서 지명했고, 학교 수업이 시작하기 전까지 우리가 너와 계약할 독점권이 있다. 프로에 들어오고 싶지 않느냐" 면서 만 17세의 Matheny[각주:2]와 계약 조건을 논의하기 시작했고, "수업 시작하기 전에 꼭 연락을 달라" 고 당부하고 떠났다. Gillick은 "우리가 너를 31라운드에 지명했지만, 2라운드급 계약금을 주겠다" 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I’m driving up (to Ann Arbor) and I’m trying not to act distracted, but a lot of us have had dreams of playing professional baseball and mine was sitting right in front of me. I’m sitting up in my dorm room in West Quad and my phone keeps ringing and they keep upping the ante and I’m thinking, ‘I’m really not that good.’ ”

- Mike Matheny, on his decision to attend Michigan 

(Michigan Daily, 06/05/2011)


혼란 속에 Michigan에 도착한 Matheny는 개강 첫 날 아침, 수업에 들어가기 직전 Gillick에게 전화를 걸어 Michigan 잔류를 알렸고, 이리하여 어렵게 Blue Jays의 구애를 뿌리쳤다. 그리고 이 결정은 훗날 선수 Matheny뿐 아니라 감독 Matheny를 있게 하는 계기가 된다.

스탠스만 보면 굉장히 잘 칠 것 같다.

[각주:3]

Bud Middaugh 감독의 판단은 정확했다[각주:4]. Big-10 Athelete 치고 덩치가 작은 편이던 Matheny는 대학 진학 후 6'2 (188cm) 를 훌쩍 넘는 키로 성장했으며, 흔치않은 Matheny의 Defensive 탤런트와 Make-up은 대학 레벨에서도 빛났다. 여전히 방망이는 부족했지만 노력으로 어느 정도 극복할만 했고, 1학년 때 이미 Connie Mack National Championship에서 전국구 우승을 맛보는 운도 따랐다. Freshman 시즌 후 Matheny를 스카우트해온 Middaugh 감독이 "풋볼 쪽에서 나는 수익을 야구 선수들 스카우트 비용으로 돌린다" 는 일종의 "공금횡령" 스캔들 속에 사임하면서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이것도 Matheny에게는 상당히 운이 따른 일이었다. 


Middaugh의 후임으로 온 새 Michigan 감독이 바로 60~70년대 Detroit Tigers의 대표 포수이자 통산 11회 올스타에 빛나던 Bill Freehan[각주:5]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현역 시절 골드글러브 5차례 수상에 빛나던 Freehan은 Matheny가 대학 레벨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캐칭 인스터럭터였고, Freehan 또한 Matheny로부터 "빅 리그 포수뿐 아니라 훗날 Manager가 될만한 자질이 보인다"며 특별히 아꼈다. 이 때 Freehan은 Matheny를 불러 "이 바닥(MLB)에 오래 있고 싶으면 (현역 은퇴 후에도) 무조건 스페인어를 해야한다. 지금 당장 너의 모든 교양과목을 (Electives) Spanish로 바꿔라[각주:6]" 고 조언했으며, Matheny는 이를 철저히 따랐다.[각주:7] 3학년 Matheny에게 주장 완장을 직접 채워준 것도 Bill Freehan이었고, Matheny가 Michigan에서의 마지막 시즌에 MVP를 수상했을 때 가장 기뻐했던 것도 Bill Freehan이었다.  

Draft and Minors

1991년 드래프트에서 Matheny는 Brewers의 지명 (8라운드 전체 208번[각주:8])을 받고 프로에 들어온다. 프로에 와서도 Matheny의 프로필은 한결같이 "All glove, No bat" 의 전형적인 수비형 포수였고, 다만 Defensive Talent가 워낙 출중해서 빅 리그로 올라가면 백업으로 분명히 쓸모가 있을 것이라는 게 전반적인 평이었다. 일단 아래는 Ko-모 유격수를 떠올리게 하는 안타까운 Matheny의 Brewers 산하 Minor 시절 타격 성적이다

Mike Matheny's Minor League Track Record

Year Lev G PA AB R H 2B 3B HR RBI BB SO 1991 Rk 64 284 253 35 72 14 0 2 34 19 52 .285 .348 .364 .711
1992 A+ 106 379 333 42 73 13 2 6 46 35 81 .219 .297 .324 .621
1993 AA 107 372 339 39 86 21 2 2 28 17 73 .254 .292 .345 .638
1994 AAA 57 203 177 20 39 10 1 4 21 16 39 .220 .299 .356 .655
7 Seasons 362 1336 1193 143 293 65 5 18 141 90 270 .246 .307 .354 .661


Matheny의 마이너 시절은 사실 스탯으로 보는게 큰 의미는 없다. 다만 Matheny는 훗날 감독이 된 후 Brewers 마이너리그 스태프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포수로써 갖춰야 할 수많은 Intangible 들 (특히 수치화시킬 수 없는 Game-Calling, Framing, Game-Reading 등) 을 갈고 닦을 수 있는 기회였다고 회고한다. 특히 10년간 (1984-94) Brewers 에서 Player Development Coordinator 자리를 지키던 Bob Humphreys의 지도와, Catching Instructor였던 Del Crandall (현역시절 골드글러브 4회 수상[각주:9])의 개인레슨은 Matheny의 커리어 황금장갑 수집에 기초를 닦아주었다.

"When I came up through the organization, I think it was very much like how the Cardinals have their philosophy. I was very fortunate to have a very disciplined Minor League development that really focused on the fundamentals and playing the game hard, playing the game right. I was fortunate in that regard."             

- Mike Matheny, on Brewers farm system (4/6/2012, MLB.com)



1994년 4월, 프로 입문 3년만에 빅 리그에 데뷔한 Matheny는 백업포수로 빅 리그와 AAA를 전전하다가 1996년 개막전에서는 Brewers의 주전 포수 마스크를 썼다. 물론 타격이 워낙 안됐던 탓에 주전이라기엔 조금 부족한 연평균 340~350PA 정도를 받는데 그쳤으나, Matheny의 Brewers 시절 OPS가 평균 .600대를 간신히 웃도는 수준이었음을 감안하면 (Tony Cruz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다) 오히려 Brewers가 꽤나 참을성이 많았구나 싶다. 1998년까지 4시즌간 Brewers의 백스톱을 책임지던 Matheny는 1999시즌을 앞두고 자신을 드래프트해주었던 Blue Jays로 옮겨갔는데, 당시 Darrin Fletcher의 백업으로 뛰면서 57경기 출장에 그쳤기에 더 이상 주전 포수가 되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2000시즌: Cardinals로 이적

1999년 시즌이 끝나고 Cardinals는 당시 팜에서 가장 기대를 모으던 "운동형 포수" Eli Marrero를 주전 포수로 낙점한뒤, Marrero의 뒤를 받쳐줄 베테랑 백업 포수를 구하고 있었고, Matheny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 당시 Matheny 영입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던 이는 베테랑 투수 Pat Hentgen이었다. Blue Jays에서의 마지막 시즌 (1999)에 Matheny와 한솥밥을 먹었던 Hentgen은 Matheny의 게임콜링, 도루저지 능력과 리더십을 몹시 높이 평가했으며, 이에 Jocketty와 TLR에게 직접 Matheny를 천거했다. 사실 Hentgen 본인도 Cardinals와 계약한지 갓 1달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99년 11월에 계약), 불과 3년 전에 CYA를 수상했던 빅 리그 10년차 투수의 추천서는 다른 어떤 낙하산보다도 강력했다. 그리고 Hentgen이 이어준 인연은 무려 5시즌이나 이어진다.

“He was pretty vocal about it. He was on my side. That’s just the ultimate compliment - for a pitcher with as much experience and success as Pat has had thinks that highly of me to put his name on the line.”

-Mike Matheny, on Hentgen's Recommendation (May 2000, AP)

스프링캠프에서 이미 Matheny 효과를 톡톡히 느낀 TLR은개막전 선발투수에 DK57을, 포수에 Matheny를 선정했다. 이 둘에게 2000시즌 개막전은 Cardinals 유니폼을 입고 처음 치르는 공식 경기이자 처음으로 호흡을 맞춰보는 경기였는데, 이 경기에서 두 선수는 나란히 크게 활약하며 Cubs를 박살했다.[각주:10] 모범적인 팀메이트였던 동시에 TLR이 원하는 스타일의 리더였던 이 배터리는 Cardinals 유니폼을 입음과 동시에 클럽하우스 리더로 부상했으며, 이후 DK57의 급사 전까지 둘은 뗄 수 없을만큼 친한 사이로 지냈다. 이후 2년 반동안 Darryl Kile과 Mike Matheny는 76경기 500이닝을 함께 했으며, Kile은 Matheny만큼 지능적이고 재능있는 포수를 백스톱에 앉혀놓고 던지는 것을 더할 나위 없는 행운으로 여겼다. Kile은 Matheny가 공을 받아줄 경우 K/BB 비율이 2.74에 이르렀는데, 이는 커리어 수치 (1.82) 보다 현격히 높은 수치이다. 포수의 Game-calling과 프레이밍은 f/x 데이터 없이 수치화하기 쉽지 않지만, 이 정도면 무시할 수 없는 차이이다.


Matheny는 Cards에 Yadi를 선사했고, Chris Carpenter를 갖다주었다.


There are few catchers in the game more solid defensively than Matheny. He frames pitches very well, and blocks pitches in the dirt as well as anyone. He has textbook mechanics, with his quick release that makes runners go reluctant to attempt a steal against him. Mike also has grown as a handler of pitchers under Cardinals pitching coach Dave Duncan.

-Scouting Report 2004, on Matheny's defense

계약 당시만 해도 Matheny는 Depth Chart에서 Eli Marrero의 백업플랜 수준이었으나, 정규시즌에서 Matheny의 타격 성적이 커리어 하이를 찍으면서 두 선수의 입지는 크게 달라졌다. Matheny는 빠른 속도로 Cardinals 투수진의 신임을 얻었으며, 꾸준한 플레잉타임을 얻으면서 .261/.317/.362의 슬래시라인을 기록했다. 비록 BABIP신의 가호를 받긴 했으나 (.323) 좌투수 상대로는 생각보다 쓸만한 타격을 보였고, 득점권에서는 유난히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서 그럭저럭 사람 구실을 하는 모습이었다[각주:11]. 수비에서 Matheny는 자신의 개인 첫 골드글러브를 수상했으며, 시즌 내내 단 1개의 3루도루도 허용하지 않았고 (2루도루 44저지 43실패), Defensive WAR로 무려 2.4를 적립했다 (Andruw Jones에 이어서 ML 2위). 

이 시즌 Mike Matheny의 유일한 오점은 딱 하나. 시즌 막판 Matheny는 San Diego 원정에서 생일 선물(9/22) 로 받은 사냥용 칼을 뜯어보다가 오른손을 크게 베이는 사고를 쳤고, 이로 인해 포스트시즌을 모조리 결장하는 삽질을 했다. 별 거 아닌 듯 보였던 이 사건은 Rick Ankiel 의 포스트시즌 Melt-down으로 다시 재조명을 받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TLR 시리즈 Ankiel 편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Matheny가 Semi 사람다운 공격력 + 골드글러브 수비를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 고무된 Cardinals는 2001년 4월, Matheny에게 3년 연장계약의 선물을 안겨준다. 그러나 Matheny의 커리어 하이 시즌은 BABIP 빨 플루크였다는 게 증명이 되었고, 좌투수 상대 타율이 0.184까지 내려가는 고생 끝에 Matheny는 wRC+ 50, .218/.276/.304 라는 처참한 성적으로 2001 시즌을 마감한다. 



2002시즌: Mike Matheny and DK57

Matheny가 Cardinals 유니폼을 입고 남긴 업적 중 가장 큰 일을 꼽으라면 3차례의 GG 수상도, 2004년 NLDS에서의 깜짝 활약도 아닌, 2002시즌 Darryl Kile의 시즌 중 급사를 수습한 일을 꼽겠다.

거의 같은 시기에 Cardinals 유니폼을 입게 된 이 둘 (Darryl Kile and Mike Matheny)은 2000시즌 개막전을 시점으로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Coors Field에서 고생을 하다 내려온 Kile은 본인의 구질을 본인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는 Matheny 에게 던지는 것을 몹시 즐겼고, Matheny 역시 자신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이는 Kile의 공을 받기 원했다. 2000시즌 마지막 등판에서 Kile은 Matheny를 앉혀놓고 정규시즌 20승째 승리를 따냈고, 경기 후 샤워를 마친 Matheny가 라커룸에 돌아왔을 때 의자에는 Kile이 갖다준 Rolex 시계가 놓여있었다. 뉴욕을 원정 방문할 때마다 짝퉁 15불짜리 Rolex를 사 모으던 Matheny에게 Kile이 진품을 선물한 것이었다. 

2002시즌 전반기는 Matheny에게나 Kile에게나 결코 즐거운 시간들이 아니었다. Matheny는 타율 2할대 유지를 버거워하는 타격 슬럼프를 겪고 있었으며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Kile은 5월 말 Astros 전에서 2경기 연속 잘 던지고도 승리를 얻지못해 (6IP 2ER, 6IP 1ER) 약이 올라있는 상태였다. 평소같았으면 늘 경기 시간 3시간 전부터 클럽하우스에 나와서 Kerry Robinson과 체스를 두고, Matty Mo와 박물관에 가고, Matheny와 비디오 분석에 몰두하며 클럽하우스 분위기를 주도했던 Kile은 이 당시 그답지 않게 우울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TLR이 넌지시 Kile에게 다른 포수들과 호흡을 맞춰볼 것을 제안하자 Kile은 "Matheny가 아니면 던지지 않겠다" 는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 며칠 후인 6월 18일, Kile은 Matheny를 앉혀놓고 그 해 최고의 퍼포먼스인 7.2IP 1ER 의 호투로 Angels 타선을 잠재웠다.

2002년 6월 22일, Chicago의 Westin Hotel에서 Darryl Kile이 사체로 발견되었던 그 날은 Kile이 선발등판하기로 되어있었던 날이었다. 모두가 DK를 잃은 슬픔으로 침묵해있던 그 날 오후, TLR은 Matheny에게 경기를 뛸 것을 요구했다. Matheny는 "Kile이 던지지 않는다면 저도 안 뛰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출전을 거부했고, TLR은 하는 수 없이 Simontacchi-Difelice 조합으로 나서서 1시간 47분 (1981년 이후 최단시간 경기) 만에 경기를 끝낸 뒤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선수단을 거둬서 숙소로 돌아갔다. 

라커룸에서 Rolex 시계를 만지작거리며 침묵으로 일관하던 Matheny는 슬픔은 미뤄두고 그 다음 날 경기부터 다시 출장을 강행했으며, 한 순간에 리더이자 친구, 동료이자 롤 모델을 동시에 잃어버린 투수진을 다독이는데 집중했으며, 후반기에는 .280에 가까운 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DK와 유난히 각별했던 Matheny는 시즌이 끝날 때까지 단 한 차례의 DK 관련 공식 인터뷰도 하지 않았다. 시즌이 끝나고 Matheny는 교회 Grief Session에서 Kile에 대해 입을 처음 열었다. 그리고 5개월간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We went out and played the game. We had an edge to us. Nobody had to say anything. We wanted to represent what he believed in, which is just going out and doing your job."                                                                       

 - Mike Matheny, on 2002 season after Kile's death


2002 NLDS에서 Cardinals의 기세는 무서웠다. 이 팀은 6월 말에 에이스를 잃은 후 57승을 거두었고, 그 중심에는 Mike Matheny가 있었다.


2005시즌: Giants로 이적

2004 WS가 허무하게 막을 내리고 Matheny는 다시 FA로 풀렸다. Cards 입장에서는 리그 최고의 수비형 포수이자 필드 위에서는 코치, 클럽하우스 안에서는 리더로 추앙받는 Matheny를 재계약할 의도가 있었으나,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던 젊은 포수 Yadi의 존재와 Matheny의 어쩔 수 없는 공격력 부재 때문에 도저히 장기 계약을 줄 수는 없었다. 게다가 Cardinals 유니폼을 입고 숱한 기록을 세우고 Gold Glove를 3개나 수상한 탓에 Matheny는 시장에서 꽤나 인기가 있었으며, 수비 하나만으로 3년 계약을 받고 Giants로 이적한다. 10년 전만해도 지금처럼 수비력이 시장에서 쉽게 인정받지 않던 시절이었으며, 이렇게 All-Glove, No Bat 프로필의 만 34세 포수가 3년 계약을 따낸 것은 Matheny 의 시장 내 Reputation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케이스이다.

"Mike is one of the toughest competitors that we have ever witnessed and a true leader. As a player, he will be missed not only on the field, but in the clubhouse, the scouting meetings and on the road with his teammates. On behalf of the Giants, I wish Mike and his family all the best. He'll always be a Giant."


-Brian Sabean, on Matheny's retirement (02/01/2007, MLB.com)


Giants 이적은 Matheny에게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2005시즌, Matheny는 862차례의 기회에서 단 1개의 실책만을 범하며 Giants의 길고 풍성한 역사에 길이 남을 가장 완벽한 Defensive Performance를 선보였으며, 뿐만아니라 홈런 (13), 2루타 (36) 타점 (59) 에서 모두 커리어 하이를 찍었고, 득점권에서는 무려 .311이라는 해괴한 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물론 이 사이 Matheny의 wRC+는 76에 그쳤으나 (비교를 원하신다면 올해 Descalso의 wRC+가 88이었다), 이마저도 Matheny 커리어에서 찾아보기 힘들 수준의 Best Offensive 시즌이었다. 

Matheny as a Catcher

우리는 근 10년째 Yadier Molina라는 걸출한 포수의 플레이를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어서 웬만한 포수들에게 쉽게 감동하지 않지만, 포수 Mike Matheny의 수비는 동시대 최고 수준이었다. 잠깐 Matheny 의 업적들을 돌아보자면...

  • Gold Glove 4회 수상 (2000, 2003, 2004, 2005) 
  • 통산 수비율 Career Fielding Percentage .994 (1,285 games, 43 errors in 7,774 total chances)
  • 252 연속경기 무실책 (8/1/02 - 8/4/04) (ML 최장기록)
  • 1565 연속 수비기회 (Chances) 무실책 (2004) (ML 최장기록)
  • 단일시즌 100+ 경기 무실책 (2003, 역대 단 3명)[각주:12]
  • 단일시즌 138경기 연속 무실책 (2003, 823 total chances)
  • Giants 프랜차이즈 사상 단일시즌 최고 수비율 (2005) (0.9988, 1112이닝 1실책)
  • 리그 최다 도루저지 1위 (2000, 2005)
  • 포수로 10,000이닝 소화 (1994-2006, 같은 기간 10,000이닝 소화한 포수는 13년간 8명[각주:13])

Matheny는 투수들에게 가장 인정받는 포수였다. 게임콜링와 블로킹, 피치 프레이밍, 타자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 Matheny는 늘 두텁게 준비가 되어있었다. Matheny는 백스톱 자리에서 가장 필요한 "Understanding of the Game,"  경기 자체에 대한 이해도에 있어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던 포수였다. Blocking은 Charles Johnson이 나았을 지 모르고, Throwing Arm은 Ivan Rodriquez가 더 나았을 수도 있겠으나, 이 모든 것을 포함한 Overall 퍼포먼스에서 Matheny를 뛰어넘는 포수는 동시대에 없었다고 봐도 좋다. 지금의 Yadi가 Liliquist를 대신해서 투수코치를 하고 있다면, Matheny는 Duncan의 Proxy로 뛰었다고 봐도 좋다.

“I can sum up what happened in two words: Mike Matheny. He got hurt, and I started to lose confidence. I’m not the only guy who struggled there after he got hurt.”                             

- Jamey Wright, on Matheny's impact on him (2007, Dallas Morning News)



Matheny as a Hitter

칭찬을 많이 했으니 좀 까도록 해보자.

어떤 과정을 거치든 ML 레벨까지 올라오는 선수들은 다들 고교/대학/마이너시절 최소 Contact/Power 둘 중 하나는 보여주게 마련이다. 심지어 Defense-oriented 선수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Matheny는 고교시절부터 타율 .280을 버거워했으며, 대학에서도 딱히 Offensive Prowess로 알려진 일은 없었다. 마이너리그 시절, Matheny는 루키레벨 이후 OPS .700을 기록한 적이 없으며, Brewers 마이너에서의 4년을 Hard-stuff와 바닥에 패대기쳐지는 Breaking-stuff에 모두 약점을 드러냈다. 직구도 못치고 변화구도 못치는 타자였는데다가, 탄탄한 체격이 아까울만큼 파워도 없었고 쓸데없이 스윙 스트로크가 길어 배트 컨트롤도 엉망이었다 (Minor 4시즌간 루키레벨 위에서 OBP .300을 넘긴 적이 없다.) Matheny 본인도 고교시절 자신의 모습에 대해, "나는 타격은 영 젬병인데 그래도 잡고 던지는 건 좀 했었다" ("I couldn’t hit my way out of a wet bag, but I could catch and throw a little bit") 고 회고했다. 

(wRC+ 기준) 역대 최고 물방망이 포수들 (1871-2014, 최소 4000PA 이상)

  1. Malachi Kittridge (59)

  2. Mike Matheny (62)

  3. Joe Girardi (71)

  4. Luke Sewell

  5. Red Dooin

  6. Rollie Hemsley

  7. Jim Hegan

  8. Cy Perkins

  9. Brent Mayne (74)

  10. Brad Ausmus (76)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All Glove, No Bat 포수였기에, Matheny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Video-Junkie 라는 별명이 붙을만큼 미친듯이 비디오 룸에서 상대 투수 분석에 시간을 투자했다. 또한 Cardinals 이적 후에는 특히나 방망이를 더 짧게 잡아 브레이킹볼 대처능력을 키웠고, 배트 스피드를 증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스윙을 컴팩트하게 만드는 것에 주력했다. 이렇게 열심히 타격 메카니즘을 교정했음에도 불구하고 Matheny의 공격 생산력은 "거의 매 시즌" Replacement Level 수준 그 이하였다. 긴 설명이 필요없이, 역대급 물방망이를 보여주었던 Matheny의 위엄은 위 랭킹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그 모든 물방망이 포수들보다 Matheny가 머리 하나는 앞서있다)

Matheny as a "Toughest Man Alive"

이미 잘 알려진 에피소드이긴 하지만 간단하게 복기해보자. 

1998년 5월 26일, Pirates와의 홈 경기에서 Matheny가 2:1로 9회말 1사 1,2루에서 타석에 들어섰다. Ball-in-the-dirt에 극히 약점이 있었던 Matheny는 (대체 무슨 구질에 약점이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골프광이었던 당시 Brewers 감독 Phil Garner와 "변화구에 삼진 당할 때마다 골프공 한 박스씩을 조공으로 바칠 것"을 약속하고 변화구 대처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삼진을 당하지 않아야겠다는 심정으로 타석에 들어섰다. 상대 투수는 빠른 공 + 엉망인 제구로 이미 잘 알려져있던 Rich Loiselle[각주:14] 이었는데, 이 허접한 투수가 2구째 패스트볼을 Matheny의 얼굴 (정확히는 왼쪽 입가)를 맞춰버린 것이다. 이 공의 구속이 95마일이었다는 보도도 있고, 90마일이었다는 기사도 있으나, 뭐 몇 마일이었든 간에 "작정하고 던진 우투수의 Up-and-in 패스트볼" 이었음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동영상 링크)

"He was a catcher, so it's kind of weird for an outfielder to say this, but I emulated him. I looked up to him. He was a guy who taught us the right way to play the game. You keep your mouth shut and do your job. 

And, man, Mikey was tough."

- Geoff Jenkins, on Matheny's toughness (10/20/2012, MLB.com)

경기 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찢어진 입가를 꼬맨 Matheny는 그 길로 곧장 Phil Garner를 찾아가 "If you can do me a favor, I want to play tomorrow" 라고 말했고, 결국 다음 날도 경기에 출장해 Matheny 다운 방법으로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4타수 무안타, 8회 상대 득점권에서 도루저지 성공). Matheny는 이 에피소드에 대해 "내가 공을 맞고 쓰러지지 않은 걸 기억하기보단 내가 HBP로 살아나가서 우리가 끝내기 안타로 이겼음을 기억해야 한다[각주:15]" 고 말했다.  당시 Brewers 의 백업포수였던 Bobby Hughes는 "저 인간이 얼굴에 공을 맞았는데도 나는 선발 출장을 못하나" 고 한탄했는데, 이 친구는 Tony Cruz와 만나면 말이 잘 통할 것 같다.



Matheny and Concussion

Matheny가 뇌진탕 후유증으로 조기 은퇴를 했고, 야구계에서 손꼽히는 Anti-Homeplate Collision 캠프의 주동 인물이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있다. 대체 어느 정도로 뇌진탕의 아픔을 겪은 것일까?

마스크에 튕기는 파울팁, 주자와의 홈 플레이트 충돌 등으로 마이너 시절부터 뇌진탕은 Matheny에게 익숙한 친구같은 존재였다. Brewers 산하 AA팀의 경기를 라디오중계하던 Vaspersian은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홈 플레이트에서의 충돌 후 Matheny 뇌진탕 증세를 겪었던 날에는 밤새도록 팀 닥터와 트레이너들이 Matheny의 숙소에 들어가 이 질문 저 질문을 하며 Matheny의 뇌가 정상인지 확인했다고 회고했다.

2006년 5월 29일, Matheny는 Marlins와의 홈 경기에 선발 포수로 출장했다. 이미 며칠간 유난히 많은 파울 볼들을 마스크에 맞아서 정신이 혼미하던 Matheny는 특유의 Grit으로 선발 출장을 강행했다. Giants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Cards 시절부터 Matheny 의 미트 안으로 수천개의 공을 던졌던 오랜 친구 Matt Morris였다. 도저히 Miguel Cabrera에게 정면승부를 할 수 없었던 이 Ex-Cards 배터리는 6회 2사 2루에서 Cabrera를 고의사구로 걸렀고, Matheny는 2루 주자 (Dan Uggla)가 혹시나 사인을 훔칠까봐 마운드로 직접 올라가 다음 타자인 Josh Willingham에게 패스트볼로 승부할 것을 이야기했다. 

"As my catcher and as a person he just meant so much to me. On the field he taught me how to be a professional. Off the field he taught me to be a man and a respectful person. He's going to be sorely missed by everybody. Unfortunately through his head trauma and concussions, it's just ending a little abruptly to him. He was a guy so hard-nosed and he wanted to play every day, so for it to end this way is unfortunate. After the blows to the head, he wasn't the same. We want the old Mike Matheny back, baseball player or not."

-Matt Morris, when Matheny retired (2007)

마운드에서 다시 내려와 플레이트 앞에 쪼그려앉은 Matheny는 불과 몇 초 전 Morris와 나눴던  대화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자신의 뇌가 뭔가 정상이 아니란 것을 깨달은 Matheny는 (자신이 요구했던) 다음 구질이 무엇일지 Guess해서 잡아야했고, Matheny는 커브를 예상하며 블로킹 자세를 취했다. Morris는 당연히 아까 상의한대로 패스트볼을 던졌고, 이에 당황한 Matheny는 스트라이크존으로 들어오는 패스트볼을 어이없이 놓쳐버렸다. Passed Ball. 평정심을 잃은 Morris는 이닝 종료 후 Matheny에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냐 화를 냈고, Matheny도 Matheny대로 shin-guards(종아리보호대)를 벗어서 Morris에게 던지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그리고 이틀 후인 5월 31일, Matheny는 자신의 커리어 마지막 경기를 치르게 된다.

쇠파이프도 씹어먹을 것 같은 강인한 이미지의 Matheny였지만,  10년간 25~30건의 뇌진탕은 견디기 힘든 수준의 고통이었다. Matheny의 열렬한 지지자이던 Giants 단장 Brian Sabean은 Matheny의 상태 호전을 위해 Pittsburgh 대학의 뇌진탕센터에 Matheny를 보내 프로그램을 따르게 했으나, 의사들의 의견은 "한 번만 더 뇌에 충격을 받으면 영구적으로 뇌에 손상을 입을 수 있다" 며 Matheny에게 선수생명 종료를 선고했다. 

뇌진탕의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Matheny는 꾸준한 단기 기억 상실증 때문에 운전 중에도 몇 차례씩 부인 Kristen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지금 어디를 가고 있고, 왜 가고 있는지" 를 물어봤으며, 심박수가 120을 넘어가게 되면 지독한 현기증에 시달렸기에 늘 Heart Monitor를 달고 다녔다. 심지어 계단을 오를 때도 한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끔찍한 두통과 현기증으로 구토증세에 시달렸으며, 이에 Matheny이 5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계단을 오를 때에는 최소 45분이 걸렸다고 한다. 주유소에서 자동차 주유구에 호스를 꽂아놓은 것을 까먹고 그냥 운전해서 나오다가 주유기를 망가트리는 일이 한 달에 3번 이상 있었다고 하니, 일상 생활에 큰 어려움이 있었음이 자명하다. 

더 이상 야구를 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린 Matheny는 이후 Giants의 미래에 누를 끼치지 싫다며 2007년 2월 1일을 앞두고 은퇴를 선언했으며, 자신과 같은 케이스가 더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에 홈 플레이트 충돌 반대 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로부터 몇 년 후 Giants 백스톱이 된 Buster Posey가 "Posey Rule"을 만들어주면서 Matheny의 바람은 어느 정도 실현이 되었다.



총평 - Natural-born Leader

(하키, 농구, 풋볼에 비해) 직접적 육체 충돌 (No Contact Sports) 이 적다는 종목 특성을 감안한다면, 야구선수에게 "Toughest Man Alive" 라는 별칭은 약간 사치스러워 보이긴 한다. 90마일을 상회하는 공을 얼굴로 이겨내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핏덩이를 "풰" 하고 뱉어내는 장면은 여전히 ESPN 혹은 MLB Network에서 All-time "Ouch" Top 50 쯤에 선정될만큼 분명 자극적이며, 스포츠 저널리스트들이 그냥 묻어버리기 아까울 소재이긴 하다. 그러나 Matheny가 단순히 이 에피소드 하나로 "무식하게 강한 맷집과 물방망이를 자랑하던 수비형 포수" 로 기억된다면, 그것 또한 억울한 일일 것이다.  

감독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선수시절의 Mike Matheny 역시 리더였다. Matheny는 개인으로써는 절대 빛나지 않는 선수였고, 타석에서의 그는 당당한 체구와 다르게 한없이 작아보였다. 그러나 8명의 팀메이트들을 눈앞에 두고 플레이트 뒤에 자리를 잡으면 Matheny의 진가가 발휘되었고, 그는 투수들 뿐 아니라 야수들까지 본인들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있는 힘껏 도왔다. 필드 안에서나 밖에서나 Matheny의 가치는 그가 주변에 미치는 영향으로써 증명되었고, 결국 마지막까지 많은 투수들을 "내 사람" 으로 만들고 은퇴했다. 수차례의 충돌과 마스크를 울리는 파울팁에 두들겨 맞으면서도 그는 무려 10,000이닝을 포수로 소화했고, 수백명의 투수들을 안심시켰으며, 그 기간동안 훌륭한 팀메이트, 훌륭한 포수, 모범적인 가장이자 인간으로 인정을 받았다. Toughest Man Alive 라는 별명은 어쩌면 95마일짜리 공을 맞고 안아픈척 쿨한척 해서 어울리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2015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Old-School 멘탈리티로 무장한 Mike Matheny는 "시대에 맞는 스타일의 리더"로 보이지는 않을 수 있다.  이미 자주 드러낸 바 있지만, 필자는 "Playing the game the right way" 를 무식할 정도로 외치는 선수들에게 어쩔 수 없는 호감을 갖게 된다. 물론 Matheny의 불펜 운용에 육두문자를 내뱉은 적도 있지만 이 양반의 리더십에 감탄한 적도 생각보다 많다. 개인의 취향에 맞는지 여부를 떠나서, Matheny가 Natural-born 리더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 않나 싶다.

“The job of a catcher is often undervalued as to the success he brings to the team as a whole; it’s constant managing. People talk about why so many catchers are managers. That’s because they’re managing people. Catchers are managing not just the pitchers, but they’re also managing other position players as well. They’re trying to get everyone on the same page. The best catchers typically do that sort of thing.”                                                                                                      
    - Mike Matheny (9/10/2010, Interview with Anna McDonald, Hardball Times)

Did you know...?

  • 2월 3일, Mike Matheny의 자서전 Matheny Manifesto가 출시된다. 요새 출판 행사 때문에 정신이 없는 것 같다.
  • Brewers는 1993년부터 "Mitch Harris Award"라는 상을 제정, 구단 내에서 가장 사회 봉사에 이바지한 선수를 특별히 표창했다. Brewers 팀내에서 주는 일종의 소규모 Roberto Clemente 상이라고 봐도 무난할만큼 비슷한 상이다. 1996년 Brewers는 26세의 백업포수 Matheny를 수상자로 정했다. 
  • 2003년, 존경받던 베테랑 투수 Darryl Kile의 안타까운 요절을 기리고자 Cardinals/Astros에서 Darryl Kile Award를 제정했다. 이 상은 그 해의 "a good teammate, a great friend, a fine father and a humble man" 에게 주어지는데, 이 상의 첫번째 수상자는 Mike Matheny였다. 
  • 2005년 말, Giants에서는 구단 내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타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는 (Inspirational) 사람에게 주는 Willie McGee Award 수상자로 Mike Matheny를 정했다. Giants 유니폼을 입은 첫 해에 이 상을 수상한 인물은 Matheny가 처음이고, 당분간 이런 케이스는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 3개의 다른 구단에서 각각 Performance 가 아닌 Character로 표창을 받는 선수는 Matheny가 처음이 아닐까 싶다.


by Doovy



Sources: SI, ESPN, MLB.com, Baseball-reference, Fangraphs, STL Post dispatch, LA Times, Baseball-almanac, Viva El Birdos, The Michigan Daily, The Hardball Times, Dallas Morning News



  1. Bud Maddaugh는 Michigan 감독직을 10년간 지켰는데, 이 기간동안 올린 성적이 무려 465승 146패, 승률이 .761에 달한다. Big-10 Conference에서 이렇게 장기간 집권하는 것은 종목을 가리지 않고 어려운 일이다. [본문으로]
  2. 고등학생 Matheny는 당시 General Manager가 "단장" 이 아닌 "팀 장비 관리자" 쯤 되는 줄 알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또한 남편 Matheny를 있게 하는 계기도 되는데, Gillick과의 통화 때문에 수업을 늦게 들어가게 되면서 현재 부인인 Kristen을 만나게 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본문으로]
  4. Middaugh 감독은 Matheny 아버지의 우람한 체구를 보고 "저걸 보면 아들녀석도 확실히 더 클 수 있다" 는 생각에 장학금을 제시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Freehan 본인도 Michigan을 나왔으며, 대학 시절 All-American Catcher 로 선정되기도 했었던 엘리트 포수이다. [본문으로]
  6. "If you’re going to be in this game for a long time, even after your playing days, you need to change all your electives to learning Spanish." [본문으로]
  7. 결국 Spanish 부전공으로 졸업. [본문으로]
  8. 이 라운드에서는 Jason Schmidt, Derek Lowe, Steve Trachsel 등 훗날 꽤 성공적인 커리어를 밟게되는 투수들이 많았다. [본문으로]
  9. 골드 글러브를 4회 이상 받은 포수는 Mike Matheny를 포함해 역대 9명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중 Matheny를 가르친 포수가 2명 (Bill Freehan, Del Crandall), Matheny가 가르친 포수가 1명 (Yaider Molina) 이다. [본문으로]
  10. 7:1 승리, Kile 6IP 2H 1ER, Matheny 2-for-4 [본문으로]
  11. Matheny의 통산 득점권 타율은 .270,OPS는 .752으로 비득점권 타율 .232에 비해 훨씬 높은 수치이다. [본문으로]
  12. Matheny 말고 다른 2명은 Phillies의 포수 Buddy Rosar (1946) 와 Marlins 역사상 최고의 포수였던 Charles Johnson (1997) 뿐이다. [본문으로]
  13. 다른 7명은 각각 Mike Piazza, Jason Kendall, Pudge Rodriguez, Brad Ausmus, Dan Wilson, 그리고 Jorge Posada 뿐이다. [본문으로]
  14. 잘 모르는 선수라서 찾아봤는데, 통산 200경기에 넘게 등판해서 BB/9이 5.0에 달한다. 2002년에는 Cardinals 마이너에서 잠시 뛰었었다. [본문으로]
  15. 다음 타자 Jose Valentin이 Walk-off 2-run single을 치면서 Matheny의 희생이 승리를 불러왔다. [본문으로]
Posted by Doo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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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인장.


Braves Series Recap

5/16 Cardinals 5, Braves 2

5/17 Cardinals 4, Braves 1

5/18 Braves 6, Cardinals 5


홈으로 장소를 옮겨서 벌인 제 2차 대변대전은 이번에도 Cardinals의 2승 1패 판정승으로 끝났다. 이번 시리즈는 지난 1차대전 보다는 훨씬 괜찮은 내용의 시리즈였는데, 우선 Lynn - Miller - Garcia(시즌데뷔) 라는 일견 답답해 보이는 선발들을 투입하고도 이들이 매 경기 7이닝씩을 소화하며 제 몫을 해 주었고, 다시 메이저리그에 복귀한 Kolten Wong도 2번 타순에서 출루, 도루에 적시타까지 치며 제대로 spark plug 역할을 해 주었다. 2차전까지 나타난 상대의 허접한 경기력으로 보아 스윕도 가능해 보였고, 실제로 스윕 1이닝 직전까지 갔으나, 3차전에서 Rosie가 막판에 무너지며 결국 역전패하고 말았다. 불펜의 핵인 Rosie와 CMart가 동반 부진에 빠진 것은 상당히 우려스러운데, 마침 Motte이 이번 시리즈에 맞춰 메이저 로스터에 돌아올 예정이니 불펜 사정도 좀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Series Preview: Cardinals vs Diamondbacks (시즌 첫 맞대결)

팀 성적

Cardinals 23승 21패 .523 (NL Central 2위, 3.5게임차)  Run Diff. +11

Diamondbacks 18승 28패 .391 (NL West 5위)  Run Diff. -60


이번 시리즈는 DBacks와의 홈 3연전이다. DBacks는 현재 승률 .391로 메이저리그 30개 팀 중 28위에 처져 있으며, 득실차는 -60점으로 MLB 전체 꼴찌이다. 그런데, 월별 기록을 보면, 4월만 해도 9승 19패로 전혀 가망이 없어 보이던 팀이 5월 들어 9승 6패로 부쩍 상승세를 타고 있다. 지난 주말에는 LA Dodgers를 맞아 Kershaw에게 7점을 뽑아 18-7로 대승을 거두고, 다음날에는 Haren을 털어 역시 위닝시리즈를 달성한 바 있다. 4월에 만났다면 참 좋았을 텐데, 지금은 상당히 까다로운 상대이다.



Probable Starters

Game 1: Adam Wainwright vs Bronson Arroyo            5/20 20:15 EDT (5/21 9:15 KST)

Game 2: Michael Wacha vs Brandon McCarthy          5/21 20:15 EDT (5/22 9:15 KST)

Game 3: Lance Lynn vs Wade Miley                        5/22 19:15 EDT (5/23 8:15 KST)


1차전의 상대는 꾸준함의 대명사인 Arroyo이다. 올해도 변함없이 4.15 ERA, 4.12 FIP로 늘 보여주던 꾸준함을 계속해서 시전하고 있다. 2000년에 메이저 데뷔를 했으니 벌써 메이저 15년차인데, 정말 이런 꾸준함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는 속구 평속이 85마일대까지 추락했는데, 대신 그라운드볼 비율을 52.3%까지 늘려서 떨어진 구위를 상쇄하고 있다. 똥볼에 말려 점수를 뽑지 못하는 답답한 경기가 예상되는데, 아마 저쪽도 Waino 상대로 점수를 못내기는 마찬가지일 것이고, 그렇게 어찌어찌 이기지 않을까...


2차전의 McCarthy는 5.01 ERA, 3.85 FIP, 2.74 xFIP, 2.88 SIERA로 실제 실점과 기대 실점과의 괴리가 매우 큰데, 59.6%의 LOB%와 21.4%의 HR/FB와 같은 괴랄한 스탯을 볼 때 불운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런데 올 시즌 9번의 선발 등판 중 5점 이상 대량실점한 경기가 네 번이나 될 만큼 불운이 자주 찾아오는 편이니, 이번에도 한 번만 더 불운하기를 빌어 보자. 사실 늘상 90마일에 머무르던 속구 구속이 올해 들어 93마일까지 치솟는 등, 투수로서는 기량이 향상된 모습이어서, 자칫 영봉 당하지나 않을까 불안하다. 예감이 영 좋지 않은 경기이다.


3차전은 Lynn과 Miley의 대결이다. Lynn의 약점은 항상 좌타자에게 뚜렷한 무기가 없어 laboring을 하는 것인데, 주로 리드오프로 나오는 Gerardo Parra와 4번을 치는 Miguel Montero를 상대로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가 관건이 되겠다. 특히 이동일인 만큼 Prado를 빼고 역시 좌타인 Eric Chavez를 3루에 내보낼 가능성이 있다. 상대 선발 Miley는 그저그런 구위를 괜찮은 제구력과 그라운드볼로 때우는 유형의 평범한 선발투수인데, 올해 들어 HR/FB가 16.4%로 치솟은 덕에 역시 4.94 ERA로 실점을 많이 하고 있다. 이 경기에서도 그냥 비슷하게 6이닝 3~4실점쯤 하지 않을까 싶은데, Lynn이 3점 이내로 막아내는 것이 관건이 되겠다. Parra 출루 후 Goldschmidt에게 홈런을 맞는 정도로 2실점에 그치길 빌어 본다. -_-;;;


하필 상대가 상승세일 때 만나게 되었으나, 우리 선발의 힘을 믿고 2승 1패의 위닝시리즈를 예상해 본다.



Statistics



스탯은 Fangraphs를 참고하였으며, 순위는 NL 15팀 중에서의 순위를 표기하였다.


팀 스탯을 보면 현재 팀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공수에 걸쳐서 전체적으로 고만고만한 모습이니 5할 언저리에서 놀고 있는 게 당연한 것이다.


DBacks는 4.75라는 황당한 팀 ERA를 가지고 있는데, xFIP는 3.63으로 1점 이상 낮다. 이것은 이 팀이 특히 피홈런을 비정상적으로 많이 허용해 왔음을 의미한다.



Player to Watch


Trevor Rosenthal & Carlos Martinez: 요즘 이 두녀석의 동반 부진이 화제가 되고 있다. 먼저 Rosie를 보면... BB/9가 무려 5.82에 달하고 있으며, 여기에 LOB%가 65.4%에 불과하여 더욱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다. 즉 볼넷으로 출루시키는 경우가 매우 많고, 이 주자들이 쉽게 득점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거, 클로저로서는 매우 나쁜 상황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을까?


패스트볼 구속을 보면 평속 96.3으로 작년보다 1마일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무척 빠른 수준이다. 구종선택 등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Plate Discipline 쪽을 보면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2013년과 2014년의 O-Swing%을 보면, 무려 15% 이상 감소한 것을 볼 수 있다. 즉, 올해들어 상대 타자들이 존을 벗어나는 공에 좀처럼 스윙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초구 스트라이크 비율이 9%나 하락한 것도 결국 이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전 같으면 헛스윙이나 파울, 인플레이가 되었을 공들이 죄다 볼이 되고 있으니 볼넷이 크게 상승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O-Swing%이 격감하면서 다른 모든 스탯이 악화되는 모습은 Shelby Miller와 비슷한 현상인데, 왜 갑자기 상대 타자들이 이렇게 볼을 잘 골라내게 된 것인지는 다소 불분명하다. 그냥 철저하게 분석당한 결과인 것일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Rosie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변화구의 구사를 늘려 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뻔히 수를 읽히고 있다면, 변화를 줘볼 필요가 있다.


CMart의 경우는 좀 더 황당한데, 구속이라든지 P/D 스탯이라든지 세부스탯은 작년보다 나빠진 것이 없는데도 삼진은 급감하고 볼넷은 늘어서, ERA와 FIP는 3점대 중후반에 머무르고 있고, 심지어 xFIP와 SIERA는 4점대를 찍고 있다. 그것도 .271이라는 낮은 BABIP의 혜택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모양이라는게 정말 어이가 없다. 이 녀석은 SwStr%과 LkStr%이 모두 10%대인 데다 초구 스트라이크도 60%에 가까워서, Mike Podhorzer의 삼진 예측 공식에 넣어 보면 expected K/PA가 무려 28%에 달한다. 이정도면 9이닝당 10개가 넘는 되는 탈삼진을 기록해야 하는데, 현실은 5.87 K/9로 거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아무리 투심으로 범타 유도하는 것을 즐긴다(?)고 해도, 이렇게 헛스윙과 루킹스트라이크를 많이 잡으면서 정작 삼진은 잡지 못하는 괴현상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원인을 알 수 없으니 뾰족한 답도 없어 보인다. 올 시즌 이닝수가 23이닝밖에 되지 않으니, 적은 샘플 사이즈에 기인한 일시적인 스탯 왜곡일 가능성도 꽤 있다. 일단은 좀 더 지켜보도록 하자.


D-Backs 타선은 뭐니뭐니해도 Paul Goldschmidt(9 HR, 148 wRC+)가 가장 무서운 존재이지만, 최근들어 A.J. Pollock(5 HR, 6 SB, 148 wRC+)이 무서운 기세로 광분하고 있어 특히 주의해야 한다. 이들 둘 외에도 Miguel Montero(117 wRC+), Chris Owings(109 wRC+), Aaron Hill(103 wRC+)이 요주의 대상이다. DBacks의 팀 성적이 나쁜 것은 순전히 투수들이 홈런을 너무 많이 얻어맞았기 때문이지, 타선이 후져서는 절대 아니다.



Miscellany


Tony La Russa가 DBacks의 "Chief Baseball Officer"로 고용되었다. 이런 직함은 처음 들어보는데, 구단 CEO인 Derrick Hall 바로 밑의 자리로, Kevin Towers 단장으로부터는 보고를 받는 자리라고 한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 보통은 갑자기 상전을 모시게 된 Towers가 옷을 벗게 되리라고 예상하게 마련이다. 일례로 Reds가 2009년 1월 Walt Jocketty를 CEO에게 직접 보고하는 Special Advisor로 고용했을 때, 당시 단장이던 Wayne Krivsky는 이후 석 달 만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Reds 프런트를 떠났다. TLR은 프런트 경력이 없으니, Jocketty처럼 본인이 단장이 되기보다는 누군가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을 단장으로 새로 세울 가능성이 꽤 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Kevin Towers는 누구보다도 이런 불편한 동거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다. Padres의 단장으로 재직하던 2005년, 구단은 뜬금없이 MLB 사무국에서 임원으로 재직 중이던 전직 A's 단장 Sandy Alderson을 데려와 CEO로 삼았고, Alderson은 본인이 단장인 것처럼 직접적으로 팀 운영에 관여하였다. 게다가 2006년에는 Paul DePodesta가 단장을 거치지 않고 CEO에게 직접 보고하는 Special Advisor로 또 고용되어, Kevin Towers는 졸지에 상전을 둘이나 모시게 되었다. 하지만, Towers는 꾹 참고 단장으로 무려 4시즌을 더 일했다. 2009년 말에 결국 짤릴 때까지 말이다. 그렇게 짤리고 나서 DBacks의 단장이 되었는데, 거기 가서 또 이런 일을 겪게 되니, 역사는 정말 반복되는 모양이다. 과연 이번에도 Padres 시절처럼 뜬금없이 나타난 시어머니를 잘 모시고 살아갈 수 있을지 무척 흥미진진하다. (근데, PDP나 Alderson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은 모르겠다만, TLR 이사람 꽤 힘들거다... 아마 앞의 둘을 합친 것보다 더 빡셀지도... ㅎㅎ)



Go Cardinals...!!!

Posted by FreeRed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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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k Ankiel - Part II (타자 편)


Rick Ankiel


2005년 - 투수 포기 선언

스프링캠프가 막 시작한 3월 8일, Ankiel이 등판할 예정이었던 Marlins와의 스플릿 스쿼드 경기가 비로 취소되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Ankiel 은 TLR의 사무실을 찾아가 "할 만큼 했다" (I've had enough) 며 투수 포기를 선언한다. TLR도, Jocketty도, 말리지 않았다. 아니, 말릴 자격이 없었다. 지난 몇 년간 수 차례의 재활과 승격, 그리고 재발, 중간 중간 심심치않게 찾아온 부상들까지 이겨내면서 여기까지 온 Ankiel을 알고 있었기에 아무도 말릴 생각을 못했다. 3월 9일 아침, Ankiel이 메이저리그에서 투수로 은퇴한다는 보도 자료가 나갔다. 

다음은 당시 MLB.com Cardinals 담당 리포터였던 Matthew Leach의 3월 9일자 기사에서 발췌했다.

"I just felt like after Puerto Rico, I had changed mechanically...Just coming back, I couldn't seem to replicate it. This whole time, the frustration I built up into it. It just seemed like it was beginning to erode my spirits, and affect my personality, off the field as well. The frustration as it was, it was time for me to move on and pursue being an outfielder."

-Rick Ankiel, on deciding to give up pitching (March, 2005)


Ankiel의 외야수 전향은 Ankiel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었다. 야구를 관두기에 너무 강력한 그의 어깨, 그리고 운동신경이 아까웠던 TLR과 Jocketty 가 외야수로의 전향을 제안했고, Ankiel은 흔쾌히 허락했다. 이 둘은 Ankiel의 커리어와 시련에 있어서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고, 어떤 방식으로든 이 천재적인 선수의 빅 리그 복귀를 돕고 싶어했다. 스프링캠프가 끝나기 전, Ankiel은 Cardinals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고 커리어의 리셋 버튼을 누른다. 당시 그의 나이 25세 8개월. 그러나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측면에서 그에게 시간이 그다지 많은 것은 아니었다. 

Ankiel이 루키 리그로 내려가서 재활을 하던 2001년, TLR과 Jocketty는 Ankiel의 자신감 회복과 긴장 완화를 목적으로 Ankiel에게 종종 "DH 알바" 를 뛸 것을 제안한 바 있었다. 이 방침에 따라 Ankiel은 등판하지 않는 날은 지명타자로 뛰었는데, 44경기 118타석에서 홈런 10개 35타점 .286/.364/.638의 성적을 냈었다. 야구에 흥미를 잃지 말라고 투입했다기엔 상당히 무시무시한 성적으로, 아무리 루키 리그라지만 11타석 당 홈런 1개씩을 뽑아낸 그의 파워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이미 Ankiel의 타격실력은 그의 짧았던 빅 리그 커리어에서도 증명이 된 바 있었는데, 데뷔 한 지 갓 한 달이 안된 4월 셋째 주에만 홈런을 2개 뽑아낸 것이었다. (결국 그는 투수로써 아주 준수한 .250/.292/.382의 타격 성적으로 2000 시즌을 마무리했다.)


수염 기르는데는 딱히 재능이 없는 듯 하다.


2005~2007: Transition

외야수 전향 첫 시즌은 성공적이었다. Ankiel은 A볼의 Quad City을 51경기만에 OPS .881을 기록하며 쉽게 졸업헀고, AA볼의 Springfield에서도 34경기만에 홈런 10개를 쳐냈다. 선구안과 컨택에 분명 문제가 있었으나, 25세에 처음으로 전문 타자로 나선 것 치고는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특히 수비에서 Ankiel의 발전은 상당히 빨랐고, AA로 승격되었을 즈음에는 이미 "ML 레벨에서 중견수를 볼 수 있을 것" 으로 기대되었다.

점점 메이저리그를 향해 한 발짝식 전진하고 있던 그는 2006년 스프링 트레이닝 캠프에서 Patellar Tendinitis (J.D. Drew가 겪었던 바로 그 무릎 부상이다) 진단을 받고 그 해 6월 무릎 수술을 받으며 시즌 전체를 날린다. 그러나 다른 선수라면 모를까, Ankiel에게 이런 정도의 Set-back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2007년을 AAA 멤피스에서 시작한 그는 초반부터 절정의 타격감을 보이며 시즌 첫 두 달만에 홈런 22개를 쳐냈다. 당초 투수에서 타자로의 전환에 희망적이지 않았던 언론에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5월 28일 그는 Arkansas 전에서 무려 530피트 짜리 홈런을 쏘아올려서 타격코치 Rick Eckstein (그렇다, David Eckstein의 형이다) 의 입을 쩍 벌어지게 했다. 6월 16일 Ankiel이 Iowa 전에서 한 경기 3홈런을 때려내자 ESPN에서 단독 인터뷰 제의가 들어왔다. "그 날" 이후로 언론과의 접촉을 극히 불편해하던 Ankiel은 조심스럽게 수락했다. Ankiel의 절친 Tagg Bozied는 팀 동료 Ankiel에게 대해 한 마디 해달라는 부탁에 "그 친구는 자기 얘기가 언론에 실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며 멘트 요청을 거절했으나, Ankiel이 직접 "괜찮다" 고 말하자 입을 열었다.

“He’s got a ton of talent and strength. He’s a hard worker. He’s only going to get better. He works out. He eats great. He’s dedicated — 100 percent....But he is really high-strung on baseball. He’s got that dynamic in his brain that he really believes he can be successful every time he goes up there."

-Tagg Bozied, on his teammate Ankiel

Ankiel의 죽마고우이자 고등학교 때부터 같이 야구를 했던 친구 Chad의 2001년 인터뷰에 따르면, Ankiel은 어렸을 때부터 팀에서 그 누구보다 일찍 운동하러 (고교시절 매일 아침 6시반에 Work-out을 했다고 한다) 나오는 선수였으며, 자기가 여태껏 본 어떤 선수들보다 Hard-worker였다고 했다. TLR, Adam Kennedy, Matt Morris 등도 공개적으로 Ankiel의 Work-Ethic을 크게 칭찬한 바 있었기에 Ankiel이 열심히 노력하는 선수라는 사실은 그다지 놀라울 게 없다. 그러나 Ankiel이 스스로에게 얹는 부담감 측면을 짚어냈다는 측면에서 Tagg Bozied의 코멘트는 주목할만 하다. 매 타석 스스로에게 잘 해야한다는 압박감을 주는 선수가 10번 중 7번은 실패하게 마련인 직업을 선택했으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 

당장 Ankiel을 보고싶었던 팬들의 성화가 있었으나, TLR와 프론트는 Ankiel에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고, "Give him all the time he needs" 라며 Ankiel에게 여유를 주었다. Ankiel은 그 사이 전반기를 무사히 마쳤으며, 102경기에서 32홈런을 때려내고 리그 최다 득표 선수의 영예를 안으며 마이너리그 올스타에 뽑혔다. 투수로 마이너리그를 지배했던 그가 타자로 다시 마이너리그를 제패하는 데에 걸린 시간은 8년에 불과했다.

Rick Ankiel's Minor League Track Record (Batting)

YearAgeTmLgLevGPAABRH2B3BHRRBISBCSBBSOBAOBPSLGOPS
2005252 Teams2 LgsA-AA8536932151831712175003766.259.339.514.853
200525Quad CitiesMIDWA5122318533501011145002737.270.368.514.881
200525SpringfieldTLAA341461361833701030001029.243.295.515.809
200727MemphisPCLAAA102423389621041533289432590.267.314.568.883


그 날 #2 (2007년 8월 9일) 

Padres와의 홈 3연전. TLR이 무려 6년 반 만에 선발 라인업 카드에 Rick Ankiel이라는 이름을 써넣었다. 다만 9번타자 투수가 아닌 2번타자 우익수로였다. Ankiel이 지난 몇 년간 어떻게 커리어를 연장해왔는지 잘 알고있었던 동료들은 Ankiel 어떤 데뷔전을 가질지 기대할 수 없었다. 아니, 기대하기 두려워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다만 시즌 초부터, 아니 어쩌면 2001년부터 그를 기다려왔던 홈팬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Ankiel의 첫 타석부터 그에게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다.

첫 세 타석에서 안타를 치지 못한 Ankiel이 7회말 2사 2,3루에서 4번째 타석에 들어섰다. 릴리버 Doug Brocail의 슬라이더가 몰렸고 Ankiel의 방망이가 돌았다. 우측 담장을 넘는 3점 홈런. 수줍고 조용한 Ankiel 도 감정을 완전히 억제할 수는 없었다. 베이스를 돌며 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아마 Cardinals 팬들이라면 Ankiel보다 덕 아웃에서 마치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행복해하던 Tony La Russa의 모습이 더 신기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La Russa가 이 정도로 기쁨을 표현하는 모습을 본 것은 딱 3번 있었는데, 나머지 두 번은 2006년 WS 우승 때와 2011년 6차전 Freese의 홈런 때이다.  동영상 링크 

(동영상 링크의 중계를 들으시면 Fox Midwest 의 Al Hrabosky가 "혹시 Ankiel을 거르고 Pujols를 상대할 가능성은 없을까요?" 라며 시답잖은 농담을 하는 걸 감상하실 수 있으며, 혹시 이 영상을 안보셨던 분이 있다면 꼭 Ankiel의 curtain call 장면까지 보시길 바란다.


그가 돌아왔다.


이틀 후인 8월 11일, Dodgers 전에서 Ankiel은 1회 Derek Lowe의 싱커를 걷어올려 투런 홈런을 작렬했고, 7회에는 Roberto Hernandez의 패스트볼을 넘기며 타자 전향 후 3경기만에 멀티홈런 게임을 만들어냈다. 이미 홈런을 두 개 친 상황에서 그는 타구판단 실수를 미친듯한 운동능력으로 극복하는 Reverse-Over-the-Shoulder 캐치로 팬들을 감동시켰으며, 이미 Ankiel의 복귀 자체에 잔뜩 흥분해있던 Cards 팬들은 High-Intensity 수비와 폭발적인 장타력을 보여주는 Ankiel을 금세 Fan Favorite으로 흡수해버렸다. 

그 다음 주에 Rick Ankiel은 Wrigley Field에서 라이벌 Cubs를 상대로 7회 쐐기 홈런을 치면서 팀 승리를 이끌었고, 8월 31일에는 자신을 상대하려고 올라온 좌완 릴리버 Eddy Guardado를 상대로 7회 자신의 데뷔 첫 만루홈런까지 쳐냈다. 9월 2일에 벌어진 Reds와의 홈 3연전에서는 무려 2홈런 9타점을 몰아쳤다. 팀 타선이 폭발한 9월 6일 Pirates 전에서는 혼자 2홈런 7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16:4 대승을 이끌었다. 언론에서는 Ankiel을 Babe Ruth 에 비교하기 시작했고, Robert Redford 주연의 영화 제목이자 한때 Ken Griffey Jr.의 별명이었던 "The Natural"이란 말이 Ankiel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비록 9월 한 달간 팀이 무려 12연패를 당하면서 한  때 .358이었던 타율은 결국 .285에서 마감했지만, Ankiel의 2007시즌 마지막 두 달간의 활약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2008시즌 - The Comeback Kid

Ankiel의 외야수 커리어에서 몇 안되는 풀 타임 주전 시즌. Jim Edmonds가 떠난 Busch의 광활한 센터 자리에는 2005년 드래프트에서 건진 차세대 중견수 Colby Rasmus가 차근 차근 단계를 밟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 사이의 Gap을 메우기에 "자체생산" Ankiel은 아주 적절한 선수였다. Schumaker - Ankiel - Ludwick 로 구성된 당시 Cardinals 외야진은, 세 선수가 모두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내면서 Edmonds의 공백을 최소화했다. Schumaker는 3할을 쳤고, Ludwick은 Break-out 시즌을 보내며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Ankiel은 전반기에만 무려 20홈런 50타점을 기록하며 "이러다가 40홈런을 치는게 아니냐" 는 반응도 있었다. 

Ankiel은 2번부터 8번까지 많은 타순을 소화헸으나 (이건 TLR의 팀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20경기 중 75경기에서 클린업 (주로 4번) 을 쳤다. 2007~2008시즌의 성공의 가장 큰 원인은 그의 재능 자체였겠지만, 필자는 2006년 Ankiel이 부인 Lori Ankiel을 만나 결혼에 성공하고 정신적으로 그를 지켜줄 반려자를 만난 것이 결정적이지 않았나 싶다.

2009시즌 

2009년 5월 5일, Ankiel은 Phillies 전에서 Pedro Feliz가 친 좌중간 큰 타구를 워닝 트랙 근처에서 다이빙 캐치로 멋지게 잡아낸다. 그러나 타구를 잡자마자 머리를 펜스에 크게 박은 뒤 쓰러져 관중들은 물론 경기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긴장시켰다. Ankiel은 의식을 잃지는 않았으나 잠시 펜스 앞에 누워있다가 들것에 실려나갔는데, 실려나가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주변을 안심시켰다. 큰 부상이 있지는 않았으나 구단 측에서는 Ankiel을 DL에 올리고 휴식을 취하게 했다.

정말 큰일 나는 줄 알았다.


이미 크게 좁아졌던 Ankiel의 입지는 부상 이후 더더욱 안좋아졌다. 오프시즌에 그는 연봉 조정에서 2.8M의 연봉을 받아내 구단 입장에서 "그냥 벤치에 데리고 있기에는 부담스러운 4th OF가 되어버렸고, 좌투수 상대로 극악의 스플릿을 기록하면서 TLR의 플래툰 기용을 합리화시켰다. 이 와중에 2005년 드래프티인 Colby Rasmus는 어느 새 Cardinals의 차세대 중견수로 자리를 잘 잡아버렸다. Ankiel은 커리어 최다인 122게임에 출장했으나 받은 타석 수는 404타석에 그쳤고, Holliday 영입 이후에는 사실상 벤치로 밀려버렸다. 타석에서 스스로에게 주는 압박감 때문에 조급했던 Ankiel은 나가지 말아야 할 공을 건드리기 시작했고, 결국 .285의 창피한 출루율로 시즌을 마쳤다.  

2009년 정규시즌이 끝나고, Ankiel은 10년간 함께한 Cardinals와 이별했다. 그 해 오프시즌, Royals과 계약하면서 Ankiel은 지역 유력지인 St. Louis Post-Dispatch에 Cardinals 팬들을 향한 무려 Half-page짜리 감사 광고를 냈다. 뛰는 기간 내내 언론과의 접촉을 몹시 불편해하던 Ankiel이었기에 모두를 놀라게 한 제스처였다. 

Many thanks to Cardinals fans and the city of St. Louis for your support and cheers over the years. It was a privilege and an honor.

- Rick Ankiel's personal ad on STL Post Dispatch



2011~2012 - Nationals 시절

오프시즌에 Ankiel은 Nationals와 1.5M 짜리 (+ 인센티브) 1년 계약을 체결하는데, 여기에는 Ankiel이 마이너리그에서 타자 수업을 받던 시절 그의 인스트럭터였던 Jim Riggleman (당시 Nats 감독) 의 입김이 컸다. Cardinals 마이너리그 시스템의 인스트럭터로 일하던 Riggleman은 TLR을 직접 찾아가 "이 팀의 최고 타자 유망주는 Ankiel이다" 며 그의 스윙과 재능을 극찬한 바 있었고, 2008년 Ankiel이 Break-out 시즌을 가지며 화려하게 부활하자 누구보다 앞장서서 그의 복귀를 환영한 바 있었다. 

Riggleman과 재회한 Ankiel은 다시 한 번 좋은 시즌을 보냈다. 저렴한 연봉을 감안해서 본다면 Ankiel의 Upside는 꽤나 괜찮았다. 그는 중견수를 소화할 수 있는 4th OF였으며, 우투수 상대로 평균 이상의 파워를 지니고 있었고, 어깨는 확실히 리그 정상급이었다. 또한 어느새 빅 리그 12년차의 베테랑이 된 그는 꼬맹이 Bryce Harper가 콜업되었을 때 그에게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워낙 조용한 선수라 트러블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그러나 2012년에는 시즌 내내 타격 슬럼프로 고생을 하자 그를 방출하고 싶지 않았던 Nats 단장 Rizzo가 Ankiel을 DL에 올리려고 했으나, Ankiel은 이를 거부하고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


Nats로 간 것은 Ankiel에게 잘 한 결정이었다.


Rick Ankiel - 첫 끗발이 X 끗발?

2007년 8월 9일 데뷔전에서 쓰리런 --> 첫 한 달간 23경기 9홈런 29타점 .358/.409/.765

→ 이후 9월 6일~시즌 최종전까지 --> 24경기 2홈런 10타점, 삼진 20개, .220/.250/.330

2010년 (Royals 이적 후) 개막 후 첫 2주간 11경기 .308/.349/.615, 3홈런 9타점 2루타 3개. 그리고 부상.

→ 트레이드 당할 때까지 16경기 .226/.293/.358, 16경기 1홈런 6타점 2루타 4개, 5볼넷 18삼진

Braves로 트레이드 된 직후 --> Turner Field 데뷔전에서 Johan Santana 상대로 2타점 2루타 

→ 그 이후 45경기 2홈런 7타점 .205/.321/.321

2013년 Astros 개막전 정규시즌 첫 타석에서 3점홈런 

→ 이후 14타석에서 12삼진 --> 이후 .183/.222/.433 60타수 11안타 (4홈런, 2루타 3개), 3볼넷 34삼진

2013년 Mets 이적 직후 첫 9경기 .323/.364/.710, 31타수 10안타 2홈런 6타점 

→ 그 이후 11경기 35타수 2안타



냉정하게 평가해보자. 외야수 / 타자로써의 Rick Ankiel은 기량이 정점일 때 5할 승률 팀의 주전 혹은 컨텐더 팀의 4th OF였으며, 기량이 퇴보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Pop와 강견을 제공하는 벤치 외야수" 수준에 그쳤다. 풀 시즌 25홈런을 친 것은 경이적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투수 하다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선수 출신 치고는" 이라는 단서가 붙을 때 얘기였다. 그는 야수로써 뛴 7년간 통산 3.9 WAR를 적립하는 데 그쳤으며, 풀 시즌을 뛰며 1.0 이상의 WAR를 기록했던 것은 (2007년의 광분은 제외) 2008년과 2011년, 두 차례에 불과했다. 

타격에서 Ankiel의 문제는 너무 간단헀다. 컨택트가 안됬다. 마이너리그 어느 레벨에서도 Ankiel은 3할을 쳐 본 적이 없으며, 그의 스윙은 정확도 상실을 어느 정도 감수하고 파워에 더 집중한 스윙이었다. 2007년~2008년의 성공은 타자 Ankiel에 대한 분석이 충분히 되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투수들이 Ankiel에게 어떻게 승부하면 되는지 알게 된 이후에는 Ankiel은 더 이상 풀 타임 보장을 받을만한 공격력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 변화구에 대한 약점도 분명했을 뿐더러, 스트라이크 존 바깥쪽에 높게 형성되는 패스트볼에 Ankiel은 사족을 못썼는데, 이 약점은 2013년까지도 고쳐지지가 않았다. 

The kid has more guts than most people. Maybe someone needs to say that to him once in a while."

-David Chase, the GM of Memphis Redbirds (2007)

Ankiel의 Plate Discipline 문제는 Tagg Bozied, Rick Eckstein이 지적한 Anxiety 이슈와도 큰 관련이 있었다. 그는 배팅 케이지에서 엄청난 타구들을 양산해내다가도 막상 압박이 있는 상황에서는 나쁜 공에 손이 나가기 시작했다. (통산 득점권 K% 28.4%, 주자 없을 때는 25.9%). 지난 5년간 Ankiel의 wRC+는 단 한 번도 리그 평균을 넘어본 적이 없으며, 그의 Z-Contact %인 66.1%는 실로 극악의 수치인데, 이에 대해서는 Fangraph의 Dave Cameron이 제대로 분석해놓은 글을 참조하셔도 좋을 것 같다. (요지는 리그 최악의 Z-Contact %, 즉 스트라이크 존 안에 들어오는 공에 대한 컨택율이 리그에서 가작 안좋았던 타자도 80%에 육박하는 반면, Ankiel의 스탯은 지나치게 비정상적이었다는 점이다.)

Rick Ankiel - Plate Discipline (Last 5 Years)

 

 K%

Z-Contact %

SwStr % 

 wRC+

 2009

 24.5%

 85.2%

 15.0%

 75

 2010

 29.6%

 76.4%

 17.8%

 92

 2011

 23.1%

 83.2%

 12.9%

 82

 2012

 34.5%

 76.5%

 17.9%

 82

 2013

 44.1%

  66.1% 

 21.2%

 79


두번째 문제는 Ankiel의 소위 "좌상바" 기질이었다. Ankiel은 데뷔했던 2007시즌에는 두 달간 좌투수 상대로 무려 홈런 7개 (11개 중) .391/.400/.783의 말도 안되는 리버스 스플릿을 보였는데,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점점 반쪽 선수가 되어버린 Ankiel (2008~2011년 4시즌간 좌투수 상대 성적)

2008년 116타석 7홈런 15타점 6볼넷 24삼진 .224/.268/.448

2009년   98타석 0홈런   8타점 2볼넷 29삼진 .234/.265/.298

2010년   64타석 0홈런   4타점 6볼넷 23삼진 .164/.270/.182

2011년   88타석 1홈런   9타점 6볼넷 21삼진 .228/.282/.304

Ankiel의 외야수로써 본격적으로 뛰기 시작한 것은 2005년으로, 이는 Ankiel이 은퇴를 앞둔 지금도 아직 채 외야수 10년차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Ankiel은 기본적으로 외야수들에게 있는 타구 방향 판단과 추적 센스가 있는 선수가 아니었으나, 판단 미스들을 뛰어난 운동신경으로 극복해내는 스타일이었고, 노력과 연습을 통해 빅 리그 중견수로 발돋움했다. Ankiel 은  몸을 사리지 않는 다이빙 캐치로 많은 박수를 받았으나, 베테랑 외야수들에게는 어렵지 않은 플레이들을 어렵게 해내는 경향이 강했다. 



수비에서의 Ankiel는 공을 잡기 전과 공을 잡은 후가 정말 판이하게 달랐다. 데뷔 초기 메이저리그에서 주전 CF로 뛰기에 그의 타구 판단력과 중견수로써의 Field Coverage는 좋은 편이 아니었으나 이를 뛰어난 운동신경과 주력으로 극복해냈다.  풀타임 첫 해인 2008년, 그는 중견수 자리에서 UZR -6.6을 기록했으며 좌익수 자리에서도 UZR -5.3을 찍었다. 그러나 수비에서 Ankiel은 경험이 쌓이면서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2011년 Nationals에서 그는 중견수 자리에서 UZR +6.1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의 어깨는 백문이 불여일견. (동영상 링크마운드에서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했던 그는 이제 광활한 외야에서 베이스를 향해 스트라이크를 쏘아대기 시작했다. (2011년 보살 리그 3위 (Kemp-McCutchen-Ankiel), Range Factor 리그 3위 (Gomez-McCutchen-Ankiel.)  

HGH 스캔들

2007년 New York Daily News에서 Ankiel이 인간 성장 호르몬 (HGH = Human Growth Hormone)을 복용했다는 기사를 보도하면서 Ankiel 의 화려한 복귀에 커다란 오점이 남았다. Ankiel 은 "당시 나는 재활 중이었고, 의사의 처방전을 받아서 복용하고 있었다" 고 진술했고, 당시 HGH가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금지한 물질이 아니었기에 스캔들은 더 커지지는 않았다. 당시 Ankiel은 팀 동료 Troy Glaus로부터 온라인 HGH 및 스테로이드 사이트를 소개받았다고 밝혔다. Ankiel 이 몇 년간 고생한 것을 인정하며 그에게 동정론을 펼치는 이들도 있었으나, 어떤 이들은 "의사의 처방전을 받았으면 왜 굳이 불법 사이트에서 구매를 했느냐" 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이 부분은 Ankiel의 커리어에서 어찌 보면 가장 안타까운 얼룩 중 하나이다.



총평 - Re-Creating Yourself.

야구는 야구 선수들에게 생계수단이다. 우리는 때때로 Baseball-Reference와 Fangraph에서 제공하는 화려한 숫자의 향연에 취해 이 기본적인 사실을 종종 망각할 때가 있다. Player Stats에 2012년도 이후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면 우리의 기억 속에 그 선수는 2012년 이후로 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지만, 삶은 계속 지속된다. Ankiel의 투수로써의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2001~2004년, 보여지지 않는 곳에서 Ankiel은 외로운 사투를 계속했다. 

Ankiel에게도 야구는 생계 수단이었다. University of Miami 진학을 포기하고 거액의 계약금을 받았을 때부터 그에게 야구는 생계 수단이었다. (좀 미안한 표현이지만) 풍비박산이 나서 뿔뿔히 흩어진 가족, 중소기업에서 비서로 일하면서 살아오며 뒷바라지한 어머니, 연락이 잘 안되는 이복 형제들, 그리고 올스타급 전과를 가진 아버지. 만 18세에 전미 최고의 고교야구 선수로 프로에 입문했고, 2000년 10월 3일 (그 날 #1) 전까지 단 한 차례도 질주를 멈춘 적이 없었던 Rick Ankiel. 야구만 알고 달려온 이 수줍음 많고 예민한 20대 청년은, 야구가 주는 시련에 아파하면서도 야구를 놓을 수가 없는 딜레마에 빠져서 20대 초반을 보냈다. 야구를 그만둔다면 그는 대학 졸업장을 가지지 못한 20대 실업자에 불과했고, 그에게는 서포트를 기대할 가족들보다는 챙겨드려야 할 어머니가 있었을 뿐이었다. 



투수에서 타자로의 드라마틱한 컴백을 이뤄낸 Ankiel의 스토리는 이미 언론에 수백차례 회자되어 이제 많은 야구팬들에게 익숙하다. Ankiel은 스포츠 저널리즘에서 늘 침을 질질흘리는 소재 중 하나인 "불운/비운의 천재"에 너무도 걸맞는 선수였고, 마치 만화 주인공처럼 극적인 커리어를 보냈기에 그의 복귀 스토리는 팬들의 Soft spot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헤드라인이었다. 그러나 Ankiel의 딜레마와 고통은 사실 매년 수십, 수백명의 마이너리거들이 겪는 시련과 그 근본적인 면에서 큰 차이가 없다. 매년 많은 선수들이 자신의 인생을 바쳐서 쫓아온 빅 리거의 꿈을 중간에서 멈춰야하는지, 더 쫓아가야하는지 하는 딜레마에 빠지며, 갑작스런 (회복 불가능 수준의) 제구 난조 또한 생각보다 많은 투수들이 겪는 문제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Ankiel에게는 보통 실패한 투수들에게서 찾기 힘든 "빅 리그에서 풀 시즌 30홈런 포텐셜"의 타격 재능이 있었고, 이 재능을 단시간 안에 끌어올려 "기량"과 "실력"으로 만들어낸 절박함이 있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Ankiel은 포기를 하지 않은 게 아니고,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좋아하는 야구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커리어를 이어나갈 수 있던 재능의 소유자 Ankiel은, 그런 의미에서 행운아가 아니었을까. 커리어 연장을 통해 그는 (루키시절 계약금을 포함해) 커리어 내내 1500만 달러 가까운 돈을 벌었고 이는 일반 사람들은 평생 만져보지 못하는 액수의 재산이다. 데뷔 15년차 시즌인 2013년도 어찌어찌 저니맨으로 메이저리그에서 남아있었다. 투수 시절 그가 누렸던 짧지만 화려했던 명예와 스포트라이트, 듣기만 해도 부담스러운 칭송들을 생각하면 그의 지금 모습은 남루하기 짝이 없다. 기록중인 성적, 선수로써의 위치, 모든 면에서 참으로 초라하다. 그러나 30대 중반의 야구인이자 사회인, 혹은 인간 Rick Ankiel 에게는 감히 초라하다는 말, 불운하다는 말을 함부로 붙이고 싶지가 않다. 



에필로그 

2010년 가을은 Cardinals가 Reds에 밀려 포스트시즌에 나가지 못했던 해였기에, 필자는 어쩌면 차라리 잘됬다는 마음으로 오랜만에 감정적 동요 없이 가을야구를 볼 생각에 은근히 부풀어 있었다. 저녁에 집에 와서 TV를 켜니 Braves와 Giants의 NLDS 2차전이 진행 중이었고, 스코어는 이미 4:1 Giants 리드. 전날 Lincecum에게 호되게 당한 Braves 타선이 Cain을 상대로 여전히 쩔쩔매고 있었다. 리플레이와 광고가 대충 끝나고 7회 선두타자로 익숙한 이름 Rick Ankiel이 등장했다. 결과는 어느 순간부터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린 시원한 헛스윙 삼진.

8회초 Braves가 Romo-Wilson 계투진을 흔들어 극적으로 4:4 동점을 만들고 계속된 1사 2루 찬스에서 Ankiel 이 또 등장했다. 이번에는 밸런스가 흐트러진 채로 공 밑을 때리며 좌익수 플라이. 경기는 Kimbrel과 Wilson의 삼진쇼로 넘어가면서 순식간에 연장 11회까지 흘러갔고, 연장 11회 1사 주자 없이 Ankiel에게 이 날 5번째 타석이 돌아왔다. 볼카운트 2-2에서 Ramon Ramirez의 94마일짜리 패스트볼이 살짝 몰렸다. Ankiel의 방망이가 돌았고 공은 AT&T 파크 밖 바다에 떨어졌다. 이 역시 어느 순간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린 "맞는 순간 바로 아는" 특유의 호쾌한 홈런이었다. 그렇게 Ankiel은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포스트시즌 홈런을 쏘아올렸다. 동영상 링크


왜 더 활짝 웃지 못하니. 왜.


TV 카메라가 Ankiel이 주먹을 쥐며 다이아몬드를 도는 모습과 Braves 덕아웃의 광적인 분위기를 번갈아 비추었고, 그 짧은 몇 초간 많은 생각이 필자의 머리를 스쳐갔다. Rick Ankiel. 현대 Cards 팬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애증의 이름. 정확히 10년 하고도 5일전, Ankiel은 야구 역사상 가장 창피한 모습으로 포스트시즌 무대를 떠나야 했다. 세상을 다 가진 듯 보였던 만 스무 살짜리 투수. 그가 던졌던 94마일 팔팔한 패스트볼에서 보였던 창창한 앞날은 온데간데 없었다. Old Busch Stadium의 따뜻한 오후 햇살이 참으로 야속해보였던 바로 그 날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Ankiel을 가슴에 묻지 않았는가. 그리고 내가 보고 있는 이 선수는 지금 나이 서른 살의 8번타자 중견수이며, 그 누구도 이 선수의 미래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스윙하자마자 손가락으로 Braves 덕아웃을 가리키며 빠른 속도로 베이스를 돌던 Ankiel의 입가에 웃음이 희미하게 보였다. 긴장과 기쁨을 동시에 머금은 그 웃음에 10년전 마운드에서 보았던 어린 투수 특유의 자신감과 배짱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Braves는 이 경기를 잡아내고도 홈에서 2경기를 내리 지면서 시리즈를 패배했고, Ankiel 에게 그 날 이후로 더 이상의 포스트시즌 안타는 없었다.

감동? 눈물? 인간 승리? 인생 역전? 글쎄...그 순간을 Ankiel이 평생동안 달고 지내왔던 그렇게 무겁고 드라마틱한 단어들로 수식하고 싶지는 않다. 아쉬움? 미련? 서러움?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그냥 고개만 끄덕여질 뿐이다.

연장 11회말을 Farnsworth가 무사히 막아내고 카메라가 Player of the Game으로 Rick Ankiel 을 비춘다. 어느 새 서른이 넘어 얼굴에 연륜이 나타나는 Ankiel 이 센터에서 마운드를 향해 무표정으로 달려오며 동료들과 시리즈 동점을 축하한다. 10년 전 NLDS 마운드에서 고개를 떨구었던 그 젊은 청년의 모습을 나도 모르게 찾고 있음을 느끼지만, 더 이상 그에게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바다 건너 먼 나라에서 그의 소식을 오랫동안 지켜봤을 뿐인, 한 면식없는 팬으로써, 그에게 이런 순간이 온 것에 괜히 감사하다.

이래서 야구를 보는구나, 하고 새삼 느낀다. 

Did you know...

  • 역사상 포스트시즌 선발 등판 + 포스트시즌에서 야수로써 홈런을 기록한 선수는 딱 두 명이다. Babe Ruth와 Rick Ankiel.
  • 선발 투수로 40차례 이상 등판하고 야수로 통산 홈런을 40개 이상 친 선수 역시 Babe Ruth와 Rick Ankiel 뿐이다.
  • 커리어 첫 홈런은 투수로 치고, 이후 야수로 또 홈런을 친 선수 역시 1947년 이후 Ankiel이 처음이다.
  • Ankiel은 2009년에 부인 Lori Ankiel와 함께 자기 이름을 내건 Rick Ankiel 와인을 런칭했는데, 2009년 이후로는 와인 관련 기록이 별로 없다. 부인 Lory Ankiel은 NFL Miami Dolphins의 치어리더 출신이다.
  • 드래프트 직후 Ankiel을 Busch Stadium으로 초청해 Work-Out을 시켰던 그 날, Ankiel은 마운드에 오르기도 전에 배팅 케이지로 먼저 가 타격부터 했다고 한다. Matt Morris는 그 날을 Ankiel이 쳤던 홈런을 회상하며 "어쩌면 그 때부터 타자를 했어야했는지도 모른다" 며 껄껄 웃었다.
  •  어려서부터 Braves 팬으로 자란 Ankiel은 2009년 Cardinals가 John Smoltz를 영입했을 때 그에게 다가가 그가 자기의 우상이었다고 말하려했다. Smoltz가 먼저 Ankiel에게 다가와 말했다. "자네가 한 일은 정말 대단한거야." (“I’ve got to give you props for what you have done.")
  • 2001년 스프링캠프를 앞두고 TLR과 Jocketty는 Ankiel에게 쏟아질 언론의 관심이 (전년도 Melt-down에 관한) 어린 투수에게 얼마나 부담스러울 지 알고 있었다. TLR은 Ankiel을 불러 "어차피 아무리 인터뷰를 거부해도 계속 괴롭힐 게 분명하니, 차라리 캠프 첫 날 기자회견을 해서 할 얘기 다 해주고 트레이닝을 시작하자" 고 말했다. 스프링 캠프 첫 날,  Jocketty와 TLR은 Ankiel을 가운데에 두고 나란히 앉아서 Ankiel이 손으로 직접 쓴 Statement (성명) 를 발표한 뒤 기자회견을 했다.  이 일이 있고 며칠 후 Ankiel은 그 기자회견이 있던 날 아침, Jocketty가 부친상을 당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Ankiel의 프레스 컨퍼런스를 모두 마친 6시간 뒤에야 아버지의 상을 치르러 갔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by Doovy

Posted by Doovy+
:

많은 투수들이 빅 리그에 올라오기 전에 각자 소속한 하위 레벨의 마이너리그들을 소위 "초토화" 시키면서 올라오고, 그 과정에서 "예전의 어떤 사이영상 투수와 비슷하다"느니, 조금만 다듬으면 누구보다 낫겠다더니, 별 소리를 다 들으면서 올라온다. 그렇지만 Sandy Koufax 에 대한 비교는 흔하지 않다. 2014년 시즌 개막을 앞둔 현재, 사이영상 3차례에 빛나는 현존 최고의 투수 (Wain아 미안하구나) Clayton Kershaw만이 무리없이 Sandy Koufax 컴패리즌을 소화해낼 수 있다. 심지어 아직도 Kershaw가 Koufax에 비교되기는 시기상조라며 향수에 젖어계신 올드 팬들도 많다.

Raw Talent로 밀어붙이는 폭발적인 잠재력을 지닌 유망주에 대한 갈증에 아직 목말라하는 2014년의 Cardinals 팬들에게는 참으로 믿기 힘들겠지만. 16년 전, 우리 팜에는 Sandy Koufax 컴패리즌이 유효하다는 고졸 좌완 투수가 있었다. 

오랜 Cardinals 팬으로써, 오랜 야구팬으로써, 머리에 떠올릴 때마다 정말이지 만감이 교차하는 선수, Rick Ankiel 을 돌아본다. Part I 에서는 투수 Ankiel을, Part II 에서는 타자 Ankiel을 다뤄보려 한다.


Rick Ankiel (Richard Alexander Ankiel Jr.)

RHP / Outfielder

DOB: 1979년 7월 19일 

Birth: Port St. Lucie, Florida

Time with Cardinals:  1997-2009

Childhood

훗날 한 스카우트로부터 "여태 내가 본 최고의 좌완 투수들 중 하나" ("one of the best left-handers I've ever seen") 라는 극찬을 받은 Rick Ankiel이지만, Ankiel이 투수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11학년이 (고2)  되고 난 후였다. 그 전까지 Ankiel은 남들보다 늘 작은 키에 그다지 대단할 게 없는 재능이었고, 리틀리그 시절에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Ankiel의 정신적 성숙함과 마운드 위에서의 차분함, 소위 "멘탈" 만큼은 유난히 훌륭했다. 지금 2000년 포스트시즌에서 역대 최악의 "멘붕" (Melt-down) 을 보였던 선수의 멘탈을 얘기하는게 맞냐고 물으신다면, 그렇다.

Florida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자란 Ankiel은 고등학교 이전까지 "실수에 대한 두려움" 으로 꽁꽁 싸매진, 소심하고 겁이 많은 소년으로 자랐다. Ankiel 은 야구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야구는 나의 길" 이라고 생각할만큼의 열정은 없었다. Ankiel보다 야구를 잘하는 아이들은 많았다. 팀에서 키도 덩치도 가장 작았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Rick Ankiel Sr. 는 아들에게 반강제로 야구를 시켰다.

그의 아버지 Rick Ankiel Sr. 는 화려한 전과를 자랑한다.1975년 대마 소지 혐의로 체포된 것이 시작으로 이후 25년간 그는 14차례 체포 당했으며, 6차례 구속당했고, 전과의 종류도 마약 밀수, 총기 은폐, 강도, 특수강도, 음주 운전 이후 경찰로부터 도주 등 정말 다양했다. 범죄자 테크를 타기 전까지 아버지의 직업은 낚시 가이드였으나, 이 업계에서 일하던 중 마약 밀매단과 엮이게 되면서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고 말았다. Ankiel이 자란 작은 마을에서 아버지의 과거와 전과, 그리고 심심찮게 일어나던 범법 행위들과 불안한 가정 분위기는 지역 사회와 이웃들의 지나친 관심과 손가락질을 불러왔고, Ankiel이 성장하면서 이로 인한 스트레스는 어린 소년이 감당하기 힘들 수준으로 부풀어올랐다. 








아버지는 어린 Ankiel에게 가혹하게 훈련시켰다. 리틀야구 선수였던 어린 아들에게 기합과 엄포는 물론이고 미국 아버지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따뜻한 부정은 전혀 없었다. 강압적이었던 아버지는 본인이 결코 아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어린 Ankiel을 더더욱 강하게 몰아붙였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던 아버지 밑에서 Ankiel은 아버지의 폭언을 피하기 위해서 야구를 했고, 늘 실수하면 안된다는 공포에 떨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 때문에 늘 소위 "군기"가 바짝 들어있었던 Ankiel은 훗날 고교야구에서 보기 드문 성숙함과 인성, 그리고 근면함으로 칭찬을 받는다.

"My dad was hard on me all the time. If I swung at a bad pitch in Little League, he'd make me run wind sprints when I got home. It was always, I could've done better. But maybe if he wasn't hard on me, I would've gone down the wrong path. He always said, 'Do what I say, not what I do."                                                                                                                                          

   -Rick Ankiel, on his father


14세가 되던 해, 어린 Ankiel은 야구를 그만두고 그냥 친구들처럼 서핑이나 낚시를 하면서 놀고 싶다고 얘기했으나, 이런 푸념을 들어줄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들이 "나는 어차피 메이저리그에 갈 재능은 안되요" 라고 하자 "If you love the game, good things will happen." 이라며 정말 무식하게 아들을 몰아붙였다. 10학년 때, 될성부른 떡잎이라면 지금쯤 고교 야구를 씹어먹고 있어야 할 그 시기에 Ankiel의 패스트볼 구속은 84마일이었다. 야구팀 코치 Messina는 "필드 밖에서 정말 훌륭한 아이지만 그다지 Exceptional 한 선수인지는 모르겠다" 라고 Ankiel을 표현했다. 

Ankiel 이 11학년 때, 갑자기 키가 급성장하면서 몸집이 커졌다. 꼬마였던 Ankiel이 6피트가 넘는 키에서 특유의 다이내믹한 투구폼으로 패스트볼을 꽂자 92마일이 넘게 찍혔다. 무브먼트도 장난이 아니었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모인 한 경기에서 Ankiel은 첫 15타자 중 14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이제야 뭔가 희망이 보였다. 그 경기 이후 Ankiel이 던지는 경기마다 스카우트들이 몰려서 구속을 측정했다. 아버지가 말한 "Good things will happen" 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아버지의 강압에 못이겨 어쩔 수 없이 야구를 지속했지만 자신의 재능에 대해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Ankiel은 순식간에 그 지역의 자랑으로 떠올랐다. 에이전트 Scott Boras와 계약한 것도 이맘때였다. 한때 Ankiel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던 코치들은 스위치히터였던 Ankiel이 혹시라도 왼팔에 HBP를 당할까봐 이제부터 우타석에 서지 말라고 했다. 가장 좋아했던 것은 아버지였다. 아들이 던지는 경기마다 그의 아버지는 관중석이 아닌 포수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커브를 던져라" "직구를 던져라" Game-Calling을 했다. 한번은 6회까지 노히트를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Throw him the funk!" 라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Ankiel은 그 말을 듣고 너클볼 (Funk가 Knuckleball 이라고 한다) 을 던졌으나 홈런을 맞았다. 

코치들은 동네 깡패 / 건달 같은 Rick의 아버지가 와서 시끄럽게 구는 것도 모자라 팀 에이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못마땅했으나, 또 한편으로는 Ankiel의 아버지였기에 쉽게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아들 Ankiel은 이런 와중에서도 삼자범퇴로 이닝을 끝낼 때는 혹시라도 칭찬을 들을까 해서 어머니가 앉아있는 관중석보다는 백스톱 뒤의 아버지를 흘깃흘깃 쳐다보며 마운드를 내려왔다.  

1997년, 고등학교 마지막 야구시즌이 끝나고 Rick Ankiel은 USA Today 선정 올 해의 고교 선수 (High School Player of the Year) 로 선정되었다. 그의 마지막 고교 시즌 성적은 11승 1패 평균자책 0.47, 74이닝 162탈삼진이었다. 


배우 Zach Efron을 닮았다는 의견도 있다.

1997년 드래프트에서 Ankiel을 2라운드 20픽, 전체 72번으로 뽑은 Cardinals가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접근해왔다. 2년 전만 해도 Ankiel은 University of Miami 진학이 최종 목표였으나, 패스트볼 구속과 함께 그의 기대치도 높아진 상황이었다. Scott Boras는 Ankiel이 마치 당장이라도 Miami 대학에 진학할 것처럼 Letter of Intent를 작성해 Cardinals의 애를 태웠고, 결국 $2.5M의 계약금을 받으며 계약한다. 프로 데뷔 전에 받는 계약금으로는 당시 역대 5위에 랭크되는 정도의 큰 규모였다. 

Ankiel과 계약이 성사된 후, Cardinals는 아직 고등학생에 불과한 Ankiel을 홈 구장으로 불러 클럽 하우스를 구경시켜주고, 그의 이름이 적힌 유니폼을 선사했다. 그리고 그가 곧 서게 될 Busch Stadium 마운드에 서서 공을 던지게 했다. Tony La Russa, Dave Duncan은 물론 프론트 직원들부터 구장 잔디 관리인들까지 다들 나와서 이 열 여덟살 짜리 투수가 시범 피칭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포수의 미트에 공이 Pop! 하고 꽂히며 모두들 그의 구위에 경악했다. 95마일의 구속도 구속이었지만, 부드러운 투구폼과 플레이트 근처에서의 매서운 무브먼트, 그리고 우타자 바깥쪽 낮게 떨어지는 싱커는 이미 아마추어 수준이 아니었다. 그 날부터 Ankiel은 Cardinals의 금송아지였다.

"They got excited because a lefty like that comes up once in a millenium. He was the real deal, and the world, the entire world, was Rick Ankiel's, blowing away the game with that arm born and bred in the Florida sun, able to do whatever he wanted to do whevnever he wanted to do it and nothing more Wild West in all of sports, a pitcher on a mound simply blessed with it."

 -Excerpt from 3 Nights in August, page 77

Rick Ankiel's Minor League Track Record

YearAgeTmLgLevWLERAGSCGSHOIPHERHRBBSOHBPWPWHIPHR/9BB/9SO/9SO/BB
1998182 Teams2 LgsA+-A1262.632810161.01064785022214110.9690.42.812.44.44
199818PeoriaMIDWA302.0670035.015801241210.7710.03.110.53.42
199818Prince WilliamCARLA+962.792110126.0913983818112101.0240.62.712.94.76
1999192 Teams2 LgsAAA-AA1332.352411137.29836962194961.1620.64.112.73.13
199919ArkansasTLAA600.9181149.125521675200.8310.42.913.74.69
199919MemphisPCLAAA733.16160088.17331746119761.3470.74.712.12.59

Ankiel의 마이너리그 시절은 그다지 언급할 부분이 없다. 너무 짧았고, 너무 일방적이었다. 흔히 말하는 "마이너리그에서 스스로를 다듬는 시간들" "교정" "세련" 이런 단어들은 Ankiel의 사전에 없었다. 그냥 Ankiel은 있는 그대로 압도적이었다. 첫 프로팀이었던 Peoria를 단 7경기만에 졸업. 이후 나머지 시즌은 A+ 레벨에서 126이닝 181탈삼진을 기록한다. 1999시즌은 AA레벨의 Arkansas에서 출발했는데, 8경기 49.1이닝 5실점이었다. AAA로 안보내기도 힘든 성적이다. 넘어져봐야 일어날 줄도 아는데, Ankiel은 차마 넘어질까 하는 우려를 표시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빠르게 달려나가고 있었다. 

보통 프로에 첫 입문해 고달픈 마이너리그 생활을 시작하는 어린 선수들, 특히 대학을 맛보지 않고 프로로 직행한 고졸 선수들은 고향과 가족,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정신적으로 힘들어하게 마련이다. 강압적이었던 아버지와 결코 행복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일까. Ankiel은 집을 떠나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마냥 즐거웠다. 매 경기 사람들은 그의 놀라운 구위에 감탄과 칭찬을 연발했고, 함께 마이너리그에 입문한 1라운더 Adam Kennedy 등 동료 선수들도 그저 Ankiel에게 좋은 말밖에 해주질 않았다. 

Cardinals는 Ankiel의 어마어마한 성장 속도에 불안함을 느꼈고, 이에 경기당 투구수 100개의 제한을 두었다. 마이너리그 투수코치들은 Ankiel에게 팔꿈치에 무리가 가는 슬라이더를 가르쳐주면 안된다는 지령을 받았고, 이런 정도의 관심을 받는 투수를 함부로 조련하려고 하는 코치들은 아무도 없었다. Ankiel이 혹시라도 어이없는 폭투 (마이너리그 성적에서도 유난히 폭투가 많은 것을 보실 수 있다)를 던진 뒤 자문을 구하면, 코치들은 "그냥 하던대로 해라 잘하고 있으니" 라며 넘겼다. Ankiel이 답답해서 재차 물어보면 그들은 "우린 널 건드리면 안돼" ('I'm not allowed to mess with you") 라고 대답했고, Ankiel은 그제서야 자신을 향한 구단의 특별대우의 이면에 그림자가 있음을 알게 되지만, 19살의 Ankiel이 그렇다고 질주를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해 그는 마이너리그 탈삼진 1위 타이틀과 함께 Player of the Year 상을 수상했고, 올스타전에 선발로 등판했다. 1999시즌을 앞두고 Baseball America 는 Ankiel을 전미 유망주 랭킹 2위에 올랐다.

마이너리그에서 어떤 조련도 받지 않은 Ankiel은 키가 조금 더 컸을 뿐이지 사실상 Port St. Lucie 고등학교 시절과 투수로써의 기량이 거의 다를 바가 없는 상태에서 메이저리그 콜업을 받는다.

"If you've got a race car that's leading the Daytona 500, you don't bring it in for a tune-up. All we did was fine-tune a couple of things with his motion, but nothing major. We have a pitch count for all pitchers in the minor leagues."

-Mike Jorgensen, the Cardinals' director of player development (1999)


Pitching Mechanic

유일하게 아버지 Ankiel이 아들 Ankiel에게 전수한 것들 중 좋은 것이 있다면 바로 그의 투구폼인데, 사실 이 부분도 따져보면 악영향이 더 크다. Ankiel이 성공 가도를 달리던 시절에도 그의 제구는 결코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 (2000시즌 BB/9 = 4.63, 1999시즌 BB/9= 4.1), 이는 그의 딜리버리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간지가 나는 딜리버리 치고 문제없는 경우를 거의 못보지 않았는가. Ankiel 역시 마찬가지이다. 위 Ankiel의 투구폼 사진을 참조하시면, Ankiel은 투구시 앞발 (Front-foot, 즉 오른발) 보다 머리가 먼저 타자쪽으로 나가는 (Out), 소위 Out-in-front 증상을 보이고 있으며, 이 증상은 Tim Lincecum에게도 종종 볼 수 있다. 몸은 아직 준비가 안되어 있는데 머리가 먼저 예전 Okajima 마냥 3루 쪽으로 가고 있으니, 당연히 Pitching Arm이 앞으로 차근차근 나오지 못하고 급작스럽게 나오게 되고 릴리즈 포인트가 굉장히 높아진다. 무게 중심의 이동이 부드럽지 못하니 팔꿈치, 어깨에 무리가 가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릴리즈 포인트가 너무 앞에서 형성되거나 높이 형성되면서 포수 머리 위, 혹은 바닥에 패대기 치는 듯한 공이 나올 수밖에 없다. 실제로 마이너리그에서나 빅 리그 데뷔 이후에나 Ankiel은 릴리즈포인트가 흔들릴 경우 포수 머리 위로 던지는 폭투의 비율이 다른 투수들에 비해 월등히 높았는데, (Ankiel 본인도 인정한 부분이다) 이는 부드러운 듯 보이지만 사실은 팔 스윙이 너무 급작스럽게 이뤄지는 그의 투구폼 탓이 컸다. 

설령 포스트시즌에서의 Melt-down이 없었더라도 이런 투구폼으로 그가 롱런을 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으며, 필자도 동의하는 부분이다. 피칭 메카닉에 대한 심도있는 이해가 바탕이 된 코치들이 용기있게 쓴 소리를 해주었다면 Ankiel의 데뷔가 좀 늦어질 지 언정 조금 더 투수로 오래 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Call-Up

"최대한 그에게 압박을 주지 않으며 천천히 콜업할 것" 이라는 한 구단 관계자의 말이 무색하게 Ankiel은 1999년 8월 23일, 만 20세의 나이로 ML 마운드를 밟았고, Adrian Beltre를 제치고 리그 최연소 선수로 등재된다 (2위는 벨트레). 데뷔전 상대는 묘하게 외인구단 느낌을 주던 추억의 팀 Expos 였는데, 선발로 등판한 그는 괴수(V. Guerrero) 에게 솔로홈런을 허용하긴 했으나 5이닝 5피안타 3실점으로 무난히 데뷔전을 마쳤고, 이후 4차례 정도 더 선발 등판을 한 뒤 불펜에서 시즌을 마감했다. 평균자책 3.27에 33이닝 39탈삼진. 약간의 제구불안이 있긴 했지만 선발 로테이션에 들어가기에 충분히 합격점인 투구였다. 

아들 Ankiel이 찬란하게 데뷔하던 이 시기, 아버지 Ankiel은 다시 한 번 체포당했다. Florida에서 멀지 않은 섬나라 Bahamas의 마약 밀매단과 연계되어 있던 Ankiel의 아버지는 마리화나와 코카인을 (미국 시장에 유포할 목적으로) 소지한 혐의로 1999년 시즌 도중에 검찰에 기소되었다. 이 때 최대 80년형의 징역과 $4M의 벌금형을 선고받게 되면서 Ankiel의 어머니는 남편과 이혼하게 된다. 이제 막 피어나려는 20살짜리 어린 투수에게, 그것도 전미 최고의 유망주 투수의 아버지가 State도 아니고 연방 검찰에 구속되었으니 언론이 가만 있지를 많았다. 

슬프게도 Ankiel은 이런 관심들이 익숙했다. 마운드에서 본인이 흔들리지 않으면 이런 일들은 결국 지나갈 것이라는게 Ankiel의 비정상적으로 강인한 정신력이었다. 자라는 내내 "너의 아버지는 뭐하는 분이시니?" "왜 너네 집 앞에는 경찰차가 와있니?" 같은 질문들에 익숙해져있던 Ankiel은 아버지의 옥살이와 부모님의 이혼, 가족의 분열 (형과 누나도 뿔뿔히 흩어졌다) 을 그저 삼켜버렸다. 가슴 복받치는 자신의 풀타임 첫 정규시즌 개막전을 한 달 여 앞둔 2000년 3월, Ankiel은 아버지 Ankiel의 재판을 위해 Florida 연방 법원에 출두해서 그의 아버지가 징역 6년형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한 달 후, 4만여 관중 앞에서 당당히 Cardinals 로테이션의 일원으로 선발 등판을 했다. 아버지와 가족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어린 투수답지 않게, 마운드 위에서 Ankiel은 흔들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재능있는 투수들 특유의 보기좋은 건방진 아우라까지 풍겼다.

씁쓸하게도 "마운드 위에서 감정을 컨트롤하라" 는 그의 아버지가 Ankiel을 코치하면서 가장 강조하던 부분이었다. 


2000년 NL Central 우승을 확정 짓고.

2000시즌

드디어 정식 발매된 Ankiel의 황금팔은 확실히 강력했다. Ankiel은 시즌 첫 선발 등판 Brewers전에서 6이닝 10K 2실점 승리를 따내면서 쾌조의 출발을 했고, Coors Field에서 3피홈런을 맞으며 주춤했으나 이후 Padres전 5이닝 무실점, Brewers 전 7이닝 무실점을 잇따라 승리투수가 되었다. 5월 13일에는 한국 야구팬들에게 잘 알려진 박찬호와의 맞대결을 펼쳤는데, 당시 박찬호가 워낙 잘 던져서 (8이닝 1실점 12K) 묻히긴 했지만 7이닝동안 무려 118구를 던지면서 4피안타 9K 무실점을 기록한 Ankiel 역시 칭찬받을만 했다. (언론은 앞날이 창창한 두 젊은 투수들의 Pitcher's Duel로 관심을 모았으나, 사실 정말 관심가는 부분은 나란히 고질적 제구 불안병을 앓고 있는 두 투수가 도대체 몇 구나 던질 것인지였다.)

Ankiel의 구위는 베테랑 포수 Mike Matheny와의 호흡이 부드러워지면서 더더욱 강화되었다. 어린 투수들의 응석을 받아주지 않던 Matheny는 구위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부족했던 Ankiel에게 딱 맞는 포수였다. 그는 리그 내에서 가장 뛰어난 블로킹 능력을 지녔기에 Ankiel의 제구 불안 데미지를 최소화 할 수 있었고, Ankiel의 구위와 구질에 대해서 투수 본인보다 훨씬 뛰어난 이해도를 지니고 있었다. 5월 7일 Reds전에서 Ankiel이 5이닝만에 볼넷 4개 폭투 4개를 기록하며 유난히 "Wild' 했던 날, Matheny는 플레이프 앞에서 흙을 튀기는Ankiel의 원바운드 공들을 전부 막아내고 마운드에 올라가 "내가 다 막을 테니 넌 똑바로 던지기만 해라" 라고 말했다. 다음 경기에서 Ankiel은 Matheny의 리드를 그대로 따르며 7이닝 무실점을 기록한다 (박찬호 경기.) 이어서 6월 20일, Ankiel은 당시 Jeff Kent와 Barry Bonds를 위시한 Giants 강타선을 상대로 6이닝 8K 2실점의 압도적인 피칭을 하고 승리투수가 된다. 당시 Giants 감독이었던 Dusty Baker는 "저런 20살 짜리는 흔하지 않다. 20살에 저 정도라면 앞으론 대체 뭘 이루려고 하는가" 며 상대팀 신인을 칭찬했다.

Ankiel의 피칭 레퍼토리는 93-95마일의 패스트볼, 그리고 88~90마일에서 형성되었던 싱커, 그리고 마이너리그에서 수많은 탈삼진을 솎아내게 해준 그의 플러스 커브였다. 특히 우타자들은 5마일의 구속 차이와 함께 탁월한 무브먼트를 동반한 그의 싱커에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으며, 어느 카운트에서나 낙차 큰 커브가 아웃피치로 들어올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Ankiel 공략을 굉장히 힘겨워했다. (2000시즌 우타자 상대 피안타율 .213) TLR은 Ankiel이 장기적으로 체인지업만 장착한다면 리그를 오랜 기간 지배할 선수라고 표현했고, 이는 결코 과찬이 아니었다.

정규시즌 후반기, Ankiel을 제외하면 대부분 노땅들로 채워진 Cardinals 로테이션은 슬슬 힘에 부쳐하기 시작했다. 팀내 최고령 투수이자 6'6피트의 장신이었던 Andy Benes는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후반기 컨디션이 이미 정상이 아니었고, 노장 Pat Hentgen는 8월이 되자 체력적인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Garret Stephenson 는 8월달에 혼자 4승 평균자책 2.63을 기록했으나 9월달이 되자 피로 누적으로 차차 구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정규시즌 마지막 한 달간, 사실상 Cardinals 로테이션은 Darryl Kile-Rick Ankiel 두 투수가 이끌기 시작했다.  그리고 Ankiel 은 신인답지 않게 시즌이 진행될수록 더 구위와 제구가 나아지며 구단의 기대에 부응했다. 그는 최종 7경기에서 4승 무패 평균자책 1.97. 45.2이닝 54탈삼진을 기록했고 이 기간동안 팀은 6경기를 이겼다. (평균 103구, 경기당 6.2이닝). 

정규시즌 종료 후 Ankiel의 성적은 11승 7패 평균자책 3.50, 175이닝 194K. 신인왕 투표에서 그는 Braves의 Rafael Furcal에 이어서 2위에 올랐다. 만 20세 시즌에 규정이닝을 소화하면서 K/9이 9.0을 넘었던 투수는 (그 때까지) 역사상 단 2명에 불과했다. (1984년 Dwight Gooden, 2000년 Rick Ankiel)

Ankiel's Last 5 Games (2000)

DateOppIPHRERBBSOERAPitStrStLStSGBFB
SeptemberOppIPHRERBBSOERAPitStrStLStSGBFB
Sep 3NYM7.0211583.801116622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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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01378068901943.50


순식간에 조롱거리로 전락하기에 그의 재능은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그 날 (2000년 10월 3일) - NLDS Game 1

Atlanta Braves와의 NLDS를 앞둔 상황, TLR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5인 로테이션에서 건강한 투수는 20승을 올린 에이스 Kile와 약관의 신인 Ankiel 달랑 2명 뿐이었고, 이들에게 많은 경기를 맡기고 싶어하는 것은 5전3승제 단기전을 앞두고 감독으로써 당연한 어프로치였다. 게다가 Ankiel은 4일 휴식을 줘야했지만 Darryl Kile은 3일 휴식으로 등판할 수 있었다. 즉 (정상적인 로테이션 순서대로) Kile이 1차전, Ankiel이 2차전을 던질 경우 Ankiel은 시리즈에 한 번 밖에 나올 수 없지만, Kile이 2차전을 던지고 Ankiel이 1차전을 던지게 된다면 이 시리즈에서 두 투수를 2번 쓸 수 있다는 소리였다. 정규시즌 마지막 한 달간 Ankiel 이 보여준 모습까지 감안했을 때, TLR의 결정은 "도박" 이라고 불리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TLR은 전국에 중계되는 첫 포스트시즌 선발이 이 젊은 투수에게 어떤 중압감으로 다가올 지에 대해 충분히 경계하고 있었다. 게다가 상대 투수는 지난 10년간 리그를 지배했던 베테랑 Greg Maddux. 호들갑을 떨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시리즈가 시작하기 전날, TLR은 불펜 피칭을 하고 나오는 Ankiel을 재빨리 언론 접촉없이 클럽하우스에서 내보냈다.  그리고 베테랑 투수 Kile에게 인터뷰실로 들어가서 마치 그가 당연히 1차전을 던지는 양 언론을 상대하도록 했다. Kile은 당시 기자들의 질문에 충실히 대답하면서도 단 한 차례도 자신이 1차전에 던질 것이라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언론에서도 이미 Kile이 1차전을 던질 것이라는 게 너무 당연했기에 물어보지 않은 것이다. 인터뷰가 다 끝나고 미디어팀이 철수하자 그제서야 TLR은 1차전 선발이 Ankiel임을 발표했다. 수많은 리포터들이 그 날 TLR에게 얼마나 욕을 퍼부었을지 자명하다.

TLR의 머릿속이 복잡한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NLDS가 열리기 며칠 전인 9월 28일, Darryl Kile의 정규시즌 20승 경기가 있었던 바로 그 날, 주전 포수 Mike Matheny가 생일 선물로 받은 사냥용 칼 (Hunting Knife) 을 잘못 놀려 자기 손을 크게 베어버리고 만 것이다. (MM의 생일은 9월 22일이다.) 이 부상으로 인해 정규시즌 잔여 경기는 물론 Matheny의 플레이오프 출장 기회도 날아가버렸다. 투수 리드와 호흡에 있어서 Ankiel에게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짝꿍이던 Matheny가 결장한 것도 문제였지만, 제구가 불안한 Ankiel과 등 부상으로 인해 활동폭이 좁던 포수 Carlos Hernandez의 조합은 결코 이상적이지 않았다. 


Hernandez가 아닌 Matheny였다면, 뭔가 달랐을까?


Braves와의 1차전이 시작했고, 마운드에 Ankiel이 올랐다. 1회 2사 후 Chipper Jones와 Andres Galarraga에게 연속 볼넷을 허용했지만 Brian Jordan을 파울 플라이로 잡아내면서 무실점. 주자를 3명이나 허용하긴 했으나 뭐 경기 초반 Ankiel의 제구 난조가 그다지 특별할 일은 없었다. 오히려 1회말 Cards 타선이 Maddux를 상대로 타자일순하며 6득점한게 더 신기할 일이었다. TLR은 훗날 이 날 Maddux를 상대로 뽑아낸 6득점은 "말도 안되는 숫자 ("Crooked Number") 라고 회상했다.

2회에도 Reggie Sanders를 삼진으로 잡으면서 시작한 Ankiel은 무실점으로 무사히 이닝을 마쳤다. 그리고 마의 3회... 

Score Out RoB Pit(cnt) R/O @Bat Batter Pitcher wWPA wWE Play Description
0-6 0 --- 4,(3-0)  ATL G. Maddux R. Ankiel -2% 91% Walk
0-6 0 1-- 4,(1-2)  O ATL R. Furcal R. Ankiel 2% 93% Foul Flyball: 1B
0-6 1 1-- 2,(0-1)  ATL A. Jones R. Ankiel -0% 92% Wild Pitch; Maddux to 2B
0-6 1 -2- 4,(2-1)  ATL A. Jones R. Ankiel -1% 92% Wild Pitch; Maddux to 3B
0-6 1 --3 5,(3-1)  ATL A. Jones R. Ankiel -2% 90% Walk
0-6 1 1-3 5,(2-2)  ATL C. Jones R. Ankiel -1% 89% Wild Pitch; Jones to 2B
0-6 1 -23 7,(3-2)  O ATL C. Jones R. Ankiel 3% 93% Strikeout Looking
0-6 2 -23 7,(3-2)  R ATL A. Galarraga R. Ankiel -3% 90% Walk; Maddux Scores/Wild Pitch; Jones to 3B
1-6 2 1-3 1,(0-0)  R ATL B. Jordan R. Ankiel -4% 85% Single to LF; Jones Scores; Galarraga to 2B
2-6 2 12- 3,(1-1)  ATL R. Sanders R. Ankiel -1% 84% Wild Pitch; Galarraga to 3B; Jordan to 2B
2-6 2 -23 5,(3-1)  ATL R. Sanders R. Ankiel -1% 82% Walk
2-6 2 123 2,(0-1)  RR ATL W. Weiss R. Ankiel -12% 71% Single to LF; Galarraga Scores; Jordan Scores; Sanders to 2B
Provided by Baseball-Reference.com: View Original Table
Generated 2/6/2014.

강판된 후 덕아웃으로 돌아온 Ankiel에게 아무도 위로의 말을 쉽게 건내지 못했다. Ankiel은 Andy Benes에게 다가가 "A joke. You've got to laugh." 라며 자신이 저질러놓고도 도대체 믿을 수가 없는 이 상황에 허탈해했다. 이 때만해도 Ankiel의 투수로써의 커리어가 이 경기를 기점으로 사실상 재생 불가능 상황이 될 것이라고 상상한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Mets와의 NLCS를 앞두고 Ankiel은 자신의 문제가 투구폼 관련된 Mechanical한 문제라며 이제 해결책을 찾았다고 이야기했다. NLCS 2차전에 Ankiel이 등판했고, 초구 91마일 패스트볼이 상대 타자 Timo Perez의 머리를 향했다 (Perez는 가까스로 피했다). 삼진-볼넷-폭투-볼넷-희생플라이-볼넷-2루타. 20구 중 5개가 포수 뒤로 날아갔다. Duncan 은 볼만큼 봤다고 생각했는지 Ankiel을 내렸는데, 질책성이라기보다는 보호 차원의 강판이었다. Duncan은 경기 후 지금 Ankiel에게 필요한 것은 쉽게 한 이닝을 던지고 감을 회복하는 것 ( "have a nice easy inning and probably get back on track") 이라고 얘기했고, Low-leverage 상황에서 Ankiel을 등판시켜 감각을 회복하도록 도와주기로 한다. 시리즈 최종전인 NLCS 5차전 7회, 0:6으로 크게 뒤져 있던 상황에서 Ankiel이 올라왔다. 볼넷-번트-삼진-폭투-폭투-볼넷. 

시리즈가 끝난 후 Rick Ankiel은 감옥에 있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경기를 본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쳤냐고 물어봤고, 아들은 괜찮다고 대답하자 이에 "아니 그럼 대체 뭐하는 짓이야!" 라고 말했다. 이 경기를 TV로 지겨보던 Ankiel의 고등학교 팀 투수코치 Charlie Frazier는 "Ankiel에게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Mechanical한 문제들이 많았으며, 딜리버리 막판의 Follow-Through 단계에서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며 어이없어했다. 동영상을 보시면 릴리즈 포인트에 신경을 쓰고 있던 Ankiel 의 상체가 부자연스럽게 거의 직선으로 서있는 모습을 보실 수 있다. 동영상 링크 


그 날이 있던 후 Ankiel이 웃고 있는 사진을 찾는 것은 굉장히 힘들어졌다.


"I never saw him lose his motion like that before. I saw mechanical flaws. He was throwing across his body; he was standing up in his follow-through. I asked him what his pitching coaches told him. He said, "They don't tell me anything!"

-Charlie Frazier, Ankiel's high-school pitching coach

NLCS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Ankiel에게 Boras가 연락이 왔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Florida를 떠난 적이 없는 Ankiel에게 그는 "지금 당장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캘리포니아로 떠나라"고 설득했다. 다른 곳에 가서 머리를 식히라는 것 빼고는 딱히 어떤 이유가 있지는 않았다. Boras는 Ankiel에게 "모든 것을 그대로 놔두고 그냥 떠나라. 내가 도와주겠다" 고 했다. Ankiel은 잠시 Florida 집에 들려 짐을 싼 뒤 그 길로 Boras의 사무실이 있던 캘리포니아 Newport Beach로 떠났다. 마이너리그 때부터 같이 올라온 드래프트 동기 Adam Kennedy (당시 Angels로 이미 옮겨가있던) 가 기꺼이 숙소를 제공했다. 둘은 야구 관련된 일은 일체 하지 않았으며, 바닷가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했다. Ankiel은 이 기간 동안 자신의 멘토이기도 했던 Darryl Kile과만 꾸준히 연락했을 뿐 은둔한 상태로 5주를 보냈다. 

5주간의 휴식이 지나고 12월 중순 Ankiel이 Florida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의 연락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스포츠 심리학계의 거장인 Harvey Dorfman 박사였다. Dorfman은 3일간 심도있게 Ankiel의 어린 시절과 그를 둘러싼 공포들, 무의식을 분석하기 위해 상담했다. Dorfman 박사와 Ankiel의 두터운 관계는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there's a lot of things in his life that could have triggered what happened in the playoffs. You're raised in that kind of environment, anything can happen. He's a very sensitive guy, and he had to be mature awfully quick. These things can have a very calamitous potential . I've seen it happen to other players where it became career threatening. So the best thing we can do is listen, understand and cover all of the possibilities."        

-Scott Boras, on Rick Ankiel's recovery (2001)

2001년 4월 8일, Ankiel은 Chase Field 원정에서 Randy Johnson과 D-Backs 라인업을 상대로 시즌 첫 등판을 치루었다. 1회 Matt Williams에게 투런 홈런을 맞았으며, 제구불안 문제도 여전했다. 그러나 전반적인 구위에 있어서 만큼은 Ankiel은 예전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5회에는 세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기세등등했고, 6회에 투구수 100개를 채우고 강판되었다. 5이닝 3피안타 3볼넷 2실점 8탈삼진. Cardinals는 Big Unit을 상대로 홈런 3개 포함 11안타를 쳤다. 9:4 승리. Ankiel의 커리어 마지막 선발승이었다. 

그러나 이 경기 이후 Ankiel 이 보여준 모습은 2000년 플레이오프와 비슷했다. 도저히 봐주기가 힘들 정도로 아무데로나 가는 공들. 잦은 폭투. 24이닝에서 볼넷 25개, 폭투 5개, 사사구 3개. 2001년 5월 홈에서 Pirates 상대로 등판한 Ankiel은 Pat Meares를 상대로 다시 포수 뒤 스크린에다가 공을 던졌다. Duncan이 올라오자 Ankiel은 고개를 떨구었다.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Cardinals 구단 측에서는 Ankiel의 커리어를 "리셋" 하겠다는 의도로 그를 루키리그로 보냈고, 세간의 관심이 없는 이 곳에서 Ankiel은 신기할만큼 빠르게 영점을 잡았다. 그리고 제구가 되는 이상 ML에서 이닝당 한 개 이상의 삼진을 잡아내던 Ankiel의 구위는 루키리그 타자들이 건드릴만한 것이 아니었다. 14경기에서 87.2이닝동안 탈삼진 158개 (K/9 = 16.2) 평균자책 1.33. 이 정도면 괜찮다 싶어서 Memphis로 승격시키자 다시 병이 도졌다. 4.1이닝동안 3피안타, 17볼넷, 10실점, 폭투 12개. 공이 미친듯이 백스톱 뒤로 날아가자 상대적으로 작은 마이너리그 구장에서 관중들의 웃음소리가 Ankiel의 귀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2004년, TJS를 받고 돌아온 Ankiel에게 아직도 Cardinals는 희망을 놓지 않고 않았다. A+ 볼에서 시즌을 시작한 Ankiel은 3차례의 선발 등판에서 8.2이닝 0볼넷 11탈삼진을 기록했고, AA볼로 승격된 이후에는 2경기에 걸쳐 9이닝 3피안타 1실점 2볼넷을 기록했다. 이어서 Memphis로 올라와서 선발 등판한 경기에서는 6이닝 1피안타 1실점. 역시 볼넷은 없었다. "그 날" 이 있기 전에도 Ankiel이 마이너리그에서 이렇게까지 좋은 제구력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드라마틱한 부활이 가시권에 있었다.

2004년 9월 7일, Ankiel이 무려 3년 6개월만에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섰다. 1이닝 무실점. 15구 중 12구가 스트라이크였다. 4일 후 Dodgers 전에 다시 구원등판한 그는 19구 중 14구를 스트라이크 존에 꽂았다. 9월 19일에는 재앙이 시작되었던 Busch Stadium 마운드에 참으로 오랜만에 섰고, 관중들은 돌아온 Ankiel을 기립박수로 환영했다. 2이닝 4K 무실점. 5차례의 등판에서 10이닝을 던지는동안 Ankiel은 삼진 9개를 잡고 볼넷은 Chad Tracy에게 내준 한 개가 유일했다. 구속은 3년 전 그의 모습에 비해 확실히 떨어진 90마일 선에 그쳤으나, 커브는 여전히 리그 정상급 낙차를 보였고, 싱커도 여전했다. 

2000시즌 이후 제대로 된 정규시즌을 치루어 본 적이 없는 이 투수는 수년 간의 방황에도 불구하고 아직 24세였다. 오프시즌에 그는 Puerto Rico 에서 열린 윈터리그에서 한층 발전된 모습을 보였고, 구단 수뇌부에서는 Matt Morris 의 자리를 Ankiel이 대신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까지 품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간신히 ML에서 통할 수 있는 수준의 상태로 기어올라온 Ankiel은 시뮬레이션 피칭에서 Edmonds, Rolen 등 Cardinals 중심타자들을 배팅 케이지에 세워놓고 다시 한 번 "나는 누구고 여긴 또 어딘가" 식의 붕괴를 겪는다. 23구를 던졌으나 스트라이크는 3개. 원바운드성 폭투는 물론이고 배팅 케이지 밖으로 아예 나가는 공도 여러개였다. 2005년 3월, Ankiel은 "더 이상 던지지 않겠다"며 투수 포기를 선언한다. 

Sandy Koufax의 재림은 신기루였다.

"I just lost it right there on the mound. I don't know what I was thinking. I'd go blank before I'd throw the ball, and then after I'd say to myself, 'How the hell did that happen?' It was definitely weird. I mean, I'd been doing it so many times in my life, and suddenly I can't throw a ball?"

-Rick Ankiel, on his melt-down (2001)


2003년 스프링캠프를 앞두고 Walt Jocketty는 Ankiel의 진로를 결정할 순간을 맞이한다.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에 참여시킨 뒤 이후 마이너리그로 보내서 다시 재활하게 하는 것이 잠재적 방안이었는데, 과연 어느 레벨의 마이너리그로 그를 보내느냐는 정해지지 않았다. TLR의 사무실에 Duncan이 찾아와 Jocketty의 결정을 알리자 TLR이 물었다. "무슨 레벨로 가는지에 대해 우리가 어느 정도의 영향력이 있지?" Duncan 이 대답했다. "뭐 어느 정도 input은 있겠지." TLR은 버스 이동거리가 많은 AA 레벨보다 조금 더 이동이 수월한 Memphis로 Ankiel을 보내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자 Duncan은 Ankiel을 Double-A 레벨의 Tennessee로 보내는 게 좋겠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덧붙였다. 

"He's 23-years old. He should be in Double-A."

(Excerpt from 3 Nights in August, page 82)


(Part II에서 계속)

자료 출처: Hardball Times, New York Times Magazine, USA Today, Palm Beach Post, STL Post-Dispatch, 3 Nights in August, Baseball-Reference, ESPN, Fangrap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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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Doovy

 4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딱 4건의 Major Transaction이 있었던 작년 오프시즌에 이어 올 오프 시즌도 다들 잘 아시다시피 Peralta 계약과 Freese-Bourjos 트레이드, Mark Ellis 영입 이후로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올 시즌은 아주 확고하고도 공공연한 팀의 최대 겨울방학과제인 "유격수 보강" 이 있었기에 필자는 솔직히 약간 설레는 마음으로 오프시즌을 맞이했는데, 너무 일찍 모든 일들이 정리가 되버린 탓에 조금 김이 샌다이에...올 해도 블로그의 간판 이벤트인 유망주 리스트에 이어서, 오프시즌의 지루함을 같이 견뎌보자는 마음에...추억팔이용 TLR ERA 시리즈를 다시 꺼내들어 작년에 미처 다루지 못한 선수들을 돌아보고자 한다.

첫 주인공은 MV3의 일원이자, 여태 필자가 본 최고의 3루수, Scott Rolen이다. 제2의 Mike Schmidt 라는 부담스러운 평을 듣고서 데뷔한 Rolen은 이후 공수에서 리그 최고의 3루수로 거듭났으며, 길고 풍성한 Cardinals 역사에서 1960년대 Ken Boyer 이후 역대 최고 3루수로 꼽히는 데 아무도 이견을 달지 못할 것이다. 

Scott Rolen

3rd Baseman

DOB: 1975년 4월 4일 

Birth: Evansville, Indiana 

Time with Cardinals:  2002-2007

Draft and Minors

고등학교 농구팀 코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Rolen은 농구와 야구를 병행했으며, 두 스포츠 모두에서 대단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Rolen의 농구 선수로써의 자질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는데, 9학년때 고등학교를 입학하자마자 주전 포인트가드로 뛰게 되었음은 물론, 키가 더 큰 이후에는 (6'4, 193cm) 포워드/스윙맨 역할까지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는 선수였다. 졸업학년 당시 Rolen은 Indiana 주에서 뽑는 Mr. Basketball 투표에서 3위에 올랐는데, Rolen이 나온 고등학교가 인구수 1만명을 넘지 못하는 "깡촌'의 작은 시골 공립학교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대단한 업적이다. 

1992년 겨울, Rolen의 Senior 농구시즌이 끝나고 나서 Kentucky, Oklahoma State, Georgia 등 BIG 10 디비전 내의 "농구 좀 한다는" 대학교들이 앞다퉈 Rolen에게 장학금 패키지를 던지기 시작했다. 6피트 4인치의 건장한 프레임과 탁월한 운동신경, 그리고 작전에 대한 출중한 이해도와 우직한 Work Ethic으로 뭉친 Rolen은 NBA 레벨까지는 아니더라도 NCAA에서는 충분히 군침을 흘릴만한 포인트가드였다. 

  


마지막 야구시즌을 앞둔 1993년 초, University of Alabama 와 University of Georgia에서 제시한 농구 장학금을 앞두고 저울질하던 (Rolen의 회고에 따르면 아마 Alabama로 갔을 것이라고 한다) Rolen을 말리는 이가 두 명 있었다. 그 중 하나는 학교의 야구팀 코치였던 Terry Gobert였다. Gobert 코치는 수년간 팀의 에이스 투수이자 유격수였던 Rolen을 12학년 때 갑자기 3루수로 옮겼는데, 그 이유는 상대적으로 공을 더 많이 처리해야하는 유격수에 비해 3루가 어깨/팔꿈치 피로와 부담이 덜하다는 것이었다. 이 작은 시골 고등학교의 야구팀 코치의 현안은 이후 Rolen의 커리어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다른 하나는 Rolen의 재능을 알아본 Phillies의 스카우트 Scott Trcka*였다. Trcka는 Rolen을 1라운더 감으로 구단에 천거했으나, Phillies 측에서는 이미 농구 장학금을 받아놓고 저울질하고 있던 Rolen이 궁극적으로 야구를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Rolen의 부모님이 둘 다 (교육을 우선시하는) 학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점 때문에 Phillies 측에서는 Rolen이 어련히 농구 장학금을 선택하고 대학교로 진학할 것이라 믿었었다. 그러나 Trcka는 Rolen의 부모님과 Phillies 프론트 양측을 진득하게 설득해 Rolen의 마음을 돌렸다.

Rolen이 궁극적으로 농구 대신 야구를 택한 것에는 25만달러라는 큰 액수의 사이닝 보너스가 큰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이유 두 가지가 있었다. 한 가지는 Rolen의 야구에 대한 열정, 그리고 다른 하나는 냉정하게 봤을 때 Rolen같은 6피트 4인치 정도의 언더사이즈 백인 포워드/가드가 웬만한 재능이 아니고서는 NBA의 벽을 두드리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농구를 택할 경우 Rolen의 농구 커리어는 NCAA 레벨 이상은 보장할 수 없으나, 야구를 택하면 확실히 프로에 갈 수 있는 재능이다 - 라는 것이 Trcka의 셀링 포인트였다. 

Rolen이 참가했던 1993년 드래프트***는 유난히 대어가 많았다. Alex Rodriguez, Torii Hunter, Trot Nixon으로 시작해서 여기에 골든 스파이크 수상자이자 이후 당대 최고 수준의 먹튀로 거듭나는 Darren Dreifort 까지...이 정도의 Draft Pool에서 깡촌 Indiana 출신의 고졸 3루수**가 "고졸"이라는 딱지를 넘어서서 1라운더가 된다는 것은 어지간해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당시 고졸 출신들 중 Rolen은 10번째로 드래프트 되었는데, Rolen보다 먼저 뽑힌 고졸 선수들 중 ML에 제대로 정착한 선수들은 Torii Hunter, A-Rod, 그리고 훗날 동료가 되는 Chris Carpenter 뿐이었다. Trcka의 꾸준한 설득에 힘입어 결국 Rolen은 1993년 드래프트 2라운드 전체 46번으로 Phillies에게 지명되었는데, 이 대어들이 넘쳐나는 드래프트에서 전체 46번으로 지명되었다는 것은 당시 Rolen의 재능이 확실히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입단 이후 Rolen은 마이너리그를 한 단계 한 단계 차근차근 씹어먹고 올라왔다. 1994시즌, 프로에서 맞이한 첫 풀시즌에서 그는 .294/.363/.462의 뛰어난 타격 성적은 물론이고, 코치들의 조언을 놀랄만큼 빨리 흡수하며 순식간에 Top Prospect로 도약했다. 1995년 A+ 레벨의 Clearwater에서 전반기를 맞이한 그는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OPS .880을 찍더니 후반기에 AA로 승격되었다. 로우레벨 마이너를 Raw Talent 하나로 빠르게 씹어먹고 올라오는 이 고졸 야수 유망주에 필리스는 흥분했다.

당시 91년 드래프트 출신이자 Phillies의 차기 3루수로 Rolen보다 먼저 치고 올라오고 있었던 Rob Grable이란 3루수는 AAA로 승격된 뒤 갑자기 좌익수로 포지션을 변경해야 했다. Rolen의 빠른 성장세를 본 Phillies가 3루를 비워놓고 싶었던 것이다. 1994시즌 직후 BA 선정 유망주 랭킹 Top 100 중 91위였던 Rolen의 순위는 1995시즌이 끝난 이후에는 27위로 올라가 있었다. 고졸 3루수가 루키리그부터 시작해 AAA까지 올라오는데 3년도 걸리지 않았으니, 당시 Phillies 팜의 실정과 Rolen의 확실한 툴을 동시에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Scott Rolen's Minor League Track Record

YearAgeTmLevGPAABRH2B3BHRRBISBCSBBSOBAOBPSLGOPS
199318MartinsvilleRk25988082550012341015.313.429.375.804
199419SpartanburgA138580513831513451472685590.294.363.462.825
199520ClearwaterA+6628323845691321039403746.290.392.487.880
199520ReadingAA20867616223031510714.289.353.447.800
199621ReadingAA612742304483222942833432.361.445.5911.037
199621Scranton/Wilkes-BarreAAA451971682346170219452828.274.376.411.786

 * Trcka 이 양반은 Phillies 구단에서 오랫동안 일한 베테랑 스카우트로, Scott Rolen에 이어 Brett Myers 등을 발굴한 바 있다. 작년부터 Phillies 스카우팅 부서에서 Mid-West Supervisor로 재고용되어 일하고 있다.

**고졸 3루수가 빅 리그에서 3루수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3루는 대체로 Retention Rate (어설픈 번역으로 포지션 유지률? 정도로 해두자) 이 낮은 포지션인데, 1989-2008년까지 20년간의 드래프트에서 Top 100 안에 뽑혔던 고졸 3루수들 중 47%만이 3루수로 빅 리그에 안착했으며, 대졸 3루수의 경우에도 Retention Rate은 60%가 채 되지를 않는다. 많은 경우에 그들은 1루수나 좌익수 등으로 포지션을 바꿔야했다 (Alex Gordon, Ryan Braun, Jason Giambi, Mark Teixeira 등.) Scott Rolen처럼 고졸 3루수로 드래프트되어 3루수로 데뷔하고 은퇴할 때까지 3루수로 뛰는 경우는, Rolen 정도의 클래스가 아니더라고 해도 대단히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이 드래프트에서도 Cardinals는 Low Ceiling/High Floor 대학 출신 우완 Alan Benes를 뽑아갔다. 강산이 정말 두 번 변했을까?



1997-2001: Phillies 의 꿈과 희망

1996년 7월 31일, AAA레벨의 Scranton에서 뛰던 Rolen은 당장 Philadelphia로 내려오라는 "The Call"을 받는다. Cardinals와의 경기가 우천으로 취소되고 다음 날 더블헤더가 잡힌 것이었다. Rolen은 기쁨에 겨워 급히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하필 이 때 Rolen의 부모님은 여름방학을 맞아 멀리 Florida의 아들네 (Rolen의 형) 집에 가 있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Rolen의 어머니 Linda Rolen은 비행기 공포증이 있어서 못 타신다고 한다. 콜업 소식을 들은 Rolen의 부모님은 아들의 데뷔전을 보기 위해 Sarasota 부터 Philadelphia까지 1100마일의 거리를 운전을 해서 올라갔다. Rolen의 부모님은 밤새도록 달렸으나 결국 당신 아들 Scottie가 주전 3루수이자 6번타자로 데뷔전을 가지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으며, 4회말 Cardinals의 투수 Donovan Osborne을 상대로 2루타를 때려내며 첫 안타를 신고하는 모습도 달리는 차 안에서 라디오 중계로 들으며 눈물을 훔쳤다고 한다. (다행히 이 날 경기가 더블헤더라서 이들이 도착한 이후 2차전은 직접 관람했다고 한다.)

이후 Rolen은 꾸준히 기회를 받으면서 더 이상 AAA로 내려가지 않았다. 데뷔 한 지 1달이 가 넘은 1996년 9월 7일, Rolen은 Cubs 투수 Steve Trachsel 의 공에 맞아 팔을 부러지는 바람에 시즌이 끝나버렸는데, 공교롭게도 Rolen이 다친 타석은 "신인 자격 유지"의 마지노선인 130번째 At Bat 이었다. 즉, 다치지 않았더라면 Rolen은 131번째 타석을 갖게 되면서 신인 자격을 상실, 이듬해 Rookie of the Year 투표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아마도 Matt Morris가 신인상을 타지 않았을까 하는 게 필자의 사족이다.)

이후 Rolen의 Phillies 생활은 탄탄대로였다. 1997시즌 새로 부임한 젊은 감독 Terry Francona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스프링 트레이닝부터 Rolen을 주전 3루수로 낙점했다 (사실 기존 3루수 Zeile이 Orioles로 트레이드 됬을 때부터 이 자리는 Rolen의 것이었다). 개막전에서는 6번타자였으나 한 달 후 이미 Rolen은 클린업에 들어가 있었다. 1997시즌 그는 21홈런 92타점 wRC+ 121, OPS .857의 화려한 성적을 거둔 뒤 1위표 14장을 모두 획득하며 만장일치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이제 갓 루키시즌을 마친 이 젊은 3루수에게 Phillies는 4년간 10M짜리 계약을 안겨주며 미래를 약속했고, Rolen 역시 그에 상응하는 디스카운트로 훈훈한 계약을 성사시켰다.

그저 장밋빛으로만 보이는 Rolen의 Phillies 시절 성적 

YearAgeTmGPAABRH2B3BHRRBISBCSBBSOBAOBPSLGOPSOPS+
199621PHI37146130103370418021327.254.322.400.72290
199722PHI15665756193159353219216676138.283.377.469.846121
199823PHI1607116011201744543111014793141.290.391.532.923139
199924PHI11249742174113281267712267114.268.368.525.893120
200025PHI128541483881443262689815199.298.370.551.920129
200126PHI151653554961603912510716574127.289.378.498.876127
200227PHI10043837552972141766525268.259.358.472.830123
PHI (7 yrs)84436433125533880207191505597125426714.282.373.504.877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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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en의 Phillies 시절은 언뜻보면 그저 장밋빛이었다. 2년차이던 1998시즌에는 31홈런 110타점으로 팀의 간판 타자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커리어 첫 골드 글러브 수상 및 MVP 득표에 성공했다. 1999시즌에는 등 부상으로 50경기를 결장하는 Down Year를 보내는 와중에도 26개의 홈런과 .893의 OPS를 유지했다. 이듬해인 2000시즌에는 다시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으며, 2001년에는 다시 100타점 고지를 밟으며 MVP 투표에도 처음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이미 2001시즌 무렵, 훈훈하기만 해보였던 Rolen과 Phillies의 사이의 갈등은 이미 상당히 곪아있었는데, 이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2001시즌: Phillies/Bowa 와의 갈등

Phillies에서의 Scott Rolen은 팀의 현재이자 미래, 그 자체였다. 그는 타석에서 뛰어난 클러치 능력을 발휘했으며, 굉장히 빠른 배트스피드로 많은 라인드라이브 타구들을 양산해냈다. 수비에서는 역대 3루수들 중 가히 최고라고 할만한 Range와 어깨, 그리고 수년간의 농구를 통해 몸에 배어버린 뛰어난 Pivot 능력과 위치선정 센스가 있었다. 특히 그는 오른쪽 방향 움직임이 워낙 빠르고 기민해서 유격수쪽으로 남들보다 더 치우쳐서 수비해도 다른 3루수들보다 더 많은 그라운드를 커버했고, 타구에 대한 빠른 리액션과 정확한 First Step에 관해서 Rolen은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클럽하우스에서 리더 역할이 익숙했던 Rolen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Phillies의 리더로 부상했다. 90년대 후반 Phillies에게 Scott Rolen이란 Braves에게 Chipper Jones가 가지는 의미, 혹은 Mets에게 David Wright가 가지는 의미와 비슷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Phillies 와 Rolen에게 Bobby Cox와 같은 감독이 없었다는 점이다.

"Defensively, he is a shortstop playing third base. He compares favorably to Mike Schmidt at a similar stage in development, and gets to balls that Brooks Robinson never dreamed of reaching. "

-Scouting Report 2002, on Rolen's Defense 

Rolen에게 첫 감독이었던 Terry Francona는 젊고 유능했지만 감독 경험이 일천했고, Phillies처럼 문제가 많은 팀을 맡아서 단기간에 성적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1999시즌에 허접한 투수진에도 불구하고 (팀 FIP 5.05) 타선에 새 얼굴들이 등장하며 무려 77승이나 해냈던 Francona는 결국 2000시즌 Fluke였던 선수들이 제 기량을 찾고 주축 멤버들이 부상에 신음한 끝에 97패를 안고 해고되었다. 오프시즌에 제대로 된 마운드 보강은 하지도 않고 쓸데없이 기대치만 높아져있는 구단 수뇌부는 시즌 중반에 Curt Schilling, Rico Brogna 등을 트레이드 해버리면서 시즌을 포기했다. Rolen은 97패라고 적힌 팀 성적표보다 시즌을 이렇게 포기해버리고 키 플레이어들을 팔아버리는 Phillies 의 운영방침이 실망스러웠다. 

새로 부임한 Larry Bowa는 Scott Rolen와 "물과 기름" 처럼 다른 성격의 사람이었기에 처음부터 팀의 리더인 Rolen과의 관계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Bowa는 야구가 없으면 못사는 천생 야구인인데다가 야구 역사, 야구 기본기에 대해 상당히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야구 말고도 다른 스포츠에서 월등했던 Rolen에게 야구는 생계 수단의 일환일 뿐, 야구를 하지 않을 때는 농구나 골프로 소일했다. 대도시 Philadelphia에서 선수생활을 오래한 Bowa는 다혈질에다가 거침없는 성격이었고, Mid-West 출신의 Rolen은 화려함을 자제하는 행동들이 몸에 배어있었다.

실수나 패배에 대해 굉장히 야박하게 질책했던 Bowa는 선수단을 전혀 장악하지 못했는데, 전반적인 선수들 사이에서의 여론은 "Bowa는 경기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기본기에 빠삭하나, 내가 감독이라면 저렇게 선수들을 대하지 않았을 것" 이라는 비판적인 의견이 대다수였다. 한 Phillies 선수는 인터뷰에서 Bowa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He can manage. He knows baseball. But if we win, it will be just to spite him. Everybody hates him that much." 이는 선수들의 큰 형같은 스타일로 인기가 많았으나 정작 성적을 못내던 전관 Terry Francona와 정반대의 모습이다.

2001시즌, Bowa는 시즌 초반 중심타선의 Abreu와 Rolen이 부진하자 "These guys are killing us" 라며 비난했고, 이에 Rolen도 지지 않고 대들었다. 둘은 6월 Tampa 원정에서 말다툼을 벌였고, 이후 Phillies가 홈스탠드를 위해 필라델피아로 돌아왔을 때 관중들은 Rolen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Phillies 팬들은 팀이 잘 나갈때나 못 나갈때나 야유에 있어서는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관중들 아니던가. 이후 시즌 내내 Rolen의 타율이 떨어질 때마다 Phillies 팬들은 서슴없이 야유를 던졌다.

2001년 8월, Larry Bowa와의 갈등이 있는 와중에 프론트 오피스의 임원급이자 단장 Ed Wade의 Senior 보좌관이었단 Dallas Green이 지역 라디오에 나가서 "Rolen은 그저 그런(So-so) 선수이며, 특히 그의 성격 (Personality) 때문에 스타가 되기 힘들 것" 이라며 친Bowa 발언을 서슴없이 던졌다. 이후 필라델피아 지역 언론의 Beat writer들이 Dallas Green에게 발언을 확인해달라고 하자, Green은 "내가 말한 그대로" 라며 시큰둥하게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Rolen을 이를 듣고 분개했으며, 곧장 Dodgers와의 시리즈에서 11타수 8안타 1홈런으로 맹타를 친 뒤 인터뷰에서 Green의 발언을 빗대 ""I thought I had a so-so series" 라고 받아쳤다.

재미있는 것은 선수시절 Bowa 본인도 Rolen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Phillies에서 데뷔 후 12년간 주전 유격수로 뛰었던 Bowa는 1980년 자기 팀 경기가 시작하기 전에 본인의 라디오 쇼를 직접 방송하며 대놓고 청취자들에게 감독과 동료 선수들은 물론 팬들까지도 Worst Fans in Baseball이라며 질책했었던 바 있다. 이 당시 Bowa가 그렇게도 까대던 Phillies 감독은 다름아닌 Dallas Green이었으며, Bowa를 필두로 한 Phillies 팀은 Green에 대한 불만와 반발심으로 똘똘 뭉쳐 결국 1980년 WS에서 Royals를 꺾고 우승한 바 있다. 이 당시 Dallas Green은 선수단에게 Bowa와 흡사한 이유로 민심을 잃고 있었는데, 21년 후 각자 다른 위치에서 같은 역사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 내에서 탑 5에 드는 빅 마켓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Montreal Expos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팀을 운영하는 모습에 Rolen은 "이 팀이 과연 우승할 생각이 있는 것인가" 하는 류의 발언을 공석에서 하기 시작했다. 2001시즌이 끝난 후, Phillies는 Rolen과의 장기계약을 1순위 과제로 삼고 오프시즌에 들어갔으나 Rolen이 11월에 Phillies의 재계약 협상을 일방적으로 중단하면서 양측의 인연은 슬슬 막바지로 치달았다. Rolen은 2002년 1월에 Phillies와 8.6M짜리 1년 계약을 맺었으며, 2002시즌이 끝나고 나면 FA가 될 것을 선언했다. 그는 또한 "Phillies와 재계약 할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그들이 정말 우승에 관심이 있는지 행동으로 보여줘야할 것" 이라고 말했다. 자린고비 구단으로 보여서 대외 이미지가 나빠질까 우려한 Phillies측에서는 급히 "Rolen에게 우리가 10년간 140M짜리 계약을 오퍼했으나 Rolen이 싫다고 한 것임" 이라며 보도 자료를 내고 그들이 간판 스타를 잡기 위해 얼마를 투자할 "뻔" 했는지를 과시했다. Rolen은 이에 "오퍼는 감사하지만 This is about winning, not money" 라면서 틀어진 마음을 굽히지 않았다.

Phillies 리빌딩의 타이밍도 Rolen에게는 큰 걸림돌이었다. Rolen이 팀 중심에 서게된 1998시즌부터 필리스에는 젊은 야수들이 하나 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Cubs에서 데려온 Doug Glanville은 마치 보급형 Kenny Lofton 처럼 쏠쏠한 리드오프로 활약해주었고, Astros에서 데려온 Bobby Abreu는 1998년을 기점으로 주전으로 발탁, 그의 길고 긴 커리어를 시작했다Rolen과 팜에서 같이 올라온 포수 Mike Lieberthal과 Rico Brogna는 모두 리그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은 선수들이었으며, 대학야구에서 받을 상은 다 받고 올라온 "Pat the Bat" Burrell 까지 승격되 상당히 괜찮은 타선을 구축했었다. 반면 Curt Schilling을 제외하고는 도저히 믿을 구석이 없던 마운드는 답이 없었다. 1997년 Phillies의 팀 ERA는 4.87 에 달했고 (타고투저 시대였다는 점을 감안해도), 이후 2000시즌까지 이 수치는 4.64 --> 4.93 --> 4.79 로 전혀 개선이 되질 않았다. (1997-2001년까지 5년간 Phillies 평균 팀 ERA는 4.68로, 같은 기간 더 안 좋았던 NL 팀은 Pre-Humider 시대의 Rockies와 Cubs 뿐이었다)

즉시전력감 투수라고는 팜을 갓 졸업하고 올라온 Randy Wolf가 고작인 상황에서, Phillies는 투수 보강에 돈을 썼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Phillies는 2004시즌 Citizens Bank Park 개장을 앞두고 모든 전력 보강을 2004년에 포커스를 맞춘 상황에서 하고 있었다. 아직 어린 Bobby Abreu와 장기 계약을 맺고, 팜에서 자란 자체생산 포수 Mike Lieberthal과 연장계약을 맺은 것, 1998년 드래프트 전체 1번 Pat Burrell과 1996년 2라운더였던 Jimmy Rollins, 1995년 2라운더였던 Marlon Anderson을 차세대 코어 플레이어로 낙점하고 키운 것 모두 2004년을 염두에 두고 진행한 움직임이었다. 자체 생산한 Burrell, Rollins, Marlon Anderson 등이 ML레벨에 무사히 안착한다면 Scott Rolen과 함께 리그에서 가장 경쟁력있고 젊은 내야진을 꾸릴 수 있었을 것이며, 이들은 Abreu-Glanville-Lieberthal 등과 함께 상당히 짜임새있는 타선을 구축한다...적어도 이것이 Phillies 단장 Ed Wade가 그린 "2004년 새 구장 개장에 맞춘 Phillies 리빌딩 프로젝트" 의 청사진이었다. 1996년에 루키 시즌을 치른 Rolen으로써는 데뷔 9년차가 되는 2004년에 비로소 팀이 포스트시즌에 도전할 것이라는 명제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Rolen이 저렇게 대놓고 FA가 될 것을 선언하고, 팀의 장기 계약 오퍼를 거절하자 Phillies는 갑자기 급해졌고, Boston에서 열린 윈터미팅에서 Rolen 세일에 들어갔다. 그러나 FA 전 마지막 시즌을 보내고 있던 선수에게 유망주를 마구 퍼줄 팀들은 없었다.


스프링 트레이닝 첫 날, 무성한 트레이드 소문과 구단과의 공개적인 관계 악화 때문에 Rolen은 지역 언론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인터뷰 대상이었다. Phillies 측의 10년간 140M 계약 오퍼를 거절했다는 소문을 확인해주길 바라자, Rolen은 "I am an idiot (for not accepting the offer)" 라면서, Phillies 구단 운영 방침을 무려 45분동안 비난했다. Rolen의 의도는 (1) 사실 140M이라는 거액을 거절하는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2) 그러나 나에게는 돈보다 승리가 중요하다 (3) 나에게 돈을 퍼주느라 다른 선수들을 영입하지 못한다면 이 팀은 절대 이길 수가 없다 는 식의, 상당히 설득력있고 공감가는 말이었다. 비슷한 예로, Oakland의 Jason Giambi 역시 A's에 잔류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되면 팀의 넉넉치 못한 주머니 사정상 Competitive 한 로스터를 유지할 수가 없게 되고, 그래서 Giambi는 Yankees를 선택한 바 있지 않던가.  

 이 일이 있고 며칠 후, Larry Bowa는 Rolen에게 다가가 쓴 소리를 했는데, 하필 이 대화가 언론에게 노출된 상황에서 벌어졌다. Bowa는 말다툼 이후 Ed Wade 당시 필라델피아 단장에게 찾아가 Rolen을 트레이드 해버리라고 말했는데, 이는 요즘같애선 참으로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이 이후 Rolen의 트레이드는 사실상 시간문제였는데, 그에 개의치않고 Rolen은 잔부상 없이 거의 모든 경기를 출장하고 전반기에만 17홈런을 쏘아올리며 첫 올스타에 선정, 자기 할 일을 했다. 

"I don't think I can put a time frame on falling in love with St. Louis. I fell in love with St. Louis probably when I was 7 years old and Mom and Dad brought us here to a ballgame and I got to watch Tommy Herr and Ozzie Smith and Willie McGee and everybody like that.''

-Scott Rolen, on his trade to St. Louis-

2002년: Play Like a Cardinal

2002시즌 Cardinals는 에이스 Darryl Kile의 갑작스런 죽음에 흔들리지 않고 탄탄한 전력을 앞세워 순항하고 있었다. 트레이드 데드라인을 앞둔 7월 28일까지만 해도 Cardinals는 58승 44패 승률 .569로 NL Central 1위를 달리고 있었으며, 2위 Reds와는 5게임, 3위 Astros와는 6게임 차이였다. 트레이드를 통해 전력 보강을 꾀한다면 오히려 투수 쪽 보강이 절실했다. 당시 Woody Williams가 7월 초 부상을 당하면서 결장이 불가피했고, Kile의 비보 이후 Jason Simontacchi라는 그다지 검증안된 신인에게 지나치게 많은 이닝이 돌아가고 있던 참이었다. Jocketty가 7월 19일에 Chuck Finley를 수혈해오면서 (왠지 이 Move는 2009년 Jake Westbrook 영입과 굉장히 흡사하다) Cardinals의 트레이드 데드라인은 그렇게 넘어갈 듯 보였다. 

그러나 Jocketty는 많은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기존 3루수 Polanco에 뜬금 노히터로 주가에 거품이 껴있던 좌완투수 Bud Smith, 그리고 베테랑 릴리버 Mike Timlin을 사용한 패키지로 Phillies와의 인연이 다한 Scott Rolen을 데려오는 강수를 둔다. Jocketty 특유의 뚝심과 배짱, 그리고 적절한 공격성이 돋보이는 이 트레이드 소식에 Marlins 원정을 가고 있던 Cardinals 선수단은 비행기 안에서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이쯤에서 주인장님의 Walt Jocketty 시리즈에 나온 코멘트를 잠깐 돌이켜보도록 하자.

"이 시즌 Jocketty는 정말 올인의 끝을 보여 주는 것 같다. Kile에게 월드시리즈 우승을 헌정하고 싶었던 것일까? Jocketty는 트레이드 마감시한을 앞두고 Scott Rolen을 영입하는 승부수를 던졌는데, 이게 또 훌륭한 트레이드가 되었다. Rolen은 공수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여 남은 두 달 동안 무려 3.3 WAR을 쌓았다. 한편, Phillies의 입장에서는 Bud Smith가 폭망해 버렸으나, Polanco가 상당히 우수한 3루수로 성장하여 그럭저럭 선방한 트레이드가 되었다. (이후 5년간 Rolen은 25 WAR, Polanco는 19 WAR을 기록하였다. 여기에 둘의 연봉 차이까지 감안하면 Phillies도 밑진 것이 별로 없을 정도이다.)

-FreeRedbird, on Scott Rolen trade

Rolen이 Cardinals 유니폼을 입은 후 첫 40타수에서 고작 6안타에 그치고 Cardinals가 7연패에 빠지면서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으나, 이는 그저 "동트기 전 고요함" 에 불과했다. Rolen은 이후 후반기 남은 48경기에서 홈런 14개에 40타점을 쏘아올리며 31홈런 110타점으로 시즌을 마무리했고, 개인 통산 4번째 골드 글러브 수상과 첫 실버 슬러거 수상에 성공했다. 조금 터질만 하면 DL에 오르면서 감질만 나게 하는 J.D. Drew 에게 조금 지쳐가던 이 팀은 Rolen의 합류로 파괴력이 어마어마한 중심타선을 갖게 되었다. Rolen 영입이 확정된 7월말 이후 Cardinals가 올린 성적은 39승 21패에 승률 .658로, 이 기간 동안 Cardinals보다 좋은 성적을 올린 팀은 없었다. 

공격에서 Rolen은 Phillies에서의 마지막 2년간 잦은 등 부상으로 배트 스피드가 나이에 비해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고, 이 때문에 몸쪽 패스트볼 승부에 약한 모습을 노출한 바 있었다. 그러나 St. Louis 로 이적한 후 플레이트에서 살짝 떨어져서 스윙 각도를 바꾸었는데, 교정 후 다시 배트 스피드를 회복하면서 좌우 가리지않고 강한 타구들을 양산해내기 시작했다. 또한 인조잔디를 깔아놓은 Veterans Stadium에서 천연잔디 구장인 Busch로 넘어온 것은 3루에서 High-intensity 플레이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Rolen의 커리어에 대단히 긍정적인 변화였다.

기존 3루수 Polanco도 당시 수비가 나쁜 선수가 아니었으나, Rolen의 3루 수비는 차원이 달랐다. 당시 유격수 Renteria는 Rolen의 수비에 대해 "The guy can cover third AND shortstop" 이라며 혀를 내둘렀는데, Rolen의 Range는 Renteria가 2루 쪽으로 조금 더 붙어서 수비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Up-the-middle 식의 2-유간 빠지는 타구들을 Renteria가 더 쉽게 걷어내도록 해주었다. Renteria 덕에 2루수 Vina 역시 1루 쪽으로 조금 더 붙어서 수비할 수 있었다. Rolen 한 명의 가세로 내야 전체가 혜택을 받는 이러한 모습은 Terry Gopert 코치가 가르치던 Jasper High School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2002시즌, Rolen은 그토록 기다리던 포스트시즌에 올라갔고, 디비전 시리즈 1차전에서 곧 HOF에 올라가실 D-Backs의 장신 좌완투수를 상대로 투런 홈런을 치며 기세등등했다. 그리고 2차전, 1:0로 앞선 7회말 2사 1,2루에서 D-Backs의 Junior Spivey가 3루 쪽으로 땅볼을 굴렸다. 하필 풀 카운트에서 나온 인플레이 타구였기에 2루 주자 Alex Cintron은 진작에 스타트를 끊은 상태였다. 타구 처리중이었던 Rolen에게 Cintron이 충돌했고, 이 과정에서 Rolen은 왼쪽 어깨가 나가버리고 만다. Rolen 왼쪽 어깨의 수난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다.

이렇게 Rolen의 첫 포스트시즌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끝나버렸다. Rolen이 없이 NLCS로 올라간 Cardinals는 할 수 없이 유틸리티맨 Miguel Cairo를 3루에 투입하거나 때론 Pujols를 3루에 넣으면서 버텼고, 특히 Cairo는 NLCS 1차전에서 투런 홈런 포함 3타점을 치는 대활약을 포함해 이 시리즈에서 13타수 5안타를 기록했다. 그러나 결국 2002시즌 Cardinals는 결국 NLCS에서 Giants에게 무릎을 꿇는데, 이 시리즈의 허망함에 대해서는 예전에도 자주 이야기한 바가 있으니 참도록 하겠다.

""I told him once, my happiest day would be if there's a game where 27 groundballs get to third base. The way he plays that position, the way he runs the bases, the way he takes his at-bats, he is a complete player.''

-  Tony La Russa, on Rolen's defensive prowess



오프시즌에 Jocketty는 Rolen에게 8년간 90M의 대형 계약을 안겨주었는데, 이는 여전히 Reasonable Spending으로 기억되는 무브이다. Rolen는 계약 첫 해가 28세 시즌이었고, 이미 리그 최고 3루수로 등극한 선수의 28~35세 시즌을 AAV 12M도 안되는 가격에 쓸 수 있다면 요즘 시세에서는 염가봉사였겠지만, 12년 전 당시 총 페이롤 75M선을 지키고 있던 Cardinals 입장에서 이는 크게 지갑을 연 것이었다. Rolen이 유년기부터 Cardinals/Reds 팬으로 자랐다는 사실은 익히 잘 알려져있는데, 때문에 Rolen은 어느 정도 검증된 전력을 구축한 컨텐더 팀이었던 Cardinals 잔류에 이미 마음이 기운 상태였고, NTC와 5M짜리 사이닝 보너스까지 포함된 이 계약을 따낸 뒤 흡족해했다. 트레이드로 데려온 뒤 장기 계약으로 묶어놓는 전형적인 Jocketty 식 영입으로, McGwire-Edmonds-Rolen의 뒤를 훗날 Holliday가 잇게 된다.

 "We are very excited that we were able to work out a new contract with Scott. In the short time he has been in St. Louis, our fans have really come to appreciate the talent that he brings to our club. Scott is a proven run producer and one of the best defensive players in the game. He will be a great cornerstone for our organization for years to come."

-Walt Jocketty, on signing long term contract with Rolen


2004년: MV3

등 부상에서 회복되어 건강하게 시즌을 시작한 Rolen은 정규시즌 초반부터 정규시즌 막판 부상자 명단에 오를 때까지 거의 계속 리그 타점 선두를 유지했으며, 전반기를 무려 .330 18홈런 80타점이라는 말도 안되는 기록으로 마치며 올스타전 최다 득표의 영예를 누렸다. Rolen은 9월초에 왼쪽 종아리에 타박상을 입어서 전력질주를 못하게 되는 부상을 입었는데, 워낙 2위팀과 경기차이가 많이 났기에 La Russa는 Rolen을 주저없이 쉬게 해주었다. 이미 트레이드 데드라인을 앞두고 Jocketty가 Larry Walker를 데려오는 또 한번의 강수를 두었었기에 팀 공격은 Rolen 없이도 활화산처럼 돌아갔다.

다만 전반기에 미친듯이 쌓던 타점 페이스가 부상으로 인해 뚝 떨어진 점이 아쉬운데, 이 시즌 Rolen은 만루에서 .583의 타율을 포함해 득점권 타율 리그 3위를 기록했으며, 넉넉히 140타점을 바라볼 수 있는 페이스였다. 건강하게 시즌을 마치고 타점 1위 타이틀을 놓치지 않았다면 이미 리그 내에서 소문난 Rolen의 수비를 고려했을 때 Beltre보다는 더 득표하지 않았을까?

2004년 MVP 투표 - MV3의 위용인가 Bonds의 위용인가

Voting ResultsBatting StatsPitching Stats
RankTmVote Pts1st PlaceShareWARGABRHHRRBISBBBBAOBPSLGOPS
1Barry BondsSFG407.024.091%10.6147373129135451016232.362.609.8121.422
2Adrian BeltreLAD311.06.069%9.615659810420048121753.334.388.6291.017
3Albert PujolsSTL247.01.055%8.415459213319646123584.331.415.6571.072
4Scott RolenSTL226.01.050%9.114250010915734124472.314.409.5981.007
5Jim EdmondsSTL160.00.036%7.1153498102150421118101.301.418.6431.061

2004년 Dodgers와의 NLDS에서 Rolen이 12타수 무안타로 부진하자 언론은 정규시즌 막판 입은 종아리 부상과 타격 슬럼프를 연결시켰는데, 그 때마다 Rolen은 "부상과 상관없다. 그냥 내가 못 친 것" 이라며 자책했다. Sox와의 World Series에서 Rolen이 15타수 무안타로 부진했을 때도 같은 반응이었다. Rolen은 핑계를 대는 선수가 아니었다.

2004년 NLCS는 디비전 라이벌 Astros와 7차전까지 가는 혈투를 벌였던 명승부로, Astros의 몰락으로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2000년대초 Cards-Astros 라이벌리의 최고점이라고 감히 부를 수 있는 시리즈였다. 비록 Cards 팬이었지만 이 시리즈의 포인트는 MV3를 필두로 쉬어갈 틈이 없는 정규시즌 105승짜리 타선의 위엄을 가을 본즈 Beltran 과 당시 Berkman 두명이 상대하는 듯 한 모습이었다. 특히 Beltran은 유비 관우 장비를 동시에 상대하며 창 쓰는 법이 가지런했다는 여포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고, Berkman 역시 변방의 마초 쯤 되는 느낌이었다.

Rolen은 이 포스트시즌에서 팬들에게 극단적으로 다른 인상을 남겼다. Dodgers와의 포스트4경기 18타석에서 한 개의 안타도 치지 못하면서 부상 의혹을 받았었다가, Astros와의 NLCS에서 비로소 명예회복을 했다. 그는 2차전에서 혼자 홈런 2개를 치면서 승리를 이끌었고, 7차전에서 6회 Pujols가 동점 2루타를 치면서 분위기를 끌어올리자 곧바로 좌측 라인드라이브성 홈런을 꽂으면서 Clemens를 넉다운시켰다. (링크) 그러나 월드시리즈가 시작되자 Red Sox 투수들에게 4경기 15타수 무안타로 꽁꽁 묶이면서 결국 무기력한 모습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는데, 정규시즌 내내 MVP 페이스로 시즌을 보낸 선수의 커리어 하이 시즌으로는 조금 억울한 면도 없지않다. 



2005-2006: 우승과 바꾼 부상

커리어 하이 시즌을 뒤로 하고 시즌을 시작한 Rolen은 5월 10일 Dodgers전에서 훗날 커리어의 반환점이 되고 마는 부상을 당한다. 투수 땅볼을 치고 1루로 냅다 뛰기 시작했는데, 투수 Scott Erickson의 악송구를 잡기 위해 1루 선상으로 나와있던 Dodgers 1루수 최희섭과 부딪친 것이다. 이것으로 어깨가 탈골되어 DL에 등재된 Rolen은 어깨 수술을 받은지 한 달후인 6월 18일에 복귀했으나 공격과 수비에서 모두 정상이 아니었다. 26경기에서 홈런없이 8타점에 .207/.293/.264에 그치며, Full Range of Motion을 회복하지 못했다고 하소연했다.

부상 기간 도중 MRI 촬영 결과 Torn Labrum을 발견했는데, Rolen은 재활을 하면서 시즌 막판 복귀를 노리느니 차라리 수술을 받고 내년 시즌을 기약하기로 한다. 2010년까지 계약이 되어 있던 Rolen의 장기적 건강을 Cardinals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으며, Rolen의 시즌은 7월 21일자로 마감되었다.

8월 중순에 수술을 받은 Rolen은 6개월간의 회복 및 재활을 거치고 스프링 트레이닝에 모습을 드러냈고, 건강을 되찾자 그의 생산성도 돌아왔다. 그는 시즌 내내 허접한 마운드와 주축 선수들의 부상으로 고생하던 와중에 142게임에서 22홈런 95타점 wRC+ 126을 기록했고, Cardinals 유니폼을 입고 마지막으로 골드 글러브와 올스타 선정의 영예를 누린다. 이 해에 Rolen은 7월 초까지만해도 OPS 10할에 육박하는 성적을 기록하는 페이스를 기록하며 전반기를 14홈런 49타점 .331로 마쳤으나, 후반기 들어서 페이스가 급격히 떨어지며 타율 .253에 그쳤다. 특히 이 시즌 나온 홈런 22개 중 19개가 당겨친 것이었을만큼 밀어치는 타구의 비거리가 현저히 감소하기 시작했는데, 이 현상은 자연스러운 Decline이라기보단 2005년 어깨 부상으로 배팅 스피드가 떨어진 탓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며, Matt Kemp도 올 시즌 비슷한 증상을 보인 바 있다. 

"There have been times where he’ll make one of those great plays and I’ll just be standing there staring. Then I’ll see the other guys running off the field because there are three outs.”

-Jim Edmonds, on Rolen's defense

Cardinals/TLR과의 갈등

2007시즌이 끝나고 Cardinals가 TLR과의 2년 연장 계약을 체결하자, Rolen은 당시 단장 대행직을 맡고 있던 Mozeliak에게 트레이드를 해줄 것을 요청한다. 지난 시즌부터 어긋났던 TLR과의 불화가 수면에 올라온 것이다. Mozeliak은 "조건이 맞지 않으면 트레이드 하지 않을 것" 이라고 말했으나 Rolen과의 이별은 TLR과의 연장 계약으로 이미 기정사실화 된 것이었다. 팀이 잘 나가고 Rolen이 건강하던 2005년까지는 별 무리없이 두 사람의 불편한 동거가 유지가 되었으나, 팀 전력이 약해지고 Rolen이 부상으로 기량이 쇠퇴해지자 양측은 자주 충돌하기 시작했다.

중부지구 1위 경쟁이 치열하던 2006년 9월 23일, La Russa는 Oswalt를 상대할 Astros전을 을 앞두고 9월 내내 현저하게 떨어진 페이스를 보이던 Rolen에게 휴식일을 제공했다. TLR은 경기 전 Rolen을 불러 그의 Oswalt 상대전적이 안좋다는 점과 어깨에 누적된 피로를 쉬게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들어 Rolen에게 Day-off를 주겠다는 그의 결정을 설명했다 (Oswalt는 이 시리즈에서 3차전에 등판했는데, 이미 1-2차전에서 Rolen은 7타수 무안타로 부진한 바 있었으며, 그게 아니더라도 9월달 내내 .225/.303/.393 으로 급격히 페이스가 떨어진 모습을 보였다). 막판 페넌트레이스 경기에서 제외당한 것이 불만스러웠던 4번타자 Rolen은 "Benched" 당했다며 곧장 언론에 불편한 심기를 전했고, 이 소식이 TLR의 귀에 들어가면서 양측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불편해진다.

이후 어찌어찌 디비전 타이틀을 차지한 Cardinals와 Padres와의 NLDS가 시작했고, Rolen은 첫 3경기에서 11타수 1안타로 부진한다. TLR은 Rolen에게 한 마디 언질 없이 4차전 라인업에서 Rolen을 빼고 3루수로 Scott Spiezio를 선발 출장시켰는데, 이에 Rolen은 크게 자존심 상해했다. 이후 언론에서 왜 Rolen에게 미리 말해주지 않았냐고 묻자 "어차피 말해줬든 안말해줬든 그에게 만족스러운 설명을 해줄 순 없었을 텐데 무슨 차이가 있으냐" 라며 한 치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NLCS 2차전에서도 TLR은 Rolen 대신 Spiezio를 기용했는데, 하필 Spiezio가 2안타 3타점으로 펄펄 날고 Rolen은 대타로 나왔다가 무안타에 그치면서 TLR의 밉상은 (Rolen의 눈에) 극에 달했다.

"The last time in Houston I sat him down for 10 minutes and explained it to him. My explanation was worthless, so what am I going to say? The last time I talked to him it was a worthless exercise. He didn't want to hear it. He didn't believe it. He didn't understand it. I 'benched' him, which is so opposite what that conversation was about."

-Tony La Russa, on his decision not to notify Rolen

2006 WS 1차전, Rolen은 Justin Verlander의 패스트볼을 당겨서 넘기며 WS 팀 첫 득점을 자신의 홈런으로 만들어낸다. 이후 Rolen은 월드시리즈 내내 .421의 맹타를 치며 Eckstein과 함께 우승을 이끌었고, 포스트시즌에서의 침묵에 대한 어느 정도의 자존심 회복도 했다. 그러나 TLR과의 관계는 회복하기에는 너무 급격히 곪아가고 있었다.

2007시즌, Rolen은 시즌 내내 어깨 부상으로 고생하면서 커리어 로우 시즌을 보냈다. 고질적으로 아팠던 목과 등 부상은 물론 약해진 어깨까지 공수에서 Rolen은 올스타 레벨의 기량을 보여줄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결장이 잦아졌고, TLR과의 충돌도 많아졌다. Rolen과의 계약은 3년이 남아있던 상황이었으나 TLR은 계약 마지막 해였다. Rolen은 Cardinals 프론트의 결정을 기다렸고, 구단 측에서 TLR과 예상대로 재계약을 맺자 도저히 안되겠다는 듯 곧장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당초 St. Louis에 뼈를 묻겠다는 심정으로 NTC가 포함된 8년 계약을 했던 선수가 감독과의 불화 때문에 NTC를 풀고 트레이드를 공개적으로 요청했으니 이례적인 경우이다.

12월 7일, TLR은 인터뷰에서 "대체 무엇때문에 Unhappy하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라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고, Rolen은 TLR의 언론 인터뷰 내용들에 대해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당시 Bernie Mikslaz는 STLPD의 다른 야구 기자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TLR과 함께 Rolen 사태에 대해서 얘기했었는데, 당시 TLR의 상태에 대해 "Tony feels burned.And when he feels burned, that person usually goes." 라고 표현했다. TLR은 이후 Rolen에게 자신이 다가오는 2008시즌에 Rolen으로 부터 기대하는 모습들에 대해 편지를 써보냈고, Rolen은 이후 이적에 대한 결심을 더욱 굳혔다. 이 편지의 내용은 아직까지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비록 2007시즌의 급격한 성적 하락이 있긴 했으나, Rolen은 아직 충분히 많은 바이어들을 유혹할만한 선수였다. 특히 Ryan Braun을 아예 좌익수로 전향시켜 3루가 시원찮은 (Bill Hall) Brewers에서도 그를 탐내했고, Dodgers에서도 그를 원했다. 2008년 1월 12일, Cards는 그나마 즉시전력 출혈이 가장 적은 조건을 제시한 Blue Jays로부터 Troy Glaus 를 받고 Rolen을 넘겨주는 맞트레이드를 단행했다.  Mid-West에서 태어나고 자란 Rolen은 훗날 인터뷰에서 캐나다 팀인 Blue Jays로 이적하는 결정이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고 했는데, 이는 충분히 이 트레이드를 거부할 수 있었던 Rolen이 얼마나 TLR로부터 탈출하고 싶어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Rolen의 Cardinals 커리어는 대략 5년 반만에 끝이 나고 만다.

다시 보기 힘든 클래스의 3루수, Scott Rolen

YearAgeGPAABRH2B3BHRRBISBCSBBSOBAOBPSLGOPSOPS+Awards
200227552292053757841444322034.278.354.561.915139
200328154657559981604912810413382104.286.382.528.910138AS,GG
20042914259350010915732434124437292.314.409.5981.007158AS,MVP-4,GG
200530562231962846121528122528.235.323.383.70684AS
200631142594521941544812295745669.296.369.518.887126AS,GG
20073211244139255104242858533756.265.331.398.72989
STL (6 yrs)66127372373421678173131114533317292383.286.370.510.879127

2008-2012: Decline

트레이드 이후 Rolen은 중심타선의 Run-Producer 역할에서 벗어나 "모범적인 베테랑" 역할이자 2선으로 물러나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인조잔디 구장을 홈으로 쓰는 Blue Jays 뛰게 되면서 등, 목, 어깨 등 잔부상이 다시 그의 스윙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부상에 시달리며 115경기 출장에 그친 그는. 2009 시즌을 앞두고 홈런과 장타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철저히 라인 드라이브 생산에 집중하기 시작했는데. 2009시즌 전반기를 .320의 타율로 마감했다. 이를 기특하게 본 Reds 단장 Jocketty는 트레이드 데드라인을 앞두고 클럽하우스에서 젊은 선수들을 다독여줄 베테랑 역할을 기대하며 Rolen을 영입했고, 이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2010년, 믿어주는 단장 Jocketty와 베테랑을 선호하는 Baker 감독 밑에서 Rolen은 마지막 불꽃을 불태웠다. Reds의 홈 개막전에서 친정팀 Cardinals를 상대한 그는 4회 옛 동료 Chris Carpenter로부터 홈런을 때려냈고, 5월 16일에는 또 Cardinals의 Brad Penny로부터 투런홈런을 쳤다. 6월 28일에는 또다른 친정팀 Phillies의 Kyle Kendrick으로부터 통산 300홈런째를 빼앗았다. 

전반기에만 무려 17홈런을 때리고 올스타전에도 나갔으며, 그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한 몇몇 기자들은 MVP 투표에서 그에게 표를 행사했다. 타자에게 유리한 GABP에서 장타율 .534를 기록하며 20홈런을 채웠고, 골드 글러브도 집에 한 개 더 가져갔으니, 한 물 간 것으로 평가받던 "제2의 Mike Schmidt" 에게 어울리는 화려한 컴백 시즌이었다. 비록 이 시즌 라이벌 팀의 4번타자로 활약하긴 했으나, 마지막 불꽃을 제대로 태운 그의 2010시즌은 많은 이들의 입에 미소를 띄웠다. 

왜 저를 빼셨습니까. 왜.

총평: Scott Rolen - Keeping your head down

고등학교에서 농구 인스터럭터였던 Scott의 아버지 Ed Rolen은 자식들에게 종종 "뭔가를 잘했을 때 다른 이들에게 이를 알리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은 다 안다." 라고 누차 가르쳤는데, 이는 Rolen의 행동과 모습에 고스란히 드러나있다. ("If you do something well, you don't have to tell anyone. They will know."). 그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결코 어려움이 없었으나, 부모님이 모두 교육자였던 Rolen 의 집안에서는 겸손함 최선의 미덕이었다. 특유의 우직한 Work Ethic이 몸에 배어있는 Rolen은 프로에 가서도 자신의 재능에 안주하지 않고 모든 플레이에 열과 성을 다했으며, 결코 우쭐해하는 법이 없었다. Braves 에서 코치를 지낸 바 있으며 Rolen의 마이너리그 시절 감독이었던 Roy Majtyka는 이런 Rolen의 Work Ethic을 Chipper Jones와 Dale Murphy에 비교한 바 있으며, 그뿐 아니라 Rolen과 같이 뛰었던 거의 모든 선수들 및 감독들 (심지어 그와 사이가 안좋았던 사람들도) 역시 타의모범이 되는 Rolen의 성실함과 진지함을 굉장히 높이 평가했다.

Rolen이 필드에서 보여주는 모습들을 복기해보자. Rolen은 타구를 처리할 때 타구를 "Surround" 즉 몸으로 둘러싸면서 처리한다는 야구의 기본기에 누구보다도 충실했던 3루수였다. 그는 다른 3루수들은 시도도 못할 플레이를 쉽게 해낸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고개를 숙였다. 홈런을 친 뒤에도 Rolen은 고개를 숙인 채 거의 전력질주 하는 듯한 속도로 다이아몬드를 도는 걸로 유명했으며, 홈을 밟은 후에도 큰 세레모니 없이 바로 덕 아웃으로 직행했다. TLR이 누누히 칭찬했던 Rolen의 주루 플레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누상에서 가장 공격적이고 지능적인 주자들 중 하나였으며, 어떤 상황에서든 Extra-base를 가는 것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멋진 슬라이딩으로 득점한 후에도 별다른 반응없이 훌훌 털어내며 다시 고개를 숙이고 덕아웃으로 들어갔다. 남들은 감히 시도하지고 못할 High-intensity 플레이들을 창조해낼 수 있는 재능이 있었으나, 그 플레이를 하는 과정에서 차오르는 아드레날린과 열정을 내적으로 삭혀버리니, 어찌보면 정말 Cardinal Way에 어울리는 선수였다. Dodgers의 한 신인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커리어 내내 두 차례나 감독과 불화가 있었다는 사실과 Phillies 시절 "Clubhouse에서 암적인 존재"로 꼽힌 바 있어서 Rolen을 마치 "클럽하우스 부적응자" 처럼 몰아가는 여론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 돌이켜보자. 정말 Rolen은 불화를 몰고 다니는 선수였을까?

위에서 언급한대로 Rolen과 Phillies 사이의 갈등에는 감독인 Larry Bowa와의 불화 외에도 Dallas Green, Phillies의 리빌딩 타이밍 등 여러가지 부수적인 요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Rolen이 Cardinals에서 트레이드 된 것은 사실 TLR과의 대립을 제외하면 딱히 이유가 없다. 비록 어느 정도 Rolen의 타격 Decline 및 부상으로 인한 쇠퇴에 대한 우려가 있긴 했으나, 여전히 Rolen은 지역 팬들 사이에서 굉장히 인기있던 선수였다. 계약의 규모와 세부 조항들에서 알 수 있다시피 Rolen은 트레이드 되는 순간부터 Cardinals에서 자신의 남은 커리어를 보낼 의지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Mid-West 특유의 사실상 "닥치고 일단 열심히" 하자는 "Believing in Hard Work" 철학을 신봉하던 Rolen의 Work Ethic과 Hustle은 Cardinal Way 에 정말 잘 어울렸던 선수였다. 많은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배팅 케이지에서의 연습 스윙 하나도 대충 하지 않았으며, 골드 글러브를 수 차례 수상한 뒤에도 땅볼 타구 처리 연습을 누구보다 많이 했다. 필드 안에서나 밖에서나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 그리고 누구에게도 꿀리지않던 재능은 그를 St. Louis에서 특히 빛날 수 있는 선수로 만들었다.  

그러나 Rolen의 최대 약점은 이 성실함, 그리고 그 이면의 고집이었다. Jasper High School 시절부터 Phillies 시절까지 어느 팀에서든 기둥 역할을 하던 Rolen은 Elite Athlete 특유의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으며, 경기에서 자신이 빠지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어했다. TLR은 훗날 Rolen이 2004년 월드시리즈에서의 부진을 어느 정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으며, 포스트시즌에서 유난히 명예회복을 하고싶어 했는데, 그런 부분들이 그에게 부담으로 작용했다고 밝혔다. TLR은 Rolen이 부상으로 쇠퇴하기 이전까지는 "Rolen이 부상을 입고 뛸 때도 리그의 대부분의 다른 3루수들보다 낫다" 고 말했고, 이런 방식의 기용은 Rolen와 잘 맞았었다. 그러나 부상 이후에 TLR은 Rolen의 타석숫자를 조절하기 시작했고, 점차 마찰은 커져만갔다.

Rolen은 또한 본인에게 미디어의 관심이 쏟아지는 것을 굉장히 부담스러워 했는데, Boston에 결코 뒤지지않은 Philadelphia의 극성스런 스포츠 언론들과 팬들은 그런 의미에서 Rolen의 성격과 아주 상극이었다. 그가 St. Louis로 이적한 후 첫 면담에서 TLR은 Rolen에게 "여기는 Phillies와 다르다. 우리 라인업은 이미 강력하며, 그냥 자네는 하던대로만 쳐주면 된다. 제 스윙만 해준다면 홈런 하나도 못쳐도 상관없다." 면서 "결과"에 대한 부담감으로부터 Rolen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Phillies 시절 커리어 초반부터 팀 타선을 홀로 이끌어야했던 Rolen으로써는 반가운 변화였고, 이때만 해도 양측의 관계는 원만함을 넘어서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필자는 TLR의 매니징 스타일의 오랜 팬이지만 Scott Rolen과의 불화는 TLR의 꼰대 근성이 가장 제대로 투영된 에피소드가 아닌가 싶다. Rolen이 비록 라인업에서 빠진 것에 대해 언론에다가 불만을 표시한 것도 그다지 칭찬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권한에 불만을 가졌다는 것에 일종의 괘씸함을 느껴서 포스트시즌 라인업에서 사전에 논의 없이 혹은 일언반구의 경고도 없이 Rolen 정도의 베테랑을 제외한 것은 "포용력 부족"이다. 자신의 결정과 판단이 Question 받는 것을 극도로 못 견디는 TLR이었기에 어찌 보면 아무 일도 아닐 수 있는 사건이 (베테랑 선수가 부상/부진 때문에 라인업에서 빠져서 불만을 갖는 것이 어디 그리 드문 경우인가) 일종의 Powertrip으로 이어져버린 것이다. 훗날 Colby Rasmus의 아버지 Tony Rasmus는 Rolen을 들먹이며 TLR을 비난했는데, TLR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There was a question about if you don't get along with the manager you don't last in St. Louis. That's the most senseless thing I've ever heard. I have never in my memory seen a front office or ownership pick a manager over a productive pitcher or player. That's ridiculous."

-Tony La Russa, after Rasmus trade

오히려 Rolen 특유의 조용히 "내 할일만 하자" 성격은 그의 커리어 막판에 빛을 발했다. 트레이드 이후 Blue Jays 에서나 Reds에서나, Rolen은 팀에서 모범적인 베테랑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며 젊은 선수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그는 클럽하우스에서 시끄럽지 않았으며, 라커룸 앞에서 주로 Steinbeck의 소설을 자주 읽었고, 땅볼을 치고도 1루로 열심히 뛰었으며, Joey Votto, Todd Frazier 를 포함한 많은 젊은 선수들은 20대선수들에게 뒤지지않은 연습량을 철저하게 소화하는 Rolen에 대한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What drives me in life is to be a good person. You help each other, you help yourself, you try to be the best person you can be. That's drive enough for me. I just want to be happy. I think that's what life's about. Happiness is what drives me, not fame or fortune. With all TV interviews and some of the fame and some of the celebrity status, I guess, that goes with this game, sometimes. ... The way I look at it, if I wanted to be on TV, I'd have been an actor. But I don't want to be on TV. I want to play baseball."

-Scott Rolen-

비록 예기치못한 불협화음 때문에 모두의 바램대로 St. Louis 유니폼을 입고 은퇴하지는 않았으나, 그가 가슴에 Birds on the Bat을 달고 뛰는 동안 우리에게 좋은 기억을 많이 심어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6'4인치의 풋볼 Linebacker 같은 건장한 사이즈와 긴 팔, Soft Hand, 유연함으로 3루 수비의 교과서를 보여주었으며, 계약 기간 중 3년 반동안은 리그에서 가장 생산적인 타자 중 하나였다. 비록 2004 월드시리즈에서의 부진과 전반적인 포스트시즌에서의 약세, 그리고 몇 차례의 부상 때문에 명성에 흠집이 간 건 사실이나, Cardinals 유니폼을 입고 5년 반의 기간동안 OPS .879에 홈런 111개를 쳤고, 3개의 골드 글러브와 4번의 올스타를 포함해 WAR 27.4 를 적립했으며, 성실한 선수 생활을 지속하면서 반지도 하나 가져왔다. 누가 감히 Rolen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Rolen 트레이드 이후 Cardinals의 3루 자리에는 다음과 같은 선수들이 왔다가 또 갔다.


2008 - Troy Glaus (4.9 WAR, wRC+ 123)

2009 - Mark DeRosa / Brian Barden (0.6 WAR, wRC+ 76)

2010 - Felipe Lopez / David Freese (1.3 WAR, wRC+ 96)

2011 - David Freese / Daniel Descalso (2.8 WAR, wRC+ 106)

2012 - David Freese (4.0 WAR, wRC+ 133)

2013 - David Freese (0.3 WAR, wRC+ 106)


Did you know...

  • 2013시즌이 끝나고 Rolen은 현재 공식 은퇴선언을 하지는 않았으나 사실상 은퇴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2013시즌을 앞두고 Rolen은 Red Sox, Yankees 등과 접촉이 있었으나, Rolen은 Reds 복귀를 원했다. 그러나 "베테랑 리더십" 을 위해 5M을 쓰기 싫었던 Reds는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고, 결국 Jocketty가 Rolen이 스프링 트레이닝에 오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후 Rolen은 "Right now I’m simply not ready to make a commitment. I would like to leave my options open, without closing any doors..." 라는 모호한 발언을 했으나, 이후 그의 행보를 보았을 때 사실상 은퇴 쪽으로 마음이 많이 기운 듯 싶다.

  • Rolen은 고향 Indiana와 Florida에 집을 두고 왔다갔다 하면서 살고 있으며, IU Hoosiers의 열렬한 팬인 부모님을 위해 자기 모교도 아닌 Indiana University 야구 프로그램과 새 구장 건설을 위해 크게 한 턱 쐈다고 한다 (Major donation). 이러다가 인디애나에서 지역구 국회의원이라도 나갈 기세.

  • Rolen의 고향 집 앞에는 Indiana Baseball Hall of Fame 이 위치해있으며, 당연히 Indiana가 낳은 최고 야구스타 중 하나이자 1993년 Indiana Mr. Baseball 출신 Rolen도 헌액되어있다. 아직도 이 동네 고등학교 야구팀 코치는 Rolen을 가르쳤던 Terry Gopert이다.

  • 2011년 7월 4일, Rolen은 친구 Chris Carpenter로부터 통산 2000안타째를 뽑아냈다.

  • 2009년 8월 10일, Reds 유니폼을 입고 Busch에 들린 Rolen은 TLR 방에 먼저 찾아 들어가 인사를 건네고, 대화를 나눴다. TLR은 당시 DL에 올라있던 Rolen에 부상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며 "빨리 회복하길 바란다"며 덕담을 건넸는데,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이 "TLR이 또 괜히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다" 는 식의 조소를 보낸 바 있다. 글쎄, 필자는 TLR이 정말 Rolen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기에 이들의 만남을 그렇게 꼬아서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 시대를 풍미한 3루수 Scott Rolen은 그렇다면 HOF에 들어갈 수 있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 다룬 많은 좋은 글들이 Fangraph나 Hardball Times에 게시되어 있는데, 수박 겉핥기 식으로 종합해보면 Rolen은 (1) 이른 은퇴, 부상 전적으로 인해 누적 스탯 (316홈런, 1211타점, 2077안타)에서는 부족하지만 (2) 통산 비율 스탯 (.281/.364/.490) 에서는 합격점을 받고 있는 이른바 "Edgar Martinez" 스타일로, 약간 부족한 명예의 전당 프로필을 압도적인 수비와 집에 남아도는 골드글러브들로 메꿔야 하는 상황이다. Rolen의 라이벌로는 Adrian Beltre가 꼽히고 있는데, 그는 비율 스탯은 딸리지만 Rolen보다 건강하고 오래 커리어를 유지한 덕에 더 나은 누적 스탯과 WAR를 찍고 은퇴할 것으로 보인다. Rolen이 명예의 전당에 가느냐 마느냐에 대한 이슈는 나중에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겠지만, 그보다는 올라간다면 과연 어떤 유니폼을 입고 올라갈 지가 더 궁금하다.


by Doo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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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ovy

이번 주 주인공은 Gritty Player 계열의 수장(?) 격인 X-Man, David Eckstein이다. 아무 툴도 없는 단신 유격수로 World Series MVP까지 따낸 그 앞에서는 Grit이라면 어디가서 꿀리지 않는 Schumaker 역시 머리를 조아린다. Scrappy한 그의 플레이스타일과 팀을 위한 헌신을 마다하지 않는 그의 노력, 허슬, 그리고 인간미 넘치는 그의 성격은 Eckstein의 좁은 수비 레인지와 낮은 장타율을 비난하는데 정신없는 세이버리스트들의 입가에도 웃음을 띄우게 했다. Cardinals에서 3년을 뛰었는데도 마치 13년을 뛴 선수처럼 팬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긴 선수. TLR 시대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 "Grit," 그리고 그 Gritty Player의 대명사격이었던  David "Pesky" Eckstein의 커리어를 돌아보자.

 

X-Man


David Eckstein

Shortstop

DOB: 1975년 1월 20일 

Birth: Sanford, Florida 

Time with Cardinals:  2005-2007


Draft and Minors

1994년, University of Florida (이하 Gators) 야구팀 트라이아웃에 5'7인 짜리 꼬맹이가 참가했다. 운동 장학금을 받지 않고 공부로 학교에 입학한 David Eckstein이었다. 부모님이 모두 교사셨던 그는 학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가풍 속에서 컸고, 고등학교 시절 야구로 State All-star에 뽑히기도 했지만 대학은 성적으로 들어갔다. 꼬맹이는 Walk-on으로 (Walk-on이란 딱히 정해진 포지션 없이 팀에 들어가는 것으로, 일종의 '깍두기/꼽사리'로 봐도 될 듯 싶다) 팀에 합류했고, Walk-on들은 팀 훈련에 참가하기 전까지 3주를 기다려야했다. David은 마냥 기다리는 대신 매일매일 혼자 배팅케이지로 가서 공을 때렸고, 이를 기특히 여긴 한 Assistant 코치가 Eckstein에게 2주차때부터는 그냥 팀 훈련에 나오라고 말했다.

당시 UF Gators 야구팀 코치였던 Joe Arnold는 Eckstein의 뛰어난 배트 컨트롤과 성실함을 믿고 그를 유격수로 키우기 시작했고, 2학년 때 Eckstein은 SEC All-Conference Team에 선정되며 이에 부응했다. 포지션도 없이 팀에 들어왔던 Eckstein은 1996시즌에는 All-American Team에 선정되었고, Gators가 College World Series에서 3위에 오르게 하는 큰 성과를 냈으며, 대학 야구를 하는 3년 내내 우수한 성적을 유지한 운동선수들을 뽑은 SEC Academic Honor-Roll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All-American 팀과 Honor Roll을 2년 연속 동시에 해낸 것은 David Eckstein이 학교 역사상 처음으로 해낸 일이다. 받지 않았던 장학금 (Athletic Scholarship)도 그가 SEC Conference 팀에 선정된 2학년 때부터는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장학금을 받지 않고 들어온 학생이 재학 도중 장학금을 받는 경우는 굉장히 드문 경우이다.


University of Florida 졸업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Eckstein은 1997년 드래프트에서 19라운드 전체 581번으로 Red Sox에 지명되었다. 굉장한 Undersized 유격수에 소녀 어깨, 툴이라고는 그럭저럭 평균 이상인 스피드....그게 끝이었다. "인상적인 배트 컨트롤과 컨택 능력이 있으나 결국은 Size 때문에 안될 것" 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고, "Grit과 투지는 인상적이지만 야구 재능 자체는 상위 마이너리그 레벨에서는 결국 먹히지 않을 것" 으로 생각했다. Red Sox의 한 스카우트는 David의 아버지인 Whitey Eckstein에게 "아드님은 훌륭한 코치가 될 겁니다 (Your son will make a great coach some day)" 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학창시절부터 내내 여태껏 이런 기대 속에 살아온 Eckstein에게는 상황이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는 특유의 근성, 성실함, 기민함으로 이러한 기대들을 이겨내고 매 시즌 선수로써 큰 발전을 이룩했다.  프로 첫 해였던 97년에는 들어오자마자 3할을 치면서 모두를 놀래켰고, 이듬해는 하이 싱글A에서 87:51이라는 굉장히 훌륭한 BB/K 비율과 45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1999년 AA볼에 올라가서는 오히려 더 나은 슬래시 라인을 기록했고,  1라운더 출신이자 Red Sox가 아끼던 유격수 유망주 Adam Everett (얘도 기대가 참 큰 유망주였다) 과 완벽한 키스톤을 이뤄 소속팀 Trenton Thunder의 92승 시즌에 앞장섰다. 마이너리그에서 Eckstein은 4년간 철저히 2루수로 육성되었으며, 2루수로 438경기를 뛰는 동안 단 29개의 에러만을 기록했다. 

Eckstein's Minor League Track Record

Year Age Tm Lev G PA AB R H 2B 3B HR RBI SB CS BB SO BA OBP SLG OPS GDP HBP SH SF
1997 22 Lowell A- 68 303 249 43 75 11 4 4 39 21 5 33 29 .301 .407 .426 .832 2 12 8 1
1998 23 Sarasota A+ 135 615 503 99 154 29 4 3 58 45 16 87 51 .306 .428 .398 .826 8 22 1 2
1999 24 Trenton AA 131 615 483 109 151 22 5 6 52 32 13 89 48 .313 .440 .416 .856 6 25 13 5
2000 25 Pawtucket AAA 119 515 422 77 104 20 0 1 31 11 8 60 45 .246 .364 .301 .665 8 20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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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ted 2/28/2013.

2000년, AAA볼 Pawtucket까지 올라온 Eckstein은 AAA 투수들의 강한 구위에 말리면서 초반 슬럼프에 빠졌다. Pawtucket의 코치들은 이런 Eckstein이 타격 메카니즘을 바꾸길 조언했고, Eckstein을 이를 시도하다가 오히려 더 성적이 떨어지고 말았다. Eckstein은 이에 다시 자기가 원래 하던 방식으로 바꿔 시즌 마지막 두 달간 자신의 타율을 0.085나 올렸으나, 이미 Red Sox는 Eckstein이 AAA 이상 레벨에서는 먹히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린 후였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Eckstein을 웨이버에 올린 뒤 7월 말, 5'10인치의 Lou Merloni를 영입해 사실상 Eckstein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8월 16일, Angels는 Waiver-wire에 올라와 있는 Eckstein을 데려왔고, Eckstein은 Angels로 오자마자 AAA 15경기에서 0.346에 홈런 3개를 쳤다.

 

Eckstein은 늘 1루로 전력 질주했다. 그리고 때때로 평범한 3루 땅볼로 1루에서 살았다.


2001-2004: Angels 시절

2001년, Eckstein은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맹타를 쳤고, 기적적으로 25인 로스터 자리를 확보했다. 그리고 주전 2루수 Adam Kennedy가 시즌을 DL에서 맞음에 따라 Eckstein은 선발 2루수에 9번타자로 개막전에 드는 영광을 누렸다. Adam Kennedy가 복귀하는 시점부터 Eckstein은 벤치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팀의 첫 9경기에서 Eckstein은 무려 406/.457/.469를 쳤고, 팀의 첫 홈 3연전인 Rangers 와의 개막 시리즈에서는 10타수 5안타에 무려 7득점을 올렸다. HBP든 BB든 그는 타석에 서면 어떻게든 1루로 나가려고 안간힘을 썼고, 2루 수비도 봐줄만했다. 4월 13일, Adam Kennedy가 부상에서 복귀했고, 기존 유격수였던 Benji Gil과 호흡을 맞춰 2루수로 선발 출장했다. 이 때 Alfredo Griffin 1루 베이스코치는 Mike Soscia에게 Eckstein을 유격수로 돌려서 라인업에 계속 넣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으며, Eckstein 역시 Scoscia에게 가서 대학시절 자신이 유격수였으며 당장이라도 유격수로 뛸 수 있다고 얘기했다 (Griffin 본인도 유격수 출신이다).

이에 Scioscia는 Eckstein을 마이너리그로 보내 유격수 수업을 받게 하자고 했고, Griffin은 자신이 메이저리그에서 뛰면서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Scioscia에게서 허락을 받은 그 날부터 Eckstein은 유격수로 선발 출장했고, 경기 전과 후에 특수 훈련을 실시하면서 2루수 Adam Kennedy와 호흡을 맞췄다. 역시 가장 문제가 있던 부분은 Eckstein의 소녀 어깨를 보완하기 위한 부분이었는데, 조금 더 강한 송구를 위해 타구 처리시 한 발 더 앞으로 디디며 Momentum을 증량시켜 공을 뿌리는 법을 익혔다.

기존 유격수 Benji Gil 이 결코 인상적인 공격력을 가진 선수가 아니었던 점, Eckstein이 개막 하자마자 Hot Streak에 오른 점, Hit-and-run을 선호하는 Scioscia 감독이 Eckstein 같은 훌륭한 Bunter를 라인업에 넣고 싶은 욕심이 있었던 부분까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Eckstein이 7월 월간 타율 0.239로 슬럼프에 빠지자 Angels 코치진은 투수들이 Eckstein의 짜증나는 타격 스타일을 상대하는 법을 알아챘다고 생각해 주전에서 빼려고 했으나, Eckstein은 바로 다음달인 8월에 .360을 치면서 완벽하게 자신의 위치를 방어했다.

If you want flashy, don't watch Eckstein play shortstop. If you want classic, don't watch Eckstein play shortstop. His range is limited--although improving--and his throws to first base are almost painful to watch. But he gets the job done, displaying an uncanny knack for smart positioning. 

-Scouting Report 2002, on David Eckstein's defense

 

2002년 Angels 우승에 Eckstein은 혁혁한 공을 세웠다.


2001-2002년 2년 연속 Eckstein은 AL 희생번트. HBP, 최저 헛스윙률 각종 변태적인 공격 카테고리에서 AL 1위에 올랐다. 리드오프로 나서서 107득점을 기록한 Eckstein은 2002시즌 Angels 우승의 주역이었으며, 그가 득점한 경기에서 Angels의 성적은 58승 17패였다 (승률.773). Eckstein이 출루에 실패하는 경기에서 팀은 9승 19패였는데, 그가 출루에 실패한 경기가 28경기 뿐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2년 4월 27일, Eckstein은 Blue Jays전에서 커리어 첫 만루홈런을 치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28일, 연장 14회에 Pedro Bourbon을 상대로 Walk-off Grand Slam을 치면서 팀의 시리즈 스윕을 주도했다. 이전까지 7승 14패의 최악의 스타트를 끊었던 Angels는 이 시리즈를 기점으로 이후 23경기에서 20승을 챙겼다. 그리고 Eckstein은 6월 9일 Reds와의 인터리그 경기에서 Joey Hamilton (이 이름을 또 마주치다니!) 을 상대로 시즌 3번째 만루홈런을 때렸고, 결국 만루홈런 리그 1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2004년 12월 19일, FA 최대 유격수이자 지난 6년간 NL 최고 유격수로 군림하던 Renteria가 Cardinals와 재계약 하는 대신 Red Sox를 선택했다. 그래도 재계약을 할 수 있을거라는 희망에 끝까지 협상 테이블에 앉아있던 Cardinals는 Renteria가 물건너가자 바로 Eckstein에 집중했고, 12월 21일에 FA 자격을 받은 David Eckstein을 12월 23일에 3년간 10.25M이라는 저렴한 조건으로 계약했다. 이 사이 Red Sox 유격수였던 Orlando Cabrera가 Angels와 계약하면서 3팀이 유격수를 서로 바꾸는 그 유명한 Shortstop Merry-go-around가 완성되었다. 

David was the player we focused on right away after Cabrera signed. Given the current free-agent market at shortstop, it pushed salaries higher, but we still felt this was a value signing for us.

-John Mozeliak, on signing David Eckstein 

2005년: Fan Favorite from the first day

Eckstein은 "The Cardinal Way"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선수였다. 볼넷을 골라도 1루로 뛰어갔고, 공수 교대시 덕아웃으로 들어올 때도 늘 빠르게 뛰어들어오며 "Hustle in, Hustle out"을 외쳤다. 잔부상 정도는 가볍게 무시하고 뛰었으며, HBP를 맞고 1루에 걸어나가서는 씩 웃었다. 안그래도 Grit에 일종의 페티쉬가 있던 TLR은 Eckstein의 이런 Grit을 예뻐했으며, Eckstein을 "Toughest guy I've seen" 이라 불렀다.

당당한 체구와 부드러운 몸놀림을 자랑했던 Renteria의 수비와 그의 파워풀한 라인드라이브 히팅에 익숙해져 있던 Cardinals 팬들이 새로운 꼬마 유격수의 보기 안타까운 투포환 송구와 삼진을 안당하려고 파울을 만들어내는데 안간힘을 쓰는 Eckstein식 타격에 익숙해지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의 저지 판매량은 순식간에 Pujols와 Edmonds가 수성하던 상위권으로 올라갔으며, 사소한 플레이 하나 하나에도 최선을 다하고 절대 싸인 요청을 거절하지 않는 Eckstein의 "Giving 110%"식 태도는 팀메이트들과 코치진, 누구에게나 인기가 있었다. 

Eckstein의 키는 많은 자료에 5'7 또는 5'8 (170cm) 로 명시되어 있으나, 실제 키는 이보다도 조금 더 작은 167cm라고 한다.


Eckstein은 이 시즌 커리어 최다인 158경기에 출장했으며, 올스타전에 선발 유격수 겸 9번타자로 출장하는 영광도 누렸다. 또한 후반기에는 .304의 타율을 기록하며 팀의 지구 우승에 일조했다. 2005년 8월 7일 Braves전, 3:1로 뒤지던 9회말 1사 만루에서 상대 마무리 Chris Reitsma를 상대로 Eckstein이 역전 끝내기 만루홈런을 쳤을 때 팬들의 그를 향한 사랑은 절정에 이르렀다. NLDS 3차전에서는 무려 PETCO에서 투런 홈런을 치는 광분을 했으며 (상대 투수 Woody 옹), 이 시리즈에서 13타수 5안타로 맹활약했다 (물론 이 세 경기에서 Reggie Sanders가 10타점을 치는 진정한 광분을 했기에 활약이 묻혔다) 

개인적으로 이 시즌 Eckstein의 모습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2005년 NLCS 5차전이다. 4:2로 지고 있던 9회초 Astros의 마무리 Brad Lidge가 마운드에 올라왔고, 순식간에 2아웃이 잡힌 뒤 Eckstein이 타석에 섰다. 어떻게든 출루를 해줬으면 하는 상황이었지만 사실 기대할 것이라곤 단타밖에 없는 Eckstein이었고, Lidge의 슬라이더는 악명높았기에 필자는 사실상 포기를 한 채 경기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Eckstein은 볼넷을 고르는 대신 3-유간으로 깔끔한 안타를 치고 나가는 것이 아닌가! (사실 이 타구는 당시 기억으로 내야수가 처리할 수 있음직한 타구였다) 

 이후 Jim Edmonds가 볼넷을 골랐고, Pujols가 타석에 들어왔다. 결과는 그 유명한 "침묵의 쓰리런"이다. Astros 팬들과 선수들이 미리 축포를 터뜨리던 것에 화가 난 Pujols는 역전 쓰리런으로 Lidge 커리어에 씻을 수 없는 흉터를 남겼고, Cardinals는 NLCS를 St. Louis로 몰고 갔다. 물론 이 시리즈는 Oswalt와 Clemens를 동시에 출격시킨 Astros가 승리했으나, 그 덕분에 월드시리즈에서 투수진 운용에 어려움을 겪은 Astros는 White Sox에게 싱겁게 패배했다. NLCS 5차전의 후폭풍이 Biggio와 Bagwell의 우승반지를 앗아간 셈이다. 

(여담이지만 이후 MVP 베이스볼이었나? 2K 시리즈였나 잘 기억은 안나는데, 일종의 '업적' 시스템처럼 어떤 특정한 이벤트 조건을 만족시키면 선수 카드를 주는 게 있었다 (가령 Crawford로 1경기 3루타 2개를 치면 Carl Crawford 카드를 준다든가...) Lidge 카드를 받는 조건은 Pujols를 삼진처리하는 것이었다)

"He's a good athlete. He studies how to hit. He has two World Series rings and a World Series MVP. He was the leadoff hitter and shortstop. Those are two very important parts of a winning team. I wonder if anyone else has ever done that for two (franchises, including the Angels) that won the World Series."

-  Adam Kennedy, on David Eckstein

Bonds는 Eckstein의 어머니를 만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You've got a great son."

 

2006년: WS MVP

많은 이들이 Eckstein을 Angel보다는 Cardinal로 기억하게 만든 바로 그 시즌이다 (필자도 자료를 찾다가 가장 놀랜 부분이 Eckstein이 Angels에서 4년을 뛰고 Cardinals에서는 3년밖에 안뛰었다는 점이다. 더 오래 뛴것 같았는데...)

늘 Wrist와 Hamstring 등에 잔부상을 참고 뛰던 Eckstein은 8월 중순에 Oblique Strain으로 무려 3년만에 DL에 올랐고, 약 한 달 정도를 결장한 후 9월 15일이 되서야 돌아왔다. 123경기 .292/.350/.344를 쳤으나 MVP 투표에 이름을 올렸던 2005년에 비하면 확실히 퇴보된 성적이었다. 포스트시즌에서도 그는 NLDS와 NLCS를 합쳐서 11경기에서 49타수 8안타에 그치며 부진했으며, WS 첫 2경기에서도 무안타에 그쳤다. 그러나 3차전 Carpenter의 역투가 있던 날, Eckstein은 4타수 2안타를 치며 타격감을 끌어올렸고, 4차전에서 5타수 4안타 2루타 3개를 폭발시키며 5:4 역전승을 이끌었다. 

Eckstein의 월드시리즈 안타들은 정말 그만의 스타일이 그대로 묻어나는 타구들이었다. 4차전 첫 타석, Eckstein은 3루에 Brandon Inge 쪽으로 바운드가 큰 타구를 쳐놓고 냅다 뛰며 내야 안타를 만들어냈다. 7회말 선두타자로 나서 2루타를 치고 나갔다가 (이 타구는 Granderson이 엎어지지 않았으면 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Eckstein이 워낙 장타력이 없었기에 중견수가 내야 쪽으로 들어와 있었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득점에 성공하며 3:3 동점을 만들고, 8회말에는 2사 2루에서 Zumaya를 상대로 다시 좌익수 키를 절묘하게 넘어가는 (이 타구도 Monroe가 정상적인 위치였다면 평범한 좌익수 뜬공이었을 뻔 했다) 2루타를 쳐서 역전을 만들어내며 영웅이 되었다. 5차전에서는 2회 2사 3루에서 3루쪽 파울라인으로 땅볼을 굴려놓고 냅다 달려서 상대 실책을 유도해 선취점을 냈고, 동점이던 4회말 1사 2,3루에서는 유격수 쪽으로 적당한 빠르기의 땅볼을 굴려서 결승점을 냈다. 

아주 소박하고, 기본기에 충실한 플레이들. 약간의 운이 없었다면 도저히 힘들었을 그런 타구들로 Eckstein은 역대 월드시리즈 유격수 최초로 한 경기 4안타를 친 선수가 되었다. WS MVP 트로피를 받아든 Eckstein은 부상으로 딸려온 노란색 스포츠카 (Corvette)을 보며 "저 차가 나의 첫 차" 라고 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Eckstein은 당시 Oblique Strain 뿐 아니라 Shoulder, Hamstring, Concussion, Wrist 등 안 아픈 곳이 없던 상황이었으며, 팀 Work-out도 제대로 소화하기 힘들 수준이라 진통제를 맞아가며 경기에 임했다고 한다.

"To me, he's our shortstop. And believe me, he's more than just guts, he's a very good player. He's the toughest guy I've seen in uniform."

-Tony La Russa, on David Eckstein

나도 홈런 치고 싶어 웨인아

 

2007년

Eckstein은 잔부상으로 고생하며 커리어 최저힌 117경기 출장에 그쳤고, 6월 중순부터 7월 중순까지 한 달간 Lower Back Strain으로 DL에 올랐던 것 외에도 DTD에 자주 왔다갔다 했다. 물론 플레이할 때는 .309/.356/.382의 평소와 다름없는 수준의 생산성을 보였고, Pesky함도 그대로였으나, 충분한 경기에 출장하지 못한 것과 올라간 그의 몸값 (2007년 연봉 4.5M) 때문에 Eckstein의 연장계약은 아쉽게도 무산되었다.

St. Louis에서의 3년간 Eckstein은 3.0 --> 1.8 --> 1.0의 감소하는 WAR를 보였고, 반대로 그의 몸값은 2.3M --> 3.3M --> 4.6M으로 매해 조금씩 인상되었다. 가격 대비 성능으로 봤을 때 2005년 Eckstein은 훌륭했고, 2006년에는 그저 그랬으며 (WS 부스트를 감안하고), 2007년에는 평균 이하였다고 봐도 좋을 듯 하다. 시즌 후 Eckstein은 유격수를 찾던 Blue Jays와 1년 계약을 맺고 토론토로 건너 갔으며, 2009년에는 Padres와 2년 계약을 맺고 2루수로 전향 (진작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2년간 252경기에 출장한 뒤 2010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공식 경기에는 뛰지 않았다.

짧지만 강렬했던 Eckstein과의 3년 (2005-2007)


총평: Eckstein에 대한 두 가지 시선

David Eckstein을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를 "늘 110%의 노력을 기울이던 작은 거인"으로 바라보는, 연민과 애정이 섞인 드라마틱한 시선이었다. 평균 신장 188cm의 건장한 빅 리거들 사이에서 단신의 몸으로 데뷔했던 Eckstein의 성공 스토리는 스포츠 저널리스트들이 정말 좋아하는 소재였다. 단 한번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적이 없이 그저 야구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모든 확률을 뒤엎고(Against all odds)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WS MVP까지 따낸 그의 커리어 스토리, 그리고 그 유명한 Grit과 투지는 스포츠에서 '감동'을 갈구하는 팬들에게 묘한 가슴뭉클함을 안겨주었다. 

두번째는 이 전자에게 조소를 날리는 듯한 "그래봤자 단타 이상은 생산해낼 수 없던, 좁은 Range와 약한 어깨를 가졌으나 몹쓸 투지 때문에 과대평가된 웃기는 유격수" 였다. 이들은 wRC+, UZR, SLG 등 Eckstein의 후진 세이버 스탯 카테고리들을 들며 Eckstein이 얼마나 과대평가되었는지 까대기 시작했다. 거품을 걷어내려는 노력은 Eckstein이라는 선수의 가치에 대한 비하로 쉽게 전이되었고, Eckstein이 남긴 업적들 역시 "사람들이 제대로 스탯 분석을 할 줄 몰라서 그렇지, 알만한 사람들은 Eckstein이 얼마나 허접한지 다 알아" 식으로 매도되었다. Fire Joe Morgan 같은 사이트들은 (FJM: 미 스포츠 저널리즘의 폐해를 풍자 및 고발하던 사이트로, ESPN 해설가 Joe Morgan의 어록을 까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은 Eckstein을 비아냥거리는 데 앞장섰으며 (정확히 말하면 Eckstein에 대한 스포츠 저널리스트들 및 미디어에 대한 비아냥거림이었으나), 몇몇 세이버리스트들은 Eckstein이 대체 언제부터 가슴으로 (Heart) 야구하는 것을 그만두고 남들처럼 팔과 다리를 써서 야구를 할 것인지를 물었다.

I might not be the best president, but I will always hold up the integrity of this office. That's why I like your son so much. He plays the game with such integrity".                           

                                                   -George W. Bush, to David Eckstein's mother, in November 2002

참 젊던 TLR. 그리고 동안계의 거장 Eckstein.

Eckstein에 대한 조금 더 중립적이고 공정한 평가는 이 두 시선을 모두 받아들여야 가능하다. 

Eckstein이 비록 기민한 풋워크와 탁월한 위치선정으로 신체적 약점을 보완하려고 노력했으나, Eckstein의 수비는 가장 나았을 때도 평균 수준이었다. 작은 몸 때문에 다이빙을 해도 그가 커버할 수 있는 범위는 좁았으며, 확실히 약한 어깨 때문에 1루 송구는 늘 버거워보였다. Angels 시절 그는 3년간 매년 최소 +3.3의 UZR을 기록했으나, Cardinals에서 그는 -8.3 --> +1.5 --> -9.8의 조금은 안타까운 UZR을 기록했다. 좁은 레인지와 약한 어깨를 보완하기 위해 그는 평범한 타구에 대한 에러를 줄이고 더블 플레이를 부드럽게 연결시키는 데에 집중했으며 (연습으로 극복이 가능한 부분이 아닌가) 결과적으로 2003,2004, 2006년 3시즌에 수비율 상위 3위에 들었고, 2005년에는 리그 내에서 가장 많은 더블플레이를 성공시킨 유격수였다. (물론 수비율이라는 스탯은 정말 허접한 스탯이지만, 적어도 Eckstein이 노력으로 많은 것을 극복했다는 부분은 알 수 있다). 2004년까지 그는 리그 평균 수준의 유격수 수비를 보였다고 해도 괜찮으며, Cardinals로 이적 후 그의 수비는 한계를 조금 더 명확히 노출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체구를 생각했을 적에 이 정도 수비를 해낸 것도 사실은 기특하지만, 프로에서 "가진 것에 비하면" 이라는 상대적인 명제는 의미가 없다.  

Eckstein이 타석에 들어설 때 장타를 기대하는 팬은 없었으며, Eckstein 본인도 늘 입버릇처럼 "나는 1루 베이스에 나가는 것이 사명" 이라고 말했다. TLR과 Mike Scioscia, 그와 함께했던 두 감독은 Eckstein을"상대 투수를 괴롭혀서 많은 공을 던지게 하고, 뛰어난 배트 컨트롤로 파울볼을 만들어내는 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Classic Leadoff" 로 정의했으며, 특히 La Russa는 Eckstein을 "Pesky" (성가시고 귀찮다는 뜻, Annoying과 흡사) 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그도 그럴 것이, Eckstein의 남다른 근성과 Grit은 타격 어프로치에서부터 이미 눈에 띄었고, 공에 배트를 맞추고 삼진을 피하는 데에는(Putting Balls in play) 훌륭한 재능이 있었다. 작은 체구 덕에 좁은 스트라이크 존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도 이득이 되었으나, 공에 맞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Eckstein의 자세는 투수들의 신경을 많이 거슬렀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지배하던 자, David Eckstein

2001년: 희생번트 1위 (16개) ,HBP 1위 (23개), 최저 헛스윙률 1위 (8.1%), 0-2 카운트 타율 1위 (.351)

2003년: 희생번트 1위 (14개) ,HBP 1위 (27개), 최저 헛스윙률 1위 (7.7%), Pct of Putting Balls in play 3위 (53.9%) 

2003년: 희생번트 4위 (10개), 최저 헛스윙률 2위 (7.7%), 

2004년: 희생번트 4위 (14개), 최저 헛스윙률 1위 (7.5%), 초구 스윙률 리그 최저 (11.2%), Pct of Putting Balls in play 4위                             (52.9%), AB per SO 1위 (11.6)

2005년: AB per SO 2위 (14.3), 득점권 타율 리그 2위 (.351)

2000년대 (2000-2009) 최소 800경기 이상 출장한 선수들 중 K% 4위 (7.3%, 1위 Juan Pierre)


Eckstein의 10년 커리어를 통틀어 통산 장타율은 .355에 불과하며, 7개의 3루타와 8개의 홈런을 터뜨린 2005년 .395가 커리어 최고 수치이다. wRC+, OPS와 같은 통상적인 지표에서 Eckstein은 불리할 수 밖에 없으며, "최대한 많은 득점을 생산해내는 것" 에 바탕을 둔 세이버 지표 상에서 단타 이상을 생산해낼 확률이 미미했던 Eckstein의 무능력함과 잉여력은 특히나 돋보였다.

Eckstein은 남들과 같은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 뼘, 아니 두 뼘이 작은 키에, 팔과 다리도 모두 6'2인치 짜리 평균 선수들에 비하면 짧았다. 운동신경은 좋았고 순발력과 민첩함은 뒤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Billy Hamilton이나 Dee Gordon처럼 엄청난 순수 운동능력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보통 선수들 처럼 Contact + Power + Line Drive hitting + Throwing Arm + Pure speed와 같은 Tool로 승부를 걸었다면 그의 야구 커리어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그만의 스타일로 야구를 해왔다. 그리고 그가 잘하는 것들, 즉 삼진을 당하지 않는 능력, 파울로 공을 커트해내는 능력, 어떻게든 내야 밖으로 타구를 보내는 능력 등은 최고 수준의 무대인 빅 리그에서도 통함을 증명해냈다. 물론 그의 성공에는 그가 커리어 대부분을 Hit-and-run과 번트를 선호하던 Mike Scioscia, Grit 과 Hustle 페티쉬의 소유자이자 작전수행 능력을 중시하는 Tony La Russa, 이 두 감독 밑에서 보내는 운도 작용했다고 사료된다.

"I can remember talking to Don Zimmer a couple of years ago about him. He said, 'You look at him, you can't figure it out.' And then during the course of the game he's in the middle of every single thing."

-Jim Leyland on David Eckstein before WS Game 5 (2006)

 

David Eckstein의 고등학교 교지에 Eckstein은 "Most Helpful" 한 학생으로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게 위선이었는지 가식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프로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을 돌이켜 봤을 때 Eckstein은 남을 돕고, 팀을 돕는 것에서 의미를 찾던 사람이고, 선수였다. 그리고 Eckstein은 타고난 신체적 조건 때문에 남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팀을 도울 수는 없었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눈물샘을 자극하고 감동을 이끌어내려고 디자인 된 진부한 신데렐라 스토리들은 Eckstein의 "인간 승리" 에 지나치게 포커스를 맞추었고, 이는 역효과를 불러왔다. 이러한 부분들을 빼고 냉정하게 Eckstein이라는 선수가 어떤 식으로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왔는지에만 집중한다고 해도, 그의 커리어는 충분히 존중받을만 하다. Eckstein은 철저한 노력과 뛰어난 야구 센스로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했고, 10년간 리그 평균선에 크게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수준의 공헌을 하며 10년간 19.6M의 연봉을 받고 18.9의 WAR를 쌓았는데, 이는 상당히 괜찮은 효율성이다. 그리고 Average 수준의 Shortstop은 예전에 주인장님이 한 번 언급하셨듯 생각보다 상당히 가치있는 재산이다. 

Intangible의 힘을 믿든, 믿지 않든, Eckstein은 주변 사람들에게 영감과 동기를 주고, 에너지를 불어넣었으며, 그 존재 자체로 팀에게 긍정적인 힘을 가져다 주었던 선수였으며, 무엇보다 우리에게 좋은 기억을 남겨주었다. 수많은 확률과 "너는 안돼" 를 이겨내고 가장 큰 무대에서 두 번이나 빛난 그는 늘상 "You see? Things work out" 을 입에 달고 다니던 낙천주의자였으며, 그의 이러한 성격을 높이 산 Cardinals 구단 측에서는 Eckstein이 팀 마이너리거들을 상대로 자신의 경험과 야구 인생에 대해 강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했다.

우리 블로그의 한 댓글에서 "스포츠를 보는 가장 큰 이유는 감동과 승리가 아니겠는가" 하는 구절을 본 적이 있는데, Eckstein은 감동도 주었고 승리도 주었으니,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행운의 상징?


Did you know...

  • 집안에 흐르는 유전병 때문에 형제들이 어렸을 때부터 신장병을 앓는 모습을 보고 자란 David Eckstein은 프로에 데뷔한 이후 줄곧 신장병 환자들을 위한 구금 활동에 활발히 참여했으며, 지역사회에 대한 환원과 봉사를 꾸준히 실천해왔다. Cardinals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데뷔 초기 Angels 시절에도 Eckstein은 팬들에게 늘 "옆집 청년"같은 이미지로 다가갔으며, 암투병 어린이나 신장병 어린이들을 위해 꾸준한 후원을 지속했다. (Angels의 한 리포터는 Eckstein이 Angels에서 논텐더로 풀렸을 때, Eckstein의 소식을 어린 딸에게 전하자 도저히 위로할 수 없을 만큼 딸이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 Eckstein은 5남매의 막내인데, 태어났을 때 병원에서 아이가 건강하다는 진단을 받았음에도 노파심에 다시 재검을 요청했다. 이 때 한 한국계 의사가 Eckstein의 내장을 근육이 막고 있는 것을 발견, 급히 수술을 진행해 제거했는데, 미리 발견하지 않았으면 생명이 위태로웠을 것이라고 한다. Eckstein 가족은 가족 대부분이 University of Florida 출신이며, David은 Padres에서의 선수생활이 끝난 후 온라인 클래스를 들으며 2012년 Political Science 학위를 따고 졸업했다.

  • David은 2006년 WS MVP 부상으로 받은 그 Corvette을 형 Rick Eckstein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유는 스틱을 몰 줄 몰라서....

  • 역사에 길이 남을 2011년 WS 6차전 시구자가 David Eckstein이었다. 이러니 St. Louis에서 사랑을 안 받을 수가 없다.

  • Eckstein은 2005년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Ahsoka의 목소리로 출연했으며 예전에 유명했던 "The Brady Bunch" 라는 시트콤에 나왔던 배우 Ashley Drane과 결혼했으며 (Disney World에서 프로포즈하고 결혼했다고 한다) 현재 부인의 사업을 도우는 한편 (여성 Sci-fi 팬들을 위한 각종 물건들을 만드는 회사로, 관심있으신 분들은 들려보시길 (www.heruniverse.com) 형인 Rick Eckstein (현 Nationals 타격코치) 와 함께 오프시즌에는 학생들에게 야구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Rick Eckstein은 동생을 위해 자신의 신장을 기증했다. 

by Doovy

맺는말: Revisiting TLR ERA 시리즈는 오늘 Eckstein편을 마지막으로 휴식에 들어갑니다. 그간 9편에 걸쳐 8명의 선수들을 돌아보았는데, 아직도 쓸 선수들이 많이 남아있지만 다음 오프시즌을 기약하겠습니다. 이번 오프시즌이 워낙 지루해서 시작한 시리즈였는데, 개인적으로 여러 선수들을 돌아볼 수 있어서 의미있고 빡센(?) 시간들이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저는 4월 프리뷰 때 다시 포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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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ovy

일곱번째 TLR 시리즈 주인공은 Cardinals에 와서 빛을 보기 시작한 Late-bloomer 투수 계보의 초대격이던 Texas 출신 우완투수, Woody Williams이다. 이 Late-Bloomer (aka Dave Duncan 컬렉션) 계보는 이후 Jeff Suppan-Jason Marquis-Joel Pineiro-Kyle Lohse 등이 이어왔는데, Woody Williams는 이들 중 가장 드라마틱하고도 불꽃같은 변신으로 짧고 굵게 Cardinals의 2000년대 초반을 장식했으며, Dave Duncan의 인생 최대 역작 중 하나로 손꼽힌다. 커터가 지금처럼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절 효과적인 커터로 Pitch-to-contact 철학의 정점을 찍었던 Woody Williams를 잠시 곱씹어보자.

 

Jocketty의 역대 최고의 Trade Deadline Move 중 하나, Woody Williams

 

 

Gregory Scott 'Woody' Williams

RHP (Starter)

DOB: 1966년 8월 19

Birth: Houston, Texas

Time with Cardinals: 2001-2004


Draft and Minors

Williams 는 University of Houston 출신으로, 1988년 드래프트에서 무려 28라운드 (전체 732번)에서 지명된 끝에 Blue Jays 유니폼을 입고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전체 732번에서 지명된 것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듯이 그에 대한 기대는 처음부터 크지 않았다. 패스트볼 구속이 빨랐던 것도 아니며 (드래프트 당시 90마일 근처) 압도적인 breaking stuff 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나이가 어리거나 (대졸 후 드래프트 참여, 계약 당시 거의 만 22세) 탁월한 하드웨어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키 6'0). 과연 빅 리그에 데뷔할 수나 있을까 싶은 수준의 지극히 평범한 선수로, 대학에서도 유격수를 보다가 뒤늦게 투수로 전향한 케이스였다. 그나마 "괜찮은 커맨드"와 "가능성이 있는 커브+체인지업" 그리고 Intangible "근성" 하나를 믿고 한번 키워봄직한 투수였다.

Williams는 마이너리그에서 생각보다 빠른 성장을 했고, 1990년에는 AAA볼까지 경험을 했다 (28라운드 출신 치고는 빠른 성장이지만, 나이도 워낙 많았다) Blue Jays에서는 어차피 Ceiling이 높지 않은 Williams를 릴리버로 쓸 생각을 하고 1991년 그를 릴리버로 돌리는 실험을 했으나, AAA볼에 올라간 Williams의 K/9이 하락하면서 이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그래도 Williams는 공격적인 피칭과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는 습관으로 적은 피홈런율을 기록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이를 무기로 1992년 AAA볼에서 괜찮은 성적을 내고 (120.2이닝 평균자책 3.13) 1993년 스윙맨으로 Blue Jays 로스터에 들었다. 물론 포스트시즌 엔트리에는 들지 못했다.

Woody Williams' Minor League Track Record

Year Age Tm Lg Lev W L ERA G GS GF CG SV IP H R ER HR BB SO WHIP H/9 HR/9 BB/9 SO/9 SO/BB
1988 21 2 Teams 2 Lgs A--AA 10 4 2.16 18 16 0 2 0 104.1 75 35 25 2 33 83 1.035 6.5 0.2 2.8 7.2 2.52
1988 21 St. Catharines NYPL A- 8 2 1.54 12 12 0 2 0 76.0 48 22 13 1 21 58 0.908 5.7 0.1 2.5 6.9 2.76
1988 21 Knoxville SOUL AA 2 2 3.81 6 4 0 0 0 28.1 27 13 12 1 12 25 1.376 8.6 0.3 3.8 7.9 2.08
1989 22 2 Teams 2 Lgs A-AA 6 10 2.89 34 21 9 2 4 152.1 124 58 49 9 60 111 1.208 7.3 0.5 3.5 6.6 1.85
1989 22 Dunedin FLOR A 3 5 2.32 20 9 8 0 3 81.1 63 26 21 3 27 60 1.107 7.0 0.3 3.0 6.6 2.22
1989 22 Knoxville SOUL AA 3 5 3.55 14 12 1 2 1 71.0 61 32 28 6 33 51 1.324 7.7 0.8 4.2 6.5 1.55
1990 23 2 Teams 2 Lgs AA-AAA 7 10 3.60 45 12 19 0 5 135.0 126 65 54 8 43 82 1.252 8.4 0.5 2.9 5.5 1.91
1990 23 Knoxville SOUL AA 7 9 3.14 42 12 19 0 5 126.0 111 55 44 7 39 74 1.190 7.9 0.5 2.8 5.3 1.90
1990 23 Syracuse IL AAA 0 1 10.00 3 0 0 0 0 9.0 15 10 10 1 4 8 2.111 15.0 1.0 4.0 8.0 2.00
1991 24 2 Teams 2 Lgs AAA-AA 6 6 3.88 49 1 24 0 9 97.1 94 45 42 3 41 74 1.387 8.7 0.3 3.8 6.8 1.80
1991 24 Knoxville SOUL AA 3 2 3.59 18 1 8 0 3 42.2 42 18 17 1 14 37 1.312 8.9 0.2 3.0 7.8 2.64
1991 24 Syracuse IL AAA 3 4 4.12 31 0 16 0 6 54.2 52 27 25 2 27 37 1.445 8.6 0.3 4.4 6.1 1.37
1992 25 Syracuse IL AAA 6 8 3.13 25 16 3 1 1 120.2 115 46 42 4 41 81 1.293 8.6 0.3 3.1 6.0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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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ted 2/19/2013.

1993-2000년: LAIM 

Williams는 데뷔 시즌 이후 4년차였던 1996년까지 ML에서 풀타임을 치른 적이 없었다. AAA행은 늘 그에게 고려해야 할 옵션이었고, Williams 정도의 재능은 얼마든지 Replacable 했다. 일각에서는 90년대 초 Blue Jays 투수진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Williams가 마이너리그에서 오래 뛰었어야 했다고 얘기하는데, 이는 절반의 사실이다. 1992-3년 WS 우승 당시 Jays 투수진에는 Jimmy Key, Dave Stewart, Dave Stieb 외에도 David Cone, David Wells, Al Leiter 등 이후 90년대를 주름잡는 (Williams보다 훨씬 높은 ceiling을 보유한) 투수들이 많았다. 허나 1995년 이후의 Jays 투수진을 보면 마치 2007년 Cardinals 투수진을 보는 마냥 착잡하다. 마이너리그에서 Williams의 기록은 (특히 AAA 승격 이후는) 그다지 압도적이지 못했으며, 빅 리그 승격 이후에도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다. (Williams는 1이닝을 압도할만큼의 구위를 지니지 못했으며, 탈삼진 능력이 후진 것에 비하면 컨트롤이 대단한 편은 아니었다. 따라서 데뷔 첫 3년간 그에게 선발등판 기회는 거의 돌아오지 않았다.)

All-around-average 투수였던 Williams가 유일하게 평균 이상으로 해낼 수 있던 것은 그나마 이닝을 꾸역꾸역 먹는 것이었다. 1997년 Williams는 Hentgen과 새로 들어온 Clemens 둘의 원투펀치 뒤에서 31경기 194.2이닝을 던졌고, 이듬해에인 1998년에도 32경기에 선발로 나가 208.2이닝을 소화하며 자신의 장점을 십분 발휘했으나, 2년간 무려 64개의 홈런을 허용했다. Woody는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어떻게든 공을 집어넣는 공격적인 피칭에 익숙해져 있었으나, AAA볼과는 달리 ML 타자들은 이를 쉽게 홈런으로 연결시켰다. FIP는 두 시즌 모두 5점대가 넘었고, 피안타율만큼은 리그 상위권이었다.

참 어색한 Woody의 Jays 시절 모습

 

1998년 오프시즌, Jays는 Woody Williams에 릴리버 Carlos Almanzar, 유망주 Pete Tucci까지 얹어서 Padres의 1라운더 출신 선발투수 Joey Hamilton과 바꾸는 3:1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당시 Pete Tucci는 ML에 데뷔하지 못했기에 생소한 이름이지만, 나름 1996년 드래프트에서 Jay가 1라운드에서 뽑은 외야수이며, 파워와 스피드를 모두 지닌 나름 (폭망한) Tool-guy였다. 특히 1998시즌에서 A+와 AA를 합쳐 30홈런 112타점 .318/.376/.602를 때리며 한창 주가를 올린터라, Jays가 Joey Hamilton에 대한 기대가 꽤 컸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당시 Williams와 Hamilton의 선수 가치가 어느 정도 차이가 났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기도 하다. 

Williams가 이후 NL로 건너가 완전히 '용'이 된 반면, Joey Hamilton (추억이 돋는다 이 이름!) 은 1998년이 사실상 마지막 전성기였다 (그래봤자 WAR 1.6에 그쳤지만...) Hamilton은 당시 1라운더 특유의 Hype에다가 6'4 220Ib의 당당한 하드웨어, 그리고 데뷔 첫 2시즌간 보여준 좋은 모습 (2년간 15승, 300이닝, 3완봉, 평균자책 3.02) 때문에 계속 Padres에서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려 보았던 투수였는데, 하체를 거의 쓰지 않고 상체의 힘만으로 던지던 투구폼과 멘붕 경향 (그로 인한 고질적 제구 불안) 때문에 결국 망하고야 만 케이스다. 그래도 나름 Padres에서는 5년동안 934이닝을 소화해주고 55승 WAR 14.8에 평균자책 3.83을 해줬으니 (기대만큼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 밥값은 했다고 봐야 하겠지만, Blue Jays로 옮기고 나서는 무려 6.52의 평균자책을 기록하며 불펜으로 쫓겨났으며, 3년간 도합 WAR 0을 기록하고 방출되었다. 

이 트레이드는 사실 Woody Williams와 Ray Lankford 의 트레이드만큼 관심을 받지는 않았으나, 돌이켜보면 Jays 입장에서  Home-run-prone인 32세의 오른손 선발투수에다가 불펜투수 + 유망주까지 더해서 뭔가 선발진 강화를 꾀했으나, 당시 28세였던 Hamilton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강화는 커녕 선발진 붕괴를 초래한 굉장히 끔찍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Tucci가 ML에 데뷔조차 못하고, Carlos Almanzar도 2년간 107이닝 WAR -0.2를 찍으면서 전혀 San Padres에 도움이 되지 못했긴 했으나, Williams는 그래도 Padres로 건너간 이후 2년 반동안 500이닝과 30승, WAR 3 이상을 적립해주면서 자신에 대한 Padres의 기대치는 그대로 맞춰주었다. 이 정도면 됐지, 뭘 더 바랬는가. 

재미있는 것은 트레이드 상대였던 Joey Hamilton이 Williams와 마찬가지로 1988년 드래프트 28라운드에서 지명당했었다는 점이다 (물론 Hamilton는 고졸이었고, 계약하는 대신 대학에 진학, 3년후 1991년 드래프트 1라운드 8번으로 지명되었다.) 

Woody Williams: Another name for mediocrity (1997-2001년 전반기) 

Year Age Tm Lg W L ERA GS IP H R ER HR BB SO ERA+ WHIP H/9 HR/9 BB/9 SO/9 SO/BB
1997 30 TOR AL 9 14 4.35 31 194.2 201 98 94 31 66 124 104 1.372 9.3 1.4 3.1 5.7 1.88
1998 31 TOR AL 10 9 4.46 32 209.2 196 112 104 36 81 151 103 1.321 8.4 1.5 3.5 6.5 1.86
1999 32 SDP NL 12 12 4.41 33 208.1 213 106 102 33 73 137 96 1.373 9.2 1.4 3.2 5.9 1.88
2000 33 SDP NL 10 8 3.75 23 168.0 152 74 70 23 54 111 114 1.226 8.1 1.2 2.9 5.9 2.06
2001 34 SDP NL 8 8 4.97 23 145.0 170 88 80 28 37 102 80 1.428 10.6 1.7 2.3 6.3 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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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ted 2/20/2013.

얼마 전 2013년 HOF 후보들을 다루는 기사에서 Sports Illustrated의 한 기자는 LAIM (League-Average-Inning-Muncher) 라는 표현으로 Woody Williams의 커리어를 설명했다. 사실이다.  Williams는 이닝을 먹어주는 것 말고는 딱히 큰 이거다 싶은 장기가 없었고, 뒤늦은 성장을 꿈꾸기에는 나이도 너무 많았다. 이미 그의 나이는 만 서른 넷, 한국 나이로는 서른 여섯이었다. 

Williams가 Cardinals 이적 후 첫 2년간 보인 성적은 Dizzy Dean에 비교된다.

 


2001년: 운명적인 트레이드

이미 자주 언급되긴 했지만 다시 한 번 돌아보자면, 2001년 7월 29일 Cardinals는 포화 상태인 외야진 정리를 위해 Ray Lankford 트레이드에 나섰다. 그리고 웬만하면 그 댓가로 선발 투수를 물어오길 바랬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단연 Andy Benes였다. DK57-Matty Mo의 훌륭한 원투펀치와 역대 최고의 루키시즌을 만들어내고 있던 Pujols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Cards의 성적은 트레이드 당시 5할에서 2게임 앞선 53승 51패에 불과했는데, 여기에는 역대 선발투수 최악의 시즌을 향해 (Sponsored by TLR) 달려가고 있던 Andy Benes의 "저는 배팅볼을 던진답니다" 캠페인이 큰 역할을 했다.

Andy Benes는 시즌 첫 등판 Coors Field에서 2.2이닝 10자책점의 참사를 떠안은 것으로 시작, 매 경기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다. 패스트볼 구속은 88마일대에서 형성되었으며, 슬라이더는 릴리스 포인트를 완전히 잃어서 자기 공처럼 던질 수가 없었다. 그나마 6월 초에 3경기 연속 QS를 기록한 것 덕분에 전반기를 무려 6.95의 평균자책으로 마무리했으며, 후반기에도 전혀 나아진 모습 없이 평균자책 7점대 벽을 가뿐히 뛰어넘으며 TLR을 당황케했다. Williams 영입이 확정된 다음 날인 8월 3일, TLR은 Marlins와의 홈 4연전 더블헤더 2차전에서 (1차전은 Matt Morris) Benes를 투입해 마지막 기회를 주었고, Benes는 혼신의 힘을 다해 117구를 던지는 역투 속에 6.1이닝 5피안타 3볼넷 4실점으로 패전을 안았다.

다음 날인 8월 4일, 만 35번째 생일을 2주 앞둔 Woody Williams가 생소한 Birds on the bat 유니폼을 입고 Busch Stadium에 섰다. 당시 아무도 Williams가 이후 후반기 리그 최고 선발투수로 군림할 것이라고 생각치 않았었으며, 과연 Cardinals가 6인 로테이션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지도 불분명한 상황이었다. 상대는 전날 Benes에게 패전을 안긴 Marlins, 투수는 Williams와 정반대인 A.J. Burnett이었다. Williams는 6이닝 7피안타 무실점 0BB 5K의 깔끔한 피칭을 한 뒤 Standing-O를 받으며 마운드를 내려왔고 팀이 3:0으로 승리하며 승리투수가 되었다. TLR은 "중요한 경기에서 좋은 인상을 남겼다"며 Williams를 칭찬했고, 이후 Andy Benes는 시즌 내내 불펜에서 뛰었다 (Andy Benes는 Williams가 전체 732번으로 뽑혔던 바로 그 88년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1번이었다. 역시 인생은 오래 살고 봐야하는 것인가..)

Woody's Incredible 2nd Half Stretch

Date Tm Opp Rslt Dec IP H R ER BB SO HR ERA BF Pit
Player went from San Diego Padres to St. Louis Cardinals
Aug 4 STL FLA W,3-0 W(9-8) 6.0 7 0 0 0 5 0 4.77 23 98
Aug 10 STL @ NYM W,7-6 4.0 7 5 5 2 2 1 4.94 20 76
Aug 15 STL CIN W,8-4 W(10-8) 5.0 6 3 3 3 2 2 4.95 23 94
Aug 20 STL @ CIN L,4-5 6.0 7 1 1 1 6 0 4.83 27 97
Aug 25 STL @ CHC L,4-6 L(10-9) 6.0 7 6 5 2 2 1 4.92 26 97
Aug 31 STL @ LAD W,5-1 W(11-9) 9.0 4 1 1 1 3 1 4.72 31 108
Sep 5 STL @ SDP W,2-0 W(12-9) 9.0 2 0 0 0 6 0 4.50 27 101
Sep 20 STL @ PIT W,9-1 W(13-9) 7.0 3 1 1 3 3 1 4.39 26 105
Sep 25 STL @ HOU W,3-2 W(14-9) 9.0 3 2 1 3 9 0 4.24 33 138
Sep 30 STL PIT W,7-3 W(15-9) 7.0 2 3 2 0 8 1 4.18 24 97
Oct 5 STL HOU L,1-2 7.0 6 0 0 4 6 0 4.05 30 125
TOT 220.0 224 110 99 56 154 35 4.05 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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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s는 후반기 11경기에 등판했고, 팀은 그가 등판한 경기에서 8승 3패 (+5)를 만들어냈는데, 이 시즌 90승 72패를 거두었던 San Francisco Giants가 Playoff에 진출하지 못했음을 생각한다면 이 +5가 있고 없고는 굉장한 차이이다. 특히 8월말~9월초에 1실점 완투승에 이어 2피안타 완봉을 거둔 점, 1위 싸움이 치열하던 9월 말 지구 선두팀인 Astros의 Wade Miller와의 맞대결에서 138구 1자책 완투승을 거둔 부분은 도저히 칭찬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전 경기에서 믿었던 Matty Mo가 Astros 타선에게 무지하게 얻어터졌기에 더더욱 필요한 승리였다).

만 35세의 Woody Williams는 빅 리그 데뷔 8년만에 처음으로 Playoff 마운드에 섰는데, 그것도 자타공인 최고 투수였던 Randy Johnson을 상대로 Division Series 2차전을 책임져야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Woody 는 그 경기를 통해 자신이 한 단계 성장했음을 과시했는데, 무려 7이닝 4피안타 1실점 9K (시즌 최다) 라는 엄청난 피칭으로 Randy Johnson에게 포스트시즌 7연패를 안겼다. Woody는 7회까지 한점도 주지 않은채 8회에 마운드에 올랐으나, 첫 타자 Greg Colbrunn에게 안타를 맞자 TLR이 바로 Steve Kline으로 교체했고, 이후 Colbrunn이 땅볼로 홈에 들어오면서 실점을 안았다. 교체될 당시 Woody의 투구수는 무려 133개였다. 

또한 Williams는 이 경기에서 3회초 선두타자로 나서 무려 8구까지 가는 승부끝에 Randy Johnson의 패스트볼을 후려서 센터쪽으로 거의 홈런이 될뻔할만큼 깊은 2루타를 작렬, Polanco의 희생플라이 때 홈에 들어오면서 시리즈 동점을 만드는게 커다란 수훈을 세웠다. (Williams는 커리어 내내 타격으로는 알아주는 투수였다)

Matheny는 Williams의 장점들이 한껏 부각되도록 도와준 은인 중 하나다.

 


 

2002년

Williams가 부상으로 절반을 날려먹은 시즌. Left-Oblique 부상으로 시즌 첫 등판부터 삐걱거렸던 Williams는 복귀 후 7월 초까지 평균자책 2.35를 기록하며 작년의 기세를 그대로 이어갔으나, 올스타 브레이크를 앞두고 다시 왼쪽 Rib-cage 부상으로 DL에 올라 8월말이 되서야 돌아왔다. Williams의 딜리버리는 왼쪽으로 Cross-body Motion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왼쪽 복사근 및 갈비쪽에 무리가 간다는 지적이 있었고, 이게 한창 좋을 시즌인 2002년에 터지면서 아쉽게도 100이닝정도를 놓쳤다.

건강할 때 Williams는 정말 좋았다. 17경기에서 103.1이닝을 소화했고, 팀은 그가 등판한 경기에서 12승 5패였다. 세부스탯에서도 2001년 후반기의 포스를 그대로 이어가면서 완전히 피어났다. 또한 자신감을 얻은 탓인지 전보다 더욱 공격적인 피칭을 이어나갔고, 다양한 구질을 평균 이상의 커맨드로 다룰 수 있었기에 컨디션이 안좋은 날도 데미지를 최소화하는 능력이 있었다. 2002시즌 17경기에서 Williams가 3실점 이상 허용한 경기는 단 한 경기 뿐이었다.

Williams의 성공 요인 중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진 것은 Dave Duncan이 그에게 하사한 Cutter이다. 이미 Padres 시절부터 Williams는 커터를 던질 수 있었으나, Dave Duncan을 만난 이후로 이 커터의 구속을 증강시켜 2001년부터는 커터 구속이 90-92마일까지 이르렀다. 또한 Duncan은 Williams의 피홈런에 크게 이바지하던 커브의 빈도수를 줄이는 대신 Change-up을 크게 발전시켰는데, 이는 Williams의 성공에 있어서 굉장히 큰 공헌을 했다. 커터-체인지업 콤보가 완성 단계에 들어서자 Williams는 리그 내에서 가장 좌타자를 상대로 효과적인 우투수로 거듭났다 (한창 잘 던질 시절의 K-Mac 선발투수 형으로 봐도 괜찮을 것 같다.) 2002년 Woody는 리그 내에서 좌타자 상대 피안타율 3위에 올랐는데 (0.182), 이는 Blue Jays 시절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Williams의 진화에 고무된 Cardinals는 오프시즌이 시작하자마자 바로 2년간 14.9M + 3년차 8M 팀 옵션의 계약으로 Williams를 붙잡았는데, 이제 갓 피기 시작한 노장 투수의 37-38세 시즌을 위해서 쓴 금액 치고는 꽤 훌륭한 계약이었다. DK의 갑작스런 비보 이후 Woody가 제공하던 Veteran Leadership 또한 인정받은 덕이기도 했다.


2003년

Woody의 37세 시즌을 앞두고 스프링 트레이닝 당시 팀 포수였던 Mike Matheny는 "우리 팀에서 가장 Consistent한 투수인 Woody가 건강하지 못하다면 올 시즌은 힘들 것" 이라고 말했다. Matheny의 걱정은 기우였는데, 이 시즌 Woody는 무려 18승을 올리며 팔자에 없던 올스타전까지 출장했으며, 무려 220.2이닝을 소화하며 투구이닝 부문 리그 4위에 랭크되었다. 

필자에게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던 경기는 이 시즌 Williams가 친정팀 Toronto 상대로 노히터에 도전하던 장면이었는데, 찾아보니까 2003년 6월 5일 경기이다.(Boxscore) 이 경기에서 Williams는 첫 타석 무사 만루에서 땅볼로 타점을 올리더니, 2번째 타석에서 TLR의 더블 스틸 지시로 2사 2,3루가 되고 상대 투수가 8번 Matheny를 고의사구로 거르면서 자존심을 건드리자 무려 3타점 3루타를 폭발시켰다. 또한 투수로써도 8회 1사까지 노히터를 이어가다가 (Vernon Wells에게 볼넷), Orlando Hudson에게 안타를 허용하고 바로 다음 타자인 Dave Berg를 GIDP 처리하면서 8이닝 25타자 상대 1안타 무실점 (98구) 정말 압도적인 피칭으로 시즌 8승 째를 거두었다. 이 경기 승리로 Woody는 1.99의 평균자책과 8승으로 2개 부문 모두 리그 선두를 달렸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 이후 Woody는 올스타 브레이크를 전후하여 Dead-arm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후반기에는 6승 6패 평균자책 5.23의 굉장히 평범한 투수로 돌아왔다. Woody의 Cutter는 투구수가 많아질 수록 서서히 구속이 줄어드는 모습을 보였으며 (근 2000이닝을 소화한 만 37세의 투수였으니 그럴만도 하다), 커터의 위력이 줄어들 경우 순식간에 난타당하는 모습을 보였다. 전반기에만 무려 134.2이닝을 소화한 그는 후반기에는 고작 86이닝을 소화하는데 그쳤고, 이는 다른 것 보다 경기 중후반을 갈수록 커터의 무브먼트와 구속이 줄면서 피안타가 늘어나는 증상이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닝별 평균자책: 3회: 2.18, 4회 2.76, 5회 4.02, 6회 4.97)

아쉽게도 이적 후 Woody가 보여준 압도적인 모습은 이 시즌 전반기를 이후로 다시 볼 수가 없었다. 그가 무려 18승을 거두면서 모든 면에서 커리어 최고 시즌을 찍은데에는 1) Rolen-Renteria-Vina-Tino Martinez로 이어진 리그 최고의 내야수비진과 2) 투수친화적, 우타자에게 적대적인 홈구장 (홈에서 3.00, 원정에선 5.04), 3) 리그 최고 수준의 득점 지원 (9이닝당 7.0점, NL 1위) 등 여러가지 부수적인 이유가 함께했으며,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에는 서서히 LAIM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2004년 WS 1차전, 강판되는 Woody.

 2004년

 사실상 혼자 팀 투수진을 이끌어야했던 2003년에 비해 2004년은 훨씬 나았는데, Dave Duncan이 신작 Jason Marquis와 리메이크작 Chris Carpenter, 그리고 Woody의 후속작인 Jeff Suppan까지 모두 발매하면서 로테이션이 굉장히 탄탄해졌다. Woody는 11승 8패 4.18이라는 평범한 성적을 냈고, 189이닝을 소화했다.

NLCS 1차전에 선발로 나서 고향팀 Astros를 상대로 6이닝 4실점 승리를 거둔 Williams는 NLCS 5차전에서 Brandon Backe와 함께 0:0의 팽팽한 투수전을 이어갔다. Woody가 7회까지 1피안타 무실점, Backe가 8회까지 1피안타 무실점으로 버텨내면서 도대체 향방을 알수 없는 투수전이 계속되었다. 당시 Brandon Backe가 누군지 잘 몰랐던 탓에 "쟤는 누군데 저렇게 잘던지나" 하면서 의아해했던 생각이 나는데, 이 경기는 결국 9회 Jeff Kent가 Izzy상대로 쓰리런을  치면서 Astros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 시리즈에서 Williams는 양팀 통틀어 최다인 13이닝을 던지면서 St. Louis 에서의 마지막 시즌에서 투혼을 불살랐다. 아쉽게도 그가 Cards 유니폼을 입고 던진 마지막 경기는 WS 1차전으로, 2.1이닝 8피안타 7실점으로 먼지나게 두들겨 맞았다. 전형적인 Dead-arm 증상이었다.

사족을 달자면 2004년 WS 1차전은 필자가 Cards 팬이 된 이후로 가장 Do-over를 하고싶은 경기 중 하나인데, 이 경기를 이겼다면 이 시리즈의 향방은 완전히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Woody가 무너지면서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한 경기를 (3회 끝나고 점수가 7:2) Larry Walker의 홈런이 터지면서 추격하기 시작했고, 결국 7:7, 9:9까지 만들어서 쫓아가지 않았는가. Mark Bellhorn은 이후 필자가 가장 싫어하는 선수가 되었고, 아직도 그 홈런은 파울이었다고 믿고 싶다. 

Woody and the Cardinals: 아름답고 효율적이었던 우리의 만남 (2001-2004): 

Year Age Tm W L ERA GS CG IP H R ER HR BB SO BF ERA+ WHIP H/9 HR/9 BB/9 SO/9 SO/BB
2001 34 STL 7 1 2.28 11 3 75.0 54 22 19 7 19 52 290 190 0.973 6.5 0.8 2.3 6.2 2.74
2002 35 STL 9 4 2.53 17 1 103.1 84 30 29 10 25 76 412 159 1.055 7.3 0.9 2.2 6.6 3.04
2003 36 STL 18 9 3.87 33 0 220.2 220 101 95 20 55 153 944 106 1.246 9.0 0.8 2.2 6.2 2.78
2004 37 STL 11 8 4.18 31 0 189.2 193 93 88 20 58 131 817 101 1.323 9.2 0.9 2.8 6.2 2.26
STL (4 yrs) 45 22 3.53 92 4 588.2 551 246 231 57 157 412 2463 118 1.203 8.4 0.9 2.4 6.3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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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은퇴

Woody에게 걸린 8M짜리 팀 옵션은 (당연하지만) 행사되지 않았고, 오프 시즌에 Woody는 친정팀 Padres과 3.5M짜리 1년 + 인센티브 및 옵션 계약을 맺고 San Diego로 돌아갔다. 이후 2년간 Woody는 젊은 투수들에게 자신의 지혜와 생존법을 전수하며 성공적으로 2년 계약을 마쳤는데, 특히 두번째 해에는 운빨+PETCO 빨을 곁들여 12승 5패 3.65라는 언뜻 보면 상당히 그럴싸한 성적을 냈다. 이 시즌이 마지막이었어야 하는데, 고향팀 Astros는 Woody에게 40세를 바라보는 Woody에게 2년 12.5M 이라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계약을 안겨주었고, Woody는 만 39세 시즌이었던 2007년, 피홈런 35개로 Livan Hernandez, Jamie Moyer 등 피홈런의 달인들을 무찌르고 당당히 NL 1위를 차지했다.

2008시즌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Woody는 무지하게 난타를 당했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 Astros는 Woody를 방출했고, 그는 미련없이 은퇴를 선택했다 (이에 대해 동료였던 Lance Berkman은 "Woody같은 베테랑에게 시범 경기에서 못한다고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조급하다" 고 지적했으나, Astros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2년 계약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을 이런 식으로 몰고 간 셈이었다)

은퇴 후 그는 고향 Houston에서 살고 있으며,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한편 지역 커뮤니티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University of Houston 동문 야구경기에 참관한 모습이 기록되었다.


총평

SI의 Jay Jaffe 가 LAIM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이유는 Woody가 얼마나 평범한 투수였는지를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며, Cardinals에서의 2년 반을 제외하면 Woody는 평범한 투수로 불리우는게 맞다. 특히나 이 단어가 출몰한 기사가 2013년 HOF 후보들을 다룬 것이었음을 생각하면, Woody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에는 지나치게 서민적이고 평범한 투수였다 (함께 언급된 투수들은 Aaron Sele, Jose Mesa 등이었다)

그러나 글을 쓰면서, 자료를 모으고 스탯을 되짚어보면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Woody가 결국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88년 드래프트 대졸 28라운더. 마이너에서 인고의 세월만 5년. 이후로 풀타임 투수가 된 것은 프로 10년차인 1997년 (그때 나이 만 31세). 빠른 공도 없고, breaking-stuff도 없고, pin-point control도 없고, 그렇다고 왼손잡이도 아니었다. 키가 컸던 것도 아니고 탄력있는 몸도 아니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타자와 싸워서 이기겠다는 아주 기본적인 투쟁심과 근성. 오랫동안 던져온 경험과 생존과정에서 익힌 다양한 구질... 그 정도? Williams는 정말 가진 게 없는 투수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풀타임 선발이 된 1997년부터 2006년까지, 그는 그의 30대를 우직하게 불태웠다. 그냥 그가 제일 잘하는 "Pitching"만 꾸준히 했을 뿐이다. 그냥 5일에 한번씩 나가서 던졌고, 던질 때는 최대한 오래 버텼다. 주자가 나가면 자기가 할 수 있는만큼 최대한 못 들어오게 했다 (통산 LOB% 74.3%, 같은 기간 ML 11위). 이 10년간 프로야구에서 그보다 더 많이 던진 선발 투수는 16명에 불과하다 (1817.1이닝). Kevin Brown (1555이닝), 박찬호 (1618이닝), Mike Hampton (1704.2이닝) 등 훨씬 화려한 투수들이 그의 이름 밑에 있다. (비슷한 순위에 Javier Vazquez, David Wells)

중간에 Cardinals라는 팀으로 이적한 것, 운명적으로 Dave Duncan을 만나서 어떻게 하면 자신이 가진 얼마 안되는 이 무기로 싸울 수 있는 지에 대해 배운 후 잠시나마 가치를 인정받았던 것. 나름 올스타에도 선정되었고, 은퇴 후에는 무려 명예의 전당 투표에 오르기까지 했다 (물론 Woody는 표를 받지 못할 것이다.) 월드시리즈에 올라가보기도 했고, Postseason에서 Randy Johnson을 꺾기도 했다. 이보다 인상적인 커리어는 많고, 우리는 늘 그런 커리어들에 익숙하지만, 누구나 그런 화려한 커리어를 밟는 것은 아니다.

League Average. 맞다. Inning Muncher. 역시 맞다. 그러나 LAIM (Lame) 이라고 발음하지는 않고 싶다. 그러기에 Woody는 정말 오랫동안 던졌고, 버텼다. 그리고 그 하나만으로도 존중받을만 하다.


Did you know...?

  • Woody는 훌륭한 타자였다. 빅 리그 통산 4홈런 43타점에 투수로써는 상당히 높은 .194의 통산 타율을 기록하고 있으며, 25개의 2루타를 기록했다. Woody의 스카우팅 리포트에는 그의 타격 재능에 관한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 유격수 출신인 Woody는 타격을 상당히 즐겼는데, 특히 자신이 등판할 예정이던 2004년 WS 1차전을 앞두고 TLR에게 DH를 쓰지 말자고 제안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 Kevin Towers (트레이드 당시 Padres GM)은 Williams-Lankford 트레이드를 자신의 커리어 최악의 무브로 꼽았다. 그래서인지 Woody가 FA가 되자 주저없이 달려들었다 (2005년) 반면 Jocketty는 Williams 트레이드르 "One of my better moves"로 꼽았다.
  • Padres 시절 시즌 중에 자꾸 오른손이 창백해지고 혈액이 통하지 않는 것을 느낀 그는 팀 의료진에게 몇 차례 치료를 부탁했고, 검사 결과 오른쪽 겨드랑이 밑에 혈관이 무너져서 부어오르는 Aneurysm (동맥류) 이 생긴 것으로 판정받았다. 이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느라 2000시즌 그는 아쉽게도 23경기 등판에 그쳤는데, 이 부상에서 회복하는동안 휴식하고 재활했던 것이 궁극적으로 그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는 과거 Yankees의 David Cone이 받았던 수술이며, 90년대를 풍미했던 1루수 John Olerud는 뇌에 동맥류가 있었다.)
  • 본명인 Gregory Scott 대신 왜 별명이 Woody 로 알려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혹자는 Woody가 발군의 타격 실력 때문에 방망이를 뜻하는 Wood가 별칭처럼 된 게 아닌가, 하는데...이것 역시 확실치는 않다. Texas 출신이라서 이런 카우보이스러운 별칭이 어울리긴 하는데, 혹시 아시는 분 있으면 제보를...

by Doovy





출처: SI, ESPN, Baseball-reference, Fangraphs, STL Post dispatch, Riverfront times, Houston Chronicle, LA Times, Baseball-alman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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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Doovy

이번 주 TLR ERA 시리즈는 90년대말 Cardinals의 핵심멤버이자 근대 Cardinals를 거쳐간 선수들 중 순수 운동능력에 관한 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던 외야수, Brian Jordan이다. TLR 시절에 Tony의 리더십과 그의 스타일에 불화 및 갈등을 겪었던 선수들은 한 두명이 아니었으나, Brian Jordan는 Ozzie Smith, Ron Gant 등과 함께 초창기 반 TLR '살생부' 명단의 일원이었으며, 잘 알려져있지는 않지만 풋볼과 야구를 병행했던 몇 안되는 Dual-Atheletes 중 하나이다. 사실은 다른 선수 포스팅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요새 연속으로 이어지던 2000년대 초반 Cardinals 포스팅 난무 및 중복을 피하기 위해 이번 주는 특별히 90년대 후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Brian "투잡" Jordan



Brian O'Neal Jordan 

Outfielder

DOB: 1967년 3월 29일 

Birth: Baltimore, Maryland

Time with Cardinals: 1988-1998


Draft and Minors

Brian Jordan는 Baltimore 태생으로, 이미 고등학교 (Millford Mill Academy) 때부터 가을엔 풋볼, 겨울엔 농구, 봄에는 야구를 하는 만능 선수였다. 키는 6'0 으로 (183cm) 그다지 특출나게 큰 것은 아니었으나, 순간 스피드와 점프력이 뛰어났으며 모든 스포츠에 있어서 뛰어난 경기 감각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Jordan은 고등학교 시절 농구를 가장 좋아했으나, 어차피 자신이 NBA에서 뛰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풋볼과 야구에서 커리어를 탐색했다. (그도 그럴 것이, 6'0으로 NBA를 꿈꾸는 것은 엄청난 테크니션이 아닌 이상 모든 코치들이 만류할 일이다). 

고등학교 Senior 때 야구에서는 .479의 타율과 40개의 도루, 풋볼에서는 21개의 터치다운과 1,014 러닝야드를 기록하며 지역 내에서 가장 촉망받는 운동선수였던 그는 1985년 드래프트에서 20라운드에 Indians에 지명이 되었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고 University of Richmond에 진학한 그는 대학에서도 풋볼과 야구에서 모두 두각을 나타냈으며, 야구에서는 학교 단일 시즌 최다 도루 기록을 세움과 동시에 풋볼에서는 역대 최다 Punt Return 기록을 세운 뒤 1988년 Sociology (사회학과) 학사를 받고 졸업했다. 

1988년 Draft에서 아직 야구로 갈지 풋볼로 갈지 정하지 않은 Brian Jordan을 Cardinals는 1라운드 Supplement 픽으로 뽑았다. 훗날 Jordan는 "사실 당시 (연고팀이었던) Orioles 쪽에서 나를 2라운드에 뽑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Cardinals가 먼저 채갔다" 고 회고했다. (소스: Baltimore Sun) Cardinals는 드래프트 당시 이미 운동능력과 순수 스피드, 강한 어깨가 검증된 Jordan이 타격에서의 성급함을 가다듬고 특유의 탄력을 살릴 수만 있다면 올스타 외야수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는데, 어찌하면 비슷한 시기에 Cardinals에 들어왔던 Ray Lankford와 비슷한 스타일이었다. 한편 1988년 드래프트에는 훗날 Cardinals 유니폼을 입게 되는 선수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는데, 다음과 같다. (참고로 Orioles는 Jordan을 놓치자 2라운드에서 Arthur Rhodes를 뽑았다 ㅎㅎ)

Cardinals를 거쳐간 1988년 드래프트 1라운더들

Year RdPck

Tm

Pos WAR
1988 1 Padres Andy Benes (minors) RHP 28.5
1988 14 Mariners Tino Martinez (minors) 1B 25.1
1988 15 Giants via Reds *Royce Clayton (minors) SS 16.4
1988 22 Cardinals via Yankees *John Ericks (minors) RHP -0.2
1988 23 Cardinals Brad Duvall (minors) RHP
1988 30 Cardinals *Brian Jordan (minors) OF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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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rdan는 결국 야구와 풋볼 중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기로 하고, 고되고 빡센 (그만큼 돈을 많이 벌수 있는) Dual-Athelete 이 되기로 하여 같은 해 NFL 드래프트에도 참가한다. 7라운드에서 Buffalo Bills에게 지명당한 Jordan은 그 해 트레이닝 캠프에서 엔트리에 들지 못하고 짤렸으나, 방출되자 마자 그를 눈여겨 보고있던 Atlanta Falcons에서 데려가 Defensive Back, 더 구체적으로는 Strong Safety라는 포지션에 그를 기용한다.

※풋볼에서 Safety란 포지션은 Defensive Team의 일원으로, 보통 Defensive Line이 상대 Offensive Line에 맞서 대인마크가 되는 반면 Safety들은 라인 뒤에서 서있다가 그때 그때의 약속된 플레이나 상황에 맞춰서 태클을 걸어야 하며, 상대 와이드 리시버의 움직임 및 러닝백을 마크하는데 있어서 큰 책임을 지고 있는 포지션이다. 뛰어난 운동신경과 순간 판단력은 물론이고, 상대 러닝백이 공을 놓칠만큼  강하고 저돌적인 태클을 걸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Jordan은 1988~1989년에 Cardinals 싱글 A에서 충분히 자신의 재능을 검증받았으며, NFL 시즌이 시작할 무렵에는 Falcons에 합류해 풀 시즌을 치른 뒤 다시 야구에 복귀하는 식의 '투잡'을 뛰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Jordan의 운동능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1989년 그는 BA 선정 Top 100에 이름을 올렸고, 1991년 AAA에서 비교적 성공적인 마이너리그 시즌을 보낸 이후에는 BA 랭킹 67위까지 진입했는데, 이 당시 Cards 팜은 선수층이 얇은 편이어서 (특히 가장 유망하던 Ray Lankford와 Gilkey가 팜을 졸업한 지 얼마 안되던 시점이다) 31위의 Dmitri Young, 35위의 Donovan Osborne, 64위의 Allen Watson을 제외하면 별다른 유망주도 없었다.


Falcons 시절 Brian Jordan


Brian Jordan's Minor League Track Record

YearAgeTmLgLevAffGPAABRH2B3BHRRBISBCSBBSOBAOBPSLGOPS
198821HamiltonNYPLA-STL19817112223141233615.310.388.549.937
198922St. PetersburgFLORASTL114543715412110208.349.378.6281.006
1990232 Teams2 LgsAA-A+STL258380713110102222.163.193.200.393
199124LouisvilleAAAAASTL6123821235561144241031741.264.342.410.752
199225LouisvilleAAAAASTL43169155234531416132821.290.337.400.737
199326LouisvilleAAAAASTL381651442454132535941617.375.442.597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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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결정

1991시즌 Brian Jordan은 AAA에서 비교적 성공적인 시즌을 보냄과 동시에 NFL 올스타전이라고 할 수 있는 Pro Bowl에 NFC (NFL은 NFC와 AFC, 양대 컨퍼런스로 나뉜다) 대표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Jordan이 야구에만 전념하기를 바랬던 Cardinals는 Brian Jordan에게 3년간 2.4M의 비교적 큰 계약을 안겨줬고, 특히 사이닝 보너스로  1.7M을 쏘면서 풋볼을 그만두기를 요청했다. Jordan은 이를 수용했고, 이를 들은 Dual-Athelete 계의 대표 주자이자 Brian Jordan의 팀 (Falcons) 동료였던 Deion Sanders는 "아니 그 정도 돈에 풋볼을 관둔다고?" 하는 반응을 보였다.

"I can't believe he gave up football. Doesn't he realize there are baseball and football players who make $6 million a year?"

-Deion Sanders, on Brian Jordan quitting football

90년대초 당시 NFL 최고 연봉자는 Dolphins QB였던 Dan Marino 였는데, 심지어 Marino 의 연봉도 4M 근처에 불과했다. Sanders의 6M 드립을 들은 Falcons 관계자는 "만약 Sanders가 Jordan을 위해 6M을 받아준다면 우리 구단 대표 협상자로 삼겠다" 며 껄껄 웃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당시 Deion Sanders에게 6M은 그렇게 꿈같은 수치만은 아니었다. 이미 당시에도 수비수로써는 드물게 1M 이상의 연봉을 받던 Sanders는 이후 무려 8년연속 올스타에 2차례 Defensive Player of the Year 상을 받는 등 NFL에서 역대급 커리어를 쌓고 이후 NFL HOF에 들어간다. 당시 Sanders와 Jordan은 하위팀 Falcons Defense의 핵심으로 굉장히 강력한 듀오를 형성했으며, Sanders가 엄청난 순수 스피드를 지녔으며 스타성과 언론의 관심을 즐기는 스타일이었다면, Jordan은 (상대적으로) Sanders보다는 덜 까불거리는 성격이었으나 더 저돌적이고 강한 태클러였다. 이 둘은 1991년 Falcons를 하위권팀 Falcons를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고 둘 다 Pro Bowl에 출전했는데,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Jordan이 NFL을 떠난다고 했으니 Sanders도 섭섭할만 하다. Sanders는 Jordan이 풋볼에 집중한다면 훌륭한 커리어를 쌓을만한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당시 Sanders는 그의 ML 커리어에서도 정점을 찍고 있었는데, 1992년 Braves에서 97경기만에 WAR 3.1을 기록했으며 무려 14개의 3루타로 .304/.346/.495의 아름다운 슬래시라인을 찍는다 (좌타자였던 Sanders는 Turner Field의 깊은 우측 외야의 덕을 제대로 이용했다). Deion "Prime Time" Sanders에게 있어서 당시 MLB와 NFL을 겸업하며 6M을 받는 것은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일이었다.

(Source: LA Times)

앳된 Brian Jordan



1992-1994년: 4th Outfielder

힘든 결정을 하고 야구에 전념한 첫 시즌. 1992년 4월 8일, 개막전 로스터에 이름을 올린 Jordan는 4월 8일 선발 우익수로 데뷔에 성공했으며, 데뷔전에서 5타수 2안타 4타점에 도루까지 기록하는 만점 데뷔전을 치렀다. 그러나 5월 중순 Hamstring 부상으로 DL에 올라가면서 일이 꼬였다. 복귀 후에도 Jordan은 타석에서 너무 뻔하게 수를 읽히는 모습을 노출하며 스트라이크 존 바깥쪽으로 유인구를 매번 쫓아가는 (chase) 모습을 보여 Torre 감독의 신임을 얻지 못해 결국 4th Outfielder로 AAA와 ML를 왕복하며 한 시즌을 보냈다.

이 시기 Cardinals 감독이었던 Joe Torre는 Bernard Gilkey-Ray Lankford-Brian Jordan의 자체생산 외야수 3명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 중 Jordan의 출장기회에 있어서 상당히 인색한 면을 보였다. 풋볼과 야구를 병행하던 Jordan은 타자로써 ML에서 롱런하기 위한 Plate Discipline이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배트 스피드로 Fastball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쳐냈으며, 웬만한 빠른 공에는 눌리지 않는 큰 장점이 있었다. 1993년~1994년 그는 각각 1.0과 1.1의 WAR를 기록하며 벤치에서 충분히 제 역할을 해냈으나,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에 온지라 1994시즌이 끝났을 때 이미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훗날 Jordan은 "이 시절 경기 출장 기회가 적다보니까 매 경기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정말 몸을 사리지 않고 뛰었다" 고 말했다. 뼛속까지 밴 그의 Football Mentality는 그가 웬만한 잔부상은 그냥 참고 뛰도록 만들었고, Jordan은 타구가 날아오면 마치 그 공이 상대 러닝백이나 리시버인 마냥 냅다 달려가 몸을 던졌다. 그리고 그러한 자세로 외야 전 포지션을 모두 소화해냈다.


제스처를 보아하니 그랜드슬램이 터진 것 같은데...이 경기의 날짜를 맞춰보실분?



1995년: 주전 발탁

1995년 4월26일, 느즈막히 열린 개막전에서 Brian Jordan은 주전 우익수로 선발 출장, 첫 타석부터 Curt Schilling을 (이 양반 정말 자주 나온다!) 상대로 적시타를 치며 첫 시즌을 상큼하게 시작했고, 이 경기에서 투런홈런 포함 2안타 3타점으로 팀의 승리를 이끌며 주전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시즌 중 Torre가 경질되고 새로 Mike Jorgensen이 부임하면서 Jordan의 입지는 더욱 굳어져갔다. Jorgensen은 "BJ는 그가 이미 최고 수준의 리그에서 플레이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면서 그를 Lankford와 Gilkey 앞에 3번타자로 투입하는 신뢰를 보였고, Jordan는 자신의 첫 풀시즌에서 525PA에서 22홈런 81타점 24도루, .296/.339/.488에 WAR 4.5를 기록하는 굉장히 훌륭한 시즌을 보냈다.

Jordan의 공/수/주 모든 면에서 경기의 흐름을 바꿀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Lankford가 먼저 자리를 잡았기에 우익수를 맡았을 뿐, 다른 팀이었다면 충분히 CF로 통했을 Range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탁월한 센스와 순발력으로 도루 성공률도 높았다. 7월 25일 Mets전, 1회에 솔로 홈런, 3회에 투런을 친 Jordan은 연장 11회말 1사 1,2루에서 끝내기 안타를 치며 사실상 혼자 힘으로 팀의 8:7 승리를 이끌었는데 (이 경기 WPA+ .609), 이는 2012시즌 초 (결과가 달라서 그렇지) Braves 전에서 혼자 북치고 장구친 현 Cardinals 우익수 (공교롭게도 둘 다 백넘버 3번이다) 가 생각나는 기록이다. 

"I feel like this is really my rookie season. They're finally letting me play all the time. I know they expected Lankford to do it, but they didn't really know what to expect from me."

-Brian Jordan, on becoming a full-time player


1995시즌이 끝남은 곧 Jordan이 1991년에 맺은 3년간 2.4M의 Baseball-Exclusive 계약이 만료됨을 의미했다. 28세의 Jordan은  충분히 이 때도 NFL로 돌아갈 수 있었고, 실제로 그를 다시 NFL로 부르는 구단들도 있었다. 그러나 1995년 말, Cardinals는 Jordan에게 3년간 9M 과 500K의 사이닝 보너스가 추가된 계약을 안겨주면서 다시 그를 야구에 붙들어놓았다.

1996년: Mr. Clutch

TLR 부임 첫 해, Gilkey가 Mets로 트레이드되고 베테랑 Gant가 합류하면서 Ron Gant-Ray Lankford-Brian Jordan의 제1대 '간지외야' 가 탄생했다. 이 해 팀 멤버가 많이 바뀌면서 타순을 어떻게 짤까 고민하던, TLR은 뛰어난 운동능력과 빠른 발을 갖고 있는 Brian Jordan을 Leadoff로 쓸 생각을 했다. 이에 5월말, 6월초에 이르러 Jordan로  Leadoff로 투입하는 실험을 11경기에 걸쳐 진행했는데, Jordan은 1번타자로 나서서는 45타수 10안타 .222/.260/.311의 굉장히 저조한 성적을 냈다. 이에 Jordan은 TLR에게 자신은 Leadoff 타입이 아니라며 이 실험을 그만하자고 말렸고 (그도 그럴 것이, Jordan의 통산 BB%은 6.3에 불과하며, 첫 풀타임이였던 1995년에는 고작 4.2%에 그칠만큼 볼넷을 고르는데 흥미가 없었다), 자신은 무조건 타점을 올릴 수 있는 타순에서 뛰고 싶다고 얘기했다.

결국 Jordan은 시즌 내내 중심타선에서 활약하게 되었는데, 이 시즌을 기점으로 Jordan은 "Mr. Clutch"로 불리며 TLR에게 보란듯이 타점을 쓸어담기 시작했다. 이 시즌 Brian Jordan의 득점권 성적은 다음과 같은데, 우리가 그토록 칭찬했던 2012시즌 Allen Craig의 득점권 성적도 Jordan에 비하면 남루해보일 지경이다. (특히 맨 밑에 만루 성적에 주목하시길;)

Brian Jordan in RISP (1996)

Split G PA AB H 2B 3B HR RBI SB CS BB SO BA OBP SLG OPS TB
RISP 104 173 147 62 11 0 10 93 11 1 13 19 .422 .453 .701 1.154 103
--- 128 303 287 76 22 1 6 6 0 0 12 45 .265 .304 .411 .715 118
Men On 120 257 226 83 14 0 11 98 22 5 17 39 .367 .404 .575 .979 130
123 25 24 19 13 5 0 1 31 0 0 1 1 .684 .625 1.105 1.730 21
Provided by Baseball-Reference.com: View Original Table
Generated 2/13/2013.

Jordan은 시즌 초 Wrist Soreness로 첫 2주를 결장한 이후에는 거의 전경기를 소화하며 140경기에서 17홈런 104타점 .310/.349/.483의 성적을 기록하며 팀의 Playoff 진출에 큰 공헌을 했고, 이를 인정받아 MVP 투표에서도 8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Jeff Bagwell보다 높은 순위, WAR은 5.2였다) 당시 Jordan은 득점권에서는 "내 뒤엔 아무도 없다" 는 식으로 파워업, 굉장한 집중력으로 어떻게든 주자를 불러들이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으며, 볼넷을 골라나가나는 데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RISP에서 그가 가진 173PA 중 볼넷은 단 13번이었는데, 그 중 고의사구가 4개였다. Jordan은 "넌 피해라 난 칠테다" 식의 진정한 타점 오타쿠였다.

플레이오프에서도 Jordan의 활약은 훌륭했다. 하이라이트는 1996년 NLDS 3차전. 9회초 5:5 로 맞선 상황에서 상대 클로저 Trevor Hoffman이 던진 슬라이더가 밋밋하게 몰리자 Jordan은 이를 그대로 좌측 담장으로 넘겨버리는 투런홈런으로 7:5 승리를 가져온다. (이 홈런은 Hoffman의 Cardinals 상대 흑역사의 일부분일 뿐이다ㅎㅎ). 

``I wasn't comfortable and happy and I let that affect my game. Whether it's hitting third, fourth or fifth makes no difference to me. As long as I'm going to have an opportunity to drive in runs, I'm going to be comfortable.''

-Brian Jordan, on his return to 4th spot



1997년: 부상

96시즌의 활약으로 Jordan은 Fan-Favorite 위치에 올라섰다. 미친듯한 타점본능과 굉장한 도루능력도 그랬지만, 몸을 전혀 사리지 않으며 이 펜스 저 펜스에 온몸을 던지는 그의 허슬은 어떤 야구팬들도 미워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Jordan의 바로 옆 자리에서 뛰던 중견수 Ray Lankford가 "그렇게 하다간 몸이 남아나지 않는다"며 "You can't keep running into those walls"라고 경고하기도 했었으나, 풋볼 멘탈리티로 무장된 Jordan에게는 동물적인 반사신경이 우선이었다.

1997년 5월 첫째주, Jordan은 스프링 트레이닝부터 자신을 괴롭혀왔던 Low-back 문제로 결국 DL에 오르고, Herniated Disc (추간판 탈출증으로 일종의 허리디스크가 아닐까 싶다), 6월 중순까지 약 6주를 결장한다. 복귀 후에도 2주만에 다시 통증을 호소, 또 DL로 올라가며 1997시즌을 사실상 망쳐버렸다. 허리가 받쳐주질 못하니 그의 장타율은 0.269로 급락했고, 스윙은 무너질대로 무너져서 161PA에서 .234/.311/.269에 그쳤다. Jordan의 공백은 John Mabry와 Willie McGee가 돌려가며 막았다.

맥과이어와 그의 조연들




1998년: 커리어 하이

St. Louis에서의 마지막 시즌. 허리 부상에서 돌아온 Jordan은 5월 한달간 무려 .424의 타율을 기록하면서 커리어 하이 및 FA 대박을 향해 힘찬 스타트를 끊었으나, 언론의 관심사는 오로지 McGwire의 홈런 레이스 뿐이었다.  그의 타율이 6월 중순 한때 .343에 이르며 NL 리딩히터 타이틀의 강력한 후보로 부상했을 때에도 경기 후 Jordan에게 오는 기자는 한 두명에 불과했으며, 그마저도 팀 동료의 신기록 페이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이에 McGwire는 Jordan의 재능과 그의 1998시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He is a great, great player. He's better than Bo Jackson. He's a two-sport player. He was an All-Pro. He's leading the league in hitting. He's in his free-agent year. There are so many things to talk about with him, and I've seen maybe one thing written about him this year.........................He's just learning how to play the game. He's been playing on raw talent. It's scary to think what he can do when he really understands the game.

-Mark McGwire, on Brian Jordan and his superstardom (1998)



이 신기록 드라마에 Ray Lankford와 함께 조연으로 출연하기로 한 Jordan은 Lankford와 함께 이 역할을 사이좋게 나누었다. Lankford가 4번을 칠 때는 Jordan은 보통 2번 타순에서 McGwire 앞에 주자를 안내보내려던 투수들을 심히 응징했고, 그가 4번을 칠 때는 마음놓고 타점 찬스를 즐겼다. Lankford가 전반기보단 후반기에 McGwire의 크게 도왔던 반면, Jordan은 전반기에 무려 .339/.385/.576의 공포스런 성적과 함께 15홈런 56타점을 기록하며 McGwire의 전반기 홈런 쌓기에 크게 일조했다. 비록 7~8월에 월간 타율이 2할대에 머물며 결국 타격왕과는 거리가 먼 성적에 그쳤으나, FA 계약을 따내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성적이었다. (WAR 6.8, 25홈런 91타점 17도루, .316/.368/.534)


Braves로 이적

FA를 앞두고 Jordan은 풋볼로 복귀할 의사가 있음을 언론에서 밝혔는데, 이에 Cardinals 측에서는 "이건 그냥 협상용 뻥카"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Jordan은 1991년 야구에 집중하기로 한 후에도 꾸준히 풋볼에 대한 사랑을 밝혀왔고, St. Louis에 있는 동안에는 St. Louis Rams 풋볼팀을 찾아가 트레이닝을 지켜보기도 하고, 팀이 원정을 떠났을 때는 시간이 날때마다 그 도시에 있는 풋볼팀에 찾아가 구경을 하고 옛 동료들과 조우하곤 했다.  또한 자신의 풋볼 백그라운드를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시즌이 끝난 후 "NFL팀을 물색해볼 생각이 있다" 고 공언했다.

전 정말 풋볼이 좋은걸요?


어차피 드래프트에서 J.D. Drew라는 완성형 대졸 외야수를 뽑아놓은 Cardinals 입장에서는 부상 위험을 안고 있으며 Club-friendly 계약을 맺을 생각이 전혀 없는 Brian Jordan을 굳이 애써가며 붙잡을 이유가 없었다. Jordan은 St. Louis에서의 생활을 즐겼으며, Cardinals 팬들 사이에서 인기도 많았으나, 프로 운동선수로써 큰 계약을 따내고 싶은 의지가 더더욱 강했다. 오프시즌, Jordan은 Orioles와 Braves 두 팀을 놓고 저울질을 했다. Orioles는 자신의 고향 Baltimore 연고팀이었고, 외야수를 보강할 생각이 있는 팀이었으나, 더 강한 어필은 Atlanta Braves로부터 왔다. Atlanta는 대학에서 만난 아내 Pam Jordan (All-conference Team 에 선정된 농구선수이다) 의 고향이었으며, 현재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는 도시였다. 게다가 Jordan은 자신의 커리어 초창기를 Atlanta Falcons에서 보냈기에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Braves 단장이던 John Schuerholz는 처음부터 Jordan을 타겟으로 생각하고 자리를 만들기 위해 Denny Neagle과 Michael Tucker를 묶어서 Bret Boone과 바꾸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그리고 11월 23일, Jordan은 마치 처음부터 원했던 것처럼 Braves과 5년간 40M의 계약을 체결하고 Braves 유니폼을 입는다. 드래프트 때 Jordan을 놓쳤던 Orioles는 Jordan에 관심이 있었으나 Braves가 선수를 치자 곧장 대어 Albert Belle을 질러버리고 만다. 이 당시 Braves 못잖게 Jordan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Mets였는데, 그들은 5년 35M 수준의 선에서 더 이상의 오퍼는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Mets는 이후 Jordan에게 크게 데이게 된다.


1999-2001년: Braves 시절

Braves로 옮긴 첫 시즌 Jordan은 전반기에만 무려 17홈런 71타점을 올리며 팀 공격을 거의 혼자 이끌다시피 했으나, 후반기에 타오르던 방망이가 급격히 식어버렸다. 여전히 그는 득점권에서 무서운 타자였고 (득점권 .316) 붙박이 4번을 치기에 적격이었으나, 나이로 인해 그의 좌투수 상대 장타력과 우투수 상대 장타력은 조금씩 차이가 나고 있었다 (커리어 초기 Jordan의 좌우 스플릿은 상당히 균등한 편이었다). 

비록 후반기에 6홈런을 추가하는 데 그치긴 했으나 Jordan의 방망이는 다시 플레이오프에서 타올랐다. 1999년 Astros와의 NLDS 2차전에서는 결승 희생플라이를 치며 Millwood의 완투승을 도와줬고, 3차전에서 Jordan은 6회초 당시 리그 최고의 좌완투수 반열에 올라있던 Mike Hampton을 상대로 역전 쓰리런을 후리며 4경기에서 1홈런 7타점을 기록해 Braves 팬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Mets와의 NLCS에서도 Kenny Rogers 상대로 결승 투런을 치며 2차전 승리에 크게 일조했으며, 4차전에서는 7회까지 흑마술같은 피칭으로 1:0 완봉을 할 기세이던 Mets 선발 Rick Reed를 상대로 동점홈런을 때렸다 (이어서 Klesko의 Back-to-back으로 역전, 그러나 John Rocker가 불지르면서 패배. 이 NLCS도 정말 재미있었다.)

2000시즌 Jordan은 시즌 내내 허리통증을 안고 싸웠으며, 통증을 줄이기 위해 타격 메카닉과 스탠스에 손을 댔다가 오히려 결과를 악화시키며 실망스러운 성적을 냈다. 17홈런 71타점을 뽑아내긴 했으나 우투수 상대 타율이 0.223에 그치는 등 전체적으로 Braves가 기대했던 모습은 아니었고, 슬래시라인도 .264/.320/.421로 풀타임 외야수가 된 이후 가장 안좋았다. 

2001년 Jordan은 다시 St.Louis 시절로 수정했고 제대로 반등했다 (25홈런 97타점 .295/.334/.496). A. Jones와 C. Jones 사이에서 그는 절대 꿀리지 않는 성적을 냈고, 오히려 Andruw Jones보다 많은 어시스트를 기록하는 작은 위업을 이뤄냈다. 또한 그는 약해진 무릎 때문에 도루를 많이 시도하지는 않았으나, 후속타시 Extra Base를 따낼 확률에서는 71.2%로 NL 1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넘어서, Jordan은 96시즌부터 이어져 온 그의 "클러치" 모드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Rise up to the occasion, Mr. Jordan


9월 23일, 2경기차로 추격중이던 Mets와의 경기. 한때 13경기까지 벌어졌던 차이를 엄청나게 줄인 Mets는 홈에서 벌어진 시즌 막판 Braves와의 3연전을 스윕하기 위해 에이스 Al Leiter를 냈다. Leiter는 8회까지 Braves 타선을 3안타 8K 1실점으로 막았다 (Braves 선발 Glavine) 그리고 4:1로 뒤지던 9회초 Mets 마무리 Benitez가 올라왔는데, 2사 1루에서 Brian Jordan이 보란듯이 투런을 작렬하면서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갔고, 이어서 B.J. Surhoff의 극적인 동점 적시타로 경기가 연장에 접어들었다. 연장 11회 선두타자로 들어선 Jordan이 또 솔로홈런을 치면서 Braves의 5:4 승리. Mets는 이 경기에서의 패배로부터 회복하지 못했다.

6일 후, 이기면 Braves가 10년 연속 지구 우승을 결정짓는 경기가 또 Mets 상대로 벌어졌다. 또 이 경기에서 Mets는 Leiter의 호투에 힘입어 5:1의 리드를 안았고, 9회에 Benitez를 또 투입했다. Benitez는 결국 Marcus Giles에게 2타점 2루타를 허용하면서 멀쩡하던 경기를 드라마로 만들었고, 2사 2,3루에서 마운드를 John Franco에게 넘겼다. Franco는 Wes Helms를 거르고 이 날 4타수 무안타이던 Jordan을 상대했다. 결과는 끝내기 만루홈런, Braves 8:5 승리, 10년 연속 지구 우승 확정. 이 다음 날 Jordan은 또 쓰리런 홈런을 쳤다. 


1999-2001년 3년간 Brian Jordan은 Braves의 중심타선에서 10.3의 WAR를 기록했는데, 같은 기간동안 그의 후계자인 Drew가 Cardinals에서 12.5의 WAR를 찍은 걸 생각하면 (Cards 입장에서는) 수지타산이 맞는 성공적인 세대교체였다. 데뷔가 늦었던 Jordan은 1998년 St. Louis에서의 임기(?) 가 끝났을 때 이미 만 서른 하나의 나이였고, 그가 96년과 98년에 보여준 공격력은 이제부터 조금씩 내리막을 걷는다고 봐야했었다. Jordan은 지역 사회에서의 왕성한 자선활동과 특유의 클러치능력, 그리고 플레이오프에서의 좋은 활약으로 지역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성공적인 시간을 보냈으며, Braves 입장에서도 3년을 잘 써먹고 Dodgers로 보냈으니 결코 나쁜 FA 계약은 아니었다.


Talent-wise, he's a Gold Glove outfielder and a great player. But he plays so hard he abuses himself. To get to that echelon of the top guys in baseball, you have to play 140 games a year. He beats himself up. When he's out there, he puts on a show, but for him to take his place among the elites, he will have to generate enough games."

-Tony La Russa, on Brian Jordan





총평

비록 Bill James가 한때 "Most Inconsistent Player of all-time"으로 뽑긴 했으나, Jordan은 풀타임 주전으로 발탁된 95년부터 2002년까지 단 한 시즌 (폭망했던 1997시즌)을 제외하고는 소속팀을 위해 매해 최소 128경기 515PA 이상을 뛰었으며, 4차례의 90타점 이상 시즌과 6차례의 타율 .280 이상 시즌을 제공했다. 95~2002년까지 Jordan은 8시즌에 걸쳐 30.8의 WAR를 적립했는데, 이는 같은 기간동안 NL에서 15위에 해당하는 수치이며, Barry Larkin과 거의 같은 수준이다. Jordan은 대학 졸업 후 풋볼과 야구를 병행한 기간이 길었기에 드래프트 후 7년만인 1995년 (만 28세)이 되서야 주전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만약 조금 더 일찍 자리를 잡았다면 더욱 화려한 커리어를 보낼 수 있는 재능이 있던 선수였다. Greg Maddux와 Tony Gwynn이 야구를 예술처럼 하는 법을 보여주었다면, Brian Jordan 같은 선수들은 야구의 가장 야성적인 면을 드러냈던 선수들로 기억이 된다. 

Jordan의 최대 약점인 동시에 최대 매력은 공수에서 모두 볼 수 있었던 풋볼 선수 특유의 Aggressiveness 였다. 수비에서 그는 Edmonds 못지않게 멋진 장면들을 많이 연출해냈으며, 엄청나게 뛰어다니면서 몸을 던져 벽에 충돌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또한 그는 "풋볼에서 그렇듯, 내가 몸을 사리기 시작하면 더욱 다칠 것" 이라고 얘기했다 (Jordan은 풋볼 대신 야구를 선택한 결정은 후회하지 않지만, 매 경기 사이의 회복시간이 짧은 야구가 풋볼보다 부상 당하기 더욱 쉬운 종목인 것 같다고 회고했다.)  또한 타석에서도 그는 1995~1999년까지 2000타석 이상 출장한 선수들 중 5번째로 안좋은 BB% (6.3)을 기록할만큼 (1위 Mark Grudzielanek) 극악의 참을성을 보였는데, 본인 또한 이 문제를 알고 있었다.

"There is so much to learn and I am trying to pick up on things. The one thing I haven't learned is patience. I have almost 200 at-bats and I have only five walks. If I took some walks, I could be hitting .400 right now, but I swing at a lot of bad pitches."

-Brian Jordan, on his plate discipline


그러나 Jordan은 자신의 타격 어프로치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것보다 자신의 강점을 최대한 살리는 데 주력했으며, 이 전략은 그대로 먹혔다. 이에 Jordan은 2001년까지 리그에서 가장 Fastball을 잘 치는 타자 중 하나로 꼽혔으며, 초구 공략도 몹시 즐겼다. 또한 몸쪽으로 들어오는 빠른 공들을 빠른 배트스피드로 응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며, 나이를 먹어서도 수비와 주루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고 클럽하우스에서 리더 역할도 발벗고 나섰다 (물론 Cardinals 시절에는 McGwire와 Lankford 앞에서 대장 노릇을 할 순 없었다. 그의 Veteran Leadership은 Braves와 Dodgers에서 크게 가치를 인정받았다.) 

Jordan은 2004년 Rangers와의 계약이 끝난 뒤 2005년과 2006년 Braves로 돌아와서 두 시즌을 더 백업멤버로 뛰고 은퇴했으며, 개인적인 소망이라고 누누히 밝혔던 200홈런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184홈런). NFL와 MLB 에서 모두 올스타에 선정된, 생각해보면 굉장히 대단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그는, 이 두 차례 올스타를 모두 Atlanta 팀 소속으로 했으며 현재 Atlanta에서 Brian Jordan Foundation 이라는 자선기금(주로 아동 교육과 소아복지를 위한) 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Braves 경기 Pre-game Analyst로 활약하고 있으며, Braves AAA팀 중계까지 하고 있다고 하는데, 커리어의 절반인 7시즌을 Cardinals에서 보내고 5시즌만을 Braves로 (게다가 중간에 트레이드까지 한) 보냈음을 생각하면 조금 서운하기도 하다. 


When I hit one, the first thing I feel is relief. Then, I circle the bases, I feel on the top of the world, I've conquered that pitching, I am the king.

-Brian Jordan, on hitting home runs



by Doovy









Posted by Doo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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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ovy

Revisiting TLR ERA [1] Ray Lankford

Revisiting TLR ERA [2] Edgar Renteria

Revisiting TLR ERA [3] Matt Morris

Revisiting TLR ERA [4] Steve Kline


TLR ERA 시리즈의 5번째 주인공은 꽤 오랫동안 카디널스 팬들에게 있어서 '게으른 천재'의 아이콘이었던 (이후 이 자리는 토론토로 간 C모 중견수가 대체한다) J.D. Drew이다. 예쁘고 가지런한 스윙에 뛰어난 외야수비와 주루까지 모든 툴을 갖고 있던 그는 매 시즌을 앞두고 큰 기대를 하게 했으며, 야구에 대해 심도있게 알지 못하던 시절, 시각적인 기쁨을 가장 많이 제공하던, 매력적인 선수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드래프트 당시의 잡음과 "열정 및 의지 부족"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곱지않은 시선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며, ML 입성 전부터 "화이트 그리피"라는 부담스러운 별명을 달고 지나치게 많은 기대를 불러일으킨 탓에 그의 커리어가 필요 이상으로 초라해게 묘사된 부분이 있다. 

이 포스팅은 희대의 재능 J.D. Drew의 아쉬움 많고 탈도 많았던 Cardinals 시절과 1997년 J.D. Drew Draft Fiasco 에 관해서, 그리고 J.D Drew라는 선수의 커리어 전반에 대해서 조금 더 균형있는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의도로 작성되었으며, 2회에 걸쳐 올리도록 한다.


The Natural


J.D. Drew (David Jonathan Drew)

Outfielder

DOB: 1975년 11월 20일 

Birth: Hahira, Georgia

Time with Cardinals: 1997-2003


Rockin' NCAA

고등학교 시절의 Drew의 유망주로써의 Reputation은 Regional한 수준이었다. 물론 시니어 때 Georgia All-Star에 뽑히기는 했으나, 시골 학교 출신 고졸 선수가 State-all-star 에 뽑히는 수준으로 드래프트에서 높은 지명을 받을 수는 없었다. 총 인구 1300명밖에 안되는 Georgia의 농촌에서 형제들과 야구를 하며 자란 Drew는, 1995년 Giants의 20라운드 지명을 뿌리치고 야구로는 전국구인 학교이자 집에서 멀지 않은 Florida State University (Tallahassee, Florida) 으로 진학했는데, 여기서 대학 야구계의 Coach K로 봐도 무방한 Mike Martin  감독을 만나면서 완전히 인생이 바뀐다. Mike Martin은 Drew의 재능을 알아보고 1학년 때부터 많은 출장기회를 주며 그의 성장을 촉진했으며, Drew는 이에 보답하듯 FSU 학교 기록과 ACC 기록까지 총 17개의 기록을 다시 쓴다 (단일 시즌 최고 타율, 커리어 최다 홈런, 컨퍼런스 역사상 최고 장타율 등)

※Coach K는 NCAA Duke의 전설 Coach Krzyzewski의 별칭. 여기서 잠깐 Drew의 은사 Mike Martin을 소개하자면, 1980년 Florida State을 맡은 이후 33년간 College World Series에 팀은 15차례 올려놓았고 ACC (Atlantic Coast Conference) 타이틀을 5차례 따냈으며, Coach of the Year를 7차례 수상한, NCAA College Baseball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감독 중 하나이다. Martin과 FSU가 배출한 Golden Spike Award 수상자만 4명이고, 가장 최근에는 Buster Posey를 배출해냈다.

Cardinals 관련 FSU Seminoles 출신들

40인 로스터: Shane Robinson, Randy Choate, Barrett Browning

팜 시스템: John Gast, James Ramsey

과거: J.D. Drew, Eduardo Perez, Luis Alicea


Drew가 3학년이었던 1997년 시즌은 가히 기록적이었는데, 이 시즌 Drew가 이뤄낸 것들은 다음과 같다.

  • NCAA Division I 사상 최초로 30홈런-30도루 가입 (하이라이트: 단 67경기만에 세운 기록)

  • NCAA 역사상 3번째로 100타점-100도루-100득점 기록 (이것 역시 67경기 만에)

  • Dick Howser Trophy와 Golden Spike Award 동시 수상 (Mike Martin의 감독 커리어에서 유일)

  • BA 선정 Player of the Year, Collegiate Baseball 선정 Player of the Year

  • The Sporting News 선정 Player of the Year, ACC Player of the Year

  • College World Series All-Decade Team

  • BA 선정 Collegiate Player of the Century 투표 8위



FSU 시절의 J.D. Drew


Drew가 대학 시절 보여준 성적의 임팩트는 그를 "Player of the Century" 투표에 랭크를 시킬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4대 스포츠를 통틀어 이 정도의 수식어를 받으면서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한 선수는 쉽게 나오지 않는다. 굳이 비교 대상을 떠올려보자면--최근의 Bryce Harper나 NFL의 Darren McFadden, 혹은 NBA의 Carmelo Anthony (Syracuse) 나 Chris Webber (Michigan) 정도가 생각나는데, 지나친 비교라고 생각하신다면 아래의 Drew의 대학야구 씹어먹기를 참조하시길. (물론 NHL을 열심히 보지 않는 관계로 4대 스포츠라고 말하는 것에는 어폐가 좀 있다ㅎㅎ). 

이 정도 성적을 내고 프로로 진입하던 무렵, 언론에서는 아직 지명도 당하지 않은 Drew를 띄우기에 바빴다. 그리고 Drew의 재능은 그 정도로 띄울만했다.  (Drew는 2003년 FSU Hall of Fame에 들어갔다)

J.D. Drew's College Numbers

YEAR   AVG  GP  GS   AB  R   H   2B  3B  HR RBI  TB   SLG%  BB HBP  SO GDP   OB% SF SH  SB ATT
----------------------------------------------------------------------------------------------
1995  .325  64  56  209  54  68   7   3  17  63  132  .632  36   3  54   2  .430  1  1  11  12
1996  .386  69  69  241  90  93  17   5  21  94  183  .759  55  12  53   4  .508  7  2  10  14
1997  .455  67  67  233 110 106  15   5  31 100  224  .961  84   8  37   3  .604  3  1  32  42
----------------------------------------------------------------------------------------------
Tot   .391 200 192  683 254 267  39  13  69 257  539  .789 175  23 144   9  .521 11  4  53  68


1996: 제 1차 Draft Fiasco

Boras의 악명이 본격적으로 뻗쳐나가게 된 계기는 1996년 Draft였는데, J.D. Drew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1996년 Draft를 간략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일단 아래에 있는 1996년 1라운더 명단부터 보시면...

Year RdPck Tm Pos WAR
1996 1 Pirates Kris Benson (minors) RHP 11.5
1996 2 Twins Travis Lee (minors) 1B 5.3
1996 3 Cardinals Braden Looper (minors) RHP 7.3
1996 4 Blue Jays Billy Koch (minors) RHP 4.9
1996 5 Expos John Patterson (minors) RHP 4.5
1996 6 Tigers Seth Greisinger (minors) RHP -0.3
1996 7 Giants Matt White (minors) RHP
1996 8 Brewers Chad Green (minors) OF
1996 9 Marlins Mark Kotsay (minors) OF 20.6
1996 10 Athletics Eric Chavez (minors) 3B 34.0
1996 11 Phillies Adam Eaton (minors) RHP 3.8
1996 12 White Sox Bobby Seay (minors) LHP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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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게 표시된 4명은 모두 Boras의 고객들이었고, 이들 중 아무도 15일 내로 지명구단으로부터 계약을 오퍼를 받은 선수는 없었다. Boras는 두꺼운 CBA (Collective Bargain Agreement) 규정집 어딘가에 처박혀있던 조항들 중 "지명권을 가진 팀은 15일 내로 그 지명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이 지명권을 잃는다"는 점을 이용해 드래프트 2주 후 이들을 모조리 FA 신청했고, 어이없게도 Twins, Giants, White Sox, Expos는 모두 소위 "새"가 되어버렸다. White Sox 측에서 유일하게 Boras의 FA 신청 무효 소송을 걸었으나, 당연히 기각되었다 (Rules are rules.)

그 결과는 아시다시피 난장판이었다. 이 신인들은 지명구단과는 상관없이 그냥 가장 좋은 계약조건을 제시한 팀과 사인을 했다. Travis Lee는 신생팀 D-Backs와 4년 11M짜리 계약을 맺었고, Matt White은 역시 신생팀이었던 Devil Rays와 10.2M짜리 계약을 맺는다.  Boras는 갓 드래프트에 들어온 새내기 4명을 통해 거의 30M에 가까운 규모의 계약을 이끌어냈는데, 이는 Boras 커리어 초창기 최고의 무브로 남아있다.


1997년: The J.D. Drew Draft Fiasco

"화이트 그리피" "제2의 켄 그리피 주니어" "대학 야구 사상 가장 완벽한 선수" 등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FSU 3년간 그는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을만큼 올라갔고, 이 선수가 필드에서 할 수 없는 일은 없어보였다. 마이너리그는 형식적으로만 거칠 것이라는, 혹은 ML 직행을 할 지도 모른다는 루머가 다분했다. 1996년 드래프트에서 Travis Lee 정도가 11M짜리 계약을 성사시키는 걸 보고, Drew는 "11M 이하로는 사인하지 않겠다" 고 공공연히 말했다. 이에 쫄은 Tigers는 전체 1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Rice의 클로저였던 파이어볼러 Matt Anderson (제구안되는 103마일을 던졌던 그 분)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2.5M에 계약) Matt Anderson이 워낙 폭망해서 그렇지, Signability에 기안한 이런 무브는 사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물론 Matt Anderson에게는 다른 종류의 Red Flag가 많았지만...)

 리그 최하위권이었던 Philadelphia Phillies의 GM Ed Wade는 "초대어 대졸 야수" J.D. Drew를 전체 2순위로 뽑았다. Drew의 "11M 이상 요구"는 소위 "뻥카" 일것으로 보고 그냥 냅다 지른 것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Drew가 요구하는 액수는 지나칠만큼 현실과 괴리감이 있던 액수였고, 전년도 드래프트 전체 1번이었던 Kris Benson (기억하시는가 이 이름!) 이나 이 해 전체 1번 Matt Anderson이 2.5M에 사인했던 것을 생각하면 Drew의 11M 드립과 Phillies 사이의 입장차는 엄청난 것이었다. 처음부터 Drew는 최소 10M 이상의 액수--("나보다 못했던 Travis Lee가 11M을 받았으니 나도 11M은 받아야지" 식 마인드에 기안한)--를 실제로 바라고 있었고, Phillies는 2.05M 이라는 굉장히 정석적인 "90년대 후반 1라운더들에게 주던 돈"으로 맞받아쳤다. 

I was made aware of my market value before the draft, and it was something I was very upfront and honest about. There are no hard feelings against the Phillies, but I felt very adamant.

-J.D. Drew on his contract and the draft fiasco (Sports Illustrated, December 1998)



Boras는 이렇게 된 이상 지명권을 가진 Phillies와 협상을 할 이유가 없었고, 그랬기에 Drew가 최대한 빨리 FA 자격을 얻는 방향으로 일을 추진했다. 먼저 그는 Drew가 드래프트에 참가하면서 적어낸 집 주소가 Drew의 고향 주소 (Georgia), 즉 일종의 '본적'과도 같은 주소였던 점에 착안, Phillies 측에서 선수 주소를 잘못 써서 보냈으므로 이 Contract offer는 Invalid 하다고 소원서를 제출했다 (실제로 Drew는 당시 Florida 주소를 가지고 있었다...당연하다 -_- 드래프트 당시 Drew는 3학년을 막 마친 상태였다). Drew의 드래프트 Eligibility Card 에 적힌 주소대로 계약서를 보낸 Phillies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노릇이었다. 

Phillies는 재빨리 Drew가 실제로 살고 있는 Florida 주소를 찾아서 Contract Offer를 다시 한 번 보냈으나, 이번에는 등기 우편물을 받은 사람이 물건을 수령했다고 서명하기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이 사람은 FSU의 Assistant Coach였다고 한다. Boras가 우편물 수령 거부를 하라고 시킨 것이 뻔하지만 "서명 거부"는 범법 행위가 아니었기에 다시 한번 Phillies의 Contract Offer는 실패한다. 15일 기한이 거의 다 지나갔을 즈음 Boras는 7M으로 하향조정하며 마지막 "양보 아닌 양보" 를 해보았으나 Phillies의 최종 오퍼액은 3.1M에서 멈췄고(사이닝 2.6M), 결국 계약은 성사되지 않았다. 


중재소 측에서는 "Phillies 측에서는 써있는 주소대로 계약을 제시했을 뿐, 그 주소가 잘못된 것은 Drew의 탓이다" 며 Boras의 소원서를 기각하지만, 이미 Boras는 이렇게 시간을 벌어놓고 Northern Independent League의 St. Paul Saints와 계약을 맺어버린 후였다. 그리고 Boras는 "이미 독립리그 프로팀과 계약을 했으니 J.D. Drew는 더 이상 Amateur 선수에 속하지 않으며, 내년 드래프트가 시작되기 7일 전부터 FA 자격을 얻는다" 고 주장했다. ("Amateur Player"의 법적 정의를 이용한 Boras의 작전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는데, 이미 1994년 Jason Varitek이 한 차례 이를 통해 이득을 본 적이 있었다.) 

MLB 사무국은 이에 맞대응해 조항을 개정해 "독립리그에서 뛰는 선수도 MLB 신인 드래프트 규정에 따른다"고 분명히 명시했고, Drew도 이를 따르기를 요청했다. FA 자격 취득을 노리고 갖은 꼼수를 다 부렸던 Boras 입장에서는 게거품을 물 상황이었고, 여기서 "법률 조항 개정" 건을 가지고 MLB 사무국과 드래프트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버리면 이는 고객 J.D. Drew에게 지나친 악영향이 갈 상황이었다 (게다가 여태까지의 판례로 봐서 Drew가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해보였다). 

여기서 MLBPA (Player's Association), 즉 선수협이 Drew의 편을 들고 나섰다. Drew라는 출중한 선수의 커리어를 보호하는 것보다는 지난 Arbitration을 통해서 세워진 원칙 (Principle)을 보호하고 선수에게 불리한 판례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선수협은 이미 수년간의 투쟁끝에 "MLB는 선수들의 동의없이 드래프트 규칙을 바꿀 수 없다" 는 원칙을 확보해 놓은 상태였으며, 이 원칙을 일관성있게 적용하는 것이 필요했다. 소송이 길어질 경우 Drew는 오리알 신세로 계속 독립 리그에서 뛰어야할 상태였기에, Independent Arbitrator (독립 중재자)를 통해서 1998년 드래프트 전에 Drew 사태가 마감될 수 있도록 일을 추진했다.

1998년 5월 19일, Independent Arbitration의 Ruling은 선수협의 손을 들어주면서 다음과 같은 조건을 달았다. 1) Drew는 선수협 회원이 아니기에 이번 중재의 결과가 적용되지 않는다 (즉 FA로 풀어줄 수는 없다) 2) Drew의 상태가 애매하니 Executive Council에게 최종 결정을 회부한다. Executive Council에서는 Drew가 1998년 드래프트에 다시 나오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이 우여곡절을 거쳐 J.D. Drew는 Cardinals와 3M의 Signing Bonus를 포함해 총액 3년간 7M의 계약 (인센티브 포함해서 총액 8.5M)을 맺는다. 참고로 Cardinals의 97년도 드래프트 1라운더는 전체 20번 Adam Kennedy였다. (1996년도 정규시즌 성적이 좋았던 Cardinals로써는 절대 Drew를 뽑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절묘하게도 Drew가 참가한 1998 드래프트에서는 전년도 73승의 삽질에 힘입어 당당히 5픽을 받았는데, 이 당시 전체 1픽을 갖고 있던 Phillies는 Drew 대신 Pat Burrell을 데려갔다)

When we saw they were going to be selected ahead of us, we decided to go with J.D. Drew. We just felt that he is one of the best players in the draft. He has the ability to play in the big leagues soon. We decided we'd draft him and do the very best to sign him. The ceiling is high on this guy, and sometimes you have to take some risks to succeed.


-Walt Jocketty, on drafting J.D. Drew (Tuscaloosa News, June 2, 1998)


J.D. Drew, (예상대로) 마이너리그를 씹어먹다

Year Age Tm Lg Lev Aff G PA AB R H 2B 3B HR RBI SB CS BB SO BA OBP SLG OPS TB
1997 21 St. Paul NORL Ind 44 203 170 51 58 6 1 18 50 5 3 30 40 .341 .443 .706 1.149 120
1998 22 3 Teams 3 Lgs Ind-AAA-AA STL 75 324 260 60 91 22 4 16 57 11 5 56 65 .350 .478 .650 1.128 169
1998 22 St. Paul NORL Ind 30 141 114 27 44 11 2 9 33 8 1 21 32 .386 .504 .754 1.258 86
1998 22 Arkansas TL AA STL 19 81 67 18 22 3 1 5 11 2 1 13 15 .328 .444 .627 1.071 42
1998 22 Memphis PCL AAA STL 26 102 79 15 25 8 1 2 13 1 3 22 18 .316 .471 .519 .990 41
1999 23 Memphis PCL AAA STL 25 97 87 11 26 5 1 2 15 6 1 8 20 .299 .371 .448 .819 39
Ind (2 seasons) Ind 74 344 284 78 102 17 3 27 83 13 4 51 72 .359 .468 .725 1.193 206
AA (1 season) AA 19 81 67 18 22 3 1 5 11 2 1 13 15 .328 .444 .627 1.071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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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w가 마이너리그를 씹어먹을 것은 진작에 예견된 일이었다. 이미 그의 스윙은 완성도가 높았으며, Plate Discipline과 Natural Power, Contact, Arm, Range, Baserunning, Raw Speed 등 평가할 수 있는 모든 면에서 Drew는 굉장히 다듬어진 선수였고 흠잡을데가 없었다. Jocketty를 위시한 Cardinals 프론트 오피스도 Drew의 리그 적응같은 것은 걱정하지 않고 신속하게 Drew의 상위레벨 진입을 추진했다. 

유일하게 구단 측에서 걱정한 부분은 바로 J.D. Drew의 (전국적으로 알려진) 드래프트 사태와 "난 11M 정도는 받겠다" 발언이었다. 순식간에 Drew는 "A talented kid with a bad rep"으로 전락한 채 프로야구에 발을 딛게 된 것이다. Arkansas에서 프로야구 첫 경기를 치른 (아...Boras에 따르면 독립야구도 프로야구이므로 이렇게 쓰면 정확하지 못한 걸텐데) 날, 타석에 들어서는 Drew에게 Dire Strait (락밴드) 의 "Money for Nothing"이 울려퍼졌고, 아웃된 뒤 덕아웃으로 돌아올 때는 Beatles의 "Money (That's what I want)"이 나왔으니, Drew를 작정하고 안좋게 보려고 하던 사람들이 어떤 식이었는지 대충 알만 하다.

아직 근육이 붙지 않은 루키 시즌의 J.D. Drew. 이 때는 8번을 달았었다.


1998년: Debut

9월 7일 로스터 확장 J.D. Drew가 콜업되자 우려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시 Cardinals에는 Ron Gant, Ray Lankford, Mark McGwire, Willie McGee, Brian Jordan 등 Drew같은 꼬맹이를 좋게 보지 않을 베테랑들이 가득했다. 특히 Drew Fiasco 당시 외야수 Brian Jordan은 Drew의 11M 요구를 "Outrageous"하다고 표현했으며, McGwire는 신인들의 계약금 액수에 $250K의 상한선을 두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다행히 Drew가 막상 올라왔을 때, BP를 치고 있는 그에게 McGwire와 Gant, Delino DeShields가 먼저 차례로 다가와 "Welcome" 을 전했으며, Drew는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는 큰 갈등 없이) 무사히 빅 리그 락커에 자기 짐을 풀었다. (심지어 TLR 마저  "솔직히 조금 걱정했던 것은 사실이다" 라며 이후에 털어놓았다) 

1998년 9월 8일, 6회말 대타로 나선 Drew는 드래프트된 이후 3개월만에 ML 데뷔전을 치렀다 (데뷔전 상대 Cubs, 상대 투수는 추억의 그 이름 Steve Trachsel). 결과는 루킹 삼진. Drew는 이후 "마지막 공은 체인지업이었다. 너무 긴장해서 그냥 빨리 타석이 끝나기만을 바랬다"며 첫 타석을 회고했다. 이 경기는 공교롭게도 McGwire가 Roger Maris의 단일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깨는 62호 홈런을 날렸던 바로 그 경기로 (혹시 이 홈런 기억하시는지! 빨랫줄처럼 낮게 빠르게 날아가 Busch Stadium에서 가장 짧은 좌측 펜스 끄트러미를 아주 살짝 넘어갔던 바로 그 홈런!), 사람들은 Drew의 데뷔보다는 신기록 수립의 순간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I really hope he means what he says when he says he wants to play the game of baseball. If someone wants to play and is fiddling over $11 million, that shows he doesn't want to play very much. I'm from the old school -- that you've got to prove yourself in the big leagues and that's where you make your money."               

-Mark McGwire, on J.D. Drew (1998)                                                                

 9월 9일, Reds와의 원정 시리즈를 나선 TLR은 선발 라인업에 Drew를 넣지 않았다. 그러나 경기 중 McGwire가 부상으로 빠지면서 3회부터 Drew를 우익수로 출장 시켰고 (대신 우익수였던 Mabry를 1루로), Drews는 8회 Gabe White을 상대로 우중간 담장을 빠르게 넘기는 라인드라이브 홈런을 작렬하며 빅 리그 첫 홈런 신고식을 한다. 

당시 Playoff 진출이 좌절된 St. Louis의 정규시즌 막판은 McGwire의 홈런 레이스로 점철되있었고, Drew의 데뷔는 생각만큼 많은 관심을 끌지 않았다. 콜업 후 첫 며칠간은 주로 대수비, 대타로 벤치에서 머물던 Drew는 9월 15일, 고작 자신의 3번째 선발출장 경기에서 3회와 5회 연타석 홈런을 때리며 멀티홈런 경기를 갖았다. 그러나 그 경기에서 9회 대타로 출전한 McGwire가 본인의 시즌 63호 홈런을 때려내면서 (참 이 양반도 대단하다) 모든 스폿라이트가 McGwire쪽으로 쏠렸고, 각종 소송과 중재, 언론과의 인터뷰로 스트레스를 받던 Drew는 이러한 무관심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9월 25일에는 Expos전에서 4회와 5회 또다시 연타석 투런을 작렬하면서 메이저리그 데뷔 후 첫 28타석만에 홈런을 5개를 때려낸다. 그야말로 명불허전 이었다.

1998시즌 후 Drew는 Arizona Fall League로 보내졌고, 수년간 센터를 지켜온 베테랑 외야수 Ray Lankford는 오프시즌 중 좌익수로 포지션 이동을 할 것을 제안받았다. Drew의 앞길에는 Cardinals의 정규시즌 개막전에서 주전 외야수로 낙점을 받는 일만 남아있었다.

With his extension and his swing, he shouldn't be either a .330 hitter with 15 home runs or a .230 hitter with 45. He should hit for power and average.

-Tony La Russa, on J.D. Drew's potential (1998)



1999-2000년: 주전 중견수로 발돋움

1999시즌 개막전, Drew는 당당히 주전 중견수로 라인업 카드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첫 한 달간 그다지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하며 5월 중순 AAA행을 받아들인다. Memphis에서 한 달간 수련한 뒤 다시 올라온 Drew는 이후 끝까지 중견수 자리를 지키긴 했으나, 확실히 실망스러운 자신의 첫 풀타임 시즌을 보냈다 (13홈런 39타점 72득점 19도루 .242/.340/.424, 50BB 77SO, WAR 2.7, wRC+ 94). 특히 8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한 달간은 홈런을 1개도 기록하지 못하면서 확연히 스윙 리듬을 잃은 모습을 보였으며, 수비나 주루에서는 충분히 훌륭했으나 타석에서는 아직 빅 리그에서 풀 타임을 치러보지 않은 애송이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정도 스탯을 Jon Jay가 찍었다면 모를까, 제2의 Ken Griffey Jr. 프로젝션을 받던 선수치고는 그다지 인상적인 데뷔는 아니었다. 그러나 마이너리그 물을 거의 먹지 않고 팀의 개막전 중견수이자 2번타자로 낙점된 신인의 성적치고 결코 나쁜 성적 역시 아니었다. 누구나 Mike Trout 혹은 Ichiro처럼 데뷔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Phillies 팬들은 정말 어지간하다.


배터리 사건

1999년 8월 10일, Cardinals는 Phillies와의 원정을 위해 Veterans Stadium을 찾는다. Drew가 타석에 들어서자 Phillies 팬들은 욕설과 야유를 시작헀으며, 이미 경기 시작 전부터 "Drew you are a disgrace to baseball" 와 같은 심한 피켓을 들고 와서 설치는 악명높은 Phillies 팬들이 많았다. 이에 굴하지 않았던 Drew는 3회 선두타자로 나서 우중간을 완전히 가르는 3루타를 치며 Phillies 팬들의 심기를 건드렸고, 8회 초에는 1사 1,2루에서 중전안타를 치며 점수를 5:2로 벌리기까지 했다.

급기야 8회말, 센터 필드에 서 있던 Drew를 상대로 관중석에서 배터리가 날아왔고, TLR은 건전지에 맞을뻔한 Drew를 보호하기 위해 심판에게 다가가 경기 중단을 요청했다. 당시 Veterans Stadium의 아나운서였던 Dan Baker가 관중들에게 "더 이상 물건들이 경기장에 난입하면 Phillies가 몰수패를 당할 것이다"고 주의를 준 이후에야 야유가 멈추었다.

참고로 이 경기에서는 5:2로 앞서고 있던 8회말, 그 며칠 전 Phillies로 트레이드되었던 Ron Gant가 Ricky Botallico를 상대로 만루에서 싹쓸이 2루타를 치면서 역전패했다. (이 경기 박스스코어)

“They were throwing batteries. With that history, to me, the first battery that comes out on the field the game's over. I hope that precedent's set. Somebody throws a battery, Phillies lose."

-Tony La Russa, on the battery incident



2000시즌, 드디어 Lankford-Edmonds-J.D.Drew의 황금 외야진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우익수 자리에 정착한 Drew는 정규시즌 3번째 경기에서 Cubs를 상대로 혼자 2홈런 5타점을 치면서 힘차게 출발했고, 전반기에만 11홈런 33타점 .313/.417/.529를 쳤으나, 올스타 브레이크 직전에 당한 부상으로 약 3주간 쉰 이후로는 타격 페이스가 확 떨어진 모습이었다. 그는 2번과 7번 자리를 Renteria와 함께 나눠맡았으며, 가끔은 리드오프로도 출장했고, 6번 타순에서도 쳤으며, 때로는 Edmonds 대신 중견수로 뛰기도 했고 Lankford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 좌익수 알바도 뛰었다. 

이 시즌에 Drew는 결국 .295/.401/.479 18홈런 57타점 WAR 4.0 의 겉으로 보면 확 나아진 성적으로 풀타임 2년차 시즌을 마감한다. 그러나 사실 Drew의 ISO는 전년도와 거의 같았으며, 크게 오른 타율은 .270 --> 0.351로 크게 오른 BAbip와 연관이 있었기에 2000시즌의 Drew가 반드시 1999시즌보다 훨씬 잘 친 것은 아니었다고 봐야했다. 다만 경험이 쌓이면서 점차 상대 투수들과의 카운트 싸움에 조금씩 익숙해져 가고 있었으며 데뷔 2번째 시즌만 4할 출루율을 기록한 그의 Plate Discipline은 그의 미래에 있어서 청신호로 보였다. Drew의 2000시즌에 있어서 가장 슬픈 점은, 아마도 이 시즌이 그가 Cardinals에서 가장 많은 경기와 타석수를 소화한 시즌이었다는 점이다 (135경기 486PA. Drew는 이후 이와 거의 동일한 135경기 496PA를 2002년에 기록한다). 이 때만 해도 Drew의 2번째 시즌은 "어제보다 나은 오늘" 이라는 점에서 고무적이었으며, 많은 이들은 여전히 Drew를 "Future all-star with MVP potential"로 지목했다.


(깨알같은) J.D. Drew vs. Colby Rasmus Comparison I (Rookie Season)          (BB%/K%)

J.D. Drew:13HR 39RBI 72R 19SB .242/.340/.424, 50BB 77SO, WAR 2.7, wRC+ 94, 11.6%/17.9% (24세)

C.Rasmus:16HR 52RBI 72R 3SB .251/.307/.407, 36BB 95SO, WAR 2.8, wRC+ 89, 6.9%/18.3%  (23세)


(깨알같은) J.D. Drew vs. Colby Rasmus Comparison II (Soph. Season)

J.D. Drew18HR 57RBI 73R 17SB .295/.401/.479,  67BB 99SO,  WAR 4.0, wRC+ 126 13.8%/20.4%   (25세)

C.Rasmus: 23HR 66RBI 85R 12SB .276/.361/.498, 63BB 148SO, WAR 4.3, wRC+ 130, 11.8%/27.7%  (24세)



To be continued...

참조: Baseball-reference.com, Sports Illustrated, CNN, Baseball-almanac, Stltoday.com, Riverfront Times, Baseball Prospectus (Kevin Goldstein), Scouting Report, Fangrap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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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ovy

TLR ERA 시리즈의 4번째 포스팅의 주인공은 Steve Kline다.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깡과 파이터 정신, 구단에 대한 애정과 더러운 모자 때문에 참 인상깊었던 선수이며, 묘한 악동 기질과 특유의 승부근성으로 2000년대 초반 Cardinals 불펜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물론 실력으로도 Izzy와 더불어 TLR 시대 릴리버들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개인적으로 Cards 경기를 보기 시작한 이래로 아직까지도 Kline 이상으로 신뢰를 주던 좌완 릴리버는 본 적이 없다.



TLR 시대를 대표하는 LOOGY



Steve Kline

LHP (Reliever)

DOB: 1972년 8월 22일 

Birth: Sunbury, Pennsylvania

Time with Cardinals: 2001-2004


Draft & Minors

West Virginia 대학에서 뛰던 Steve Kline은 1993년 드래프트 8라운드에서 Cleveland Indians에게 지명을 받고 프로 생활을 시작하는데, 이 당시 Kline은 좌완 선발투수였다. 당시 1994년 21세의 나이로 싱글A Columbus에 올라온 그는 28경기에 선발 등판해 18승 5패 3.01이라는 상당히 훌륭한 성적을 찍으며 Indians 내 최고 투수 유망주에게 주는 상인 Bob Feller Award를 수상하고 구단 내 촉망받는 새싹으로 떠오른다 (이 정도면 요새 우리 팜의 John Gast나 Kevin Siegrist 급의 기대는 받던게 아닐지?) 

AA까지는 무사히 올라왔으나 1996년 그는 AA볼에서 선발투수로 낙제점을 받았다. 그러나 좌완 투수가 부족하던 팀 사정상, 1997년 Indians 불펜의 일원으로 개막 로스터에 진입하는 행운을 맛본다.  1997년 4월 2일, Oakland A's를 상대로 한 정규시즌 개막전에서 Kline은 Charles Nagy에 이은 2번째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데뷔전에서 행운의 구원승을 따내며 가뿐하게 시즌을 시작하지만 이후 내내 두들겨맞았다. 당시 Indians 불펜은 클로저 Jose Mesa를 주축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Whip 1.5에 평균자책 4.38을 기록한, 리그 내에서 가장 후진 불펜 중 하나였다. 빅 리그에서 그다지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자 Indians는 트레이드 마감시한 전에 Kline을 Montreal Expos로 넘기며 선발투수 거구의 우완투수 Jeff Juden을 받아왔다.

AA까지는 선발투수로 수업을 받던 Steve Kline

Year Age Tm Lg Lev Aff W L ERA G GS IP H ER HR BB SO WHIP H/9 BB/9 SO/9 SO/BB
1993 20 Burlington APPY Rk CLE 1 1 4.91 2 1 7.1 11 4 0 2 4 1.773 13.5 2.5 4.9 2.00
1993 20 Watertown NYPL A- CLE 5 4 3.19 13 13 79.0 77 28 3 12 45 1.127 8.8 1.4 5.1 3.75
1994 21 Columbus SALL A CLE 18 5 3.01 28 28 185.2 175 62 14 36 174 1.136 8.5 1.7 8.4 4.83
1995 22 Canton-Akron EL AA CLE 2 3 2.42 14 14 89.1 86 24 6 30 45 1.299 8.7 3.0 4.5 1.50
1996 23 Canton-Akron EL AA CLE 8 12 5.46 25 24 146.2 168 89 16 55 107 1.520 10.3 3.4 6.6 1.95
AA (3 seasons) AA 10 15 4.27 40 39 238.0 254 113 22 86 154 1.429 9.6 3.3 5.8 1.79
A (2 seasons) A 18 5 2.97 30 29 188.0 176 62 14 37 179 1.133 8.4 1.8 8.6 4.84
Rk (1 season) Rk 1 1 4.91 2 1 7.1 11 4 0 2 4 1.773 13.5 2.5 4.9 2.00
A- (1 season) A- 5 4 3.19 13 13 79.0 77 28 3 12 45 1.127 8.8 1.4 5.1 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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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ted 1/23/2013.

1998-2000년: 릴리버로써 정착

Expos로 건너간 Kline은 이 기간동안 완전히 빅 리그에 정착했다. 1998~1999년에는 (얼마전 출소하신) 클로저 Ugueth Urbina의 뒤를 이어 Expos 불펜의 넘버3이자 유일한 좌완 릴리버로 입지를 다졌고, 주로 LOOGY 역할을 담당하며 3시즌동안 평균 81경기에 출장하는 Durability를 과시했다. 2년간의 활약을 인정받아 2000시즌 막판에는 Expos의 클로저로도 발탁되며 14세이브를 올렸고, SO/BB 비율은 3년간 1.85 -> 2.09 -> 2.37로 매년 발전을 거듭했다. 

정말 더럽다 더러워

2000년 12월 4일: Cards 유니폼을 입다

2000시즌이 끝나고 Walt Jocketty는 당시 FA 시장 최대어였던 Mike Hampton을 찔러보았다. 마지막까지 최종 Suitor들 중 하나로 남긴 했으나 Cardinals는 Rockies의 (당시로써는) 기록적이며 또한 충격적이었던 오퍼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으며, FA를 통한 투수진 강화가 실패하자 본인의 전공분야인 트레이드로 눈길을 돌려 Expos의 Dustin Hermanson을 찔러보았다. 당시 Hermanson은 타고투저의 리그 트렌드와 하위팀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4년간 43승 평균자책 3.98을 올리며 가치가 상당히 올라가있던 터였다. 

Expos는 당시 갓 25세 시즌을 마쳤으며 3년동안 300경기에서 홈런 60개 OPS .914에 SLG 0.525를 기록한 젊은 3루수 Fernando Tatis에 Britt Reames까지 원했고, Jocketty는 내구성이 검증된 젊은 좌완 릴리버 Steve Kline을 요구하면서 양측간의 2:2 트레이드가 성사가 되었다. (Britt Reames, Fernando Tatis <--> Dustin Hermanson, Steve Kline)

This is a guy we've been searching for years. He's really the first left-hander we've gotten under the 30 years of age-- actually, under the 40 years of age--since I've been here.

-Walt Jocketty, after trading for Steve Kline in 2000 


2001년: 끝만 빼고 다 좋았다

Cardinals 유니폼을 입은 첫 해, Steve Kline은 89경기 출장해 75이닝을 던지며 3승 3패 17홀드 9세이브 평균자책 1.80 Whip 1.08이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냈고 무려 3년 연속 최다 경기 출장 타이틀을 따냈다. 그가 기록한 1.80의 평균자책은 리그 내 구원투수들 중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으며, 2001시즌 개막전 Cardinals 클로저 자리는 Dave Veres의 것이었으나, 시즌 막판에는 Steve Kline이 클로저였다 (반면 Veres는 8월 이후 거의 세이브 기회에서 등판하지 못했다). 매치업을 중요시하는 TLR에게 Steve Kline의 연투 능력은 불펜진 운용을 한결 수월하게 해주었으며, 시즌 후 발간된 2002 Scouting Report에서는 "이 팀에서 Morris와 Darryl Kile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투수"라고 Kline을 묘사했다. 

그리고 Kline은 클로저가 아닌 불펜 투수로는 이례적으로 2001시즌 MVP 투표에서 표를 받는다 (WAR 1.1, Scott Rolen, Brian Giles, Larry Walker, Vladimir Guerrero와 동률). 당시는 지금보다 더욱 Non-closing Middle-reliever들이 각광받기 힘든 시절이었기에 Kline의 득표는 상당히 기록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해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Giants의 릴리버 Felix Rodriguez 역시 득표했다)

Kline의 주 레퍼토리는 Heavy Sinker 와 Late-breaking, hard Slider였으며, 그의 최대 장점 중 하나는 "공을 꾸준히 낮게 제구할 수 있는 능력" (Consistency down in the zone) 이었다. 당연히 좌타자들은 "마치 탁자 위를 구르다가 떨어지는 것 같은" 그의 싱커를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으며 (피안타율 .149) 우타자들 역시 Kline을 상대로 상당히 고전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릴리버들에게 중요한 "깡" 이 있던 Kline은 후반기에 Dave Veres가 부상으로 이탈한 후 중압감이 더 커졌으나 오히려 후반기에만 1.04의 평균자책을 기록하며 Pressure를 어느 정도 즐기는 모습까지 보여주었고, 시즌 막판들어 Kline은 불펜 에이스로 등극했다.


포스트시즌에서도 Kline의 활약은 훌륭했다. 2001년 NLDS 2차전, Randy Johnson과의 매치업에서 사실상의 판정승을 거둔 Woody Williams가 8회 선두타자 Craig Counsell에게 안타를 허용하자 TLR은 곧장 Steve Kline을 투입했다. Kline은 이후 상대하는 거의 매 타자들에게 땅볼을 유도하며 8,9회를 모두 막아내고 6아웃 세이브를 해냈는데, 이 기록은 2012년 Jason Motte이 갈아치우기 전까지 포스트시즌에서 Cardinals 투수가 기록한 마지막 6아웃 세이브로 남아있었다. 

이어서 펼쳐진 3차전에서도 9회에 등판해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고, 4차전에서도 세이브 상황에서 올라와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으나, 결국 이 시즌 Kline에게 유일한 오점으로 남은 NLDS 5차전에서 Womack에게 끝내기 안타를 허용하며 미들 릴리버가 꿈꿀 수 있는 가장 화려한 시즌을 아쉬움 속에서 접었다.


Kenny Lofton의 끝내기 안타가 터지는 순간의 Steve Kline (2002년 NLCS)



2002년

이 해 5월 Kline는 Left-tricep strain으로 DL에 올라 한 달여를 결장했는데, 복귀 후에도 전반기 내내 피칭 리듬과 투구감을 찾지 못한 모습이었다. 특히 땅볼 유도를 해야하는 그의 싱커가 제대로 듣지 않아 고생하며 전반기를 4.29의 평균자책으로 마감했다. 그러나 후반기에 다시 감을 찾은 Kline은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에만 37이닝을 소화하며 2승 무패 4세이브 평균자책 2.89를 기록했고, 새 클로저이자 이후 자신의 절친이 되는 Jason Isringhausen의 뒤를 굳건히 받쳐주었다. 

NLDS와 NLCS에서 5경기에 나와 한 점도 내주지 않았던 Kline은, 1승 3패로 탈락을 앞둔 NLCS 5차전, Matt Morris가 선발로 나와 9회까지 팽팽한 1:1의 균형을 이어갔다. 투구수가 85개에 불과하던 Morris는 9회말에도 홈팀 Giants를 상대로 등판을 강행했고, J.T. Snow까지 플라이볼로 잡아내면서 2아웃을 잡아냈다. David Bell이 좌중간으로 툭 쳐서 안타를 뽑아낼 때만 해도 별일 없겠지 싶었으나 (그 정도로 Morris는 쉽게 쉽게 잘 던졌다) 후속타자 Shawon Dunston이 다시 안타를 뽑아내면서 홈 관중들을 열광시켰다. 끝내기 위기에서 TLR은 Steve Kline에게 다시 공을 맡겼고, Kline은 첫 타자 Kenny Lofton에게 가장 자신있는 싱커를 던졌으나 Lofton이 이 초구를 때려 우중간에 안타를 만들어내면서 시리즈가 끝나버렸다. 

Morris가 워낙 잘 던지며 반전의 여지를 마련했었기에 (상대 투수는 전병호를 연상시키던 흑마술사 Kirk Rueter) 5차전을 잡아내고 Busch로 돌아간다면 시리즈를 역전할 수 있을 듯 싶었으나, Kline이 2년 연속 자기 손으로 시리즈를 마무리 지으면서 -_- Cardinals는 다시 한 번 주저앉았다. 


2003년

이 시즌 Kline은 5승 5패 3세이브 18홀드, 78경기 출장에 63.2이닝을 소화했다. 그러나 그는 볼넷보다 딱 한 개 많은 삼진을 잡는 데 그쳤고 (30BB/31SO) 평균 자책은 루키 시즌 이후 가장 높은 3.82에 달했다. 무엇보다 좌타자 상대 피안타율이 2년 전에 비해 거의 1할이 올랐던 점이 (.243) 결정적인 성적 악화로 작용했다. 2003년 4월 27일, Cardinals와 Marlins는 무려 20이닝까지 가는 지루한 경기를 펼쳤는데, Kline은 이 경기에서 LOOGY라는 본인의 신분을 잊고 3이닝 퍼펙트를 기록하며 18~20회를 막아내고 승리투수가 되었다. 그러나 이 이후 Kline은 평년만 못한 안정성을 보여주었으며, 특히나 피홈런이 늘어나고 삼진률이 떨어지는 적신호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3년간의 활약과 여전한 내구성에 고무된 프론트는 이 해 12월, Kline을 1년간 1.7M으로 붙잡는다.  


2004년 WS 진출이 확정되던 순간



2004년

2004년은 Steve Kline에게 가장 안타까운 시즌 중 하나로, 이 해 Kline은 9월 초까지 평균자책 1.79를 기록하며 무려 67경기에 등판했고, 이 페이스 대로였다면 3년만에 다시 80경기 출장 및 출장왕 타이틀을 가져올 수 있을 듯 보였다. 특히나 Ray King이라는 또다른 효과적인 좌완 릴리버가 불펜에 들어오면서 경기 중후반 모든 좌타자 매치업을 혼자 상대하던 Kline의 부담이 조금 줄어들었고, Izzy를 위시해 Cal Eldred, Julian Tavarez 등이 좋은 시즌을 보내면서 2004년 Cards 불펜은 간만에 상당히 안정된 모습이었다.

Kline은 이 시즌 홈에서 25.2이닝을 던지는 동안 ERA 0을 찍었으며 (늘 Kline은 홈에서 훨씬 강한 모습이었다) 좌타자 상대로의 위력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피안타율 0.143). 그러나 9월 초 Kline은 Groin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했고 이후에는 "Torn tendon in finger" (손가락 인대 부상)으로 다시 쉰 뒤 포스트시즌을 앞둔 9월 29일에서야 로스터로 복귀했다. 그러나 손가락 부상이 완전치 않은 상태로 복귀한 그를 정규시즌처럼 불펜 에이스로 중요한 상황에 투입할 수는 없었고, 부상이 점점 낫기를 바라면서 Low-Leverage 상황에서 등판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Dodgers 2004년 NLDS 3차전 (그렇다. Jose Lima가 완봉승을 거둔 바로 그 경기이다 -_-)에서 0:4로 뒤진 8회에 나와 공 7개로 1이닝을 삼자범퇴 무실점으로 막아낸 Kline은 사실상 그 경기를 마지막으로 포스트시즌을 접었다. NLCS 2차전, 4:3으로 앞선 6회에 등판한 그는 첫 두 타자인 Vizcaino와 Brad Ausmus에게 연속 안타를 허용한 뒤 이를 Kiko Calero에게 마운드를 넘겼으며, 경기 후 기자들에게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사실상 올 시즌은 끝난 것 같다" 고 말했다. 이후 Kline은 Hand Specialist를 보기 위해 Houston 대신 Indianapolis로 떠나야 했으며, 이 경기는 Kline이 Cardinals 유니폼을 입고 던진 마지막 경기이자 커리어 마지막 포스트 시즌 등판이었다.


훌륭했던 4년간의 Cardinals 시절

Year Age Tm W L ERA G GF SV IP H R ER HR BB SO BF ERA+ WHIP H/9 HR/9 BB/9 SO/9 SO/BB Awards
2001 28 STL 3 3 1.80 89 26 9 75.0 53 16 15 3 29 54 303 241 1.093 6.4 0.4 3.5 6.5 1.86 MVP-24
2002 29 STL 2 1 3.39 66 17 6 58.1 54 23 22 3 21 41 241 118 1.286 8.3 0.5 3.2 6.3 1.95
2003 30 STL 5 5 3.82 78 22 3 63.2 56 29 27 5 30 31 274 108 1.351 7.9 0.7 4.2 4.4 1.03
2004 31 STL 2 2 1.79 67 22 3 50.1 37 12 10 3 17 35 202 238 1.073 6.6 0.5 3.0 6.3 2.06
STL (4 yrs) 12 11 2.69 300 87 21 247.1 200 80 74 14 97 161 1020 156 1.201 7.3 0.5 3.5 5.9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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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ted 1/24/2013.
*1998-2007년까지 10년간 출장 경기수 ML 전체에서 1위 (750경기, 2위는 Mike Stanton 706경기)


장난끼가 많았던 Steve Kline



2005년 이후: 떠나고도 계속되는 Cardinals 사랑

계약이 끝나고 Steve Kline은 프론트에 "내게 재계약 오퍼를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Walt Jocketty는 "우리의 터무니없는 액수로 너에게 모욕을 주고싶지 않다"며 사실상 결별을 선언했다. 이미 Ray King이 건재하고 Randy Flores, Tyler Johnson 등이 올라오고  있던 불펜 사정상 Kline처럼 삼십대 중반을 바라보는 베테랑 LOOGY에게 많은 돈을 주기는 힘든 실정이었던 것이다. Kline은 이후 Orioles와 2년간 5.5M의 딜을 체결한다.

그러나 Orioles로 이적하고 맞는 첫 시즌 첫 주에 Kline은 먼지나게 두들겨맞고, 인터뷰에서는 St. Louis의 팬들과 선수들을 대놓고 공개적으로 그리워하며 Orioles로 온 것이 실수라고 말해버린다. 심지어 "나는 Jim Edmonds, Edgar Renteria 등이 내가 실수하면 뒤에서 받쳐주는 것에 너무 익숙해 있다" 고 말하며 팀메이트들을 깠다. 그만큼 Kline은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고 St. Louis에 대한 애정이 넘치던 선수였다.

There's nothing worse than getting booed at home. St. Louis fans are too good for that. They understand the game more than most people.

-Steve Kline, on St. Louis fans


Orioles에서의 불행한 시간을 보내면서 61이닝만에 무려 11개의 홈런을 허용한 Kline은 (Cardinals에서 4년동안 허용한 피홈런 14개) 결국 LaTroy Hawkins와 1:1 맞트레이드를 당하면서 SF Giants로 이적한다. Giants 이적 첫 해는 72경기에서 3.66의 평균자책으로 밥값은 했으나, K/9이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진 2007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지 못했다. 2008년 시즌 개막과 함께 방출된 Kline은 이후 Phillies와 계약했으나 마이너리그에서 심판과 몸싸움을 벌이며 징계를 받고 방출되었으며, 2008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이 모자는 시즌 초라서 그렇게 더러운 편도 아니다



더러운 모자 (Dirty Hat Tradition)

Steve Kline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더러운 모자이다. Kline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Pennsylvania 에서도 amish 들이 많이 사는 지역의 농부였으며, 이 지역에는 농부들 뿐 아니라 광부들 (coal miner)과 트럭운전수들 (Truckers) 등 전형적인 미국식 blue-collar 노동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동네에서 나고 자란 Kline은 하루 일과가 끝나고 나면 온 몸이 지저분해진 채로 집에 오던 아버지와 같은 노동자들을 기리는 마음에서 더러운 모자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They come home dirty after a hard day's work, and it's a symbol to my dad and others that I'm working hard, too. I've always done it. Everybody changes their hats left and right, but I decided to wear one hat the whole season. I like to see how bad and smelly it gets at the end of the year.

-Steve Kline, on his Dirty Hat idiosyncrasy


Cardinals 구단 측에서 이러한 Steve Kline의 모자 페티쉬를 프로모션의 일환으로 삼아 "Dirty-Cap-Day"를 지정, 2002년 5월 19일 홈관중 선착순 5000명에게 인공적으로 지저분하게 만들어진 "Dirty Hat"을 선물로 주었다. Kline은 또한 거침없고 재미있는 언행과 남자다움으로 여성팬들이 많았는데, 몇 가지 에피소드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에피소드 #1

2004년 개막전에서 당시 미 대통령이었던 George W. Bush가 시구를 하러 나왔다. 구단 측에서는 Bush라고 쓰여진 Cardinals 저지를 선물하며 선수들에게 사인을 하게 했는데, 모두들 제 이름을 쓰는 사이 Steve Kline 혼자 Babe Ruth 라고 썼다.

에피소드 #2

Orioles 시절 Yankees 상대로 던지다가 보크를 선언받은 Steve Kline은 경기 후 이렇게 얘기했다.

"지암비가 타임을 불렀고, 나는 투수판에서 발을 떼었다. 양키즈 벤치에서 "보크"를 외쳤다. 한 번 그렇게 걸리기 시작하면, 심판들이 신경써서 본다. 그 보크 판정은 삽소리였다. 걔한테 (주심 Foster) 코브라 클러치 (레슬링 기술)를 걸지 말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 순간 전까지는 훌륭한 게임이었는데."

"The batter, Jason Giambi, called time. I stepped off the rubber. You could hear the Yankee bench yelling "Balk." Once you get hit for it once, the umpires look for it. That was a bogus call. I was deliberating whether to put him in the Cobra Clutch. It was a great game until that happened."

오프시즌에는 고등학교에서 15년째 레슬링 코치를 한다는 Steve Kline이다. 


에피소드 #3

2004년 7월 Cubs와의 시리즈. Wrigley Field 불펜에서 컵스 팬들이 던지는 조롱과 욕설로 이미 한껏 짜증이 나있던 Kline은 TLR이 몸을 풀라고 지시한 뒤 경기에 투입하지 않는 일을 (불펜 투수들이 제일 싫어한다는 소위 'dry-humping') 두 차례나 하자 카메라에 대놓고 TLR 보란듯이 중지손가락을 날렸다. 이후 TLR은 샤워장까지 가서 Kline을 대면해 상당한 설전을 벌였다고 (알만하지 않은가.) 여기서 웃기는 것은 Steve Kline이 "나한테 손가락으로 욕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하라 (You can flip me off whenever you want, Tony"고 TLR에게 얘기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Kline이 실점을 하고 들어갈때마다 TLR이 덕아웃에서 손가락으로 욕을 해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I loved Tony. People always thought we hated each other but he was probably the best manager I ever had. I never complained about anything too much. I liked to have fun with him and he liked to have fun with me, but once game time hit, he wanted to win and I wanted to win. He doesn't hold grudges. He lets things slide and that's why he is who he is. That's why he is a Hall of Famer.

         -Steve Kline on Tony La Russa, in an interview with Fox



에피소드 #5

2003년 시즌 말, 이미 플레이오프 탈락이 확정된 Cardinals와 Astros의 시리즈를 앞두고 Prior는 "I hope Astros beat their brains in" 이라는 강한 표현을 쓰며 도발했다. 그러자 Mark Prior의 NLDS 3차전 출격을 앞두고 Steve Kline은 지역 TV에 나가 이렇게 말했다.

"I hope Mark Prior takes a line drive to the forehead and we never have to see him again," (Prior가 머리에 라인드라이브를 맞아서 다시 볼 수 없었으면 좋겠다)


에피소드 #6

이 에피소드는 얼마 전 댓글에서 언급된 "2004년 7월 20일경 Cubs와의 난타전 시리즈"와 관련이 있다. Carlos Zambrano가 Jim Edmonds의 다리에 빈볼을 던지며 도발했으나, Edmonds는 꾹 참고 다음 타석에서 홈런을 친 뒤 타구를 잠시 응시하며 Zambrano의 심기를 건드렸다. Zambrano가 이후 화를 내며 매너 운운을 하자 Steve Kline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I just don't think you should yell at guys when they hit home runs when you have one of those guys on your team who hops every time he hits one. You don't see him [Zambrano] yelling at Sammy [Sosa] every time he his one off another pitcher, so I don't think you should yell at your guy  for hitting the ball and watching it. Especially when you just drilled him in the leg." (자기 팀에는 홈런 칠때마다 방방 뛰는 선수가 있는데, 그건 생각 안하고 무조건 홈런 치는 선수한테 큰소리부터 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Sammy Sosa가 홈런 칠때마다 Zambrano가 뭐라고 하진 않지 않는가. 그러니가 우리 팀 선수가 공을 치고 그걸 좀 본다고 해서 뭐라고 하면 안된다. 특히 니가 이 선수 다리에 공을 맞춘 다음에는...)


봤냐 88마일!


에피소드 #7

이 사건은 Kline이 Giants 소속으로 뛸 때 있던 일이지만 소개하지 않기에는 너무 아깝다. 2007년 5월 13일 (하필이면 이 날은 Mother's day 였다), Giants는 Rockies를 상대로 Coors Field를 마음껏 즐기며 15:1의 압도적 리드를 하고 있었다 (선발투수 Matt Cain vs. Taylor Buckholz). 이미 다 이긴 경기를 마무리하기 위해 9회말 Kline이 등판했는데, 1사 후 안타를 치고 나간 Yorvit Torrealba는 2루도루를 감행해 세이프가 되었다 (스탯에는 Defensive Indifference로 기록) 이 사건이 있고 나서 경기 후 Steve Kline은 이렇게 말했다.

"You know what? I'm a dumb hick, and I forget a lot of things, but I'm not gonna forget that."

-Steve Kline, on Torrealaba's steal

Torrealba는 이를 듣고 "어쩔려고? 84마일짜리 패스트볼로 맞출려고?" 라고 응수했고, 그로부터 2주 후인 5월 26일 Rockies와의 홈 시리즈에서 Kline은 이 날 Giants 선발이었던 Matt Morris를 구원해 등판했는데, Tulowitzki에게 이미 안타를 허용해 1사 1루인 상황에서 Torrealba를 다시 상대했다. 그리고 보란듯이 88마일짜리 패스트볼로 Torrealba의 등을 맞춰버렸다. Torrealba는 크게 화를 내며 1루로 걸어나가는 대신 Kline에게 다가갔고, 벤치 클리어링 상황이 벌어졌다. 경기 후 Kline은 "전 그냥 던진건데요. 공이 미끄러워서...야구하다 보면 이런 일도 생기는거죠" 라고 했다. Torrealba는 이후 이 사건이 징계 위원회에 회부되자 "대체 내가 뭘 잘못했냐" 고 물었다.



총평

2001~2004년간 Steve Kline은 무려 300경기에 출장했으며, 팀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역할을 큰 기복없이 수행했다. 특히 그의 연투 능력은 물론이거니와 때로는 LOOGY로, 때로는 2이닝 세이브까지 할 수 있는 유동성은 그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했다. 또한 그는 "볼넷을 내주더라도 내 공을 치게 하지 말자"는 주의로, 커리어 내내 많은 볼넷을 내줬으나 (가장 좋던 Cardinals 시절에도 3.5BB/9IP) 병살타 및 땅볼 유도 능력만큼은 여태껏 Cardinals 불펜을 거쳐간 어떤 투수들에도 꿀리지 않았다. 그러나 Kline의 가장 빛나는 퀄리티는 그의 "competitiveness"와 소위 말하는 "깡다구"로, Rosie, Mujica, Motte 등 순둥이 위주의 우리 불펜 아이들 중에도 이런 캐릭터가 하나 생기면 재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2012년 1월 26일, Steve Kline은 SF 산하 싱글A인 San Jose Giants에서 투수코치로 임명되었으며 성공적으로 코치직을 수행하고 있다. 이제 현역에서 은퇴했기에 더 이상 Dirty Hat을 쓰지는 않는다고 한다.



by Doovy





Posted by Doo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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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프시즌 때, John Mozeliak의 무브들을 자세히 살펴본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그 후속 시리즈로, 전임 단장 Walt Jocketty의 주요 선수 영입과 그 성과에 대해 살펴볼까 한다.


Jocketty는 재임기간이 무려 13시즌이나 되었기 때문에, Mo 때처럼 자세히 무브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너무 긴 시리즈가 될 것 같다. 되도록 중요한 무브 위주로 하여 분량을 조절해 볼 생각이다. 특히 Jocketty가 트레이드를 통해 주로 팀 전력을 구축했던 만큼, 트레이드 위주로 살펴볼 예정이다.


오늘은 본격적인 시리즈 전개에 앞서서 Walt Jocketty라는 인물에 대해 가볍게 훑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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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cketty와 TLR은 상성이 아주 좋은 파트너였다.


Walter Joseph Jocketty는 1951년 Minneapolis에서 태어났다. Walt가 어렸을 때는 Minnesota Twins가 아직 생기기 전이었으므로, 라디오를 통해 Cardinals 경기 중계를 듣곤 했다고 한다. (참고: Twins는 1961년에 Washington Senators가 연고지를 이전하여 탄생하였다) 또한, 당시의 그는 Cards 유니폼이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멋지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Jocketty는 University of Minnesota에서 경영학을 전공하였고, 1974년에 졸업하였다. 야구 관련 일에 종사하고 싶었던 그는 그해의 윈터미팅에 찾아갔고, 결국 당시 Astros의 AAA팀이었던 Iowa Oaks의 프런트에 일자리를 얻게 된다. 1975년 Iowa Oaks의 메이저리그 팀이 Chicago White Sox로 바뀌었는데, 이때 White Sox의 AAA 플레이어 중에는 Tony La Russa가 있어서, 두 사람은 AAA 프런트와 선수로 처음 만나게 된다. 이 시즌에는 선수였던 La Russa는 1979년에는 감독이 되어 Oaks를 맡게 되는데, 이후 La Russa는 White Sox의 감독이 되고, Jocketty는 Oakland Athletics 프런트에 합류하면서 잠시(?) 떨어지게 된다. 둘이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1986년 La Russa가 Athletics 감독으로 취임하면서이다.


1979년 말, Jocketty는 White Sox 단장 Roland Hemond의 추천에 힘입어 Oakland Athletics의 'Director of Minor League Operation'으로 전격 발탁되었다. 그는 유망주 육성과 더불어 Athletics 팜 시스템 전체를 재정비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그가 있는 동안 팜 시스템은 Mark McGwire, Jose Canseco, Walt Weiss 등의 스타 플레이어들을 배출하여 Athletics가 80년대 말 강팀으로 군림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루키레벨의 유망주 육성에도 관심을 기울여서, 루키리그인 DSL(1985년 창립)과 AZL(1989년 창립)의 탄생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런 과거를 가진 Jocketty가 훗날 Cards에서 유망주를 주로 트레이드 베잇으로 활용하고 검증된 베테랑의 외부영입을 통해 메이저 로스터를 구성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Oakland의 Farm Director로 능력을 인정받은 Jocketty는 'Director of Baseball Administration'으로 승진하여, 팜 시스템 뿐 아니라 구단의 선수 수급/육성 전반에 관여하게 된다. 1993년까지 Athletics에서 일한 후, 1994 시즌에 Jocketty는 Rockies의 부단장 자리로 옮기게 되는데, 장래의 단장 후보로 여러 구단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결국 1994 시즌이 끝난 후, 새로운 단장을 찾고 있던 Cardinals에서 그를 단장으로 선임하게 된다. 당시 최종 후보는 Jocketty와 Phillies의 단장 Lee Thomas 둘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1995년부터 2007년까지 13년간 Jocketty가 단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Cards는 플레이오프에 7차례 진출하였으며(1996, 2000, 2001, 2002, 2004, 2005, 2006), 그중 월드시리즈에 두 번 올라갔고(2004, 2006), 2006년에는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 Cardinals의 성적은 2085게임에서 1117승 968패(승률 53.6%) 였으며, 2000년과 2004년에는 ML Executive of the Year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러한 훌륭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Jocketty는 Jeff Luhnow를 비롯한 스탯 분석 조직과 기존 old-school 인사들을 잘 화합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본인이 Luhnow와 대립하는 등 갈등이 심화되었다. 2007년 팀 성적이 5할 밑으로 내려간 가운데 Cards 프런트는 1년 내내 분열되어 있었고, 결국 구단주 Bill DeWitt Jr.는 이 내부 분열의 책임을 물어 Jocketty를 해고하기에 이르렀다.


Jocketty & Mozeliak


비록 Cards에서의 결말은 좋지 않았지만, 그간의 화려한 이력과 명성을 가진 Jocketty가 새로운 일자리를 얻는 데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Reds의 오너쉽 그룹은 2008년 1월 그를 'Special Advisor'로 고용하여, 프런트 인선에서부터 스카우팅, 팜 시스템 운영 등 구단의 모든 분야에 관여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당시 단장이었던 Wayne Krivsky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말이 좋아 'Advisor'이지 상관을 모신 셈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Krivsky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3개월 만에 옷을 벗었고, 모두가 예상한 대로 Jocketty가 Reds의 단장이 되었다. 그가 단장이 된 후 Reds는 2010년, 2012년 두 차례 지구 1위를 차지하여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다. 특히 2010년의 플레이오프 진출은 1995년 이후 15년 만의 일이었고, Jocketty는 이 해 또다시 ML Executive of the Year로 선정되었다. 이변이 없는 한, Reds는 이번 시즌에도 NL 중부지구 1위 자리를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이게 될, 가장 강력한 지구 라이벌이다.


그에게는 2000년대 초중반 황폐한 Cards 팜 시스템에 대한 비난이 많이 있었고, 결국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영입된 Luhnow와 대립하다가 해고되기도 했으나, 어쨌든 메이저리그에서의 결과를 놓고 보자면 60년대 이후의 modern baseball 시대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유능한 단장 중 한 명임은 분명하다. 또한, 현역 단장으로서 Reds를 컨텐더로 이끌고 있는 그의 활약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Posted by FreeRedbird
:
주말 사이에 투수코치 Dave Duncan이 사임하는 사건이 있었다.

Dave Duncan은 작년 시즌 중에도 부인이 뇌종양 수술을 받은 후 병간호를 위해 한동안 팀을 떠나 있다가 플레이오프 때가 되어서야 복귀했던 적이 있다. 무려 30년 가까이 감독과 투수코치의 관계로 인연을 이어 왔던 TLR이 은퇴를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팀에 잔류하겠다는 의사를 계속 밝혀 왔었으나, 결국 와이프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하게 되었다.



Dave Duncan에 대해서는 이전에 이 블로그에 장문의 분석 글을 올렸던 적이 있다. (1편, 2편) 지금 다시 보니 Duncan 효과를 연간 1.5승 정도로 계산했던 것 같은데, 그의 연봉이 실제로 5M 수준이었으니 어찌보면 fair price에 계약을 해 왔던 셈이다. 세간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시즌의 성패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엄청난 영향을 주는 코치는 아니었고, 지나치게 투수들을 한 가지 스타일로 개조하려는 똥고집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의 기본적인 철학 - 볼넷을 주지 마라. 스트라이크를 던져라. 특히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아라. 타자가 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싱커를 던져서 그라운드볼을 유도하라. - 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후임으로는 불펜코치 Derek Lilliquist가 승격되었는데, 외부에서 코치를 영입하기 어려운 시기이고, 이번 오프시즌 들어 내부 인물을 중용하고 있는 분위기를 고려할 때, 예상대로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겠다. 불펜코치에는 마이너리그의 피칭 코디네이터를 맡고 있던 Dyar Miller가 승격되었으며, 피칭 인스트럭터였던 Brent Strom이 Miller 대신 피칭 코디네이터가 되었다. 새로운 인스트럭터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듯하다. 구단 전체의 투구 철학에 대한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보이나, 밸런스 포인트를 강조하던 Duncan이 떠남에 따라, Miller와 Strom의 natural mechanics가 조금 더 힘을 얻지 않을까 싶다. 스트라이크를 많이 던지라는 Duncan의 가르침을 살리되, 투구 자세에 대해서는 조금 더 유연하게 각 투수의 개성을 살리는 쪽으로 갈 수 있다면, 오히려 이전보다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011 시즌의 드라마틱한 우승 이후, 오프시즌에는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간단히 살펴보면...

Tony La Russa(감독)


16시즌 동안 감독으로 재직(1996-2011) 한 후 2011년 10월 31일에 은퇴를 발표하였다. 그의 후임은 Mike Matheny로 결정되었다.

Dave Duncan(투수코치)


16시즌 동안 투수코치로 재직(1996-2011) 한 후 2012년 1월에 와이프 병간호를 위해 사임하였다. 그의 후임은 Derek Lilliquist이다.

Jeff Luhnow(Senior VP of scouting and player procurement)


Luhnow는 9년 동안 VP로 재직(2003-2011) 하며 스카우팅 및 팜 디렉터로 일하다가 2011년 12월 Houston Astros의 새로운 단장이 되면서 사임하였다. 후임으로는 Dan Kantrovitz가 임명되었다.

Sig Mejdal(Senior quantitative analyst)


한때 NASA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기도 했던 Mejdal은 2004년부터 Cardinals의 스탯 분석을 담당하는 Senior quantitative analyst로 일하면서 Luhnow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고, 결국 2011년 12월 Luhnow가 Astros 단장이 되면서 Astros 프런트에 합류하였다. 후임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 개인적으로는 Luhnow가 사임했을 때 제발 데려가지 않았으면 했던 1인이었으나... 결국 데려가고 말았다.

Albert Pujols(1루수)


그는 1999년 드래프트 13라운드 지명으로 입단한 후, 2001 시즌 개막전 때 메이저리그에 데뷔하여 11시즌 동안 지금 은퇴해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수 있을 정도의 기록을 남기고 2011년 12월에 FA로서 Angels와 계약하여 팀을 떠났다. 1루 수비는 Berkman이, 타선에서의 빈자리는 Beltran이 메꿔 줄 것으로 예상된다.


5명 중 가장 아쉬운 사람을 하나 꼽으라면, Jeff Luhnow가 될 것 같다.

프랜차이즈를 대표하던 선수와 감독, 투수코치를 모두 잃었고, 2000년대 중후반 이후 구단이 지속적으로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큰 공헌을 한 스카우팅 디렉터와 스탯 분석 책임자까지 구단을 떠났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나는 Cardinals를 응원해 온 지난 12-13년 중에서, 이번 2012 시즌이 가장 기대가 되고 있다. 이렇게 개막전이 기다려지는 시즌은 처음이다.


Today's Music: Semisonic - Closing Time (Live 2001)



"Every new beginning comes from some other's beginning's end."
Posted by FreeRedbird
:
이 글은 The Hardball Times에 Chris Jaffe가 포스팅한 것으로, 원문의 제목은 "내가 TLR에 대해 잘 몰랐던 10가지 사실"이다. 약간의 낚시질을 위해 제목을 살짝 고쳐 보았다.

Chris와 나는 그가 THT에 Cardinals 관련 글을 올릴 때마다 메일로 의견을 주고받고 있다. ㅎㅎㅎ 참고로, Chris Jaffe는 낮에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강의하고, 밤에는 야구 스탯에 파묻혀 살고 있으며, 저서로는 Evaluating Baseball's Managers 가 있다. 이 책은 좀 비싸지만 꽤 재미있으니 메이저리그 감독들에 대해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는 일독을 권한다.


1. TLR은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야구 퀴즈의 주인공이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18세에 유격수로 선발 출장한 선수가 딱 세 명 있다. 그들은...
A-Rod, Robin Yount, 그리고 TLR이다..!!

2. TLR이 속해 있었던 Kansas City Athletics는 수많은 메이저리그 코칭스탭을 배출했다.
Athletics가 Kansas City에 있던 시절(1955-67)은 팀 성적으로는 암흑기였다. 이 13년 동안 팀은 5할 승률을 넘긴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팀을 거쳐간 선수들 중에는 전설적인 감독들과 명 코치들이 많았는데, TLR을 비롯하여 Charlie Lau(타격코치), Dave Duncan(투수코치), Dick Howser, Dick Williams, Whitey Herzog, Hank Bauer, Billy Martin, Tommy Lasorda(이상 감독으로 모두 월드시리즈 우승) 등이 한때 이 팀에 있었다.

3. TLR은 Bill Veeck과 연결되어 있는 몇 안되는 생존자이다.
White Sox의 전설적인 괴짜 구단주 Bill Veeck은 1979년(Veeck이 악명높은 "Disco Demolition Night" 프로모션 행사를 진행하여 흥분한 관중들이 폭동을 일으켰던 바로 그 해이다)에 TLR을 처음 감독으로 고용한 인물이었는데, 그와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 중 현역으로 지금까지 활동한 인물은 거의 TLR 뿐이다.

4. 30년이 넘는 재임기간동안, TLR은 단 1회 해고되었다.
성적이 나쁘거나 하면 쉽게 짤리는 것이 감독이지만, TLR은 그 긴 기간 동안 한 번 밖에 해고된 적이 없다. 1986년 White Sox에서 짤린 것이 전부이다. 그는 단 몇 주 뒤에 A's 감독으로 부임하였고, 이후 1995년에 자진해서 물러난 후 Cardinals로 옮겼다.

5. Oakland 불펜은 현대 불펜 운용의 시작이었다.
TLR은 구원투수들의 역할을 세분화하고, 이닝 중간에 투수교체를 자주 단행한 최초의 감독이었다. 오늘날 이닝 중에 투수를 바꾸는 일은 흔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보기 힘든 일이었다. 1991년 A's 구원투수들은 출전시 평균 1.14이닝을 던졌는데, 당시에는 이것이 MLB에서 가장 작은 수치였다. 하지만, 2010년 메이저리그에서 이보다 평균 이닝이 많은 팀은 Mariners(1.17) 뿐이다.

6. TLR의 팀에서 은퇴한 선수들로 로스터를 만들면 올스타 팀이 된다.
TLR이 33년 감독생활을 하는 동안 그의 팀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선수들 만으로 로스터를 만들면 어떻게 될까?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C – Joe Girardi
1B – Mark McGwire
2B – Steve Sax
SS – Ozzie Smith
3B – Ron Cey
OF – Dusty Baker
OF – Larry Walker
OF – Reggie Jackson
DH – Don Baylor
SP – Bob Welch
SP – Dave Stewart
SP – Fernando Valenzuela
SP – John Smoltz
SP – Chuck Finley
RP – Sparky Lyle

벤치 - Willie McGee, Greg Luzinski, Vance Law, Carney Lansford, Will Clark, Oscar Gamble, Preston Wilson, Ray Lankford, Glenn Hubbard, Dave Kingman, Bruce Bochte, Aurelio Rodriguez, Bill Caudill, Gabe White, Andy Benes, Darryl Kile, Mark Mulder, Eric Show, and even Minnie Minoso.

이것은 Chris Jaffe의 원문이고... 나는 그와 왜 Baker를 빼고 Lankford를 스타팅 라인업에 넣어야 되는지 토론을 하고 있는 중이다. ^^
어쨌거나 이정도면 리그 우승 전력인 것 같은데...

7. 지난 30년간 Cardinals를 이끈 감독들은 모두 HOF 감독들이다.
지난 30년간 Cardinals를 맡았던 감독들은 Whitey Herzog, Joe Torre, TLR로, 이들은 모두 명예의 전당에 오를 감독들이다.

8. TLR의 팀은 상대팀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우수했다.
TLR의 팀은 5,097 게임에서 23,964 득점 - 22,441 실점으로 1,523점을 더 득점했다.
그의 팀은 상대 팀에 비해 1,523개의 안타를 더 치고, 686개의 볼넷을 더 얻고, 19개의 HBP를 더 얻었다. 또한, 1,523개의 안타 속에는 480개의 홈런이 포함되어 있다.
그의 팀은 상대보다 854개의 도루를 더 기록한 반면 도루실패는 단지 27번 더 했을 뿐이다.
주자를 2천여명이나 더 내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병살타는 오히려 상대보다 79개 적게 쳤다.
그의 팀은 상대보다 113개의 SF, 28개의 SH를 더 기록했다.

9. 그의 월드시리즈 우승팀은 그의 가장 훌륭한 팀이 아니었다.
TLR의 A's는 1988-90년 3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는데, 그중 우승을 차지한 팀은 가장 적은 99승을 기록한 89년 팀이었다. (나머지 2년은 104, 103승)
그가 감독을 맡았던 30여개의 팀 중에서, 2006년의 Cardinals 팀은 승률 20위, 2011년 팀은 승률 12위에 불과했다.

10. TLR은 정말 정말 오랜 기간 감독으로 재임했다.
30년이 넘게 감독 생활을 하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일이다.
여기 2007년 Brian Gunn이 전했던 TLR의 일화가 있다.
- TLR 왈, "5점차로 이기고 있을 때에도 신경이 날카로와져서 견디기 힘들 때가 있다. 나는 두통에 시달리고, 구토를 할 것 같은 기분이 된다. 결과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이다." 두통, 불안함, 구토감, 이런 것은 TLR에게는 아주 정상적인 근무 환경인 것이다.


더 읽을 거리.
Chris Jaffe의 TLR Career Highlight.
Chris Jaffe의 TLR 평가(그의 책의 일부분임)
Posted by FreeRedbird
:
항상 어딘가에서 구단 내부 소식을 빼내오는 Joe Strauss가 이번엔 Cardinals 감독 후보 명단을 공개했다.
(정보를 주신 skip님께 감사드리며... ^^ )
대부분 익숙한 이름들이겠지만, 이들의 경력을 간략히 정리해 보았다.

Jose "Secret Weapon" Oquendo (63년생)
1979 Mets와 아마추어 FA 계약
1983 메이저리그 데뷔
1983-84 Mets
1985-95 Cardinals
1996 은퇴
2루수 및 유틸리티맨. 1,190 게임에 나와 .256/.346/.317 기록.
Secret Weapon이라는 별명은 당시 감독이었던 Herzog에 의한 것임.

1998 New Jersey Cardinals 감독 (SS A 레벨, Cardinals org.)
1999 St. Louis Cardinals 벤치 코치
2000-현재 St. Louis Cardinals 3루 코치
Padres, Mariners, Mets 등에서 감독 후보로 인터뷰를 한 바 있음.
2009년 WBC에서 푸에르토리코 감독을 역임.

Chris Maloney (61년생)
1983 Mets와 계약
1루수/외야수. 4시즌을 마이너리그에서 보낸 후 은퇴

1991 Johnson City Cardinals 감독 (Rookie레벨, Cardinals org.)
1992 Hamilton Redbirds 감독 (SS A, Cards org.)
1993 Savanah Cardinals 감독 (A, Cards org.)
1994 Arkansas Travelers 감독 (AA, Cards org.)
1995-96 St. Petersburg Cardinals 감독 (A+, Cards org.)
1998-2000 Arkansas Travelers 감독 (AA, Cards org.)
2001 Johnson City Cardinals 감독 (Rookie, Cards org.)
2002-04 New Orleans Zephyrs 감독 (AAA, Astros org.)
2005-06 Springfield Cardinals 감독 (AA, Cards org.)
2007-11 Memphis Redbirds 감독 (AAA, Cards org.)
마이너리그에서만 감독 생활을 20년 하였음.

Mike Matheny (70년생)
1988 Blue Jays에 의해 드래프트 31라운드 지명 : 계약하지 않음.
1991 Brewers에 의해 드래프트 8라운드 지명 : 계약
1994 메이저리그 데뷔
1994-98 Brewers
1999 Blue Jays
2000-04 Cardinals
2005-06 Giants
2007 은퇴
포수. 13시즌에서 .239/.293/.344 기록. 최고의 수비형 포수로 명성을 날림. GG 4회 수상.

2010-현재 Cardinals 마이너리그 순회 코치 및 Special Assistant for Player Development

Joe "Super Joe" McEwing (72년생)
1992 Cardinals에 의해 드래프트 18라운드 지명 : 계약
1998 메이저리그 데뷔
1998-99 Cardinals
2000-04 Mets
2005 Royals
2006 Astros
2008 은퇴
유틸리티맨. 754게임에서 .251/.302/.355 기록. 실력은 없으나 열심히 뛰는 허슬플레이어의 전형이었음.

2008 Charlotte Knights 타격 코치 (AAA, White Sox organization)
2009-10 Winston-Salem Dash 감독 (A, White Sox org.)
2011 Charlotte Knights 감독 (AAA, White Sox org.)
2009년 올해의 마이너리그 감독상을 수상하고, BA에 의해 "top managerial prospect"로 선정됨.

Terry "Tito" Francona (59년생)
주요 경력
1980 Expos에 의해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 : 계약 (전체 22순위)
1981 메이저리그 데뷔
1981-85 Expos
1986 Cubs
1987 Reds
1988 Indians
1989-90 Brewers
1990 은퇴
1루수/외야수. 708게임에서 .274/.300/.351 기록.

1991 Sarasota White Sox 감독 (Rookie, White Sox org.)
1992 South Bend White Sox 감독 (A, White Sox org.)
1993-1995 Birmingham Barons 감독 (AA, White Sox org.)
1996 Detroit Tigers 3루 코치
1997-2000 Philadelphia Philies 감독
2001 Cleveland Indians Special Assistant to GM
2002 Texas Rangers 벤치코치
2003 Oakland Athletics 벤치코치
2004-11 Boston Red Sox 감독
1993년 올해의 마이너리그 감독상 수상. 1994년 BA의 "top managerial prospect"로 선정.
2004, 2007년 월드시리즈 우승

Ryne "Ryno" Sandberg (59년생)
1978 Phillies에 의해 드래프트 20라운드 지명 : 계약
1981 메이저리그 데뷔
1981 Phillies
1982-97 Cubs
1997 은퇴
2005 Hall of Fame 입성
2루수. 2,164게임에서 .285/.344/.452, 기록. 2루수로써 기록한 277홈런은 2004년 Jeff Kent에 의해 깨질 때까지 메이저리그 2루수 최고 기록이었음. 9년 연속 GG 수상. 10년 연속 올스타 선정.
Cubs는 그의 등번호 25번을 영구 결번시킴.

2007-08 Peoria Chiefs 감독 (A, Cubs org.)
2009 Tennessee Smokies 감독 (AA, Cubs org.)
2010 Iowa Cubs 감독 (AAA, Cubs org.)
2011 LeHigh Valley IronPigs 감독 (AAA, Philles org.)
2010년 "올해의 PCL 감독"으로 선정됨.


여러가지로 특이한 리스트이다. Tito 이외에는 메이저리그 감독 출신이 없고, Matheny의 경우는 마이너리그 감독 경험조차 없다. Matheny와 McEwing은 매우 젊은 후보들이다. Sandberg가 끼어 있는 것도 특이한데, Sandberg는 Cubs 유니폼을 입고 HOF에 입성할 정도로 라이벌 Cubs의 수퍼스타였기 때문이다. 반면 종종 거론되던 Pop Warner는 빠져 있는데... 마이너리거들의 육성에서 AA가 매우 중요한 레벨인 만큼 거기서 계속 유망주들을 키워 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Matheny는 아직 좀 이른 느낌이다. 마이너리그에서 몇 년 감독생활을 한 뒤에 불러올리면 어떨까 싶다. McEwing도 마찬가지. Maloney는 2009년 Memphis를 PCL 정상에 올려놓는 등 최근 몇 년간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는데... Rapoport 같은 애들에게 출장기회를 많이 주는 걸 보니 그다지 기대가 되지 않는다.

굳이 이 리스트에서 고르라면, Tito를 데려오거나 Oquendo에게 기회를 줘 보면 어떨까 싶다. Oquendo의 경우 Pujols 재계약에 도움이 되는 장점도 있고... 워낙 오래 3루코치 생활을 해서 이미 선수들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Sandberg는 HOF에 입성하면서 요즘 어린 것들은 정신자세가 글러먹었다느니, 희생번트와 같은 중요한 플레이가 요즘 무시되고 있다느니 등등의 일장연설을 늘어놓은 바 있다. 이런 태도도 맘에 안들고, 게다가 Cubs의 수퍼스타 출신이기도 하고... 웬만하면 다른 후보를 선택하길 바란다.


이 6명은 단지 "알려진 리스트"일 뿐이고, 실제로 후보가 더 있을 수 있다고 하지만... 조만간 결론을 내겠다는 Mo의 태도를 볼 때 후보가 그렇게 많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누가 되든 간에 가장 중요한 덕목이 "Mozeliak 및 선수 육성 파트(Jeff Luhnow)와의 긴밀한 협력"이라고 하니, TLR시절과는 사뭇 다른 구단 분위기가 될 것 같다.

Dave Duncan은 Duncan대로 자신과 원만하게 일할 수 있는 감독을 원한다는데... 저 리스트에서 누가 거기에 해당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만약 Duncan이 떠난다면, 후임으로는 마이너리그 순환 코치로 있는 Brent Strom을 강추하고 싶다. Strom은 Luhnow와 가까운 사이이기도 하다.
Posted by FreeRedbird
:
영원히 Cardinals 감독으로 남아 있을 것만 같던 Tony La Russa 감독이 은퇴를 선언했다.


이미 본인은 8월에 은퇴하기로 결심을 했다고 하는데...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고 은퇴를 하게 되어 그야말로 정상에 있을 때 내려오는 형태가 되었다. 멋진 결말이다.


Tony La Russa는 1979년 Chicago White Sox의 감독으로 취임한 이래, 지난 33년 동안 정규시즌에서 2728승 2365패(승률 .536)를 기록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우수한 성적이며, 역대 감독 다승 랭킹에서는 Connie Mack(3731승)과 John McGraw(2763승)에 이어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구단주와 단장이 좋은 선수들을 공급해 준 덕분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감독 본인이 능력이 좋지 않으면 이렇게 30년 이상 현역 생활을 유지한다는 게 불가능하다.

그는 33시즌 동안 14번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였고, 이중 6번을 월드시리즈에 올라가 3회 우승하였다. 월드시리즈를 3회 이상 우승한 감독은 TLR을 제외하고는 8명 뿐이며, 이들 중 Joe Torre를 제외한 7명은 모두 이미 명예의 전당에 올라 있다. 그가 포스트시즌에서 거둔 70승은 Joe Torre(84승)에 이은 통산 2위의 성적이다. 또한, AL에서 3회, NL에서 1회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기존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1이닝 클로저" 개념을 발명한 것으로, Oakland 감독 시절 Dennis Eckersley를 전업 마무리 투수로 삼은 것이 그 최초이다. Eckersley는 클로저로 보직을 바꾼 후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였고, 92년에는 AL 사이영상과 MVP를 동시에 수상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전통적인 투수 운용의 틀을 깨고 투수들을 3이닝씩 나눠 던지게 하기도 했고, NL에 온 뒤에는 심심치않게 투수들을 8번 타순에 기용하기도 했다. 또한, 이번 포스트시즌에서 보여 준 바와 같이, 보통은 8회에 기용하기 위해 아껴두는 셋업맨들을 3회나 5회부터 일찌감치 투입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세이버메트릭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여준 투수 8번 타순 기용이나 셋업맨 조기 투입 등은 세이버메트릭스에서 주장하는 바와 동일한 경기 운영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승부에 대해서는 일절 타협하지 않고 매 경기를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진정한 프로페셔널이기도 했다. 상대방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연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패배를 용납하지 않는 그의 승부사 기질은 심지어 스프링 트레이닝의 연습경기조차 진지하게 경기를 운영할 정도였는데, 이러한 그의 hard-driving, everyday-grinding 스타일은 Cardinals를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진지하게 열심히 뛰는 팀으로 만들었고, 그가 늘 입에 달고 있던 "play a hard nine"은 Cardinals 야구를 상징하는 표현이 되었다. TLR이 이끄는 Cardinals의 진지함과 냉정함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어서, ESPN의 Jayson Stark이 Cardinals를 가리켜 "Professional stoic group"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이번 NLCS에서도 그러한 면이 잘 드러났는데, Brewers의 장난스런 Beast Mode와 인터뷰에서의 도발에 대해 Cardinals는 시종일관 "응, 그래" 수준의 쿨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승부를 향한 열정은 항상 좋은 쪽으로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심판이나 상대팀과 끊임없이 마찰을 빚어온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도 더 문제였던 것은, 이러한 열정적이고 진지한 분위기에 동참하지 못하는 선수들은 대놓고 미워하다가 결국 팀 밖으로 몰아냈다는 것이다. 과거 J.D. Drew가 대표적이었고, 최근에는 Brendan Ryan과 Colby Rasmus가 그러했다. Scott Rolen은 TLR과 비슷하게 항상 진지한 캐릭터였는데, 진지함과 열정이 지나치다보니 오히려 또 비슷한 둘이 충돌하여 결국 Rolen도 팀을 떠났다. 이렇게 선수를 입맛에 맞게 고르다 보면 결국 프런트의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나와 다른 사람도 포용하고 이끌어갈 수 있는 것이 진정한 리더쉽임을 생각하면,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그는 over-managing으로도 비판을 많이 받았는데, 월드시리즈 5차전에서 두 차례의 힛앤런이 실패하여 주자를 횡사시키고 결국 경기를 내준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TLR의 팀은 도루는 많이 하지 않으면서도 힛앤런이나 스퀴즈 는 자주 사용하는 편인데, 불필요한 상황에서 굳이 작전을 걸어서 상황을 악화시키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었다. Match-up 데이터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신뢰도 역시 꾸준히 비판을 받아온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TLR이 가장 맘에 안들었던 것은 역시 언론플레이였다. 언론을 통해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서 프런트를 압박하는 것이다. 인터뷰를 통해 공개적으로 Rasmus를 여러 번 씹은 결과 Mo 단장은 결국 Rasmus를 트레이드했다. Rangers에서 흑형이 방출되자 언론을 통해 "참 좋은 투수"라며 여러 번 치켜세운 결과 Mo 단장은 결국 그를 영입했다. 그나마 올해는 Mozeliak이 TLR에게 많이 맞춰준 편이지만, 2009년에 Chris Duncan을 트레이드 했을 때처럼 단장과 감독이 대립하던 시절에는 TLR이 언론을 통해 내뱉는 독설의 수준이 상당했다. 불만이 있으면 사무실에 가서 직접 이야기를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언론을 통해 비난을 하고 나쁜 여론을 조성하여 압박을 가하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태도라고 본다.


지난 12년간 Cardinals 야구를 지켜보는 동안, 늘 이 팀의 감독은 TLR이었다. 마치 영원히 감독으로 남아 있는 느낌이었는데, 막상 TLR이 떠나고 다른 감독으로 바뀐다고 생각하니 어색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그간 나이를 먹어 가면서 점점 고집이 세지고 꼰대기질을 보이기도 해서 최근 2년간은 솔직히 TLR에 대해 불만이 많았고, 이제는 그만 은퇴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었다. 이 블로그를 초창기부터 보셨다면 2009년에는 TLR에 대해 우호적인 표현이 많다가 2010년부터 안티로 돌아섰음을 아실 것이다. 마침 우승도 하고 했으니, 모두가 좋은 분위기 속에서 이렇게 한 시대를 끝내고, 또 새로운 분위기로 새 시즌을 준비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동안 여러 모로 아쉬운 부분도 많았지만, 지금까지 쌓아온 업적과 성적에 대해서는 다른 말을 하기가 어렵다고 본다. 사실 TLR보다 더 안좋은 감독이 얼마나 많은가? (요새 TLR의 후임으로 Riggleman 같은 허접한 인물이 거론되는 걸 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그가 Cardinals 감독으로 재임한 기간 중에서도, 특히 Darryl Kile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엉망이 된 클럽 분위기를 추스려서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던 2002 시즌과, 8월 말부터 앞만 보고 질주하기 시작해서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달성한 2011 시즌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그의 베스트 시즌을 하나만 꼽자면, 역시 2002년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아름다운 퇴장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Miscellany

구단은 Octavio Dotel, Rafael Furcal, Corey Patterson의 옵션을 모두 기각했다. 이미 흑형의 옵션도 기각했으니, 결국 Yadi와 Waino 외에는 모두 옵션을 포기한 것이다. 다른 선수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Dotel을 포기한 것은 좀 아쉽다. 나이가 많긴 하지만 아직도 좋은 구위를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3.5M의 옵션을 포기하고 0.75M의 바이아웃을 지불했으니 2.75M 이하로 재계약을 해야 수지가 맞는데, 이런 가격에는 Dotel이 계약하려고 들지 않을 것이다. 결국 우완 릴리프는 외부 영입 없이 그냥 내년 시즌을 준비할 모양이다.


p.s. TLR의 인간적인 면모와 경기를 운영하는 방식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에게는 Three Nights in August 책을 추천.
Posted by FreeRedbird
:
정규시즌 성적
Cardinals 90승 72패 (NL Wild Card 1위)
Rangers 96승 66패 (AL West 1위)

World Series : Cardinals 2-3 Rangers
1차전 Cardinals 3, Rangers 2
2차전 Cardinals 1, Rangers 2
3차전 Cardinals 16, Rangers 7
4차전 Cardinals 0, Rangers 4
5차전 Cardinals 2, Rangers 4

Probable Starters
6차전 Jaime Garcia vs Colby Lewis
7차전 TBA vs Matt Harrison

5차전은 여지껏 야구를 보면서 이렇게 답답한 경기가 있었나 싶을만큼 속터지는 경기였다. 매 이닝 주자를 3루에 보내면서도 전혀 점수로 연결시키지 못하는 타자들, 상대가 고의사구와 병살작전으로 대응할 것이 뻔한데도 주자가 나갔다 하면 희생번트를 대서 아웃카운트를 헌납하는 TLR, 크리티컬한 상황에서 실패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두 차례의 어이없는 힛앤런 시도, 전화기의 문제인지 무엇의 문제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괴상한 불펜 운용까지... 생각해보면 TLR의 over-managing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만큼, 그렇게 많이 있었던 RISP 상황에서 타자들이 한두 번만 안타를 쳐줬으면 TLR이 오버할 기회조차 없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6차전은 2차전에 나왔던 Garcia와 Lewis의 리매치이다. 2차전에서 Garcia의 피칭은 꽤 훌륭했으나, 9회에 빚맞은 타구들이 안타가 되는 불운과 Pujols의 수비 미스로 아쉽게 역전패한 바 있다. 솔직히 4차전과 5차전에서 타선이 워낙 무기력했고, 2차전에서 Lewis의 공을 그다지 잘 공략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점수를 많이 낼 수 있을 지 의문이다. 다시 한 번 홈에서 유난히 강한 Garcia의 왼팔에 의지해야 할 것 같다.

현지시간으로 수요일 저녁에 St. Louis 지역에는 비가 내릴 것이 예상되는 모양이고... 이에 따라 경기를 아예 하루 연기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는 것 같다. 하루를 더 쉬게 되면 7차전의 투수 운용에 여러가지 옵션이 생기게 된다. 소위 믿음의 야구를 시전하고 있는 Washington은 연기가 되든지 말든지 무조건 Harrison을 선발로 내겠다고 했지만, TLR은 말을 아끼고 있다. 뭐 어쨌거나... 6차전을 이겨야 7차전을 할 수 있으니 일단 이기고 나서 걱정할 일이다.


Go Cardinals!!



TORTY!! TORTY!! TORTY!! TORTY!! TORTY!! TORTY!! TORTY!! TORTY!!
Posted by FreeRedbird
:
2009년 John Mozeliak은 A급 유망주였던 Brett Wallace를 비롯 5명의 유망주를 내주며 Matt Holliday와 Mark DeRosa를 영입하는 올인 무브를 감행하였다. 당시 출혈이 너무 심하다는 의견이 우세하였고, 실제로 Mark DeRosa가 손목부상에 시달리며 기대에 훨씬 못미치는 성적을 낸 데다가 플레이오프에서는 1라운드에서 스윕당함으로써, 이 트레이드는 Cards가 망한 것이라는 평가가 더욱 굳어졌다. (Holliday는 덤으로 플레이오프에서 낭심캐치라는 명장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후 2년이 지난 지금, 이 트레이드를 다시 보면, 조금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Brett Wallace는 몇 번의 트레이드를 거쳐 Astros의 주전 1루수가 되어 있지만, 그의 거대한 엉덩이가 타석에서 파워로 연결되지 않고 있으며, 현재 그의 성적은 정확히 replacement level 수준이다. Clayton Mortensen은 역시 트레이드를 거쳐 Rockies에서 메이저리그와 AAA를 오가고 있는데.. 메이저리그에서 그의 스탯은 4.63 K/9에 3.70 BB/9로 K-Mac을 연상시키는 수준이다. Shane Peterson은 현재 Oakland의 AA 팀에서 뛰고 있는데, 기록을 보니 AAA에서 좋은 성적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AA로 강등되어 있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Billy Beane이 그를 정말 중요한 유망주라고 생각했다면 이런 식의 강등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Chris Perez는 Indians의 클로저가 되어 있는데, 제구력이 개선되지 않으면서 탈삼진은 K-Mac에 가까운 수준으로 줄어 버려서... 2.95의 ERA와 달리 xFIP는 5.03으로 뽀록이 심한 모습이다. 구속도 매 시즌 감소하여 한때 95마일을 넘었던 그의 평균 구속은 이제 93마일에 머무르고 있다. Jess Todd는 웨이버 클레임으로 Cardinals에 돌아왔고, 그후 Cardinals가 그를 다시 웨이버 공시했을 때 아무도 클레임을 하지 않았다. 이쯤되면 더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서론이 다소 길었는데, 요는 트레이드 분석은 상당히 어렵다는 것이다. 여러 분들께서 댓글로 달아 주신 것처럼, 결국 시간이 지나면 결과론적으로 보게 되고, 그렇게 다시 보면 2009년의 올인성 트레이드들은 그 당시와는 전혀 다른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다. DeRosa는 한 게 없으니 wash라고 쳐도 Holliday 트레이드는 Mozeliak의 수작으로 보인다. Holliday는 두 달 남짓한 기간 동안 2.6 WAR를 기록하여 팀 전력에 확실하게 기여하였고, FA가 된 뒤에도 Cardinals 출신이었기 때문에 드래프트 픽 손실 없이 재계약을 할 수 있었다. 다른 팀에서 시즌을 보낸 후 계약했다면 1라운드 픽이 날아갔을 것이고, 그것은 Zack Cox를 지명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당시 TOP 15급으로 꼽히던 그가 서플 라운드까지 남아 있을 확률은 없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우선 세 팀이 주고받은 선수들을 보자.

Cardinals get: Edwin Jackson(RHP) from CHW
                         Marc Rzepczynski(LHP), Octavio Dotel(RHP), Corey Patterson(OF) from TOR
                         3 Player To Be Named Later or Cash from TOR
Blue Jays get: Colby Rasmus(CF), P. J. Walters(RHP), Brian Tallet(LHP), Trever Miller(LHP) from STL
                          Mark Teahen(IF UT) from CHW
White Sox get: Jason Frasor(RHP), Zach Stewart(RHP) from TOR

우선 비교적 단순한 White Sox의 이해득실을 보자. White Sox는 이 글을 쓰는 현재 51승 52패로 5할 승률 밑으로 떨어져 있지만, AL에서 가장 허접한 Central Division에 속해 있는 덕분에 1위 Tigers와 3게임밖에 차이나지 않고 있다. 이런 어중간한 포지션과 페이롤을 줄이고 싶다는 바램이 결국 이런 어정쩡한 딜을 하게 만든 것 같다. Edwin Jackson이 없어도 선발 로테이션은 꾸릴 수 있고(Buerhle - Peavy - Humber - Floyd - Danks) Frasor의 영입으로 불펜이 강화되었으며, 무엇보다도 Jackson과 Teahen을 내보냄으로써 올 시즌 4M(Frasor의 연봉을 감안하면 3M), 2011-12년 약 10M의 페이롤을 절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히 트레이드 시장에 좋은 선발 매물이 별로 없는 상황에서, Staff Ace 역할을 하던 Edwin Jackson을 판 대가치고는 다소 부족해 보인다. Frasor는 좋은 우완 불펜이긴 하지만 시즌 초 엉망이던 White Sox 불펜은 Santos가 풀타임 클로저가 된 후 많이 안정된 상태였기에, 우완 셋업맨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 아니었다. Zach Stewart는 한때 좋은 유망주로 꼽혔으나, 지금은 다소 가치가 하락한 상태이다. 25세의 나이로 올 시즌 대부분을 AA에서 보낸 그는 대략 4-5선발 급으로 보인다. 아마도, 부족하게 느껴지는 부분은 Teahen을 넘기면서 향후 2년간 10M의 현금 보조를 받은 셈으로 치면 조금 이해가 될 지도 모르겠다. Teahen은 멀티포지션이 장점이라지만 타격도 안되고 수비도 별로인, 쓸데없이 연봉만 높은 유틸리티맨이기 때문이다.


Blue Jays는 대부분의 전문가들로부터 이 삼각 딜의 승자로 평가받고 있는데... 내준 선수들이 애초에 드래프트 보상픽이나 얻을 생각으로 연봉 조정 신청을 했다가 덜컥 받아들이는 바람에 물리게 된 Frasor를 비롯하여 릴리버 세 명과 잉여 AAAA 외야수 1명, 4-5선발급 유망주 1명으로 그다지 아쉬울 것이 없는 것이다. 잉여자원들을 묶어서 꽤 오랫동안 올스타급 포텐셜로 지목받아 왔던 24세의 Colby Rasmus를 잡아 왔으니, 이런 딜을 만들어낸 AA의 수완 만큼은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이다. AA는 이미 작년에도 Braves 코칭스탭의 눈밖에 난 Yunel Escobar를 헐값에 잡아오는 개가를 올린 바 있는데, 올해에도 Rasmus를 상대로 똑같은 시도를 하고 있다. Rasmus는 현재 성적이 좋지 않지만, 스탯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삼진 비율을 크게 떨어뜨리는 등 오히려 작년보다 발전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올 시즌의 삽질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향후 몇 년간 4-5 WAR 수준의 뛰어난 활약을 해 줄 것으로 본다.

물론, 일방적인 이득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양 팀으로부터 쓰레기 선수들과 그들의 연봉을 대거 데려온 것이다. Teahen을 비롯하여 PJ Walters, Trever Miller, Brian Tallet은 아무리 봐도 전력에 보탬이 되리라고는 전혀 기대가 되지 않는 플레이어들이다. 이것은 모두 이 선수들을 활용하기보다는 양 팀에 연봉보조를 해 준 것인데.. 이게 다 올해 초 Vernon Wells를 현금 한 푼 얹지 않고 그대로 Angels에 트레이드하는 데 성공하여 페이롤을 여유롭게 유지한 덕분이다. 특히 내년에는 Teahen의 연봉까지 포함해도 전체 페이롤이 40M을 밑돌고 있어서, 올해 말 오프시즌에서 Fielder나 Pujols를 노리고 크게 질러볼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AA는 참 유능한 단장임에 틀림없다. 새삼스럽게 Orioles가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지금의 Division 구조는 바꿀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의 Cardinals 차례이다. TLR을 위시하여 코칭스탭과 끊임없이 불화를 빚어온 Colby Rasmus는 타격부진까지 맞물리면서 7월들어 벤치에 앉는 일이 잦아졌다. 어차피 그대로 두어 봐야 올 시즌 하반기 내내 벤치에서 썩을 가능성이 높아졌으므로, Mozeliak에게는 사실상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벤치워머는 굳이 Rasmus가 아니더라도 적당히 replacement level 선수를 구해서 앉혀 놓으면 되는 것이기에, 그럴 바에야 Rasmus를 이용해서 뭔가 전력 보강이라도 하는 것이 바람직한 선택일 것이다.

다음, 팀의 블랙홀이라면 미들인필드가 제일 먼저 떠오르지만, 2루는 마침 Craig이 재활을 시작했고(-_-;; ), 유격수는 Theriot를 처분할 방법이 마땅치 않은 데다 나와 있는 매물도 별로 없다. 오히려 최근 선발과 불펜이 모두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쓸만한 선발을 하나 구하고 KMac을 불펜으로 내려보내서 양쪽을 모두 안정시키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전력에 보탬이 될만한 선발투수는 Jackson 외에 Kuroda나 Ubaldo Jimenez 정도가 매물로 나와있는 것 같은데, Rockies는 Jimenez의 대가로 TOP 유망주 세 명을 부르고 있는 데다가, 이미 외야 Depth가 충분해서 Rasmus를 굳이 데려갈 이유가 없는 팀이다. Dodgers는 워낙 돈이 궁하다보니 Rockies보다는 거래가 용이하겠지만, 역시 Kemp가 있는 상황에서 Rasmus를 받으려고 할 지는 의문인 데다가, Kuroda가 트레이드 거부권을 가지고 있는 것도 큰 문제이다. 다시 한 번, Mozeliak에게는 그다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렇게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던 Mozeliak에게, Rasmus를 받고 Edwin Jackson을 물어다 주면서 처치곤란이던 Brian Tallet과 Trever Miller까지 일괄수거 해 주겠다는 AA와의 딜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을 것이다. PJ Walters와 Corey Patterson은 상호 Throw-in으로 생각되는데, Walters는 아깝지 않지만 Patterson을 굳이 받아와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아예 출루를 거부하는 듯한 그의 plate approach는 상당히 좌절스럽다.






구체적으로 득실을 따져보자.



어차피 올스타전 이후 TLR은 작심하고 Jay를 주전 CF로 기용하고 있었으니, 올해의 타선은 이 트레이드로 인해 달라질 것이 없다.

투수 쪽에서는 남은 시즌 동안 KMac (거의 replacement level) --> Jackson (19번 등판에서 3.0 WAR) 업그레이드가 대략 1.5 WAR 정도 되지 않을까 싶고, Miller와 Tallet은 모두 replacement level을 밑돌고 있었으므로 이들을 Rzep/Dotel로 교체한 효과 및 KMac이 불펜으로 간 효과를 감안하면 셋을 합쳐 거의 1 WAR 가까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잔여 시즌 동안 2.5 승 정도의 업그레이드 효과가 있는 셈인데, Brewers 및 Pirates와 치열한 1위 다툼(-_-;; )을 벌이고 있는 현 상황을 고려하면 상당히 의미있는 업그레이드가 될 것 같다. 이후의 비교를 위해 돈으로 환산하면... 평균적으로 1승 = 4M 이라고 할 때, 이 2.5승은 10M에 해당한다. Jackson을 받고 쩌리들을 내주면서 잔여 시즌 연봉이 Net으로 2M 정도 증가하는데, 이 딜이 MLB 사무국의 허가를 거쳤음을 생각하면 1M 이상의 현금이 따로 오고 갔을 것으로 보인다. 상식적으로 Blue Jays가 Cards에게 돈을 줬을 것으로 보이므로... 이 돈을 1M이라고 치면 Cards의 Net 이득은 10 - 1 = 9M 이다. 여기에 플레이오프 진출 확률 증가에 따른 추가적인 이득이 있는데(플옵 진출시 입장 및 중계수익이 추가로 발생하므로), 이건 어떻게 계산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으니 일단은 "알파"라고만 하고 넘어가자.


이렇게 이 트레이드가 올 시즌 전력 강화에 보탬이 된다는 점에는 대부분 이견이 없으나, 문제는 그 뒤이다.

Rasmus가 3년 동안 연평균 4.5 WAR을 기록(참고로 작년 Rasmus 성적이 4.3 WAR 였다. 매년 4.5 WAR면 3년간 계속 작년 수준으로 플레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상당히 높은 가정이다.)하면서 40/60/80의 조정 연봉을 받는다고 하면, 1승 = 4M으로 환산할 때 Rasmus의 기여 수준은 4.5 x 4 x 3 = 54M인 반면 연봉은 4.5 x 4 x (0.4 + 0.6 + 0.8) = 28.8M으로 25.2M의 추가 기여를 하게 되는 셈이 된다.

반면 Cards에는 Jackson과 Dotel이 모두 Type B로 시즌을 마감하면 두 장의 드래프트 서플 픽이 남게 되며, Rzep은 2012년 말이 되어야 연봉 조정 신청이 가능하다. 서플 픽의 가치는 Victor Wang의 연구에 따르면 대략 2.6M이므로, 서플픽 2장 = 5.2M 이다. 홀로 남은 Rzep이 무려 20M의 잉여 가치를 팀에 안겨줄 가능성은, 릴리버로 남는 한은 없다. Rzep이 셋업맨으로서 매년 0.7 WAR씩 해 준다고 치고, 연봉조정 기간 동안 1/1.52M을 받는다고 하면, 2.8 x 4 - 4.5 = 6.7M 이 된다.

그리고... 3명의 PTBNL 혹은 Cash가 있다. 돈으로도 받을 수 있는 수준이라면 의미있는 유망주를 받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으나, 이것은 밑져야 본전이므로 어쨌든 이 세명으로 발생하는 부수적인 이득을 "베타"라고 하자.


이제 올해 가치와 미래 가치를 모두 더해서 이해 득실을 따져보자.

9 + 알파 - 25.2 + 5.2 + 6.7 + 베타 = 알파 + 베타 - 4.3

놀랍게도 이 트레이드는 비교적 공정한 것으로 나온다...!!
"알파"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과거 2009년 Holliday 트레이드 시에는 약 4M 정도로 나왔었고, "베타"도 적어도 마이너스는 아닐 것이니, 심지어 약간은 Cardinals가 이득이라고도 볼 수 있는 트레이드이다.

게다가... 트레이드의 이해득실을 확 바꿀 수 있는 변수가 있는데, Rzep이 그럭저럭 쓸만한 선발투수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년부터 4년간을 셋업맨이 아니라 리그 평균 선발(2 WAR) 투수로 활약한다고 하고, 역시 연봉 조정을 40/60/80으로 거친다고 하면, 2 x 4 x 4 - 2 x 4 x (0.4 + 0.6 + 0.8) = 17.6M이 되어 서플 픽 2개와 합치면 미래가치만으로도 거의 대등한 수준이 된다. Rzep은 좌완으로서 쓸만한 투심과 강력한 슬라이더를 보유하고 있어 우수한 탈삼진 비율과 그라운드볼 비율을 기록하고 있으며, 실제로 09년에 선발로서 상당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오늘 Cardinals 데뷔전에서도,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으며 Miller나 Tallet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좋은 stuff를 보여 주지 않았던가... 다만, 그의 딜리버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선발로 장기간 버틸 수 있을 지는 다소 의문이다. 무리한 선발 기용이 팔꿈치나 어깨 수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결론적으로, 이 트레이드는 첫인상과 달리 꽤 공정한 트레이드였음을 알 수 있다. "알파" 및 "베타"의 크기나 미래가치에 대한 할인 정도에 따라, 그리고 Rzepczynski의 선발 전환 여부에 따라 오히려 Cardinals가 이득을 보았다고도 할 수 있는 트레이드이다.

다만, 이 딜의 성패를 좌우할 와일드카드가 또 있으니... 그것은 Berkman의 건강이다. 만약 Berkman이 장기간 DL에 오르게 되면, 트레이드 이전이라면 Rasmus가 주전으로 기용되겠지만 지금같은 로스터라면 우리는 Patterson의 모습을 자주 보며 좌절하게 될 것이다.


다음은 이 딜의 결과를 업데이트한 25인, 40인 로스터 및 페이롤 테이블이다.
참고하시기 바란다. Wainwright가 60일 DL에 올라 있는 관계로 총 41명이 되고 있다.

(클릭하시면 크게 나옵니다.)


*오랜만에 테이블을 업데이트 하다 보니 좀 오류가 있는 것 같다. Lance Lynn은 2014년까지 0.4M, 이후 연봉조정신청 자격을 얻게 된다.


Today's Music : King's X - Lost in Germany (Live 1999)



단지 세 명이 만들어내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사운드. 육중한 그루브와 Beatles풍의 하모니, 그리고 그저 놀라울 뿐인 Ty Tabor의 기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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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L Series Recap
2승 1패로 시리즈를 가져왔고, 특히 Braves의 철벽 계투진을 두 번이나 무너뜨렸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만 하지만, 마지막 경기의 삽질은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수비에서는 에러를 범하고 타석에서는 병살타를 친 Theriot도 문제지만, 역시 괴상한 선수기용을 일삼고 있는 TLR이 더 짜증난다. 이제 제발 좀 그만 집에서 쉬어라...

팀 성적

Cardinals 16승 12패 (NL Central 1위)
Marlins 16승 8패 (NL East 2위)

오늘부터 Florida Marlins와의 홈 4연전이 시작된다. Marlins는 현재 .667의 승률로 Rockies와 함께 NL 공동 2위를 달리고 있을 만큼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다. 

Probable Starters
미국시간
5/2 Kyle Lohse vs Chris Volstad
5/3 Kyle McClellan vs Anibal Sanchez
5/4 Chris Carpenter vs Javier Vazquez

5/5 Jake Westbrook vs Josh Johnson

최소한 2승 2패로 시리즈 스플릿은 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 경기는 거의 이길 가능성이 없어 보이므로, 앞의 세 경기에 총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Volstad는 지난 번 경기에서 잘 던졌지만 그전까지는 삽질을 거듭해 왔고, Vazquez는 이제 정말 한물 간 것으로 보이므로, 일단 이 두 경기를 잡으면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것이다. 2차전 상대 Anibal Sanchez는 올해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KMac도 그럭저럭 잘 던져주고 있으니 이것도 해볼만 하지 않을까...

Statistics
Batters
Cardinals .295/.361/.448, .357 wOBA(NL 1위), 8.5 BB%(9위), 18.1 K%(1위)
Marlins  .253/.327/.403, .322 wOBA(NL 6위) 9.2 BB%(6위), 21.9 K%(11위)
Pitchers
Cardinals  3.28 ERA(NL 5위), 3.70 FIP(7위), 3.75 xFIP(7위), 3.94 tERA(7위), 6.81 K/9(13위), 3.14 BB/9(7위), 49.5 GB%(2위)
Marlins  3.23 ERA(NL 4위), 3.65 FIP(6위), 3.77 xFIP(8위), 3.86 tERA(6위), 7.23 K/9(10위), 3.23 BB/9(8위), 44.2 GB%(10위)

Braves 시리즈에서 스탯을 조금 까먹기는 했지만, Cards의 타선은 여전히 리그 최강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다만 Freese가 손목 부상으로 DL에 오른 것이 아쉬운데, Allen Craig가 얼마나 땜빵을 잘 해줄 지가 관건이다. 양 팀은 투수 스탯에 있어서는 상당히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Player(?) to Watch
Tony La Russa. 자꾸 창의적으로 지는 방법을 연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는데...
Posted by FreeRedbird
:
1. 팀 성적

86승 76패, NL Central 2위(5게임차)

Cardinals가 시즌 마지막 게임에서 Jeff Suppan의 6이닝 무실점 호투(WTF!?)에 힘입어 Rockies를 6-1로 꺾고 시즌을 마무리했다. 시즌 막바지에 5연승을 하면서 시즌을 끝냈는데... 9월 내내 삽질하다가 시즌 다 끝날 무렵에 갑자기 연승행진을 하는 특이한 현상이 최근 몇 년간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면 참 좋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플레이오프 진출은 안되고 내년 드래프트 순위만 내려가는 역효과가 나고 있어서 안타깝다. 뭐 어쨌든.... 지는 것보다는 이기는 게 좋은 거라고... 좋게 생각하도록 하자.

Jeff Suppan의 호투는 아주 나쁜 타이밍에 나왔는데... 이런 투구를 마지막에 함으로써 괜히 Mozeliak 단장으로 하여금 "재계약을 해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의 3.84 ERA는 꽤 그럴듯해 보이지만, 4.89 FIP와 5.05 xFIP를 보면 역시 Suppan은 그냥 Suppan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Suppan을 데려오느니 차라리 Lance Lynn에게 기회를 줘 보도록 하자.


다음 포스팅에서 스탯을 자세히 보면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이 팀은 업그레이드가 상당히 어려운 팀이다. 이 팀은 선수들이 부상만 당하지 않는다면, 지금 이대로도 이미 컨텐더에 가깝다. 게다가 리그 평균 아래이지만 replacement level보다는 위인 선수들이 여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여기에서 확실하게 효과를 볼 만큼 업그레이드를 하려면 대형 FA를 지르거나 팜을 거덜내는 트레이드를 하는 수밖에 없다. (1 WAR 플레이어를 1.5 WAR 플레이어로 대체해 봤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런데, 그러기에는 페이롤도 빡빡하고 팜도 황폐한 상태이다. 그렇다고 올해의 Jaime Garcia처럼 데뷔하자마자 임팩트를 줄 만한 좋은 신인이 AAA에 대기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모로 Mozeliak 단장의 역량을 시험하는 어려운 오프시즌이 될 것 같다.


2. 이런 저런 소식

- La Russa 감독, 다음 주 중 거취 결정

La Russa 감독이 내년 시즌의 거취 문제에 대해 집에서 쉬면서 생각을 해 보고 다음주 중에 발표하겠다고 하였다. 구단은 그가 돌아오겠다면 막을 생각이 없어 보이고, Pujols, Ryan, 심지어 Rasmus까지도 La Russa 감독이 돌아오면 좋겠다는 발언을 하였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기회에 감독을 바꾸고 분위기를 좀 쇄신했으면 하는 생각이 있지만... 선수들의 지지를 많이 받고 있다면 뭐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누가 감독이 되든 간에 Aaron Miles를 1, 2번에 기용한다거나, 경기 중반에 더블스위치로 투수를 4번이나 5번 타순에 집어넣는 황당한 경기 운용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

- Jake Westbrook, 팀 잔류 희망

이제 곧 FA가 되는 Jake Westbrook이 여러 차례에 걸쳐 Cardinals에 남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Mo 단장 역시 그와의 재계약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어쩌면 조만간 계약이 발표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얼마 전 33세가 된 Westbrook은 2008년의 수술로부터 완전히 회복한 것으로 보이며, 특히 Cardinals로 이적한 이후 3.52 FIP, 3.62 xFIP의 뛰어난 피칭을 하였다. 메이저리그의 가장 극단적인 그라운드볼 투수 중 한 명으로, 구단의 투구 철학에도 잘 맞는 투수이다. 문제는 연봉인데... 연평균 7-8M 정도로 2년 계약을 할 수 있으면 잡아도 좋을 것 같지만... 이정도 연봉 x 기간으로는 계약이 안될 것 같다. 연평균 10M 이상을 요구한다면 아쉽지만 포기하는 것이 나을 듯 하다.


Today's Music : Ben Folds Five - One Angry Dwarf and 200 Solemn Faces (Live)



Ben Folds Five 시절의 라이브.  Ben Folds의 퍼포먼스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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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팀 성적

시즌성적 75승 70패, NL Central 2위(7게임차)/NL Wildcard 2위(7게임차)

오늘은 Padres 시리즈의 1차전이 있었는데, Westbrook이 8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 주면서 4대 0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내일은 Mat Latos와 Kyle Lohse의 선발 대결인데, 솔직히 경기결과보다는 올시즌 최고의 영건으로 떠오르고 있는 Latos의 투구가 더 기대된다. -_-;;;

Padres 타선에는 반가운 이름들이 들어 있었는데, Ryan Ludwick과 David Eckstein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Ludwick은 트레이드 후 처음으로 Busch Stadium에 와서, 홈팬들로부터 따뜻한 환영 인사를 받았다.

그나저나... Padres 타선을 보니 이런 타선을 가지고 잘도 서부지구 1위를 달리고 있구나 싶을만큼 허접스러웠다. Adrian Gonzalez를 제외하고는 평균 정도 되는 타자도 별로 없을 정도였고, Ludwick도 트레이드 이후에는 완전히 삽을 푸고 있었다. 그래도 Padres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투수력과 수비력의 힘이다. Padres는 팀 FIP와 팀 UZR에서 모두 NL 1위이다. 그럼 Cardinals는? FIP 8위, UZR 10위이다. 이런 게 바로 컨텐더와 컨텐더가 아닌 팀의 차이이다.


2. 마이너리그 플레이오프 소식

이제 거의 플레이오프 탈락이 유력한 메이저리그 팀과는 달리, 산하의 마이너리그 팀들은 거의 대부분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다. 마이너리그 정규시즌은 보통 9월초에 끝나므로, 지금은 플레이오프가 진행중이거나 이미 우승팀까지 나온 상태이다. 간략히 정리해 보면..

(참고 : 대부분의 마이너리그 플레이오프는 4개 팀이 진출하여 준결승 - 결승을 벌이는 2 라운드의 구조로 되어 있다.)

- Memphis Redbirds(AAA) : 플레이오프 1라운드 3전 전승으로 PCL 챔피언 시리즈에 진출. PCL 챔피언 시리즈의 상대팀은 Mariners 산하의 Tacoma Rainiers인데, 5전 3선승제의 시리즈에서 1, 2차전을 내리 패하여 0-2로 코너에 몰린 상황이다. 3차전 선발은 올 시즌 팀의 에이스였던 PJ Walters이며, 우리나라 시간으로 내일 오전에 진행된다. 참고로 Memphis는 전년도 PCL 챔피언으로, AAA 통합 챔피언전에서 아깝게 패한 바 있었다.

1라운드 상대는 Rangers 산하의 Oklahoma City 였는데, 3차전 선발로 나선 Lance Lynn은 7이닝 동안 16삼진 0볼넷 3안타 1실점의 믿기지 않는 환상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1회에 연속 3안타를 맞고 1점을 내준 후, 그는 무려 20명의 타자를 연속으로 아웃 처리하며 아무도 출루시키지 않았다. Lynn은 전반기에 심각한 삽질을 하여 나도 유망주 중간점검 포스팅에서 혹평을 했었으나, 올스타전 이후 65.1이닝에서 67 K, 20 BB, 3.51 ERA의 준수한 성적을 거두더니 결국 포스트시즌에서 최고의 피칭을 보여 주었다. 연말에 Jake Westbrook이 FA가 되면 5선발 자리가 비게 되는데, 괜히 FA시장에서 허접한 베테랑 투수에게 돈을 퍼주기보다는 내년 Spring Training에서 Lance Lynn에게 기회를 주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깉다. 그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 Springfield Cardinals(AA) : 5전 3승제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Northwest Arkansas Naturals (Royals 산하)를 맞아 5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결국 패하여 탈락하고 말았다. Adam Reifer의 AAA 승격으로 인해 불안해진 불펜이 아쉬웠던 시리즈였다.

- Palm Beach Cardinals(A Adv.) : 시즌 막판까지 플레이오프 컨텐더였으나 결국 1위에 2게임차 뒤진 4위로 시즌을 끝내면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다. DSL, VSL 이런 리그를 제외하면, 팜에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한 유일한 팀이다.

- Quad Cities River Bandits(A) : 3전 2승제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Athletics 산하의 Kane County Cougars에게 1승 2패로 져서 탈락했다. 시리즈 1차전에서 Shelby Miller가 선발 등판하여 7이닝 13삼진 2안타의 눈부신 활약을 하며 첫 승을 올렸으나, 이후 2연패하고 말았다.

- Batavia Muckdogs(Short Season A) : 3전 2승제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Astros 산하의 Tri-City Valleycats에게 1승 2패로 져서 탈락하였다. 마지막 3차전은 Andrew Moss가 선발 등판하여 9이닝 5삼진 4안타 1실점으로 호투하였으나 타선이 상대 투수들에게 완봉 당하여 1-0으로 아깝게 지고 말았다.

- Johnson City Cardinals(R) : 3전 2승제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 및 2라운드에서 모두 2연승하여, 전승으로 Appy League 우승을 차지하였다...!!

산하 마이너리그 팀 중 무려 5개의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것은 구단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마이너리그 팀이 플레이오프에 나가고, 우승을 하는 것은 본인들 이외에는 그다지 대단한 일이 아닐 지도 모른다. 마이너리그 팀들이 좋은 성적을 낸다고 팜 시스템이 반드시 훌륭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Cardinals 산하 마이너리그 팀들이 대부분 리그 평균에 비해 어린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고, Jocketty가 떠난 뒤 마이너리그 베테랑들을 거의 계약하지 않고 드래프트 유망주들로만 팜을 꾸려나가고 있음을 감안하면, 이렇게 산하 마이너 팀들이 모두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은 팜 시스템이 어느 정도 잘 굴러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본다. 올해 Freese, Garcia, Jay와 같은 신인들을 메이저리그에 올려보내기도 했고... Cardinals 팜은 외부에서 평가하는 만큼 심각하게 허접한 수준은 아닌 것 같다.


3. 기타 이런저런 소식

- Jaime Garcia, 시즌 오버?

Cardinals가 빠른 속도로 플레이오프 진출 경쟁에서 밀려나면서, Garcia가 시즌을 이대로 접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일단 다음 선발 등판은 Jeff Suppan이 대신 나설 예정이며, 그 뒤 확실하게 결정할 것이라고 한다. Tommy John 수술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 되었으므로, 어차피 시즌이 별 볼일 없게 되었다면 이쯤에서 그만 던지게 해서 어깨와 팔을 보호하는 것도 괜찮은 아이디어이다.

- John Vuch, 팜 디렉터로 승진

그동안 Jeff Luhnow 밑에서 팜 시스템 운영의 2인자로 일해왔던 John Vuch가 팜 디렉터를 맡게 되었다. 이에 따라 스카우팅과 팜 운영 양쪽의 최고 책임자였던 Jeff Luhnow는 스카우팅 분야에 주력하게 되었다.

Vuch는 구단내의 여러 이해 관계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심지어 La Russa 감독조차도 이례적으로 "그는 그럴 만한 자격이 추분하다" 며 이 인사조치를 반기는 발언을 했다.

- Mozeliak 단장, Rasmus 트레이드 불가 선언

John Mozeliak 단장이 Social Media Night 프로모션의 일환으로 100여명의 팬들 앞에서 구단 운영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대략 이런 내용이다. 1) 페이롤은 향후 3년간 계속 상승하여 95~105M 수준이 될 것이다. 2) Rasmus가 트레이드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정도의 재능을 가진 CF를 구할 방법이 없다. 우리 팀의 내년 시즌의 1B, LF, CF, C 포지션은 이미 확정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3) La Russa 감독의 거취 문제는 아직 결정된 바가 없으나, 시즌이 끝나면 저녁 식사를 같이 하면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결정은 신속하게 내릴 것이다.

Mozeliak은 언젠가 STLTODAY 사이트에서 팬들과 채팅하면서 키보드 워리어들과 막말을 주고받았던 일(이 채팅은 정말 재미있었다!!)에서도 드러나듯이, 정치적인 언행에 서투르고 거짓말을 잘 못하는 사람인 것 같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모든 결정은 정말로 신속하게 내려질 것이다. Rasmus의 팀 잔류를 확언한 이상, 이제 관심은 La Russa 감독에게 모아지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기회에 감독을 교체했으면 좋겠는데... Mo 단장의 스타일 상, 조만간 알게 될 것이다.


Today's Music : Mott the Hoople - All the Way from Memphis (Live)



AAA PCL 챔피언 시리즈에서 탈락 위기에 놓인 Memphis를 응원하기 위해 이 곡을 골라 보았다. Go Memphis!!
Posted by FreeRedbird
:
사실은 여기에 박스 스코어를 일일이 링크해 두었는데, 글을 포스팅하기 직전에 그냥 지웠다. 별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시즌성적 74승 69패, NL Central 2위(7게임차)/NL Wildcard 2위(7.5게임차)

이제 Cardinals의 플레이오프 진출 확률은 2.3%이다. 지난 10경기 동안 Reds가 3승 7패로 부진했음에도 불구하고, Cardinals는 4승 6패로 동반 부진을 하는 의리를 보여 주었다. 결국 마지막 기회조차 날린 셈이 되었고, 이제는 정말로 가망이 없어 보인다.

경기를 정말 잘하는데 운이 참 안 따라준다... 라고 느껴야 뭔가 희망이 있는 것인데, 지금 이 팀은 솔직히 말해 정말 실력이 없다. 이런 팀이 플레이오프에 나갈 수 있다면 리그의 수준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오늘 Cubs에게 또 무기력하게 7-2로 졌는데... 오늘의 선발 라인업을 살펴보자. 이름 옆의 숫자는 올 시즌 누적 성적이다.

1. Skip Schumaker  .686 OPS, .306 wOBA
2. Felipe Lopez .659 OPS, .299 wOBA
3. Colby Rasmus  .856 OPS, .362 wOBA
4. Matt Holliday  .915 OPS, .393 wOBA
5. Jon Jay  .817 OPS, .354 wOBA
6. Yadier Molina   .658 OPS, .293 wOBA
7. Pedro Feliz  .487 OPS, .218 wOBA  (Cardinals 소속으로 뛴 기록만 계산)
8. Adam Wainwright(선발투수)  .465 OPS, .217 wOBA
9. Brendan Ryan  .587 OPS, .262 wOBA

오늘 Pujols가 왼쪽 팔꿈치 통증으로 결장했고, 그 결과 이런 라인업이 구성되었다. 대충봐도 경쟁력이 없는 타선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데, Rasmus와 Holliday, Jay를 빼고는 OPS가 .700도 안되는 데다, Feliz는 Wainwright를 wOBA에서 0.001차로 아주 간신히 앞서고 있을만큼 참담한 성적을 보이고 있다. 이미 Astros 소속일 때에도 .554 OPS, .241 wOBA로 메이저리그 최악의 레귤러 였는데, Cardinals에 와서는 이전 기록을 더욱 능가하여 허접타격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도대체 이런 넘을 트레이드까지 해서 데리고 오는 Mo 단장은 뭐고, 이런 넘을 심심하면 5번에 기용하는 La Russa 감독은 뭐냐??

Pujols가 라인업에 복귀하면 좋은 타자가 네 명이니 그정도면 괜찮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Jon Jay의 시즌 기록은 순전히 메이저리그 콜업 초기의 뽀록 크레이지 모드에 힘입어서 괜찮아 보이는 것으로, 최근 30일간의 기록은 26 게임 104 PA에서 .575 OPS, .266 wOBA로 대략 Brendan Ryan과 유사한 수준이다. 이건 좀 지나친 삽질이긴 하지만... 그래도 내 이럴 줄 알았다. Jay는 마이너리그 내내 한 번도 그렇게 잘 친 적이 없었고, 기껏해야 외야 백업 정도의 포텐셜로 생각되던 플레이어였단 말이다. Jon Jay에 대해 그렇게 칭찬을 늘어놓던 La Russa 감독은 어디 변명 좀 해 보시지? 응? 그렇게 타격을 잘 해서 OPS가 .600도 안 나오냐?

요약하자면, 요즘의 Cardinals는 그날그날의 게임에 엘리트 타자 2명(Pujols, Holliday)과 꽤 좋은 타자 1명(Rasmus), 그리고 replacement level 수준의 쓰레기 타자 2명(Skip/Lopez, Molina), replacement level보다도 더 아래인 수퍼 울트라 쓰레기 2명(Jay, Ryan), 투수 2명(선발투수, Feliz) 으로 선발 라인업을 짜서 내보내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Molina와 Ryan은 뛰어난 수비력으로 허접한 타격을 어느 정도 makeup 해 주고 있긴 하다.)

거기다가, 벤치에 있는 선수들이 훌륭하냐 하면 물론 그럴 리가 없다.

Randy Winn  .739 OPS, .331 wOBA
Aaron Miles  .661 OPS, .288 wOBA
Nick Stavinoha  .607 OPS, .272 wOBA

이들은 벤치를 남용하는 La Russa 감독의 스타일로 인해 거의 준 주전 수준으로 기용되고 있는데... Winn은 그나마 리그 평균 수준의 준수한 생산력을 보여주고 있다. Aaron Miles는 .330의 높은 BABIP와 그에 힘입은 3할 타율에도 불구하고 출루능력과 장타능력이 전무하여 결국 replacement level 아래의 공격력을 보여주고 있으니, 이넘은 그야말로 답이 전혀 없다. 이래가지고는 AAA에서도 잘 칠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길 정도인데, Mo 단장은 Miles를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계속 붙여 두고, La Russa 감독은 그를 1번이나 2번으로 주로 기용한다...!!! Stavinoha는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주니 더 할 이야기도 없다. 우리의 명장 La Russa 감독은 상대 선발이 좌완이면 Stavinoha를 5번에 기용하곤 한다. 아아... (혹시라도 Stavinoha가 플래툰으로는 쓸만하지 않느냐고 궁금해 하시는 분들을 위해 사족을 달아 보면... Stavinoha의 올 시즌 OPS는 좌완 상대로 .605, 우완 상대로 .609 이다.)

이렇게 보면, 이런 타선을 내보내면서 어쩌다가 한 번씩 이기고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Pirates나 Nationals를 상대로 삽질을 한 것도 이제는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이런 플레이어들을 가지고는 어차피 플레이오프에 나갈 가망도 없는 데다가, 선구안과 장타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그저 스트라이크 비슷한 공이 오면 무조건 휘두르기만 하는 쓰레기 타자들을 유난히 중용하는 La Russa 감독이 그나마 낮은 확률을 더욱 낮추어 왔다고 본다. 차라리 jdzinn님의 댓글처럼 남은 경기를 전패하고 내년 드래프트 상위 픽을 받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내년 드래프트가 그렇게 알짜 유망주가 많다고 하던데...

생각해보면 물론 운이 없었던 측면도 있다. Skip Schumaker는 메이저리그에 올라온 이래 계속해서 리그 평균 수준의 쓸만한 타격을 보여 왔으므로, 올해 이렇게 갑자기 확 망가질 줄은 몰랐을 것이다. 매년 타격 능력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던 Molina가 올해 퇴보한 것도 예상 밖이거니와, Rasmus와 더불어 "꽤 괜찮은 타자"라고 할 수 있었던, 한때 신인왕 후보로까지 거론되던 David Freese가 어이없는 부상으로 시즌아웃 된 것도 불운이었다. 로테이션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면서 선발진을 보강하기 위해 Ludwick을 트레이드하게 된 것도 뭐 어찌보면 불운이었다. (반은 불운이고 반은 아니다. Penny야 원래 로또성 계약이었지만 Lohse는 Mo 단장의 완벽한 실패작이니까...)

하지만, 이러한 불운에 대처하기 위해 구단프런트와 La Russa 감독은 Miles나 Feliz, Stavinoha 같은 초 허접 플레이어들을 가지고 땜빵을 시도했고,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사태의 시작은 불운이었지만, 이러한 결과에 이르게 된 것은 잘못된 선수 수급 및 기용이 낳은 인재라고밖에 할 수가 없다.


Today's Music : Beck - Loser (Live 2003)



Mo 단장과 La Russa 감독은 이런 곡을 오늘의 음악이랍시고 선곡하는 팬의 마음을 좀 헤아리길 바란다! 제길..
Posted by FreeRedbird
:

Reds 시리즈 때 만루홈런을 날리고 기뻐하는 Rasmus(왼쪽).

오늘 Cardinals는 또 졌다. Pirates와 Nationals에 시리즈를 내준 데 이어 Astros에게도 패한 것이다. 박스 스코어 같은 것은 시리즈가 끝나면 링크를 걸도록 하겠다. 어차피 이제 마음을 많이 비우기도 했다.

그건 그렇고...

매일매일 저질적인 경기를 하는 것으로는 모자라서, 이제 감독과 선수 간의 또 다른 off-field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Cardinals 공식 페이지(링크)에 의하면...

Originally listed as St. Louis' center fielder, Rasmus was a last-minute scratch in Sunday's 4-2 loss to the Nationals. The decision was not announced in the press box until the Nationals were taking the field to begin the afternoon game. The official reason for the change was listed as "manager's decision," and both Rasmus and manager Tony La Russa said that Rasmus did not have a setback in his recuperation from a right calf injury.

(중략)

As for upcoming games, La Russa said Sunday that Rasmus' approach at the plate will determine how frequently the second-year player is in the lineup over the season's final five weeks.

A Cardinals team in need of a boost could certainly use Rasmus' combination of power and on-base ability in the lineup every day or close to it. However, La Russa still feels that there is too much inconsistency in Rasmus' at-bats. The more the second-year center fielder erases that tendency, the more he'll play.

"He's had all the work," La Russa said. "He's never backed off the work, taking batting practice. I think it all has to do with what his concentration is, and what his focus is. I do believe that -- you just watch his swings in batting practice and in the game -- I think he is convinced that he helps us more if he just yanks the ball out of the park. That normally is not the case, because you're limiting yourself to a side of the park and you're vulnerable to too many pitches. We really push, 'Just play the game.' That's what Jon [Jay] does. He plays the game. take a single, take a walk, let the home runs come."


요약해 보자.


1. Rasmus의 몸 상태는 Nationals와의 마지막 게임에 선발 출장해도 지장이 없는 수준이었고, 원래 선발 출장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게임 시작 직전 라인업에서 빠졌다.

2. La Russa 감독에 의하면, 남은 5주 동안 Rasmus의 출장 시간은 그의 타석에서의 어프로치에 달려 있다고 한다. La Russa 감독은 Rasmus에게 consistency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3. La Russa 감독이 보기에, Rasmus는 타석에서 오직 홈런을 날릴 생각만 하고 있으며, 그 결과 너무 많은 투구에 속고 있다.

4. Rasmus에 비해서, Jon Jay의 어프로치가 좋다. Jay는 단타도 치고 볼넷도 고른다. 그렇게 하면 홈런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이제 하나 하나 따져 보자.

1. Rasmus의 몸 상태는 Nationals와의 마지막 게임에 선발 출장해도 지장이 없는 수준이었고, 원래 선발 출장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게임 시작 직전 라인업에서 빠졌다.

- 제정신인가? 팀의 플레이오프 진출이 간당간당한 상황에서, Rasmus가 뛸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출장을 안 시키다니...???? 이날 라인업은 우익수 자리에 Skip Schumaker, 2루에 Aaron Miles가 각각 선발 출장하였다. Rasmus가 얘네 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설마 Miles의 .330 타율이 Rasmus보다 우월한 타자임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로 덕아웃에 앉아있을 자격이 없다.

2. La Russa 감독에 의하면, 남은 5주 동안 Rasmus의 출장 시간은 그의 타석에서의 어프로치에 달려 있다고 한다. La Russa 감독은 Rasmus에게 consistency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 제정신인가? Rasmus는 지금 팀의 타자들 중 Holliday, Pujols에 이어 세 번째로 중요한 플레이어이다. Schumaker, Feliz, Miles 등을 매일 출전시키면서 Rasmus는 어프로치가 안좋으면 출전을 안 시키겠다니, 사실상 감독이 플레이오프 진출을 스스로 포기하는 셈이다.

3. La Russa 감독이 보기에, Rasmus는 타석에서 오직 홈런을 날릴 생각만 하고 있으며, 그 결과 너무 많은 투구에 속고 있다.

- 이건 일부분 사실일 수도 있다. Rasmus는 당겨치는 것을 좋아하므로, 보기에 따라서는 장타에 너무 집착한다고 느낄 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Rasmus가 삼진을 많이 당하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결과가 따라 준다면 남이야 당겨치든 밀어치든 무슨 상관인가?? Rasmus는 .268/.352/.501, .364 wOBA, 130 wRC+로 확고부동한 팀내 세 번째의 중심타자이다. 이날 Rasmus 대신 우익수로 기용된 Schumaker는 .680 OPS, .306 wOBA, 92 wRC+로 평균 이하의 타자이다. 수비력 차이는 말할 것도 없고... Schumaker가 우익수로 가면서 2루에 선발 출장한 Miles 역시 97 wRC+로 메이저리그 평균 아래의 타자이다. 출루율과 장타율이 받쳐주지 못하는 .330의 타율은 공허할 뿐이다. 얘네들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Rasmus에게는 수치이다.

4. Rasmus에 비해서, Jon Jay의 어프로치가 좋다. Jay는 단타도 치고 볼넷도 고른다. 그렇게 하면 홈런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 Jay는 메이저리그 콜업 직후 1.000 OPS가 넘는 맹타를 휘둘렀으나 최근 급격히 페이스가 떨어지고 있다. Jay의 마이너리그 통산 OPS가 .798임을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다. 어쨌거나... 여기서 왜 굳이 Jay와 비교했는지 의문이다. Rasmus를 CF에, Jay를 RF에 둘 다 기용하면 되지 않는가...?? Miles와 Schumaker 둘 중 하나를 벤치에 앉히면 되는데도 왜 이런 어이없는 선택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La Russa 감독은 스탯을 들여다보지도 않는 모양이다. Jay가 "단타도 치고 볼넷도 고른다"는데, 실상을 보면 Jay의 볼넷 비율은 7.0%인 반면 Rasmus의 볼넷 비율은 11.4%로 Rasmus가 훨씬 높은 것이다.


돌이켜보면, La Russa 감독과 사이가 틀어지고 팀을 떠난 플레이어들이 참 많았다. 부임 초기 Ozzie Smith와의 갈등을 비롯하여, Ray Lankford, Steve Kline, J.D. Drew, Scott Rolen 등이 모두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다 팀을 떠났다. Kline 같은 경우는 본인이 한심해서 문제를 일으킨 것이지만, 특히 Rolen의 경우 일방적으로 선수를 비난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것은 고집센 두 명의 충돌이라고 보는 쪽이 더 정확할 것이다.

La Russa 감독은 철저한 프로페셔널이며, 그동안 이뤄온 업적은 인정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1년 내내 열과 성을 다해 그라운드에서 온몸을 던지며 구르는 것만을 요구하는 그의 스타일은 많은 주변 사람들을 지치게 하는 것 같다. (아마도 ESPN의 Jayson Stark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Cardinals를 가리켜서 Professional Stoic Group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Miles나 Schumaker와 같은 별 재능이 없는 플레이어들이 단지 번트를 잘 대고 밀어치기를 좀 할 줄 안다는 따위의 이유로 Rasmus보다 나은 타자로 대접을 받는다면, 이것은 문제가 아주 심각한 것이다.

La Russa 감독에게, 그간의 모든 업적에 대해 존경과 감사를 표하는 동시에, 이제는 제발 그만 집에 가시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싶다. 굳이 선택하라면, 이제 Tony La Russa의 야구보다는 Colby Rasmus의 야구를 보고 싶다. 그동안 La Russa 감독을 많이 변호해 왔지만, 이젠 나도 질렸다.


Today's Music : The Offspring - Defy You (Official MV)



이 곡의 오리지널 뮤비는 유튜브에서 링크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 링크가 가능한 것이 이런 포르투갈어 자막이 들어간 버전밖에 없었다. -_-;;;
어쨌거나... 이렇게 음악과 영상이 환상적으로 잘 어울리는 뮤직비디오를 찾기는 쉽지 않다. 즐감하시길...
"the more you say, the more I defy you...!!!"
Posted by FreeRed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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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 McGwire

오옷..!!! 오프시즌 첫 뉴스치고는 엄청나게 흥미로운 뉴스가 등장했다....!!!

ESPN 및 MLB 공식 사이트에 의하면, Mark McGwire가 Cardinals의 타격 코치로 복귀할 예정이라고 한다...!!!
http://stlouis.cardinals.mlb.com/news/article.jsp?ymd=20091025&content_id=7544500&vkey=news_stl&fext=.jsp&c_id=stl

아직 구단으로부터 공식 발표는 없으나, MLB.com에 보도된 만큼, 거의 사실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많은 이들이 올 시즌 Cardinals의 성급한 타격 스타일에 대해 불만을 표시해 왔고, 아마도 구단 프런트도 예외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결국 이렇게 해서 Hal McRae는 짤리게 된 것 같다.

McGwire는 이전에도 Cardinals의 Spring Training Instructor로 일한 적이 있고, 겨울에 Skip Schumaker와 Matt Holliday를 비롯한 몇몇 선수들의 개인 훈련을 지도한 바 있다. Schumaker의 경우는 그의 지도가 좋은 결과를 낳았지만, Holliday의 경우는 올 시즌 상반기의 부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다지 결과가 좋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다 적용할 수 있는 만능의 방법 같은 것은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McGwire의 코치 기용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고 있다. 어쨌거나 McGwire가 97년에서 2001년까지 Cardinals에서 뛰었던 수퍼스타였던 것이 사실이고... 내가 이 무렵부터 Cardinals의 팬이 되었다보니 그에 대해서는 호감을 많이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스테로이드 사용에 대한 불분명한 태도, 특히 증언대에서 눈물을 흘리며 애매모호한 대답으로 어물쩡 넘어가 버린 것은 역시 불쾌한 부분이다. 그가 정말로 타격 코치가 되어 야구장에 복귀한다면...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McGwire 본인의 공식적인 확인과 사과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고무적인 것은... McGwire는 선구안이 매우 좋은 타자였다는 것이다. 그의 커리어 통산 ISO OBP는 무려 .131에 달한다. (참고로 Hal McRae의 선수시절 통산 ISO OBP는 .061이다.) 물론 90년대 후반 들어서 그가 약물의 힘으로 초인적인 홈런 타자가 되면서 투수들이 고의사구를 많이 던진 탓도 있지만... Oakland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1990년 시즌에 그는 이미 110개의 볼넷을 얻고 있었다. 이 중 단지 9개만 고의사구였으므로, 그의 선구안은 정말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올 시즌 Cardinals 타선의 가장 큰 문제는 타석에서의 선구안과 참을성이었으므로, McGwire의 영입으로 이러한 문제가 개선될 수 있다면 보다 강력한 타선이 될 것이다.


한편으로... Tony La Russa 감독 역시 Cardinals 잔류가 거의 확정되었다고 한다. 위의 McGwire 기사를 보면 La Russa 감독과의 연장계약이 곧 공식 발표될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La Russa 감독의 거취에 따라 결정하겠다"라고 했던 Dave Duncan 투수코치 역시 팀에 남을 것으로 예상된다. (친구가 남으면 나도 남겠다라니 이건 뭐 애들도 아니고... -_-;;; ) La Russa - Duncan - McGwire의 코치진이라... 꽤 재미있는 시즌이 될 것 같다.


Today's Music : Anthrax - Indians (Original MV)
http://www.youtube.com/watch?v=Hm4ohAcGJWg

그냥.. 오늘은 이런 걸 듣고 싶은 기분이 되어서리...
지난번에 동영상을 직접 걸어 봤더니 역시 RSS Feed가 안된 모양이다. -_-;;; 다시 그냥 링크만 거는 것으로 돌아갔다. 혹시 이런 문제의 해결책을 아시는 분?? 동영상을 직접 붙이면 RSS Feed가 안되는데...
Posted by FreeRed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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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ony La Russa 감독, Cardinals 플레이오프 로스터 구성 계획을 밝히다.

금일 Rockies와의 게임 중계방송에서, La Russa 감독의 플레이오프 로스터 구상이 일부 보도되었다.
링크(The Cardinal Nation, 유료정보)

당초 Mozeliak 단장은 투수 11명, 타자 14명의 로스터로 플레이오프에 임할 것이라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으나, 이날 보도에 따르면 La Russa 감독은 투수 12명, 타자 13명을 데려갈 계획이라고 한다. (나는 이전의 포스팅에서 이미 이런 결과를 예상한 바 있었다. ㅎㅎㅎ)이거 Mozeliak 단장과 상호 협의가 된 내용일까? 아니면 감독의 일방적인 발표일까...? 올 시즌 Mo 단장을 비롯한 구단 프런트와 La Russa, Dave Duncan의 필드 스탭들은 끊임없이 불협화음을 내고 있는 것 같다. 정말 시즌 끝나면 둘 다 떠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또한, 플레이오프 1라운드의 디비전 시리즈에는 Carpenter, Wainwright, Pineiro의 3인 로테이션을 운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불펜투수가 무려 9명이 되는 셈이다. 정말 극단적인 로스터 구성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디비전 시리즈에서는 평소보다도 훨씬 심한 불펜 벌떼작전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NL 디비전 시리즈 일정은 아래와 같다.
1차전 : 10/7 (미국시간)
2차전 : 10/8
3차전 : 10/10
4차전 : 10/11
5차전 : 10/13

이런 일정에서 3인 로테이션으로 가면, 1차전 선발이 3일만 쉬고 4차전에 나온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식의 선발진 운용을 좀처럼 하지 않던 La Russa 감독이어서 더욱 의외로 느껴지는데, Kyle Lohse를 플레이오프 선발로서 신용하지 않는다는 것과, John Smoltz를 셋업맨으로 돌리고 싶다는 것의 두 가지 의도를 읽을 수 있다. 1차전 선발은 아마 Carpenter가 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렇게 다소 무리해 가며 1, 4차전에 등판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선택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러다가 정말 내년 시즌엔 60-Day DL에 드러누워 버리게 되지 않을까...


참고로... 플레이오프 로스터를 구성하는 규정은 아래와 같다.

일단 플레이오프의 25인 로스터에 들어갈 수 있는 로스터 풀은, 8월 31일자 25인 로스터 + DL로 한정된다. 이에 따르면, Cardinals의 로스터 풀은 총 28명으로 아래와 같다.
투수(12) : Carpenter, Wainwright, Pineiro, Smoltz, Boggs, Franklin, Miller, Reyes, McClellan, Motte, Hawksworth, Thompson
타자(13) : Pujols, Schumaker, Ryan, DeRosa, Molina, Holliday, Rasmus, Ludwick, Ankiel, LaRue, Lugo, Thurston, K Greene
DL(3) : Glaus, Lohse, Wellemeyer

그런데... 이중에서 부상으로 인해 플레이오프에서 전혀 뛸 수 없는 선수에 한해서 다른 선수로 대체가 가능하다. 현재 Glaus가 부상으로 시즌 아웃된 것으로 생각되므로, 위의 28명 로스터 풀에서 Glaus를 빼고 다른 한 명을 넣을 수가 있다. 내 예상으로는 T Greene이 Glaus 대신 들어갈 것 같다.

이렇게 구성된 28명의 로스터 풀 중에서, 플레이오프의 각 라운드 별로 1차전이 시작되기 전에 25명을 추려서 가는 것이다.

오늘 얻은 새로운 정보를 바탕으로 플레이오프 1라운드 로스터를 다시 한 번 예상해 보면...

선발(3) : Carpenter, Wainwright, Pineiro
불펜(9) : Franklin, Smoltz, Miller, Reyes, McClellan, Motte, Hawksworth, Lohse, Thompson
타자(13) : Pujols, Schumaker, Ryan, DeRosa, Molina, Holliday, Rasmus, Ludwick, Ankiel, LaRue, Lugo, Thurston, K Greene


Thompson보다는 Boggs가 훨씬 나을 것 같은데... Thompson이 특별한 이유 없이 감독의 사랑을 받고 있는 관계로 별로 가망이 없어 보인다. -_-;;; K Greene과 T Greene 사이의 선택은... La Russa 감독의 베테랑 선호로 인해 역시 K Greene쪽을 데려갈 것 같다.


2. Mark Hamilton, Jon Jay 중남미 윈터리그 참가

AAA 유망주들인 Mark Hamilton(1B)과 Jon Jay(OF)의 윈터리그 참가가 발표되었다. Hamilton은 도미니카에서, Jay는 베네수엘라에서 각각 뛰게 되었다고 한다.

한때 잊혀진 존재였던 Hamilton은 올해 AA와 AAA에서 .927의 OPS를 기록하여 다시금 유망주로서의 지위를 되찾았다. 구단은 도미니카에서 그를 좌익수로 기용할 예정이라고 하니, 어느 정도 외야수비에 적응한다면 내년 Spring Training 때 메이저리그 벤치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어 보인다.

Jay는 올 시즌 OPS .732의 아쉬운 시즌을 보냈으므로, 윈터리그에서 좀 더 좋은 활약을 하여 구단 프런트에 깊은 인상을 남겨야 하는 입장이다. Rick Ankiel이 시즌 후 FA로 팀을 떠난다면, 벤치의 좌타 외야수 자리를 놓고 바로 위의 Hamilton과 경쟁할 것으로 보인다. 왼손/오른손과 수비 포지션을 생각할 때 일단 상상할 수 있는 벤치 외야수 조합은 Mather/Hamilton과 Craig/Jay의 두 가지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FreeRed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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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 Duncan : 삼진당하고 헬멧을 던지는 이런 모습도 더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Julio Lugo


Cardinals와 Red Sox가 트레이드를 단행하였다.

Cardinals get :
Julio Lugo와 그의 연봉 전액(2010년까지 약 $13.5M)


Red Sox get:
Chris Duncan
현금 혹은 PTBNL(Player To Be Named Later)



나는 Red Sox의 팬이 아니지만, Theo Epstein 단장이 이끄는 Red Sox 구단 프런트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고 싶지 않다. 물론 Garciaparra 같은 프랜차이즈 스타를 팀에서 방출하여 팬들로부터 원성을 사기도 했지만, 지난 5년 동안 네 번의 플레이오프 진출과 두 차례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일궈낸 것도 사실이다. Theo Epstein은 리그 최상급의 강력한 메이저리그 팀을 구축했을 뿐 아니라, 팜 시스템도 아주 탄탄하게 일궈 놓았다. 주전들의 줄부상 같은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향후에도 5년 이상 계속해서 매우 유력한 컨텐더로 남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현재 30개 구단 중 구단 프런트가 가장 일을 잘 하고 있는 구단이라고 본다. 단지 돈이 많아서 Red Sox가 강팀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생각은 완전한 오해이다. Red Sox는 메이저리그 전체를 통틀어 전통적인 스카우팅과 세이버메트릭스를 가장 잘 조화시키고 있는 구단이며, 돈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줄 아는 구단이기도 하다.


뜬금없는 타 구단 칭찬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이러한 Theo Epstein의 몇 안되는 실패작 중 하나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 Julio Lugo이다. Red Sox가 Julio Lugo와 계약한 것은 2006년 12월의 일이었는데, 당시 FA였던 Lugo를 4년 $36M에 계약한 것이다. 계약 당시에 이미 오버페이 논란이 있었던 이 계약은 시간이 지나면서 재앙으로 드러났다. 계약 후 현재까지 Lugo의 공격 스탯은 .251/.319/.346에 불과하였고, 한때 뛰어났던 수비도 평균이하로 추락하여 몸값만 비싸고 별 장점이 없는 플레이어가 된 것이다. 올 시즌 유격수로서 그의 UZR/150은 무려 -43.2인데, 뛴 경기 수가 많지 않다보니 작은 샘플 사이즈로 인해 과장된 면이 있어 보인다. 2007년에 UZR/150이 4.3, 2008년에 -2.6이었으므로 비슷하게 나빠진다면 올해의 UZR/150은 대충 -5~-10 사이가 되지 않을까 싶다.

Red Sox는 Julio Lugo를 이미 DFA(Designated for Assignment, 선수를 방출하기 위한 예비 조치로 10일간의 유예 기간을 갖게 된다. 10일 안에 트레이드되지 않으면 방출하거나 마이너리그에 내려보내야 한다.) 처리한 상태였으므로 Lugo와의 결별은 시간 문제였다. 며칠 전 다른 모든 구단에 "Lugo의 모든 연봉을 떠안을테니 제발 3류 유망주(a fringe prospect)라도 주고 데려가라"는 메시지를 보냈을 만큼,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Lugo를 팀에서 내보내려고 하고 있었다.



한편, Chris Duncan은 잘 알려진 대로 Cardinals의 투수 코치 Dave Duncan의 둘째 아들이다. 2006년 시즌 중반 메이저리그에 올라와서 314타석에서 .293/.363/.589(OPS .952), 22홈런의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팀의 플레이오프 진출 및 월드시리즈 우승에 큰 공을 세웠다. 월드시리즈에서 그의 형편없는 외야 수비가 TV를 통해 전세계에 널리 알려지긴 했지만... 파워와 선구안은 수준급이었다. 한마디로 제 2의 Adam Dunn이 나타난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2007년 시즌 중반부터 그는 심각한 타격 슬럼프에 빠졌고, 이후 전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2008년에 그가 목디스크 및 허리디스크에 시달리고 있음이 밝혀졌고, 그는 목에 티타늄 디스크를 삽입하는 대수술을 받고 시즌 아웃되었다. 이 수술은 야구선수에게 행해진 것으로는 전례가 없는 것이었고, 다시는 야구를 할 수 없을 가능성도 있다고 이야기할 만큼 위험한 수술이었다.

다행히 수술 후 재활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Chris Duncan은 2009년 Spring Training에서 뛰어난 타격감을 과시했다. 그리고 4월 한 달 동안 .304/.417/.522 (OPS .939)의 맹타를 휘둘렀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되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5월부터 다시 바닥을 모르는 추락이 시작되었다.
5월 .227/.289/.386 (OPS .675)
6월 .224/.318/.289 (OPS .607)
7월 .037/.257/.037 (OPS .294)

그는 수비력이 좋지 않은 LF이므로(커리어 통산 UZR/150이 -8.5이다.), 나쁜 수비를 상쇄할 수 있을 정도의 타격이 되지 않으면, 그를 25인 로스터에 유지할 아무런 명분이 없다. NL에는 DH가 없으므로... 더더욱 그의 설 자리는 없었다.


이렇게 해서 두 팀은 서로 그다지 필요없는 두 선수를 맞바꾸게 되었다.

Red Sox 입장에서 보면... Jed Lowrie가 복귀하는 마당에 Lugo는 어차피 쓸모가 없었으므로, 트레이드로 누구라도 받을 수 있다면 밑질 것은 없었다. Chris Duncan은 2007년 중반 이후로 그의 거의 유일한 툴이었던 파워를 잃어버렸지만, 그리고 실질적으로 그의 유일한 포지션은 DH 뿐이지만, 그래도 밑질 것은 없는 것이다. 아마 아무도 Lugo의 트레이드를 제안하지 않았더라면 공 1박스, 배트 1박스와도 바꾸려고 했을 것이다. 혹시라도 Chris Duncan이 2006년의 홈런 파워를 되찾게 된다면, 그를 값싼 DH/1루 백업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어도 그만이고...

과거 2006년 말에 John Sickels가 Duncan을 Brian Daubach과 비교한 적이 있었다. Duncan이 예전의 타격 실력을 조금이라도 회복하여 Daubach만큼만 될 수 있어도 Red Sox는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Cardinals 입장에서 보면... 둘 다 올해 삽질을 거듭하고 있고, 특히 좌완투수에게는 똑같이 쥐약인 Duncan과 Ankiel을 동시에 데리고 있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Duncan은 대타요원으로도 제 몫을 못하고 있으므로.. (엊그제 9회에서 대타로 나와서 병살타로 팀의 마지막 기회를 말아먹은 기억이 생생하다...-_-) 어떻게든 팀을 업그레이드할 방법이 있다면 방출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Lugo는 그다지 기대할 것은 없는 플레이어이지만, 2루를 맡고 있는 Skip Schumaker가 좌완투수 상대로 OPS .562의 형편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므로, 2루 플래툰 및 내야 백업 요원으로 활용하면 Duncan을 데리고 있을 때보다는 좀 더 짜임새 있는 로스터가 될 것이다. 게다가 내년까지 모든 연봉을 Red Sox에서 전액 부담하므로, 삽질만 계속할 경우 그냥 방출해 버려도 그만이다. 즉 Cardinals 입장에서도 밑져야 본전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Lugo로 인해 Joe Thurston의 출장 기회가 줄어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만족스러울 것 같다. Thurston은 오늘도 9회말 1사에서 병살 처리해야 하는 공을 홈에 던지는 바람에 결국 4-3으로 역전패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넘은 야구 센스라는 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이 트레이드에 대한 세이버메트릭스적인 분석은 생략하겠다. 현 시점에서는 둘 다 마이너스 WAR를 기록하고 있기에, 별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둘 다 -0.3 WAR으로 삽질의 수준이 비슷하긴 하다...  -_-;;;


다만 우려되는 일은 Mozeliak 단장 및 구단 프런트와 La Russa 감독/Dave Duncan 투수코치와의 관계가 악화하는 것이다. 자기 아들이 트레이드 되는 것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없을 것이므로... Dave Duncan 코치가 삐질 것이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또한, 바로 엊그제 인터뷰에서 병살타 친 Chris Duncan을 열과 성을 다해 변호하던 Tony La Russa 감독도, 하루만에 Chris Duncan이 트레이드되어 머쓱해지게 되었다. 안그래도 작년부터 감독과 단장 사이에 잡음이 조금씩 들리고 있는데... 올 시즌이 끝나면 La Russa 감독 및 Duncan 코치와의 계약이 만료된다. 과연 이들과 재계약을 할지 주목된다.


둘 다 새로운 팀에서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Posted by FreeRed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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