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이 생각보다 너무 많은 아이디어를 주신 덕에 (?) 조연 모듬 리스트를 확정을 하지 못했다. 대신 불판도 갈을 겸 해서 조연 모듬에 넣으려던 다른 선수 하나를 준비했다. 사실 시리즈를 20편에서 종결할 생각이었으나, 필자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선수들을 많이 깨우쳐주신 덕에 몇 편은 더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어차피 추억팔이를 할 수 있는 시간도 이제 얼마 안남았다!


Ryan Franklin


Starter / Reliever

DOB: 1973년 3월 5일

Birth: Fort Smith, Arkansas

Time with Cardinals: 2007-2011

Draft and Minors

1992년 드래프트 23라운더인 Franklin은 "유망주" 와는 거리가 멀었다. 별볼일없는 구위를 다양한 레퍼토리와 그나마 쓸만한 커맨드로 메우는 (매우 낮은 Upside의 ) 허접한 투수였는데, 주니어 칼리지 (Seminole Junior College) 시절 2년간 20승 무패의 기록을 세운 점과 상당히 간결하고 안전한 투구폼을 지녔다는 점을 높이 평가받아 그래도 23라운드 전체 642번으로 지명을 받았다.[각주:1] 프로 입문 5년만에 AAA볼 Tacoma까지 진입하긴 했는데, 90-92마일대의 평범한 패스트볼 + 다양하지만 자신없는 브레이킹볼 + 전무한 플러스피치로 ML레벨에 들어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Franklin은 97~99시즌 3년간 AAA볼에서 꾸준히 선발수업을 받으며  350이닝을 넘게 던졌고 평균자책 4.55를 기록했다. 이 당시 PCL의 경기당 평균 득점이 5.7을 넘었으며, 리그 평균 타율이 3할에 육박하고 리그 평균 OPS가 8할이 훌쩍 넘었음을 생각하면 Franklin 이 꽤나 선방했다고 봐야 하겠으나, "잘해봐야 스윙맨" 프로젝션을 받을만큼 Stuff가 너무 실망스러웠다. 심지어 Franklin 본인도 훗날 "마이너 시절 내가 ML에서 승격될 수 있을 거라고 낙관하지 않았다" 고 회고했다.

"I never considered myself to have the best talent in the world, but I was always a fierce competitor and I worked really hard. If you told me in the minor leagues that I would have 10 years in the big leagues and be an All-Star, I would have said, 'Whatever,' because I never really had high expectations for myself. It's crazy what hard work and competing can do for you."

-Ryan Franklin, ESPN interview with Jerry Crasnick (03/28/2010)


Ryan Franklin's Minor League Track Record

YearTmLevWLERAGSIPHERHRBBSOWHIPBB9SO9SO/W
1993BellinghamA-532.921474.07224227551.3383.36.72.04
19943 TeamsA-A+-AAA1383.2527185.11756713321391.1171.66.84.34
1995Port CityAA6104.3220146.01537013431021.3422.76.32.37
1996Port CityAA6124.0127182.01868123371271.2251.86.33.43
19972 TeamsAAA-AA973.7322149.21426215381081.2032.36.52.84
1998TacomaAAA564.5116127.2148641832901.4102.36.32.81
1999TacomaAAA694.7119135.2142711733941.2902.26.22.85
2000TacomaAAA1153.9022164.01477128351421.1101.97.84.06
10 Seasons61603.921681170.211695101292778611.2352.16.63.11

AAA볼에서 4년째 정체중이던 Franklin은 2000 시즌 전환점을 마련했다. 소속팀 Tacoma에서 11승 ERA 3.90으로 커리어 최고 성적을 찍었고, 무엇보다 수년째 2점대에 머물던 BB/SO 비율이 갑자기 4.0을 넘기면서 ML 승격을 부르짖었다. Franklin은 커리어 내내 그럭저럭 괜찮은 제구력과 커맨드를 자랑했는데 (거의 유일한 장점이라고 본다), 이 시즌에 딜리버리에 디셉션을 가미하면서 갑자기 K/9이 무려 7.8까지 올라갔고 (물론 이 해를 마지막으로 Franklin은 다시 이 수준으로 탈삼진을 잡아내지 못했다), 이 활약을 크게 인정받아 시즌 막판에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Ryan Franklin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미국 대표팀 출신이다. 당시 미국 대표팀 로스터를 파헤쳐보면 대략 1) AAAA레벨 쩌리들, 2) BA Top 100에 수준의 고급 마이너 유망주들 (Sean Burroughs, Kurt Ainsworth, Adam Everett), 3) ML급 엘리트 탤런트 (Roy Oswalt, Ben Sheets) 들로 대략 구성되어 있었는데, 27세의 나이로 Mariners 산하 AAA 소속이던 Franklin은 당연히 1번 유형에 속하는 케이스였다. 이 대회는 Ben Sheets의 속칭 "하드캐리"[각주:2] 로 잘 알려져 있기에 Franklin을 기억하시는 분은 아마 없겠지만, 나름 3경기에서 8이닝 무실점으로 대표팀 밥값은 충분히 했다.

시애틀 시절의 Franklin

Mariners 시절 (2000-2005)

올림픽에서의 선전 덕분일까. 28세의 늦은 나이에 ML에 자리를 잡은 Franklin은 2001시즌 불펜에서 Mop-up 으로 아주 좋은 활약을 했고 (78.1이닝 ERA 3.56), 2002시즌에는 스윙맨 (선발 12경기, 구원 29경기) 으로 뛰었으며, 2003년 Mariners 선발진에 진입해 기회를 제대로 살렸다. 커리어 최다인 212이닝을 던지면서 평균자책 3.57로 실점을 억제했는데, 이는 타고투저 시대였던 당시 리그 ERA 탑 10에 드는 수치였다.[각주:3]  지역 언론에서는 이 해 "Jamie Moyer 를 제외하면 Mariners 로테이션에서 가장 믿을만한 투수"로 Franklin을 뽑았고, 특히 그가 득점지원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Run Support 4.66, 리그 하위권) Franklin이 15승은 넉넉히 했어야한다는 지원사격을 보냈다. 덕분에 Franklin은 Mariners로부터 2년간 4.3M의 꽤나 짭짤한 계약을 받았는데, 예상대로 이는 양측에게 좋은 일이 아니었다.

괜찮아보였던 2003시즌도 뚜껑을 열어보면 불안요소가 한두개가 아니었다. 일단 삼진을 잘 잡지 못하니 FIP와 ERA와의 괴리는 끔찍한 수준이었고[각주:4] (FIP 5.17, ERA 3.57),  공이 느린 플라이볼 피처이다보니 (FB 44%, GB/FB 0.77) 피홈런 리그 1위 (34개)의 영광도 차지했다. 체인지업이 구리다보니 좌타자들에게만 홈런을 23개나 두들겨맞았고 K/9은 고작 4.2에 그쳤으니, 이 정도면 차세대 흑마술사의 등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스카우팅 리포트를 보면 Franklin의 레퍼토리는 "패스트볼 + 슬라이더 + 커브 + 체인지업 + 스플리터 + 싱커 + 에다가 2003시즌에 커터를 도입했다" 고 써있는데, 구위가 부족하니 레퍼토리를 확장해서 그 갭을 메워야했던 Franklin의 부단한 노력이 안쓰럽다.  결국 2004년, Franklin은 우악스럽게 패스트볼을 존에 찔러넣다가 우타자들에게 호되게 당했고, 7~8월에는 무려 선발 11연패를 당하기도 했다. 거기에 Mariners 특유의 리그 최하위 득점지원이 계속되면서 (Run Support 3.1, 리그 최하위) 4승 16패라는 끔찍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다.

"He has so many weapons. We'll be in the bullpen saying, 'He's going to throw this now,' and then he throws something else for a strike. Last year it seemed like he was 0-1 or 0-2 against everybody. It's tough to hit down 0-2 no matter who you are." 

-Jason Motte, on Franklin's repertoire (03/28/2010)

7개의 구질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하나 Franklin은 결국 운이 많이 필요한 홈런 프론, Finesse-Flyball pitcher 였다. 이런 투수들은 Sustained Success를 이어가기가 힘들고, Franklin의 선발투수로써의 가치는 2003시즌에 정점을 치고 아주 급격히 거품이 빠졌다. Franklin이 Cardinals로 이적해온 것은 2007년인데, 그 때 Franklin의 나이는 이미 34세로, 대체 뭘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던 상황이었다. 두들겨 맞는 걸로는 자신있었으며 (투수구장 홈으로 쓰면서 4년간 피홈런 100+개), Mariners에서 뛴 6년간 K/9이 4.7에 불과했던 투수를 영입했던 것이었기에 영입 당시만해도 이 투수가 향후 Izzy의 뒤를 잇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후 Franklin은 Cardinals에서 무려 5시즌을 뛰었고, TLR 시대에서 가장 많은 경기에 등판한 선수로 남게 된다.  

TLR ERA (1995-2011) 최다 경기 등판 순위

  1. Jason Isringhausen (401)
  2. Ryan Franklin (285)
  3. Kyle McClellan (245)
  4. Matt Morris (237)
  5. Chris Carpenter (195)

"It’s good to know (about closing), because I want to be prepared. It’s not going to be any different than the job I’ve been doing, really — I have to get three outs, under pressure. It just changes when I start getting ready."

-Ryan Franklin, upon getting the closer gig (2007, STL Post Dispatch, Derrick Goold)


2007-2008년: (35세에) 클로저 전환

Cardinals 유니폼을 입고 나서 Franklin은 "피홈런을 줄여라" 는 특명 아래 TLR+Dunc 의 조련을 받으며 커터와 싱커를 가다듬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다지 좌/우 스플릿이 없었던 Franklin이 땅볼 유도용 구질을 제대로 장착하면서 TLR이 가장 좋아하는 노예가 되었고, 2007년에 무려 69게임에 등판해 80이닝을 소화한다. 특히 2007년 전반기 Franklin은 보는 사람들을 의아하게 할만큼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는데, 38경기에서 3승 무패 ERA 1.23, .204/.230/.280으로 상대 타자들을 완벽하게 봉쇄했다.

2007 전반기 Ryan Franklin : 38경기, 3-0, ERA 1.23, .204/.230/.280, 44IP 17K 4BB

2011 전반기 Edward Mujica : 41경기, 26 S, ERA 2.21, .188/.197/.315, 41IP 34K 2BB

불펜투수로써는 희귀한 5+-pitch 레퍼토리를 자랑하는 Franklin은 플러스 피치의 부재를 1) 무식하게 달려드는 승부욕, 2)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공격적 성향, 3) 타고난 연투능력으로 메웠고, 이런 메카니즘 덕분에 굉장히 빠른 속도로 릴리버로의 전환에 성공했다. 평균 패스트볼 구속은 91-92마일 수준이었지만, 필요할 때는 최고 94.5마일까지 구속을 늘릴 수 있었으며, 원할 때는 86마일짜리 패스트볼도 던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싱커/커터의 비중을 늘리면서 선발 시절 35% 근처였던 GB%가 구원 전환 후 45%대로 크게 올라간 것이 피홈런 문제를 완화시키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다시 보기 힘든 5+ pitch Closer


2008년 5월, Isringhausen이 DL에 올라가자 TLR은 별 망설임 없이 Franklin을 차기 클로저로 내세웠다. Franklin은 당시 시즌 첫 한 달간 무려 5차례의 연투를 했을만큼 팀에서 가장 꾸준한 노예였으며, 이미 불펜에서 Franklin의 위상은 Izzy 다음이었다. 물론 당시 Cardinals의 차기 클로저 재목으로 지목되던 Chris Perez에게 빨리 경험치를 몰아줘야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베테랑 투수들의 경험을 존중하는 TLR의 취향과 고집은 Franklin을 우선시했다.  Franklin은 담담하게 보직을 받아들였고, 그럭저럭 역할을 소화하는 듯 보였으나 7월 말에 3경기 연속 피홈런 + 블론을 자행하며 TLR을 머쓱하게 했다. (상대 타자들은 Bill Hall, Ryan Braun, Fernando Tatis) 

2009년: 마법같은 시즌

엄청난 운이 작용하긴 했지만, 그래도 Franklin의 2009시즌은 Cardinals 클로저 역사상 가장 효과적인 시즌 중 하나였다. 개막 이후 13경기 연속 무실점 (9세이브)을 기록하던 Franklin은 5월 10일 Reds전에서 Hairston과 Micah Owings에게 2피홈런을 허용하며 리드를 날렸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의 블론 이후 다시 정신을 차리고 전반기 내내 단 1실점만을 더 허용했다 (이후 20경기 19.1이닝 1실점, 팀 17승 3패). 그리고 후반기에도 이 페이스를 꾸준히 이어가며 2009년 8월에는 11경기 11이닝 무실점 11세이브로 Reliever of the Month 상을 수상했다. 

2000년대 단일시즌 Sub 2.00 ERA, 35+ Saves (2000-2009)

  1. John Smoltz (2003, ERA 1.12)

  2. Eric Gagne (2003)

  3. Armando Benitez (2004)

  4. Takashi Saito (2007)

  5. Robb Nen (2000)

  6. Billy Wagner (2005)

  7. Derrick Turnbow (2005)

  8. Billy Wagner (2003)

  9. Chad Cordero (2005)

  10. Ryan Franklin (2009, ERA 1.92)

8월 30일까지 Franklin의 성적은 35세이브 ERA 1.05에 리그 구원 1위. 이렇게 능력 이상의 페이스로 스탯을 쌓아가는 선수들이 시즌을 무난히 마무리하는 경우가 거의 없듯이, 월간 마무리 상을 수상하자마자 Franklin은 급격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특히 시즌 내내 그를 버티게 해준 패스트볼 제구가 엉망이 되면서 9.1이닝동안 상대타자들에게 .405/.521/486로 두들겨맞았고, 볼넷 10개를 내주며 3블론세이브를 기록했다. 자기 공은 멀쩡한데 등판간격이 들쭉날쭉해서 결과가 안좋았다고 말을 돌렸지만, 이도 없고 잇몸도 사실상 없는 Franklin 입장에서는 제구가 되지 않으면 임무를 절대 수행할 수 없었다. 우려는 현실이 되서 2009 NLDS 2차전에서 Franklin의 제구 난조는 결국 결정적인 블론세이브와 시리즈 패배로 이어졌다.

넌 나 아니었으면 진작 은퇴했어


총평: TLR이 살린 5-pitch Closer

불펜 분업화 패러다임을 갈고 닦은 TLR에게 클로저 역할의 중요성이야 두말하면 잔소리. 그런데 클로저를 뽑는데 있어서 TLR의 취향은 몹시 분명했다; 첫째는 제구였고, 둘째는 (클로저 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Make-up 이었다. 커리어 내내 제구는 그럭저럭 쓸만했으며, 상대 타자를 물어뜯고 싶어하던 Franklin은 이 두 가지 조건에 잘 부합했으며, 그랬기에 허접한 공으로도 Izzy의 후계자로 낙점되어 TLR의 클로저로 활약할 수 있었다. 다른 감독, 다른 구단이었다면 Franklin은 Mop-up guy 혹은 잘해봐야 비컨텐더 팀의 4~5선발로 뛰다가 은퇴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수순인 투수였다. 허나 어린 시절부터 팬이었던 (Franklin이 자란 Oklahoma도 Cardinal Nation이다) 고향팀과 계약 후 TLR을 만나 성공적으로 릴리버로 전환했으며, 이후 생각지도 못했던 영광까지[각주:5] 누리게 되었으니 선수 본인에게는 정말 소중한 인연이다. 어쩌면 그걸 너무 잘 알고 있기에 Franklin도 은퇴 이후 Cardinals 프론트 오피스에서 일을 도우기로 한 게 아닐까?

은퇴 이후 Mozeliak의 Special Assistant 라는 직명으로 구단 운영일을 시작한 Franklin은, 일단 본인의 고향 Oklahoma 지역에서 스카우팅 일을 돕고 Mozeliak의 선수 평가 (Player Evaluation)을 보조하는 것으로 직무를 시작했다. 사실 허울뿐일 수도 있는 이런 비공식적인 포지션을 소화하면서 Franklin의 현장감있는 시야와 근면함으로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며 순식간에 Mozeliak의 측근으로 자리를 잡았다.  Cardinals 측에서도 Franklin을 애리조나 지역에 있는 Scout School에 보내 본격적인 스카우트로써의 교육을 받게 했으며, 드래프트에서 Cardinals를 대표해 드래프티들을 발표하기도 했다. 올 해 드래프트에서도 큰 이변이 없다면 Cardinals 수뇌부를 대표해서 선수 이름을 호명하는 Franklin을 보게 될 것이다. 

"You keep an open mind and look for two things. Can he control his emotions, and can he locate? And when he locates, is it good enough to avoid hard contact? You have to have enough stuff where the ball is tough to center, and makeup is critical. If you get too emotional and throw balls [out of the strike zone] or balls down the middle, that doesn't work."

-Tony La Russa, on what he wants from his closers (ESPN, 2010)

통산 Contact Rate이 84%를 넘는 Franklin은 결코 컨텐더 팀의 "최종 보스" 에 어울리는 인물은 아니었다. 헛스윙을 유도할 수 있는 능력이 턱없이 부족했고 (커리어 7.2%), 당연히 클로저의 기본인 탈삼진도 기대할 수 없었다 (릴리버 전환 후 5.7 K/9). 맞춰잡는 마무리의 최대 단점은 "페이스가 한창 좋을 때도 운이 필요하다"는 점일텐데[각주:6], 2009년 NLDS에서 이 우려가 현실이 되어버렸다. 절대 잊을 수 없는 몇 차례의 재앙같은 경기들을 제외하고 나면, Franklin은 준수하게 자기에게 주어진 보직을 능력 이상으로 소화해냈다고 본다. 좀 취향이 변태스럽지만, 리그에서 가장 Underwhelming 한 구질들을 보유했으며 Strikeout Pitch가 전혀 없는 만 36세 투수가 절묘하게 9회의 긴장감을 소화해내며 어찌어찌 리드를 지켜내는 모습은 꽤나 볼만했다.



흔한 일 같지만 사실 커리어 중간에 Starter --> Closer 전환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John Smoltz와 Dennis Eckersley 같은 "뭘 시켜도 잘할 역대급 탤런트"를 갖춘 투수들을 제외하고 나면, 커리어에서 선발투수와 클로저로 따로 따로 밥값을 한 케이스는 사실상 전무하다. 그것도 투수로써 모든 능력치가 전반적으로 떨어질 시기인 35세의 나이에, 아주 허접한 패스트볼을 지닌 투수가, 갑작스럽게 클로저로 전환해서 성공한 케이스는 정말 드물다. 

35세 이후 Saves 랭킹 (Source: Elias Sports Bureau)

PitcherSaves after 35
Ryan Franklin

81

Tim Worrell

64

Woodie Fryman53
Al Reyes29
Mark Leiter29

그래서 Ryan Franklin의 케이스는 상당히 특이한 것이다. 혹시나 해서 Baseball-Reference의 도움으로 찾아보니 60승 / 80세이브 / 100 GS / 200 GF 를 모두 기록한 선수는 1961년 이후 고작 6명 뿐이며, 여기서 Franklin이 당당하게 이름을 올렸다. 

Career 60W, 80S, 100GS, 200GF, 1000 IP 클럽 (...)

  1. John Smoltz
  2. Dennis Eckersley
  3. Tom "Flash" Gordon
  4. Ron Reed
  5. Dave Giusti
  6. Ryan Franklin (!!!) 

Ryan Franklin's 3대 블론

워낙 많이 등판했으니 Franklin 의 이름을 들으면 생각나는 경기들이 있긴 하다. 그런데 좋은 기억들보단 안좋은 기억들이 훨씬 많다. Franklin의 3대 블론을 필자 재량껏 추려보았다.

블론 #1 (10/8/2009)

NLDS 2차전, Dodgers 원정에서 Kershaw와 Wainwright의 맞대결. 27세의 Wainwright은 지금처럼 "신선같은" 모습은 없었으나 싱싱한 어깨로 강한 패스트볼과 커브를 구사했으며, 8이닝 3피안타 1실점으로 Dodgers 타선을 봉쇄했다 (그리고 이후 5년간 포스트시즌에서 Waino가 이런 모습을 보여준 적은 거의 없다).  2:1 리드에서 9회, Trevor Miller가 좌상바 Ethier를 무난히 내야 팝업으로 잡아내고 나서 시리즈 초반부터 Cardinals의 구멍 취급을 받던 Franklin이 마운드에 올랐다. Franklin이 선두타자 Manny 를 중견수쪽 큼지막한 플라이볼로 잡아내는 순간 Cardinals의 산술적 승률은 무려 96%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사단이 났다.

Inn Score RoB Pit(cnt) Batter Pitcher wWE Play Description
b9 1-2 --- 5,(2-2)  J. Loney R. Franklin 14% Reached on E7 (Line Drive); Loney to 2B
b9 1-2 -2- 9,(3-2)  C. Blake R. Franklin 17% Walk
b9 1-2 12- 1,(0-0)  R. Belliard R. Franklin 61% Single to CF (Fly Ball); Pierre Scores/unER; Blake to 2B
b9 2-2 12- 3,(2-0)  R. Martin R. Franklin 63% Passed Ball; Blake to 3B; Belliard to 2B
b9 2-2 -23 4,(3-0)  R. Martin R. Franklin 66% Walk
b9 2-2 123 2,(0-1)  M. Loretta R. Franklin 100% Single to CF (Line Drive); Blake Scores/unER; Belliard to 3B; Martin to 2B

James Loney의 타구를 놓친 Holliday의 유명한 "낭심캐치" 를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나, 이 플레이 이후 Franklin이 Casey Blake 정도의 타자에게 볼넷을 내준 것은 극히 실망스럽다. Franklin은 우투수임에도 불구하고 우타자에게 전혀 강점을 보이지 못했으며 (통산 .266/.310/.447), 가장 큰 이유는 Franklin의 패스트볼이 너무 Hittable 했기 때문이다. 결과론이지만 여기서 Mitchell Boggs, Jason Motte 등 우타자들에게 패스트볼만 작정하고 던질 줄 아는 투수를 투입했더라면...그랬더라면...

블론 #2 (07/06/2010)

쿠어스필드에서 9:3으로 Cardinals가 Rockies를 상대로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8회말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은 Dennys Reyes가 경기를 마무리 지으러 올라왔는데, 안타 2개와 패스트볼로 실점을 하더니  1사  1,2루를 만들어놓고 5점차 리드에서 Franklin에게 경기를 넘겼다. 그리고 나서 생긴 일들이 아주 가관이다.

2013시즌 초 Mitchell Boggs의 핵실험들을 겪으신 분이라면 어느 정도 클로저 Melt-down에 있어서 면역력 향상 주사를 맞은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러나 Franklin의 Melt-down은 차원이 달랐다. 비교적 안정적인 커맨드를 자랑하는 Franklin이었으나 완벽과는 거리가 멀었고, 제구가 안잡히는 날에는 7가지 구질 중 어느 공을 던져도 미트볼이었다. 2010년 7월 6일은 필자가 본 Melt-down 중 가장 끔찍한 케이스 중 하나였다. Franklin이 등판하자마자 첫 타자에서 쓰리런을 허용하더니 이후 4안타 허용 후 다시 끝내기 쓰리런으로 5점차 리드를 날리는 모습은 (4:9 -> 12:9) 아마겟돈 수준의 대서사시였다. 당시 U. Colorado 에 있던 필자의 친구는 (이 분도 Cards팬) 쿠어스필드에서 이 경기를 직관한 뒤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 방금 있을 수 없는 일을 목격했다고 진술했으며, 그 해 가을부터 필자가 누차 설득했던대로 Anti-Franklin 캠프로 돌아섰다. 

잘잘못을 따질 순 없지만, 또 동시에 잘잘못을 안 따질 수도 없다. 2009년 NLDS는 두고두고 아쉽다.


블론 #3 (04/17/2011)

이미 이 경기 전에 Franklin의 클로저 수명은 사실상 다했다고 봐야한다. 그는 4월 8일 Giants전에서 4:3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Sandoval에게 적시타를 맞아 경기를 연장으로 몰고갔고, 다음 날인 9일에는 2:1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Tejada에게 끝내기 2타점 2루타를 허용했다.[각주:7] 14일 Dodgers 전에서는 5점차 상황 (9:4) 에서 등판해 Kemp에게 솔로 홈런을 맞았었다. 이미 4차례 세이브 기회 중 3번을 날리고 받은 5번째 기회에서 Franklin은 선두타자 Kemp에게 2-2에서 패스트볼을 한 가운데로 떠먹여주었고, 이게 경기를 끝내는 역전 투런이 되어버렸다. 경기 전 수염까지 깎고 나와서 분위기 전환을 노렸던 Franklin 입장에서는 끔찍한 결과였다.

Franklin은 경기 후 "1) 내 공은 별 문제 없다, 2) 구위가 문제가 아니라 구질 선택이 문제였다, 3) 이런 건 별일 아니다" 를 외쳤는데, 하도 여러 경기를 짧은 시간에 말아먹었던 터라 이런 대응은 오히려 화를 불러왔다. 특히 며칠 전에 홈런을 허용했던 Kemp에게 2타석 연속 홈런을 허용한 터라 팬들의 인내심은 한계점에 이르렀던 상태였고, Franklin이 Kemp에게 던졌던 공이 워낙 한 가운데로 들어온 탓에 "my stuff's fine" 이라는 변명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들렸다. 

"My stuff's fine, everything in the arsenal's still there. I haven't lost anything. Sure, if you're human it's going to affect you, but you can't let it affect you on the mound. What it boils down to is I've got blood going through my veins, so sure it affects you. I'm not going to lie."

-Ryan Franklin, after 4th BS in 5 SVO (ESPN, 04/20/2011)

이 경기를 기점으로 Franklin은 St. Louis 에서 상당히 드문 일인 "홈팬들의 야유"를 받기 시작했으며, 4월 20일에는 TLR이 직접 Franklin을 클로저 자리에서 내린다고 발표했다. 이후 열흘이 지난 4월 30일, Franklin은 공식적으로 롱 릴리프 역할로 강등되었다. 어쩌면 Franklin에게 가장 어울리는 자리일지도 모르는 그 위치에서 Low-leverage 상황만 골라 등판했으나 전혀 투구 내용이 나아지지 않았고, 2달 후인 6월 28일에 Cardinals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게 된다. 방출 통보를 받고도 Franklin은 선수생활 연장에 강한 의지를 표출했으나, 그의 선수 생명은 사실상 끝난 것과 다름 없었다.


by Doovy













  1. 나름 1992년 드래프트 동기들인 Rich Aurilia, Geoff Jenkins 같은 선수들보다 높은 순위이다. [본문으로]
  2. Ben Sheets는 올림픽에서 22이닝 1자책점을 기록했다. [본문으로]
  3. AL ERA 10위는 3.60으로 시즌을 마감한 Indians의 C.C. Sabathia였고, Franklin은 3.57로 9위에 랭크되었다. 극히 허접한 stuff의 소유자인 Franklin이 200이닝을 소화하면서 CC만큼 실점을 억제했다는 점은 존중해줄만 하다. (한편 ERA라는 스탯의 허점이 격하게 느껴진다) [본문으로]
  4. Franklin이 기록한 단일시즌 ERA-FIP 괴리 수치는 -1.61로, 2000년대에 이보다 더 FIP에 ERA를 잘 받은 투수는 없었다 (2위 1.58 Elmer Dessens, 2002) [본문으로]
  5. 2009년 올스타, 2009 Sporting News 선정 Reliever of the Year [본문으로]
  6. 심지어 2009년 8월에 월간 마무리상을 수상했을 때도 11이닝을 던지혀 삼진 4개, 볼넷 6개에 그쳤다. 세이버매트리션들이 극히 혐오할 투수이다. [본문으로]
  7. 물론 이 경기에서 Tejada의 2루타는 사실 Colby Rasmus가 놓치지 않을 수 있던 타구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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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ovy

이번 편에서는 블로그 출범 후 가장 욕을 많이 먹은 인물, Mike Matheny 를 돌아보도록 한다. 사실 현 감독 위치에 앉아있는 인물을 옛 사람처럼 돌아보는게 좀 꺼려지긴 했으나, TLR 시대 (더 정확히는 Pre-Yadi 시대의) 포수 Matheny는 2000년대 초 Cardinals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었기에 도저히 뺄 수가 없었다. Teammate로써, 인간으로써, 리더로써의 Matheny는 TLR 시대가 추구했던 가치관을 가장 잘 반영하는 선수였기에 비난(?)을 무릅쓰고 Matheny의 커리어를 돌아본다. 



Michael "The Toughest Man Alive" Matheny

Catcher

DOB: 1970년 9월 22일

Birth: Reynoldsburg, Ohio

Time with Cardinals: 2000-2004


Pre-Draft

Matheny가 자란 Ohio 주 Reynoldsburg는 주도 Columbus 근처의 황량하고 특징없는 Mid-west Suburb 동네로, 가족 모두가 OSU (Ohio State Univ) 풋볼 팬이었다. 이에 당연히 Matheny도 OSU 진학을 꿈꾸며 자랐고, 8년간의 리틀리그 경험을 쌓으면서 점차 동네를 대표하는 선수가 되어갔다. 집에서 4년제 대학을 나온 사람이 없었던 Matheny 가문에서는 늘 "운동도 운동이지만 일단 교육"을 중시했고, 이에 Matheny 는 학창시절 내내 운동선수치고 상당히 학점관리를 훌륭히 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고교시절 Matheny는 풋볼 팀과 야구 팀에서 모두 캡틴을 지냈으며, 철저한 Christian 가정에서 자라서 사생활도 깨끗했다. 무엇보다 리더로써의 자질은 Mike를 만난 사람 모두 칭찬하는 바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MidWest Elite Athlete의 교과서라고 볼 수 있는 Scott Rolen의 유년기가 생각난다. 


그러나 2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첫번째는 일단 타격이 너무 안됐으며 (본인도 인정), 두번째는 키가 작았다 (고교 마지막 학년 당시 177cm). 이 명백한 약점 때문에 OSU, University of Ohio 등 지역 연고학교에서는 Matheny에게 크게 신경쓰지 않았고, Matheny 본인도 고교 졸업반이었던1988년 드래프트에 본인의 이름을 넣기는 했으나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무렵, Michigan 야구팀의 전설적인 감독인 Bud Middaugh[각주:1]가 Matheny에게 선뜻 장학금을 제시하면서 Matheny는 (학벌과 운동을 모두 잡을 수 있는) Michigan으로 진학하기로 결정한다. 프로 선수를 목표로 하고 있던 Matheny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드래프트 3일 내내 전화기 옆에서 기다렸으나, 한 통의 전화도 오지 않았다.

드래프트가 다 끝나고 나서 이틀 후, 뒤늦게 Blue Jays 측에서 Matheny를 뽑았다고 연락이 오긴 왔으나, Matheny는 이미 Michigan 진학으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1988년 여름 끝자락, Ohio 집을 떠나 Ann Arbor (Michigan 대학 소재지) 로 떠나기 이틀 전, Matheny의 집으로 당시 Blue Jays 단장 Pat Gillick이 직접 찾아왔다. 능수능란한 Gillick은 "우리가 너를 드래프트에서 지명했고, 학교 수업이 시작하기 전까지 우리가 너와 계약할 독점권이 있다. 프로에 들어오고 싶지 않느냐" 면서 만 17세의 Matheny[각주:2]와 계약 조건을 논의하기 시작했고, "수업 시작하기 전에 꼭 연락을 달라" 고 당부하고 떠났다. Gillick은 "우리가 너를 31라운드에 지명했지만, 2라운드급 계약금을 주겠다" 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I’m driving up (to Ann Arbor) and I’m trying not to act distracted, but a lot of us have had dreams of playing professional baseball and mine was sitting right in front of me. I’m sitting up in my dorm room in West Quad and my phone keeps ringing and they keep upping the ante and I’m thinking, ‘I’m really not that good.’ ”

- Mike Matheny, on his decision to attend Michigan 

(Michigan Daily, 06/05/2011)


혼란 속에 Michigan에 도착한 Matheny는 개강 첫 날 아침, 수업에 들어가기 직전 Gillick에게 전화를 걸어 Michigan 잔류를 알렸고, 이리하여 어렵게 Blue Jays의 구애를 뿌리쳤다. 그리고 이 결정은 훗날 선수 Matheny뿐 아니라 감독 Matheny를 있게 하는 계기가 된다.

스탠스만 보면 굉장히 잘 칠 것 같다.

[각주:3]

Bud Middaugh 감독의 판단은 정확했다[각주:4]. Big-10 Athelete 치고 덩치가 작은 편이던 Matheny는 대학 진학 후 6'2 (188cm) 를 훌쩍 넘는 키로 성장했으며, 흔치않은 Matheny의 Defensive 탤런트와 Make-up은 대학 레벨에서도 빛났다. 여전히 방망이는 부족했지만 노력으로 어느 정도 극복할만 했고, 1학년 때 이미 Connie Mack National Championship에서 전국구 우승을 맛보는 운도 따랐다. Freshman 시즌 후 Matheny를 스카우트해온 Middaugh 감독이 "풋볼 쪽에서 나는 수익을 야구 선수들 스카우트 비용으로 돌린다" 는 일종의 "공금횡령" 스캔들 속에 사임하면서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이것도 Matheny에게는 상당히 운이 따른 일이었다. 


Middaugh의 후임으로 온 새 Michigan 감독이 바로 60~70년대 Detroit Tigers의 대표 포수이자 통산 11회 올스타에 빛나던 Bill Freehan[각주:5]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현역 시절 골드글러브 5차례 수상에 빛나던 Freehan은 Matheny가 대학 레벨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캐칭 인스터럭터였고, Freehan 또한 Matheny로부터 "빅 리그 포수뿐 아니라 훗날 Manager가 될만한 자질이 보인다"며 특별히 아꼈다. 이 때 Freehan은 Matheny를 불러 "이 바닥(MLB)에 오래 있고 싶으면 (현역 은퇴 후에도) 무조건 스페인어를 해야한다. 지금 당장 너의 모든 교양과목을 (Electives) Spanish로 바꿔라[각주:6]" 고 조언했으며, Matheny는 이를 철저히 따랐다.[각주:7] 3학년 Matheny에게 주장 완장을 직접 채워준 것도 Bill Freehan이었고, Matheny가 Michigan에서의 마지막 시즌에 MVP를 수상했을 때 가장 기뻐했던 것도 Bill Freehan이었다.  

Draft and Minors

1991년 드래프트에서 Matheny는 Brewers의 지명 (8라운드 전체 208번[각주:8])을 받고 프로에 들어온다. 프로에 와서도 Matheny의 프로필은 한결같이 "All glove, No bat" 의 전형적인 수비형 포수였고, 다만 Defensive Talent가 워낙 출중해서 빅 리그로 올라가면 백업으로 분명히 쓸모가 있을 것이라는 게 전반적인 평이었다. 일단 아래는 Ko-모 유격수를 떠올리게 하는 안타까운 Matheny의 Brewers 산하 Minor 시절 타격 성적이다

Mike Matheny's Minor League Track Record

Year Lev G PA AB R H 2B 3B HR RBI BB SO 1991 Rk 64 284 253 35 72 14 0 2 34 19 52 .285 .348 .364 .711
1992 A+ 106 379 333 42 73 13 2 6 46 35 81 .219 .297 .324 .621
1993 AA 107 372 339 39 86 21 2 2 28 17 73 .254 .292 .345 .638
1994 AAA 57 203 177 20 39 10 1 4 21 16 39 .220 .299 .356 .655
7 Seasons 362 1336 1193 143 293 65 5 18 141 90 270 .246 .307 .354 .661


Matheny의 마이너 시절은 사실 스탯으로 보는게 큰 의미는 없다. 다만 Matheny는 훗날 감독이 된 후 Brewers 마이너리그 스태프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포수로써 갖춰야 할 수많은 Intangible 들 (특히 수치화시킬 수 없는 Game-Calling, Framing, Game-Reading 등) 을 갈고 닦을 수 있는 기회였다고 회고한다. 특히 10년간 (1984-94) Brewers 에서 Player Development Coordinator 자리를 지키던 Bob Humphreys의 지도와, Catching Instructor였던 Del Crandall (현역시절 골드글러브 4회 수상[각주:9])의 개인레슨은 Matheny의 커리어 황금장갑 수집에 기초를 닦아주었다.

"When I came up through the organization, I think it was very much like how the Cardinals have their philosophy. I was very fortunate to have a very disciplined Minor League development that really focused on the fundamentals and playing the game hard, playing the game right. I was fortunate in that regard."             

- Mike Matheny, on Brewers farm system (4/6/2012, MLB.com)



1994년 4월, 프로 입문 3년만에 빅 리그에 데뷔한 Matheny는 백업포수로 빅 리그와 AAA를 전전하다가 1996년 개막전에서는 Brewers의 주전 포수 마스크를 썼다. 물론 타격이 워낙 안됐던 탓에 주전이라기엔 조금 부족한 연평균 340~350PA 정도를 받는데 그쳤으나, Matheny의 Brewers 시절 OPS가 평균 .600대를 간신히 웃도는 수준이었음을 감안하면 (Tony Cruz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다) 오히려 Brewers가 꽤나 참을성이 많았구나 싶다. 1998년까지 4시즌간 Brewers의 백스톱을 책임지던 Matheny는 1999시즌을 앞두고 자신을 드래프트해주었던 Blue Jays로 옮겨갔는데, 당시 Darrin Fletcher의 백업으로 뛰면서 57경기 출장에 그쳤기에 더 이상 주전 포수가 되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2000시즌: Cardinals로 이적

1999년 시즌이 끝나고 Cardinals는 당시 팜에서 가장 기대를 모으던 "운동형 포수" Eli Marrero를 주전 포수로 낙점한뒤, Marrero의 뒤를 받쳐줄 베테랑 백업 포수를 구하고 있었고, Matheny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 당시 Matheny 영입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던 이는 베테랑 투수 Pat Hentgen이었다. Blue Jays에서의 마지막 시즌 (1999)에 Matheny와 한솥밥을 먹었던 Hentgen은 Matheny의 게임콜링, 도루저지 능력과 리더십을 몹시 높이 평가했으며, 이에 Jocketty와 TLR에게 직접 Matheny를 천거했다. 사실 Hentgen 본인도 Cardinals와 계약한지 갓 1달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99년 11월에 계약), 불과 3년 전에 CYA를 수상했던 빅 리그 10년차 투수의 추천서는 다른 어떤 낙하산보다도 강력했다. 그리고 Hentgen이 이어준 인연은 무려 5시즌이나 이어진다.

“He was pretty vocal about it. He was on my side. That’s just the ultimate compliment - for a pitcher with as much experience and success as Pat has had thinks that highly of me to put his name on the line.”

-Mike Matheny, on Hentgen's Recommendation (May 2000, AP)

스프링캠프에서 이미 Matheny 효과를 톡톡히 느낀 TLR은개막전 선발투수에 DK57을, 포수에 Matheny를 선정했다. 이 둘에게 2000시즌 개막전은 Cardinals 유니폼을 입고 처음 치르는 공식 경기이자 처음으로 호흡을 맞춰보는 경기였는데, 이 경기에서 두 선수는 나란히 크게 활약하며 Cubs를 박살했다.[각주:10] 모범적인 팀메이트였던 동시에 TLR이 원하는 스타일의 리더였던 이 배터리는 Cardinals 유니폼을 입음과 동시에 클럽하우스 리더로 부상했으며, 이후 DK57의 급사 전까지 둘은 뗄 수 없을만큼 친한 사이로 지냈다. 이후 2년 반동안 Darryl Kile과 Mike Matheny는 76경기 500이닝을 함께 했으며, Kile은 Matheny만큼 지능적이고 재능있는 포수를 백스톱에 앉혀놓고 던지는 것을 더할 나위 없는 행운으로 여겼다. Kile은 Matheny가 공을 받아줄 경우 K/BB 비율이 2.74에 이르렀는데, 이는 커리어 수치 (1.82) 보다 현격히 높은 수치이다. 포수의 Game-calling과 프레이밍은 f/x 데이터 없이 수치화하기 쉽지 않지만, 이 정도면 무시할 수 없는 차이이다.


Matheny는 Cards에 Yadi를 선사했고, Chris Carpenter를 갖다주었다.


There are few catchers in the game more solid defensively than Matheny. He frames pitches very well, and blocks pitches in the dirt as well as anyone. He has textbook mechanics, with his quick release that makes runners go reluctant to attempt a steal against him. Mike also has grown as a handler of pitchers under Cardinals pitching coach Dave Duncan.

-Scouting Report 2004, on Matheny's defense

계약 당시만 해도 Matheny는 Depth Chart에서 Eli Marrero의 백업플랜 수준이었으나, 정규시즌에서 Matheny의 타격 성적이 커리어 하이를 찍으면서 두 선수의 입지는 크게 달라졌다. Matheny는 빠른 속도로 Cardinals 투수진의 신임을 얻었으며, 꾸준한 플레잉타임을 얻으면서 .261/.317/.362의 슬래시라인을 기록했다. 비록 BABIP신의 가호를 받긴 했으나 (.323) 좌투수 상대로는 생각보다 쓸만한 타격을 보였고, 득점권에서는 유난히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서 그럭저럭 사람 구실을 하는 모습이었다[각주:11]. 수비에서 Matheny는 자신의 개인 첫 골드글러브를 수상했으며, 시즌 내내 단 1개의 3루도루도 허용하지 않았고 (2루도루 44저지 43실패), Defensive WAR로 무려 2.4를 적립했다 (Andruw Jones에 이어서 ML 2위). 

이 시즌 Mike Matheny의 유일한 오점은 딱 하나. 시즌 막판 Matheny는 San Diego 원정에서 생일 선물(9/22) 로 받은 사냥용 칼을 뜯어보다가 오른손을 크게 베이는 사고를 쳤고, 이로 인해 포스트시즌을 모조리 결장하는 삽질을 했다. 별 거 아닌 듯 보였던 이 사건은 Rick Ankiel 의 포스트시즌 Melt-down으로 다시 재조명을 받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TLR 시리즈 Ankiel 편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Matheny가 Semi 사람다운 공격력 + 골드글러브 수비를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 고무된 Cardinals는 2001년 4월, Matheny에게 3년 연장계약의 선물을 안겨준다. 그러나 Matheny의 커리어 하이 시즌은 BABIP 빨 플루크였다는 게 증명이 되었고, 좌투수 상대 타율이 0.184까지 내려가는 고생 끝에 Matheny는 wRC+ 50, .218/.276/.304 라는 처참한 성적으로 2001 시즌을 마감한다. 



2002시즌: Mike Matheny and DK57

Matheny가 Cardinals 유니폼을 입고 남긴 업적 중 가장 큰 일을 꼽으라면 3차례의 GG 수상도, 2004년 NLDS에서의 깜짝 활약도 아닌, 2002시즌 Darryl Kile의 시즌 중 급사를 수습한 일을 꼽겠다.

거의 같은 시기에 Cardinals 유니폼을 입게 된 이 둘 (Darryl Kile and Mike Matheny)은 2000시즌 개막전을 시점으로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Coors Field에서 고생을 하다 내려온 Kile은 본인의 구질을 본인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는 Matheny 에게 던지는 것을 몹시 즐겼고, Matheny 역시 자신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이는 Kile의 공을 받기 원했다. 2000시즌 마지막 등판에서 Kile은 Matheny를 앉혀놓고 정규시즌 20승째 승리를 따냈고, 경기 후 샤워를 마친 Matheny가 라커룸에 돌아왔을 때 의자에는 Kile이 갖다준 Rolex 시계가 놓여있었다. 뉴욕을 원정 방문할 때마다 짝퉁 15불짜리 Rolex를 사 모으던 Matheny에게 Kile이 진품을 선물한 것이었다. 

2002시즌 전반기는 Matheny에게나 Kile에게나 결코 즐거운 시간들이 아니었다. Matheny는 타율 2할대 유지를 버거워하는 타격 슬럼프를 겪고 있었으며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Kile은 5월 말 Astros 전에서 2경기 연속 잘 던지고도 승리를 얻지못해 (6IP 2ER, 6IP 1ER) 약이 올라있는 상태였다. 평소같았으면 늘 경기 시간 3시간 전부터 클럽하우스에 나와서 Kerry Robinson과 체스를 두고, Matty Mo와 박물관에 가고, Matheny와 비디오 분석에 몰두하며 클럽하우스 분위기를 주도했던 Kile은 이 당시 그답지 않게 우울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TLR이 넌지시 Kile에게 다른 포수들과 호흡을 맞춰볼 것을 제안하자 Kile은 "Matheny가 아니면 던지지 않겠다" 는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 며칠 후인 6월 18일, Kile은 Matheny를 앉혀놓고 그 해 최고의 퍼포먼스인 7.2IP 1ER 의 호투로 Angels 타선을 잠재웠다.

2002년 6월 22일, Chicago의 Westin Hotel에서 Darryl Kile이 사체로 발견되었던 그 날은 Kile이 선발등판하기로 되어있었던 날이었다. 모두가 DK를 잃은 슬픔으로 침묵해있던 그 날 오후, TLR은 Matheny에게 경기를 뛸 것을 요구했다. Matheny는 "Kile이 던지지 않는다면 저도 안 뛰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출전을 거부했고, TLR은 하는 수 없이 Simontacchi-Difelice 조합으로 나서서 1시간 47분 (1981년 이후 최단시간 경기) 만에 경기를 끝낸 뒤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선수단을 거둬서 숙소로 돌아갔다. 

라커룸에서 Rolex 시계를 만지작거리며 침묵으로 일관하던 Matheny는 슬픔은 미뤄두고 그 다음 날 경기부터 다시 출장을 강행했으며, 한 순간에 리더이자 친구, 동료이자 롤 모델을 동시에 잃어버린 투수진을 다독이는데 집중했으며, 후반기에는 .280에 가까운 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DK와 유난히 각별했던 Matheny는 시즌이 끝날 때까지 단 한 차례의 DK 관련 공식 인터뷰도 하지 않았다. 시즌이 끝나고 Matheny는 교회 Grief Session에서 Kile에 대해 입을 처음 열었다. 그리고 5개월간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We went out and played the game. We had an edge to us. Nobody had to say anything. We wanted to represent what he believed in, which is just going out and doing your job."                                                                       

 - Mike Matheny, on 2002 season after Kile's death


2002 NLDS에서 Cardinals의 기세는 무서웠다. 이 팀은 6월 말에 에이스를 잃은 후 57승을 거두었고, 그 중심에는 Mike Matheny가 있었다.


2005시즌: Giants로 이적

2004 WS가 허무하게 막을 내리고 Matheny는 다시 FA로 풀렸다. Cards 입장에서는 리그 최고의 수비형 포수이자 필드 위에서는 코치, 클럽하우스 안에서는 리더로 추앙받는 Matheny를 재계약할 의도가 있었으나,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던 젊은 포수 Yadi의 존재와 Matheny의 어쩔 수 없는 공격력 부재 때문에 도저히 장기 계약을 줄 수는 없었다. 게다가 Cardinals 유니폼을 입고 숱한 기록을 세우고 Gold Glove를 3개나 수상한 탓에 Matheny는 시장에서 꽤나 인기가 있었으며, 수비 하나만으로 3년 계약을 받고 Giants로 이적한다. 10년 전만해도 지금처럼 수비력이 시장에서 쉽게 인정받지 않던 시절이었으며, 이렇게 All-Glove, No Bat 프로필의 만 34세 포수가 3년 계약을 따낸 것은 Matheny 의 시장 내 Reputation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케이스이다.

"Mike is one of the toughest competitors that we have ever witnessed and a true leader. As a player, he will be missed not only on the field, but in the clubhouse, the scouting meetings and on the road with his teammates. On behalf of the Giants, I wish Mike and his family all the best. He'll always be a Giant."


-Brian Sabean, on Matheny's retirement (02/01/2007, MLB.com)


Giants 이적은 Matheny에게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2005시즌, Matheny는 862차례의 기회에서 단 1개의 실책만을 범하며 Giants의 길고 풍성한 역사에 길이 남을 가장 완벽한 Defensive Performance를 선보였으며, 뿐만아니라 홈런 (13), 2루타 (36) 타점 (59) 에서 모두 커리어 하이를 찍었고, 득점권에서는 무려 .311이라는 해괴한 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물론 이 사이 Matheny의 wRC+는 76에 그쳤으나 (비교를 원하신다면 올해 Descalso의 wRC+가 88이었다), 이마저도 Matheny 커리어에서 찾아보기 힘들 수준의 Best Offensive 시즌이었다. 

Matheny as a Catcher

우리는 근 10년째 Yadier Molina라는 걸출한 포수의 플레이를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어서 웬만한 포수들에게 쉽게 감동하지 않지만, 포수 Mike Matheny의 수비는 동시대 최고 수준이었다. 잠깐 Matheny 의 업적들을 돌아보자면...

  • Gold Glove 4회 수상 (2000, 2003, 2004, 2005) 
  • 통산 수비율 Career Fielding Percentage .994 (1,285 games, 43 errors in 7,774 total chances)
  • 252 연속경기 무실책 (8/1/02 - 8/4/04) (ML 최장기록)
  • 1565 연속 수비기회 (Chances) 무실책 (2004) (ML 최장기록)
  • 단일시즌 100+ 경기 무실책 (2003, 역대 단 3명)[각주:12]
  • 단일시즌 138경기 연속 무실책 (2003, 823 total chances)
  • Giants 프랜차이즈 사상 단일시즌 최고 수비율 (2005) (0.9988, 1112이닝 1실책)
  • 리그 최다 도루저지 1위 (2000, 2005)
  • 포수로 10,000이닝 소화 (1994-2006, 같은 기간 10,000이닝 소화한 포수는 13년간 8명[각주:13])

Matheny는 투수들에게 가장 인정받는 포수였다. 게임콜링와 블로킹, 피치 프레이밍, 타자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 Matheny는 늘 두텁게 준비가 되어있었다. Matheny는 백스톱 자리에서 가장 필요한 "Understanding of the Game,"  경기 자체에 대한 이해도에 있어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던 포수였다. Blocking은 Charles Johnson이 나았을 지 모르고, Throwing Arm은 Ivan Rodriquez가 더 나았을 수도 있겠으나, 이 모든 것을 포함한 Overall 퍼포먼스에서 Matheny를 뛰어넘는 포수는 동시대에 없었다고 봐도 좋다. 지금의 Yadi가 Liliquist를 대신해서 투수코치를 하고 있다면, Matheny는 Duncan의 Proxy로 뛰었다고 봐도 좋다.

“I can sum up what happened in two words: Mike Matheny. He got hurt, and I started to lose confidence. I’m not the only guy who struggled there after he got hurt.”                             

- Jamey Wright, on Matheny's impact on him (2007, Dallas Morning News)



Matheny as a Hitter

칭찬을 많이 했으니 좀 까도록 해보자.

어떤 과정을 거치든 ML 레벨까지 올라오는 선수들은 다들 고교/대학/마이너시절 최소 Contact/Power 둘 중 하나는 보여주게 마련이다. 심지어 Defense-oriented 선수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Matheny는 고교시절부터 타율 .280을 버거워했으며, 대학에서도 딱히 Offensive Prowess로 알려진 일은 없었다. 마이너리그 시절, Matheny는 루키레벨 이후 OPS .700을 기록한 적이 없으며, Brewers 마이너에서의 4년을 Hard-stuff와 바닥에 패대기쳐지는 Breaking-stuff에 모두 약점을 드러냈다. 직구도 못치고 변화구도 못치는 타자였는데다가, 탄탄한 체격이 아까울만큼 파워도 없었고 쓸데없이 스윙 스트로크가 길어 배트 컨트롤도 엉망이었다 (Minor 4시즌간 루키레벨 위에서 OBP .300을 넘긴 적이 없다.) Matheny 본인도 고교시절 자신의 모습에 대해, "나는 타격은 영 젬병인데 그래도 잡고 던지는 건 좀 했었다" ("I couldn’t hit my way out of a wet bag, but I could catch and throw a little bit") 고 회고했다. 

(wRC+ 기준) 역대 최고 물방망이 포수들 (1871-2014, 최소 4000PA 이상)

  1. Malachi Kittridge (59)

  2. Mike Matheny (62)

  3. Joe Girardi (71)

  4. Luke Sewell

  5. Red Dooin

  6. Rollie Hemsley

  7. Jim Hegan

  8. Cy Perkins

  9. Brent Mayne (74)

  10. Brad Ausmus (76)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All Glove, No Bat 포수였기에, Matheny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Video-Junkie 라는 별명이 붙을만큼 미친듯이 비디오 룸에서 상대 투수 분석에 시간을 투자했다. 또한 Cardinals 이적 후에는 특히나 방망이를 더 짧게 잡아 브레이킹볼 대처능력을 키웠고, 배트 스피드를 증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스윙을 컴팩트하게 만드는 것에 주력했다. 이렇게 열심히 타격 메카니즘을 교정했음에도 불구하고 Matheny의 공격 생산력은 "거의 매 시즌" Replacement Level 수준 그 이하였다. 긴 설명이 필요없이, 역대급 물방망이를 보여주었던 Matheny의 위엄은 위 랭킹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그 모든 물방망이 포수들보다 Matheny가 머리 하나는 앞서있다)

Matheny as a "Toughest Man Alive"

이미 잘 알려진 에피소드이긴 하지만 간단하게 복기해보자. 

1998년 5월 26일, Pirates와의 홈 경기에서 Matheny가 2:1로 9회말 1사 1,2루에서 타석에 들어섰다. Ball-in-the-dirt에 극히 약점이 있었던 Matheny는 (대체 무슨 구질에 약점이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골프광이었던 당시 Brewers 감독 Phil Garner와 "변화구에 삼진 당할 때마다 골프공 한 박스씩을 조공으로 바칠 것"을 약속하고 변화구 대처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삼진을 당하지 않아야겠다는 심정으로 타석에 들어섰다. 상대 투수는 빠른 공 + 엉망인 제구로 이미 잘 알려져있던 Rich Loiselle[각주:14] 이었는데, 이 허접한 투수가 2구째 패스트볼을 Matheny의 얼굴 (정확히는 왼쪽 입가)를 맞춰버린 것이다. 이 공의 구속이 95마일이었다는 보도도 있고, 90마일이었다는 기사도 있으나, 뭐 몇 마일이었든 간에 "작정하고 던진 우투수의 Up-and-in 패스트볼" 이었음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동영상 링크)

"He was a catcher, so it's kind of weird for an outfielder to say this, but I emulated him. I looked up to him. He was a guy who taught us the right way to play the game. You keep your mouth shut and do your job. 

And, man, Mikey was tough."

- Geoff Jenkins, on Matheny's toughness (10/20/2012, MLB.com)

경기 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찢어진 입가를 꼬맨 Matheny는 그 길로 곧장 Phil Garner를 찾아가 "If you can do me a favor, I want to play tomorrow" 라고 말했고, 결국 다음 날도 경기에 출장해 Matheny 다운 방법으로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4타수 무안타, 8회 상대 득점권에서 도루저지 성공). Matheny는 이 에피소드에 대해 "내가 공을 맞고 쓰러지지 않은 걸 기억하기보단 내가 HBP로 살아나가서 우리가 끝내기 안타로 이겼음을 기억해야 한다[각주:15]" 고 말했다.  당시 Brewers 의 백업포수였던 Bobby Hughes는 "저 인간이 얼굴에 공을 맞았는데도 나는 선발 출장을 못하나" 고 한탄했는데, 이 친구는 Tony Cruz와 만나면 말이 잘 통할 것 같다.



Matheny and Concussion

Matheny가 뇌진탕 후유증으로 조기 은퇴를 했고, 야구계에서 손꼽히는 Anti-Homeplate Collision 캠프의 주동 인물이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있다. 대체 어느 정도로 뇌진탕의 아픔을 겪은 것일까?

마스크에 튕기는 파울팁, 주자와의 홈 플레이트 충돌 등으로 마이너 시절부터 뇌진탕은 Matheny에게 익숙한 친구같은 존재였다. Brewers 산하 AA팀의 경기를 라디오중계하던 Vaspersian은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홈 플레이트에서의 충돌 후 Matheny 뇌진탕 증세를 겪었던 날에는 밤새도록 팀 닥터와 트레이너들이 Matheny의 숙소에 들어가 이 질문 저 질문을 하며 Matheny의 뇌가 정상인지 확인했다고 회고했다.

2006년 5월 29일, Matheny는 Marlins와의 홈 경기에 선발 포수로 출장했다. 이미 며칠간 유난히 많은 파울 볼들을 마스크에 맞아서 정신이 혼미하던 Matheny는 특유의 Grit으로 선발 출장을 강행했다. Giants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Cards 시절부터 Matheny 의 미트 안으로 수천개의 공을 던졌던 오랜 친구 Matt Morris였다. 도저히 Miguel Cabrera에게 정면승부를 할 수 없었던 이 Ex-Cards 배터리는 6회 2사 2루에서 Cabrera를 고의사구로 걸렀고, Matheny는 2루 주자 (Dan Uggla)가 혹시나 사인을 훔칠까봐 마운드로 직접 올라가 다음 타자인 Josh Willingham에게 패스트볼로 승부할 것을 이야기했다. 

"As my catcher and as a person he just meant so much to me. On the field he taught me how to be a professional. Off the field he taught me to be a man and a respectful person. He's going to be sorely missed by everybody. Unfortunately through his head trauma and concussions, it's just ending a little abruptly to him. He was a guy so hard-nosed and he wanted to play every day, so for it to end this way is unfortunate. After the blows to the head, he wasn't the same. We want the old Mike Matheny back, baseball player or not."

-Matt Morris, when Matheny retired (2007)

마운드에서 다시 내려와 플레이트 앞에 쪼그려앉은 Matheny는 불과 몇 초 전 Morris와 나눴던  대화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자신의 뇌가 뭔가 정상이 아니란 것을 깨달은 Matheny는 (자신이 요구했던) 다음 구질이 무엇일지 Guess해서 잡아야했고, Matheny는 커브를 예상하며 블로킹 자세를 취했다. Morris는 당연히 아까 상의한대로 패스트볼을 던졌고, 이에 당황한 Matheny는 스트라이크존으로 들어오는 패스트볼을 어이없이 놓쳐버렸다. Passed Ball. 평정심을 잃은 Morris는 이닝 종료 후 Matheny에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냐 화를 냈고, Matheny도 Matheny대로 shin-guards(종아리보호대)를 벗어서 Morris에게 던지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그리고 이틀 후인 5월 31일, Matheny는 자신의 커리어 마지막 경기를 치르게 된다.

쇠파이프도 씹어먹을 것 같은 강인한 이미지의 Matheny였지만,  10년간 25~30건의 뇌진탕은 견디기 힘든 수준의 고통이었다. Matheny의 열렬한 지지자이던 Giants 단장 Brian Sabean은 Matheny의 상태 호전을 위해 Pittsburgh 대학의 뇌진탕센터에 Matheny를 보내 프로그램을 따르게 했으나, 의사들의 의견은 "한 번만 더 뇌에 충격을 받으면 영구적으로 뇌에 손상을 입을 수 있다" 며 Matheny에게 선수생명 종료를 선고했다. 

뇌진탕의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Matheny는 꾸준한 단기 기억 상실증 때문에 운전 중에도 몇 차례씩 부인 Kristen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지금 어디를 가고 있고, 왜 가고 있는지" 를 물어봤으며, 심박수가 120을 넘어가게 되면 지독한 현기증에 시달렸기에 늘 Heart Monitor를 달고 다녔다. 심지어 계단을 오를 때도 한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끔찍한 두통과 현기증으로 구토증세에 시달렸으며, 이에 Matheny이 5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계단을 오를 때에는 최소 45분이 걸렸다고 한다. 주유소에서 자동차 주유구에 호스를 꽂아놓은 것을 까먹고 그냥 운전해서 나오다가 주유기를 망가트리는 일이 한 달에 3번 이상 있었다고 하니, 일상 생활에 큰 어려움이 있었음이 자명하다. 

더 이상 야구를 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린 Matheny는 이후 Giants의 미래에 누를 끼치지 싫다며 2007년 2월 1일을 앞두고 은퇴를 선언했으며, 자신과 같은 케이스가 더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에 홈 플레이트 충돌 반대 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로부터 몇 년 후 Giants 백스톱이 된 Buster Posey가 "Posey Rule"을 만들어주면서 Matheny의 바람은 어느 정도 실현이 되었다.



총평 - Natural-born Leader

(하키, 농구, 풋볼에 비해) 직접적 육체 충돌 (No Contact Sports) 이 적다는 종목 특성을 감안한다면, 야구선수에게 "Toughest Man Alive" 라는 별칭은 약간 사치스러워 보이긴 한다. 90마일을 상회하는 공을 얼굴로 이겨내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핏덩이를 "풰" 하고 뱉어내는 장면은 여전히 ESPN 혹은 MLB Network에서 All-time "Ouch" Top 50 쯤에 선정될만큼 분명 자극적이며, 스포츠 저널리스트들이 그냥 묻어버리기 아까울 소재이긴 하다. 그러나 Matheny가 단순히 이 에피소드 하나로 "무식하게 강한 맷집과 물방망이를 자랑하던 수비형 포수" 로 기억된다면, 그것 또한 억울한 일일 것이다.  

감독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선수시절의 Mike Matheny 역시 리더였다. Matheny는 개인으로써는 절대 빛나지 않는 선수였고, 타석에서의 그는 당당한 체구와 다르게 한없이 작아보였다. 그러나 8명의 팀메이트들을 눈앞에 두고 플레이트 뒤에 자리를 잡으면 Matheny의 진가가 발휘되었고, 그는 투수들 뿐 아니라 야수들까지 본인들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있는 힘껏 도왔다. 필드 안에서나 밖에서나 Matheny의 가치는 그가 주변에 미치는 영향으로써 증명되었고, 결국 마지막까지 많은 투수들을 "내 사람" 으로 만들고 은퇴했다. 수차례의 충돌과 마스크를 울리는 파울팁에 두들겨 맞으면서도 그는 무려 10,000이닝을 포수로 소화했고, 수백명의 투수들을 안심시켰으며, 그 기간동안 훌륭한 팀메이트, 훌륭한 포수, 모범적인 가장이자 인간으로 인정을 받았다. Toughest Man Alive 라는 별명은 어쩌면 95마일짜리 공을 맞고 안아픈척 쿨한척 해서 어울리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2015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Old-School 멘탈리티로 무장한 Mike Matheny는 "시대에 맞는 스타일의 리더"로 보이지는 않을 수 있다.  이미 자주 드러낸 바 있지만, 필자는 "Playing the game the right way" 를 무식할 정도로 외치는 선수들에게 어쩔 수 없는 호감을 갖게 된다. 물론 Matheny의 불펜 운용에 육두문자를 내뱉은 적도 있지만 이 양반의 리더십에 감탄한 적도 생각보다 많다. 개인의 취향에 맞는지 여부를 떠나서, Matheny가 Natural-born 리더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 않나 싶다.

“The job of a catcher is often undervalued as to the success he brings to the team as a whole; it’s constant managing. People talk about why so many catchers are managers. That’s because they’re managing people. Catchers are managing not just the pitchers, but they’re also managing other position players as well. They’re trying to get everyone on the same page. The best catchers typically do that sort of thing.”                                                                                                      
    - Mike Matheny (9/10/2010, Interview with Anna McDonald, Hardball Times)

Did you know...?

  • 2월 3일, Mike Matheny의 자서전 Matheny Manifesto가 출시된다. 요새 출판 행사 때문에 정신이 없는 것 같다.
  • Brewers는 1993년부터 "Mitch Harris Award"라는 상을 제정, 구단 내에서 가장 사회 봉사에 이바지한 선수를 특별히 표창했다. Brewers 팀내에서 주는 일종의 소규모 Roberto Clemente 상이라고 봐도 무난할만큼 비슷한 상이다. 1996년 Brewers는 26세의 백업포수 Matheny를 수상자로 정했다. 
  • 2003년, 존경받던 베테랑 투수 Darryl Kile의 안타까운 요절을 기리고자 Cardinals/Astros에서 Darryl Kile Award를 제정했다. 이 상은 그 해의 "a good teammate, a great friend, a fine father and a humble man" 에게 주어지는데, 이 상의 첫번째 수상자는 Mike Matheny였다. 
  • 2005년 말, Giants에서는 구단 내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타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는 (Inspirational) 사람에게 주는 Willie McGee Award 수상자로 Mike Matheny를 정했다. Giants 유니폼을 입은 첫 해에 이 상을 수상한 인물은 Matheny가 처음이고, 당분간 이런 케이스는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 3개의 다른 구단에서 각각 Performance 가 아닌 Character로 표창을 받는 선수는 Matheny가 처음이 아닐까 싶다.


by Doovy



Sources: SI, ESPN, MLB.com, Baseball-reference, Fangraphs, STL Post dispatch, LA Times, Baseball-almanac, Viva El Birdos, The Michigan Daily, The Hardball Times, Dallas Morning News



  1. Bud Maddaugh는 Michigan 감독직을 10년간 지켰는데, 이 기간동안 올린 성적이 무려 465승 146패, 승률이 .761에 달한다. Big-10 Conference에서 이렇게 장기간 집권하는 것은 종목을 가리지 않고 어려운 일이다. [본문으로]
  2. 고등학생 Matheny는 당시 General Manager가 "단장" 이 아닌 "팀 장비 관리자" 쯤 되는 줄 알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또한 남편 Matheny를 있게 하는 계기도 되는데, Gillick과의 통화 때문에 수업을 늦게 들어가게 되면서 현재 부인인 Kristen을 만나게 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본문으로]
  4. Middaugh 감독은 Matheny 아버지의 우람한 체구를 보고 "저걸 보면 아들녀석도 확실히 더 클 수 있다" 는 생각에 장학금을 제시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Freehan 본인도 Michigan을 나왔으며, 대학 시절 All-American Catcher 로 선정되기도 했었던 엘리트 포수이다. [본문으로]
  6. "If you’re going to be in this game for a long time, even after your playing days, you need to change all your electives to learning Spanish." [본문으로]
  7. 결국 Spanish 부전공으로 졸업. [본문으로]
  8. 이 라운드에서는 Jason Schmidt, Derek Lowe, Steve Trachsel 등 훗날 꽤 성공적인 커리어를 밟게되는 투수들이 많았다. [본문으로]
  9. 골드 글러브를 4회 이상 받은 포수는 Mike Matheny를 포함해 역대 9명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중 Matheny를 가르친 포수가 2명 (Bill Freehan, Del Crandall), Matheny가 가르친 포수가 1명 (Yaider Molina) 이다. [본문으로]
  10. 7:1 승리, Kile 6IP 2H 1ER, Matheny 2-for-4 [본문으로]
  11. Matheny의 통산 득점권 타율은 .270,OPS는 .752으로 비득점권 타율 .232에 비해 훨씬 높은 수치이다. [본문으로]
  12. Matheny 말고 다른 2명은 Phillies의 포수 Buddy Rosar (1946) 와 Marlins 역사상 최고의 포수였던 Charles Johnson (1997) 뿐이다. [본문으로]
  13. 다른 7명은 각각 Mike Piazza, Jason Kendall, Pudge Rodriguez, Brad Ausmus, Dan Wilson, 그리고 Jorge Posada 뿐이다. [본문으로]
  14. 잘 모르는 선수라서 찾아봤는데, 통산 200경기에 넘게 등판해서 BB/9이 5.0에 달한다. 2002년에는 Cardinals 마이너에서 잠시 뛰었었다. [본문으로]
  15. 다음 타자 Jose Valentin이 Walk-off 2-run single을 치면서 Matheny의 희생이 승리를 불러왔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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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ovy

결국 이번 오프시즌도 우리의 바램과는 달리 (?) Jason Heyward 트레이드로 초반에 결론이 나버렸고, 엘리트 Front-liner 를 물어온다는 루머가 떠돌고 있지만 일단 당장 심심한게 사실이다. 예전에 주인장님이 한 번 말씀하셨듯, "팔 추억이라도 많은게 어딘가."  그래서 TLR 시리즈 "외전" 을 준비해보았다. 이 시리즈도 3년째쯤 되니 이제 슬슬 팔 추억이 줄어들고 있어서 올해는 평년처럼 9편씩 물량이 나오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새로운 시리즈 기획 전까지 Stopgap으로 쓸 만큼은 남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번 편에서는 Hittability의 아이콘이자 Mediocrity의 상징, 그리고 무엇보다 2006 NLCS의 히어로, "Soup" Jeff Suppan 을 돌아보도록 한다.

 


Jeffrey 'Soup' Suppan

RHP (Starter)

DOB: 1975년 1월 2일

Birth: Oklahoma City, Oklahoma

Time with Cardinals: 2004-2006, 2010


Draft and Minors

Oklahoma에서 태어났지만 LA 근교에서 자랐던 Jeff Suppan은 "캘리포니아에서 자란 독실한 백인 카톨릭 가족"이라는 색깔있는 배경을 가졌다. 아버지가 관제탑에서 비행기 이착륙을 관리하는 Air Controller였었으며, 나중에는 프랑스 식당에서 부주방장 (Sous-chef) 을 했었는데, 이 때문에 고교시절부터 Suppan은 식당에 가서 설겆이와 각종 부엌 잡일을 돕는 것을 "즐겼다" 고 한다. Suppan의 All-boys 카톨릭 학교에서 고교 시절을 보냈고, 지역 신문사에서 새벽에 알바를 뛰었으며, 신앙의 힘을 늘 야구에 접목시키며 던졌다. 건전해도 이렇게 건전할 수 없다. 그의 종교, 그리고 요식업에 대한 부분은 포스팅 막판에 다시 다루도록 하겠다.

커리어 내내 Meatball을 던지는 것으로 알려져있긴 하지만, Suppan은 커리어 초기 상당히 유망한 투수였다. 그는 엄청난 양의 탤런트 (i.e. A-Rod, Torii Hunter, Scott Rolen 등) 가 무더기로 쏟아져나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1993년 드래프트에서 Red Sox에게 무려 2라운드 전체 49번으로 뽑혔다. 당시 고졸 야수들 중 최고 엘리트로 꼽혔던 Scott Rolen이 전체 46번, Matt Clement가 3라운더 였던 걸 생각하면 Suppan이 생각보다 Highly-touted 유망주였던 것은 분명하다. 일단 어린 고졸 유망주들을 보면 환장을 하던 당시 Sox 프론트오피스의 성향도 한몫했겠지만, 그래도 Suppan에게서 어느정도 포텐셜을 보았기 때문에 2라운드에서 채간 것이다. 

Soup's Minor League Track Record (1993-1997) 

YearAgeTmLgLevWLERAGSIPHRERHRBBSOBFWHIPBB9SO9SO/W
199318Red SoxGULFRk432.18957.2522014016642391.1792.510.04.00
199419SarasotaFLORA+1373.2627174.0153746310501737121.1672.68.93.46
199520TrentonELAA622.361599.0863526526884091.1312.48.03.38
199520PawtucketILAAA235.32745.250292799321911.2921.86.33.56
199621PawtucketILAAA1063.2222145.1130665216251425931.0671.58.85.68
199722PawtucketILAAA513.71960.2512625715402391.0882.25.92.67

AA볼 (1995년 Trenton) 까지의 Suppan의 성적을 보시면 정말 어디갖다놔도 부럽지 않은 성적이다. 전혀 어려움없이 마이너리그 레벨을 하나 둘 제패하고 올라오다보니 95시즌 말미에는 고졸 투수가 2년만에 AAA에 올라와 있었다. 당시 Suppan의 나이는 만 20세로, IL 리그 평균보다 무려 6.6세가 어렸다. 그러고보니 우리도 만 20살짜리 투수가 몇 년 전 AA볼에서 탁월한 성적을 낸 적이 있었다. 누구더라?


Shelby Miller : ERA 2.70, 16G 86.2IP 33BB 89SO, Whip 1.21, 9.0 K/9, SO/BB 2.70 (2011년 AA Springfield)

 Jeff Suppan  : ERA 2.38, 15G    99IP 26BB 88SO, Whip 1.13, 8.0 K/9, SO/BB 3.38 (1995년 AA Trenton)

물론 Suppan이 당시 소속이던 Trenton Thunder의 홈구장 Arm & Hammer Park는 극단적인 투수 구장[각주:1]이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그래도 Hittability의 아이콘 Suppan이 마이너에서 이 정도였다니, 꽤 신선하지 않은가. 이 활약을 바탕으로 Suppan은 BA 선정 전미 유망주 35위로 발돋움했다. 그리고 Red Sox는 이례적으로 고작 20.5세에 불과한 Suppan을 7월 중순에 빅 리그에 데뷔시켰는데, 나름 일찍 승격된 편인 Carlos Martinez가 21.2세에 데뷔를 했으니 이 정도면 상당히 파격적인 승격이다.



AAA Pawtucket에서는 상당히 안정적이었으나 빅 리그에 올라가기만 하면 두들겨 맞았던 Suppan은 Red Sox에서의 첫 3년간 157.2이닝 평균자책 5.99의 볼품없는 성적을 냈다. 기회를 안줬다고도 할 수가 없었다. 빅 리그 3년차이던 1997시즌에는 팀 5선발로 22경기에나 출장을 했었는데, 9이닝당 피안타수가 11개가 넘었으며, 투구수 관리가 전혀 돼지가 않아 고작 110이닝 정도를 먹는데 그쳤다. 지극히 평범하게 생긴 인상의 우완 투수가 마치 "나도 던질 수 있을 것 같은" 수준의 패스트볼을 던지고 두들겨맞으니까 금세 조롱의 타겟이 되었다. 당연히 Red Sox는 1998년 Expansion Draft를 앞두고 보호선수 명단에 Suppan을 올리지 않았다.

물론 Upside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97시즌 Suppan의 FIP는 4.37로 ERA에 비해 훨씬 낮았고, 극악의 타고투저 현상 속에서 Suppan의 성적은 조정방어율로 82였다. Ceiling은 "유망주"로 불리기엔 턱없이 낮았지만, 그래도 아직 젊었고, 딜리버리가 안정적이었다. 세부스탯을 들여다보면 고작 2.9 BB/9, 5.4 K/9, Whip 1.57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부상경력이 없어서 건강했으며 늘 등판할 준비가 (Available) 되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하위팀의 25인 로스터 자리는 아깝지 않았다. 

많이 두들겨맞긴 했지만 Suppan은 Red Sox AAA레벨에서 3년간 250이닝을 소화했으며, ML에서 159이닝으로 도합 3년간 400이닝을 넘게 던졌다. 투구수 관리만 돼면 이 정도 이닝 이터의 자질은 보여준 셈이었기에 신생팀 D-Backs가 Expansion Draft 에서 선뜻 Suppan을 3순위로 지명했다. Bobby Abreu를 뽑을 수 있었는데도 Suppan을 지명한 것이다.  


1998-2002년: Royals의 소년가장

1998년 9월초, D-Backs는 끔찍한 시즌을 보내고 있던 Suppan을 마치 거추장스러운 짐을 치우듯 Mets로 보냈다[각주:2]. Mets에서는 Suppan에게 유니폼조차 맞춰주지 않는 무성의함을 보이다가 며칠 후 바로 Royals로 보내버렸다. 워낙 선발투수가 급했던 Royals는 시즌이 끝나기전에 Suppan에게 선발 등판 기회를 주었고, Suppan은 White Sox를 6이닝 4피안타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면서 시즌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이듬해 Suppan은 Kevin Appier-Jose Rosado에 이은 3선발로 시즌을 시작했다[각주:3]

Royals의 궁색한 선발진은 Suppan에게 무궁무진한 기회를 주었다. 굉장히 얄팍한 전력을 자랑하던 Royals는 그나마도 제대로 발휘를 못하고 5월 이후 5할 승률에서 멀어졌으며, 이렇게 팀이 삽질을 할수록 "무슨 일이 있어도 등판을 거르지 않는" Suppan의 입지는 탄탄해졌다. 그는 1999년부터 2002년까지 4년간 Royals 로테이션을 꾸준히 지키며 매년 200이닝, 33경기 이상 선발 등판을 소화하고 bWAR 10.0, fWAR 10.6 을 적립했다. 이 기간동안 무려 852이닝을 소화했는데, 이는 같은 기간 리그 전체에서 7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물론 그 기간동안 평균자책은 4.75에 달했는데, 이럼에도 불구하고 4시즌 중 3시즌에서 조정방어율 100 이상을 기록했다. 스테로이드 시대였던 당시, 심한 타고투저로 경기당 득점이 높아졌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2000시즌 리그 평균 ERA 4.91)


폐허가 된 Kansas City 마운드에서 Suppan은 "가장 꾸준하고, 그랬기에 가장 많이 이기는" 투수였다. 4선발짜리 투수한테 스태프 에이스를 맡긴 상황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허약한 레퍼토리와 전반적으로 허접한 stuff는 어떻게 보완할 수가 없었다. Suppan의 메인 레퍼토리는 90~91마일대의 극히 평범한 패스트볼과 비교적 각이 괜찮은 커브, 써드 피치로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을 장착하고 있었는데 사실 큰 의미는 없었다. 제구가 잘되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이닝을 많이 먹기는 했지만 그건 등판을 거르지 않아서 그런거였고, Suppan은 결코 스태미너가 좋은 투수는 아니었다. 75구를 넘어가고 나서 커브의 각이 크게 떨어진다는 평이 마이너 시절부터 그를 따라다녔으며, 5회쯤 되면 그의 밋밋한 패스트볼은 타자들에게 좋은 먹잇감이었다, 써드 피치가 제대로 된게 없으니 로케이션에 엄청 신경을 쓰지 않으면 장타를 맞기 일쑤였다. 아니, 로케이션에 신경을 아무리 써도 장타를 맞기 일쑤였다. 이쯤에서 2001시즌이 끝나고 나온 Scouting Report의 평을 들어보자.

One of baseball's most consistent pitchers, Suppan is good for six innings before leaving while his team still has a chance to win. He almost never gets blown out of any game. Still, as long as he pitches in the No.1 Spot, Suppan won't be a big winner. He would suit a better team well as a fourth starter.

-Scouting Report 2002, on Jeff Suppan


2003년: Epstein의 퍼즐

2003년 초, Royals와의 계약이 종료되고 Suppan은 Pirates와 1년짜리 계약을 맺고 NL로 옮겨갔는데, 이건 좋은 선택이었다. 투수에게 유리한 홈 구장으로 쓰면서 지명타자가 없는 라인업을 상대하게 되자, 어차피 적당히 맞아가면서 버티는 스타일이었던 Suppan은 그의 장기인 "버티기" 를 시전할 수 있었다. 당대 최고의 타선 중 하나이던 Rockies를 상대로 무려 129구를 던지며 6안타 완봉을 했고 (6/29), 그 다다음 등판에서는 Brewers 원정에서 무려 133구를 던지고 3피홈런을 맞으면서도 9이닝 4실점 완투승을 따냈다. 이어서 7월 28일에는 St. Louis 원정에서는 9이닝 7피안타 완봉승. 무려 3차례의 완투를 통해 Suppan의 가치는 극에 달했고, 트레이드 데드라인을 앞두고 5할에서 8게임을 뒤지고 있던 (47-55) Pirates는 나름 "Sell-high" 를 노리고 Suppan을 매물로 올렸다.

당시 새파랗게 어린 나이로 단장 자리에 올라 첫 시즌을 보내고 있던 Theo Epstein은 트레이드 데드라인을 앞두고 1게임차로 치고받던 Yankees와 디비전 레이스를 버텨내줄 투수가 더 필요했다. 데드라인을 앞두고 Theo는 Anastacio Martinez, Brandon Lyon을 내주고 Pirates로부터 당시 리그 정상급 좌완 셋업맨으로 평가받던 Scott Sauerback, Mike Gonzalez를 영입하는 딜을 완료했다.


Sox 측에서 내준 Anastacio Martinez는 그다지 특별할게 없는 25세 도미니카 출신 우완 투수라는 프로필의 투수로, 당시 AAA레벨에서 ERA 1.93, K/9 9.6으로 상당히 좋은 시즌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전 하위 마이너에서의 트랙 레코드가 구린 편이어서 갑작스런 AAA에서의 약진은 (그것도 14이닝의 적은 샘플 사이즈) 큰 의미가 없었고, 잘 커봤자 low-leverage Reliever 정도 프로젝션이었기 때문에 Sox 입장에서는 전혀 아쉬운 선수가 아니었다. Brandon Lyon 역시 그래봤자 전형적인 스윙맨 프로필이었다. 

반면 Scott Sauerbeck은 굉장히 기대해볼만한 선수였다. 1999년 갑자기 어디선가 툭 튀어나온 Sauerbeck은 까다롭고 Deceptive한 딜리버리와 굉장히 각이 큰 커브를 구사했으며, 당시 Pittsburgh 불펜에서 몇 안돼는 소위 "Lights-out" 릴리버였다. 클로저도 아니었으면서 데뷔 후 첫 4시즌 중 2.0WAR (bWAR 기준) 이상을 2시즌이나 기록했으니 기대를 걸어봄직한 젊은 Future Closer 재목이었던 것이다. Red Sox의 포스트시즌을 염두에 두고 Win-now 모드로 진행한 이 트레이드만 놓고 보면 Epstein의 무브는 (결과론은 배제하고)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Pirates측에서 메디컬 테스트 이후 Brandon Lyon의 오른쪽 팔꿈치 인대 손상 (frayed elbow ligament) 을 발견하고 Red Sox 측에게 트레이드를 물러줄 것을 요청했다. 이후 Pirates는 Lyon과 Martinez를 둘 다 Boston 으로 돌려보냈는데, Red Sox 프론트는 새로 영입된 선수들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당시 언론에서 "걍 이렇게 남의 투수들을 데리고 있어도 되는거냐?" 고 묻자 Epstein은 "안될 껀 또 뭐 있나. 필요하면 그때 피츠버그랑 얘기해보겠다" 면서 배짱을 피웠다 (``I have no reason to think otherwise. If the need arises I'm sure we'll work with Pittsburgh to work this out.)  그리고 이후 말이 많자 1차 트레이드의 가장 핵심인물이었던 Sauerbeck은 쏙 빼놓고 곁가지였던 Mike Gonzalez만 돌려보냈다. 


선수 한 명을 잃어버린 꼴이 되자 당연히 Pirates GM Dave Littlefield는 반발했고, Epstein이 끝까지 Sauerbeck을 물고 놓치지 않으면서 데드라인을 3일 앞둔 28일 새벽 1시 반까지 협상에 진전이 없었다. 결국 다음 날 아침, Epstein은 당시 Sox 팜에서 촉망받던 유망주이던 Freddy Sanchez (당시 Sanchez는 25세였으며, AAA Pawtucket에서 무려 .341/.430/.493을 치고 있었다)를 내주기로 하는 대신, Jeff Suppan을 받아오면서 트레이드가 완성되었다.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물만 보면 이 트레이드는 "Scott Sauerbeck + Jeff Suppan <==> Freddy Sanchez + 극소량의 현금" 이었던 것이다. 트레이드 당사자였던 Sauerbeck은 "사실상 선수 하나를 그냥 훔쳐온 셈이다. 나는 한 100원에 정도에 팔린 듯 하다" (`Basically, you just stole a player for nothing. I think they got me for 10 cents'') 고 말했다.[각주:4] 


``Brandon was always a healthy pitcher for us and available to pitch every single day we had him and, according to our medical staff, was healthy the whole time. There's not a legal obligation, but depending on what's shown, if we feel there's something that needs to be done to treat Pittsburgh fairly, we'll do it. There may be an ethical obligation depending on what the facts show. But Brandon Lyon was a healthy pitcher with us, otherwise we wouldn't have traded him.''

-Theo Epstein, on Brandon Lyon's elbow 

(Hartford Courant 발췌, 07/26/2003)


Suppan의 Red Sox 복귀는 사실 Suppan 본인에게나, Boston 팬들에게나 그다지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AL East에서 Suppan처럼 특징없는 투수는 말리게 마련이었으며, Suppan도 극성스럽고 졸렬한 Sox 팬들 앞에서 홈런을 맞는 것을 즐기지 않았고, 홈구장 Fenway는 더더욱 싫어했다. Suppan은 Red Sox로 복귀한 첫 경기에서 Angels타선에 홈런 3방을 허용하며 5이닝 7피안타 7실점으로 파운딩을 당했고, 그 다음 경기에서도 5점을 내줬다. 

Pirates 유니폼을 입은 마지막 8경기 (팀 7승1패) 에서 61.2이닝을 소화하며 (3완투 포함) 평균자책 2.63을 기록하며 한창 가치가 높던 Suppan의 Sox 이적 후 성적은 ERA 5.57, 63이닝 12피홈런, .281/.335/.538. 당초 Suppan이 영입 되었을 때 Royals 시절 동료였던 Johnny Damon 을 비롯해 여러 선수들이 Suppan의 가세를 반겼으나, 포스트시즌이 시작되었을 무렵 Suppan은 공식적으로나 Sox 클럽하우스에서나 이미 전력 외로 분류되어 있었다. 


욕먹어가면서 힘들게 영입한 Sauerback과 Suppan이 나란히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Sox가 내준 Freddy Sanchez가 곧이어 NL 타격왕에 오르면서 이 트레이드는 Epstein의 커리어 초기 최악의 무브로 손꼽힌다. 그러나 Dave Littlefield를 딱히 승자라고 보기도 힘든게, 멍청하게 자기 선수를 보호하지도 못하면서 완전히 사기당할뻔 하다가 운좋게 얻어걸린 Sanchez가 터진 덕에 조금 덜 욕을 먹게된 것이다. Dave Littlefield 의 흑역사에서 이 정도의 삽질은 귀여운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2004년: Cardinals 입단

2003시즌 후 Suppan은 다시 FA 시장으로 나왔지만, Red Sox에서 끔찍한 후반기를 보낸 덕에 그다지 인기가 있지 않았다. 어차피 Suppan은 "잘해야 4선발" 로 분류되었고, 냉정하게 말해서 "Upside가 거의 없는 투수" 였기 때문에 "투수가 급한 팀"이 아니면 굳이 애써 데려올 필요가 없었다. 당시 정규시즌 내내 Kiko Calero, Jeff Fassero 등을 로테이션에 끼워넣어 쓰며 투수진이 난장판이 되어버린 Cardinals는 당시 정확하게 "투수가 급한 팀"이었고, 등판을 거르지 않고 꾸준히 경기를 나서줄 인력이 필요했다. 

2003년 12월 18일, Jocketty는 Suppan에게 2년간 5M (+3년째 팀옵션 4M) 짜리 계약을 안겨주었다. Jocketty가 원했던 스탯은 Suppan의 훈장과도 같은 "5년 연속 200이닝," 딱 그거 하나 뿐이었고, 그의 허접한 Whip이나 안쓰러운 피안타율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이후 3년간, Suppan은 Quantity 뿐 아니라 (누구도 그에게 기대하지 않던) Quality까지 제공하면서 이 계약을 Steal로 만들어버렸다. 

Jeff Suppan in St. Louis (2004-2006)

YearAgeWLERAGSIPHRERHRBBSOERA+FIPWHIPH9HR9BB9SO9
2004291694.1631188.0192988725651101024.771.3679.21.23.15.3
20053016103.5732194.1206937724631141194.531.3849.51.12.95.3
2006311274.1232190.02071008721691041084.701.4539.81.03.34.9

Woody Williams에게서 커터를 장착시키고 크게 재미를 봤던 Dunc와 TLR은 Suppan이 팀에 들어오자 망설임 없이 커터로 이 특징없는 투수를 튜닝했다. 이후 3년간 Suppan의 성적은 본인의 커리어에서 최고 수준이었으며, 3년간 무려 44승을 올렸다. 그런데 이 기간동안 Suppan이 적립한 WAR는 3년간 4.6, 연평균 1.5 수준에 불과하다. 이는 Royals에서 소년가장 역할을 하던 시절에 비하면 훨씬 적은 수치이다. 이쯤되면 궁금해지는게, Suppan의 전성기는 Cardinals에서가 아니던가? 일단 표면적인 성적만 봐도 훨씬 나아보이지 않는가?

Jeff Suppan: pre-Dunc vs. post-Dunc

 

 1995 - 2003

 2004 - 2006 

 H/9

 9.9

 9.5

 HR/9

 1.2

 1.1

 BB/SO

 1.73

 1.67

 GB% 

 44.7%

  47%

 HR/FB

 11.9%

  11.7%

 ERA (FIP)

 4.90 (4.80)

 3.95 (4.67)

특징없는 투수들의 성적이 "팀/환경과의 궁합"에 훨씬 쉽게 좌지우지 된다는 것은 Suppan을 보면 가장 쉽게 설명이 된다. 

Suppan이 커터를 장착하고 조금 더 효율적인 투수가 된 것은 맞다. GB%가 약간 늘어났고, 피홈런이 약간 줄었으며, 전반적인 세부 스탯의 향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Woody의 케이스처럼 갑자기 "커터 마스터" 로 환골탈태를 한 게 아니라, 고만고만한 레퍼토리에 고만고만한 무기를 하나 더 장착했을 뿐인 것이다[각주:5]. 피안타율과 BB/SO 비율이 아주 살짝 나아지긴 했지만 저것도 AL에서 NL로 옮겨온 투수라는 걸 생각하면 전혀 인상적이지 않다.

Suppan은 이제 점차 리그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Flyball-Finesse 스타일의 투수이다. 땅볼 유도 구질이 딱히 없어서 철저히 완급 조절에 의지해야하기 때문에 야수의 도움이 절대적이다. Suppan이 뛸 당시 1999~2002년 Royals 수비진은 팀의 전반적으로  허접했던 전력을 생각하면 (4년간 연평균 67승을 한 팀이다) 사실 나쁜 수비진은 아니었다. 유격수 Rey Sanchez는 dWAR로만 3년간 8WAR 가까이 적립한 수비형 유격수였고, 3루수 Joe Randa와 Jermaine Dye도 수비로 크게 욕을 먹지는 않았으며, 무릎이 건강했던 당시 중견수 Carlos Beltran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2004~2005 Cardinals의 황금 내야진 + 센터 Jim Edmonds 는 Royals와 클래스가 다른 수비를 제공했다. "유격수같은 3루수" Rolen과 Renteria가 뒤에 받치고 있자 Suppan의 실점률은 급히 떨어졌고, 결국 위 표에서 보시듯 "FIP와 ERA의 괴리"만 엄청나게 확장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Suppan이 능력 이상의 성적을 낸 데에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Dunc의 조련" 혹은 "신구질 개발" 의 역할은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어떤 스탯으로 보나 Cardinals에 와서도 Suppan은 예전과 거의 비슷한 투수였으며, 화려한 야수들의 도움과 강력한 팀 전력의 힘을 입어 능력 이상의 성적이 나왔을 뿐이다. 키스톤이 당초 Renteria - Womack에서 Eckstein-Miles로 바뀐 후 Suppan의 H/9이 9.2 --> 9.8 까지 올랐다는 점, 그리고 Suppan의 Cardinals에서 보낸 시즌이 투수의 전성기인 29~31세 시즌이었음을 기억하자. 


Suppan in October - 2004 Postseason

Suppan을 St. Louis 시절이 유난히 성공적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이렇게 Hittable한 투수가" 포스트시즌에서 능력 이상의 활약을 했기 때문이다. 2004년 가을 당시 Suppan은 16승으로 팀내 최다승을 거두긴 했지만 후반기 평균자책점이 무려 5.23에 이르렀고 (전반기 3.33), 특히 9월 한 달간 피슬래시가 .296/.373/.496 에 달했다. 등판을 거르지는 않았으나 Suppan이 투구수가 늘어날 수록 배팅볼 머신이 된다는 점은 모두들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Suppan의 흑마술은 가을용이었다. DS 4차전에서 Dodgers 타선을 7IP 2H 2ER 3K로 누르며 본인의 첫 포스트시즌 등판에서 승리투수가 되었는데, 경기 초반 피홈런으로 빠른 실점 후 플라이볼과 야수정면 라인드라이브 아웃 위주로 (12개)를 잡아내는 모습은 보는 사람을 굉장히 불안하게 했다.

2004 NLCS 3차전, ESPN에서 "Apparent Mismatch" 로 표현한 이 매치업에서 Suppan은 300승 투수 Roger Clemens와 통산 4번째 맞대결을 펼쳤다. 1회 첫 5타자를 상대로 안타-볼넷-병살-안타-홈런으로 완전 말릴뻔한 상황을 모면한 Suppan은 마지막 고비였던 Morgan Ensberg를 중견수 플라이로 잡아냈다. 3회에도 안타를 3개나 맞으면서 2사 만루 위기에 몰렸지만 또 Morgan Ensberg를 중견수 플라이로 잡아냈다. 이 경기에서 Suppan은 중견수 쪽으로 뜬공과 라인드라이브를 무려 6개나 허용했는데, 이 중 5개를 고비마다 Edmonds가 잡아내면서 어찌어찌 QS를 해냈다.

NLCS 7차전, 통산 Clemens와의 매치업 0승 4패에 빛나는 Suppan이 또 마운드에 올랐다. 리드오프 Biggio에게 4구만에 통렬한 홈런을 맞으면서 찝찝하게 시작했으나 사실 Suppan은 이런 경기가 너무 익숙했다. 2회초, 아직 정신을 못차린 Suppan은 1사 1,2루에서 Brad Ausmus에게 좌중간을 완전히 가르는 타구를 얻어맞는다. 그리고 역대 NLCS 최고의 캐치로 남아있는 바로 그 장면이 이어진다. (Edmond 2004 NLCS Game 7 Catch 링크) 이 캐치 이후 NLCS 7차전의 분위기는 홈팀 St. Louis쪽으로 넘어왔다.  

Edmonds의 말도 안돼는 캐치 이후 Suppan은 점차 안정을 찾더니 3회 1사 3루 기회에서 깔끔한 스퀴즈번트로 경기를 팀에게 2:1 리드를 선사했다. 그리고 늘 하던대로 GB 3개, FB 12개의 극단적인 비율로 아웃카운트를 잡아냈으며, 결국 Clemens와의 5번째 듀얼에서 승리투수가 되었다. 그 어떤 면으로도 Clemens와 비교할 수 없는 투수가 Suppan이지만, 그의 장기인 "버티기"를 시전하다보니 1승이 나올 때가 된 것이었다. 7차전에서 Suppan이 보여준 퍼포먼스 덕에 TLR은 커리어 최초로 NLCS 시리즈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전까지 0승 3패), 이후 Suppan에 대한 신뢰가 더욱 두터워졌다.

Suppan in October - 2006 Postseason

선수생활 내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일이 없던 Suppan에게도 볕들날이 있었으니, 2006년 NLCS에서 갑자기 흑마술이 절정에 달한 것이었다. 원정에서 스플릿을 거두고 홈으로 돌아온 첫 경기, 시리즈 3차전에서 Steve Trachsel을 상대한 Suppan은 2회 선두타자로 나서 솔로 홈런을 치며 Trachsel에게 단단히 망신을 줬고, 이후 8IP 3H 0R 1BB 4K라는 어마어마한 피칭을 했다. Suppan이 이 경기에서 기록한 게임스코어 79점은 그가 Cardinals 유니폼을 입고 던진 모든 경기를 통틀어서 2번째로 높은 점수인데[각주:6], 하필 그 경기가 Underdog으로 치르고 있던 NLCS 3차전에서 나온 것이다. 이 정도면 뭐 거의 개기월식 수준이다.

     "That was one of the real key turning points of the game because Supp kept his composure, made great pitches and got out of it. The game could have gotten away right there. You have a combination of Chavez's catch, they capitalize on the Rolen error, and with their bullpen ... but it didn't happen."                                                                                                                                                    

 - Tony La Russa, on Suppan's 6th Inning in Game 7

NLCS 7차전, 이번에는 원정에서 Oliver Perez를 상대하게 된 Suppan은 1회 David Wright에게 적시타를 허용한 이후 쭉 순항하며 1:1 스코어로 Perez와 Pitcher's duel을 펼쳤다. 보통 이런 경기는 홈팀이 어느정도 엣지를 가지게 마련인데, 6회말 1사 1루에서 David Wright 의 3루 땅볼을 잡은 Scott Rolen이 1루 관중석에다 송구를 뿌리면서 경기가 순식간에 홈팀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타석에는 Shawn Green-Jose Valentin-Endy Chavez 등 3명의 좌타자가 (Valentin은 스위치) 잇따라 들어섰고, 정규시즌에서 좌타자들 상대로 피안타율이 3할이 넘었던 Suppan은 Green을 거르고 만루를 만들었다. 이쯤에서 Randy Flores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TLR은 그 때까지 잘 던지고 있던 Soup에게 그냥 경기를 맡겼다.

당시 Jose Valentin 은 Suppan을 상대로 통산 4홈런 9타점으로 굉장히 강했으며, 봉사 수준의 선구안을 가졌고 브레이킹볼에 명백한 약점이 있던 내야수였다. Soup은 2스트라이크를 잡아놓고 5구째를 본인의 가장 자신있는 변화구인 Curve in the dirt 를 던졌는데, 팔팔한 천재포수 Yadi의 블로킹 능력일 믿지 못했다면 절대 만루에서 나올 수 없는 구질 선택이었다. Valentin이 이 공에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나면서 갑자기 Mets 측에는 불안감이 엄습했고, Endy Chavez의 타구가 센터 쪽으로 뜨는 순간 양쪽의 희비가 엇갈렸다. 평범함의 상징 Jeff Suppan이 자신의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X줄타는 High-Leverage 상황을 무실점으로 모면하며 전국구 Spotlight 아래서 마음껏 Flair를 발산하는 순간하는 아름다운 순간이다. 

"“When you’ve got a guy like Soup, a smart pitcher, it’s easy to get through something like that. I remember that inning. That inning stays with you forever. He did his part. Now it was our turn to help.”                                                                                                          - Yadier Molina, on Suppan's 6th Inning in NLCS Game 7                                                                                                             (Interview with Derrick Goold on St. Louis Post Dispatch)



2007-2010: Brewers와의 안좋은 인연

2006시즌이 끝나고 Suppan이 다시 FA가 되었을 때, Cardinals는 포스트시즌에서의 활약으로 가치에 크게 거품이 껴있던 Suppan을 굳이 붙잡지 않았다. 투수들 가격이 마구 올라가기 시작하던 이 무렵, 결국 Suppan은 Brewers로부터 Back-loaded된 4년간 40M짜리 계약을 받는 대박을 쳤다. 계약 첫 해인 2007년에는 오랜만에 200이닝을 넘기면서 bWAR 1.9 짜리 괜찮은 시즌을 보냈으나, 2008년초 모친상을 당하고 부상이 겹치면서 FIP 5.51로 난타를 당했고, 그 이후에도 전혀 반등하지 못하면서 2.5년간 bWAR -.2.7을 적립했다. 포스트시즌에서 흑마술을 보여준 것에 반해서 데려왔는데, 정작 2008년 NLDS 마지막 경기에 Suppan은 Phillies 타선을 상대로 3이닝을 채 넘기지 못하고 홈런 3방을 맞으면서 붕괴했다. Suppan의 능력과 한계점을 모두 알고 있는 입장에서, 당시 시리즈를 보면서 "왜 쟤네는 시즌 마지막 게임이 될 수 있는 경기에 Gallardo를 넣지않고 Suppan을 등판시켰나" 하면서 의아해했던 생각이 난다. 

더욱 밀워키의 염장을 질렀던 것은 계약 이후이다. Brewers에서 팀에 득보단 해가 되었던 투수가, 만신창이가 되서 Cardinals와 계약을 하더니 밥값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2010년 6월, 잔여연봉 10M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내심이 다한 Brewers가 Suppan을 내치자, TLR은 얼씨구나 하면서 곧장 Suppan에게 전화를 걸어 불펜세션을 던져볼 것을 요청했다. Dave Duncan은 불펜세션을 지켜보고 "딜리버리 과정에서 약간 투구 메카닉적인 문제가 있는데, 저걸 고치면 쓸만할 것 같다" 며 OK를 주었고, 중고차를 사들이듯 Suppan을 다시 데려와 부상에 신음하고 있던 선발 로테이션에 투입했다. 

"I think it's very correctable. Sometimes some things happen as a pitcher subtly over time but what they said absolutely made sense. I was very happy with talking with them, then getting out there and throwing."           
                                         

  - Jeff Suppan, after a bullpen session with Dave Duncan (ESPN, 06/12/2010)

Brewers에서는 불펜과 선발을 오가며 ERA 7.84를 기록했던 Suppan은 이적 후 첫 등판에서 4IP 4H 1ER 4K라는 사람같은 피칭을 했고, 7월 18일 Dodgers전에서는 6IP 5H 1ER 으로 퀄리티스타트까지 따냈다. 결국 Suppan은 Cardinals 유니폼을 입고 반 시즌만에 0.3WAR를 적립하고 70이닝을 소화하며 ERA 3.84로 막아냈다. Suppan과의 장기계약에 3년간 고통스러워 했던 Brewers 팬들은 Suppan의 후반기 활약을 보고 분개했으며, "16 most despised Brewers of all time" (역대 제일 싫은 Brewers 선수) 토너먼트에 Suppan을 올려서 Rickie Weeks와 맞붙였다. 

"Soup" as a Catholic

위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Soup은 굉장히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는데, 그냥 단순히 일요일에 성당을 가는 수준이 아니었다. 

2005년 NLCS가 끝나고 11월 초, Suppan은 메이저리그 선수 역대 최초로 교황을 만나러 카톨릭의 성지 Vatican City로 직접 날아갔다. 당시 Suppan은 "Cardinal = 추기경" 이라는 점에 착안, 재치있게 Cardinals 저지에 교황 이름을 새겨서 [각주:7] 선물로 주려고 가져갔다. 공교롭게도 Suppan이 이태리에 도착했을 때 항공사에서 그의 짐을 잃어먹는 바람에 결국 선물을 전달해주지는 못하고, 그냥 Vatican에서 열린 첫 스포츠 컨퍼런스에 참가한 뒤 교황의 반지에 키스를 하는 영광을 누렸다고 한다. 포스트시즌 마운드에서도 그다지 떨지 않았던 Soup은 미국에 돌아온 이후 "이렇게 떨렸던 적은 없었다" 면서 황송해했다.  

"It was emotional for me. I was nervous in a different way. I've never been nervous before. I don't really know how to describe it. It was truly a once-in-a-lifetime experience."                                                                                                                                                                       - Jeff Suppan, after meeting the Pope (11/22/2005, Chicago Tribune)

이뿐 아니고 Catholic Exchange 라는 단체에서 "Champions of Faith"라는 타이틀로 영화를 제작했는데, 당시 빅 리그에서 잘 나가는 선수들 중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을 골라서 그들의 신앙생활을 들춰보자는 취지의 일종의 다큐멘터리/영상물이었다. 이 영화에 Craig Biggio, Mike Piazza 등 진짜 Superstar 들도 출연했는데, Suppan은 팀 동료 David Eckstein과 함께 Baseball Superstar라는 어색한 타이틀을 달고 출연했다.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 Youtube 링크를 여기 걸어드린다.



Soup의 종교 관련 에피소드 하나 더. 월드시리즈가 한창 진행중이면 2006년 10월, Suppan은 당시 Missouri 주의 헌법 수정안 (State Constitution Amendment) 에 반대하는 광고에 선뜻 출연했다. 수정안은 줄기세포 (Stem-cell) 연구와 인간 복제를 합헌하는 내용이었는데, 워낙 예민한 문제라서 찬반 논란이 과열된 상황이었다. "인간 복제에 반대하는 미주리인들" (Missourians against Human Clonings) 이라는 단체에서는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지역 스포츠 팀들의 인기 스타들 중 독실한 카톨릭인 선수들을 모아서 (가령 St. Louis Rams 출신의 쿼터백 Kurt Warner, Royals의 Mike Sweeney) 광고 영상을 찍고 완성본이 이미 나온 상태였는데, 딱 이 무렵에 Soup의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하이라이트였던 2006년 NLCS가 일어났던 것이다. 

83승짜리 팀을 WS로 이끌어준 투수였으니 지역팬들의 지지도는 하늘을 찔렀고, 광고 영상을 TV에 올리려던 제작진은 급히 방향을 선회해 Suppan의 집에 찾아가 촬영 협조를 구했다. 독실한 카톨릭이었던 Soup 은 이 수정안이 부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용의 메세지를 영상으로 남겼고, 이 광고영상은 이후 월드시리즈 내내 지역방송인 Fox Midwest에서 방영이 되었다. (Suppan의 광고 링크

이를 두고 언론에서 TLR에게 "월드시리즈 도중에 이런 정치적인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고 묻자 TLR은 "선수들이 야구를 초월해 다른 방식으로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모습은 보기좋다" 면서 지지했는데, 사실 TLR 본인의 동물 보호 문제에 관한 열정을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다. Suppan의 힘이었을까? 2006년 WS가 끝나고 Poll을 매겨보자 헌법 수정안에 찬성하는 이들의 비율은 전년도 68%에서 51%까지 떨어졌다.[각주:8]


총평 - Control What You Can

총평을 읽기 전에 일단 Suppan 형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보시라. 작년 TLR 시리즈 9편의 주인공 Jason Isringhausen 편에서 Generation K가 얼마나 야구를 못하게 생겼는지에 대해서 재미있는 의견교환이 있었는데, Suppan 이 양반도 야구 참 못하게 생겼다. Jeff Suppan이란 이름을 보고 탈삼진을 잡고 포효하는 장면보다는 피홈런을 허용하고 고개를 젓는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2014년 1월 2일 오후 2시 (Pacific Time) , Suppan은 17년간의 커리어를 접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When you retire, there’s a loss, not just as a player, but from everyone in your family, everyone who watched and rooted for me. I just wanted to give that official ‘it’s over’ for them and for myself. I just wanted to make sure that when my career was over it was over, and I had squeezed everything I could out of it..." 

Sports on Earth의 기자 Will Leitch는 Suppan의 은퇴를 기리면서 쓴 칼럼에서 이 "Squeeze"라는 단어에 주목했다.[각주:9] 

지금까지 스크롤 압박을 이겨내고 이걸 읽어주셨다면 이제쯤은 다 아실 것이다. Suppan은 짜낼 수 (Squeeze) 밖에 없는 투수였다. 그냥 Stuff가 부족한 수준에 그친게 아니고, Upside가 정말 없었다. 확실한 아웃피치가 있던 것도 아니고, 싱커를 구사한 것도 아니다. 제구도 좋은 편은 아니었고, 제구가 안좋으니 이닝을 많이 먹냐면 그것도 아니었다.[각주:10] Deception이 있는 딜리버리가 있던 것도 아니고, 주자 견제도 시원찮았다. 많은 League-Average 투수들이 TLR 시대에 Cardinals를 거침으로써 (혹은 Dunc를 거침으로써) 커리어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는데, 그 투수들과 비교해서도 Suppan은 가장 가진 탤런트가 없는 선수였다.[각주:11]

"....I just wanted to be a hard worker, a good teammate, and take the ball every time. I remember it like it was yesterday when a coach was sitting on the bench with me. We were talking about All-Stars, big-time players, utility players, situational players. He said, ‘Soup, the best ability is availability.’ That always stuck in my head. Make every start.                                                                                                                                                                                                                                       

- Jeff Suppan, Interview with Thomas Hoffarth (L.A Daily News, 01/11/2014)

Suppan은 "Best ability is availability" 라는 마이너 시절 코치의 조언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17년간 실천에 옮겼다. 힘이 닿는 한 잘 던지든, 못 던지든, 던졌다. 그래서 쌓아온 숫자가 417경기 선발 등판. 이는 통산 109위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그리고 그는 이 Availability 라는 탤런트 하나 만으로 감히 상상하기 힘든 규모의 커리어를 쌓았다. 

아래는 Suppan이 커리어 내내 플레이오프에서 상대한 투수들이다. "Apparent Mismatch" 라는 ESPN의 표현이 정말 Clemens 상대로만 어울릴까? 필자가 보기엔 거의 모든 매치업에서 Suppan은 미스매치였다.

Suppan의 역대 플레이오프 매치업

 

 상대 선발

 Suppan 성적

 시리즈 전적

 QS 여부

 2004 NLDS Game 4

 Odalis Perez

 W

 3-1 승리

 O

 2004 NLCS Game 3

 Roger Clemens

 L 

 4-3 승리

 O

 2004 NLCS Game 7

 Roger Clemens

 W

 

 O

 2004 W.S.  Game 1

 Pedro Martinez

L

 0-4 패배

 X

 2005 NLCS Game 4

 Brandon Backe

ND

 2-4 패배

 X

 2006 NLDS Game 3

 Chris Young

 L

 3-0 승리

 X

 2006 NLCS Game 3

 Steve Trachsel

 W

 4-3 승리

 O

 2006 NLCS Game 7

 Oliver Perez

 ND

 

 O

 2006 W.S.  Game 4

 Jeremy Bonderman

 ND

 4-1 승리

 O

 2008 NLDS Game 4

 Joe Blanton

 L

 1-3 패배

 X

 

 

 3-4, 3ND

 5-3

 6QS (10GS)

Jim Edmonds가 없었더라면, Carlos Beltran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Scott Rolen이 없었더라면, Dunc나 TLR이 없었더라면 Suppan이 커리어를 이만큼 이어나갈 수 있었을까? 많은 것이 부족했던 투수 Suppan는 늘 주변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게 받쳐줄 때야만 비로소 효과적일 수 있었다. 

젊은 시절 관제탑에서 비행기 승객들의 안전을 책임졌던 Suppan의 아버지는 "Control what you can, leave the rest up to others"를 Suppan에게 늘 강조했다. 사실 Stuff가 허접한 투수 입장에서는 필드 위에서 Control 할 수 있는 부분이 굉장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데, Suppan은 마운드 위에서 뭘 제어하려는 것에 대한 미련을 일찌감찌 버리고 "Take the ball every 5th day," 5일에 한번씩 등판하기에만 집중했다. 어쩌면 Professional Athlete의 모토라기에는 약간 실망스러울 정도로 소박한 이런 태도는 Suppan에게 꾸준한 자기관리 + 상대 타자에 대한 연구를 하도록 만들었으며, 던지고 던지고 던지다 보니 때때로 Suppan과 비교도 안될만큼 화려한 커리어를 지녔던 선수들이 Suppan에게 기대야 할 순간들이 생겼다. 또 이런 순간들이 쌓이고 쌓이자 2006년 NLCS와도 같은 기적같은 퍼포먼스도 나왔고, Roger Clemens도 Suppan의 Availability 앞에 한 번은 무릎을 꿇었다 (4번을 이겼을지언정). 

"I love this guy. I love him. ... That was not a very good inning, emotionally, for me.”  

-Scott Rolen, on Jeff Suppan after 2006 NLCS Game 7

2010시즌 Cardinals와의 계약이 끝나고 Suppan에게 ML 레벨 계약을 제시하는 팀은 없었다. 시즌이 개막하고 나서야 (4/4/2011) 옛 소속팀 Kansas City가 일종의 보험용으로 Suppan에게 마이너리그 계약을 제시했고, Suppan은 나이 36세 시즌에 생소한 트리플 A 팀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햄버거로 식사를 하게 되었다. Royals 팜에는 Suppan보다 훨씬 재능있는 젊은 투수들이 너무도 많았고, 언제 빅 리그로 콜업이 될 지 전혀 기한이 없었다. 결국 그 시즌, Royals 로스터에는 Suppan을 위한 자리는 나지 않았다. 

이번 2014 포스트시즌, Royals가 오랜만에 가을야구에 나가게 되서 광란의 질주를 하고 있을 무렵 Fox Sports 에서 Suppan에게 옛 친정팀 Royals의 선전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Suppan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I'm pulling for the Royals. I played there in 2011 when I couldn't find a job anywhere. I played the whole year in Triple-A. We won the PCL (Pacific Coast League) Championship there. All those guys in the big leagues now, I played with them in 2011. Hopefully, I had a positive influence on them being a veteran. That's what veterans are supposed to do, pass things down. I wish the best for them."                                                                                                                                                                                    

  - Jeff Suppan, on Royals' postseason run                 

Suppan은 삭막하고 고생스러워보이는 2011 시즌을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다.  

Suppan은 Omaha Storm Chaser 소속으로 28경기에 등판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의 팀이 PCL 정규시즌과 플레이오프를 모두 우승한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빅 리그 17년차 베테랑으로써 이 젊은 Royals의 미래 주역들에게[각주:12]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바라며 열심히 한 시즌을 소화해 낸 것을 기억한다. 땀흘리고 이겼던 것을 기억하고, 동료에게 좋은 팀메이트였던 것을 기억한다. Suppan에게 2011년은 "시즌 내내 마이너에서 썩어야 했던 시즌"이 아닌, "미래의 Royals 주역들과 같이 뛰며 우승했던 시즌"이었던 것이다. 그는 PCL에서 만났던 Royals 코치진들과 팀 동료들과의 인연을 지극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입에 발린 가식처럼 들릴 수도 겠으나, 마음속에서 우러난 겸손함이 없다면 말하기 힘든 내용이다.

 2000년대 투구수 순위 (2000-2009) 

1. Barry Zito

2. Livan Hernandez

3. Javier Vazquez

4. Mark Buerhle

5. C.C. Sabathia

6. Jon Garland

7. Jamie Moyer

8. Carlos Zambrano

9. Derek Lowe

10. Roy Oswalt

11. Jeff Suppan (24,689)


"Soup" as a Restauranteur

늘 요식업계 진출을 꿈꾸던 Suppan은 은퇴 후  LA 근교 San Fernando Valley에다가 소원대로 식당을 차렸다. Soup's Sports Grill 이라는 이 식당에는 Suppan의 커리어를 처음부터 끝까지 돌아볼 수 있는 사진 컬렉션들이 벽에 쫙 걸려있으며, Randy Wolf, Jim Edmonds, David Eckstein 등 Suppan의 옛 동료들이 싸인을 해서 걸어놓은 싸인들이 수두룩하다.  특히 Edmonds의 2004년 캐치 장면 사진에는 Edmonds가 직접 "Jeff, 이건 내 Best Catch니까 잘 보이는데다가 걸어놓게" 라고 적어놓았는데 Suppan이 보란듯이 한쪽 구석에다가 걸어놨다.

Did you know...?

  • Jeff Suppan은 Detroit Tigers 의 옛 홈구장인 Tiger Stadium의 마지막 공식 경기의 선발 투수였다 (1999). 또한, 새로 개장한 Comerica Park에서 Verlander가 첫 노히트를 했을 때도 상대 투수가 Suppan이었다 (06/12/2007).
  • Suppan은 메이저리그에서 통산 2개의 홈런을 (플레이오프 1개, 정규시즌 1개) 기록했는데, 둘 다 Mets의 Steve Trachsel을 상대로 친 것이다. 
  • Suppan의 생일이 1월 2일이며, Suppan의 어머니가 2008년 1월 2일에 돌아가셨다. 이에 Suppan은 2014년 1월 2일 (정확히는 오후 2시, 어머니의 사망 시간) 을 본인의 은퇴 날짜로 정했다.


by Doovy



Sources: SI, ESPN, MLB.com, Baseball-reference, Fangraphs, STL Post dispatch, LA Times, Baseball-almanac, Viva El Birdos, Los Angeles Daily News, Sports on Earth (Will Leitch), 


  1. (Suppan이 홈으로 쓰던 Arm & Hammer Park는 리그 평균을 1로 잡았을 때 득점이 0.902, 홈런이 0.742에 그칠만큼 리그에서 손꼽히는 투수 친화구장이다) [본문으로]
  2. 당시 D-Backs는 Mets에서 베테랑 외야수 Bernard Gilkey를 영입했었는데, 이에 대한 보상으로 Supp을 넘겨준 것이다. [본문으로]
  3. 90년대 말 폐허와도 같았던 Royals 마운드에 혜성처럼 등장했었던 젊은 좌완투수 Jose Rosado를 기억하시는 분이 계시는 지 모르겠다. 아주 잠깐 반짝 했었는데, 다른 건 크게 기억이 안나고 커브가 상당히 좋았었다. 필자는 Jaime Garcia가 부상으로 빌빌거릴 때마다 Rosado를 자주 떠올렸었다. [본문으로]
  4. Sauerbeck은 스스로를 "Curveball-flipping freak"으로 불렀으며, 소속팀 Pirates를 대놓고 까는 등 굉장히 당찬 캐릭터였으나, 트레이드 이후 부상-마이너를 전전하다가 2008년 초라하게 은퇴했다. [본문으로]
  5. Suppan의 커터 Pitch Value로만 봐도 3년간 -0.4 --> +0.3 --> - 0.8 로 득보다는 실이 더 많았다. [본문으로]
  6. 2004년 정규시즌에 한 차례 80점짜리 경기를 한 적이 있을 뿐이다. [본문으로]
  7. 05년 당시 교황이 Benedict 16세였는데, 아마 유니폼에 Benedict 번호 16번 뭐 이렇지 않았을까 하는게 필자의 추측이다. [본문으로]
  8. 결과가 궁금하시다면, 2006년 11월 7일 개표 결과 이 수정안은 통과되었다. [본문으로]
  9. Appreciating Enduring Mediocrity 라는 멋진 제목의 이 칼럼은 꼭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란다. 링크: http://www.sportsonearth.com/article/66286268 [본문으로]
  10. 의외로 Suppan은 Cardinals에서 단 한 번도 200이닝을 넘겨본 적이 없다. Suppan은 Average 투수였으나, Inning-Muncher는 절대 아니었다. [본문으로]
  11. 혹자는 Suppan와 Woody Williams를 비교할 수도 있는데, 택도 없는 소리다. Woody는 커터와의 궁합이 굉장히 잘 맞아서 Cards 유니폼을 입고 2년간은 리그 낸에서 가장 효과적인 투수로 빛을 봤었다. Suppan은 위에서 분석했다시피 Cardinals 유니폼을 입고 더 나은 투수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2006년 10월 제외) [본문으로]
  12. 2011 PCL 우승의 주역 멤버들은 대부분이 2014년 Royals 돌풍의 주역으로 그대로 전이가 되었다 (Mike Moustakas, Lorenzo Cain, Greg Holland, Danny Duffy 등).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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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Doovy


오늘 돌아볼 선수는 시리즈 마지막을 위해 아껴놓은 선수, "Jimmy Baseball" Jim Edmonds 이다.





Jim Edmonds (Jimmy Baseball)

Center Fielder

DOB: 1970년 6월 27일 

Birth: Fullerton, California

Time with Cardinals:  2000-2007


Draft and Minors


양손잡이였던 Edmonds 는 어린 시절부터 풋볼, 농구, 축구, 모든 스포츠에서 또래들보다 우월했으며, 천부적인 운동신경과 신체조건을 타고 났다. 감각적인 Hand-Eye Coordination, 20/15로 완벽에 가까운 시력, 남들보다 유난히 길었던 팔과 강한 손목힘. 신체조건 뿐 아니라 환경도 빵빵했다. 4계절 내내 밖에서 뛰놀 수 있는 Southern California 출신이었으며, LA 근교에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대가족들이 SoCal 이곳 저곳에 퍼져 있었다. Edmonds의 리틀리그 게임이 열릴 때면 많은 친척들이 Jimmy를 보겠다고 경기장으로 찾아왔다. Edmonds의 낙천적인 성격은 타고난 부분도 있었지만, 환경적인 요인도 분명 작용한 듯 싶다. 고교 시절의 Edmonds는 힘들이지 않고 또래 선수들보다 월등한 기량을 가졌음을 뽐냈으며, 좀처럼 얼굴을 찡그리거나 힘들어하는 법 없이 무엇이든 쉽게쉽게  (Effortlessly) 해내는 선수였다. 타격 재능과 빠른 발도 분명히 매력적이었지만, Edmonds의 매력은 역시 고교시절부터 "True CF" 로 평가받던 그의 수비였다. 


Anaheim의 바로 옆동네인 Fullerton에서 태어나 근방의 Diamond Bar에서 고교시절을 보낸 Edmonds는 어린 시절부터 하드코어 Angels 팬으로 자랐으며, 이에 1988년 드래프트 7라운드에서 고향 연고팀 Angels가 그를 지명하자 몹시 기뻐했다. 그러나 프로에 와서 Edmonds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는데, (아래 성적 참조) 첫 4년간 그는 200경기를 넘게 출장하면서 홈런 6개를 치는데 그쳤다. 예쁘다는 평가를 받던 그의 스윙은 좀처럼 타구에 힘을 싣지 못했다. 조금 타격감을 찾나 싶으면 부상으로 주춤하면서 상당한 시간을 소비했으며, 스트라이크 존 판단력이 떨어져 많은 삼진을 당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Edmonds의 프로젝션은 "수비에 비해 타격은 떨어지지만, 수비가 워낙 좋아 4th OF로 경쟁력이 있을 것" 이라는 정도였다. (Angels 스카우트의 말)


Jim Edmonds' Minor League Track Record


YearAgeTmLgLevGPARH2B3BHRRBIBBSOBAOBPSLGOPS
198818BendNORWA-351432327400132044.221.329.254.583
198919Quad CitiesMIDWA319911244014734.261.313.337.650
199020Palm SpringsCALLA+9134636921863562775.293.351.417.768
199121Palm SpringsCALLA+6023128551512274057.294.417.417.834
199222MidlandTLAA7028942771528324183.313.413.488.901
199222EdmontonPCLAAA5021237581526361455.299.343.490.833
199323VancouverPCLAAA95403591122849744181.315.382.492.873


Edmonds가 더딘 성장으로 4년동안 A+ 레벨도 졸업하지 못하고 빌빌거리는 사이, 드래프트 1년 후배이던 Tim Salmon은 1991년 더블 A에서 홈런 23개 94타점을 기록하고 당당히 BA 선정 Top 100에 이름을 올리며 Angels의 미래로 등극했다. 이듬해인 92년 Edmonds는 Salmon의 뒤를 좇아 AA볼로 승격, .313/.413/.488로 모처럼 활활 타올랐지만, 이 시즌 Salmon은 타자 친화 리그인 PCL을 마음껏 누비고 다니며 타율 .347 28홈런 109타점으로 폭격하자 이에 묻혔다. 게다가 이맘 때는 1990년 Draftee로 Edmonds의 2년 후배였던 Garrett Anderson도 치고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Anderson은 Edmonds와 비슷한 Skill Set 을 가졌으나 2살이 어렸고 더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 뿐 아니라 Edmonds보다 1년 늦게 드래프트된 GCU출신 외야수 Chad Curtis는 AA를 스킵하고 2년동안 도루 110개를 기록한 뒤 Edmonds보다 빅 리그에 먼저 올라가 주전 CF 자리를 꿰찼다.


당시 Elite-Outfielder 재목들을 팜에 여럿 거느리고 있던 Angels는 외야진의 교통정리가 미처 다 되기 전에 Edmonds가 1992년 PCL에서 상당히 뛰어난 성적을 올리자 그를 일단 스프링캠프로 초대했다. 여기서도 Jimmy가 미친듯이 맹타를 치며 무력시위를 했으나, 이 때 Angels 외야에는 빈 자리가 하나 뿐이었고, 그 자리는 PCL을 부숴버리고 가장 먼저 올라온 Tim Salmon의 것이었다. (결국 Salmon은93년 Angels 역사상 최초의 ROY 영광을 안으며 성공적으로 데뷔한다) 이 해 Edmonds는 프로 입문 이래 처음으로 부상없이 한 시즌을 소화하며 95경기에서 .315/.382/.492에 타점 74개를 쏟아낸 뒤 9월 로스터 확장 때 "Cup of Coffee"를 마시러 Anaheim으로 내려갔다. 


1993-1997: Carew's Crew


"Human Highlight Reel" 이라는 영광스런 별명이 익숙한 Cardinals 팬들에게는 믿기 힘든 내용이지만, Edmonds는 Angels 시절 초창기에 좌익수로, 그것도 4th OF로 주로 출장해야 헀다. 또 40홈런을 쉽게 쳐내던 슬러거 Edmonds를 기억하던 우리들에겐 익숙치 않지만, 커리어 초창기 Edmonds는 파워히터보다는 교타자에 가까웠으며, 몸쪽 공을 Derek Jeter 처럼 Inside-out 스윙으로 밀어쳤고, 장타보다는 라인드라이브 히팅에 주력하는 타자였다. 잠시 여기서 루키 시즌 (1994년) 이 끝나고 나온 Stats. Inc의 스카우팅 리포트를 참조해본다.


"Edmonds can expect to see his playing time diminish. While he showed some signs of developing as a hitter, his role will probably be reduced to fourth outfielder. This more closely suits his abilities."  This reflected the scouting consensus on Edmonds heading into 1995."

-Scouting Report, 1994




타자 Edmonds 에게 큰 전환을 가져다준 인물은 당시 Angels 타격 코치이자 통산 7차례 리딩히터 타이틀 + 3000안타에 빛나는 전설적인 교타자 Rod Carew였다. 타격의 과학 (Science of Hitting)과 이론에 정통했던 Rod Carew는 약간 변칙적이었던 Edmonds 의 No-Stride 메카니즘을 바꾸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Edmonds는 스윙시 Stride 도 없고 발도 거의 땅에서 떼지 않은 채 무게중심을 이동, 공에 힘을 실어냈는데, Carew는 Edmonds에게 이 타격자세를 그대로 유지하되, 대신 공을 띄우는 것에 (Lifting) 집중하기를 추천했다. 유리한 카운트에서 작정하고 공을 Drive & Pull 할 수 있게 된 Edmonds는 1995년 전반기에 무려 13홈런 52타점을 기록했으며, 23경기 연속 안타 행진으로 팀 최고 기록에 근접했다. (Angels 최고 기록은 스승 Rod Carew가 가진 25경기.) 


Carew는 또한 Edmonds가 이전 타석에서의 실수를 빨리 잊고 다음 타석에 집중할 수 있도록 심리적인 조언을 끊임없이 해주었으며, Carew's Crew 라고 불렸던 당시 Angels 로스터의 젊은 타자들 (Carew의 제자들) 중에서도 유난히 돈독한 친분을 유지했다. 둘은 1995시즌 올스타 브레이크 때 함께 콜로라도 강으로 제트스키를 타러 가기로 했었는데, Edmonds가 전반기에 타격에 눈을 뜬 뒤 마이너리그에서조차 한 번도 선정된 적이 없었던 올스타에 뽑히는 바람에 여행을 가지 못하게 되자, 제자에게 껄껄 웃으며 기꺼이 올스타전에 갔다오라고 얘기한 것도 Carew 였다. Edmonds는 올스타전 이후에 홈런 20개를 더 치고 33홈런 106타점, 그리고 Angels 구단 역사상 단일시즌 최다 득점 기록인 120득점을 기록하고 풀 타임 첫 시즌을 마쳤다. (이 기록은 이후 Erstad, V-Guerrero, 그리고 Trout에 의해 3차례 경신되었다)


Carew와의 만남은 타자 Edmonds뿐 아니라 선수 Edmonds에게도 결정적인 인연이었다. Southern California 특유의 넉살과 여유가 몸에 배어있었던 Edmonds는 종종 베테랑들 혹은 보수적인 코치들로부터 "열심히 하지 않는다" "진지함이 부족하다" "건방지다" 는 평을 받곤 했는데, Carew는 Edmonds가 이런 오해를 사지 않도록 조금 적당히 낙천적으로 (?) 굴 것을 지도했다. 어린 시절부터 Angels 팬으로 자랐던 Edmonds는 소년 시절 우상이자 Angels에서 6년을 뛰었던 스타 Rod Carew의 말을 크게믿었고, 행동을 조심히 하려고 노력했다.


"Jim could always hit. But if he missed a pitch he thought he should have hit, he'd get angry and let that at bat stay with him. I can't let my hitters get down on themselves. I tell them, 'I'm going through every swing with you. If I don't get down on you, don't get down on yourself.' "


- Rod Carew, on Jim Edmonds (Sports Illustrated, 1995) 




1997-1999 : 불화


어린 시절부터 응원했던 고향 팀에 드래프트되어, 5년 안에 메이저리그를 밟았고, 올스타에 뽑혔으며, 전설적인 타격왕이 직접 개인 지도를 해주고 있었으니, Edmonds에게 더 이상 아쉬울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의외로 Angels와의 인연은 1995년을 기점으로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했다. 


일단 첫 사건은 1995년 아마추어 드래프트였다. Angels가 포화된 외야진에 전체 1번으로 U of Nebraska 외야수 Darin Erstad를 뽑은 것이었는데, Erstad는 이미 대학야구를 제패하고 Golden Spike 상을 수상한 완성형 / 즉시전력감 유망주였기에 마이너리그에 오래 둘 수가 없는 선수였다. 교통정리가 필요해지는 시점이 다가오자 지역 언론에서는 조금씩 Edmonds의 트레이드 루머를 흘리기 시작했다. (오죽했으면 동료 Tim Salmon은 Edmonds가 Ken Griffey Jr. 삼각 트레이드에 포함되지 않고 Angels에 잔류한다고 하자 깜짝 놀라며 "그 인간은 목숨이 9개구만" 이라고 했다고 한다)


California Angels 에서 Anaheim Angels으로 팀 공식 명칭까지 바꾸고 새로운 출발을 외친 Angels는 1997시즌부터 Terry Collins 에게 팀 사령탑을 맡겼는데, 이것이 본격적인 불화의 시작이었다.  Angels는 당시 팜에서 공수된 Core Players (Edmonds, Salmon, Garrett Anderson으로 뭉친 Angels 팜 출신의 리그 정상급 외야진 + 95년 드래프트 전체 1번 Darrin Erstad + 자체생산 마무리 Troy Percival 등) 들이 주축이 된 비교적 젊은 로스터를 (평균나이 28.3세) 가지고 있었고, 충분히 비전이 있었는 전력이었다. 그러나 팀의 선발진이 워낙 허접했으며, 선발진 강화를 위한 투자가 제대로 되지도 않아 포스트시즌에서 대권을 노려볼만하기에는 약점이 뚜렷했다. 1997시즌 Angels는 디비전 타이틀 레이스에서 8월부터 힘에 부쳐하며 마지막 두달한 24승 30패에 그쳤고, 결국 84승으로 6게임차 지구 2위에 그쳤다. 


이 와중에 Terry Collins 감독은 엄청나게 "떽떽거리는" 스타일로 선수들을 밀어붙였고, 조금이라도 여유를 가지려는 선수가 있으면 몹시 질책했다. 어떤 선수들에게는 이런 어프로치가 먹혔으나 Edmonds는 이런 스타일의 매니징에 질색을 했고, 역으로 Terry Collins 역시 Edmonds처럼 "flair"가 넘치는 선수를 좋아하지 않았다. Edmonds가 평소처럼 Over-the-sholuder 캐치를 해놓고 스스로를 축하하는 제스처를 보이면, Collins는 이를 "잘난체" 한다고 생각해 Edmonds를 질타했으며, 옆에서 1루코치 Larry Bowa도 이를 거들었다. 이들은 Edmonds가 어떤 플레이를 하던 (Scott Rolen처럼) 고개를 숙인채 묵묵히 덕아웃으로 뛰어들어오기를 바랬는데, Edmonds는 그런 류의 선수가 아니었다. 


1998시즌 역시 전년도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시나리오로 흘러갔고, Angels 구단의 상처는 성적을 초월해 이제는 구단 내부로 곪고 있었다. Edmonds는 이 기간동안 어깨, 엄지손가락, 복사근, 허벅지 등 이곳 저곳에 부상을 당하는 와중에서도 각각 133, 154경기를 소화했으며, 2시즌동안 홈런 51개 타점 171개, 골드 글러브 2개를 수상하며 제 몫을 충분히 해주었다. 그러나 1999년 정규시즌 개막 무렵 Edmonds가 어깨 수술을 받기로 결정하면서 드디어 쌓아왔던 감정들이 폭발했는데, 당시 이미 Edmonds를 좋게 보지 않던 팀메이트들은 "오프시즌에 수술을 받아야지 시즌이 개막하고 수술을 받는거냐" 며 불만을 표시했다. Edmonds는 정규시즌 내내 무릎 부상 때문에 고생을 한 터라 몸이 회복된 후 어깨 수술을 받고 싶어했는데, 이미 어느 정도 "미운 털이 박힌"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주려는 동료들은 거의 없었다.


반 Edmonds 운동의 선두에 있던 인물은 1999년 오프시즌 Angels의 핵심 FA 영입 중 하나였던 90년대 탑 클래스 슬러거 중 하나인 Mo Vaughn이었는데, Vaughn은 인터뷰에서 "Some guys want to get better, some don't. Some play with pain, some don't. The bottom line is, you have an obligation to the guys who are paying you and to the guys who are playing to get better." 라며 사실상 대놓고 Edmonds를 디스했다. Vaughn는 1998년까지 Red Sox에서 뛰다가 시즌이 끝나고 Angels와 계약한 터라 사실상 Edmonds와는 한  번도 같이 뛰어본 적이 없는 (그러나 당분간 같이 지내야하는) 사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까지 강한 디스를, 그것도 시즌 시작과 거의 동시에 저런 말을 했다는 것은 이 당시 Angels가 얼마나 콩가루집안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Edmonds 디스에는 꽤나 많은 선수들이 참가했는데 (대표적으로 Darrin Erstad가 앞서서 Edmonds의 "자기 관리 실패"를 비방했다), 웃기는 것은 Vaughn도 Edmonds를 배척함으로써 클럽하우스를 장악하려고 했으나 이도 보기좋게 실패했다는 점이다. Angels 클럽하우스는 이미 마이너시절부터 수년을 같이 뛰어온 선수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고, 과체중 때문에 발목 부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 뚱뚱한 지명타자가 갑자기 Players-only 미팅을 소집한다고 선수들이 말을 들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Angels는 결국 어수선하게 시즌을 시작했고, Tim Salmon의 부상 이후 최하위로 떨어진 뒤 70승 92패라는 "당연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Trade to St. Louis


끔찍했던 1999시즌이 끝나고 이미 Edmonds의 트레이드는 기정 사실화되었고, Angels는 구미에 맞는 옵션들을 저울질 하기 시작했다. 가장 성사에 가까웠던 딜은 Mariners와의 딜이었는데, 당시 프랜차이즈 스타 Ken Griffey Jr. 가 시애틀을 떠나고 Edmonds가 그 자리를 대체하는 시나리오가 상당히 유력했었다 (Angels는 댓가로 Brett Tomko를 원했다.) 그러나 Edmonds 본인이 워낙 시애틀에서 뛰는 것을 싫어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었기에, 시애틀도 어차피 묶어놓지 못할 Edmonds 를 Ken Griffey Jr.의 적합한 후계자로 데려올 생각을 포기했고, 곧 Reds에서 Mike Cameron을 얻어왔다. Mariners행이 무산된 뒤에 가장 Angels가 원했던 것은 Yankees에서 Alfonso Soriano 를 받아오는 딜이었으나, Yankees가 이를 거부했다. 


2000년 3월 23일, 수년째 무성하던 Edmonds의 트레이드 루머에 단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던 팀이었던 Cardinals가 이 때 슬쩍 모습을 드러내더니 Adam Kennedy + Kent Bottenfield 패키지로 Edmonds를 영입하는데 성공한다. 정규시즌 개막을 열흘 도 채 앞두지 않고 터진 이 트레이드는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는데, Angels GM 이었던 Bill Stoneman은 트레이드 직후 "우리 입장에서는 검증된 선발투수와 1라운드 출신 2루수를 얻을 수 있는, 정말 매력적인 딜이라서 거부하기가 힘들었다" 고 소감을 밝혔다. Bottenfield는 전년도 올스타 + 정규시즌 18승은 물론 트레이드 당시 스프링캠프에서도 호투하며 모든 이들이 그를 "Proven Starter" 감으로 보고있던 상황이었고, Adam Kennedy는 전년도 Cardinals 팜에서 Minor League Player of the Year로 뽑혔던 전국구 유망주였다. 이 두 선수의 커리어를 통틀어 이들의 가치가 가장 높았던 시점이 아마 이 딜이 일어났던 2000년 정규시즌 개막 직전이 아닐까 싶은데, 두 선수를 얻고 마치 너무 훌륭한 트레이드를 한 것 마냥 살짝 흥분한듯한 Stoneman의 소감 고백이 이해가 안 가는 바도 아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귀엽기까지 하다)





2000-2007: Flying CF with Flair


Cardinals도 트레이드를 통해 리그 최고의 중견수를 얻었지만, Edmonds에게도 Cardinals 행은 그의 커리어에 있어서 더할 나위없이 좋은 인연이었다. Edmonds가 Birds-on-the-Bat 을 가슴에 새기고 처음 타석에 들어선 날, 팬들은 아직 아무것도 보여준 게 없는 Edmonds에게 환영의 의미로 기립박수를 선사했고, Edmonds는 이에 크게 감동받았다. 클럽하우스에서도 모두들 Edmonds를 환영했으며, 특히 같은 고향 출신이자 USC 레전드였던 Mark McGwire는 Edmonds는 만나는 순간부터 오래된 친구처럼 그와 붙어다니기 시작했다. 


Cardinals 클럽하우스는 불화와 냉전, 서로에 대한 책임 전가로 점철되었던 90년대말 Angels 클럽하우스와는 차원이 달랐으며, 무엇보다 야구를 즐겁게 해야한다고 생각했던 Edmonds는 이렇게 좋은 환경이 조성되자 더욱 신이 났다. 그는 개막 후 첫 한 달간 .382/.515/.776에 홈런 8개를 쏘아올리며 파괴력을 뽐냈고, 순식간에 Cardinals 중심 타선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Busch Stadium의 관중들은 여태껏 본 적 없는 수준의 미친듯한 센터 수비를 보여주는 Edmonds의 끼 넘치는 다이빙캐치에 매료되었고, Jocketty 역시 기대 이상의 결과에 흡족해했다. 트레이드 후 채 두 달이 지나지 않은 2000년 5월, Cardinals와 Edmonds는 6년 $57M (+1년 선수옵션 10M) 짜리 대형 FA 계약을 맺었다. 당시만 해도 이 정도 규모의 FA 계약은 흔하지 않았고 (구단 역사상 최고 규모였는데, 얼마 지나지않아 Scott Rolen이 이 기록을 깬다)


"아직 온 지 두달도 안 된 선수에게 6년 계약은 리스크가 너무 크지 않느냐?" 는 우려에 Jocketty는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내가 한 달간 지켜본 바로 Jimmy는 향후 몇년간 우리에게 중요한 선수가 될 것이다. 리스크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또 반면 초대박이 터질 수도 있다 (It could be a bonanza for us)" 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It's been a pleasure to play here for the first month, and I'm looking forward to staying here for the rest of my career. I wasn't trying to get a dollar for every person through the turnstile and a free house and a free plane and all that stuff. I just want to play baseball and have a place where I knew I could be for a while. I knew what I wanted and it made it pretty simple, pretty easy."

-Jim Edmonds, on signing with the Cardinals (May, 2000)



TLR 역시 Terry Collins보다 훨씬 합리적인 감독이었다. TLR은 Edmonds가 팀에 들어오자 평소 친분이 있던 Rod Carew에게 전화해 "이 놈이 정말 물건이긴 한거냐?" 고 물었고, Carew는 "Let the kid play and he'll do a heck of a job for you." 라고 대답했다. Carew의 한 마디에 TLR은 Edmonds를 정규시즌 내내 3번타자-중견수로 고정해서 썼으며, Edmonds는 이에 보답하듯 매 달 최소 홈런 6개를 쏘아올리며 올스타에 선정되었을 뿐 아니라 MVP 투표에서 리그 4위에 올랐다. (물론 167개의 삼진은 NL 좌타자 최고 기록이었다)


오자마자 MVP? - 2000년 NL MVP Ballot 


Voting ResultsBatting StatsPitching Stats
RankTmVote Pts1st PlaceShareWARGABRHHRRBISBBBBAOBPSLGOPS
1Jeff KentSFG392.022.088%7.2159587114196331251290.334.424.5961.021
2Barry BondsSFG279.06.062%7.71434801291474910611117.306.440.6881.127
3Mike PiazzaNYM271.03.060%5.11364829015638113458.324.398.6141.012
4Jim EdmondsSTL208.00.046%6.21525251291554210810103.295.411.583.994
5Todd HeltonCOL198.01.044%8.9160580138216421475103.372.463.6981.162



2003시즌, Edmonds는 전반기에 307타수에서 .303의 타율과 28홈런을 치는 괴력을 뽐내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내는 듯한 기대를 갖게 했다. 그러나 올스타전 홈런 더비에 출전한 것이 실수였는데, 여기서 예전에 다쳤던 어깨를 다시 다치면서 후반기에 20여경기를 결장해야했고, .214 11홈런으로 생산력이 툭 떨어져버렸다. 결국 Edmonds는 39홈런 89타점으로 시즌을 마감했는데, 당초 50홈런 페이스로 홈런을 치다가 홈런 더비를 기점으로 흐름이 끊겨서 아쉬움이 더했다. Edmonds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수당 홈런 수 리그 2위로 시즌을 마감했는데, 더 놀라운 것은 Edmonds가 어깨 부상 전에도 전반기 내내 종아리, 엉덩이, 갈비뼈 부상을 달고 뛰었다는 점이다. (11.5 AB / HR, 1위는 뭐 당연히 Bonds)


2004시즌, Edmonds는 3할 타율과 40홈런을 동시에 넘어서는 기록을 달성했고, Rolen-Pujols와 함께 살인 타선의 일원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정규시즌 막판 2주간 Edmonds는 홈런을 치지 못했고, 마지막 4경기를 21타수 무안타 슬럼프를 벗어나지 못했다. 전반적인 타격감 저하는 포스트시즌으로 이어졌는데, NLDS 1차전에서 Edmonds는 Odalis Perez를 강판시키는 결정적 홈런을 한 개 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그다지 홈런을 한 개 치긴 했지만 볼넷 한 개를 골라내는 동안 9개의 삼진을 당하면서 영 제 모습이 아니었다. 





벌써 여러차례 언급하는 2004 NLCS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지만,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으니 동영상을 링크하도록 한다. 아래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Edmonds가 High-Fastball에 쉽게 방망이를 내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는데, 장면을 다시 보시면 Astros 릴리버 Dan Miceli가 작정하고 아예 High-Fastball 승부를 해오는 것을 Edmonds가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받쳐놓고" 후려넘기는 청량감 넘치는 장면을 보실 수 있다. 링크


사실 Edmonds의 클래스는 극적인 6차전 Walk-Off보다 7차전에서 더 빛났는데, 6회 2사 2루 위기를 맞은 Roger Clemens가 대기 타석에 있는 Edmonds를 흘깃 보더니 Rolen을 거르지 않고 정면 승부를 하다가 결승 투런을 허용하는 장면이었다. (Edmonds는 이 시리즈 3차전에서 Roger Clemens를 상대로 홈런을 쳤던 바 있었다.)


2006시즌, Edmonds는 커리어에서 유일한 월드시리즈 우승을 일궈냈다. 이 시즌 Edmonds는 잔부상으로 DL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110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고, 특히 9월에도 첫 3주간은 경기에 나오지를 못했었다. 그러나 포스트시즌 개막을 앞두고 돌아온 Edmonds는 대타로 출장한 복귀 첫 타석에서 대타 쓰리런을 쳤고, Mets와의 NLCS에 홈런 2개를 기록했으며, 월드시리즈 3차전에서 4회 Nate Robertson을 상대로 결승 2타점 2루타를 치며 충분한 제 몫을 했다.


Jimmy Baseball - 8 years in St. Louis


YearAgeTmGPAABRH2B3BHRRBISBCSBBSOBAOBPSLGOPSOPS+TB
200030STL15264352512915525042108103103167.295.411.583.994147306
200131STL15060850095152381301105593136.304.410.564.974149282
200232STL1445764769614831228834386134.311.420.561.981158267
200333STL1375314478912332239891377127.275.385.6171.002160276
200434STL1536124981021503834211183101150.301.418.6431.061171320
200535STL1425674678812337129895591139.263.385.533.918137249
200636STL110408350529018019704053101.257.350.471.822110165
200737STL11741136539921521253024175.252.325.403.72888147
STL (8 yrs)11054356362869010332341124171337246451029.285.393.555.947143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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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 성격 빼고는 약점이 없던 역대 최고의 중견수

2003년 Edmonds의 Scouting Report를 보면 재미있는 평이 나오는데, 바로 Edmonds가 타구가 자신에게 날아올 때 일부러 각을 어렵게 잡고 ("Style his way") 더 힘들게 (고로 더 멋있게) 타구를 잡는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Edmonds의 플레이를 보면서 (팬심 가득)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지만, 이런 여론이 있었다는 자체가 분명히 Edmonds의 캐릭터에 대해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Edmonds는 Angels 시절 "부상을 달고 뛸 줄 모르고, 몸을 사린다" 는 평이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Edmonds는 실제로 많은 잔부상들을 달고 시즌을 보냈으며, 건강하게 한 시즌을 난 경우는 거의 없다. 진짜 문제는 Edmonds가 남들이 뭐라고 하든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데 있었다. 1999년 초, Edmonds가 수술 타이밍을 하필이면 정규시즌 개막과 거의 비슷하게 잡는 바람에 욕먹을 여지를 만들어 주었는데, 이 때 분위기가 워낙 안좋았던 Angels 클럽 하우스는 누구라도 실수를 하면 마녀사냥을 할 준비가 되어있는 곳이었다. 





쌩뚱맞게 갑자기 들어와서 리더 역할을 하려고 했던 Mo Vaughn과의 충돌, "Drill Sergeant" (군대 조교) 라는 별명이 있던 감독 Terry Collins와의 불화, Old-School 로 치면 어디 가서 밀리지 않는 1루코치 Larry Bowa (Scott Rolen 편을 기억하시는가!) 와의 충돌도 비슷한 이유였다. Edmonds는 열심히 하는 티를 내려고 하질 않았고, 딱히 겸손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Edmonds는 Angels 시절 한 번 "나는 홈경기에서 Leadoff로 나가기 싫다" 고 말했는데, "Leadoff로 나가면 1회초 상대팀 공격 후 덕아웃까지 뛰어가서 빨리 방망이를 챙기고 타석에 나가야되는데, 그게 좀 피곤하다" 는 게 이유였다. 그리고 "야구는 늘 재밌게" 라는 그의 모토와 걸맞게 늘 필드 위에서의 플레이들을 즐기려고 했다. 이런 모습들을 "돈은 돈대로 쓰고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성적이 안나는 대도시의 2인자 구단" 클럽하우스에서 보였으니, 눈치가 없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He has so much talent, if you challenge him to do something, to make more contact or go the other way, he's the kind of guy who accepts that challenge and applies himself."  

- Tony La Russa, on Jim Edmonds' talent


Edmonds는 Cardinals 클럽하우스에서 큰 충돌 없이 잘 지냈는데, 이는 Mark McGwire의 존재가 그의 적응을 쉽게 만들어준 덕도 있었다. TLR 역시 그다지 Flair를 좋아하는 스타일의 감독은 아니었지만, Collins처럼 멀쩡히 성적을 잘 내고 있는 선수들을 족쳐서 역효과를 만드는 감독도 아니었고, 부상을 달고 뛰라고 강요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특히 Edmonds는 2002년 Darryl Kile의 급사 때 발벗고 나서서 리더 역할을 자청했고, 이 시즌을 통해서 조금 더 믿음직스러운 베테랑으로 거듭났다. (Edmonds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DK 57"을 그의 왼쪽 팔뚝에 새겼고, 2007년에는 Josh Hancock의 이니셜인 JH 32를 다른 쪽 팔뚝에 문신으로 새겨 동료를 기렸다.)


"If it doesn’t seem like I'm working hard sometimes, that's someone else's problem."

- Jim Edmonds




그는 Cardinals에서 뛴 8년간 마지막 두 시즌을 제외하고는 모두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고, 8년간 WAR 37.8을 (첫 6년간은 36.3, 마지막 2년간은 1.5) 적립했다. 포스트시즌에서도 절대 약하지 않았으며 (통산 포스트시즌 13홈런 42타점 .273/.361/.513) 선수라면 누구나 꿈꿔보는 드라마틱한 홈런도 여러 차례 쳤다. Edmonds는 특히 Mark McGwire와 만난 이후 Plate Discipline에서 드라마틱한 발전을 이룩했으며, 리그 내에서 가장 플라이볼을 잘 만들어내는 선수 (그리고 병살도 잘 안치는) 로 거듭났다.


Angels 시절 BB% / K% =   9.2% / 18.9%  (평균 wRC+ 106)

  Cards 시절 BB% / K% = 14.8% / 23.6 % (평균 wRC+ 140)


그리고 수비. Edmonds의 수비는 "우리가 다시 저런 중견수를 볼 수 있을까" 싶을 수준의 Flair을 자랑했으며, 엄청난 레인지와 정확한 어깨로 Busch Stadium의 외야 한 가운데를 8년간 책임졌다 (이 모든 것을 무릎 부상과 어깨 부상을 달고 다니면서 해낸 일이다.) 특히 타구를 쫓아가는 경로에 있어서 Edmonds는 동물적인 감각을 자랑했고, Frank Thomas는 "Edmonds같은 선수가 외야에 있는 것은 Edmonds의 수비가 조금 특별했던 이유는 그가 워낙 화려한 장면들을 자주 만들어내서 Defender 보다는 Entertainer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Edmonds는 단 한 번도 Overrate 된 적이 없으나, 그렇다고 Underrate 된 적도 없는 선수였다.  (Edmonds의 미친 수비들 보러가기)


타자로써 Edmonds는 거의 약점이 없었다. 그는 패스트볼, 변화구에 대한 대처 능력이 모두 뛰어났으며, Strike Zone 판단능력도 훌륭했다. Opposite-Field Power, 즉 타구를 밀어쳐서 장타로 만드는 능력은 정말 어마어마 했는데, 2000년대 초 Edmonds보다 좋은 Opposite-Field Power를 보여주는 선수는 Bonds 밖에 없었다. (스프레이 차트를 봐도 Edmonds는 우투수의 공들을 매년 10개씩은 쉽게 좌측으로, 좌중간으로 밀어쳤다.) 바깥쪽 공을 워낙 잘 밀어치니 투수들은 Edmonds를 쉽게 공략하지 못했고, 특히 Cardinals 유니폼을 입고 나서 그는 더더욱 타석에서 인내심있는 모습을 보였다 (Pitchers per AB 리그 2위)


타자 Edmonds에게서 굳이 흠을 찾자면 (1) 파괴력은 있지만 너무 큰 스윙과 (2) 하이 패스트볼에 유난히 약했다는 점이다 (High-Fastball Chase). Edmonds는 높은 패스트볼을 상당히 좋아했는데, 종종 이로 인해 "버리는 타석" 이 많아질 때가 있었다. 즉, 2스트라이크 이후 약간 말도 안된다 싶을 정도로 터무니없이 높은 패스트볼에 쉽게 헛스윙을 하는, 약간은 성의없는 모습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Edmonds가 전반적으로 타격 컨디션과 리듬이 좋지 않을 때 나오는 증상이었으며, 그 외의 시간에는 Edmonds만큼 참을성있는 타자들도 드물었다.



"Not really, there wasn't one. Any day a pitcher can be on and make your day hard. The other way around, a pitcher can have a tough day and make it easy for you. Each day is a challenge and each pitcher is a challenge. Whether it was Roger Clemens or whoever, you never know what kind of day you'll have until it's over.


- Jim Edmonds, when asked "which pitcher did you hate to face?"


Jim Edmonds의 성격은 팀 동료이자 TLR 시리즈 10편의 주인공 Scott Rolen과 정반대였다. Edmonds는 "내가 할 일은 야구를 잘하는 것일 뿐, 나는 내 방식대로 게임을 하겠다" 며 본인의 넘치는 끼를 주체하지 않았고, "야구는 결국 놀이" (It's just a game) 이라는 생각이 짙게 깔려 있었다. 반면 어려서부터 절제와 겸손이 몸에 철저히 배어있던 Rolen은 캡틴 아메리카의 아우라를 풍기며 "오직 승리만이 나의 것, 열심히 하면 안될 것이 없다" 를 되뇌이는 모범생이었다.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두 명 모두 Larry Bowa와 불화가 있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둘 다 정말 고집은 세다)


Edmonds는 2008년 Cardinals를 떠난 이후 Reds, Brewers, Cubs 등 디비전 라이벌들의 클럽하우스를 순회공연 다니다가 결국 2011년, Cardinal로 은퇴하기 위한 단기 계약을 맺고 돌아왔다. 낙천적인 Edmonds는 뛰는 모든 도시에서 야구를 즐겼고, 어느 곳에 가든 그 도시와 소속팀에 대해 좋은 점만을 늘어놓는 선수였으나, Angels 구단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그는 Angels에서 떠밀리다시피 팀을 나온 그를 따뜻하게 맞이해준 St. Louis 팬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고, 2000년대 Cardinals 중흥기를 이끌며 많은 포스트시즌에 출전했던 좋은 기억들, 그 곳에서 맺은 인간 관계들과 리그 최고 수준의 선수로써 누렸던 영광들 때문에 커리어를 접는 순간만큼은 Cardinal로 기억되기 원했다.


2011년, Brewers와 Cardinals의 NLCS가 열렸을 때 한 기자가 (최근까지도 Brewers 유니폼을 입고 있던 Edmonds 에게 어느 팀을 응원하냐고 물었다. 


Edmonds는 어깨를 으쓱했다. "I'm a St. Louis guy, I'm rooting for the Cards."



Did you know...

  • Edmonds는 계약 마지막 해이던 2007년, 다운타운 St. Louis에 자기 이름을 걸고 식당을 냈다. Pujols의 스포츠 바보다 위치는 더 좋긴 한데 (Busch Stadium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이다) 딱히 음식이 대단하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 Edmonds는 은퇴 이후 Cardinals 경기를 전담중계하는 Fox Midwest의 해설자로 활동했다. (전임자는 Cal Eldred)
  • 2012년, Jim Edmonds와 그의 부인 Allison Edmonds는 "The Real Housewives of Orange County" 라는 리얼리티 쇼 (시즌8) 에 캐스팅되었다가 촬영 며칠을 앞두고 발을 뺐다. 
  • 어릴 때 투수였던 Edmonds가 소년 시절 가장 좋아했던 선수는 Nolan Ryan, 타자가 된 이후에는 Don Mattingly 였다.
  • 예전에 한번 댓글에서 언급된 바 있는 경기인데, 2004년 8월 Cubs-Cardinals 경기에서 Carlos Zambrano가 Edmonds에게 사사구를 두 개 던진 경기가 있었다. 몇 년 후 Edmonds는 Cubs 유니폼을 입고 Carlos Zambrano와 동료로써 재회하는데, 이 때 Zambrano가 먼저 다가와 Edmonds에게 사과했다고 한다. (When I played for the Cubs, he was one of the first people to come up and apologize, saying sorry for whatever. Ended up being a good teammate.)
  • Cardinals 시절 Edmonds는 오프시즌에 NHL팀 St. Louis Blues 선수들과 함께 스케이트를 타며 몸관리를 했다. 이는 Edmonds가 St. Louis에 살던 시절, 바로 이웃에 Blues의 디펜더 Chris Pronger가 살고 있어서 둘이 친해지게 된 게 결정적인 계기였다. 
  • Edmonds는 연봉 중 $1M을 떼어서 St. Louis 의 시민공원인 Forest Park에 자신의 이름을 딴 시민 야구장 "Jim Edmonds Field" 건설에 쾌척했다. 


Edmonds 편을 마지막으로 이번 오프시즌 TLR ERA 시리즈는 마감합니다. 지난 해부터 시작해서 총 16편에 걸쳐 14명의 선수들을 돌아보았습니다만, 아직도 소재는 무궁무진하게 많이 남아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추억은 이제 그만 팔고, 게임 쓰레드로 뵙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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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Doo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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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연 모듬 Part II 도 준비해보았다. 

이번 조연 모듬의 기준을 잠시 설명하자면, (1) TLR 시대의 서비스 타임 (웬만하면 3년 이상) (2) 최소 3개 포지션 이상 소화 (혹은 기본적인 마당쇠ness) (3) TLR식 관리를 통한 스스로의 재발견 여부 (4) 거부할 수 없는 쩌리 본능 정도를 들 수 있겠다. 이번 모듬은 잊고 지냈던 Unsung Hero들 및 마당쇠들을 돌아보자는 취지가 강하기에, Bo Hart, J-Rod, Jason Simontacchi 등 서비스 타임이 적었던 선수들은 아쉽게도 제외했다. 나중에 "반짝 특집" "광분 특집" 같은 걸로 다뤄볼 예정이다. 


Aaron Miles

Infielder, Outfielder, Pitcher

DOB: 1976년 12월 15일 

Birth: Antioch, California

Time with Cardinals:  2006-2008, 2010


고졸 유격수로 Astros에 16라운드에 지명된 Aaron Miles는, 루키리그에서 5'8 인치의 작은 키 때문에 2루로 포지션을 바꿨고, 이후 5년간 Astros 마이너 시스템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파워가 전무하고 그렇다고 발이 빠르지도 않은 언더사이즈 2루수. 드래프트 이후 5년이 지난 2000년에도 그는 A+볼에 머물러 있었다. 이후 Miles는 Rule 5 드래프트 때 White Sox에 지명되어 이적했는데, 이 때 타격에 눈을 떠 2003년 AAA에서 .304/.351/.445에 11홈런 50타점을 기록하고 26세의 나이로 프로 입문 8년만에 메이저리그 데뷔를 이루어낸다. 그 해 오프시즌, Juan Uribe 트레이드 떄 Rockies로 건너간 Miles는 Rockies의 주전 2루수로 뛰면서 6홈런 47타점 .293/.329/.368의 기대 이상의 성적을 내며 신인왕 투표에서 4위에 올랐다.


그는 2005년 오프시즌 Ray King 트레이드 떄 Cardinals 로 건너왔는데, David Eckstein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뭔가 클럽하우스에 Grit 이 부족함을 느끼던 TLR에게 오아시스같은 존재였다.  그는 뭘 시켜도 기꺼이 하는 충성스러운 팀 플레이어였으며, 마이너리그에서 8년간 고생을 하고 올라온데다 본인 기량의 Ceiling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어서 자존심을 앞세우는 선수가 아니었다. Eckstein의 부상 때 Miles는 기꺼이 (빅 리그에서 맡아본 적 없는) 유격수 자리를 맡았고, 모두의 예상대로 아주 열심히 평균 이하의 수비를 보여주었다. 이게 기특했던 TLR은 2006년 7월 18:4로 지고 있던 경기에서 Dave Duncan에게 "우리 팀에서 가장 작은 구원투수가 누구더라?" 라면서 Miles를 내보냈고, 그는 "까짓 거 해보죠 뭐" 하고 올라가서 기꺼이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내려왔다. Miles의 "안 하는 거 빼고 다해" 본능은 2008년에 그 정점을 찍었는데, 이 시즌에 그는 기존 전공이던 2루수와 부전공이던 유격수, 3루수는 물론 선택과목인 좌익수, 우익수, 중견수, 그리고 투수로도 모두 출장했다. 


Miles는 투수로써 뛰어난 기록을 남기긴 했지만 (-_-) 벤치에서 클러치 히트를 제공하기도 했다. 2006년 전반기 마지막 경기에서 Cardinals는 당시 순위 싸움이 치열하던 Astros를 상대로 Chris Carpenter의 호투를 발판 삼아 거의 경기를 다 잡아놨었는데, 하필 이 시즌에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못하던 Izzy가 블론세이브를 하면서 경기가 연장전으로 넘어갔다. 연장 12회에 Eckstein과 달구지 형이 Astros 마무리 Lidge를 흔들었으나 Pujols와 Rolen이 잇따라 범타로 물러났는데, 여기서 TLR은 Juan Encarnacion 대신 Aaron Miles를 대타로 기용했고, Miles가 역전 2타점 2루타를 치면서 결국 이 경기를 잡아냈다. 2006년 정규시즌 막판 순위싸움을 생각해보면, 이 날 경기의 Miles의 결승타는 생각보다 큰 의미가 있었다.


Miles의 Scarppiness와 "깡"을 상징하는 일화로 Astros 마이너 시절의 총기 강도 사건이 있다. 당시 마이너리거 신분으로 스프링 캠프에 참여하고 있던 Miles는 팀 동료들과 근방의 숙소 Holiday Inn에 머물고 있었는데, 숙소 한 층을 통째로 빌려서 있던 터라 서로 다들 방문을 열어놓고 TV를 보거나 비디오 게임을 하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 때 Miles의 옆 방에 총기 강도가 들이닥치더니 방에 있는 5명의 선수들과 그 중 한 명의 여자친구까지 모조리 묶고 테이프로 입을 막은 뒤 금품을 갈취했고, 이후 Miles가 혼자 있던 방에 들이닥쳐서 그를 총으로 위협하고 금품을 요구했다. Miles는 처음에는 협조하는 척 하다가 잠시 강도가 방심한 사이 달려들어 억지로 총을 빼앗으려고 덤볐고, 강도는 그런 Miles의 얼굴이 계속 주먹질을 했으나 결국 Miles는 강도로부터 총을 빼앗은 뒤 경찰이 올 때 까지 강도들을 제압하고 동료들을 구했다고 한다. 5'8인치 (172cm) 일반인 중에서도 결코 큰 덩치가 아닌데, 총을 든 강도에게 맨손으로 덤벼 총을 빼앗은 이 브루스 윌리스 같은 캐릭터가 이후 좋은 주군을 만나 (TLR) 그를 호위하는 전위같은 캐릭터가 된다는 것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이 당시 함께 있던 인질 5명 중 한 명은 이후 Astros 중심타선에서 활약하게 될 Morgan Ensberg이기도 하다.)


받아라 나의 강속구


기량은 부족했지만 그는 중요한 순간에 집중력을 발휘했고, 실수나 패배를 당할 때 그냥 대충 넘기는 순둥이가 아니라 Fiesty하게 전의를 불태우는 벤치의 투사였다. 14살 때 이후 처음으로 올라가본다는 마운드에서도 그는 최선을 다해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상대로 묵직한 70마일짜리 속구를 뿌렸고, 그런 Aaron Miles의 모습은 결국 유명한 Cardinals 블로그인 Aaron Miles' Fastball 의 탄생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지금까지도 Miles는 David Eckstein, Skip Schumaker와 함께 2000년대 Cardianals 클럽하우스 역사에서 빼먹을 수 없는 인물로 회자되고 있다. Miles는 늘 "I want to play the game the right way" 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는데, 이 말 한 마디에 그에 대한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다.


TLR 밑에서 Miles가 "유틸리티 플레이어의 꽃" 으로 피어나는 것을 본 Cubs는 이를 벤치마킹해 2008년 Mike Fontenot, Ryan Theriot 등 고만고만한 미들 인필더들로 내야진을 꾸려보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Aaron Miles에게 2년 계약을 선사했다. 그러나 2009시즌이 끝난 후 Miles의 2.7M이나 되는 연봉이 부담스러웠던 Cubs는 2년을 못 채우고 Miles를 A's로 트레이드했고, A's에서 다시 Reds로 옮겨갔으며, Reds에서는 방출을 당했다. Miles를 떠나보낸 후 그리움에 사무쳤던 TLR은 옳거니 하고 다시 Miles를 데려왔고, 2010년의 Miles는 타자로써는 79경기에서 타율 .281과 투수로써 2이닝 무실점을 기록했으며, 2루, 3루, 유격수 자리에 구멍이 날 때마다 들어가서 막았다. 이 시즌 Miles의 연봉은 전적으로 (방출 결정을 내린) Reds와 Cubs에서 전부 부담했으니, TLR 입장에서는 제일 좋아하는 선수를 디비전 라이벌들의 돈으로 사용한 셈이었다. 


통산 Cardinals 시절 성적 - 4시즌 481경기 1479타석 8홈런 102타점, .288/.332/.359

                                                  5경기 5이닝 5피안타 2실점, Whip 1.00




Randy Flores

Left-Handed Pitcher

DOB: 1975년 7월 31일 

Birth: Bellflower, California

Time with Cardinals:  2004-2008


Cardinals 팬들에게 Randy Flores는 TLR의 "Go-To Guy" 이자 천상 잡초같은 LOOGY 느낌이 있지만, Randy Flores는 야구 명문 USC의 투수 관련 기록들을 거의 다 가지고 있는, USC Trojans의 전설같은 존재의 선발투수였다다. 당초 Walk-on으로 팀에 들어왔으나 (즉, 고교 시절에 스카우트 된 것이 아니었으며, U of Florida 출신 David Eckstein도 같은 식으로 팀에 들어왔다) Flores는 입학 이후 4년간 한 차례도 All-Pac-10 팀 (Pacific Coast 지역의 학교 10개를 모아부르는 NCAA 디비전 이름으로, 지금은 PAC-12로 확장되었다) 을 놓치지 않았으며, 3차례 All-American 팀에 선정되었고 1995년에는 USC를 대학 월드시리즈에 진출시키며 Pac-10 Pitcher of the Year 상을 수상했다. (13승 3패 3.24).  Flores는 4년간 USC를 대표해 484.1이닝을 던지며 42승 10패 평균자책 3.29의 성적을 거두었고, 22차례의 완투를 해냈는데, 다승/이닝/완투 모두 USC 역사상 최고 기록이다. (484.1이닝은 PAC-12 디비전 내에서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은 기록이며, 대학 야구에서 4년 내내 이렇게 뛰어주는 투수가 별로 없어지는 추세라서 당분간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화려한 대학 야구 생활을 뒤로 하고 Flores는 1997년 드래프트에서 Yankees에 9라운드에 지명되며 프로 생활을 시작했는데, 대학에서 무려 4년을 뛰고 프로에 간 터라 빨리 뭔가 보여주지 않으면 빅 리그로 올라가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2001년에 그가 양키즈 산하 AA볼에서 14승 평균자책 2.78을 기록할 때까지만 해도 빅 리그에 선발로 올라갈 수 있을 듯 싶었으나, 양키즈는 당시 유망주들에게 기회를 줄 여력이 없었다. 그러던 중 Texas, Colorado로 잇따라 트레이드되면서 Flores는 방황했고, 2004년 Cardinals와 계약했을 때 이미 만 28세이던 Flores는 구원이든 선발이든 가릴 사정이 아니었다. 


2004년 9월 로스터 확장 때 Cardinals 유니폼을 입고 데뷔한 Flores는 9경기에서 평균자책 1.93 (14이닝 3실점) 으로 호투했고, 선발로 오래 뛴 터라 멀티이닝도 너끈히 소화함은 물론,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에서는 선발투수들을 아끼려는 TLR의 의도대로 선발등판해 3이닝 1실점으로 호투했다. Flores가 등장하자 Cardinals는 그 때까지 불펜의 핵심 좌완투수이던 Steve Kline을 굳이 붙잡지 않았으며, 2005년 Randy Flores-Ray King 체제 하에서 Flores는 본격적인 LOOGY로써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다. Flores는 2005년에 주로 원포인트 릴리프로 50경기에 등판해서 41.1이닝을 소화하며 평균자책 3.46을 기록하면서 비교적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고,  2006년에는 정규시즌에서 부진했지만 NLCS에서 4차례 등판, 3.2이닝을 3K 무실점으로 막아내면서 시리즈 승리에 일조해 어느 정도 밥값은 했다. (2006 NLCS의 7차전 승리 투수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시즌 이후로 Flores는 "조연"에서 "쩌리"로 전락해버린다.


생긴 것에 비해 참 못했던 투수.

Randy Flores vs. LHB 

2005 : .173/.253/.338 

2006 : .253/.337/.335

2007 : .320/.385/.432

2008 : .302/.422/.549

  2009 : .265/.286/.472 (at Rockies)


Flores는 90마일을 간신히 넘기는 패스트볼과 80마일 초반대의 슬라이더, 70마일대의 커브를 구사하는 투수였고, 나름 Deceptive 한 딜리버리에 꽤나 예리한 슬라이더를 지니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LOOGY로 충분히 효과적일 수 있는 프로필인데, 이상하게 2006년 이후 Flores는 좌타자들을 상대로 아예 위력을 잃어버렸고, 특히 Cardinals에서의 마지막 2년간은 한 때의 Salas 혹은 Boggs 수준의 핵실험으로 많은 팬들을 분노케 했다. 좌타자를 잡으라고 데려다놓은 선수가 좌타자를 잡아내질 못하니 Flores는 순식간에 구단의 짐으로 전락했다. 단순한 패스트볼 구속 저하만이 문제는 아니었으며, 슬라이더가 Zone 바깥으로 Break-away 하지 못하면서 많은 피안타를 양산했고, Flores의 자신감은 계속 하락했다.


이후 미네소타로 이적했을 때, 당시 포수였던 Joe Mauer가 슬라이더를 요구하자 이를 Shake-off 하고 패스트볼을 냅다 던졌는데, Flores의 88마일짜리 패스트볼은 뭐 거의 Meatball 수준이었다. 이에 Gardenhire는 "좌타자에게 패스트볼을 던질 것이었으면 좌투수가 아니라 우투수를 올렸을 것" 이라며 Flores를 비난했고, 이렇게 Flores는 한 때 USC의 전설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다. 그는 2011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했으며, 이후 ESPN의 대학 야구 애널리스트 및 USC 경기 해설가로 활동하던 Randy FLores는 2013년 3월, 모교 USC 야구팀의 어시스턴트 코치로 임명되었다. 이제 Flores는 자기 자리를 찾은 듯 싶다.


통산 Cardinals 시절 성적 - 5시즌 237경기 9승 2패 3세이브 178이닝 154탈삼진 73볼넷, 평균자책 4.35, Whip 1.56




So Taguchi

Utility Infielder, Outfielder

DOB: 1969년 7월 2일 

Birth: Fukuoka, Japan

Time with Cardinals:  2002-2007


이번 조연 특집을 시작할 때부터 가장 마음에 담고 있던 선수이자 조연의 꽃, 소 다구치 형이다. 이빨을 훤히 드러내던 사람좋은 웃음이 트레이드 마크이던 다구치는 인성 뿐 아니라 Grit과 Hustle 그리고 클러치 히팅으로 많은 Cardinals 팬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특히 2006년 NLCS 2차전에서 당대 최고의 마무리 Billy Wagner의 패스트볼을 드라마틱한 결승 홈런으로 만들어내며 모든 이들을 경악케했다. 이 장면은 Cardinals의 2000년대 포스트시즌 역사에서 손에 꼽히는 홈런이며, 이걸 쳐낸 선수가 성실하고도 열과 성을 다해 플레이했던 다구치였다는 사실에 팬들은 더더욱 기뻐했었다.


1992년부터 2001년까지 10년간 오릭스의 붙박이 3루수로 뛴 다구치는 2001년 시즌이 끝나고 32세의 나이로 메이저리그에 도전하는 용기를 냈다. 2002년 1월 29일, 그는 Cardinals와 계약을 하며 구단 역사상 최초의 일본인 선수로 (아직까지는 유일한) 입단하는 영광을 안았는데, 이치로나 마쓰이처럼 일본 프로야구를 제패하고 왔던 선수가 아니었기에 다구치에게는 주전 자리가 보장되지 않았다. 다구치는 입단 이후 첫 2년간인 2002~2003년간 주로 Memphis에서 뛰며 미국 야구에 적응했고, 2003년 8월에 J.D. Drew가 부상을 당하자 그제서야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후 다구치는 이렇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2002년에 그가 처음 미국야구를 접했을 때 많은 전문가들이 AAA 레벨의 많은 파이어볼러들의 강력한 패스트볼에 다구치의 방망이가 밀린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구치는 일본에서도 장타력이 뛰어난 선수가 아니었고, (10년간 장타율 4할 이상은 3번 뿐이었으며, 두 자릿수 홈런도 1번 뿐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엄청난 스피드가 이치로급 컨택트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다구치는 꾸준한 웨이트로 근육을 증량해 패스트볼 대처력을 키우는 한편, 스윙을 최대한 짧게 가져가며 자신의 강점인 변화구 대처력을 높였다. 또한 성실하고 근면한 자세, 겸손한 태도로 마이너리그에서부터 코치들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궂은 일이나 백업 역할을 맡겨도 굉장히 성심성의껏 임했다. 2004년 메이저리그에서 첫 풀타임 시즌을 치르면서 다구치는 TLR, 코치들, 팀 동료들로부터 무한한 신뢰를 얻었다. 특히 TLR은 다구치를 Sam & Dave의 노래 "Soul Man" 을 빗대 다구치를 "So Man"으로 부르면서 애정을 보였고, 특히 누상에서 한 베이스라도 더 가려는 그의 집중력과 기본기에 충실한 그의 수비를 칭찬, 곧 있을 2루 기용을 넌지시 암시했다. 



난 자네가 마음에 든다네. 자넨 어떤가.



2004년 다구치는 팀의 4th OF로 무난히 자리를 잡았으며, 이치로도 밟아보지 못한 월드시리즈 무대에 올라가서 타점도 올리자, 이를 어여삐 여긴 Cardinals에서는 다구치에게 3년간 2.25M의 계약을 던져주었다. 다구치는 계약 첫 해인 2005년부터 경기수(143) 타석수 (424) 홈런 (8개) 타점 (53) 등 모든 기록면에서 커리어 최고 기록을 세우며 WAR 1.1을 기록하는 효율성을 보였고, 외야에 빈 자리가 날 때마다 탄탄한 수비로 메워주었다.. 8월 3일 Marlins 전에서는 4:2로 뒤진 7회 1사 1,2루에서 상대 투수 Beckett을 상대로 TLR이 John Mabry를 대타로 기용했는데, 이에 Marlins 의 Jack McKeon 감독이 좌완 Ron Villone을 투입해 TLR의 매치업 놀이를 저지하려고 하자, TLR은 너무도 당연하게 Mabry를 빼고 다구치를 대타로 투입했다. 결과는 경기를 5:4로 뒤집는 역전 쓰리런이었고, 이후 다구치는 외야수로 경기에 남아있었다. 이러니 TLR이 어찌 다구치를 예뻐하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2006년 정규시즌에서 6월 21일 이후 단 한 개의 홈런도 치지 못하며 홈런 3개로 시즌을 마감한 다구치는 NLDS 3차전에서 Scott Linebrink를 상대로 자신의 포스트시즌 첫 홈런을 쏘아올렸는데, 정작 이것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NLCS 2차전, 6:4로 뒤진 7회 당시 빨간 턱수염을 휘날리던 Scott Spiezio가 2타점 3루타를 치면서 동점을 만들었고, 9회 Billy Wagner가 올라왔을 때 상대한 선두타자는 9회초 대수비로 들어온 다구치였다. 다구치는 극강의 패스트볼과 슬라이더를 던지던 Wagner에게 0-2 카운트로 몰렸으나, 불안불안하게 억지로 Wagner의 98마일 패스트볼들을 커트해내고, 존 바깥쪽에 걸치는 슬라이더를 요리조리 골라가며 풀 카운트까지 끌고갔다. 그리고 9구째 Wagner의 패스트볼을 때려 Shea Stadium을 순식간에 조용하게 만들었는데, 경기 후 "누가 내가 홈런을 칠 거라고 예상했겠어요. 나도 몰랐는데" 라면서 겸연쩍어하던 다구치의 상기된 인터뷰가 기억난다. 동영상 링크


다구치 일본으로 돌아간 이후 NHK에서 야구 해설자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성공적으로 한 시즌을 이미 마쳤다. 다구치는 아직도 St. Louis에 집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며, 이번 2014년 스프링 트레이닝 캠프에도 Larry Walker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다구치 형 블로그 링크 


통산 Cardinals 시절 성적 - 5시즌 578경기 1409타석 19홈런 154타점, .283/.336/.391




Chris Duncan

Corner Outfielder, First Baseman

DOB: 1981년 5월 5일 

Birth: Tucson, Arizona

Time with Cardinals:  1999-2009


Dave Duncan 투수코치의 아들인 Chris Duncan은 고등학교 시절 이미 지역에서 소문난 파워히터였으며, 6'5인치의 거구를 바탕으로 한 힘이 돋보이는 타자였다 (지금의 Matt Adams도 Duncan에 비하면 그다지 커보이지 않는다). 아버지 Dave Duncan은 구단 측에 자기 아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으나, 그런 혈연 낙하산이  없이도 프론트 오피스는 만 18세의 나이에 이미 Upper-Deck으로 홈런을 꽝꽝 때려댈 수 있는 Chris Duncan에게 충분히 매력을 느꼈다.  1999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46번에 뽑힌 Duncan은 프로 입문 첫 2년간은 잠재된 힘을 타구에 싣지 못했으나 (2000시즌 Peoria에서 494타석 8홈런), 2001년에는 훨씬 나아진 모습을 보이며 337타석에서 홈런 13개 2루타 23개를 때리면서 한 단계 크게 나아갔다. 하이A Potomac으로 승격된 후에는 몸쪽 패스트볼에 약점을 드러내며 잠시 부진했으나 (49경기 타율 0.179), 이후 천천히 발전을 계속하며 만 24세 시즌이었던 200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AAA 멤피스에서 21홈런 73타점을 기록하며 마이너리그를 졸업했다.


2006년 Chris Duncan은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자리를 잡지 못한 채 멤피스에서 시즌을 시작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5월 셋째주 (지명타자를 쓸 수 있는) Royals와의 인터리그 시리즈를 앞두고 콜업된다. 시즌 데뷔전에서 투런 홈런을 친 Duncan은 고작 3홈런으로 전반기를 마감했으나, 후반기에 무려 19홈런을 쏘아올리며 후반기 Cardinals 루키 최다 홈런 기록 (종전 Pujols)을 경신한다. 특히 8월달에는 타율 .361에 9홈런 14타점으로 이 달의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경기에 출장하지 않는 날에는 대타 홈런까지 2개나 기록했다. Duncan의 분전 속에도 Cardinals는 이 시즌 후반기에 5할에서 6게임이 모자란 성적을 거두었는데, Duncan이 없었으면 이마저도 힘들었을 것이다. (2006년 후반기 성적 19홈런 34타점 .295/.374/.604). 우투수들의 패스트볼 승부에는 어느 정도 자신있던 Duncan은 Pujols 앞에서 2번타자로 출장해 많은 정면 승부를 했고, 이를 최대한으로 활용해 아주 공격적으로 빠른 카운트에서 풀스윙을 구사, 많은 초구 홈런 혹은 2구 홈런들을 생산해냈다.


Duncan이 이렇게까지 파워 포텐셜을 터뜨리자, 그의 어쩔 수 없는 좌상바 기질에도 불구하고 (2006시즌 좌타자 상대로 2홈런, 타율 .170) TLR도 그를 2007 시즌 외야 구성에서 제외하기가 힘들었다. 전반기에는 72경기에 출장하며 16홈런 .288/.380/.547의 뛰어난 활약을 했던 Duncan은 후반기에 급격히 페이스가 떨어지며 타율 .209에 홈런 5개를 추가하는 데 그쳤으며, 좌상바 기질은 더욱 심해져 좌투수를 상대로는 90타석에서 삼진을 31개나 당하고 장타율은 .313에 그쳤다. Duncan은 2006년 시즌 후반기~2007년 시즌 전반기 사이에만 35홈런을 쳤는데, 이는 그의 통산 홈런수인 55개 중 무려 63%에 달하는 수치이다. 화려한 몇 달을 보내긴 했지만 이 이외의 기간에 Duncan은 반쪽 선수, 조연 혹은 쩌리에 지나지 않았다.




2008년, Duncan은 예년과 마찬가지로 Pujols 라는 최고급 우산을 쓰고 그 앞에서 좋은 공들을 받았지만 전혀 생산성을 보이지 못했고, Memphis로 강등당했다 (추억의 Joe Mather가 대신 올라온다.) Duncan은 승격된 이후에도 계속 빌빌거리다가 7월 셋째주 Nerve Injury로 시즌을 마감했으며, 2009년 수술 후 복귀했으나 전혀 예전 모습을 되찾지 못했다. 이후 Duncan은 팬들의 짜증만 돋구다가 295타석에서 삼진 63개를 당하며 팬들의 짜증만 돋구다가 7월 22일, Red Sox의 유격수 Julio Lugo (역시 허접한 경기력으로 그 지역 팬들의 짜증을 돋구고 있던 선수였다) 와 맞트레이드 되었다. 


공격에서 5할 장타율과 25+ 홈런을 기대할 수 있었다면, Duncan은 그의 좁아터진 수비 범위와 좀 심한 좌상바 기질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메이저리그에서 커리어를 이어나갈 수 있는 선수였다. 그러나 2007년 후반기를 기점으로 그는 완전히 다른 선수가 되었고, 중간중간 있었던 부상들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1루수로써나 좌익수로써나 평균 이하의 수비수였으며, 특히 2006년 월드시리즈에서 Magglio Ordonez의 평범한 플라이볼을 떨구고 이 실책이 다음 타자 Sean Casey의 투런홈런으로 이어지는 장면은 2009년 Matt Holliday의 낭심캐치 장면만큼이나 충격적이고도 감정적으로 힘든 (이 선수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못왔을 것을 알기에) 순간들이었다. 다행히 2006년 월드시리즈는 결과가 좋게 끝났지만...


2010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Duncan은 2011년부터 St. Louis 지역의 야구 라디오쇼에서 야구 애널리스트로 활동했는데, 선수 출신만이 제공할 수 있는 생생한 정보와 꽤나 날카로운 분석력과 유머러스한 입담으로 오후 시간대 지역 라디오 최고 청취율을 기록했었다 (필자도 St. Louis에 다시 갔을 때 잠시 들어본 적이 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이게 Chris Duncan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Duncan은 이후 Fox Mid-West의 Post-game Analysis에서도 활약하면서 방송 쪽에 자리를 잡나했으나, 2012년 10월, 돌연 누구에게도 이유를 말하지 않고 그냥 "개인적인 사정" 이라고 뭉뚱그린 뒤 사라졌다. 많은 이들이 그가 어머니의 투병 떄문에 그러는 게 아닌가 했으나 (Dave Duncan 투수코치 역시 St. Louis에서는 못잖게 중요한 인물이기에 많은 이들이 이를 알고 있었다) 결국 Chris Duncan 본인이 Brain Tumor, 즉 뇌종양 진단을 받고 수술을 했다는 충격적인 사실로 드러났다.


Duncan은 뇌수술 이후 고통스런 Chemo-therapy (약물치료)를 거친 끝에 지금은 일단 MRI 상으로 보이는 종양은 모두 걷어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의학쪽 지식이 없기에 함부로 말할수 없으나) 한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Duncan의 갖고 있던 종양은 유난히 악성종양으로 (Grade IV Glioblastoma), 이 종양은 다시 돋아날 수 있다고 한다. Duncan은 현재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남은 생 내내 암과 투병할 것이며, 진단 이후 평균 수명은 10년 내외라고 한다. 언제 다시 암이 재발할 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나이 서른 셋이 채 안된 젊은 Duncan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바로 라디오 쇼를 통해 "암 투병을 하고 있으나 의료 보험이 없어 적절한 치료를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을 위해 기금을 모으는 일이라고 한다. 


* 사망 선고와 가까운 암을 이겨낸 동생 Chris에 못잖게 형인 Shelley Duncan (Yankees와 Indians에서 뛰던 외야수) 도 강력한 멘탈로 치면 뒤지지 않는다. 그는 원정경기 도중 (2013년 6월) 어머니가 오랜 투병 생활 끝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으나, 곧장 짐을 챙기는 대신 무려 일주일 동안 남은 원정 경기 스케줄을 모두 치르고 휴식일을 기다린 뒤 장례를 치르러 갔다. 이 당시 Shelley가 뛰던 팀은? 다름아닌 Rays 산하 마이너 팀인 Durham Bulls였다.


통산 Cardinals 시절 성적 - 5시즌 389경기 1317타석 55홈런 175타점, .257/.348/.458


by Doo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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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kiel 편에서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졌던 것 같아 이번에는 TLR 시대의 쩌리 모듬을 준비해보았다. 아니, 쩌리라는 표현보다는 아무래도 TLR 시대의 "영광스런 조연들"이 조금 더 어울리려나? 이 모듬에 이름을 올릴만한 많은 선수들이 있지만 스크롤 압박 상 이번 포스팅에서는 필자 재량껏 4명만 추려보았다.


Craig Paquette 

Corner Infielder, Outfielder

DOB: 1969년 3월 28일 

Birth: Long Beach, CA

Time with Cardinals:  1999-2001


Craig Paquette은 대단할 게 없는 공격력과 평균 이하의 수비력을 지녔던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TLR 초 여러 포지션에 땜질을 하러 뛰어다니며 수고했다는 점을 높이 사서 이 리스트에 포함시켰다. 1989년 드래프트에서 A's에 8라운드에 지목되며 프로 생활을 시작했고, 본 포지션인 3루수만 맡아서는 경쟁력이 없었기에 유격수, 2루수, 코너 외야 등 많은 곳에서 수비 경험을 쌓았다. 1995년까지는 AAA와 ML레벨을 오가며 굉장히 애매했으나, 1996년 Royals에서 22홈런을 때리면서 처음으로 이름을 알렸다. 1998년 Mets 유니폼을 입었으나 부상과 부진으로 전혀 자리를 못잡고 방황하다가 1999년 7월 31일 데드라인 직전에 Cardinals 로 트레이드되었는데, 이 인연으로 이후 3시즌간 Fernando Tatis, Mark McGwire 등의 부상 때마다 이곳 저곳을 메우며 기대 이상의 활약을 해주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Paquette이 훨씬 더 Cardinals 유니폼을 일찍 입을 수 있었으나, 에이전트 Scott Boras의 무관심으로 이적이 진작에 성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A's 감독 시절 팜에서 자라던 Paquette을 눈여겨보았던 TLR은 St. Louis에 부임한 후 Paquette의 이적을 꾸준히 추진해왔으나, 그때마다 Boras를 비롯한 Paquette의 에이전트들이 제대로 그의 입장을 대변해주지 못해서 결국 인연이 닿지 않았다는 것이다. Paquette이 St. Louis에 처음 온 날, 코치 Dave McKay가 와서 나눈 첫 마디가 "우린 자네를 굉장히 찾았는데, 왜 이렇게 연락이 안되나?" 라고 했다고 한다.


Paquette은 기량에 비해 Cardinals 팬들로부터 상당히 호평을 받았는데, 이는 그가 Cardinals 유니폼을 입은 그 첫 한 달간  임팩트 있는 활약으로 뭔가 묘하게 "클러치 사나이" 같은 느낌을 줬기 때문이다. 그는 99년 8월 3일에 열린 데뷔전에서 8회말 Padres 릴리버 Dan Miceli를 상대로 투런홈런을 치면서 제대로 신고식을 했고, 며칠 후에는 Phillies 전에서 9회 대타로 나가 솔로 홈런을 쳤다. 8월 15일에는 Terry Adams를 상대로 9회 끝내기 안타를 뽑아냈으며, 그 다음 날인 16일에는 Randy Wolf를 상대로 역전 쓰리런을 쳤고, 17일에는 만루에서 끝내기 2타점 2루타를 후렸다. TLR도 당시 "확실히 아드레날린이란 것은 무서운 것 같다" 며 유난히 클러치 히트를 많이 쳐냈던 Paquette을 신뢰했는데, 이렇게 쌓인 TLR의 호감은 결국 돌글러브 Paquette의 잦은 2루 기용으로 표출되었다. 8월 한 달간 타율 3할에 5홈런 20타점을 기록하며 피어나기 시작한 Paquette은 이어서 9월달에는 4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하기도 하며 .229의 ISO와 .516의 장타율을 기록하며 로스터에 자리를 잡았다. (Paquette의 클러치 본능에 관한 잘못된 편견은 2001시즌에 그가 무려 득점권에서 무려 .372/.435/.521의 말도 안되는 성적을 기록하면서 더더욱 굳건해졌다.)


2001시즌이 끝나고 FA 자격을 획득한 Paquette은 전년도의 미친듯한 득점권 성적과 2년간 30홈런을 친 쓸만한 파워, 그리고 5개 포지션을 (모두 평균 이하 수준의 수비로) 소화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워 Tigers와 2년간 5.7M짜리, 본인의 기량에 비해 상당히 큰 규모의 계약을 따냈다. Paquette이 만약 좌투수를 씹어먹는 완벽한 플래툰용 우타자였다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었겠지만, Paquette은 커리어 내내 좌우 스플릿이 상당히 균등한 편이었으며, 좌투수를 상대로 OPS가 8할이 넘었던 것은 2001년 딱 한 차례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의 3루 수비는 David Freese를 골드 글러버처럼 보이게 할 수준이었으며, 어깨는 약했고, Plate Discipline은 정말 최악이었다 (3년간 K%는 20% 이상, BB%는 5% 미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Paquette은 2년간의 풀타임 시즌 (2000~2001년) 동안 800타석 가까이를 보장받았다. 


Paquette은 2003년 Tigers에서 방출당한 이후 Cardinals와 다시 마이너리그 계약을 체결했는데, "2주만 마이너리그에서 뛰어보고 콜업되지 않으면 그만두겠다" 는 조항이 포함된 계약이었다. Paquette은 2주를 뛰었고, 메이저리그 로스터에는 자리가 나지 않았다. Paquette의 계약이 딱 끝난 그 다음 날 (15일째), 2루수 Fernando Vina가 부상으로 DL에 올랐다. 그러나 아쉽게도 Paquette은 더 이상 Cardinals 소속 선수가 아니었다. Paquette은 이후 메이저리그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2007년 독립리그에서 한 시즌을 보낸 기록이 남아있으나 지금은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


통산 Cardinals 시절 성적 - 305경기 951타석 40홈런 162타점, .267/.309/.461




Eli Marrero 

Catcher, Outfielder, and First Baseman

DOB: 1973년 11월 17일 

Birth: La Habana, Cuba 

Time with Cardinals:  1997-2003


비록 조연 특집에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Eli Marrero는 다들 주연이 될 것으로 예상한 선수였다. 1993년 드래프트 3라운드에서 지명되었던 Marrero의 운동능력은 모두에게 인정받았으나, 이 운동능력을 기량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Marrero에게 늘 고질적인 문제였다. Marrero는 늘 타격에서 허술함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Cardinals 팜 시스템을 매년 한 레벨씩 차근차근 모범적으로 밟고 올라왔다. 강한 어깨와 점점 나아지는 타격, 쓸만한 Pop과 포수치고 상당히 빠른 발까지. 마이너에서 단 한 차례도 .273 이상의 타율을 기록한 적은 없을만큼 컨택트에 문제가 있었으나, 점차 발전하는 수비와 강한 어깨로 포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수 있다면 포수 수비에 더 중점을 두는 Cardinals 와 잘 맞는 포수가 되지 않을까 기대되었다. 1997년 Marrero는 BA 선정 전미 유망주 37위에 랭크될 정도로 촉망되는 젊은 포수였으며, AAA 포수들 중 가장 높은 타율 (.273)을 기록함과 동시에 같은 리그 감독들로부터 "Best Defensive Catcher of the League"로 뽑혔다. Cardinals는 1997년 9월 로스터 확장 때 Marrero를 콜업해 베테랑 포수 Tom Lampkin에게 사사를 받게 했다.


1998년 스프링 트레이닝 초반, Marrero는 갑상선에 암이 생겼다는 충격적인 진단을 받고 즉시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시즌 개막을 한 달 남기고 받은 수술인데다 항암치료로 인해 신진대사율이 급격히 떨어진 탓에 Marrero가 정상적으로 복귀할 수 있을 지는 큰 의문이었다. Marrero는 그러나 정규시즌 개막 일주일 후 포수 Pagnozzi가 DL에 오르자 바로 로스터에 합류했고, 첫 경기에서 홈런과 3루타를 치며 모두를 놀라게했으나, 지나치게 이른 복귀는 결국 독이 되었다. 이 시즌 그는 ML에서도 그의 수준급 도루 저지 능력과 뛰어난 운동신경, 강견이 통한다는 것을 어느정도 증명했으나, 마이너리그 시절 보였던 약점이 더욱 증폭되었는데, 일단 스윙이 너무 커서 변화구 대처 능력이 몹시 떨어졌으며, 시즌 중 약물 치료 때문에 조울증 및 의지 박약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arrero의 Upside를 높이 평가한 TLR은 그를 "Best Athlete on the team" 이라고 서슴없이 칭하며 그에게 이듬해 개막전 마스크를 씌웠다. ("Eli is one of the best athletes in baseball with his quickness, his live bat, his arm and his defensive capabilities.")


1999년 개막전에서 Marrero는 5타수 3안타 2루타 2개 2타점으로 맹활약 했고, 4월 23일 Dodgers 전에서는 박찬호를 상대로 자신의 시즌 첫 홈런을 쏘아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이후 Marrero는 점차 페이스가 떨어지더니 끝내 6월 13일 이후로는 단 한 개의 홈런도 치지 못했으며, 결국 시즌을 114경기에서 .192/.236/.297, wRC+ 27이라는 형편없는 성적으로 마감한다. 이는 OPS+ 역순으로 매겼을 적에 1973년 이후 역대 포수 최악의 타격 6위에 드는 역사적인 시즌이었다. (이 랭킹 Top 30에 무려 두 차례나 이름을 올리신 분이 바로 MM이다).


자신감이 완전히 바닥을 친 Marrero는 이후 타격폼을 대폭 수정, 오픈 스탠스와 짧고 간결한 스윙을 장착한 뒤 2002년 모처럼 밥값을 했다. 131게임에서 18홈런 66타점, .262/.327/.451에 wRC+ 106를 기록하며 Break-out 시즌을 가진 것이었다. 이 시즌 Marrero는 좌익수, 우익수, 중견수, 포수로 모두 36경기 이상 출장했으며, 특히 중견수와 포수로 이렇게까지 많은 경기를 동시에 출장한 것은 Craig Biggio 이후 처음있는 일이었다. (7월7일 Dodgers 전에서는 CF-->RF-->C-->RF로 한 경기에 3차례 포지션을 바꾸는 일이 있기도 했다). 다만 골드글러버 포수 Mike Matheny의 존재 때문에 이미 Marrero는 팀에서 포수로써의 가치가 점점 하락하고 있었고, 결국 2002시즌이 끝났을 때 팀은 Marrero를 포수보다는 외야수로 보고 있었다. 재능은 있었지만 Inconsistency 때문에 그 재능을 맘껏 펼치지 못했던 Marrero는 미친듯한 몰아치기 이후 몇 주간의 슬럼프로 TLR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고, 결국 J.D. Drew와 함께 패키지로 묶여 Braves로 트레이드되었다.


3루타를 기대할 수 있던 몇 안되는 포수.



Marrero의 운동능력은 한창 때의 Russell Martin을 연상시켰으며, Tool 하나 만큼은 90년대 Cardinals 팜에서 손꼽히는 수준이었으나, 이를 Performance로 연결시키지 못한 아쉬운 케이스에 속한다. 그는 3경기 연속 홈런을 때리거나 컨디션이 좋을 때는 늘 사이클링 히트에 쉽게 도전하는 선수였으나, 컨디션이 나쁠 때는 3~4주씩 안타를 치지 못했다. 그의 Tool에 매료되었던 TLR은 상당히 Marrero에게 인내심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이 젊은 포수가 그의 능력을 맘껏 펼쳐보기를 누구보다 바랬었다. 그러나 Marrero가 다양한 잔부상에 시달리며 (어깨, 손가락, 복근, 갈비뼈 등) 커리어에 시동을 걸지 못한데다가 막판에는 포수를 더 이상 보지 않겠다고 하자 결국 2003년 그와의 이별을 선택했다. Paquette과 마찬가지로 Marrero 역시 저니맨으로 이곳 저곳 옮겨다니면서 자리를 잡지 못하다가 2006년 오프시즌에 Cardinals로의 복귀를 추진,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으나, 멤피스에서 1경기만 뛰고 2007년 5월 다시 방출되었다.


Marrero는 2011년 7월부터 Montana에 연고한 Billings Mustangs (Reds 산하 루키리그 팀) 에서 타격 코치로 일했으며, 2013년에는 Arizona League Reds (GCL 산하 Reds 마이너팀)의 감독으로 취임해 지도자로써의 커리어를 이어나가고 있다. Jocketty와의 친분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통산 Cardinals 시절 성적 - 7시즌 525경기 1577타석 43홈런 187타점, .238/.295/.390



Miguel Cairo 

Utility Infielder

DOB: 1974년 5월 4일 

Birth: Anaco, Venezuela 

Time with Cardinals:  2001-2003, 2007


1980년대 Fernando Valenzuela 대박 이후 Ramon Martinez, Ismael Valdez 등을 건져오면서 중남미 시장 공략에 재미를 들인 Dodgers는 1990년 16세의 어린 Venezuela 출신 내야수를 스카우트 해오는데, 이게 "가늘고 길게" 메이저리그에서 17년동안 커리어를 이어온 Miguel Cairo의 시작이었다. Cairo는 이후 Dodgers -> Mariners -> Blue Jays -> Cubs 등 많은 팀을 거친 끝에 1997년 메이저리그 확장 드래프트 때 신생팀 Tampa Bay에게 지명되고, Devil Rays의 창단 멤버로 데뷔했다. 1998년 풀 타임 첫 시즌에 Cairo는 150경기에 출장해 558타석을 소화하고 WAR 2.4를 기록하는데, 이것은 Cairo의 단일 시즌 최고 기록이며, 이 이후 Cairo는 15년이 넘는 기간동안 400타석 이상을 받아본 것은 달랑 한 번, WAR 1.0 이상을 기록해본 것도 달랑 한 번 뿐이다. Cairo의 커리어는 전형적인 유틸리티 플레이어의 그것인데, 이렇게 처음부터 "유틸리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선수가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다는 Versatility 하나로 무려 17년간 커리어를 이어나갔다는 사실은 Cairo라는 선수에 대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슷한 선수로는 Craig Counsell이나 Mark DeRosa가 있지만, Cairo가 더 upside가 낮은 선수였다). 2001년 여름 Cairo가 Cubs에서 방출되자 내야 유틸리티 플레이어가 필요했던 TLR이 Cairo를 8월 중순에 웨이버 와이어에서 건지면서 Cardinals 유니폼을 입게 되었는데, 이는 양측에게 적절한 만남이었다.


Cairo의 Cardinals 커리어의 하이라이트는 2002년이다. 이 해 Cairo는 정규시즌에서 대타로 .322라는 대단히 높은 타율 (59타수 19안타) 을 기록하며 TLR의 예쁨을 한껏 받았으며, 포수와 투수, 중견수의 센터라인을 제외한 필드의 전 포지션을 모조리 소화하며 TLR의 변태적인 욕구도 충족시켜 주었다. 게다가 Cairo는 포스트시즌에서 아무도 기대치 않은 광적인 활약까지 선보였다. NLDS 2차전에서 (자세한 내용은 TLR 시리즈 Scott Rolen 편 참조) Scott Rolen이 부상당하자 Cairo가 라인업에 들어왔고, 그는 3차전에서 2회 적시타, 4회 HBP, 6회 안타, 8회 BK를 상대로 1타점 2루타를 날리는 등 3타수 3안타 2타점 2득점의 맹활약으로 Scott Rolen의 공백을 완전히 메워버렸다. Cairo의 미친 타격감은 NLCS 1차전에서도 이어졌는데, 이 날도 Cairo는 첫 타석에서 모두 안타로 출루한데 이어 3번째 타석에서는 Giants의 좌완 똥볼러 Kirk Rueter를 상대로 투런홈런을 쏘아올리며 무려 7타석 연속 안타를 기록했고, 5차전에서도 5타수 2안타를 기록하는 등 13타수 5안타로 시리즈를 마감했다. 


Miguel Cairo는 대표적인 No-Tool Player라고 할 수 있지만, TLR 시대의 키워드이자 "제 6의 툴" 이라고 할 수 있는 "Grit + Hustle"을 갖춘 베테랑이었고, 그랬기에 2000년대초 Cardinals에서 그의 존재는 결코 작지 않았다. 한 가지 지나치기 쉬운 사실: Cairo는 장기계약을 하기 힘든 Utility Player 답게 커리어 내내 1년 계약밖에 할 수가 없었고, 2003년 첫 FA때부터 무려 9차례나 FA 시장에 나왔으며, 9차례 전부 메이저리그 계약을 손에 넣었다. 이 사실 하나로도 Miguel Cairo는 존중받을만한 선수이다.


Cairo는 Reds에서 3년, Cardinals에서 4년 총 7년간 Jocketty와 함께 했으며, 그 기간동안 모범적인 생활과 리더십으로 Jocketty에게 큰 신뢰를 받았다. 2013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Miguel Cairo가 구단 운영에 관심을 보이자 Jocketty는 그를 특별 어시스턴트 (Special Assistant to GM) 로 고용했으며, 스프링 캠프에서는 인스트럭터로 일하고 있다.


통산 Cardinals 시절 성적 - 4시즌 255경기 605타석 8홈런 67타점, .253/.301/.376



Brad Thompson

Right-handed Pitcher

DOB: 1982년 1월 31일 

Birth: Las Vegas, Nevada

Time with Cardinals:  2005-2009


2002년 드래프트에서 16라운드에 지명되었던 Brad Thompson은 TLR 시리즈에 올리기에는 아직도 창창한 나이이지만, 그래도 5년간 이곳 저곳 땜질을 해주면서 "유틸리티 투수" 같은 활약을 해주었기에 리스트에 추가했다. 사실 Thompson은 전력에 도움이 되었다기보다는 Replacement Level 수준의 이닝 소화를 해주는 데 그치긴 했으나, Thompson처럼 TLR 시대에 5년동안 ML 로스터에서 뛴 투수들의 숫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2003년 프로 입문 첫 해에 65.2이닝동안 홈런 2개만을 허용하며 좋은 인상을 남긴 Thompson은, AA에서는 본격적인 선발투수로써의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Thompson은 위력적인 싱커를 앞세워 AA팀 Tennesee Smokies 에서 날아다니기 시작했는데, 무려 57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을 세우며 한 세기 묵은 이 리그의 연속이닝 무실점 기록을 갈아치운 것이었다. AA에서 13경기 8승 2패 평균자책 2.36에 세컨더리 피치였던 슬라이더까지 큰 발전을 이룩하면서 탈삼진도 잘 잡아내기 시작했고, 프로 입문 2년만에 AAA의 Memphis까지 올라갔다. Low Upside의 대졸 우완이라는 프로필은 어쩔 수 없었지만, 이렇게까지 잘하니  빅 리그에서 어떻게 던지나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Brad Thompson은 St. Louis와 Memphis 사이를 가장 많이 왔다갔다한 선수일 것이다. Mop-up 롤이 익숙했던 그는 추가 영입이 있을 때마다 25인 로스터에서 가장 제외하기 쉬운 선수였고, 또한 투수진에 일손이 딸릴 때 가장 쉽게 콜업할 수 있던 선수였다. 1이닝 릴리프, 혹은 Low-Leverage 상황에서의 멀티이닝 릴리버 역할을 맡을 떄의 Brad Thompson은 로스터 자리가 아까운 선수가 결코 아니었다. 2005년 루키 시즌에 57.2%의 엄청난 GB%를 앞세워 상당히 효과적인 피칭을 선보였고, 2006년 WS 우승 시즌에도 43경기를 소화하면서 그럭저럭 제 역할을 했다. 그러나 2007년에 17차례의 Spot-start를 소화하면서 총 126이닝을 소화했는데, 이 때 Thompson은 87~90마일 수준의 Hittable한 싱커 + 플러스 피치라고 볼 수 없는 수준의 슬라이더라는 단조로운 피칭 조합 때문에 타자들을 많이 상대할 수록 엄청나게 두들게 맞기 시작했다. 특히 좌타자들은 Thompson의 싱커를 몹시 좋아했으며 (슬래시라인 .343/.403/.567), 타순이 한 번 돈 이후에는 피안타율이 3할이 훌쩍 넘어가기 시작했다. 릴리버일 때는 효과적으로 제압하던 피홈런 갯수도 무려 23개로 급증했다. (HR/FB =14.7%)


Thompson은 늘 좀 부담스러울 만큼 동안이었다.



Brad Thompson은 지금의 Seth Maness와 비슷한 유형의 투수였으며, High-Leverage 상황에서는 절대 올라와서는 안될 투수였다. 그러나 25인 로스터를 꾸려가며 6개월의 시즌을 치르는 중에는 Thompson같은 Replacement Level의 투수들도 종종 필요하게 마련이며, 특이한 점은 Thompson이 희한하게도 무려 5년을 이런 역할로 버텨낸 것이다. 2009년 Cardinals를 떠난 Thompson은 2010년 Royals로 이적했으나 여전히 예전의 Effectiveness는 잃어버린 지 오래였고, Astros 마이너리그에서 잠시 뛴 이후 독립리그로 이적해갔다. Brad Thompson은 2013년 3월 뉴저지 연고의 독립리그 팀인 Somerset Patriots와 계약했고,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이제 만 32세의 Thompson이기에 아직도 현역으로 10년은 족히 뛸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갑자기 너클볼을 배우거나 Oswalt처럼 감전 사고를 당하고 구속이 오르는 일이 없지 않는 이상 빅 리그에 복귀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통산 Cardinals 시절 성적 - 5시즌 21승 17패 평균자책 4.36, 185경기 (32선발) 405.1이닝 190탈삼진, GB = 52.3%



by Doo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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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k Ankiel - Part II (타자 편)


Rick Ankiel


2005년 - 투수 포기 선언

스프링캠프가 막 시작한 3월 8일, Ankiel이 등판할 예정이었던 Marlins와의 스플릿 스쿼드 경기가 비로 취소되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Ankiel 은 TLR의 사무실을 찾아가 "할 만큼 했다" (I've had enough) 며 투수 포기를 선언한다. TLR도, Jocketty도, 말리지 않았다. 아니, 말릴 자격이 없었다. 지난 몇 년간 수 차례의 재활과 승격, 그리고 재발, 중간 중간 심심치않게 찾아온 부상들까지 이겨내면서 여기까지 온 Ankiel을 알고 있었기에 아무도 말릴 생각을 못했다. 3월 9일 아침, Ankiel이 메이저리그에서 투수로 은퇴한다는 보도 자료가 나갔다. 

다음은 당시 MLB.com Cardinals 담당 리포터였던 Matthew Leach의 3월 9일자 기사에서 발췌했다.

"I just felt like after Puerto Rico, I had changed mechanically...Just coming back, I couldn't seem to replicate it. This whole time, the frustration I built up into it. It just seemed like it was beginning to erode my spirits, and affect my personality, off the field as well. The frustration as it was, it was time for me to move on and pursue being an outfielder."

-Rick Ankiel, on deciding to give up pitching (March, 2005)


Ankiel의 외야수 전향은 Ankiel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었다. 야구를 관두기에 너무 강력한 그의 어깨, 그리고 운동신경이 아까웠던 TLR과 Jocketty 가 외야수로의 전향을 제안했고, Ankiel은 흔쾌히 허락했다. 이 둘은 Ankiel의 커리어와 시련에 있어서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고, 어떤 방식으로든 이 천재적인 선수의 빅 리그 복귀를 돕고 싶어했다. 스프링캠프가 끝나기 전, Ankiel은 Cardinals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고 커리어의 리셋 버튼을 누른다. 당시 그의 나이 25세 8개월. 그러나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측면에서 그에게 시간이 그다지 많은 것은 아니었다. 

Ankiel이 루키 리그로 내려가서 재활을 하던 2001년, TLR과 Jocketty는 Ankiel의 자신감 회복과 긴장 완화를 목적으로 Ankiel에게 종종 "DH 알바" 를 뛸 것을 제안한 바 있었다. 이 방침에 따라 Ankiel은 등판하지 않는 날은 지명타자로 뛰었는데, 44경기 118타석에서 홈런 10개 35타점 .286/.364/.638의 성적을 냈었다. 야구에 흥미를 잃지 말라고 투입했다기엔 상당히 무시무시한 성적으로, 아무리 루키 리그라지만 11타석 당 홈런 1개씩을 뽑아낸 그의 파워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이미 Ankiel의 타격실력은 그의 짧았던 빅 리그 커리어에서도 증명이 된 바 있었는데, 데뷔 한 지 갓 한 달이 안된 4월 셋째 주에만 홈런을 2개 뽑아낸 것이었다. (결국 그는 투수로써 아주 준수한 .250/.292/.382의 타격 성적으로 2000 시즌을 마무리했다.)


수염 기르는데는 딱히 재능이 없는 듯 하다.


2005~2007: Transition

외야수 전향 첫 시즌은 성공적이었다. Ankiel은 A볼의 Quad City을 51경기만에 OPS .881을 기록하며 쉽게 졸업헀고, AA볼의 Springfield에서도 34경기만에 홈런 10개를 쳐냈다. 선구안과 컨택에 분명 문제가 있었으나, 25세에 처음으로 전문 타자로 나선 것 치고는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특히 수비에서 Ankiel의 발전은 상당히 빨랐고, AA로 승격되었을 즈음에는 이미 "ML 레벨에서 중견수를 볼 수 있을 것" 으로 기대되었다.

점점 메이저리그를 향해 한 발짝식 전진하고 있던 그는 2006년 스프링 트레이닝 캠프에서 Patellar Tendinitis (J.D. Drew가 겪었던 바로 그 무릎 부상이다) 진단을 받고 그 해 6월 무릎 수술을 받으며 시즌 전체를 날린다. 그러나 다른 선수라면 모를까, Ankiel에게 이런 정도의 Set-back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2007년을 AAA 멤피스에서 시작한 그는 초반부터 절정의 타격감을 보이며 시즌 첫 두 달만에 홈런 22개를 쳐냈다. 당초 투수에서 타자로의 전환에 희망적이지 않았던 언론에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5월 28일 그는 Arkansas 전에서 무려 530피트 짜리 홈런을 쏘아올려서 타격코치 Rick Eckstein (그렇다, David Eckstein의 형이다) 의 입을 쩍 벌어지게 했다. 6월 16일 Ankiel이 Iowa 전에서 한 경기 3홈런을 때려내자 ESPN에서 단독 인터뷰 제의가 들어왔다. "그 날" 이후로 언론과의 접촉을 극히 불편해하던 Ankiel은 조심스럽게 수락했다. Ankiel의 절친 Tagg Bozied는 팀 동료 Ankiel에게 대해 한 마디 해달라는 부탁에 "그 친구는 자기 얘기가 언론에 실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며 멘트 요청을 거절했으나, Ankiel이 직접 "괜찮다" 고 말하자 입을 열었다.

“He’s got a ton of talent and strength. He’s a hard worker. He’s only going to get better. He works out. He eats great. He’s dedicated — 100 percent....But he is really high-strung on baseball. He’s got that dynamic in his brain that he really believes he can be successful every time he goes up there."

-Tagg Bozied, on his teammate Ankiel

Ankiel의 죽마고우이자 고등학교 때부터 같이 야구를 했던 친구 Chad의 2001년 인터뷰에 따르면, Ankiel은 어렸을 때부터 팀에서 그 누구보다 일찍 운동하러 (고교시절 매일 아침 6시반에 Work-out을 했다고 한다) 나오는 선수였으며, 자기가 여태껏 본 어떤 선수들보다 Hard-worker였다고 했다. TLR, Adam Kennedy, Matt Morris 등도 공개적으로 Ankiel의 Work-Ethic을 크게 칭찬한 바 있었기에 Ankiel이 열심히 노력하는 선수라는 사실은 그다지 놀라울 게 없다. 그러나 Ankiel이 스스로에게 얹는 부담감 측면을 짚어냈다는 측면에서 Tagg Bozied의 코멘트는 주목할만 하다. 매 타석 스스로에게 잘 해야한다는 압박감을 주는 선수가 10번 중 7번은 실패하게 마련인 직업을 선택했으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 

당장 Ankiel을 보고싶었던 팬들의 성화가 있었으나, TLR와 프론트는 Ankiel에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고, "Give him all the time he needs" 라며 Ankiel에게 여유를 주었다. Ankiel은 그 사이 전반기를 무사히 마쳤으며, 102경기에서 32홈런을 때려내고 리그 최다 득표 선수의 영예를 안으며 마이너리그 올스타에 뽑혔다. 투수로 마이너리그를 지배했던 그가 타자로 다시 마이너리그를 제패하는 데에 걸린 시간은 8년에 불과했다.

Rick Ankiel's Minor League Track Record (Batting)

YearAgeTmLgLevGPAABRH2B3BHRRBISBCSBBSOBAOBPSLGOPS
2005252 Teams2 LgsA-AA8536932151831712175003766.259.339.514.853
200525Quad CitiesMIDWA5122318533501011145002737.270.368.514.881
200525SpringfieldTLAA341461361833701030001029.243.295.515.809
200727MemphisPCLAAA102423389621041533289432590.267.314.568.883


그 날 #2 (2007년 8월 9일) 

Padres와의 홈 3연전. TLR이 무려 6년 반 만에 선발 라인업 카드에 Rick Ankiel이라는 이름을 써넣었다. 다만 9번타자 투수가 아닌 2번타자 우익수로였다. Ankiel이 지난 몇 년간 어떻게 커리어를 연장해왔는지 잘 알고있었던 동료들은 Ankiel 어떤 데뷔전을 가질지 기대할 수 없었다. 아니, 기대하기 두려워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다만 시즌 초부터, 아니 어쩌면 2001년부터 그를 기다려왔던 홈팬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Ankiel의 첫 타석부터 그에게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다.

첫 세 타석에서 안타를 치지 못한 Ankiel이 7회말 2사 2,3루에서 4번째 타석에 들어섰다. 릴리버 Doug Brocail의 슬라이더가 몰렸고 Ankiel의 방망이가 돌았다. 우측 담장을 넘는 3점 홈런. 수줍고 조용한 Ankiel 도 감정을 완전히 억제할 수는 없었다. 베이스를 돌며 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아마 Cardinals 팬들이라면 Ankiel보다 덕 아웃에서 마치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행복해하던 Tony La Russa의 모습이 더 신기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La Russa가 이 정도로 기쁨을 표현하는 모습을 본 것은 딱 3번 있었는데, 나머지 두 번은 2006년 WS 우승 때와 2011년 6차전 Freese의 홈런 때이다.  동영상 링크 

(동영상 링크의 중계를 들으시면 Fox Midwest 의 Al Hrabosky가 "혹시 Ankiel을 거르고 Pujols를 상대할 가능성은 없을까요?" 라며 시답잖은 농담을 하는 걸 감상하실 수 있으며, 혹시 이 영상을 안보셨던 분이 있다면 꼭 Ankiel의 curtain call 장면까지 보시길 바란다.


그가 돌아왔다.


이틀 후인 8월 11일, Dodgers 전에서 Ankiel은 1회 Derek Lowe의 싱커를 걷어올려 투런 홈런을 작렬했고, 7회에는 Roberto Hernandez의 패스트볼을 넘기며 타자 전향 후 3경기만에 멀티홈런 게임을 만들어냈다. 이미 홈런을 두 개 친 상황에서 그는 타구판단 실수를 미친듯한 운동능력으로 극복하는 Reverse-Over-the-Shoulder 캐치로 팬들을 감동시켰으며, 이미 Ankiel의 복귀 자체에 잔뜩 흥분해있던 Cards 팬들은 High-Intensity 수비와 폭발적인 장타력을 보여주는 Ankiel을 금세 Fan Favorite으로 흡수해버렸다. 

그 다음 주에 Rick Ankiel은 Wrigley Field에서 라이벌 Cubs를 상대로 7회 쐐기 홈런을 치면서 팀 승리를 이끌었고, 8월 31일에는 자신을 상대하려고 올라온 좌완 릴리버 Eddy Guardado를 상대로 7회 자신의 데뷔 첫 만루홈런까지 쳐냈다. 9월 2일에 벌어진 Reds와의 홈 3연전에서는 무려 2홈런 9타점을 몰아쳤다. 팀 타선이 폭발한 9월 6일 Pirates 전에서는 혼자 2홈런 7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16:4 대승을 이끌었다. 언론에서는 Ankiel을 Babe Ruth 에 비교하기 시작했고, Robert Redford 주연의 영화 제목이자 한때 Ken Griffey Jr.의 별명이었던 "The Natural"이란 말이 Ankiel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비록 9월 한 달간 팀이 무려 12연패를 당하면서 한  때 .358이었던 타율은 결국 .285에서 마감했지만, Ankiel의 2007시즌 마지막 두 달간의 활약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2008시즌 - The Comeback Kid

Ankiel의 외야수 커리어에서 몇 안되는 풀 타임 주전 시즌. Jim Edmonds가 떠난 Busch의 광활한 센터 자리에는 2005년 드래프트에서 건진 차세대 중견수 Colby Rasmus가 차근 차근 단계를 밟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 사이의 Gap을 메우기에 "자체생산" Ankiel은 아주 적절한 선수였다. Schumaker - Ankiel - Ludwick 로 구성된 당시 Cardinals 외야진은, 세 선수가 모두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내면서 Edmonds의 공백을 최소화했다. Schumaker는 3할을 쳤고, Ludwick은 Break-out 시즌을 보내며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Ankiel은 전반기에만 무려 20홈런 50타점을 기록하며 "이러다가 40홈런을 치는게 아니냐" 는 반응도 있었다. 

Ankiel은 2번부터 8번까지 많은 타순을 소화헸으나 (이건 TLR의 팀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20경기 중 75경기에서 클린업 (주로 4번) 을 쳤다. 2007~2008시즌의 성공의 가장 큰 원인은 그의 재능 자체였겠지만, 필자는 2006년 Ankiel이 부인 Lori Ankiel을 만나 결혼에 성공하고 정신적으로 그를 지켜줄 반려자를 만난 것이 결정적이지 않았나 싶다.

2009시즌 

2009년 5월 5일, Ankiel은 Phillies 전에서 Pedro Feliz가 친 좌중간 큰 타구를 워닝 트랙 근처에서 다이빙 캐치로 멋지게 잡아낸다. 그러나 타구를 잡자마자 머리를 펜스에 크게 박은 뒤 쓰러져 관중들은 물론 경기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긴장시켰다. Ankiel은 의식을 잃지는 않았으나 잠시 펜스 앞에 누워있다가 들것에 실려나갔는데, 실려나가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주변을 안심시켰다. 큰 부상이 있지는 않았으나 구단 측에서는 Ankiel을 DL에 올리고 휴식을 취하게 했다.

정말 큰일 나는 줄 알았다.


이미 크게 좁아졌던 Ankiel의 입지는 부상 이후 더더욱 안좋아졌다. 오프시즌에 그는 연봉 조정에서 2.8M의 연봉을 받아내 구단 입장에서 "그냥 벤치에 데리고 있기에는 부담스러운 4th OF가 되어버렸고, 좌투수 상대로 극악의 스플릿을 기록하면서 TLR의 플래툰 기용을 합리화시켰다. 이 와중에 2005년 드래프티인 Colby Rasmus는 어느 새 Cardinals의 차세대 중견수로 자리를 잘 잡아버렸다. Ankiel은 커리어 최다인 122게임에 출장했으나 받은 타석 수는 404타석에 그쳤고, Holliday 영입 이후에는 사실상 벤치로 밀려버렸다. 타석에서 스스로에게 주는 압박감 때문에 조급했던 Ankiel은 나가지 말아야 할 공을 건드리기 시작했고, 결국 .285의 창피한 출루율로 시즌을 마쳤다.  

2009년 정규시즌이 끝나고, Ankiel은 10년간 함께한 Cardinals와 이별했다. 그 해 오프시즌, Royals과 계약하면서 Ankiel은 지역 유력지인 St. Louis Post-Dispatch에 Cardinals 팬들을 향한 무려 Half-page짜리 감사 광고를 냈다. 뛰는 기간 내내 언론과의 접촉을 몹시 불편해하던 Ankiel이었기에 모두를 놀라게 한 제스처였다. 

Many thanks to Cardinals fans and the city of St. Louis for your support and cheers over the years. It was a privilege and an honor.

- Rick Ankiel's personal ad on STL Post Dispatch



2011~2012 - Nationals 시절

오프시즌에 Ankiel은 Nationals와 1.5M 짜리 (+ 인센티브) 1년 계약을 체결하는데, 여기에는 Ankiel이 마이너리그에서 타자 수업을 받던 시절 그의 인스트럭터였던 Jim Riggleman (당시 Nats 감독) 의 입김이 컸다. Cardinals 마이너리그 시스템의 인스트럭터로 일하던 Riggleman은 TLR을 직접 찾아가 "이 팀의 최고 타자 유망주는 Ankiel이다" 며 그의 스윙과 재능을 극찬한 바 있었고, 2008년 Ankiel이 Break-out 시즌을 가지며 화려하게 부활하자 누구보다 앞장서서 그의 복귀를 환영한 바 있었다. 

Riggleman과 재회한 Ankiel은 다시 한 번 좋은 시즌을 보냈다. 저렴한 연봉을 감안해서 본다면 Ankiel의 Upside는 꽤나 괜찮았다. 그는 중견수를 소화할 수 있는 4th OF였으며, 우투수 상대로 평균 이상의 파워를 지니고 있었고, 어깨는 확실히 리그 정상급이었다. 또한 어느새 빅 리그 12년차의 베테랑이 된 그는 꼬맹이 Bryce Harper가 콜업되었을 때 그에게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워낙 조용한 선수라 트러블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그러나 2012년에는 시즌 내내 타격 슬럼프로 고생을 하자 그를 방출하고 싶지 않았던 Nats 단장 Rizzo가 Ankiel을 DL에 올리려고 했으나, Ankiel은 이를 거부하고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


Nats로 간 것은 Ankiel에게 잘 한 결정이었다.


Rick Ankiel - 첫 끗발이 X 끗발?

2007년 8월 9일 데뷔전에서 쓰리런 --> 첫 한 달간 23경기 9홈런 29타점 .358/.409/.765

→ 이후 9월 6일~시즌 최종전까지 --> 24경기 2홈런 10타점, 삼진 20개, .220/.250/.330

2010년 (Royals 이적 후) 개막 후 첫 2주간 11경기 .308/.349/.615, 3홈런 9타점 2루타 3개. 그리고 부상.

→ 트레이드 당할 때까지 16경기 .226/.293/.358, 16경기 1홈런 6타점 2루타 4개, 5볼넷 18삼진

Braves로 트레이드 된 직후 --> Turner Field 데뷔전에서 Johan Santana 상대로 2타점 2루타 

→ 그 이후 45경기 2홈런 7타점 .205/.321/.321

2013년 Astros 개막전 정규시즌 첫 타석에서 3점홈런 

→ 이후 14타석에서 12삼진 --> 이후 .183/.222/.433 60타수 11안타 (4홈런, 2루타 3개), 3볼넷 34삼진

2013년 Mets 이적 직후 첫 9경기 .323/.364/.710, 31타수 10안타 2홈런 6타점 

→ 그 이후 11경기 35타수 2안타



냉정하게 평가해보자. 외야수 / 타자로써의 Rick Ankiel은 기량이 정점일 때 5할 승률 팀의 주전 혹은 컨텐더 팀의 4th OF였으며, 기량이 퇴보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Pop와 강견을 제공하는 벤치 외야수" 수준에 그쳤다. 풀 시즌 25홈런을 친 것은 경이적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투수 하다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선수 출신 치고는" 이라는 단서가 붙을 때 얘기였다. 그는 야수로써 뛴 7년간 통산 3.9 WAR를 적립하는 데 그쳤으며, 풀 시즌을 뛰며 1.0 이상의 WAR를 기록했던 것은 (2007년의 광분은 제외) 2008년과 2011년, 두 차례에 불과했다. 

타격에서 Ankiel의 문제는 너무 간단헀다. 컨택트가 안됬다. 마이너리그 어느 레벨에서도 Ankiel은 3할을 쳐 본 적이 없으며, 그의 스윙은 정확도 상실을 어느 정도 감수하고 파워에 더 집중한 스윙이었다. 2007년~2008년의 성공은 타자 Ankiel에 대한 분석이 충분히 되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투수들이 Ankiel에게 어떻게 승부하면 되는지 알게 된 이후에는 Ankiel은 더 이상 풀 타임 보장을 받을만한 공격력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 변화구에 대한 약점도 분명했을 뿐더러, 스트라이크 존 바깥쪽에 높게 형성되는 패스트볼에 Ankiel은 사족을 못썼는데, 이 약점은 2013년까지도 고쳐지지가 않았다. 

The kid has more guts than most people. Maybe someone needs to say that to him once in a while."

-David Chase, the GM of Memphis Redbirds (2007)

Ankiel의 Plate Discipline 문제는 Tagg Bozied, Rick Eckstein이 지적한 Anxiety 이슈와도 큰 관련이 있었다. 그는 배팅 케이지에서 엄청난 타구들을 양산해내다가도 막상 압박이 있는 상황에서는 나쁜 공에 손이 나가기 시작했다. (통산 득점권 K% 28.4%, 주자 없을 때는 25.9%). 지난 5년간 Ankiel의 wRC+는 단 한 번도 리그 평균을 넘어본 적이 없으며, 그의 Z-Contact %인 66.1%는 실로 극악의 수치인데, 이에 대해서는 Fangraph의 Dave Cameron이 제대로 분석해놓은 글을 참조하셔도 좋을 것 같다. (요지는 리그 최악의 Z-Contact %, 즉 스트라이크 존 안에 들어오는 공에 대한 컨택율이 리그에서 가작 안좋았던 타자도 80%에 육박하는 반면, Ankiel의 스탯은 지나치게 비정상적이었다는 점이다.)

Rick Ankiel - Plate Discipline (Last 5 Years)

 

 K%

Z-Contact %

SwStr % 

 wRC+

 2009

 24.5%

 85.2%

 15.0%

 75

 2010

 29.6%

 76.4%

 17.8%

 92

 2011

 23.1%

 83.2%

 12.9%

 82

 2012

 34.5%

 76.5%

 17.9%

 82

 2013

 44.1%

  66.1% 

 21.2%

 79


두번째 문제는 Ankiel의 소위 "좌상바" 기질이었다. Ankiel은 데뷔했던 2007시즌에는 두 달간 좌투수 상대로 무려 홈런 7개 (11개 중) .391/.400/.783의 말도 안되는 리버스 스플릿을 보였는데,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점점 반쪽 선수가 되어버린 Ankiel (2008~2011년 4시즌간 좌투수 상대 성적)

2008년 116타석 7홈런 15타점 6볼넷 24삼진 .224/.268/.448

2009년   98타석 0홈런   8타점 2볼넷 29삼진 .234/.265/.298

2010년   64타석 0홈런   4타점 6볼넷 23삼진 .164/.270/.182

2011년   88타석 1홈런   9타점 6볼넷 21삼진 .228/.282/.304

Ankiel의 외야수로써 본격적으로 뛰기 시작한 것은 2005년으로, 이는 Ankiel이 은퇴를 앞둔 지금도 아직 채 외야수 10년차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Ankiel은 기본적으로 외야수들에게 있는 타구 방향 판단과 추적 센스가 있는 선수가 아니었으나, 판단 미스들을 뛰어난 운동신경으로 극복해내는 스타일이었고, 노력과 연습을 통해 빅 리그 중견수로 발돋움했다. Ankiel 은  몸을 사리지 않는 다이빙 캐치로 많은 박수를 받았으나, 베테랑 외야수들에게는 어렵지 않은 플레이들을 어렵게 해내는 경향이 강했다. 



수비에서의 Ankiel는 공을 잡기 전과 공을 잡은 후가 정말 판이하게 달랐다. 데뷔 초기 메이저리그에서 주전 CF로 뛰기에 그의 타구 판단력과 중견수로써의 Field Coverage는 좋은 편이 아니었으나 이를 뛰어난 운동신경과 주력으로 극복해냈다.  풀타임 첫 해인 2008년, 그는 중견수 자리에서 UZR -6.6을 기록했으며 좌익수 자리에서도 UZR -5.3을 찍었다. 그러나 수비에서 Ankiel은 경험이 쌓이면서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2011년 Nationals에서 그는 중견수 자리에서 UZR +6.1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의 어깨는 백문이 불여일견. (동영상 링크마운드에서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했던 그는 이제 광활한 외야에서 베이스를 향해 스트라이크를 쏘아대기 시작했다. (2011년 보살 리그 3위 (Kemp-McCutchen-Ankiel), Range Factor 리그 3위 (Gomez-McCutchen-Ankiel.)  

HGH 스캔들

2007년 New York Daily News에서 Ankiel이 인간 성장 호르몬 (HGH = Human Growth Hormone)을 복용했다는 기사를 보도하면서 Ankiel 의 화려한 복귀에 커다란 오점이 남았다. Ankiel 은 "당시 나는 재활 중이었고, 의사의 처방전을 받아서 복용하고 있었다" 고 진술했고, 당시 HGH가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금지한 물질이 아니었기에 스캔들은 더 커지지는 않았다. 당시 Ankiel은 팀 동료 Troy Glaus로부터 온라인 HGH 및 스테로이드 사이트를 소개받았다고 밝혔다. Ankiel 이 몇 년간 고생한 것을 인정하며 그에게 동정론을 펼치는 이들도 있었으나, 어떤 이들은 "의사의 처방전을 받았으면 왜 굳이 불법 사이트에서 구매를 했느냐" 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이 부분은 Ankiel의 커리어에서 어찌 보면 가장 안타까운 얼룩 중 하나이다.



총평 - Re-Creating Yourself.

야구는 야구 선수들에게 생계수단이다. 우리는 때때로 Baseball-Reference와 Fangraph에서 제공하는 화려한 숫자의 향연에 취해 이 기본적인 사실을 종종 망각할 때가 있다. Player Stats에 2012년도 이후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면 우리의 기억 속에 그 선수는 2012년 이후로 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지만, 삶은 계속 지속된다. Ankiel의 투수로써의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2001~2004년, 보여지지 않는 곳에서 Ankiel은 외로운 사투를 계속했다. 

Ankiel에게도 야구는 생계 수단이었다. University of Miami 진학을 포기하고 거액의 계약금을 받았을 때부터 그에게 야구는 생계 수단이었다. (좀 미안한 표현이지만) 풍비박산이 나서 뿔뿔히 흩어진 가족, 중소기업에서 비서로 일하면서 살아오며 뒷바라지한 어머니, 연락이 잘 안되는 이복 형제들, 그리고 올스타급 전과를 가진 아버지. 만 18세에 전미 최고의 고교야구 선수로 프로에 입문했고, 2000년 10월 3일 (그 날 #1) 전까지 단 한 차례도 질주를 멈춘 적이 없었던 Rick Ankiel. 야구만 알고 달려온 이 수줍음 많고 예민한 20대 청년은, 야구가 주는 시련에 아파하면서도 야구를 놓을 수가 없는 딜레마에 빠져서 20대 초반을 보냈다. 야구를 그만둔다면 그는 대학 졸업장을 가지지 못한 20대 실업자에 불과했고, 그에게는 서포트를 기대할 가족들보다는 챙겨드려야 할 어머니가 있었을 뿐이었다. 



투수에서 타자로의 드라마틱한 컴백을 이뤄낸 Ankiel의 스토리는 이미 언론에 수백차례 회자되어 이제 많은 야구팬들에게 익숙하다. Ankiel은 스포츠 저널리즘에서 늘 침을 질질흘리는 소재 중 하나인 "불운/비운의 천재"에 너무도 걸맞는 선수였고, 마치 만화 주인공처럼 극적인 커리어를 보냈기에 그의 복귀 스토리는 팬들의 Soft spot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헤드라인이었다. 그러나 Ankiel의 딜레마와 고통은 사실 매년 수십, 수백명의 마이너리거들이 겪는 시련과 그 근본적인 면에서 큰 차이가 없다. 매년 많은 선수들이 자신의 인생을 바쳐서 쫓아온 빅 리거의 꿈을 중간에서 멈춰야하는지, 더 쫓아가야하는지 하는 딜레마에 빠지며, 갑작스런 (회복 불가능 수준의) 제구 난조 또한 생각보다 많은 투수들이 겪는 문제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Ankiel에게는 보통 실패한 투수들에게서 찾기 힘든 "빅 리그에서 풀 시즌 30홈런 포텐셜"의 타격 재능이 있었고, 이 재능을 단시간 안에 끌어올려 "기량"과 "실력"으로 만들어낸 절박함이 있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Ankiel은 포기를 하지 않은 게 아니고,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좋아하는 야구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커리어를 이어나갈 수 있던 재능의 소유자 Ankiel은, 그런 의미에서 행운아가 아니었을까. 커리어 연장을 통해 그는 (루키시절 계약금을 포함해) 커리어 내내 1500만 달러 가까운 돈을 벌었고 이는 일반 사람들은 평생 만져보지 못하는 액수의 재산이다. 데뷔 15년차 시즌인 2013년도 어찌어찌 저니맨으로 메이저리그에서 남아있었다. 투수 시절 그가 누렸던 짧지만 화려했던 명예와 스포트라이트, 듣기만 해도 부담스러운 칭송들을 생각하면 그의 지금 모습은 남루하기 짝이 없다. 기록중인 성적, 선수로써의 위치, 모든 면에서 참으로 초라하다. 그러나 30대 중반의 야구인이자 사회인, 혹은 인간 Rick Ankiel 에게는 감히 초라하다는 말, 불운하다는 말을 함부로 붙이고 싶지가 않다. 



에필로그 

2010년 가을은 Cardinals가 Reds에 밀려 포스트시즌에 나가지 못했던 해였기에, 필자는 어쩌면 차라리 잘됬다는 마음으로 오랜만에 감정적 동요 없이 가을야구를 볼 생각에 은근히 부풀어 있었다. 저녁에 집에 와서 TV를 켜니 Braves와 Giants의 NLDS 2차전이 진행 중이었고, 스코어는 이미 4:1 Giants 리드. 전날 Lincecum에게 호되게 당한 Braves 타선이 Cain을 상대로 여전히 쩔쩔매고 있었다. 리플레이와 광고가 대충 끝나고 7회 선두타자로 익숙한 이름 Rick Ankiel이 등장했다. 결과는 어느 순간부터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린 시원한 헛스윙 삼진.

8회초 Braves가 Romo-Wilson 계투진을 흔들어 극적으로 4:4 동점을 만들고 계속된 1사 2루 찬스에서 Ankiel 이 또 등장했다. 이번에는 밸런스가 흐트러진 채로 공 밑을 때리며 좌익수 플라이. 경기는 Kimbrel과 Wilson의 삼진쇼로 넘어가면서 순식간에 연장 11회까지 흘러갔고, 연장 11회 1사 주자 없이 Ankiel에게 이 날 5번째 타석이 돌아왔다. 볼카운트 2-2에서 Ramon Ramirez의 94마일짜리 패스트볼이 살짝 몰렸다. Ankiel의 방망이가 돌았고 공은 AT&T 파크 밖 바다에 떨어졌다. 이 역시 어느 순간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린 "맞는 순간 바로 아는" 특유의 호쾌한 홈런이었다. 그렇게 Ankiel은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포스트시즌 홈런을 쏘아올렸다. 동영상 링크


왜 더 활짝 웃지 못하니. 왜.


TV 카메라가 Ankiel이 주먹을 쥐며 다이아몬드를 도는 모습과 Braves 덕아웃의 광적인 분위기를 번갈아 비추었고, 그 짧은 몇 초간 많은 생각이 필자의 머리를 스쳐갔다. Rick Ankiel. 현대 Cards 팬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애증의 이름. 정확히 10년 하고도 5일전, Ankiel은 야구 역사상 가장 창피한 모습으로 포스트시즌 무대를 떠나야 했다. 세상을 다 가진 듯 보였던 만 스무 살짜리 투수. 그가 던졌던 94마일 팔팔한 패스트볼에서 보였던 창창한 앞날은 온데간데 없었다. Old Busch Stadium의 따뜻한 오후 햇살이 참으로 야속해보였던 바로 그 날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Ankiel을 가슴에 묻지 않았는가. 그리고 내가 보고 있는 이 선수는 지금 나이 서른 살의 8번타자 중견수이며, 그 누구도 이 선수의 미래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스윙하자마자 손가락으로 Braves 덕아웃을 가리키며 빠른 속도로 베이스를 돌던 Ankiel의 입가에 웃음이 희미하게 보였다. 긴장과 기쁨을 동시에 머금은 그 웃음에 10년전 마운드에서 보았던 어린 투수 특유의 자신감과 배짱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Braves는 이 경기를 잡아내고도 홈에서 2경기를 내리 지면서 시리즈를 패배했고, Ankiel 에게 그 날 이후로 더 이상의 포스트시즌 안타는 없었다.

감동? 눈물? 인간 승리? 인생 역전? 글쎄...그 순간을 Ankiel이 평생동안 달고 지내왔던 그렇게 무겁고 드라마틱한 단어들로 수식하고 싶지는 않다. 아쉬움? 미련? 서러움?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그냥 고개만 끄덕여질 뿐이다.

연장 11회말을 Farnsworth가 무사히 막아내고 카메라가 Player of the Game으로 Rick Ankiel 을 비춘다. 어느 새 서른이 넘어 얼굴에 연륜이 나타나는 Ankiel 이 센터에서 마운드를 향해 무표정으로 달려오며 동료들과 시리즈 동점을 축하한다. 10년 전 NLDS 마운드에서 고개를 떨구었던 그 젊은 청년의 모습을 나도 모르게 찾고 있음을 느끼지만, 더 이상 그에게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바다 건너 먼 나라에서 그의 소식을 오랫동안 지켜봤을 뿐인, 한 면식없는 팬으로써, 그에게 이런 순간이 온 것에 괜히 감사하다.

이래서 야구를 보는구나, 하고 새삼 느낀다. 

Did you know...

  • 역사상 포스트시즌 선발 등판 + 포스트시즌에서 야수로써 홈런을 기록한 선수는 딱 두 명이다. Babe Ruth와 Rick Ankiel.
  • 선발 투수로 40차례 이상 등판하고 야수로 통산 홈런을 40개 이상 친 선수 역시 Babe Ruth와 Rick Ankiel 뿐이다.
  • 커리어 첫 홈런은 투수로 치고, 이후 야수로 또 홈런을 친 선수 역시 1947년 이후 Ankiel이 처음이다.
  • Ankiel은 2009년에 부인 Lori Ankiel와 함께 자기 이름을 내건 Rick Ankiel 와인을 런칭했는데, 2009년 이후로는 와인 관련 기록이 별로 없다. 부인 Lory Ankiel은 NFL Miami Dolphins의 치어리더 출신이다.
  • 드래프트 직후 Ankiel을 Busch Stadium으로 초청해 Work-Out을 시켰던 그 날, Ankiel은 마운드에 오르기도 전에 배팅 케이지로 먼저 가 타격부터 했다고 한다. Matt Morris는 그 날을 Ankiel이 쳤던 홈런을 회상하며 "어쩌면 그 때부터 타자를 했어야했는지도 모른다" 며 껄껄 웃었다.
  •  어려서부터 Braves 팬으로 자란 Ankiel은 2009년 Cardinals가 John Smoltz를 영입했을 때 그에게 다가가 그가 자기의 우상이었다고 말하려했다. Smoltz가 먼저 Ankiel에게 다가와 말했다. "자네가 한 일은 정말 대단한거야." (“I’ve got to give you props for what you have done.")
  • 2001년 스프링캠프를 앞두고 TLR과 Jocketty는 Ankiel에게 쏟아질 언론의 관심이 (전년도 Melt-down에 관한) 어린 투수에게 얼마나 부담스러울 지 알고 있었다. TLR은 Ankiel을 불러 "어차피 아무리 인터뷰를 거부해도 계속 괴롭힐 게 분명하니, 차라리 캠프 첫 날 기자회견을 해서 할 얘기 다 해주고 트레이닝을 시작하자" 고 말했다. 스프링 캠프 첫 날,  Jocketty와 TLR은 Ankiel을 가운데에 두고 나란히 앉아서 Ankiel이 손으로 직접 쓴 Statement (성명) 를 발표한 뒤 기자회견을 했다.  이 일이 있고 며칠 후 Ankiel은 그 기자회견이 있던 날 아침, Jocketty가 부친상을 당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Ankiel의 프레스 컨퍼런스를 모두 마친 6시간 뒤에야 아버지의 상을 치르러 갔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by Doo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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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투수들이 빅 리그에 올라오기 전에 각자 소속한 하위 레벨의 마이너리그들을 소위 "초토화" 시키면서 올라오고, 그 과정에서 "예전의 어떤 사이영상 투수와 비슷하다"느니, 조금만 다듬으면 누구보다 낫겠다더니, 별 소리를 다 들으면서 올라온다. 그렇지만 Sandy Koufax 에 대한 비교는 흔하지 않다. 2014년 시즌 개막을 앞둔 현재, 사이영상 3차례에 빛나는 현존 최고의 투수 (Wain아 미안하구나) Clayton Kershaw만이 무리없이 Sandy Koufax 컴패리즌을 소화해낼 수 있다. 심지어 아직도 Kershaw가 Koufax에 비교되기는 시기상조라며 향수에 젖어계신 올드 팬들도 많다.

Raw Talent로 밀어붙이는 폭발적인 잠재력을 지닌 유망주에 대한 갈증에 아직 목말라하는 2014년의 Cardinals 팬들에게는 참으로 믿기 힘들겠지만. 16년 전, 우리 팜에는 Sandy Koufax 컴패리즌이 유효하다는 고졸 좌완 투수가 있었다. 

오랜 Cardinals 팬으로써, 오랜 야구팬으로써, 머리에 떠올릴 때마다 정말이지 만감이 교차하는 선수, Rick Ankiel 을 돌아본다. Part I 에서는 투수 Ankiel을, Part II 에서는 타자 Ankiel을 다뤄보려 한다.


Rick Ankiel (Richard Alexander Ankiel Jr.)

RHP / Outfielder

DOB: 1979년 7월 19일 

Birth: Port St. Lucie, Florida

Time with Cardinals:  1997-2009

Childhood

훗날 한 스카우트로부터 "여태 내가 본 최고의 좌완 투수들 중 하나" ("one of the best left-handers I've ever seen") 라는 극찬을 받은 Rick Ankiel이지만, Ankiel이 투수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11학년이 (고2)  되고 난 후였다. 그 전까지 Ankiel은 남들보다 늘 작은 키에 그다지 대단할 게 없는 재능이었고, 리틀리그 시절에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Ankiel의 정신적 성숙함과 마운드 위에서의 차분함, 소위 "멘탈" 만큼은 유난히 훌륭했다. 지금 2000년 포스트시즌에서 역대 최악의 "멘붕" (Melt-down) 을 보였던 선수의 멘탈을 얘기하는게 맞냐고 물으신다면, 그렇다.

Florida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자란 Ankiel은 고등학교 이전까지 "실수에 대한 두려움" 으로 꽁꽁 싸매진, 소심하고 겁이 많은 소년으로 자랐다. Ankiel 은 야구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야구는 나의 길" 이라고 생각할만큼의 열정은 없었다. Ankiel보다 야구를 잘하는 아이들은 많았다. 팀에서 키도 덩치도 가장 작았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Rick Ankiel Sr. 는 아들에게 반강제로 야구를 시켰다.

그의 아버지 Rick Ankiel Sr. 는 화려한 전과를 자랑한다.1975년 대마 소지 혐의로 체포된 것이 시작으로 이후 25년간 그는 14차례 체포 당했으며, 6차례 구속당했고, 전과의 종류도 마약 밀수, 총기 은폐, 강도, 특수강도, 음주 운전 이후 경찰로부터 도주 등 정말 다양했다. 범죄자 테크를 타기 전까지 아버지의 직업은 낚시 가이드였으나, 이 업계에서 일하던 중 마약 밀매단과 엮이게 되면서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고 말았다. Ankiel이 자란 작은 마을에서 아버지의 과거와 전과, 그리고 심심찮게 일어나던 범법 행위들과 불안한 가정 분위기는 지역 사회와 이웃들의 지나친 관심과 손가락질을 불러왔고, Ankiel이 성장하면서 이로 인한 스트레스는 어린 소년이 감당하기 힘들 수준으로 부풀어올랐다. 








아버지는 어린 Ankiel에게 가혹하게 훈련시켰다. 리틀야구 선수였던 어린 아들에게 기합과 엄포는 물론이고 미국 아버지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따뜻한 부정은 전혀 없었다. 강압적이었던 아버지는 본인이 결코 아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어린 Ankiel을 더더욱 강하게 몰아붙였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던 아버지 밑에서 Ankiel은 아버지의 폭언을 피하기 위해서 야구를 했고, 늘 실수하면 안된다는 공포에 떨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 때문에 늘 소위 "군기"가 바짝 들어있었던 Ankiel은 훗날 고교야구에서 보기 드문 성숙함과 인성, 그리고 근면함으로 칭찬을 받는다.

"My dad was hard on me all the time. If I swung at a bad pitch in Little League, he'd make me run wind sprints when I got home. It was always, I could've done better. But maybe if he wasn't hard on me, I would've gone down the wrong path. He always said, 'Do what I say, not what I do."                                                                                                                                          

   -Rick Ankiel, on his father


14세가 되던 해, 어린 Ankiel은 야구를 그만두고 그냥 친구들처럼 서핑이나 낚시를 하면서 놀고 싶다고 얘기했으나, 이런 푸념을 들어줄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들이 "나는 어차피 메이저리그에 갈 재능은 안되요" 라고 하자 "If you love the game, good things will happen." 이라며 정말 무식하게 아들을 몰아붙였다. 10학년 때, 될성부른 떡잎이라면 지금쯤 고교 야구를 씹어먹고 있어야 할 그 시기에 Ankiel의 패스트볼 구속은 84마일이었다. 야구팀 코치 Messina는 "필드 밖에서 정말 훌륭한 아이지만 그다지 Exceptional 한 선수인지는 모르겠다" 라고 Ankiel을 표현했다. 

Ankiel 이 11학년 때, 갑자기 키가 급성장하면서 몸집이 커졌다. 꼬마였던 Ankiel이 6피트가 넘는 키에서 특유의 다이내믹한 투구폼으로 패스트볼을 꽂자 92마일이 넘게 찍혔다. 무브먼트도 장난이 아니었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모인 한 경기에서 Ankiel은 첫 15타자 중 14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이제야 뭔가 희망이 보였다. 그 경기 이후 Ankiel이 던지는 경기마다 스카우트들이 몰려서 구속을 측정했다. 아버지가 말한 "Good things will happen" 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아버지의 강압에 못이겨 어쩔 수 없이 야구를 지속했지만 자신의 재능에 대해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Ankiel은 순식간에 그 지역의 자랑으로 떠올랐다. 에이전트 Scott Boras와 계약한 것도 이맘때였다. 한때 Ankiel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던 코치들은 스위치히터였던 Ankiel이 혹시라도 왼팔에 HBP를 당할까봐 이제부터 우타석에 서지 말라고 했다. 가장 좋아했던 것은 아버지였다. 아들이 던지는 경기마다 그의 아버지는 관중석이 아닌 포수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커브를 던져라" "직구를 던져라" Game-Calling을 했다. 한번은 6회까지 노히트를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Throw him the funk!" 라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Ankiel은 그 말을 듣고 너클볼 (Funk가 Knuckleball 이라고 한다) 을 던졌으나 홈런을 맞았다. 

코치들은 동네 깡패 / 건달 같은 Rick의 아버지가 와서 시끄럽게 구는 것도 모자라 팀 에이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못마땅했으나, 또 한편으로는 Ankiel의 아버지였기에 쉽게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아들 Ankiel은 이런 와중에서도 삼자범퇴로 이닝을 끝낼 때는 혹시라도 칭찬을 들을까 해서 어머니가 앉아있는 관중석보다는 백스톱 뒤의 아버지를 흘깃흘깃 쳐다보며 마운드를 내려왔다.  

1997년, 고등학교 마지막 야구시즌이 끝나고 Rick Ankiel은 USA Today 선정 올 해의 고교 선수 (High School Player of the Year) 로 선정되었다. 그의 마지막 고교 시즌 성적은 11승 1패 평균자책 0.47, 74이닝 162탈삼진이었다. 


배우 Zach Efron을 닮았다는 의견도 있다.

1997년 드래프트에서 Ankiel을 2라운드 20픽, 전체 72번으로 뽑은 Cardinals가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접근해왔다. 2년 전만 해도 Ankiel은 University of Miami 진학이 최종 목표였으나, 패스트볼 구속과 함께 그의 기대치도 높아진 상황이었다. Scott Boras는 Ankiel이 마치 당장이라도 Miami 대학에 진학할 것처럼 Letter of Intent를 작성해 Cardinals의 애를 태웠고, 결국 $2.5M의 계약금을 받으며 계약한다. 프로 데뷔 전에 받는 계약금으로는 당시 역대 5위에 랭크되는 정도의 큰 규모였다. 

Ankiel과 계약이 성사된 후, Cardinals는 아직 고등학생에 불과한 Ankiel을 홈 구장으로 불러 클럽 하우스를 구경시켜주고, 그의 이름이 적힌 유니폼을 선사했다. 그리고 그가 곧 서게 될 Busch Stadium 마운드에 서서 공을 던지게 했다. Tony La Russa, Dave Duncan은 물론 프론트 직원들부터 구장 잔디 관리인들까지 다들 나와서 이 열 여덟살 짜리 투수가 시범 피칭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포수의 미트에 공이 Pop! 하고 꽂히며 모두들 그의 구위에 경악했다. 95마일의 구속도 구속이었지만, 부드러운 투구폼과 플레이트 근처에서의 매서운 무브먼트, 그리고 우타자 바깥쪽 낮게 떨어지는 싱커는 이미 아마추어 수준이 아니었다. 그 날부터 Ankiel은 Cardinals의 금송아지였다.

"They got excited because a lefty like that comes up once in a millenium. He was the real deal, and the world, the entire world, was Rick Ankiel's, blowing away the game with that arm born and bred in the Florida sun, able to do whatever he wanted to do whevnever he wanted to do it and nothing more Wild West in all of sports, a pitcher on a mound simply blessed with it."

 -Excerpt from 3 Nights in August, page 77

Rick Ankiel's Minor League Track Record

YearAgeTmLgLevWLERAGSCGSHOIPHERHRBBSOHBPWPWHIPHR/9BB/9SO/9SO/BB
1998182 Teams2 LgsA+-A1262.632810161.01064785022214110.9690.42.812.44.44
199818PeoriaMIDWA302.0670035.015801241210.7710.03.110.53.42
199818Prince WilliamCARLA+962.792110126.0913983818112101.0240.62.712.94.76
1999192 Teams2 LgsAAA-AA1332.352411137.29836962194961.1620.64.112.73.13
199919ArkansasTLAA600.9181149.125521675200.8310.42.913.74.69
199919MemphisPCLAAA733.16160088.17331746119761.3470.74.712.12.59

Ankiel의 마이너리그 시절은 그다지 언급할 부분이 없다. 너무 짧았고, 너무 일방적이었다. 흔히 말하는 "마이너리그에서 스스로를 다듬는 시간들" "교정" "세련" 이런 단어들은 Ankiel의 사전에 없었다. 그냥 Ankiel은 있는 그대로 압도적이었다. 첫 프로팀이었던 Peoria를 단 7경기만에 졸업. 이후 나머지 시즌은 A+ 레벨에서 126이닝 181탈삼진을 기록한다. 1999시즌은 AA레벨의 Arkansas에서 출발했는데, 8경기 49.1이닝 5실점이었다. AAA로 안보내기도 힘든 성적이다. 넘어져봐야 일어날 줄도 아는데, Ankiel은 차마 넘어질까 하는 우려를 표시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빠르게 달려나가고 있었다. 

보통 프로에 첫 입문해 고달픈 마이너리그 생활을 시작하는 어린 선수들, 특히 대학을 맛보지 않고 프로로 직행한 고졸 선수들은 고향과 가족,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정신적으로 힘들어하게 마련이다. 강압적이었던 아버지와 결코 행복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일까. Ankiel은 집을 떠나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마냥 즐거웠다. 매 경기 사람들은 그의 놀라운 구위에 감탄과 칭찬을 연발했고, 함께 마이너리그에 입문한 1라운더 Adam Kennedy 등 동료 선수들도 그저 Ankiel에게 좋은 말밖에 해주질 않았다. 

Cardinals는 Ankiel의 어마어마한 성장 속도에 불안함을 느꼈고, 이에 경기당 투구수 100개의 제한을 두었다. 마이너리그 투수코치들은 Ankiel에게 팔꿈치에 무리가 가는 슬라이더를 가르쳐주면 안된다는 지령을 받았고, 이런 정도의 관심을 받는 투수를 함부로 조련하려고 하는 코치들은 아무도 없었다. Ankiel이 혹시라도 어이없는 폭투 (마이너리그 성적에서도 유난히 폭투가 많은 것을 보실 수 있다)를 던진 뒤 자문을 구하면, 코치들은 "그냥 하던대로 해라 잘하고 있으니" 라며 넘겼다. Ankiel이 답답해서 재차 물어보면 그들은 "우린 널 건드리면 안돼" ('I'm not allowed to mess with you") 라고 대답했고, Ankiel은 그제서야 자신을 향한 구단의 특별대우의 이면에 그림자가 있음을 알게 되지만, 19살의 Ankiel이 그렇다고 질주를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해 그는 마이너리그 탈삼진 1위 타이틀과 함께 Player of the Year 상을 수상했고, 올스타전에 선발로 등판했다. 1999시즌을 앞두고 Baseball America 는 Ankiel을 전미 유망주 랭킹 2위에 올랐다.

마이너리그에서 어떤 조련도 받지 않은 Ankiel은 키가 조금 더 컸을 뿐이지 사실상 Port St. Lucie 고등학교 시절과 투수로써의 기량이 거의 다를 바가 없는 상태에서 메이저리그 콜업을 받는다.

"If you've got a race car that's leading the Daytona 500, you don't bring it in for a tune-up. All we did was fine-tune a couple of things with his motion, but nothing major. We have a pitch count for all pitchers in the minor leagues."

-Mike Jorgensen, the Cardinals' director of player development (1999)


Pitching Mechanic

유일하게 아버지 Ankiel이 아들 Ankiel에게 전수한 것들 중 좋은 것이 있다면 바로 그의 투구폼인데, 사실 이 부분도 따져보면 악영향이 더 크다. Ankiel이 성공 가도를 달리던 시절에도 그의 제구는 결코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 (2000시즌 BB/9 = 4.63, 1999시즌 BB/9= 4.1), 이는 그의 딜리버리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간지가 나는 딜리버리 치고 문제없는 경우를 거의 못보지 않았는가. Ankiel 역시 마찬가지이다. 위 Ankiel의 투구폼 사진을 참조하시면, Ankiel은 투구시 앞발 (Front-foot, 즉 오른발) 보다 머리가 먼저 타자쪽으로 나가는 (Out), 소위 Out-in-front 증상을 보이고 있으며, 이 증상은 Tim Lincecum에게도 종종 볼 수 있다. 몸은 아직 준비가 안되어 있는데 머리가 먼저 예전 Okajima 마냥 3루 쪽으로 가고 있으니, 당연히 Pitching Arm이 앞으로 차근차근 나오지 못하고 급작스럽게 나오게 되고 릴리즈 포인트가 굉장히 높아진다. 무게 중심의 이동이 부드럽지 못하니 팔꿈치, 어깨에 무리가 가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릴리즈 포인트가 너무 앞에서 형성되거나 높이 형성되면서 포수 머리 위, 혹은 바닥에 패대기 치는 듯한 공이 나올 수밖에 없다. 실제로 마이너리그에서나 빅 리그 데뷔 이후에나 Ankiel은 릴리즈포인트가 흔들릴 경우 포수 머리 위로 던지는 폭투의 비율이 다른 투수들에 비해 월등히 높았는데, (Ankiel 본인도 인정한 부분이다) 이는 부드러운 듯 보이지만 사실은 팔 스윙이 너무 급작스럽게 이뤄지는 그의 투구폼 탓이 컸다. 

설령 포스트시즌에서의 Melt-down이 없었더라도 이런 투구폼으로 그가 롱런을 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으며, 필자도 동의하는 부분이다. 피칭 메카닉에 대한 심도있는 이해가 바탕이 된 코치들이 용기있게 쓴 소리를 해주었다면 Ankiel의 데뷔가 좀 늦어질 지 언정 조금 더 투수로 오래 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Call-Up

"최대한 그에게 압박을 주지 않으며 천천히 콜업할 것" 이라는 한 구단 관계자의 말이 무색하게 Ankiel은 1999년 8월 23일, 만 20세의 나이로 ML 마운드를 밟았고, Adrian Beltre를 제치고 리그 최연소 선수로 등재된다 (2위는 벨트레). 데뷔전 상대는 묘하게 외인구단 느낌을 주던 추억의 팀 Expos 였는데, 선발로 등판한 그는 괴수(V. Guerrero) 에게 솔로홈런을 허용하긴 했으나 5이닝 5피안타 3실점으로 무난히 데뷔전을 마쳤고, 이후 4차례 정도 더 선발 등판을 한 뒤 불펜에서 시즌을 마감했다. 평균자책 3.27에 33이닝 39탈삼진. 약간의 제구불안이 있긴 했지만 선발 로테이션에 들어가기에 충분히 합격점인 투구였다. 

아들 Ankiel이 찬란하게 데뷔하던 이 시기, 아버지 Ankiel은 다시 한 번 체포당했다. Florida에서 멀지 않은 섬나라 Bahamas의 마약 밀매단과 연계되어 있던 Ankiel의 아버지는 마리화나와 코카인을 (미국 시장에 유포할 목적으로) 소지한 혐의로 1999년 시즌 도중에 검찰에 기소되었다. 이 때 최대 80년형의 징역과 $4M의 벌금형을 선고받게 되면서 Ankiel의 어머니는 남편과 이혼하게 된다. 이제 막 피어나려는 20살짜리 어린 투수에게, 그것도 전미 최고의 유망주 투수의 아버지가 State도 아니고 연방 검찰에 구속되었으니 언론이 가만 있지를 많았다. 

슬프게도 Ankiel은 이런 관심들이 익숙했다. 마운드에서 본인이 흔들리지 않으면 이런 일들은 결국 지나갈 것이라는게 Ankiel의 비정상적으로 강인한 정신력이었다. 자라는 내내 "너의 아버지는 뭐하는 분이시니?" "왜 너네 집 앞에는 경찰차가 와있니?" 같은 질문들에 익숙해져있던 Ankiel은 아버지의 옥살이와 부모님의 이혼, 가족의 분열 (형과 누나도 뿔뿔히 흩어졌다) 을 그저 삼켜버렸다. 가슴 복받치는 자신의 풀타임 첫 정규시즌 개막전을 한 달 여 앞둔 2000년 3월, Ankiel은 아버지 Ankiel의 재판을 위해 Florida 연방 법원에 출두해서 그의 아버지가 징역 6년형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한 달 후, 4만여 관중 앞에서 당당히 Cardinals 로테이션의 일원으로 선발 등판을 했다. 아버지와 가족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어린 투수답지 않게, 마운드 위에서 Ankiel은 흔들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재능있는 투수들 특유의 보기좋은 건방진 아우라까지 풍겼다.

씁쓸하게도 "마운드 위에서 감정을 컨트롤하라" 는 그의 아버지가 Ankiel을 코치하면서 가장 강조하던 부분이었다. 


2000년 NL Central 우승을 확정 짓고.

2000시즌

드디어 정식 발매된 Ankiel의 황금팔은 확실히 강력했다. Ankiel은 시즌 첫 선발 등판 Brewers전에서 6이닝 10K 2실점 승리를 따내면서 쾌조의 출발을 했고, Coors Field에서 3피홈런을 맞으며 주춤했으나 이후 Padres전 5이닝 무실점, Brewers 전 7이닝 무실점을 잇따라 승리투수가 되었다. 5월 13일에는 한국 야구팬들에게 잘 알려진 박찬호와의 맞대결을 펼쳤는데, 당시 박찬호가 워낙 잘 던져서 (8이닝 1실점 12K) 묻히긴 했지만 7이닝동안 무려 118구를 던지면서 4피안타 9K 무실점을 기록한 Ankiel 역시 칭찬받을만 했다. (언론은 앞날이 창창한 두 젊은 투수들의 Pitcher's Duel로 관심을 모았으나, 사실 정말 관심가는 부분은 나란히 고질적 제구 불안병을 앓고 있는 두 투수가 도대체 몇 구나 던질 것인지였다.)

Ankiel의 구위는 베테랑 포수 Mike Matheny와의 호흡이 부드러워지면서 더더욱 강화되었다. 어린 투수들의 응석을 받아주지 않던 Matheny는 구위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부족했던 Ankiel에게 딱 맞는 포수였다. 그는 리그 내에서 가장 뛰어난 블로킹 능력을 지녔기에 Ankiel의 제구 불안 데미지를 최소화 할 수 있었고, Ankiel의 구위와 구질에 대해서 투수 본인보다 훨씬 뛰어난 이해도를 지니고 있었다. 5월 7일 Reds전에서 Ankiel이 5이닝만에 볼넷 4개 폭투 4개를 기록하며 유난히 "Wild' 했던 날, Matheny는 플레이프 앞에서 흙을 튀기는Ankiel의 원바운드 공들을 전부 막아내고 마운드에 올라가 "내가 다 막을 테니 넌 똑바로 던지기만 해라" 라고 말했다. 다음 경기에서 Ankiel은 Matheny의 리드를 그대로 따르며 7이닝 무실점을 기록한다 (박찬호 경기.) 이어서 6월 20일, Ankiel은 당시 Jeff Kent와 Barry Bonds를 위시한 Giants 강타선을 상대로 6이닝 8K 2실점의 압도적인 피칭을 하고 승리투수가 된다. 당시 Giants 감독이었던 Dusty Baker는 "저런 20살 짜리는 흔하지 않다. 20살에 저 정도라면 앞으론 대체 뭘 이루려고 하는가" 며 상대팀 신인을 칭찬했다.

Ankiel의 피칭 레퍼토리는 93-95마일의 패스트볼, 그리고 88~90마일에서 형성되었던 싱커, 그리고 마이너리그에서 수많은 탈삼진을 솎아내게 해준 그의 플러스 커브였다. 특히 우타자들은 5마일의 구속 차이와 함께 탁월한 무브먼트를 동반한 그의 싱커에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으며, 어느 카운트에서나 낙차 큰 커브가 아웃피치로 들어올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Ankiel 공략을 굉장히 힘겨워했다. (2000시즌 우타자 상대 피안타율 .213) TLR은 Ankiel이 장기적으로 체인지업만 장착한다면 리그를 오랜 기간 지배할 선수라고 표현했고, 이는 결코 과찬이 아니었다.

정규시즌 후반기, Ankiel을 제외하면 대부분 노땅들로 채워진 Cardinals 로테이션은 슬슬 힘에 부쳐하기 시작했다. 팀내 최고령 투수이자 6'6피트의 장신이었던 Andy Benes는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후반기 컨디션이 이미 정상이 아니었고, 노장 Pat Hentgen는 8월이 되자 체력적인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Garret Stephenson 는 8월달에 혼자 4승 평균자책 2.63을 기록했으나 9월달이 되자 피로 누적으로 차차 구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정규시즌 마지막 한 달간, 사실상 Cardinals 로테이션은 Darryl Kile-Rick Ankiel 두 투수가 이끌기 시작했다.  그리고 Ankiel 은 신인답지 않게 시즌이 진행될수록 더 구위와 제구가 나아지며 구단의 기대에 부응했다. 그는 최종 7경기에서 4승 무패 평균자책 1.97. 45.2이닝 54탈삼진을 기록했고 이 기간동안 팀은 6경기를 이겼다. (평균 103구, 경기당 6.2이닝). 

정규시즌 종료 후 Ankiel의 성적은 11승 7패 평균자책 3.50, 175이닝 194K. 신인왕 투표에서 그는 Braves의 Rafael Furcal에 이어서 2위에 올랐다. 만 20세 시즌에 규정이닝을 소화하면서 K/9이 9.0을 넘었던 투수는 (그 때까지) 역사상 단 2명에 불과했다. (1984년 Dwight Gooden, 2000년 Rick Ankiel)

Ankiel's Last 5 Games (2000)

DateOppIPHRERBBSOERAPitStrStLStSGBFB
SeptemberOppIPHRERBBSOERAPitStrStLStSGBFB
Sep 3NYM7.0211583.801116622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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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 27@SDP6.0500283.5096601715410
175.01378068901943.50


순식간에 조롱거리로 전락하기에 그의 재능은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그 날 (2000년 10월 3일) - NLDS Game 1

Atlanta Braves와의 NLDS를 앞둔 상황, TLR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5인 로테이션에서 건강한 투수는 20승을 올린 에이스 Kile와 약관의 신인 Ankiel 달랑 2명 뿐이었고, 이들에게 많은 경기를 맡기고 싶어하는 것은 5전3승제 단기전을 앞두고 감독으로써 당연한 어프로치였다. 게다가 Ankiel은 4일 휴식을 줘야했지만 Darryl Kile은 3일 휴식으로 등판할 수 있었다. 즉 (정상적인 로테이션 순서대로) Kile이 1차전, Ankiel이 2차전을 던질 경우 Ankiel은 시리즈에 한 번 밖에 나올 수 없지만, Kile이 2차전을 던지고 Ankiel이 1차전을 던지게 된다면 이 시리즈에서 두 투수를 2번 쓸 수 있다는 소리였다. 정규시즌 마지막 한 달간 Ankiel 이 보여준 모습까지 감안했을 때, TLR의 결정은 "도박" 이라고 불리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TLR은 전국에 중계되는 첫 포스트시즌 선발이 이 젊은 투수에게 어떤 중압감으로 다가올 지에 대해 충분히 경계하고 있었다. 게다가 상대 투수는 지난 10년간 리그를 지배했던 베테랑 Greg Maddux. 호들갑을 떨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시리즈가 시작하기 전날, TLR은 불펜 피칭을 하고 나오는 Ankiel을 재빨리 언론 접촉없이 클럽하우스에서 내보냈다.  그리고 베테랑 투수 Kile에게 인터뷰실로 들어가서 마치 그가 당연히 1차전을 던지는 양 언론을 상대하도록 했다. Kile은 당시 기자들의 질문에 충실히 대답하면서도 단 한 차례도 자신이 1차전에 던질 것이라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언론에서도 이미 Kile이 1차전을 던질 것이라는 게 너무 당연했기에 물어보지 않은 것이다. 인터뷰가 다 끝나고 미디어팀이 철수하자 그제서야 TLR은 1차전 선발이 Ankiel임을 발표했다. 수많은 리포터들이 그 날 TLR에게 얼마나 욕을 퍼부었을지 자명하다.

TLR의 머릿속이 복잡한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NLDS가 열리기 며칠 전인 9월 28일, Darryl Kile의 정규시즌 20승 경기가 있었던 바로 그 날, 주전 포수 Mike Matheny가 생일 선물로 받은 사냥용 칼 (Hunting Knife) 을 잘못 놀려 자기 손을 크게 베어버리고 만 것이다. (MM의 생일은 9월 22일이다.) 이 부상으로 인해 정규시즌 잔여 경기는 물론 Matheny의 플레이오프 출장 기회도 날아가버렸다. 투수 리드와 호흡에 있어서 Ankiel에게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짝꿍이던 Matheny가 결장한 것도 문제였지만, 제구가 불안한 Ankiel과 등 부상으로 인해 활동폭이 좁던 포수 Carlos Hernandez의 조합은 결코 이상적이지 않았다. 


Hernandez가 아닌 Matheny였다면, 뭔가 달랐을까?


Braves와의 1차전이 시작했고, 마운드에 Ankiel이 올랐다. 1회 2사 후 Chipper Jones와 Andres Galarraga에게 연속 볼넷을 허용했지만 Brian Jordan을 파울 플라이로 잡아내면서 무실점. 주자를 3명이나 허용하긴 했으나 뭐 경기 초반 Ankiel의 제구 난조가 그다지 특별할 일은 없었다. 오히려 1회말 Cards 타선이 Maddux를 상대로 타자일순하며 6득점한게 더 신기할 일이었다. TLR은 훗날 이 날 Maddux를 상대로 뽑아낸 6득점은 "말도 안되는 숫자 ("Crooked Number") 라고 회상했다.

2회에도 Reggie Sanders를 삼진으로 잡으면서 시작한 Ankiel은 무실점으로 무사히 이닝을 마쳤다. 그리고 마의 3회... 

Score Out RoB Pit(cnt) R/O @Bat Batter Pitcher wWPA wWE Play Description
0-6 0 --- 4,(3-0)  ATL G. Maddux R. Ankiel -2% 91% Walk
0-6 0 1-- 4,(1-2)  O ATL R. Furcal R. Ankiel 2% 93% Foul Flyball: 1B
0-6 1 1-- 2,(0-1)  ATL A. Jones R. Ankiel -0% 92% Wild Pitch; Maddux to 2B
0-6 1 -2- 4,(2-1)  ATL A. Jones R. Ankiel -1% 92% Wild Pitch; Maddux to 3B
0-6 1 --3 5,(3-1)  ATL A. Jones R. Ankiel -2% 90% Walk
0-6 1 1-3 5,(2-2)  ATL C. Jones R. Ankiel -1% 89% Wild Pitch; Jones to 2B
0-6 1 -23 7,(3-2)  O ATL C. Jones R. Ankiel 3% 93% Strikeout Looking
0-6 2 -23 7,(3-2)  R ATL A. Galarraga R. Ankiel -3% 90% Walk; Maddux Scores/Wild Pitch; Jones to 3B
1-6 2 1-3 1,(0-0)  R ATL B. Jordan R. Ankiel -4% 85% Single to LF; Jones Scores; Galarraga to 2B
2-6 2 12- 3,(1-1)  ATL R. Sanders R. Ankiel -1% 84% Wild Pitch; Galarraga to 3B; Jordan to 2B
2-6 2 -23 5,(3-1)  ATL R. Sanders R. Ankiel -1% 82% Walk
2-6 2 123 2,(0-1)  RR ATL W. Weiss R. Ankiel -12% 71% Single to LF; Galarraga Scores; Jordan Scores; Sanders to 2B
Provided by Baseball-Reference.com: View Original Table
Generated 2/6/2014.

강판된 후 덕아웃으로 돌아온 Ankiel에게 아무도 위로의 말을 쉽게 건내지 못했다. Ankiel은 Andy Benes에게 다가가 "A joke. You've got to laugh." 라며 자신이 저질러놓고도 도대체 믿을 수가 없는 이 상황에 허탈해했다. 이 때만해도 Ankiel의 투수로써의 커리어가 이 경기를 기점으로 사실상 재생 불가능 상황이 될 것이라고 상상한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Mets와의 NLCS를 앞두고 Ankiel은 자신의 문제가 투구폼 관련된 Mechanical한 문제라며 이제 해결책을 찾았다고 이야기했다. NLCS 2차전에 Ankiel이 등판했고, 초구 91마일 패스트볼이 상대 타자 Timo Perez의 머리를 향했다 (Perez는 가까스로 피했다). 삼진-볼넷-폭투-볼넷-희생플라이-볼넷-2루타. 20구 중 5개가 포수 뒤로 날아갔다. Duncan 은 볼만큼 봤다고 생각했는지 Ankiel을 내렸는데, 질책성이라기보다는 보호 차원의 강판이었다. Duncan은 경기 후 지금 Ankiel에게 필요한 것은 쉽게 한 이닝을 던지고 감을 회복하는 것 ( "have a nice easy inning and probably get back on track") 이라고 얘기했고, Low-leverage 상황에서 Ankiel을 등판시켜 감각을 회복하도록 도와주기로 한다. 시리즈 최종전인 NLCS 5차전 7회, 0:6으로 크게 뒤져 있던 상황에서 Ankiel이 올라왔다. 볼넷-번트-삼진-폭투-폭투-볼넷. 

시리즈가 끝난 후 Rick Ankiel은 감옥에 있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경기를 본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쳤냐고 물어봤고, 아들은 괜찮다고 대답하자 이에 "아니 그럼 대체 뭐하는 짓이야!" 라고 말했다. 이 경기를 TV로 지겨보던 Ankiel의 고등학교 팀 투수코치 Charlie Frazier는 "Ankiel에게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Mechanical한 문제들이 많았으며, 딜리버리 막판의 Follow-Through 단계에서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며 어이없어했다. 동영상을 보시면 릴리즈 포인트에 신경을 쓰고 있던 Ankiel 의 상체가 부자연스럽게 거의 직선으로 서있는 모습을 보실 수 있다. 동영상 링크 


그 날이 있던 후 Ankiel이 웃고 있는 사진을 찾는 것은 굉장히 힘들어졌다.


"I never saw him lose his motion like that before. I saw mechanical flaws. He was throwing across his body; he was standing up in his follow-through. I asked him what his pitching coaches told him. He said, "They don't tell me anything!"

-Charlie Frazier, Ankiel's high-school pitching coach

NLCS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Ankiel에게 Boras가 연락이 왔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Florida를 떠난 적이 없는 Ankiel에게 그는 "지금 당장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캘리포니아로 떠나라"고 설득했다. 다른 곳에 가서 머리를 식히라는 것 빼고는 딱히 어떤 이유가 있지는 않았다. Boras는 Ankiel에게 "모든 것을 그대로 놔두고 그냥 떠나라. 내가 도와주겠다" 고 했다. Ankiel은 잠시 Florida 집에 들려 짐을 싼 뒤 그 길로 Boras의 사무실이 있던 캘리포니아 Newport Beach로 떠났다. 마이너리그 때부터 같이 올라온 드래프트 동기 Adam Kennedy (당시 Angels로 이미 옮겨가있던) 가 기꺼이 숙소를 제공했다. 둘은 야구 관련된 일은 일체 하지 않았으며, 바닷가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했다. Ankiel은 이 기간 동안 자신의 멘토이기도 했던 Darryl Kile과만 꾸준히 연락했을 뿐 은둔한 상태로 5주를 보냈다. 

5주간의 휴식이 지나고 12월 중순 Ankiel이 Florida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의 연락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스포츠 심리학계의 거장인 Harvey Dorfman 박사였다. Dorfman은 3일간 심도있게 Ankiel의 어린 시절과 그를 둘러싼 공포들, 무의식을 분석하기 위해 상담했다. Dorfman 박사와 Ankiel의 두터운 관계는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there's a lot of things in his life that could have triggered what happened in the playoffs. You're raised in that kind of environment, anything can happen. He's a very sensitive guy, and he had to be mature awfully quick. These things can have a very calamitous potential . I've seen it happen to other players where it became career threatening. So the best thing we can do is listen, understand and cover all of the possibilities."        

-Scott Boras, on Rick Ankiel's recovery (2001)

2001년 4월 8일, Ankiel은 Chase Field 원정에서 Randy Johnson과 D-Backs 라인업을 상대로 시즌 첫 등판을 치루었다. 1회 Matt Williams에게 투런 홈런을 맞았으며, 제구불안 문제도 여전했다. 그러나 전반적인 구위에 있어서 만큼은 Ankiel은 예전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5회에는 세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기세등등했고, 6회에 투구수 100개를 채우고 강판되었다. 5이닝 3피안타 3볼넷 2실점 8탈삼진. Cardinals는 Big Unit을 상대로 홈런 3개 포함 11안타를 쳤다. 9:4 승리. Ankiel의 커리어 마지막 선발승이었다. 

그러나 이 경기 이후 Ankiel 이 보여준 모습은 2000년 플레이오프와 비슷했다. 도저히 봐주기가 힘들 정도로 아무데로나 가는 공들. 잦은 폭투. 24이닝에서 볼넷 25개, 폭투 5개, 사사구 3개. 2001년 5월 홈에서 Pirates 상대로 등판한 Ankiel은 Pat Meares를 상대로 다시 포수 뒤 스크린에다가 공을 던졌다. Duncan이 올라오자 Ankiel은 고개를 떨구었다.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Cardinals 구단 측에서는 Ankiel의 커리어를 "리셋" 하겠다는 의도로 그를 루키리그로 보냈고, 세간의 관심이 없는 이 곳에서 Ankiel은 신기할만큼 빠르게 영점을 잡았다. 그리고 제구가 되는 이상 ML에서 이닝당 한 개 이상의 삼진을 잡아내던 Ankiel의 구위는 루키리그 타자들이 건드릴만한 것이 아니었다. 14경기에서 87.2이닝동안 탈삼진 158개 (K/9 = 16.2) 평균자책 1.33. 이 정도면 괜찮다 싶어서 Memphis로 승격시키자 다시 병이 도졌다. 4.1이닝동안 3피안타, 17볼넷, 10실점, 폭투 12개. 공이 미친듯이 백스톱 뒤로 날아가자 상대적으로 작은 마이너리그 구장에서 관중들의 웃음소리가 Ankiel의 귀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2004년, TJS를 받고 돌아온 Ankiel에게 아직도 Cardinals는 희망을 놓지 않고 않았다. A+ 볼에서 시즌을 시작한 Ankiel은 3차례의 선발 등판에서 8.2이닝 0볼넷 11탈삼진을 기록했고, AA볼로 승격된 이후에는 2경기에 걸쳐 9이닝 3피안타 1실점 2볼넷을 기록했다. 이어서 Memphis로 올라와서 선발 등판한 경기에서는 6이닝 1피안타 1실점. 역시 볼넷은 없었다. "그 날" 이 있기 전에도 Ankiel이 마이너리그에서 이렇게까지 좋은 제구력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드라마틱한 부활이 가시권에 있었다.

2004년 9월 7일, Ankiel이 무려 3년 6개월만에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섰다. 1이닝 무실점. 15구 중 12구가 스트라이크였다. 4일 후 Dodgers 전에 다시 구원등판한 그는 19구 중 14구를 스트라이크 존에 꽂았다. 9월 19일에는 재앙이 시작되었던 Busch Stadium 마운드에 참으로 오랜만에 섰고, 관중들은 돌아온 Ankiel을 기립박수로 환영했다. 2이닝 4K 무실점. 5차례의 등판에서 10이닝을 던지는동안 Ankiel은 삼진 9개를 잡고 볼넷은 Chad Tracy에게 내준 한 개가 유일했다. 구속은 3년 전 그의 모습에 비해 확실히 떨어진 90마일 선에 그쳤으나, 커브는 여전히 리그 정상급 낙차를 보였고, 싱커도 여전했다. 

2000시즌 이후 제대로 된 정규시즌을 치루어 본 적이 없는 이 투수는 수년 간의 방황에도 불구하고 아직 24세였다. 오프시즌에 그는 Puerto Rico 에서 열린 윈터리그에서 한층 발전된 모습을 보였고, 구단 수뇌부에서는 Matt Morris 의 자리를 Ankiel이 대신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까지 품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간신히 ML에서 통할 수 있는 수준의 상태로 기어올라온 Ankiel은 시뮬레이션 피칭에서 Edmonds, Rolen 등 Cardinals 중심타자들을 배팅 케이지에 세워놓고 다시 한 번 "나는 누구고 여긴 또 어딘가" 식의 붕괴를 겪는다. 23구를 던졌으나 스트라이크는 3개. 원바운드성 폭투는 물론이고 배팅 케이지 밖으로 아예 나가는 공도 여러개였다. 2005년 3월, Ankiel은 "더 이상 던지지 않겠다"며 투수 포기를 선언한다. 

Sandy Koufax의 재림은 신기루였다.

"I just lost it right there on the mound. I don't know what I was thinking. I'd go blank before I'd throw the ball, and then after I'd say to myself, 'How the hell did that happen?' It was definitely weird. I mean, I'd been doing it so many times in my life, and suddenly I can't throw a ball?"

-Rick Ankiel, on his melt-down (2001)


2003년 스프링캠프를 앞두고 Walt Jocketty는 Ankiel의 진로를 결정할 순간을 맞이한다.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에 참여시킨 뒤 이후 마이너리그로 보내서 다시 재활하게 하는 것이 잠재적 방안이었는데, 과연 어느 레벨의 마이너리그로 그를 보내느냐는 정해지지 않았다. TLR의 사무실에 Duncan이 찾아와 Jocketty의 결정을 알리자 TLR이 물었다. "무슨 레벨로 가는지에 대해 우리가 어느 정도의 영향력이 있지?" Duncan 이 대답했다. "뭐 어느 정도 input은 있겠지." TLR은 버스 이동거리가 많은 AA 레벨보다 조금 더 이동이 수월한 Memphis로 Ankiel을 보내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자 Duncan은 Ankiel을 Double-A 레벨의 Tennessee로 보내는 게 좋겠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덧붙였다. 

"He's 23-years old. He should be in Double-A."

(Excerpt from 3 Nights in August, page 82)


(Part II에서 계속)

자료 출처: Hardball Times, New York Times Magazine, USA Today, Palm Beach Post, STL Post-Dispatch, 3 Nights in August, Baseball-Reference, ESPN, Fangrap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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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Doovy


이번 주 주인공은 TLR 시대의 대표적 클로저이자 프랜차이즈 세이브 리더인 "Izzy" Jason Isringhausen 이다. 



Jason Isringhausen (Izzy)

Closer

DOB: 1972년 9월 7일 

Birth: Brighton, Illinois 

Time with Cardinals:  2002-2008


Draft and Minors


1991년 드래프트, Mets는 2라운드 전체 66번으로 Virginia 출신의 고졸좌완 Bill Pulsipher를 지명했다. 강력한 패스트볼과 슬라이더 조합을 가지고 있던 6'3인치의 이 어린 좌완투수는 이 드래프트에서 가장 Ceiling이 높은 고졸 투수로 손에 꼽혔다. 그리고 1000명이 넘는 선수들이 지나간 후, Mets는 44라운드, 전체 1156번으로 Illinois의 한 커뮤니티 칼리지에 다니는 19세 선수를 지목했다. 6'3인치의 프레임을 가진 평범한 외야수였다. 고등학교에서 포수를 보았던 이 선수는 팀 주전 포수 경쟁에서 패배해 외야로 밀려나 있었다. 


야구를 커리어로 삼을 생각이 크게 없던 이 어린 선수는 드래프트 지명을 일종의 "여름알바 (Summer Job)" 수준으로 생각했다. 그도 그럴것이, 44라운드 지명 선수가 무슨 포지션에서 뭘 어떻게하든 무슨 상관인가. 현실적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가서 재밌게 놀다오고 끝나면 와서 일할 준비를 해라" 라고 말했고, Isringhausen은 7천달러의 계약금을 받아들고 신이 나서 GCL이 열리는 플로리다로 내려갔다. 이게 우리가 아는 Izzy의 시작이다.

 “My dad said, ‘Go have a fun summer and get ready to go to work when it’s over.’ We both figured it would be a little summer fling thing. For a summer job, it worked out all right.”

-Jason Isringhausen, reminiscing his draft day

GCL Mets의 코치들은 Izzy를 보자마자 "외야수로 뛰기에는 스피드가 형편없는데 어깨는 쓸만하니 투수를 시켜보자" 는 주먹구구식 포지션 변경을 제안했다. Izzy는 싫다고 할 이유가 없었다. 결과는 웬걸, 12경기 65이닝에서 고작 2피홈런. 이 44라운더 외야수의 어깨는 "쓸만한" 정도가 아니고 96마일을 상회하는 강력한 패스트볼을 뿌릴 수 있었다. 하위 마이너에서 29BB/49SO의 비율을 기록한 것은 문제가 있으나, 본격적인 피칭을 사실상 처음 시도해보는 선수가 이 정도의 성적이라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었다. 피칭 메카닉을 다듬고 패스트볼 커맨드를 잡는데 주력한 Izzy는 이듬해인 1993시즌에는 로우A 레벨에서 90.1이닝 104탈삼진을 잡는다. 같은 해 하이A 레벨에서 뛰던 2라운더 Bill Pulsipher가 96.1이닝 102탈삼진을 잡았으니, Mets 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3년, 무려 59승 103패의 성적으로 당당히 전체 1번 드래프트 픽을 확보한 Mets는 1994년 드래프트에서 모두가 기다리던 FSU 출신의 우완 Paul Wilson을 지명했다. 당시 이미 6'5인치의 큰 체구, 대학 마지막 시즌에 ERA 2.08과 134이닝 154K을 기록했던 그의 압도적인 패스트볼-슬라이더 콤보는 이미 어느 정도 완성형으로 뽑혔었다. ML 레벨에서 즉시전력감이 될 것으로 평가받던 Wilson은 몇 년 전의 David Price나 십수년 전 Mark Prior가 받던 수준의 각광을 받으면서 Nomar Garciaparra, Jason Veritek 등 당대 최고의 유망주들을 제치고 전체 1번의 영광을 안았다. Wilson은 Tom Seaver, Dwight Gooden의 뒤를 잇고 싶다는 당찬 포부를 밝히며 Mets 산하 A+ 팀인 St. Lucie로 들어간 뒤 이듬해 AA볼을 마음껏 씹어먹는다. (16경기 120.이닝 127삼진 평균자책 2.17) 



왼쪽부터 BA Top 100 Prospect 37위 Izzy, 16위 Wilson, 12위 Pulsipher (1995)



Jason Isringhausen, Paul Wilson, 그리고 Bill Pulsipher. 이것이 소리만 요란했던 빈 수레이자 일종의 신기루와도 같았던 Mets의 Generation K의 탄생이었다. 당시 신조어처럼 번지고 있던 Generation X (X세대?) 라는 단어를 빗대 만든 말인데, Dwight Gooden의 빠른 쇠퇴와 David Cone의 이적 이후 순식간에 투수진이 붕괴되어 골머리를 썩던 Mets 입장에서는 이 Generation K에서 한 명만이라도 살아남기를 간절히 바랬을 것이다. 결과론이지만 세 투수 중 선발 투수로 성공한 투수는 한 명도 없으며, Izzy를 제외하곤 누구도 올스타에 선정된 적이 없다.


1995-1998: 용두사미


아래 Izzy의 마이너리그 트랙 레코드를 보시면 포수-->외야수를 거쳐 프로에 와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마운드를 밟아본 선수치고 거의 시행착오가 없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강력한 Mid-90s Fastball-Knuckle Curve 조합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1995 시즌에는 12경기에서 완봉 3차례를 포함 9승 1패 ERA 1.55의 압도적인 성적으로 투수로써는 드물게 International League MVP를 수상했으니, 사실상 Generation K 멤버들 중 가장 덜 주목받으면서 프로에 입문한 선수가 결국 가장 화려한 성적으로 팜을 졸업하고 콜업되는 인생역전인 셈이었다. 이 해 Mets 산하 AAA팀의 Norfolk에는 Mets의 미래를 짊어진 Generation K 투수 3명이 모두 뛰었는데, 이들 중 Izzy의 성적이 가장 압도적으로 좋았음은 말할 것도 없다. (Paul Byrd 3승 5패 ERA 2.79, Pulsipher 6승 4패 ERA 3.14) 


그리고 그 해 올스타 브레이크가 끝난 직후 콜업된 Izzy는 7월 17일, Izzy는 Wrigley Field에서 Cubs를 상대로 가진 데뷔전에서 7이닝 2피안타 2실점 6K의 뛰어난 피칭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당시 Mark Grace-Sammy Sosa-Todd Zeile-Luis Gonzalez 등을 위시한 Cubs 라인업을 상대로 데뷔전에서 2피안타만을 허용했을 뿐이니 Mets 입장에서는 로테이션에 안착시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후 Izzy는 남은 2달 반의 정규시즌동안 14차례 선발등판, 9승 2패 평균자책 2.81의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으며, 경기당 평균 6.2이닝을 소화하는 철완을 과시하는 한편 8월 20일부터 9월 25일까지는 7경기 연속 선발승을 기록하기도 했다. 비록 신인왕 투표에서는 Hideo Nomo, Chipper Jones 등 걸출한 다른 루키들에게 밀리긴 했지만, 후반기만 뛰고 3.0의 WAR를 적립했으니 효율면에서는 그 해 어떤 신인들에게도 뒤지지 않는 활약이었다. 


슬픈 일은 선발투수로써 Izzy의 커리어는 이것이 정점이었다는 것이다. 


망나니(?) Isringhausen 의 화려한 마이너리그 트랙 레코드 


YearAgeTmLgLevWLERAGGSCGSHOIPHRERHRBBSOHBPWPWHIPH/9HR/9BB/9SO/9SO/BB
1992192 Teams2 LgsRk653.7413121165.058412722949441.3388.00.34.06.81.69
199219MetsGULFRk244.34660029.026191401725321.4838.10.05.37.81.47
199219KingsportAPPYRk413.25761136.032221321224121.2228.00.53.06.02.00
199320PittsfieldNYPLA-743.2915152090.1684533728104381.0636.80.72.810.43.71
1994212 Teams2 LgsA+-AA1182.61282883193.11546656850128491.0557.20.42.36.02.56
199421St. LucieFLORA+642.23141463101.076312522759241.0206.80.22.45.32.19
199421BinghamtonELAA543.0214142092.178353162369251.0947.60.62.26.73.00
1995222 Teams2 LgsAAA-AA1121.97181843128.09032283361345100.9846.30.22.59.43.72
199522BinghamtonELAA212.85661041.026151311259360.9275.70.22.613.04.92
199522NorfolkILAAA911.5512123387.064171522475241.0116.60.22.57.83.13


우리가 본 2000년대 초 Cardinals 클로저 Izzy는 이미 프로 7년차의 어엿한 베테랑이었지만, Mets 시절, 아니 보다 정확히 Generation K 시절의 Izzy는 상당히 문제아였다. 1995년 자신의 첫 메이저리그 스프링 트레이닝 캠프에 도착한 Izzy는 캠프 도중 술에 취한 채로 여자친구의 집 발코니를 기어올라가다가 건물 3층에서 떨어져 발가락과 정강이가 부러지고 머리를 60바늘을 꿰매는 큰 부상을 당했는데,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당시 의사의 소견이 더 기가 막힌데, "환자가 술에 취해서 근육들이 이완되어 있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즉사했을 것" 이라는 것이다. -_-)


메이저리그에 콜업된 이후인 1997년 스프링 캠프에서는 팔꿈치 부상으로 피칭을 쉬던 중에 동네 소프트볼 게임에 나가서 우익수를 보며 코치진들에게 야단을 맞았으며, AAA Rehab 게임에서는 자신의 투구 내용에 화가 나서 분을 못 이겨 쓰레기통을 주먹으로 쳤는데, 이 과정에서 오른쪽 Wrist가 골절되었다. 1997년 정규시즌 막판에는 소포 패키지를 열어보다가 테이프를 뜯던 칼로 자기 허벅지를 크게 베어버리는 등 Zumaya의 기타 히어로 사건을 우습게 만들 수준의 에피소드가 많았다. 클럽하우스에서 시끄러운 음악을 듣고 고함을 지르는 등의 일은 예사였다. 당시 Mets 클럽하우스에는 딱히 제대로 기강을 잡고 있던 베테랑들이 별로 없었고, 팀이 전반적으로 젊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선발투수 Izzy의 루키시즌은 상당히 대단한 것이었다.


1996시즌 9월말에 팔꿈치와 어깨 수술을 받은 Izzy는 1997시즌 스프링캠프에서 당시 TJS를 받고 막 돌아온 Bill Pulsipher**와 함께 Rehab과 시뮬레이션 피칭을 하며 시즌을 준비했으나, 연이은 Set-back으로 결국 시즌을 DL에서 시작한다. 4월 11일,  AAA 리햅 등판에 나섰던 Izzy는 스스로에게 치밀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클럽하우스 쓰레기통을 주먹으로 때려 부쉈는데, 이 과정에서 오른쪽 팔뚝의 작은 뼈들이 부서져버리면서 최소 3개월은 결장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자신의 멍청한 행동에 화가 난 Izzy는 "필드로 돌아가고 싶어 미치겠다. 내 자신이 너무 멍청하다" 면서 자책했고, 클럽하우스에 들어온 Izzy에게 베테랑 좌완 릴리버 John Franco는 자신의 오른쪽 Knuckle에 난 흉터를 보여주면서 "빡치는 건 이해하지만, 정 필요하다면 왼손을 써라" 라며 상당히 실용적인 조언을 해주었다. 


팀 복귀가 가까워진 시점인 7월, 그는 부상 정도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흉부 X-Ray를 찍었는데, 여기서 종양 비슷한 물체가 발견되었다. 의사들은 이를 암으로 진단했고, 나이 스무 살에 암선고를 받아버린 Izzy는 호텔방에서 며칠간 두문불출하며 하염없이 정밀진단 결과를 기다렸는데, 다행히 일주일 후 정밀 진단 결과로 Tuberculosis, 즉 폐결핵 진단이 나왔다. 스프링캠프 때만 해도 "예정보다 빠르게 재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며 자신에 찼던 그의 선발 3년차 시즌은 잇따른 예기치못한 부상에 어느덧 반환점을 지나고 있었다.

"I try to keep it in more. But I still snap once in a while. I've just got to use my left." 


- Jason Isringhausen, on his temper

8월 27일이 되어서야 자신의 시즌 첫 데뷔전을 치른 Izzy의 몸 컨디션은 정상이 아니었다. 시즌 첫 등판에서 그는 Giants를 상대로 5이닝동안 무려 17명의 주자를 허용하며 (11피안타 6볼넷) 6실점하는 최악의 투구내용을 보였다 (그런데 승리투수가 되었다-_-). 그 다음 경기에서는 6이닝 6볼넷 무실점으로 버텼으나 이미 패스트볼 커맨드는 제어 불가능 상태였다. Mets는 9월 23일까지 더 기회를 주었으나, Izzy는 끝까지 잃어버린 제구와 구위를 찾지 못한채 시즌을 마무리했고, 정규시즌 후 팔꿈치 부상 진단을 받는다. Izzy가 받을 3차례의 TJS 중 그 첫번째가 온 것이다.


** 처참하게 무너지긴 했지만 그래도 ML 마운드를 밟아본 Izzy는 그래도 양반이다. 함께 재활등판을 준비하던 또다른 Generation K의 멤버 Pulsipher는 1997시즌 단 한 차례도 마운드를 밟아보지 못했다. 재활 때문에 내려갔던 A+볼에서 36.2이닝 동인 35볼넷, 폭투 14개, 보크 5개를 기록하면서 소위 "맛이 가버린" 것이다. 전미 12위 유망주였던 Pulsipher의 커리어는 이 시점을 끝으로 사실상 끝나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1998년: 첫 TJS


TJS 로 1년간 힘든 재활과 무료함을 견뎌야했던 Izzy는 그의 아내 Lorrie를 만나는데, 당시 이미 어느 정도 성공한 뉴욕의 커리어우먼이었던 Lorrie를 만나면서 Izzy의 망나니스러움은 많이 벗겨졌다. 1998시즌을 그렇게 날리고 1999시즌 그가 Mets 클럽하우스에 다시 들어서서 조용히 자기 라커룸 앞에서 책을 읽자 (훗날 그의 멘토가 되는) John Franco, Al Leiter 등이 다가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당시 Mets 클럽하우스의 기강을 잡던 Al Leiter, Robin Ventura, Mike Piazza 등 베테랑들은 강속구밖에 모르던 천방지축 망나니에게 의외로 의젓한 면이 생긴 모습을 기특하게 생각했다. 

He respected the hierarchy of the older players. As much as he was outgoing and goofy, he also knew his place.


-Al Leiter, on Izzy's character

1999시즌 5월 24일, Izzy는 Pirates 원정에서 오랫동안 기다린 복귀전을 치르지만, 홈런을 2개 맞으면서 심상찮은 조짐을 보인다. 몇 차례 더 기회가 있었으나 패스트볼 커맨드가 계속 들쭉날쭉했고, 투구수 60개를 넘은 뒤에는 통증 때문에 공의 위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본인의 5번째 선발 등판이 있던 6월 19일, Cardinals 전에서 마운드에 선 Izzy는 1회에 Mark McGwire에게 쓰리런을 맞으면서 경기를 시작하더니, 3회에는 영점을 완전히 잃어버리며 볼질을 시작했다. 투구수 50개를 넘기면서 팔꿈치가 다시 말썽을 부린 것이었다. 통증이 극심해지는 사이 Cards 타선은 타자 일순하며 순식간에 6점째를 뽑아냈고, 이내 Izzy는 3회를 채 채우지 못하고 2.2이닝 6피안타 4볼넷 6실점의 기록을 남긴 채 내려왔다. 선발 유망주 Izzy의 마지막 선발 등판이었다. 

Bobby Valentine 감독은 Jason Isringhausen을 불펜으로 돌리는 것에 대해 "그것은 마치 *Indy 500 (레이싱 대회)용 레이스카를 택시로 쓰는 것과 같다" 며 Izzy의 선발 기용에 대해 미련을 표시했었는데, 이렇게 되니 어쩔 수가 없이 불펜으로의 전환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왠지 "차고에 넣어놓은 페라리"로 불리고 있는 한 선수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는 서서히 망가져가던 Izzy의 커리어를 부활시키는 신의 한 수가 된다. 

 Izzy는 "망쳐도 내일 또 나와서 다시 잘 할 기회가 있으니 좋다" ("You know coming in the next day, no matter how it went, you'd have a chance to do it again") 며 릴리버로의 전환에 만족해했다. 7월 31일, 불펜 고령화로 인해 젊은 피가 필요했던 A's가 Izzy의 클로저로써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데려간 뒤에는 더더욱 잘 하기 시작했다. 이적 후 첫 한 달간 11경기에서 15이닝 2실점 2세이브. 1이닝 전력 투구 모드로 바뀌자 패스트볼 커맨드도 잡히기 시작했고, 구위도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미 9월달에 실질적 A's의 마무리는 Izzy가 되어 있었다. A's의 Art Howe 감독이 Izzy를 처음 클로저로 내정했을 때 영 못미덥다는 눈초리를 보내던 여론도 Izzy가 단 한 차례의 블론세이브도 기록하지 않고 시즌을 끝내자 잠잠해졌다.

*사족이지만 Izzy 를 보내고 Mets는 Billy Taylor라는 릴리버를 받아왔는데, 18경기에서 ERA 8.10을 찍고 방출당했다. Beane-Ricciardi 콤비의 혜안이 적중한 것도 칭찬할만 하지만, 반면에 Valentine이 대체 월드시리즈를 어떻게 올라갔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When I scouted him, I had gone to see other guys. I saw Izzy and I called Billy Beane and said, 'His stuff is just unbelievable.' He had an above-average fastball, a plus curve. But around four innings in he would start to lose focus. I mentioned to Billy that I'd really like to get this guy. His stuff for one inning was just incredible.

- J.P. Ricciardi, A's Director of Player's Personnel (2000)

2000-2001 : 클로저로써의 도약 


"깡"과 "배짱", 그리고 강력한 패스트볼과 커브 조합의 Hard stuff로 무장한 Izzy는 흔히 말하는 "클로저 체질" 이었다. 마운드에서 Izzy는 당당했으며, 살얼음판 리드에서도 적어도 표정만큼은 냉담했다. 가끔가다 좌타자 상대로 고전하는 모습, 패스트볼 커맨드가 흔들려서 투구수가 늘어나는 모습을 노출하던 그는 결코 완벽한 마무리 투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기본적인 의무인 "매일 리드를 지키러 나온다"는 측면에서 Izzy는 그다지 흠잡을 곳이 없었다. Oakland에서 그가 뛰는 동안 홈 팬들은 9회 세이브 상황이 되면 Coliseum 불펜을 바라보며 Boom-boom, Boom-boom-boom, Is-Ring-Hau-Sen! 이라는 구호로 그들의 클로저를 소환했다.



2000년 8월 8일 Yankees전, Barry Zito와 Roger Clemens가 팽팽한 투수전을 펼치며 9회까지 3:2 오클랜드의 리드가 이어졌다. 9회 클로저 Izzy가 껌을 짝짝 씹으며 Yankee Stadium 마운드에 올랐다. 첫 타자 Bernie Williams가 작정하고 Izzy의 초구 몸쪽 패스트볼을 후려서 우측 담장을 넘기는 동점 홈런을 쳤고 (3:3), 두번째 타자 David Justice는 관중들의 환호성이 끝나기도 전에 Izzy의 바깥쪽 낮게 빠지는 초구 패스트볼을 걷어올려서 우중간으로 넘겨버렸다. 공 2개로 동점홈런-끝내기홈런. 4:3 Walk-Off.  

Yankee Stadium이 광란의 도가니로 변하는 사이에 클로저 Izzy는 아무렇지도 않게 마운드를 내려왔다. 클로저로써 어쩌면 굴욕적일 수도 있는 그런 경기를 끝내고도 Izzy는 기자들의 질문에 "솔직히 좀 웃겼다. (힘을 안썼으니) 암튼 내일을 위해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That was actually comical. Well, I'm well-rested for tomorrow.") 라고 대답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 경기 이후 Izzy는 17경기에서 1승 8세이브를 거두는 동안 단 한차례의 블론도 없이 시즌을 끝냈다. 

그가 오클랜드 유니폼을 입고 뛰던 2년간 A's는 ALDS에서 매번 Yankees를 만났고, (다들 잘 아시다시피) 두 번 모두 2승 3패로 패배했는데, Izzy는 팀의 4승 중 3경기에서 깔끔한 1이닝 무실점 세이브를 따냈다. 특히 Yankee Stadium에서 펼쳐진 2001년 ALDS 2차전은 백미였다. 선두타자 Bernie Williams에게 2루타, Tino Martinez에게 볼넷을 허용한 후 3타자를 삼진-파울 플라이-파울 플라이로 잡아내고 포효하던 모습은 Izzy 의 짧지만 굵었던 오클랜드 시절에서 잊을 수 없는 하이라이트이다. (이후 Izzy의 회고에서는, Posasa 타석을 앞두고 Jason Giambi가 마운드로 다가와 "Calm Down" 하라고 하자 Izzy는 "I can't feel my legs" 라며 글러브로 입을 가린채 엄청나게 웃었다고 한다. 물론 Posada는 삼진을 당했다.)

2002: 바라고 바라던 Elite Closer

무려 4명의 선수가 돌려가면서 9회를 맡았던 2001시즌의 집단 마무리 체제를 벗어나고 싶었던 Jocketty, 그리고 TLR은 Top Closer를 FA로 영입하는 것이 목표라고 오프시즌을 앞두고 공공연하게 밝혔다. John Smoltz, Jeff Shaw 등 다른 옵션들도 있었으나, TLR의 눈에는Oakland에서의 2년간 75세이브를 거두며 리그 정상급 클로저로 순식간에 발돋움한 28세의 투수 Izzy가 가장 매력적인 타겟이었다.

2001년 12월 11일, 양측은 4년간 27M이라는 조건에 합의를 본다. 당시 Texas Rangers가 4년간 30M으로 더 큰 규모의 계약을 제시했으나, Izzy는 소년 시절부터 응원해왔던 팀이자 현재 가장 포스트시즌에 가까운 전력을 구축해놓은 팀인 St. Louis Cardinals 에 입단하기로 결정한다. Izzy의 고향인 일리노이 주의 Brighton은 St. Louis에서 45분이면 갈 수 있는 곳으로, 가족과 가까운 곳에서 뛸 수 있다는 사실에 Izzy는 매우 흡족해했다.

"Down at the end it was between the Cardinals and the Rangers. But my final choice was being with the Cardinals. My main goal is to win, and I think they have the right group of guys here to win for a very long time."


- Jason Isringhausen, after signing a 4-year contract with the Cardinals

새 클로저 Isringhausen은 강력했다. 그는 5월달에 무려 12세이브를 기록하면서 구단 월간 최다 세이브 기록과 타이를 이루는 등 전반기에만 42이닝을 소화하며 19세이브 평균자책 2.57을 기록했다. 94-97마일에서 형성되는 그의 패스트볼은 구속과 무브먼트를 모두 동반해 스트라이크 존을 찔렀으며, Duncan으로부터 조련받은 커터도 충분히 효과적이었다. Izzy는 우타자들을 상대로는 저승사자였으나 (피안타율 .164) 딱히 좌타자들을 상대로 던질만한 구질이 마땅치 않아 좌타자 상대 피안타율 .247을 기록했으며, 가끔가다 패스트볼 커맨드를 전혀 잡지 못하는 모습을 노출하며 몇몇 경기에서 자멸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37번의 기회에서 32세이브를 거둔 Izzy의 첫 시즌은 전반적으로 성공적이었다. 특히나 단 한 차례도 홈런을 허용하지 않은 점은 Izzy의 Hard-stuff를 여실히 보여주는 기록이다.




그러나 이 시즌 Izzy의 최대 문제점은 바로 내구성이었는데, 이미 TJS를 많이 받았던 Izzy는 구단 측에 본인의 팔 상태에 대해서 명백하게 의사표현을 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후반기에 두 차례나 DL에 올랐으며 정규시즌 마지막 몇 경기도 뛰지 못했다. Izzy의 내구성을 우려한 구단에서는 Izzy에게 10월에 어깨 수술을 받은 뒤 오프시즌 내 Conditioning을 확실히 하라고 당부했다.


2003시즌, Izzy는 다른 투수들보다 약간 늦게 스프링 캠프에 도착할 예정이긴 했으나 회복 속도가 더뎠다. 당초 4월 중순쯤이면 복귀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재활에서 몇 차례 Setback 이 생기면서 결국 6월이 되서야 복귀했다. Izzy가 늦게 오는 사이 Cardinals 불펜은 망가질대로 망가져있었는데, 2003시즌의 너덜너덜한 불펜 상황을 보시면...(LINK)


2004시즌 스프링캠프에 Izzy는 어느 때보다도 건강하고 준비된 모습으로 나타났고, 결과는 환상적이었다. Izzy 개인적으로나 여태 Cardinals 클로저 역사상 가장 위력적인 시즌 중 하나였다. 그는 74게임에 등판해서 그 중 57경기를 무실점으로 막았고, 프랜차이즈 단일시즌 최다 세이브 타이 기록을 세움은 물론 NL 세이브 리더 타이틀을 획득한다. 특히 Cards에 와서 던지기 시작한 그의 파워커브는 이 무렵 어느 카운트에서나 던질 수 있는 구질이 되었으며, 이 시즌 Izzy는 좌우 스플릿이 .205 (L) .195 (R)로 거의 균등해졌다.


2004 NLCS는 Izzy 라는 투수의 매력이 제대로 드러난 시리즈였다. NLCS 5차전에서 (그렇다, Brandon Backe와 Woody Wiliams가 나란히 인생투를 던진 그 경기이다) 0:0이던 8회 TLR은 너무도 당연하게 Izzy를 출동시켰다. Izzy는 상대 8-9-1번 타순을 가볍게 삼진-내야플라이 2개로 돌려세웠는데, 9회 Beltran이 안타를 치고 2루를 훔치자 Berkman을 고의사구로 거르고 1사 1,2루에서 Jeff Kent를 상대했다. 


Jeff Kent가 누군가. 초구 좋아하고 직구 좋아하기로 리그 내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그런 타자이다 (통산 홈런 377개 중 18.3%에 달하는 69개가 초구 홈런, 초구 타율 .322). 그리고 Izzy는 그런 타자들에게 초구 패스트볼을 안던지고는 못배기는 그런 투수였다. 이 타석에서 나온 초구 끝내기 쓰리런은 어찌 보면 그다지 놀랍지도 않은 결과였다. 5차전을 본인이 직접 날려먹은 Izzy는 NLCS 6차전에 똑같은


등판했다. 그리고 무려 3이닝 (2피안타 1실점) 을 소화해주며 팀 승리에 크게 일조했으며, 초구 공략에 맛들린 Jeff Kent를 초구 내야 플라이로 잡아냈다. 7차전에서 9회 선두타자로 나온 Kent를 또다시 초구 내야 플라이로 잡아냈다. 결국 시리즈 승리를 확정지으며 NLCS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낸 것은, 5차전에서 충격적인 쓰리런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툭툭 털고 던지던 Izzy였다. 7차전까지 간 이 명승부에서 Izzy는 무려 6경기에 등판했고, 그 중 5경기를 본인 손으로 마무리했다 (다른 한 경기는 연장 12회에 Edmonds의 홈런으로 이긴 경기). TLR의 두터운 신뢰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이 포스트시즌이 끝나자, 4년 계약의 마지막 해인 2005시즌을 앞두고 Cardinals는 Izzy에게 2년 연장 계약 (+1년 팀 옵션)을 안겼고, Izzy는 흔쾌히 계약서에 싸인했다. 

 

2005시즌 스프링 캠프를 앞두고 Izzy는 좌완 릴리버를 찾고 있던 Jocketty 에게 옛 동료이자 Generation K의 일원으로 한때 촉망받는 유망주였던 Bill Pulsipher를 추천한다. 당시 팀에는 이미 Ray King 이라는 걸출한 왼손 릴리버가 있었으나, 매치업을 선호하는 TLR은 이미 좌완 릴리버 2명으로 톡톡히 재미를 봤던 터라 Secondary LOOGY를 25인 로스터에 포함시키길 원했다. Pulsipher는 스프링 캠프 초대를 수락했는데, 이미 당시 25인 로스터의 마지막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선수로 반평생을 LOOGY 역할로 살아온 Mike Myers와 2000년 드래프트에서 Cardinals 가 뽑았던 Undersized 대졸 좌완 Carmen Cali 등이 눈에 불을 켜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Pulsipher은 의외로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무려 탁월한 기록을 내며 선전했고, Cardinals는 Mike Myers를 트레이드한 뒤 Pulsipher를 LOOGY로 낙점했다. Generation K 시절 이후 떨어져있던 두 선수가 처음으로 다시 같은 유니폼을 입고 뛰는 순간이었다.


아쉽게도 이 훈훈한 Feel-good story는 Pulsipher가 잠깐의 기회를 살리지 못한 채 개막 후 한 달을 못 버티고 방출당하면서 씁쓸한 엔딩으로 끝나게된다. Pulsipher는 잇따른 부상과 마이너리그, 독립리그 생활로 인한 우울증과 싸우고 있으며, 2005년을 마지막으로 메이저리그에서 자취를 감췄다. Izzy와는 종종 연락을 하고 지낸다고 한다.


TLR 시대를 상징하는 클로저, Izzy 


YearAgeTmWLERAGGFSVIPHRERHRBBIBBSOHBPWPBFERA+WHIPH/9HR/9BB/9SO/9SO/BBAwards
200229STL322.4860513265.1462218018168102571620.9806.30.02.59.43.78
200330STL012.3640312242.0311411218141061741761.1676.60.43.98.82.28
200431STL422.8774664775.1552724523471213081481.0356.60.62.78.53.09
200532STL122.1463523959.0431414427551122451991.1866.60.64.17.81.89AS
200633STL483.5559513358.14725231038352332571261.4577.31.55.98.01.37
200734STL402.4863543265.1422118428354232671781.0715.80.63.97.41.93
200835STL155.7042271242.248282752203651200751.64110.11.14.67.61.64
STL (7 yrs)17202.98401332217408.03121511353017417373141617081431.1916.90.73.88.22.14


 Izzy는 2003년과 2006년 플레이오프를 제외하고 상당히 Durable했으며, 2004년의 커리어하이 시즌 이후에도 3년 연속 최소 32세이브 이상, 59게임 이상을 출장했다. 2006년 성적이 커리어 라인보다 유난히 안좋은 이유는, 이 해 8월부터 그가 부상을 숨기고 정상이 아닌 구위로 던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시즌을 9월 초에 접고 마무리 자리를 루키 Adam Wainwright에게 넘겼는데, 마지막 한 달간 Izzy의 성적은 1승 4패 4세이브 3블론, 9.2이닝 14피안타 8실점 (3피홈런)으로 뭔가 구위가 정상이 아님을 짐작케했다. 아쉽게도 2006년 포스트시즌을 뛰지 못하기는 했지만, 이 시즌에 Izzy가 반지를 가져가는 것에 불공평함을 느꼈을 팬들은 아무도 없다. 2005년 NLCS 이후 Izzy는 포스트시즌에서 뛴 기록이 없으며, 포스트시즌 통산 23경기 11세이브 26.2이닝 23K 평균자책 2.36으로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2007시즌이 끝나고, 지난 수년간 든든하게 뒷문을 지켜준 Isringhausen의 팀 옵션은 당연히 실행되었는데, 이는 양측 모두에게 재앙이었다. 2008시즌은 Elite Closer로써 쌓아온 Izzy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시즌이었다. 한때 95마일을 쉽게 찍던 포심 구속은 평균 91마일대로 떨어진 지 오래였고, 들쭉날쭉한 제구는 2008시즌 급격히 안좋아졌다. 4월 25일 Astros전에서 2:0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Carlos Lee에게 역전 쓰리런을 허용한 것을 제외하면 시즌 초반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5월 전까지 13경기 1승 2패 9세이브, 12이닝 3볼넷). 그러나 우타자들 상대로 한때 몸쪽 패스트볼 승부를 즐기던 Izzy는 패스트볼이 맞아나가면서 우타자 상대 피안타율이 무려 .327에 이르게 되었고, 이로 인해 몸쪽 패스트볼을 사실상 못던지게 되자 볼넷이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8월 16일 Reds전을 끝으로 Izzy는 시즌을 접었고, 이것이 결국 Cardinals 유니폼을 입고 그의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Photo Credit to Spokeo



Cardinals와의 마지막 시즌 에 보여준 기량 저하가 너무 급격했기에, 나이 37세 시즌을 맞이하는 한 물 간 우완투수에게 어떤 팀도 새로운 둥지를 제공하지 않았다. 은퇴를 고려하던 Izzy에게 Rays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750K짜리 마이너리그 딜을 제안했다. Izzy는 한 달 만에 Rays 불펜의 일원으로 데뷔했는데, 잘 던지다가 6월 중순에 오른쪽 팔꿈치의 통증을 호소하며 DL에 올랐다. 세번째 TJS 선고였다. 


그를 아무도 클로저 취급하지 않던 2011년, Izzy는 Mets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고 익숙한 Mets의 플로리다 스프링 캠프에 입소한다. 아무도 나이 38세에 갓 TJS를 받고 돌아온 투수에게 뭘 기대할 지 몰라했으나, 친정팀 불펜에 돌아온 Izzy는 구속이 줄었을 뿐 여전히 효과적인 피칭을 해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해 7월, Mets 클로저는 "불펜에 두기 아까운 레이싱카" 라던 Izzy였다. 자신의 첫 세이브를 거두었던 팀에서 (Mets에서 1세이브 기록 후 트레이드) 자신의 마지막 세이브를 거두게 된 것이다. Izzy를 위해 Jason Bay는 자신의 등번호 44번을 기꺼이 내주었다.

"I've seen a lot more than I expected at any time. The ball is coming out of his hand great. He still has the Izzy curveball, and he's added a nice little cutter and changeup. I couldn't be more pleased. If Izzy can come in and continue to do exactly what he's doing right now, he is a major part of this.

-Dan Warthen on Izzy, Mets Pitching Coach (2011)


TLR이 A's 시절 Dennis Eckersley를 시작으로 "1이닝 클로저" 라는 개념을 본격적으로 정착시켰다는 사실은 야구팬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알려진 사실인데,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보면 TLR은 "클로저" 라는 개념의 창시보다 "불펜"의 역할을 재조명/재정립한 감독이었다. Dave Duncan과 TLR은 전반적으로 투수의 평가 기준과 야구 이념이 일치했기에 오랜 시간 붙어다니면서 어느 정도 동화되었는데, 그 사이에 끝까지 서로 의견을 좁힐 수 없었던 부분은 Duncan이 선발 투수들을 더 중시하고 TLR이 불펜을 더 중시했다는 점이다. 


서로의 의견차를 존중했던 이들은 암묵적 분업으로 충돌을 줄였다. 선발투수들에 관련된 일이면 TLR이 Duncan의 의견에 많이 의지했으며, 불펜 투수들의 운용에 대해서는 TLR 본인이 조금 더 목소리를 크게 냈었다. TLR에게 Closer 란 25인 로스터에서 유일하게 "제 몫을 할 경우 팀이 100% 이기게 해주는 선수"였고, 그랬기에 그는 유능한 클로저에 욕심을 냈었다. TLR은 Izzy를 "배짱과 Attitude와 Stuff를 모두 갖춘 Real-Deal Closer" 로 평가했으며, 이는 클로저 자리에 큰 의미를 두는 TLR의 입에서 나온 대단한 칭찬이다.



장난스러운 Izzy는 불펜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유지하는 선수였다. Izzy, Tavarez, Ray King.



총평 - 긴장감을 즐겼던 Real-deal Closer

마무리라는 보직은 그 자리에 올라가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훨씬 힘든 자리이며, 개인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팀의 Development Stage 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팀 사정이 열악하면 Kevin Gregg 같은 투수도 마무리를 할 수 있으며, 기존 클로저가 견고하다면 Rafael Soriano 같은 투수도 셋업맨일 뿐인 것이다. 올 시즌 Edward Mujica, 혹은 커리어 후반기의 Brad Lidge 등의 예에서 볼 수 있듯 짧은 이닝을 소화하는 마무리 자리는 확실히 믿을만한 구질 하나만 있어도 One-pitch pitcher로 살아남는 게 가능한 자리이다. (비록 롱런은 못할지라도), 


강속구를 뿌리는 싱싱한 젊은 어깨들이 무지하게 많아지고 있는 추세에 힘입어, 현대 야구에서의 25인 로스터 관리에서 점차 마무리 투수는 "자체보강"하기 쉬운 보직이 되어가고 있다. 구단 컨트롤 하에 있는 젊은 투수들에게 1~2년 불펜 경험을 쌓게 한 후 마무리로 돌려버리는 패턴이 점차 증가함에 따라 Trevor Hoffman이나 Mariano Rivera 처럼 한 팀에서 5년, 10년씩 마무리로 뛰는 선수들은 요새 점차 보기 힘들어졌고, Cardinals 역시 이러한 트렌드에 뒤쳐지지 않고 있다.  


1996시즌 (TLR 부임) 이후 역대 Cardinal 클로저


1996~1997 - Dennis Eckersley

1998 - Jeff Brantley / Jose Acevedo

1999 - Ricky Bottalico

2000 - Dave Veres

2001 - Dave Veres / Steve Kline 

2002~2007 - Jason Isringhausen

2008 - Jason Isringhausen / Chris Perez

2009~2010 - Ryan Franklin

2011 - Fernando Salas

2012 - Jason Motte

2013 - Edward Mujica



Izzy의 등번호가 44번인 이유는?



점차 늘어나고 있는 클로저 자리의 유동성을 생각해봤을 때, 거의 7년간 Cardinals 마무리 자리를 맡아준 Izzy 같은 케이스는 한동안 보기 힘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13 시즌만 봐도 풀타임 마무리 2년을 채 못채운 Motte이 부상으로 시즌을 날린 사이 생전 클로저 역할을 해본 적도 없던 Mujica가 리그 내에서 가장 안정적인 마무리로 잠깐의 명성을 누렸고, 이후에는 Rosie가 클로저 자리를 맡아주었다. 2014시즌 마무리 역시 Rosie로 낙점되있지만, 2015년에는 다른 얼굴이 클로저 역할을 맡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으면 주인장님을 비롯해 이 블로그의 많은 "Rosie를 Rotation으로!"를 외치시던 분들이 거품을 무실지도...)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인 2008시즌을 제외하고 Izzy는 안정적인 편이었으며 (필자는 Ryan Franklin에게 이런 안정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 전통적인 "마무리" 라는 개념에 정말 잘 어울리는 투수였다. 그는 타석에서 패스트볼을 기다리는 타자에게 그냥 패스트볼을 냅다 꽂아버리는 배짱이 있었으며, 주자가 나간다고 해서 흔들리지 않았다 (특히 Izzy는 많은 클로저들이 그렇듯이 주자 견제라던가 수비 측면에서 약점을 노출했는데, 그가 Cards 유니폼을 입고 뛴 기간 동안은 내-외야에 골드 글러버들을 숱하게 깔아놓고 공을 던졌던 터라 큰 문제는 없었다). 전날 경기를 본인 손으로 직접 망치고도 다음 날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듯 껌을 짝짝 씹으면서 마운드로 올라가는 그의 "뻔뻔함"(?) 은 그를 효과적인 클로저로 롱런하도록 만들어주었다.


음료수를 담아놓은 아이스박스에 바퀴를 달아서 막내 투수에게 배달을 시키자는 것도 Izzy의 아이디어였다. (사진은 당시 "막내"였으나 이후 선수협 대표로 성장하는 Kyle McClellan)


비록 Mets 시절에는 혈기를 참지 못하고 망나니짓을 하고 다닌 적도 있으나 Cardinals 시절의 그는 Bullpen에서 무궁무진한 소재의 "소싯적 얘기"를 하는 것으로 투수들 사이에서 "재밌는 형"으로 인기가 많았다. 특히 마운드 위에서의 두둑한 배짱은 동료들에게 신뢰를 주었으며, 불펜 투수로써의 마음가짐에 있어서 다른 선수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아 코치들도 좋아했다. 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Izzy가 세이브 상황에서 오는 긴장감을 즐길 줄 아는, 타고난 클로저 멘탈리티를 보유한 투수였다는 점이다.


"You do have to be a little bit of an adrenaline junkie. It's what makes it fun. I get nervous a little bit, but you put that to good use. Even that little bit of fear you channel to your advantage. It makes you focus a little better."


-Jason Isringhausen, on closing 9th inning


Izzy는 Generation K의 체면을 살린 유일한 투수이다. 그는 44라운더로 지명되었다가 순식간에 Generation K의 일원이 되었고, 이들 중 가장 혹사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오래 버틴 잡초같은 투수였다. 3차례의 TJS와 정말 다양한 종류의 부상들이 (결핵, 흉부골절, 자해) 그의 커리어를 위협했으나, 자신의 커리어를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재생시켰고, 이후 성공적인 FA 계약을 통해 고향 연고인 컨텐더 팀에 안착, 이후 오랜 기간 Elite Closer로 뛰면서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경험했다. 커리어 막판에는 베테랑 투수 답게 Angels에서 Jordan Walden, Mets에서 Bobby Parnell 등 어린 클로저들에게 마인드셋에 관해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Mets로 돌아와서 통산 300세이브를 딱 채운 뒤 클로저 자리에서 미련을 내려놓았다. 이듬해인 2012년 Angels에서 그는 커리어 마지막 시즌을 보냈는데, 7월말까지 3승 4홀드에 평균자책 2점대를 유지했으며 (마지막 두 달간 많이 맞았으나), 총 50경기 42이닝을 던지며 삼진 31개를 잡았다. 만 39세 투수의 3번째 TJS 이후 2번째 시즌 치고 훌륭했다고 하면, 팬심일까?


그의 커리어에는 돌아보면 꽤나 많은 시련과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그 순간 순간의 위기들을 꾸역꾸역 잘 넘기고 결국은 리그 내에서 가장 풍성한 역사를 자랑하는 팀에서 프랜차이즈 세이브 리더로 남아 은퇴했으니, 성공한 야구인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부록: Cardinals 역사에서 Izzy 의 위엄


Career Saves (우측은 이닝)

1.Jason Isringhausen217408.0
2.Lee Smith160266.2
3.Todd Worrell129425.2
4.Bruce Sutter127396.2
5.Ryan Franklin84312.1

Single Season Saves

RankPlayerSavesYear
1.Jason Isringhausen472004
 Lee Smith471991
3.Bruce Sutter451984
4.Lee Smith431992
 Lee Smith431993
6.Jason Motte422012
7.Jason Isringhausen392005

Games Finished

1.Jason Isringhausen332408.0
2.Todd Worrell232425.2
3.Lee Smith209266.2
4.Bruce Sutter203396.2
5.Lindy McDaniel188884.2





Did you know...

  • Izzy는 2013년 2월, 고향인 Brighton 근처의 Southern Illinois University (SIU) 피칭코치직을 수락했다. 이 팀의 감독 Tony Stoecklin은 Izzy가 노하우를 전수하는 교수법이 좋다면서 코치로써 커리어를 쌓을 수 있을 것이라 낙관했는데, 한번 두고 보도록 하자.
  • Izzy는 어머니가 자기를 임신했을 때 임신 7개월까지 동네 소프트볼 팀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면서, 그것 때문에 자기가 이렇게 망나니 기질이 생긴 것 같다는 진담 반 농담 반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 Izzy의 등번호가 44번은 그가 드래프트에서 44라운드에 뽑혔던 것을 상징한다. 
  • 2009년 Rays에서 뛸 당시, Izzy는 5월 25일 Indians 전에서 대기록 수립에 동참한다. Rays가 8회까지 10:2로 앞서던 이 경기는 9회 Ryan Garko가 만루홈런을 치면서 10:8까지 점수가 좁혀졌다. 당시 High-leverage 상황에서 나오는 릴리버가 아니던 Izzy는 Grant Balfour가 무너져버리자 급히 불을 끄기 위해 등판했는데, 무사 1루에서 3연속 볼넷으로 1점을 더 내주더니 Victor Martinez에게 2타점 적시타를 맞고 경기를 자기 손으로 끝내버렸다. 10점차 리드를 7회까지 유지한 후 뒤집힌 몇 안되는 경기를 직접 뒤집은 것이다. Izzy는 그 경기를 제외하면 단 한 번도 Rays 유니폼을 입고 실점한 적이 없다.



  by Doo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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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ovy

 4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딱 4건의 Major Transaction이 있었던 작년 오프시즌에 이어 올 오프 시즌도 다들 잘 아시다시피 Peralta 계약과 Freese-Bourjos 트레이드, Mark Ellis 영입 이후로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올 시즌은 아주 확고하고도 공공연한 팀의 최대 겨울방학과제인 "유격수 보강" 이 있었기에 필자는 솔직히 약간 설레는 마음으로 오프시즌을 맞이했는데, 너무 일찍 모든 일들이 정리가 되버린 탓에 조금 김이 샌다이에...올 해도 블로그의 간판 이벤트인 유망주 리스트에 이어서, 오프시즌의 지루함을 같이 견뎌보자는 마음에...추억팔이용 TLR ERA 시리즈를 다시 꺼내들어 작년에 미처 다루지 못한 선수들을 돌아보고자 한다.

첫 주인공은 MV3의 일원이자, 여태 필자가 본 최고의 3루수, Scott Rolen이다. 제2의 Mike Schmidt 라는 부담스러운 평을 듣고서 데뷔한 Rolen은 이후 공수에서 리그 최고의 3루수로 거듭났으며, 길고 풍성한 Cardinals 역사에서 1960년대 Ken Boyer 이후 역대 최고 3루수로 꼽히는 데 아무도 이견을 달지 못할 것이다. 

Scott Rolen

3rd Baseman

DOB: 1975년 4월 4일 

Birth: Evansville, Indiana 

Time with Cardinals:  2002-2007

Draft and Minors

고등학교 농구팀 코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Rolen은 농구와 야구를 병행했으며, 두 스포츠 모두에서 대단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Rolen의 농구 선수로써의 자질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는데, 9학년때 고등학교를 입학하자마자 주전 포인트가드로 뛰게 되었음은 물론, 키가 더 큰 이후에는 (6'4, 193cm) 포워드/스윙맨 역할까지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는 선수였다. 졸업학년 당시 Rolen은 Indiana 주에서 뽑는 Mr. Basketball 투표에서 3위에 올랐는데, Rolen이 나온 고등학교가 인구수 1만명을 넘지 못하는 "깡촌'의 작은 시골 공립학교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대단한 업적이다. 

1992년 겨울, Rolen의 Senior 농구시즌이 끝나고 나서 Kentucky, Oklahoma State, Georgia 등 BIG 10 디비전 내의 "농구 좀 한다는" 대학교들이 앞다퉈 Rolen에게 장학금 패키지를 던지기 시작했다. 6피트 4인치의 건장한 프레임과 탁월한 운동신경, 그리고 작전에 대한 출중한 이해도와 우직한 Work Ethic으로 뭉친 Rolen은 NBA 레벨까지는 아니더라도 NCAA에서는 충분히 군침을 흘릴만한 포인트가드였다. 

  


마지막 야구시즌을 앞둔 1993년 초, University of Alabama 와 University of Georgia에서 제시한 농구 장학금을 앞두고 저울질하던 (Rolen의 회고에 따르면 아마 Alabama로 갔을 것이라고 한다) Rolen을 말리는 이가 두 명 있었다. 그 중 하나는 학교의 야구팀 코치였던 Terry Gobert였다. Gobert 코치는 수년간 팀의 에이스 투수이자 유격수였던 Rolen을 12학년 때 갑자기 3루수로 옮겼는데, 그 이유는 상대적으로 공을 더 많이 처리해야하는 유격수에 비해 3루가 어깨/팔꿈치 피로와 부담이 덜하다는 것이었다. 이 작은 시골 고등학교의 야구팀 코치의 현안은 이후 Rolen의 커리어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다른 하나는 Rolen의 재능을 알아본 Phillies의 스카우트 Scott Trcka*였다. Trcka는 Rolen을 1라운더 감으로 구단에 천거했으나, Phillies 측에서는 이미 농구 장학금을 받아놓고 저울질하고 있던 Rolen이 궁극적으로 야구를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Rolen의 부모님이 둘 다 (교육을 우선시하는) 학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점 때문에 Phillies 측에서는 Rolen이 어련히 농구 장학금을 선택하고 대학교로 진학할 것이라 믿었었다. 그러나 Trcka는 Rolen의 부모님과 Phillies 프론트 양측을 진득하게 설득해 Rolen의 마음을 돌렸다.

Rolen이 궁극적으로 농구 대신 야구를 택한 것에는 25만달러라는 큰 액수의 사이닝 보너스가 큰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이유 두 가지가 있었다. 한 가지는 Rolen의 야구에 대한 열정, 그리고 다른 하나는 냉정하게 봤을 때 Rolen같은 6피트 4인치 정도의 언더사이즈 백인 포워드/가드가 웬만한 재능이 아니고서는 NBA의 벽을 두드리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농구를 택할 경우 Rolen의 농구 커리어는 NCAA 레벨 이상은 보장할 수 없으나, 야구를 택하면 확실히 프로에 갈 수 있는 재능이다 - 라는 것이 Trcka의 셀링 포인트였다. 

Rolen이 참가했던 1993년 드래프트***는 유난히 대어가 많았다. Alex Rodriguez, Torii Hunter, Trot Nixon으로 시작해서 여기에 골든 스파이크 수상자이자 이후 당대 최고 수준의 먹튀로 거듭나는 Darren Dreifort 까지...이 정도의 Draft Pool에서 깡촌 Indiana 출신의 고졸 3루수**가 "고졸"이라는 딱지를 넘어서서 1라운더가 된다는 것은 어지간해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당시 고졸 출신들 중 Rolen은 10번째로 드래프트 되었는데, Rolen보다 먼저 뽑힌 고졸 선수들 중 ML에 제대로 정착한 선수들은 Torii Hunter, A-Rod, 그리고 훗날 동료가 되는 Chris Carpenter 뿐이었다. Trcka의 꾸준한 설득에 힘입어 결국 Rolen은 1993년 드래프트 2라운드 전체 46번으로 Phillies에게 지명되었는데, 이 대어들이 넘쳐나는 드래프트에서 전체 46번으로 지명되었다는 것은 당시 Rolen의 재능이 확실히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입단 이후 Rolen은 마이너리그를 한 단계 한 단계 차근차근 씹어먹고 올라왔다. 1994시즌, 프로에서 맞이한 첫 풀시즌에서 그는 .294/.363/.462의 뛰어난 타격 성적은 물론이고, 코치들의 조언을 놀랄만큼 빨리 흡수하며 순식간에 Top Prospect로 도약했다. 1995년 A+ 레벨의 Clearwater에서 전반기를 맞이한 그는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OPS .880을 찍더니 후반기에 AA로 승격되었다. 로우레벨 마이너를 Raw Talent 하나로 빠르게 씹어먹고 올라오는 이 고졸 야수 유망주에 필리스는 흥분했다.

당시 91년 드래프트 출신이자 Phillies의 차기 3루수로 Rolen보다 먼저 치고 올라오고 있었던 Rob Grable이란 3루수는 AAA로 승격된 뒤 갑자기 좌익수로 포지션을 변경해야 했다. Rolen의 빠른 성장세를 본 Phillies가 3루를 비워놓고 싶었던 것이다. 1994시즌 직후 BA 선정 유망주 랭킹 Top 100 중 91위였던 Rolen의 순위는 1995시즌이 끝난 이후에는 27위로 올라가 있었다. 고졸 3루수가 루키리그부터 시작해 AAA까지 올라오는데 3년도 걸리지 않았으니, 당시 Phillies 팜의 실정과 Rolen의 확실한 툴을 동시에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Scott Rolen's Minor League Track Record

YearAgeTmLevGPAABRH2B3BHRRBISBCSBBSOBAOBPSLGOPS
199318MartinsvilleRk25988082550012341015.313.429.375.804
199419SpartanburgA138580513831513451472685590.294.363.462.825
199520ClearwaterA+6628323845691321039403746.290.392.487.880
199520ReadingAA20867616223031510714.289.353.447.800
199621ReadingAA612742304483222942833432.361.445.5911.037
199621Scranton/Wilkes-BarreAAA451971682346170219452828.274.376.411.786

 * Trcka 이 양반은 Phillies 구단에서 오랫동안 일한 베테랑 스카우트로, Scott Rolen에 이어 Brett Myers 등을 발굴한 바 있다. 작년부터 Phillies 스카우팅 부서에서 Mid-West Supervisor로 재고용되어 일하고 있다.

**고졸 3루수가 빅 리그에서 3루수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3루는 대체로 Retention Rate (어설픈 번역으로 포지션 유지률? 정도로 해두자) 이 낮은 포지션인데, 1989-2008년까지 20년간의 드래프트에서 Top 100 안에 뽑혔던 고졸 3루수들 중 47%만이 3루수로 빅 리그에 안착했으며, 대졸 3루수의 경우에도 Retention Rate은 60%가 채 되지를 않는다. 많은 경우에 그들은 1루수나 좌익수 등으로 포지션을 바꿔야했다 (Alex Gordon, Ryan Braun, Jason Giambi, Mark Teixeira 등.) Scott Rolen처럼 고졸 3루수로 드래프트되어 3루수로 데뷔하고 은퇴할 때까지 3루수로 뛰는 경우는, Rolen 정도의 클래스가 아니더라고 해도 대단히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이 드래프트에서도 Cardinals는 Low Ceiling/High Floor 대학 출신 우완 Alan Benes를 뽑아갔다. 강산이 정말 두 번 변했을까?



1997-2001: Phillies 의 꿈과 희망

1996년 7월 31일, AAA레벨의 Scranton에서 뛰던 Rolen은 당장 Philadelphia로 내려오라는 "The Call"을 받는다. Cardinals와의 경기가 우천으로 취소되고 다음 날 더블헤더가 잡힌 것이었다. Rolen은 기쁨에 겨워 급히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하필 이 때 Rolen의 부모님은 여름방학을 맞아 멀리 Florida의 아들네 (Rolen의 형) 집에 가 있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Rolen의 어머니 Linda Rolen은 비행기 공포증이 있어서 못 타신다고 한다. 콜업 소식을 들은 Rolen의 부모님은 아들의 데뷔전을 보기 위해 Sarasota 부터 Philadelphia까지 1100마일의 거리를 운전을 해서 올라갔다. Rolen의 부모님은 밤새도록 달렸으나 결국 당신 아들 Scottie가 주전 3루수이자 6번타자로 데뷔전을 가지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으며, 4회말 Cardinals의 투수 Donovan Osborne을 상대로 2루타를 때려내며 첫 안타를 신고하는 모습도 달리는 차 안에서 라디오 중계로 들으며 눈물을 훔쳤다고 한다. (다행히 이 날 경기가 더블헤더라서 이들이 도착한 이후 2차전은 직접 관람했다고 한다.)

이후 Rolen은 꾸준히 기회를 받으면서 더 이상 AAA로 내려가지 않았다. 데뷔 한 지 1달이 가 넘은 1996년 9월 7일, Rolen은 Cubs 투수 Steve Trachsel 의 공에 맞아 팔을 부러지는 바람에 시즌이 끝나버렸는데, 공교롭게도 Rolen이 다친 타석은 "신인 자격 유지"의 마지노선인 130번째 At Bat 이었다. 즉, 다치지 않았더라면 Rolen은 131번째 타석을 갖게 되면서 신인 자격을 상실, 이듬해 Rookie of the Year 투표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아마도 Matt Morris가 신인상을 타지 않았을까 하는 게 필자의 사족이다.)

이후 Rolen의 Phillies 생활은 탄탄대로였다. 1997시즌 새로 부임한 젊은 감독 Terry Francona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스프링 트레이닝부터 Rolen을 주전 3루수로 낙점했다 (사실 기존 3루수 Zeile이 Orioles로 트레이드 됬을 때부터 이 자리는 Rolen의 것이었다). 개막전에서는 6번타자였으나 한 달 후 이미 Rolen은 클린업에 들어가 있었다. 1997시즌 그는 21홈런 92타점 wRC+ 121, OPS .857의 화려한 성적을 거둔 뒤 1위표 14장을 모두 획득하며 만장일치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이제 갓 루키시즌을 마친 이 젊은 3루수에게 Phillies는 4년간 10M짜리 계약을 안겨주며 미래를 약속했고, Rolen 역시 그에 상응하는 디스카운트로 훈훈한 계약을 성사시켰다.

그저 장밋빛으로만 보이는 Rolen의 Phillies 시절 성적 

YearAgeTmGPAABRH2B3BHRRBISBCSBBSOBAOBPSLGOPSOPS+
199621PHI37146130103370418021327.254.322.400.72290
199722PHI15665756193159353219216676138.283.377.469.846121
199823PHI1607116011201744543111014793141.290.391.532.923139
199924PHI11249742174113281267712267114.268.368.525.893120
200025PHI128541483881443262689815199.298.370.551.920129
200126PHI151653554961603912510716574127.289.378.498.876127
200227PHI10043837552972141766525268.259.358.472.830123
PHI (7 yrs)84436433125533880207191505597125426714.282.373.504.877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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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en의 Phillies 시절은 언뜻보면 그저 장밋빛이었다. 2년차이던 1998시즌에는 31홈런 110타점으로 팀의 간판 타자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커리어 첫 골드 글러브 수상 및 MVP 득표에 성공했다. 1999시즌에는 등 부상으로 50경기를 결장하는 Down Year를 보내는 와중에도 26개의 홈런과 .893의 OPS를 유지했다. 이듬해인 2000시즌에는 다시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으며, 2001년에는 다시 100타점 고지를 밟으며 MVP 투표에도 처음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이미 2001시즌 무렵, 훈훈하기만 해보였던 Rolen과 Phillies의 사이의 갈등은 이미 상당히 곪아있었는데, 이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2001시즌: Phillies/Bowa 와의 갈등

Phillies에서의 Scott Rolen은 팀의 현재이자 미래, 그 자체였다. 그는 타석에서 뛰어난 클러치 능력을 발휘했으며, 굉장히 빠른 배트스피드로 많은 라인드라이브 타구들을 양산해냈다. 수비에서는 역대 3루수들 중 가히 최고라고 할만한 Range와 어깨, 그리고 수년간의 농구를 통해 몸에 배어버린 뛰어난 Pivot 능력과 위치선정 센스가 있었다. 특히 그는 오른쪽 방향 움직임이 워낙 빠르고 기민해서 유격수쪽으로 남들보다 더 치우쳐서 수비해도 다른 3루수들보다 더 많은 그라운드를 커버했고, 타구에 대한 빠른 리액션과 정확한 First Step에 관해서 Rolen은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클럽하우스에서 리더 역할이 익숙했던 Rolen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Phillies의 리더로 부상했다. 90년대 후반 Phillies에게 Scott Rolen이란 Braves에게 Chipper Jones가 가지는 의미, 혹은 Mets에게 David Wright가 가지는 의미와 비슷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Phillies 와 Rolen에게 Bobby Cox와 같은 감독이 없었다는 점이다.

"Defensively, he is a shortstop playing third base. He compares favorably to Mike Schmidt at a similar stage in development, and gets to balls that Brooks Robinson never dreamed of reaching. "

-Scouting Report 2002, on Rolen's Defense 

Rolen에게 첫 감독이었던 Terry Francona는 젊고 유능했지만 감독 경험이 일천했고, Phillies처럼 문제가 많은 팀을 맡아서 단기간에 성적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1999시즌에 허접한 투수진에도 불구하고 (팀 FIP 5.05) 타선에 새 얼굴들이 등장하며 무려 77승이나 해냈던 Francona는 결국 2000시즌 Fluke였던 선수들이 제 기량을 찾고 주축 멤버들이 부상에 신음한 끝에 97패를 안고 해고되었다. 오프시즌에 제대로 된 마운드 보강은 하지도 않고 쓸데없이 기대치만 높아져있는 구단 수뇌부는 시즌 중반에 Curt Schilling, Rico Brogna 등을 트레이드 해버리면서 시즌을 포기했다. Rolen은 97패라고 적힌 팀 성적표보다 시즌을 이렇게 포기해버리고 키 플레이어들을 팔아버리는 Phillies 의 운영방침이 실망스러웠다. 

새로 부임한 Larry Bowa는 Scott Rolen와 "물과 기름" 처럼 다른 성격의 사람이었기에 처음부터 팀의 리더인 Rolen과의 관계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Bowa는 야구가 없으면 못사는 천생 야구인인데다가 야구 역사, 야구 기본기에 대해 상당히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야구 말고도 다른 스포츠에서 월등했던 Rolen에게 야구는 생계 수단의 일환일 뿐, 야구를 하지 않을 때는 농구나 골프로 소일했다. 대도시 Philadelphia에서 선수생활을 오래한 Bowa는 다혈질에다가 거침없는 성격이었고, Mid-West 출신의 Rolen은 화려함을 자제하는 행동들이 몸에 배어있었다.

실수나 패배에 대해 굉장히 야박하게 질책했던 Bowa는 선수단을 전혀 장악하지 못했는데, 전반적인 선수들 사이에서의 여론은 "Bowa는 경기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기본기에 빠삭하나, 내가 감독이라면 저렇게 선수들을 대하지 않았을 것" 이라는 비판적인 의견이 대다수였다. 한 Phillies 선수는 인터뷰에서 Bowa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He can manage. He knows baseball. But if we win, it will be just to spite him. Everybody hates him that much." 이는 선수들의 큰 형같은 스타일로 인기가 많았으나 정작 성적을 못내던 전관 Terry Francona와 정반대의 모습이다.

2001시즌, Bowa는 시즌 초반 중심타선의 Abreu와 Rolen이 부진하자 "These guys are killing us" 라며 비난했고, 이에 Rolen도 지지 않고 대들었다. 둘은 6월 Tampa 원정에서 말다툼을 벌였고, 이후 Phillies가 홈스탠드를 위해 필라델피아로 돌아왔을 때 관중들은 Rolen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Phillies 팬들은 팀이 잘 나갈때나 못 나갈때나 야유에 있어서는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관중들 아니던가. 이후 시즌 내내 Rolen의 타율이 떨어질 때마다 Phillies 팬들은 서슴없이 야유를 던졌다.

2001년 8월, Larry Bowa와의 갈등이 있는 와중에 프론트 오피스의 임원급이자 단장 Ed Wade의 Senior 보좌관이었단 Dallas Green이 지역 라디오에 나가서 "Rolen은 그저 그런(So-so) 선수이며, 특히 그의 성격 (Personality) 때문에 스타가 되기 힘들 것" 이라며 친Bowa 발언을 서슴없이 던졌다. 이후 필라델피아 지역 언론의 Beat writer들이 Dallas Green에게 발언을 확인해달라고 하자, Green은 "내가 말한 그대로" 라며 시큰둥하게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Rolen을 이를 듣고 분개했으며, 곧장 Dodgers와의 시리즈에서 11타수 8안타 1홈런으로 맹타를 친 뒤 인터뷰에서 Green의 발언을 빗대 ""I thought I had a so-so series" 라고 받아쳤다.

재미있는 것은 선수시절 Bowa 본인도 Rolen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Phillies에서 데뷔 후 12년간 주전 유격수로 뛰었던 Bowa는 1980년 자기 팀 경기가 시작하기 전에 본인의 라디오 쇼를 직접 방송하며 대놓고 청취자들에게 감독과 동료 선수들은 물론 팬들까지도 Worst Fans in Baseball이라며 질책했었던 바 있다. 이 당시 Bowa가 그렇게도 까대던 Phillies 감독은 다름아닌 Dallas Green이었으며, Bowa를 필두로 한 Phillies 팀은 Green에 대한 불만와 반발심으로 똘똘 뭉쳐 결국 1980년 WS에서 Royals를 꺾고 우승한 바 있다. 이 당시 Dallas Green은 선수단에게 Bowa와 흡사한 이유로 민심을 잃고 있었는데, 21년 후 각자 다른 위치에서 같은 역사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 내에서 탑 5에 드는 빅 마켓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Montreal Expos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팀을 운영하는 모습에 Rolen은 "이 팀이 과연 우승할 생각이 있는 것인가" 하는 류의 발언을 공석에서 하기 시작했다. 2001시즌이 끝난 후, Phillies는 Rolen과의 장기계약을 1순위 과제로 삼고 오프시즌에 들어갔으나 Rolen이 11월에 Phillies의 재계약 협상을 일방적으로 중단하면서 양측의 인연은 슬슬 막바지로 치달았다. Rolen은 2002년 1월에 Phillies와 8.6M짜리 1년 계약을 맺었으며, 2002시즌이 끝나고 나면 FA가 될 것을 선언했다. 그는 또한 "Phillies와 재계약 할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그들이 정말 우승에 관심이 있는지 행동으로 보여줘야할 것" 이라고 말했다. 자린고비 구단으로 보여서 대외 이미지가 나빠질까 우려한 Phillies측에서는 급히 "Rolen에게 우리가 10년간 140M짜리 계약을 오퍼했으나 Rolen이 싫다고 한 것임" 이라며 보도 자료를 내고 그들이 간판 스타를 잡기 위해 얼마를 투자할 "뻔" 했는지를 과시했다. Rolen은 이에 "오퍼는 감사하지만 This is about winning, not money" 라면서 틀어진 마음을 굽히지 않았다.

Phillies 리빌딩의 타이밍도 Rolen에게는 큰 걸림돌이었다. Rolen이 팀 중심에 서게된 1998시즌부터 필리스에는 젊은 야수들이 하나 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Cubs에서 데려온 Doug Glanville은 마치 보급형 Kenny Lofton 처럼 쏠쏠한 리드오프로 활약해주었고, Astros에서 데려온 Bobby Abreu는 1998년을 기점으로 주전으로 발탁, 그의 길고 긴 커리어를 시작했다Rolen과 팜에서 같이 올라온 포수 Mike Lieberthal과 Rico Brogna는 모두 리그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은 선수들이었으며, 대학야구에서 받을 상은 다 받고 올라온 "Pat the Bat" Burrell 까지 승격되 상당히 괜찮은 타선을 구축했었다. 반면 Curt Schilling을 제외하고는 도저히 믿을 구석이 없던 마운드는 답이 없었다. 1997년 Phillies의 팀 ERA는 4.87 에 달했고 (타고투저 시대였다는 점을 감안해도), 이후 2000시즌까지 이 수치는 4.64 --> 4.93 --> 4.79 로 전혀 개선이 되질 않았다. (1997-2001년까지 5년간 Phillies 평균 팀 ERA는 4.68로, 같은 기간 더 안 좋았던 NL 팀은 Pre-Humider 시대의 Rockies와 Cubs 뿐이었다)

즉시전력감 투수라고는 팜을 갓 졸업하고 올라온 Randy Wolf가 고작인 상황에서, Phillies는 투수 보강에 돈을 썼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Phillies는 2004시즌 Citizens Bank Park 개장을 앞두고 모든 전력 보강을 2004년에 포커스를 맞춘 상황에서 하고 있었다. 아직 어린 Bobby Abreu와 장기 계약을 맺고, 팜에서 자란 자체생산 포수 Mike Lieberthal과 연장계약을 맺은 것, 1998년 드래프트 전체 1번 Pat Burrell과 1996년 2라운더였던 Jimmy Rollins, 1995년 2라운더였던 Marlon Anderson을 차세대 코어 플레이어로 낙점하고 키운 것 모두 2004년을 염두에 두고 진행한 움직임이었다. 자체 생산한 Burrell, Rollins, Marlon Anderson 등이 ML레벨에 무사히 안착한다면 Scott Rolen과 함께 리그에서 가장 경쟁력있고 젊은 내야진을 꾸릴 수 있었을 것이며, 이들은 Abreu-Glanville-Lieberthal 등과 함께 상당히 짜임새있는 타선을 구축한다...적어도 이것이 Phillies 단장 Ed Wade가 그린 "2004년 새 구장 개장에 맞춘 Phillies 리빌딩 프로젝트" 의 청사진이었다. 1996년에 루키 시즌을 치른 Rolen으로써는 데뷔 9년차가 되는 2004년에 비로소 팀이 포스트시즌에 도전할 것이라는 명제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Rolen이 저렇게 대놓고 FA가 될 것을 선언하고, 팀의 장기 계약 오퍼를 거절하자 Phillies는 갑자기 급해졌고, Boston에서 열린 윈터미팅에서 Rolen 세일에 들어갔다. 그러나 FA 전 마지막 시즌을 보내고 있던 선수에게 유망주를 마구 퍼줄 팀들은 없었다.


스프링 트레이닝 첫 날, 무성한 트레이드 소문과 구단과의 공개적인 관계 악화 때문에 Rolen은 지역 언론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인터뷰 대상이었다. Phillies 측의 10년간 140M 계약 오퍼를 거절했다는 소문을 확인해주길 바라자, Rolen은 "I am an idiot (for not accepting the offer)" 라면서, Phillies 구단 운영 방침을 무려 45분동안 비난했다. Rolen의 의도는 (1) 사실 140M이라는 거액을 거절하는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2) 그러나 나에게는 돈보다 승리가 중요하다 (3) 나에게 돈을 퍼주느라 다른 선수들을 영입하지 못한다면 이 팀은 절대 이길 수가 없다 는 식의, 상당히 설득력있고 공감가는 말이었다. 비슷한 예로, Oakland의 Jason Giambi 역시 A's에 잔류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되면 팀의 넉넉치 못한 주머니 사정상 Competitive 한 로스터를 유지할 수가 없게 되고, 그래서 Giambi는 Yankees를 선택한 바 있지 않던가.  

 이 일이 있고 며칠 후, Larry Bowa는 Rolen에게 다가가 쓴 소리를 했는데, 하필 이 대화가 언론에게 노출된 상황에서 벌어졌다. Bowa는 말다툼 이후 Ed Wade 당시 필라델피아 단장에게 찾아가 Rolen을 트레이드 해버리라고 말했는데, 이는 요즘같애선 참으로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이 이후 Rolen의 트레이드는 사실상 시간문제였는데, 그에 개의치않고 Rolen은 잔부상 없이 거의 모든 경기를 출장하고 전반기에만 17홈런을 쏘아올리며 첫 올스타에 선정, 자기 할 일을 했다. 

"I don't think I can put a time frame on falling in love with St. Louis. I fell in love with St. Louis probably when I was 7 years old and Mom and Dad brought us here to a ballgame and I got to watch Tommy Herr and Ozzie Smith and Willie McGee and everybody like that.''

-Scott Rolen, on his trade to St. Louis-

2002년: Play Like a Cardinal

2002시즌 Cardinals는 에이스 Darryl Kile의 갑작스런 죽음에 흔들리지 않고 탄탄한 전력을 앞세워 순항하고 있었다. 트레이드 데드라인을 앞둔 7월 28일까지만 해도 Cardinals는 58승 44패 승률 .569로 NL Central 1위를 달리고 있었으며, 2위 Reds와는 5게임, 3위 Astros와는 6게임 차이였다. 트레이드를 통해 전력 보강을 꾀한다면 오히려 투수 쪽 보강이 절실했다. 당시 Woody Williams가 7월 초 부상을 당하면서 결장이 불가피했고, Kile의 비보 이후 Jason Simontacchi라는 그다지 검증안된 신인에게 지나치게 많은 이닝이 돌아가고 있던 참이었다. Jocketty가 7월 19일에 Chuck Finley를 수혈해오면서 (왠지 이 Move는 2009년 Jake Westbrook 영입과 굉장히 흡사하다) Cardinals의 트레이드 데드라인은 그렇게 넘어갈 듯 보였다. 

그러나 Jocketty는 많은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기존 3루수 Polanco에 뜬금 노히터로 주가에 거품이 껴있던 좌완투수 Bud Smith, 그리고 베테랑 릴리버 Mike Timlin을 사용한 패키지로 Phillies와의 인연이 다한 Scott Rolen을 데려오는 강수를 둔다. Jocketty 특유의 뚝심과 배짱, 그리고 적절한 공격성이 돋보이는 이 트레이드 소식에 Marlins 원정을 가고 있던 Cardinals 선수단은 비행기 안에서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이쯤에서 주인장님의 Walt Jocketty 시리즈에 나온 코멘트를 잠깐 돌이켜보도록 하자.

"이 시즌 Jocketty는 정말 올인의 끝을 보여 주는 것 같다. Kile에게 월드시리즈 우승을 헌정하고 싶었던 것일까? Jocketty는 트레이드 마감시한을 앞두고 Scott Rolen을 영입하는 승부수를 던졌는데, 이게 또 훌륭한 트레이드가 되었다. Rolen은 공수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여 남은 두 달 동안 무려 3.3 WAR을 쌓았다. 한편, Phillies의 입장에서는 Bud Smith가 폭망해 버렸으나, Polanco가 상당히 우수한 3루수로 성장하여 그럭저럭 선방한 트레이드가 되었다. (이후 5년간 Rolen은 25 WAR, Polanco는 19 WAR을 기록하였다. 여기에 둘의 연봉 차이까지 감안하면 Phillies도 밑진 것이 별로 없을 정도이다.)

-FreeRedbird, on Scott Rolen trade

Rolen이 Cardinals 유니폼을 입은 후 첫 40타수에서 고작 6안타에 그치고 Cardinals가 7연패에 빠지면서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으나, 이는 그저 "동트기 전 고요함" 에 불과했다. Rolen은 이후 후반기 남은 48경기에서 홈런 14개에 40타점을 쏘아올리며 31홈런 110타점으로 시즌을 마무리했고, 개인 통산 4번째 골드 글러브 수상과 첫 실버 슬러거 수상에 성공했다. 조금 터질만 하면 DL에 오르면서 감질만 나게 하는 J.D. Drew 에게 조금 지쳐가던 이 팀은 Rolen의 합류로 파괴력이 어마어마한 중심타선을 갖게 되었다. Rolen 영입이 확정된 7월말 이후 Cardinals가 올린 성적은 39승 21패에 승률 .658로, 이 기간 동안 Cardinals보다 좋은 성적을 올린 팀은 없었다. 

공격에서 Rolen은 Phillies에서의 마지막 2년간 잦은 등 부상으로 배트 스피드가 나이에 비해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고, 이 때문에 몸쪽 패스트볼 승부에 약한 모습을 노출한 바 있었다. 그러나 St. Louis 로 이적한 후 플레이트에서 살짝 떨어져서 스윙 각도를 바꾸었는데, 교정 후 다시 배트 스피드를 회복하면서 좌우 가리지않고 강한 타구들을 양산해내기 시작했다. 또한 인조잔디를 깔아놓은 Veterans Stadium에서 천연잔디 구장인 Busch로 넘어온 것은 3루에서 High-intensity 플레이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Rolen의 커리어에 대단히 긍정적인 변화였다.

기존 3루수 Polanco도 당시 수비가 나쁜 선수가 아니었으나, Rolen의 3루 수비는 차원이 달랐다. 당시 유격수 Renteria는 Rolen의 수비에 대해 "The guy can cover third AND shortstop" 이라며 혀를 내둘렀는데, Rolen의 Range는 Renteria가 2루 쪽으로 조금 더 붙어서 수비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Up-the-middle 식의 2-유간 빠지는 타구들을 Renteria가 더 쉽게 걷어내도록 해주었다. Renteria 덕에 2루수 Vina 역시 1루 쪽으로 조금 더 붙어서 수비할 수 있었다. Rolen 한 명의 가세로 내야 전체가 혜택을 받는 이러한 모습은 Terry Gopert 코치가 가르치던 Jasper High School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2002시즌, Rolen은 그토록 기다리던 포스트시즌에 올라갔고, 디비전 시리즈 1차전에서 곧 HOF에 올라가실 D-Backs의 장신 좌완투수를 상대로 투런 홈런을 치며 기세등등했다. 그리고 2차전, 1:0로 앞선 7회말 2사 1,2루에서 D-Backs의 Junior Spivey가 3루 쪽으로 땅볼을 굴렸다. 하필 풀 카운트에서 나온 인플레이 타구였기에 2루 주자 Alex Cintron은 진작에 스타트를 끊은 상태였다. 타구 처리중이었던 Rolen에게 Cintron이 충돌했고, 이 과정에서 Rolen은 왼쪽 어깨가 나가버리고 만다. Rolen 왼쪽 어깨의 수난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다.

이렇게 Rolen의 첫 포스트시즌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끝나버렸다. Rolen이 없이 NLCS로 올라간 Cardinals는 할 수 없이 유틸리티맨 Miguel Cairo를 3루에 투입하거나 때론 Pujols를 3루에 넣으면서 버텼고, 특히 Cairo는 NLCS 1차전에서 투런 홈런 포함 3타점을 치는 대활약을 포함해 이 시리즈에서 13타수 5안타를 기록했다. 그러나 결국 2002시즌 Cardinals는 결국 NLCS에서 Giants에게 무릎을 꿇는데, 이 시리즈의 허망함에 대해서는 예전에도 자주 이야기한 바가 있으니 참도록 하겠다.

""I told him once, my happiest day would be if there's a game where 27 groundballs get to third base. The way he plays that position, the way he runs the bases, the way he takes his at-bats, he is a complete player.''

-  Tony La Russa, on Rolen's defensive prowess



오프시즌에 Jocketty는 Rolen에게 8년간 90M의 대형 계약을 안겨주었는데, 이는 여전히 Reasonable Spending으로 기억되는 무브이다. Rolen는 계약 첫 해가 28세 시즌이었고, 이미 리그 최고 3루수로 등극한 선수의 28~35세 시즌을 AAV 12M도 안되는 가격에 쓸 수 있다면 요즘 시세에서는 염가봉사였겠지만, 12년 전 당시 총 페이롤 75M선을 지키고 있던 Cardinals 입장에서 이는 크게 지갑을 연 것이었다. Rolen이 유년기부터 Cardinals/Reds 팬으로 자랐다는 사실은 익히 잘 알려져있는데, 때문에 Rolen은 어느 정도 검증된 전력을 구축한 컨텐더 팀이었던 Cardinals 잔류에 이미 마음이 기운 상태였고, NTC와 5M짜리 사이닝 보너스까지 포함된 이 계약을 따낸 뒤 흡족해했다. 트레이드로 데려온 뒤 장기 계약으로 묶어놓는 전형적인 Jocketty 식 영입으로, McGwire-Edmonds-Rolen의 뒤를 훗날 Holliday가 잇게 된다.

 "We are very excited that we were able to work out a new contract with Scott. In the short time he has been in St. Louis, our fans have really come to appreciate the talent that he brings to our club. Scott is a proven run producer and one of the best defensive players in the game. He will be a great cornerstone for our organization for years to come."

-Walt Jocketty, on signing long term contract with Rolen


2004년: MV3

등 부상에서 회복되어 건강하게 시즌을 시작한 Rolen은 정규시즌 초반부터 정규시즌 막판 부상자 명단에 오를 때까지 거의 계속 리그 타점 선두를 유지했으며, 전반기를 무려 .330 18홈런 80타점이라는 말도 안되는 기록으로 마치며 올스타전 최다 득표의 영예를 누렸다. Rolen은 9월초에 왼쪽 종아리에 타박상을 입어서 전력질주를 못하게 되는 부상을 입었는데, 워낙 2위팀과 경기차이가 많이 났기에 La Russa는 Rolen을 주저없이 쉬게 해주었다. 이미 트레이드 데드라인을 앞두고 Jocketty가 Larry Walker를 데려오는 또 한번의 강수를 두었었기에 팀 공격은 Rolen 없이도 활화산처럼 돌아갔다.

다만 전반기에 미친듯이 쌓던 타점 페이스가 부상으로 인해 뚝 떨어진 점이 아쉬운데, 이 시즌 Rolen은 만루에서 .583의 타율을 포함해 득점권 타율 리그 3위를 기록했으며, 넉넉히 140타점을 바라볼 수 있는 페이스였다. 건강하게 시즌을 마치고 타점 1위 타이틀을 놓치지 않았다면 이미 리그 내에서 소문난 Rolen의 수비를 고려했을 때 Beltre보다는 더 득표하지 않았을까?

2004년 MVP 투표 - MV3의 위용인가 Bonds의 위용인가

Voting ResultsBatting StatsPitching Stats
RankTmVote Pts1st PlaceShareWARGABRHHRRBISBBBBAOBPSLGOPS
1Barry BondsSFG407.024.091%10.6147373129135451016232.362.609.8121.422
2Adrian BeltreLAD311.06.069%9.615659810420048121753.334.388.6291.017
3Albert PujolsSTL247.01.055%8.415459213319646123584.331.415.6571.072
4Scott RolenSTL226.01.050%9.114250010915734124472.314.409.5981.007
5Jim EdmondsSTL160.00.036%7.1153498102150421118101.301.418.6431.061

2004년 Dodgers와의 NLDS에서 Rolen이 12타수 무안타로 부진하자 언론은 정규시즌 막판 입은 종아리 부상과 타격 슬럼프를 연결시켰는데, 그 때마다 Rolen은 "부상과 상관없다. 그냥 내가 못 친 것" 이라며 자책했다. Sox와의 World Series에서 Rolen이 15타수 무안타로 부진했을 때도 같은 반응이었다. Rolen은 핑계를 대는 선수가 아니었다.

2004년 NLCS는 디비전 라이벌 Astros와 7차전까지 가는 혈투를 벌였던 명승부로, Astros의 몰락으로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2000년대초 Cards-Astros 라이벌리의 최고점이라고 감히 부를 수 있는 시리즈였다. 비록 Cards 팬이었지만 이 시리즈의 포인트는 MV3를 필두로 쉬어갈 틈이 없는 정규시즌 105승짜리 타선의 위엄을 가을 본즈 Beltran 과 당시 Berkman 두명이 상대하는 듯 한 모습이었다. 특히 Beltran은 유비 관우 장비를 동시에 상대하며 창 쓰는 법이 가지런했다는 여포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고, Berkman 역시 변방의 마초 쯤 되는 느낌이었다.

Rolen은 이 포스트시즌에서 팬들에게 극단적으로 다른 인상을 남겼다. Dodgers와의 포스트4경기 18타석에서 한 개의 안타도 치지 못하면서 부상 의혹을 받았었다가, Astros와의 NLCS에서 비로소 명예회복을 했다. 그는 2차전에서 혼자 홈런 2개를 치면서 승리를 이끌었고, 7차전에서 6회 Pujols가 동점 2루타를 치면서 분위기를 끌어올리자 곧바로 좌측 라인드라이브성 홈런을 꽂으면서 Clemens를 넉다운시켰다. (링크) 그러나 월드시리즈가 시작되자 Red Sox 투수들에게 4경기 15타수 무안타로 꽁꽁 묶이면서 결국 무기력한 모습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는데, 정규시즌 내내 MVP 페이스로 시즌을 보낸 선수의 커리어 하이 시즌으로는 조금 억울한 면도 없지않다. 



2005-2006: 우승과 바꾼 부상

커리어 하이 시즌을 뒤로 하고 시즌을 시작한 Rolen은 5월 10일 Dodgers전에서 훗날 커리어의 반환점이 되고 마는 부상을 당한다. 투수 땅볼을 치고 1루로 냅다 뛰기 시작했는데, 투수 Scott Erickson의 악송구를 잡기 위해 1루 선상으로 나와있던 Dodgers 1루수 최희섭과 부딪친 것이다. 이것으로 어깨가 탈골되어 DL에 등재된 Rolen은 어깨 수술을 받은지 한 달후인 6월 18일에 복귀했으나 공격과 수비에서 모두 정상이 아니었다. 26경기에서 홈런없이 8타점에 .207/.293/.264에 그치며, Full Range of Motion을 회복하지 못했다고 하소연했다.

부상 기간 도중 MRI 촬영 결과 Torn Labrum을 발견했는데, Rolen은 재활을 하면서 시즌 막판 복귀를 노리느니 차라리 수술을 받고 내년 시즌을 기약하기로 한다. 2010년까지 계약이 되어 있던 Rolen의 장기적 건강을 Cardinals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으며, Rolen의 시즌은 7월 21일자로 마감되었다.

8월 중순에 수술을 받은 Rolen은 6개월간의 회복 및 재활을 거치고 스프링 트레이닝에 모습을 드러냈고, 건강을 되찾자 그의 생산성도 돌아왔다. 그는 시즌 내내 허접한 마운드와 주축 선수들의 부상으로 고생하던 와중에 142게임에서 22홈런 95타점 wRC+ 126을 기록했고, Cardinals 유니폼을 입고 마지막으로 골드 글러브와 올스타 선정의 영예를 누린다. 이 해에 Rolen은 7월 초까지만해도 OPS 10할에 육박하는 성적을 기록하는 페이스를 기록하며 전반기를 14홈런 49타점 .331로 마쳤으나, 후반기 들어서 페이스가 급격히 떨어지며 타율 .253에 그쳤다. 특히 이 시즌 나온 홈런 22개 중 19개가 당겨친 것이었을만큼 밀어치는 타구의 비거리가 현저히 감소하기 시작했는데, 이 현상은 자연스러운 Decline이라기보단 2005년 어깨 부상으로 배팅 스피드가 떨어진 탓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며, Matt Kemp도 올 시즌 비슷한 증상을 보인 바 있다. 

"There have been times where he’ll make one of those great plays and I’ll just be standing there staring. Then I’ll see the other guys running off the field because there are three outs.”

-Jim Edmonds, on Rolen's defense

Cardinals/TLR과의 갈등

2007시즌이 끝나고 Cardinals가 TLR과의 2년 연장 계약을 체결하자, Rolen은 당시 단장 대행직을 맡고 있던 Mozeliak에게 트레이드를 해줄 것을 요청한다. 지난 시즌부터 어긋났던 TLR과의 불화가 수면에 올라온 것이다. Mozeliak은 "조건이 맞지 않으면 트레이드 하지 않을 것" 이라고 말했으나 Rolen과의 이별은 TLR과의 연장 계약으로 이미 기정사실화 된 것이었다. 팀이 잘 나가고 Rolen이 건강하던 2005년까지는 별 무리없이 두 사람의 불편한 동거가 유지가 되었으나, 팀 전력이 약해지고 Rolen이 부상으로 기량이 쇠퇴해지자 양측은 자주 충돌하기 시작했다.

중부지구 1위 경쟁이 치열하던 2006년 9월 23일, La Russa는 Oswalt를 상대할 Astros전을 을 앞두고 9월 내내 현저하게 떨어진 페이스를 보이던 Rolen에게 휴식일을 제공했다. TLR은 경기 전 Rolen을 불러 그의 Oswalt 상대전적이 안좋다는 점과 어깨에 누적된 피로를 쉬게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들어 Rolen에게 Day-off를 주겠다는 그의 결정을 설명했다 (Oswalt는 이 시리즈에서 3차전에 등판했는데, 이미 1-2차전에서 Rolen은 7타수 무안타로 부진한 바 있었으며, 그게 아니더라도 9월달 내내 .225/.303/.393 으로 급격히 페이스가 떨어진 모습을 보였다). 막판 페넌트레이스 경기에서 제외당한 것이 불만스러웠던 4번타자 Rolen은 "Benched" 당했다며 곧장 언론에 불편한 심기를 전했고, 이 소식이 TLR의 귀에 들어가면서 양측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불편해진다.

이후 어찌어찌 디비전 타이틀을 차지한 Cardinals와 Padres와의 NLDS가 시작했고, Rolen은 첫 3경기에서 11타수 1안타로 부진한다. TLR은 Rolen에게 한 마디 언질 없이 4차전 라인업에서 Rolen을 빼고 3루수로 Scott Spiezio를 선발 출장시켰는데, 이에 Rolen은 크게 자존심 상해했다. 이후 언론에서 왜 Rolen에게 미리 말해주지 않았냐고 묻자 "어차피 말해줬든 안말해줬든 그에게 만족스러운 설명을 해줄 순 없었을 텐데 무슨 차이가 있으냐" 라며 한 치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NLCS 2차전에서도 TLR은 Rolen 대신 Spiezio를 기용했는데, 하필 Spiezio가 2안타 3타점으로 펄펄 날고 Rolen은 대타로 나왔다가 무안타에 그치면서 TLR의 밉상은 (Rolen의 눈에) 극에 달했다.

"The last time in Houston I sat him down for 10 minutes and explained it to him. My explanation was worthless, so what am I going to say? The last time I talked to him it was a worthless exercise. He didn't want to hear it. He didn't believe it. He didn't understand it. I 'benched' him, which is so opposite what that conversation was about."

-Tony La Russa, on his decision not to notify Rolen

2006 WS 1차전, Rolen은 Justin Verlander의 패스트볼을 당겨서 넘기며 WS 팀 첫 득점을 자신의 홈런으로 만들어낸다. 이후 Rolen은 월드시리즈 내내 .421의 맹타를 치며 Eckstein과 함께 우승을 이끌었고, 포스트시즌에서의 침묵에 대한 어느 정도의 자존심 회복도 했다. 그러나 TLR과의 관계는 회복하기에는 너무 급격히 곪아가고 있었다.

2007시즌, Rolen은 시즌 내내 어깨 부상으로 고생하면서 커리어 로우 시즌을 보냈다. 고질적으로 아팠던 목과 등 부상은 물론 약해진 어깨까지 공수에서 Rolen은 올스타 레벨의 기량을 보여줄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결장이 잦아졌고, TLR과의 충돌도 많아졌다. Rolen과의 계약은 3년이 남아있던 상황이었으나 TLR은 계약 마지막 해였다. Rolen은 Cardinals 프론트의 결정을 기다렸고, 구단 측에서 TLR과 예상대로 재계약을 맺자 도저히 안되겠다는 듯 곧장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당초 St. Louis에 뼈를 묻겠다는 심정으로 NTC가 포함된 8년 계약을 했던 선수가 감독과의 불화 때문에 NTC를 풀고 트레이드를 공개적으로 요청했으니 이례적인 경우이다.

12월 7일, TLR은 인터뷰에서 "대체 무엇때문에 Unhappy하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라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고, Rolen은 TLR의 언론 인터뷰 내용들에 대해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당시 Bernie Mikslaz는 STLPD의 다른 야구 기자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TLR과 함께 Rolen 사태에 대해서 얘기했었는데, 당시 TLR의 상태에 대해 "Tony feels burned.And when he feels burned, that person usually goes." 라고 표현했다. TLR은 이후 Rolen에게 자신이 다가오는 2008시즌에 Rolen으로 부터 기대하는 모습들에 대해 편지를 써보냈고, Rolen은 이후 이적에 대한 결심을 더욱 굳혔다. 이 편지의 내용은 아직까지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비록 2007시즌의 급격한 성적 하락이 있긴 했으나, Rolen은 아직 충분히 많은 바이어들을 유혹할만한 선수였다. 특히 Ryan Braun을 아예 좌익수로 전향시켜 3루가 시원찮은 (Bill Hall) Brewers에서도 그를 탐내했고, Dodgers에서도 그를 원했다. 2008년 1월 12일, Cards는 그나마 즉시전력 출혈이 가장 적은 조건을 제시한 Blue Jays로부터 Troy Glaus 를 받고 Rolen을 넘겨주는 맞트레이드를 단행했다.  Mid-West에서 태어나고 자란 Rolen은 훗날 인터뷰에서 캐나다 팀인 Blue Jays로 이적하는 결정이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고 했는데, 이는 충분히 이 트레이드를 거부할 수 있었던 Rolen이 얼마나 TLR로부터 탈출하고 싶어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Rolen의 Cardinals 커리어는 대략 5년 반만에 끝이 나고 만다.

다시 보기 힘든 클래스의 3루수, Scott Rolen

YearAgeGPAABRH2B3BHRRBISBCSBBSOBAOBPSLGOPSOPS+Awards
200227552292053757841444322034.278.354.561.915139
200328154657559981604912810413382104.286.382.528.910138AS,GG
20042914259350010915732434124437292.314.409.5981.007158AS,MVP-4,GG
200530562231962846121528122528.235.323.383.70684AS
200631142594521941544812295745669.296.369.518.887126AS,GG
20073211244139255104242858533756.265.331.398.72989
STL (6 yrs)66127372373421678173131114533317292383.286.370.510.879127

2008-2012: Decline

트레이드 이후 Rolen은 중심타선의 Run-Producer 역할에서 벗어나 "모범적인 베테랑" 역할이자 2선으로 물러나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인조잔디 구장을 홈으로 쓰는 Blue Jays 뛰게 되면서 등, 목, 어깨 등 잔부상이 다시 그의 스윙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부상에 시달리며 115경기 출장에 그친 그는. 2009 시즌을 앞두고 홈런과 장타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철저히 라인 드라이브 생산에 집중하기 시작했는데. 2009시즌 전반기를 .320의 타율로 마감했다. 이를 기특하게 본 Reds 단장 Jocketty는 트레이드 데드라인을 앞두고 클럽하우스에서 젊은 선수들을 다독여줄 베테랑 역할을 기대하며 Rolen을 영입했고, 이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2010년, 믿어주는 단장 Jocketty와 베테랑을 선호하는 Baker 감독 밑에서 Rolen은 마지막 불꽃을 불태웠다. Reds의 홈 개막전에서 친정팀 Cardinals를 상대한 그는 4회 옛 동료 Chris Carpenter로부터 홈런을 때려냈고, 5월 16일에는 또 Cardinals의 Brad Penny로부터 투런홈런을 쳤다. 6월 28일에는 또다른 친정팀 Phillies의 Kyle Kendrick으로부터 통산 300홈런째를 빼앗았다. 

전반기에만 무려 17홈런을 때리고 올스타전에도 나갔으며, 그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한 몇몇 기자들은 MVP 투표에서 그에게 표를 행사했다. 타자에게 유리한 GABP에서 장타율 .534를 기록하며 20홈런을 채웠고, 골드 글러브도 집에 한 개 더 가져갔으니, 한 물 간 것으로 평가받던 "제2의 Mike Schmidt" 에게 어울리는 화려한 컴백 시즌이었다. 비록 이 시즌 라이벌 팀의 4번타자로 활약하긴 했으나, 마지막 불꽃을 제대로 태운 그의 2010시즌은 많은 이들의 입에 미소를 띄웠다. 

왜 저를 빼셨습니까. 왜.

총평: Scott Rolen - Keeping your head down

고등학교에서 농구 인스터럭터였던 Scott의 아버지 Ed Rolen은 자식들에게 종종 "뭔가를 잘했을 때 다른 이들에게 이를 알리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은 다 안다." 라고 누차 가르쳤는데, 이는 Rolen의 행동과 모습에 고스란히 드러나있다. ("If you do something well, you don't have to tell anyone. They will know."). 그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결코 어려움이 없었으나, 부모님이 모두 교육자였던 Rolen 의 집안에서는 겸손함 최선의 미덕이었다. 특유의 우직한 Work Ethic이 몸에 배어있는 Rolen은 프로에 가서도 자신의 재능에 안주하지 않고 모든 플레이에 열과 성을 다했으며, 결코 우쭐해하는 법이 없었다. Braves 에서 코치를 지낸 바 있으며 Rolen의 마이너리그 시절 감독이었던 Roy Majtyka는 이런 Rolen의 Work Ethic을 Chipper Jones와 Dale Murphy에 비교한 바 있으며, 그뿐 아니라 Rolen과 같이 뛰었던 거의 모든 선수들 및 감독들 (심지어 그와 사이가 안좋았던 사람들도) 역시 타의모범이 되는 Rolen의 성실함과 진지함을 굉장히 높이 평가했다.

Rolen이 필드에서 보여주는 모습들을 복기해보자. Rolen은 타구를 처리할 때 타구를 "Surround" 즉 몸으로 둘러싸면서 처리한다는 야구의 기본기에 누구보다도 충실했던 3루수였다. 그는 다른 3루수들은 시도도 못할 플레이를 쉽게 해낸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고개를 숙였다. 홈런을 친 뒤에도 Rolen은 고개를 숙인 채 거의 전력질주 하는 듯한 속도로 다이아몬드를 도는 걸로 유명했으며, 홈을 밟은 후에도 큰 세레모니 없이 바로 덕 아웃으로 직행했다. TLR이 누누히 칭찬했던 Rolen의 주루 플레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누상에서 가장 공격적이고 지능적인 주자들 중 하나였으며, 어떤 상황에서든 Extra-base를 가는 것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멋진 슬라이딩으로 득점한 후에도 별다른 반응없이 훌훌 털어내며 다시 고개를 숙이고 덕아웃으로 들어갔다. 남들은 감히 시도하지고 못할 High-intensity 플레이들을 창조해낼 수 있는 재능이 있었으나, 그 플레이를 하는 과정에서 차오르는 아드레날린과 열정을 내적으로 삭혀버리니, 어찌보면 정말 Cardinal Way에 어울리는 선수였다. Dodgers의 한 신인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커리어 내내 두 차례나 감독과 불화가 있었다는 사실과 Phillies 시절 "Clubhouse에서 암적인 존재"로 꼽힌 바 있어서 Rolen을 마치 "클럽하우스 부적응자" 처럼 몰아가는 여론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 돌이켜보자. 정말 Rolen은 불화를 몰고 다니는 선수였을까?

위에서 언급한대로 Rolen과 Phillies 사이의 갈등에는 감독인 Larry Bowa와의 불화 외에도 Dallas Green, Phillies의 리빌딩 타이밍 등 여러가지 부수적인 요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Rolen이 Cardinals에서 트레이드 된 것은 사실 TLR과의 대립을 제외하면 딱히 이유가 없다. 비록 어느 정도 Rolen의 타격 Decline 및 부상으로 인한 쇠퇴에 대한 우려가 있긴 했으나, 여전히 Rolen은 지역 팬들 사이에서 굉장히 인기있던 선수였다. 계약의 규모와 세부 조항들에서 알 수 있다시피 Rolen은 트레이드 되는 순간부터 Cardinals에서 자신의 남은 커리어를 보낼 의지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Mid-West 특유의 사실상 "닥치고 일단 열심히" 하자는 "Believing in Hard Work" 철학을 신봉하던 Rolen의 Work Ethic과 Hustle은 Cardinal Way 에 정말 잘 어울렸던 선수였다. 많은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배팅 케이지에서의 연습 스윙 하나도 대충 하지 않았으며, 골드 글러브를 수 차례 수상한 뒤에도 땅볼 타구 처리 연습을 누구보다 많이 했다. 필드 안에서나 밖에서나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 그리고 누구에게도 꿀리지않던 재능은 그를 St. Louis에서 특히 빛날 수 있는 선수로 만들었다.  

그러나 Rolen의 최대 약점은 이 성실함, 그리고 그 이면의 고집이었다. Jasper High School 시절부터 Phillies 시절까지 어느 팀에서든 기둥 역할을 하던 Rolen은 Elite Athlete 특유의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으며, 경기에서 자신이 빠지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어했다. TLR은 훗날 Rolen이 2004년 월드시리즈에서의 부진을 어느 정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으며, 포스트시즌에서 유난히 명예회복을 하고싶어 했는데, 그런 부분들이 그에게 부담으로 작용했다고 밝혔다. TLR은 Rolen이 부상으로 쇠퇴하기 이전까지는 "Rolen이 부상을 입고 뛸 때도 리그의 대부분의 다른 3루수들보다 낫다" 고 말했고, 이런 방식의 기용은 Rolen와 잘 맞았었다. 그러나 부상 이후에 TLR은 Rolen의 타석숫자를 조절하기 시작했고, 점차 마찰은 커져만갔다.

Rolen은 또한 본인에게 미디어의 관심이 쏟아지는 것을 굉장히 부담스러워 했는데, Boston에 결코 뒤지지않은 Philadelphia의 극성스런 스포츠 언론들과 팬들은 그런 의미에서 Rolen의 성격과 아주 상극이었다. 그가 St. Louis로 이적한 후 첫 면담에서 TLR은 Rolen에게 "여기는 Phillies와 다르다. 우리 라인업은 이미 강력하며, 그냥 자네는 하던대로만 쳐주면 된다. 제 스윙만 해준다면 홈런 하나도 못쳐도 상관없다." 면서 "결과"에 대한 부담감으로부터 Rolen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Phillies 시절 커리어 초반부터 팀 타선을 홀로 이끌어야했던 Rolen으로써는 반가운 변화였고, 이때만 해도 양측의 관계는 원만함을 넘어서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필자는 TLR의 매니징 스타일의 오랜 팬이지만 Scott Rolen과의 불화는 TLR의 꼰대 근성이 가장 제대로 투영된 에피소드가 아닌가 싶다. Rolen이 비록 라인업에서 빠진 것에 대해 언론에다가 불만을 표시한 것도 그다지 칭찬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권한에 불만을 가졌다는 것에 일종의 괘씸함을 느껴서 포스트시즌 라인업에서 사전에 논의 없이 혹은 일언반구의 경고도 없이 Rolen 정도의 베테랑을 제외한 것은 "포용력 부족"이다. 자신의 결정과 판단이 Question 받는 것을 극도로 못 견디는 TLR이었기에 어찌 보면 아무 일도 아닐 수 있는 사건이 (베테랑 선수가 부상/부진 때문에 라인업에서 빠져서 불만을 갖는 것이 어디 그리 드문 경우인가) 일종의 Powertrip으로 이어져버린 것이다. 훗날 Colby Rasmus의 아버지 Tony Rasmus는 Rolen을 들먹이며 TLR을 비난했는데, TLR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There was a question about if you don't get along with the manager you don't last in St. Louis. That's the most senseless thing I've ever heard. I have never in my memory seen a front office or ownership pick a manager over a productive pitcher or player. That's ridiculous."

-Tony La Russa, after Rasmus trade

오히려 Rolen 특유의 조용히 "내 할일만 하자" 성격은 그의 커리어 막판에 빛을 발했다. 트레이드 이후 Blue Jays 에서나 Reds에서나, Rolen은 팀에서 모범적인 베테랑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며 젊은 선수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그는 클럽하우스에서 시끄럽지 않았으며, 라커룸 앞에서 주로 Steinbeck의 소설을 자주 읽었고, 땅볼을 치고도 1루로 열심히 뛰었으며, Joey Votto, Todd Frazier 를 포함한 많은 젊은 선수들은 20대선수들에게 뒤지지않은 연습량을 철저하게 소화하는 Rolen에 대한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What drives me in life is to be a good person. You help each other, you help yourself, you try to be the best person you can be. That's drive enough for me. I just want to be happy. I think that's what life's about. Happiness is what drives me, not fame or fortune. With all TV interviews and some of the fame and some of the celebrity status, I guess, that goes with this game, sometimes. ... The way I look at it, if I wanted to be on TV, I'd have been an actor. But I don't want to be on TV. I want to play baseball."

-Scott Rolen-

비록 예기치못한 불협화음 때문에 모두의 바램대로 St. Louis 유니폼을 입고 은퇴하지는 않았으나, 그가 가슴에 Birds on the Bat을 달고 뛰는 동안 우리에게 좋은 기억을 많이 심어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6'4인치의 풋볼 Linebacker 같은 건장한 사이즈와 긴 팔, Soft Hand, 유연함으로 3루 수비의 교과서를 보여주었으며, 계약 기간 중 3년 반동안은 리그에서 가장 생산적인 타자 중 하나였다. 비록 2004 월드시리즈에서의 부진과 전반적인 포스트시즌에서의 약세, 그리고 몇 차례의 부상 때문에 명성에 흠집이 간 건 사실이나, Cardinals 유니폼을 입고 5년 반의 기간동안 OPS .879에 홈런 111개를 쳤고, 3개의 골드 글러브와 4번의 올스타를 포함해 WAR 27.4 를 적립했으며, 성실한 선수 생활을 지속하면서 반지도 하나 가져왔다. 누가 감히 Rolen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Rolen 트레이드 이후 Cardinals의 3루 자리에는 다음과 같은 선수들이 왔다가 또 갔다.


2008 - Troy Glaus (4.9 WAR, wRC+ 123)

2009 - Mark DeRosa / Brian Barden (0.6 WAR, wRC+ 76)

2010 - Felipe Lopez / David Freese (1.3 WAR, wRC+ 96)

2011 - David Freese / Daniel Descalso (2.8 WAR, wRC+ 106)

2012 - David Freese (4.0 WAR, wRC+ 133)

2013 - David Freese (0.3 WAR, wRC+ 106)


Did you know...

  • 2013시즌이 끝나고 Rolen은 현재 공식 은퇴선언을 하지는 않았으나 사실상 은퇴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2013시즌을 앞두고 Rolen은 Red Sox, Yankees 등과 접촉이 있었으나, Rolen은 Reds 복귀를 원했다. 그러나 "베테랑 리더십" 을 위해 5M을 쓰기 싫었던 Reds는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고, 결국 Jocketty가 Rolen이 스프링 트레이닝에 오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후 Rolen은 "Right now I’m simply not ready to make a commitment. I would like to leave my options open, without closing any doors..." 라는 모호한 발언을 했으나, 이후 그의 행보를 보았을 때 사실상 은퇴 쪽으로 마음이 많이 기운 듯 싶다.

  • Rolen은 고향 Indiana와 Florida에 집을 두고 왔다갔다 하면서 살고 있으며, IU Hoosiers의 열렬한 팬인 부모님을 위해 자기 모교도 아닌 Indiana University 야구 프로그램과 새 구장 건설을 위해 크게 한 턱 쐈다고 한다 (Major donation). 이러다가 인디애나에서 지역구 국회의원이라도 나갈 기세.

  • Rolen의 고향 집 앞에는 Indiana Baseball Hall of Fame 이 위치해있으며, 당연히 Indiana가 낳은 최고 야구스타 중 하나이자 1993년 Indiana Mr. Baseball 출신 Rolen도 헌액되어있다. 아직도 이 동네 고등학교 야구팀 코치는 Rolen을 가르쳤던 Terry Gopert이다.

  • 2011년 7월 4일, Rolen은 친구 Chris Carpenter로부터 통산 2000안타째를 뽑아냈다.

  • 2009년 8월 10일, Reds 유니폼을 입고 Busch에 들린 Rolen은 TLR 방에 먼저 찾아 들어가 인사를 건네고, 대화를 나눴다. TLR은 당시 DL에 올라있던 Rolen에 부상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며 "빨리 회복하길 바란다"며 덕담을 건넸는데,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이 "TLR이 또 괜히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다" 는 식의 조소를 보낸 바 있다. 글쎄, 필자는 TLR이 정말 Rolen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기에 이들의 만남을 그렇게 꼬아서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 시대를 풍미한 3루수 Scott Rolen은 그렇다면 HOF에 들어갈 수 있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 다룬 많은 좋은 글들이 Fangraph나 Hardball Times에 게시되어 있는데, 수박 겉핥기 식으로 종합해보면 Rolen은 (1) 이른 은퇴, 부상 전적으로 인해 누적 스탯 (316홈런, 1211타점, 2077안타)에서는 부족하지만 (2) 통산 비율 스탯 (.281/.364/.490) 에서는 합격점을 받고 있는 이른바 "Edgar Martinez" 스타일로, 약간 부족한 명예의 전당 프로필을 압도적인 수비와 집에 남아도는 골드글러브들로 메꿔야 하는 상황이다. Rolen의 라이벌로는 Adrian Beltre가 꼽히고 있는데, 그는 비율 스탯은 딸리지만 Rolen보다 건강하고 오래 커리어를 유지한 덕에 더 나은 누적 스탯과 WAR를 찍고 은퇴할 것으로 보인다. Rolen이 명예의 전당에 가느냐 마느냐에 대한 이슈는 나중에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겠지만, 그보다는 올라간다면 과연 어떤 유니폼을 입고 올라갈 지가 더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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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ovy

이번 주 주인공은 Gritty Player 계열의 수장(?) 격인 X-Man, David Eckstein이다. 아무 툴도 없는 단신 유격수로 World Series MVP까지 따낸 그 앞에서는 Grit이라면 어디가서 꿀리지 않는 Schumaker 역시 머리를 조아린다. Scrappy한 그의 플레이스타일과 팀을 위한 헌신을 마다하지 않는 그의 노력, 허슬, 그리고 인간미 넘치는 그의 성격은 Eckstein의 좁은 수비 레인지와 낮은 장타율을 비난하는데 정신없는 세이버리스트들의 입가에도 웃음을 띄우게 했다. Cardinals에서 3년을 뛰었는데도 마치 13년을 뛴 선수처럼 팬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긴 선수. TLR 시대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 "Grit," 그리고 그 Gritty Player의 대명사격이었던  David "Pesky" Eckstein의 커리어를 돌아보자.

 

X-Man


David Eckstein

Shortstop

DOB: 1975년 1월 20일 

Birth: Sanford, Florida 

Time with Cardinals:  2005-2007


Draft and Minors

1994년, University of Florida (이하 Gators) 야구팀 트라이아웃에 5'7인 짜리 꼬맹이가 참가했다. 운동 장학금을 받지 않고 공부로 학교에 입학한 David Eckstein이었다. 부모님이 모두 교사셨던 그는 학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가풍 속에서 컸고, 고등학교 시절 야구로 State All-star에 뽑히기도 했지만 대학은 성적으로 들어갔다. 꼬맹이는 Walk-on으로 (Walk-on이란 딱히 정해진 포지션 없이 팀에 들어가는 것으로, 일종의 '깍두기/꼽사리'로 봐도 될 듯 싶다) 팀에 합류했고, Walk-on들은 팀 훈련에 참가하기 전까지 3주를 기다려야했다. David은 마냥 기다리는 대신 매일매일 혼자 배팅케이지로 가서 공을 때렸고, 이를 기특히 여긴 한 Assistant 코치가 Eckstein에게 2주차때부터는 그냥 팀 훈련에 나오라고 말했다.

당시 UF Gators 야구팀 코치였던 Joe Arnold는 Eckstein의 뛰어난 배트 컨트롤과 성실함을 믿고 그를 유격수로 키우기 시작했고, 2학년 때 Eckstein은 SEC All-Conference Team에 선정되며 이에 부응했다. 포지션도 없이 팀에 들어왔던 Eckstein은 1996시즌에는 All-American Team에 선정되었고, Gators가 College World Series에서 3위에 오르게 하는 큰 성과를 냈으며, 대학 야구를 하는 3년 내내 우수한 성적을 유지한 운동선수들을 뽑은 SEC Academic Honor-Roll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All-American 팀과 Honor Roll을 2년 연속 동시에 해낸 것은 David Eckstein이 학교 역사상 처음으로 해낸 일이다. 받지 않았던 장학금 (Athletic Scholarship)도 그가 SEC Conference 팀에 선정된 2학년 때부터는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장학금을 받지 않고 들어온 학생이 재학 도중 장학금을 받는 경우는 굉장히 드문 경우이다.


University of Florida 졸업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Eckstein은 1997년 드래프트에서 19라운드 전체 581번으로 Red Sox에 지명되었다. 굉장한 Undersized 유격수에 소녀 어깨, 툴이라고는 그럭저럭 평균 이상인 스피드....그게 끝이었다. "인상적인 배트 컨트롤과 컨택 능력이 있으나 결국은 Size 때문에 안될 것" 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고, "Grit과 투지는 인상적이지만 야구 재능 자체는 상위 마이너리그 레벨에서는 결국 먹히지 않을 것" 으로 생각했다. Red Sox의 한 스카우트는 David의 아버지인 Whitey Eckstein에게 "아드님은 훌륭한 코치가 될 겁니다 (Your son will make a great coach some day)" 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학창시절부터 내내 여태껏 이런 기대 속에 살아온 Eckstein에게는 상황이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는 특유의 근성, 성실함, 기민함으로 이러한 기대들을 이겨내고 매 시즌 선수로써 큰 발전을 이룩했다.  프로 첫 해였던 97년에는 들어오자마자 3할을 치면서 모두를 놀래켰고, 이듬해는 하이 싱글A에서 87:51이라는 굉장히 훌륭한 BB/K 비율과 45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1999년 AA볼에 올라가서는 오히려 더 나은 슬래시 라인을 기록했고,  1라운더 출신이자 Red Sox가 아끼던 유격수 유망주 Adam Everett (얘도 기대가 참 큰 유망주였다) 과 완벽한 키스톤을 이뤄 소속팀 Trenton Thunder의 92승 시즌에 앞장섰다. 마이너리그에서 Eckstein은 4년간 철저히 2루수로 육성되었으며, 2루수로 438경기를 뛰는 동안 단 29개의 에러만을 기록했다. 

Eckstein's Minor League Track Record

Year Age Tm Lev G PA AB R H 2B 3B HR RBI SB CS BB SO BA OBP SLG OPS GDP HBP SH SF
1997 22 Lowell A- 68 303 249 43 75 11 4 4 39 21 5 33 29 .301 .407 .426 .832 2 12 8 1
1998 23 Sarasota A+ 135 615 503 99 154 29 4 3 58 45 16 87 51 .306 .428 .398 .826 8 22 1 2
1999 24 Trenton AA 131 615 483 109 151 22 5 6 52 32 13 89 48 .313 .440 .416 .856 6 25 13 5
2000 25 Pawtucket AAA 119 515 422 77 104 20 0 1 31 11 8 60 45 .246 .364 .301 .665 8 20 9 4
Provided by Baseball-Reference.com: View Original Table
Generated 2/28/2013.

2000년, AAA볼 Pawtucket까지 올라온 Eckstein은 AAA 투수들의 강한 구위에 말리면서 초반 슬럼프에 빠졌다. Pawtucket의 코치들은 이런 Eckstein이 타격 메카니즘을 바꾸길 조언했고, Eckstein을 이를 시도하다가 오히려 더 성적이 떨어지고 말았다. Eckstein은 이에 다시 자기가 원래 하던 방식으로 바꿔 시즌 마지막 두 달간 자신의 타율을 0.085나 올렸으나, 이미 Red Sox는 Eckstein이 AAA 이상 레벨에서는 먹히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린 후였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Eckstein을 웨이버에 올린 뒤 7월 말, 5'10인치의 Lou Merloni를 영입해 사실상 Eckstein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8월 16일, Angels는 Waiver-wire에 올라와 있는 Eckstein을 데려왔고, Eckstein은 Angels로 오자마자 AAA 15경기에서 0.346에 홈런 3개를 쳤다.

 

Eckstein은 늘 1루로 전력 질주했다. 그리고 때때로 평범한 3루 땅볼로 1루에서 살았다.


2001-2004: Angels 시절

2001년, Eckstein은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맹타를 쳤고, 기적적으로 25인 로스터 자리를 확보했다. 그리고 주전 2루수 Adam Kennedy가 시즌을 DL에서 맞음에 따라 Eckstein은 선발 2루수에 9번타자로 개막전에 드는 영광을 누렸다. Adam Kennedy가 복귀하는 시점부터 Eckstein은 벤치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팀의 첫 9경기에서 Eckstein은 무려 406/.457/.469를 쳤고, 팀의 첫 홈 3연전인 Rangers 와의 개막 시리즈에서는 10타수 5안타에 무려 7득점을 올렸다. HBP든 BB든 그는 타석에 서면 어떻게든 1루로 나가려고 안간힘을 썼고, 2루 수비도 봐줄만했다. 4월 13일, Adam Kennedy가 부상에서 복귀했고, 기존 유격수였던 Benji Gil과 호흡을 맞춰 2루수로 선발 출장했다. 이 때 Alfredo Griffin 1루 베이스코치는 Mike Soscia에게 Eckstein을 유격수로 돌려서 라인업에 계속 넣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으며, Eckstein 역시 Scoscia에게 가서 대학시절 자신이 유격수였으며 당장이라도 유격수로 뛸 수 있다고 얘기했다 (Griffin 본인도 유격수 출신이다).

이에 Scioscia는 Eckstein을 마이너리그로 보내 유격수 수업을 받게 하자고 했고, Griffin은 자신이 메이저리그에서 뛰면서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Scioscia에게서 허락을 받은 그 날부터 Eckstein은 유격수로 선발 출장했고, 경기 전과 후에 특수 훈련을 실시하면서 2루수 Adam Kennedy와 호흡을 맞췄다. 역시 가장 문제가 있던 부분은 Eckstein의 소녀 어깨를 보완하기 위한 부분이었는데, 조금 더 강한 송구를 위해 타구 처리시 한 발 더 앞으로 디디며 Momentum을 증량시켜 공을 뿌리는 법을 익혔다.

기존 유격수 Benji Gil 이 결코 인상적인 공격력을 가진 선수가 아니었던 점, Eckstein이 개막 하자마자 Hot Streak에 오른 점, Hit-and-run을 선호하는 Scioscia 감독이 Eckstein 같은 훌륭한 Bunter를 라인업에 넣고 싶은 욕심이 있었던 부분까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Eckstein이 7월 월간 타율 0.239로 슬럼프에 빠지자 Angels 코치진은 투수들이 Eckstein의 짜증나는 타격 스타일을 상대하는 법을 알아챘다고 생각해 주전에서 빼려고 했으나, Eckstein은 바로 다음달인 8월에 .360을 치면서 완벽하게 자신의 위치를 방어했다.

If you want flashy, don't watch Eckstein play shortstop. If you want classic, don't watch Eckstein play shortstop. His range is limited--although improving--and his throws to first base are almost painful to watch. But he gets the job done, displaying an uncanny knack for smart positioning. 

-Scouting Report 2002, on David Eckstein's defense

 

2002년 Angels 우승에 Eckstein은 혁혁한 공을 세웠다.


2001-2002년 2년 연속 Eckstein은 AL 희생번트. HBP, 최저 헛스윙률 각종 변태적인 공격 카테고리에서 AL 1위에 올랐다. 리드오프로 나서서 107득점을 기록한 Eckstein은 2002시즌 Angels 우승의 주역이었으며, 그가 득점한 경기에서 Angels의 성적은 58승 17패였다 (승률.773). Eckstein이 출루에 실패하는 경기에서 팀은 9승 19패였는데, 그가 출루에 실패한 경기가 28경기 뿐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2년 4월 27일, Eckstein은 Blue Jays전에서 커리어 첫 만루홈런을 치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28일, 연장 14회에 Pedro Bourbon을 상대로 Walk-off Grand Slam을 치면서 팀의 시리즈 스윕을 주도했다. 이전까지 7승 14패의 최악의 스타트를 끊었던 Angels는 이 시리즈를 기점으로 이후 23경기에서 20승을 챙겼다. 그리고 Eckstein은 6월 9일 Reds와의 인터리그 경기에서 Joey Hamilton (이 이름을 또 마주치다니!) 을 상대로 시즌 3번째 만루홈런을 때렸고, 결국 만루홈런 리그 1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2004년 12월 19일, FA 최대 유격수이자 지난 6년간 NL 최고 유격수로 군림하던 Renteria가 Cardinals와 재계약 하는 대신 Red Sox를 선택했다. 그래도 재계약을 할 수 있을거라는 희망에 끝까지 협상 테이블에 앉아있던 Cardinals는 Renteria가 물건너가자 바로 Eckstein에 집중했고, 12월 21일에 FA 자격을 받은 David Eckstein을 12월 23일에 3년간 10.25M이라는 저렴한 조건으로 계약했다. 이 사이 Red Sox 유격수였던 Orlando Cabrera가 Angels와 계약하면서 3팀이 유격수를 서로 바꾸는 그 유명한 Shortstop Merry-go-around가 완성되었다. 

David was the player we focused on right away after Cabrera signed. Given the current free-agent market at shortstop, it pushed salaries higher, but we still felt this was a value signing for us.

-John Mozeliak, on signing David Eckstein 

2005년: Fan Favorite from the first day

Eckstein은 "The Cardinal Way"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선수였다. 볼넷을 골라도 1루로 뛰어갔고, 공수 교대시 덕아웃으로 들어올 때도 늘 빠르게 뛰어들어오며 "Hustle in, Hustle out"을 외쳤다. 잔부상 정도는 가볍게 무시하고 뛰었으며, HBP를 맞고 1루에 걸어나가서는 씩 웃었다. 안그래도 Grit에 일종의 페티쉬가 있던 TLR은 Eckstein의 이런 Grit을 예뻐했으며, Eckstein을 "Toughest guy I've seen" 이라 불렀다.

당당한 체구와 부드러운 몸놀림을 자랑했던 Renteria의 수비와 그의 파워풀한 라인드라이브 히팅에 익숙해져 있던 Cardinals 팬들이 새로운 꼬마 유격수의 보기 안타까운 투포환 송구와 삼진을 안당하려고 파울을 만들어내는데 안간힘을 쓰는 Eckstein식 타격에 익숙해지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의 저지 판매량은 순식간에 Pujols와 Edmonds가 수성하던 상위권으로 올라갔으며, 사소한 플레이 하나 하나에도 최선을 다하고 절대 싸인 요청을 거절하지 않는 Eckstein의 "Giving 110%"식 태도는 팀메이트들과 코치진, 누구에게나 인기가 있었다. 

Eckstein의 키는 많은 자료에 5'7 또는 5'8 (170cm) 로 명시되어 있으나, 실제 키는 이보다도 조금 더 작은 167cm라고 한다.


Eckstein은 이 시즌 커리어 최다인 158경기에 출장했으며, 올스타전에 선발 유격수 겸 9번타자로 출장하는 영광도 누렸다. 또한 후반기에는 .304의 타율을 기록하며 팀의 지구 우승에 일조했다. 2005년 8월 7일 Braves전, 3:1로 뒤지던 9회말 1사 만루에서 상대 마무리 Chris Reitsma를 상대로 Eckstein이 역전 끝내기 만루홈런을 쳤을 때 팬들의 그를 향한 사랑은 절정에 이르렀다. NLDS 3차전에서는 무려 PETCO에서 투런 홈런을 치는 광분을 했으며 (상대 투수 Woody 옹), 이 시리즈에서 13타수 5안타로 맹활약했다 (물론 이 세 경기에서 Reggie Sanders가 10타점을 치는 진정한 광분을 했기에 활약이 묻혔다) 

개인적으로 이 시즌 Eckstein의 모습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2005년 NLCS 5차전이다. 4:2로 지고 있던 9회초 Astros의 마무리 Brad Lidge가 마운드에 올라왔고, 순식간에 2아웃이 잡힌 뒤 Eckstein이 타석에 섰다. 어떻게든 출루를 해줬으면 하는 상황이었지만 사실 기대할 것이라곤 단타밖에 없는 Eckstein이었고, Lidge의 슬라이더는 악명높았기에 필자는 사실상 포기를 한 채 경기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Eckstein은 볼넷을 고르는 대신 3-유간으로 깔끔한 안타를 치고 나가는 것이 아닌가! (사실 이 타구는 당시 기억으로 내야수가 처리할 수 있음직한 타구였다) 

 이후 Jim Edmonds가 볼넷을 골랐고, Pujols가 타석에 들어왔다. 결과는 그 유명한 "침묵의 쓰리런"이다. Astros 팬들과 선수들이 미리 축포를 터뜨리던 것에 화가 난 Pujols는 역전 쓰리런으로 Lidge 커리어에 씻을 수 없는 흉터를 남겼고, Cardinals는 NLCS를 St. Louis로 몰고 갔다. 물론 이 시리즈는 Oswalt와 Clemens를 동시에 출격시킨 Astros가 승리했으나, 그 덕분에 월드시리즈에서 투수진 운용에 어려움을 겪은 Astros는 White Sox에게 싱겁게 패배했다. NLCS 5차전의 후폭풍이 Biggio와 Bagwell의 우승반지를 앗아간 셈이다. 

(여담이지만 이후 MVP 베이스볼이었나? 2K 시리즈였나 잘 기억은 안나는데, 일종의 '업적' 시스템처럼 어떤 특정한 이벤트 조건을 만족시키면 선수 카드를 주는 게 있었다 (가령 Crawford로 1경기 3루타 2개를 치면 Carl Crawford 카드를 준다든가...) Lidge 카드를 받는 조건은 Pujols를 삼진처리하는 것이었다)

"He's a good athlete. He studies how to hit. He has two World Series rings and a World Series MVP. He was the leadoff hitter and shortstop. Those are two very important parts of a winning team. I wonder if anyone else has ever done that for two (franchises, including the Angels) that won the World Series."

-  Adam Kennedy, on David Eckstein

Bonds는 Eckstein의 어머니를 만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You've got a great son."

 

2006년: WS MVP

많은 이들이 Eckstein을 Angel보다는 Cardinal로 기억하게 만든 바로 그 시즌이다 (필자도 자료를 찾다가 가장 놀랜 부분이 Eckstein이 Angels에서 4년을 뛰고 Cardinals에서는 3년밖에 안뛰었다는 점이다. 더 오래 뛴것 같았는데...)

늘 Wrist와 Hamstring 등에 잔부상을 참고 뛰던 Eckstein은 8월 중순에 Oblique Strain으로 무려 3년만에 DL에 올랐고, 약 한 달 정도를 결장한 후 9월 15일이 되서야 돌아왔다. 123경기 .292/.350/.344를 쳤으나 MVP 투표에 이름을 올렸던 2005년에 비하면 확실히 퇴보된 성적이었다. 포스트시즌에서도 그는 NLDS와 NLCS를 합쳐서 11경기에서 49타수 8안타에 그치며 부진했으며, WS 첫 2경기에서도 무안타에 그쳤다. 그러나 3차전 Carpenter의 역투가 있던 날, Eckstein은 4타수 2안타를 치며 타격감을 끌어올렸고, 4차전에서 5타수 4안타 2루타 3개를 폭발시키며 5:4 역전승을 이끌었다. 

Eckstein의 월드시리즈 안타들은 정말 그만의 스타일이 그대로 묻어나는 타구들이었다. 4차전 첫 타석, Eckstein은 3루에 Brandon Inge 쪽으로 바운드가 큰 타구를 쳐놓고 냅다 뛰며 내야 안타를 만들어냈다. 7회말 선두타자로 나서 2루타를 치고 나갔다가 (이 타구는 Granderson이 엎어지지 않았으면 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Eckstein이 워낙 장타력이 없었기에 중견수가 내야 쪽으로 들어와 있었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득점에 성공하며 3:3 동점을 만들고, 8회말에는 2사 2루에서 Zumaya를 상대로 다시 좌익수 키를 절묘하게 넘어가는 (이 타구도 Monroe가 정상적인 위치였다면 평범한 좌익수 뜬공이었을 뻔 했다) 2루타를 쳐서 역전을 만들어내며 영웅이 되었다. 5차전에서는 2회 2사 3루에서 3루쪽 파울라인으로 땅볼을 굴려놓고 냅다 달려서 상대 실책을 유도해 선취점을 냈고, 동점이던 4회말 1사 2,3루에서는 유격수 쪽으로 적당한 빠르기의 땅볼을 굴려서 결승점을 냈다. 

아주 소박하고, 기본기에 충실한 플레이들. 약간의 운이 없었다면 도저히 힘들었을 그런 타구들로 Eckstein은 역대 월드시리즈 유격수 최초로 한 경기 4안타를 친 선수가 되었다. WS MVP 트로피를 받아든 Eckstein은 부상으로 딸려온 노란색 스포츠카 (Corvette)을 보며 "저 차가 나의 첫 차" 라고 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Eckstein은 당시 Oblique Strain 뿐 아니라 Shoulder, Hamstring, Concussion, Wrist 등 안 아픈 곳이 없던 상황이었으며, 팀 Work-out도 제대로 소화하기 힘들 수준이라 진통제를 맞아가며 경기에 임했다고 한다.

"To me, he's our shortstop. And believe me, he's more than just guts, he's a very good player. He's the toughest guy I've seen in uniform."

-Tony La Russa, on David Eckstein

나도 홈런 치고 싶어 웨인아

 

2007년

Eckstein은 잔부상으로 고생하며 커리어 최저힌 117경기 출장에 그쳤고, 6월 중순부터 7월 중순까지 한 달간 Lower Back Strain으로 DL에 올랐던 것 외에도 DTD에 자주 왔다갔다 했다. 물론 플레이할 때는 .309/.356/.382의 평소와 다름없는 수준의 생산성을 보였고, Pesky함도 그대로였으나, 충분한 경기에 출장하지 못한 것과 올라간 그의 몸값 (2007년 연봉 4.5M) 때문에 Eckstein의 연장계약은 아쉽게도 무산되었다.

St. Louis에서의 3년간 Eckstein은 3.0 --> 1.8 --> 1.0의 감소하는 WAR를 보였고, 반대로 그의 몸값은 2.3M --> 3.3M --> 4.6M으로 매해 조금씩 인상되었다. 가격 대비 성능으로 봤을 때 2005년 Eckstein은 훌륭했고, 2006년에는 그저 그랬으며 (WS 부스트를 감안하고), 2007년에는 평균 이하였다고 봐도 좋을 듯 하다. 시즌 후 Eckstein은 유격수를 찾던 Blue Jays와 1년 계약을 맺고 토론토로 건너 갔으며, 2009년에는 Padres와 2년 계약을 맺고 2루수로 전향 (진작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2년간 252경기에 출장한 뒤 2010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공식 경기에는 뛰지 않았다.

짧지만 강렬했던 Eckstein과의 3년 (2005-2007)


총평: Eckstein에 대한 두 가지 시선

David Eckstein을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를 "늘 110%의 노력을 기울이던 작은 거인"으로 바라보는, 연민과 애정이 섞인 드라마틱한 시선이었다. 평균 신장 188cm의 건장한 빅 리거들 사이에서 단신의 몸으로 데뷔했던 Eckstein의 성공 스토리는 스포츠 저널리스트들이 정말 좋아하는 소재였다. 단 한번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적이 없이 그저 야구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모든 확률을 뒤엎고(Against all odds)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WS MVP까지 따낸 그의 커리어 스토리, 그리고 그 유명한 Grit과 투지는 스포츠에서 '감동'을 갈구하는 팬들에게 묘한 가슴뭉클함을 안겨주었다. 

두번째는 이 전자에게 조소를 날리는 듯한 "그래봤자 단타 이상은 생산해낼 수 없던, 좁은 Range와 약한 어깨를 가졌으나 몹쓸 투지 때문에 과대평가된 웃기는 유격수" 였다. 이들은 wRC+, UZR, SLG 등 Eckstein의 후진 세이버 스탯 카테고리들을 들며 Eckstein이 얼마나 과대평가되었는지 까대기 시작했다. 거품을 걷어내려는 노력은 Eckstein이라는 선수의 가치에 대한 비하로 쉽게 전이되었고, Eckstein이 남긴 업적들 역시 "사람들이 제대로 스탯 분석을 할 줄 몰라서 그렇지, 알만한 사람들은 Eckstein이 얼마나 허접한지 다 알아" 식으로 매도되었다. Fire Joe Morgan 같은 사이트들은 (FJM: 미 스포츠 저널리즘의 폐해를 풍자 및 고발하던 사이트로, ESPN 해설가 Joe Morgan의 어록을 까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은 Eckstein을 비아냥거리는 데 앞장섰으며 (정확히 말하면 Eckstein에 대한 스포츠 저널리스트들 및 미디어에 대한 비아냥거림이었으나), 몇몇 세이버리스트들은 Eckstein이 대체 언제부터 가슴으로 (Heart) 야구하는 것을 그만두고 남들처럼 팔과 다리를 써서 야구를 할 것인지를 물었다.

I might not be the best president, but I will always hold up the integrity of this office. That's why I like your son so much. He plays the game with such integrity".                           

                                                   -George W. Bush, to David Eckstein's mother, in November 2002

참 젊던 TLR. 그리고 동안계의 거장 Eckstein.

Eckstein에 대한 조금 더 중립적이고 공정한 평가는 이 두 시선을 모두 받아들여야 가능하다. 

Eckstein이 비록 기민한 풋워크와 탁월한 위치선정으로 신체적 약점을 보완하려고 노력했으나, Eckstein의 수비는 가장 나았을 때도 평균 수준이었다. 작은 몸 때문에 다이빙을 해도 그가 커버할 수 있는 범위는 좁았으며, 확실히 약한 어깨 때문에 1루 송구는 늘 버거워보였다. Angels 시절 그는 3년간 매년 최소 +3.3의 UZR을 기록했으나, Cardinals에서 그는 -8.3 --> +1.5 --> -9.8의 조금은 안타까운 UZR을 기록했다. 좁은 레인지와 약한 어깨를 보완하기 위해 그는 평범한 타구에 대한 에러를 줄이고 더블 플레이를 부드럽게 연결시키는 데에 집중했으며 (연습으로 극복이 가능한 부분이 아닌가) 결과적으로 2003,2004, 2006년 3시즌에 수비율 상위 3위에 들었고, 2005년에는 리그 내에서 가장 많은 더블플레이를 성공시킨 유격수였다. (물론 수비율이라는 스탯은 정말 허접한 스탯이지만, 적어도 Eckstein이 노력으로 많은 것을 극복했다는 부분은 알 수 있다). 2004년까지 그는 리그 평균 수준의 유격수 수비를 보였다고 해도 괜찮으며, Cardinals로 이적 후 그의 수비는 한계를 조금 더 명확히 노출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체구를 생각했을 적에 이 정도 수비를 해낸 것도 사실은 기특하지만, 프로에서 "가진 것에 비하면" 이라는 상대적인 명제는 의미가 없다.  

Eckstein이 타석에 들어설 때 장타를 기대하는 팬은 없었으며, Eckstein 본인도 늘 입버릇처럼 "나는 1루 베이스에 나가는 것이 사명" 이라고 말했다. TLR과 Mike Scioscia, 그와 함께했던 두 감독은 Eckstein을"상대 투수를 괴롭혀서 많은 공을 던지게 하고, 뛰어난 배트 컨트롤로 파울볼을 만들어내는 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Classic Leadoff" 로 정의했으며, 특히 La Russa는 Eckstein을 "Pesky" (성가시고 귀찮다는 뜻, Annoying과 흡사) 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그도 그럴 것이, Eckstein의 남다른 근성과 Grit은 타격 어프로치에서부터 이미 눈에 띄었고, 공에 배트를 맞추고 삼진을 피하는 데에는(Putting Balls in play) 훌륭한 재능이 있었다. 작은 체구 덕에 좁은 스트라이크 존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도 이득이 되었으나, 공에 맞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Eckstein의 자세는 투수들의 신경을 많이 거슬렀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지배하던 자, David Eckstein

2001년: 희생번트 1위 (16개) ,HBP 1위 (23개), 최저 헛스윙률 1위 (8.1%), 0-2 카운트 타율 1위 (.351)

2003년: 희생번트 1위 (14개) ,HBP 1위 (27개), 최저 헛스윙률 1위 (7.7%), Pct of Putting Balls in play 3위 (53.9%) 

2003년: 희생번트 4위 (10개), 최저 헛스윙률 2위 (7.7%), 

2004년: 희생번트 4위 (14개), 최저 헛스윙률 1위 (7.5%), 초구 스윙률 리그 최저 (11.2%), Pct of Putting Balls in play 4위                             (52.9%), AB per SO 1위 (11.6)

2005년: AB per SO 2위 (14.3), 득점권 타율 리그 2위 (.351)

2000년대 (2000-2009) 최소 800경기 이상 출장한 선수들 중 K% 4위 (7.3%, 1위 Juan Pierre)


Eckstein의 10년 커리어를 통틀어 통산 장타율은 .355에 불과하며, 7개의 3루타와 8개의 홈런을 터뜨린 2005년 .395가 커리어 최고 수치이다. wRC+, OPS와 같은 통상적인 지표에서 Eckstein은 불리할 수 밖에 없으며, "최대한 많은 득점을 생산해내는 것" 에 바탕을 둔 세이버 지표 상에서 단타 이상을 생산해낼 확률이 미미했던 Eckstein의 무능력함과 잉여력은 특히나 돋보였다.

Eckstein은 남들과 같은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 뼘, 아니 두 뼘이 작은 키에, 팔과 다리도 모두 6'2인치 짜리 평균 선수들에 비하면 짧았다. 운동신경은 좋았고 순발력과 민첩함은 뒤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Billy Hamilton이나 Dee Gordon처럼 엄청난 순수 운동능력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보통 선수들 처럼 Contact + Power + Line Drive hitting + Throwing Arm + Pure speed와 같은 Tool로 승부를 걸었다면 그의 야구 커리어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그만의 스타일로 야구를 해왔다. 그리고 그가 잘하는 것들, 즉 삼진을 당하지 않는 능력, 파울로 공을 커트해내는 능력, 어떻게든 내야 밖으로 타구를 보내는 능력 등은 최고 수준의 무대인 빅 리그에서도 통함을 증명해냈다. 물론 그의 성공에는 그가 커리어 대부분을 Hit-and-run과 번트를 선호하던 Mike Scioscia, Grit 과 Hustle 페티쉬의 소유자이자 작전수행 능력을 중시하는 Tony La Russa, 이 두 감독 밑에서 보내는 운도 작용했다고 사료된다.

"I can remember talking to Don Zimmer a couple of years ago about him. He said, 'You look at him, you can't figure it out.' And then during the course of the game he's in the middle of every single thing."

-Jim Leyland on David Eckstein before WS Game 5 (2006)

 

David Eckstein의 고등학교 교지에 Eckstein은 "Most Helpful" 한 학생으로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게 위선이었는지 가식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프로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을 돌이켜 봤을 때 Eckstein은 남을 돕고, 팀을 돕는 것에서 의미를 찾던 사람이고, 선수였다. 그리고 Eckstein은 타고난 신체적 조건 때문에 남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팀을 도울 수는 없었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눈물샘을 자극하고 감동을 이끌어내려고 디자인 된 진부한 신데렐라 스토리들은 Eckstein의 "인간 승리" 에 지나치게 포커스를 맞추었고, 이는 역효과를 불러왔다. 이러한 부분들을 빼고 냉정하게 Eckstein이라는 선수가 어떤 식으로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왔는지에만 집중한다고 해도, 그의 커리어는 충분히 존중받을만 하다. Eckstein은 철저한 노력과 뛰어난 야구 센스로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했고, 10년간 리그 평균선에 크게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수준의 공헌을 하며 10년간 19.6M의 연봉을 받고 18.9의 WAR를 쌓았는데, 이는 상당히 괜찮은 효율성이다. 그리고 Average 수준의 Shortstop은 예전에 주인장님이 한 번 언급하셨듯 생각보다 상당히 가치있는 재산이다. 

Intangible의 힘을 믿든, 믿지 않든, Eckstein은 주변 사람들에게 영감과 동기를 주고, 에너지를 불어넣었으며, 그 존재 자체로 팀에게 긍정적인 힘을 가져다 주었던 선수였으며, 무엇보다 우리에게 좋은 기억을 남겨주었다. 수많은 확률과 "너는 안돼" 를 이겨내고 가장 큰 무대에서 두 번이나 빛난 그는 늘상 "You see? Things work out" 을 입에 달고 다니던 낙천주의자였으며, 그의 이러한 성격을 높이 산 Cardinals 구단 측에서는 Eckstein이 팀 마이너리거들을 상대로 자신의 경험과 야구 인생에 대해 강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했다.

우리 블로그의 한 댓글에서 "스포츠를 보는 가장 큰 이유는 감동과 승리가 아니겠는가" 하는 구절을 본 적이 있는데, Eckstein은 감동도 주었고 승리도 주었으니,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행운의 상징?


Did you know...

  • 집안에 흐르는 유전병 때문에 형제들이 어렸을 때부터 신장병을 앓는 모습을 보고 자란 David Eckstein은 프로에 데뷔한 이후 줄곧 신장병 환자들을 위한 구금 활동에 활발히 참여했으며, 지역사회에 대한 환원과 봉사를 꾸준히 실천해왔다. Cardinals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데뷔 초기 Angels 시절에도 Eckstein은 팬들에게 늘 "옆집 청년"같은 이미지로 다가갔으며, 암투병 어린이나 신장병 어린이들을 위해 꾸준한 후원을 지속했다. (Angels의 한 리포터는 Eckstein이 Angels에서 논텐더로 풀렸을 때, Eckstein의 소식을 어린 딸에게 전하자 도저히 위로할 수 없을 만큼 딸이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 Eckstein은 5남매의 막내인데, 태어났을 때 병원에서 아이가 건강하다는 진단을 받았음에도 노파심에 다시 재검을 요청했다. 이 때 한 한국계 의사가 Eckstein의 내장을 근육이 막고 있는 것을 발견, 급히 수술을 진행해 제거했는데, 미리 발견하지 않았으면 생명이 위태로웠을 것이라고 한다. Eckstein 가족은 가족 대부분이 University of Florida 출신이며, David은 Padres에서의 선수생활이 끝난 후 온라인 클래스를 들으며 2012년 Political Science 학위를 따고 졸업했다.

  • David은 2006년 WS MVP 부상으로 받은 그 Corvette을 형 Rick Eckstein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유는 스틱을 몰 줄 몰라서....

  • 역사에 길이 남을 2011년 WS 6차전 시구자가 David Eckstein이었다. 이러니 St. Louis에서 사랑을 안 받을 수가 없다.

  • Eckstein은 2005년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Ahsoka의 목소리로 출연했으며 예전에 유명했던 "The Brady Bunch" 라는 시트콤에 나왔던 배우 Ashley Drane과 결혼했으며 (Disney World에서 프로포즈하고 결혼했다고 한다) 현재 부인의 사업을 도우는 한편 (여성 Sci-fi 팬들을 위한 각종 물건들을 만드는 회사로, 관심있으신 분들은 들려보시길 (www.heruniverse.com) 형인 Rick Eckstein (현 Nationals 타격코치) 와 함께 오프시즌에는 학생들에게 야구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Rick Eckstein은 동생을 위해 자신의 신장을 기증했다. 

by Doovy

맺는말: Revisiting TLR ERA 시리즈는 오늘 Eckstein편을 마지막으로 휴식에 들어갑니다. 그간 9편에 걸쳐 8명의 선수들을 돌아보았는데, 아직도 쓸 선수들이 많이 남아있지만 다음 오프시즌을 기약하겠습니다. 이번 오프시즌이 워낙 지루해서 시작한 시리즈였는데, 개인적으로 여러 선수들을 돌아볼 수 있어서 의미있고 빡센(?) 시간들이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저는 4월 프리뷰 때 다시 포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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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ovy

일곱번째 TLR 시리즈 주인공은 Cardinals에 와서 빛을 보기 시작한 Late-bloomer 투수 계보의 초대격이던 Texas 출신 우완투수, Woody Williams이다. 이 Late-Bloomer (aka Dave Duncan 컬렉션) 계보는 이후 Jeff Suppan-Jason Marquis-Joel Pineiro-Kyle Lohse 등이 이어왔는데, Woody Williams는 이들 중 가장 드라마틱하고도 불꽃같은 변신으로 짧고 굵게 Cardinals의 2000년대 초반을 장식했으며, Dave Duncan의 인생 최대 역작 중 하나로 손꼽힌다. 커터가 지금처럼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절 효과적인 커터로 Pitch-to-contact 철학의 정점을 찍었던 Woody Williams를 잠시 곱씹어보자.

 

Jocketty의 역대 최고의 Trade Deadline Move 중 하나, Woody Williams

 

 

Gregory Scott 'Woody' Williams

RHP (Starter)

DOB: 1966년 8월 19

Birth: Houston, Texas

Time with Cardinals: 2001-2004


Draft and Minors

Williams 는 University of Houston 출신으로, 1988년 드래프트에서 무려 28라운드 (전체 732번)에서 지명된 끝에 Blue Jays 유니폼을 입고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전체 732번에서 지명된 것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듯이 그에 대한 기대는 처음부터 크지 않았다. 패스트볼 구속이 빨랐던 것도 아니며 (드래프트 당시 90마일 근처) 압도적인 breaking stuff 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나이가 어리거나 (대졸 후 드래프트 참여, 계약 당시 거의 만 22세) 탁월한 하드웨어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키 6'0). 과연 빅 리그에 데뷔할 수나 있을까 싶은 수준의 지극히 평범한 선수로, 대학에서도 유격수를 보다가 뒤늦게 투수로 전향한 케이스였다. 그나마 "괜찮은 커맨드"와 "가능성이 있는 커브+체인지업" 그리고 Intangible "근성" 하나를 믿고 한번 키워봄직한 투수였다.

Williams는 마이너리그에서 생각보다 빠른 성장을 했고, 1990년에는 AAA볼까지 경험을 했다 (28라운드 출신 치고는 빠른 성장이지만, 나이도 워낙 많았다) Blue Jays에서는 어차피 Ceiling이 높지 않은 Williams를 릴리버로 쓸 생각을 하고 1991년 그를 릴리버로 돌리는 실험을 했으나, AAA볼에 올라간 Williams의 K/9이 하락하면서 이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그래도 Williams는 공격적인 피칭과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는 습관으로 적은 피홈런율을 기록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이를 무기로 1992년 AAA볼에서 괜찮은 성적을 내고 (120.2이닝 평균자책 3.13) 1993년 스윙맨으로 Blue Jays 로스터에 들었다. 물론 포스트시즌 엔트리에는 들지 못했다.

Woody Williams' Minor League Track Record

Year Age Tm Lg Lev W L ERA G GS GF CG SV IP H R ER HR BB SO WHIP H/9 HR/9 BB/9 SO/9 SO/BB
1988 21 2 Teams 2 Lgs A--AA 10 4 2.16 18 16 0 2 0 104.1 75 35 25 2 33 83 1.035 6.5 0.2 2.8 7.2 2.52
1988 21 St. Catharines NYPL A- 8 2 1.54 12 12 0 2 0 76.0 48 22 13 1 21 58 0.908 5.7 0.1 2.5 6.9 2.76
1988 21 Knoxville SOUL AA 2 2 3.81 6 4 0 0 0 28.1 27 13 12 1 12 25 1.376 8.6 0.3 3.8 7.9 2.08
1989 22 2 Teams 2 Lgs A-AA 6 10 2.89 34 21 9 2 4 152.1 124 58 49 9 60 111 1.208 7.3 0.5 3.5 6.6 1.85
1989 22 Dunedin FLOR A 3 5 2.32 20 9 8 0 3 81.1 63 26 21 3 27 60 1.107 7.0 0.3 3.0 6.6 2.22
1989 22 Knoxville SOUL AA 3 5 3.55 14 12 1 2 1 71.0 61 32 28 6 33 51 1.324 7.7 0.8 4.2 6.5 1.55
1990 23 2 Teams 2 Lgs AA-AAA 7 10 3.60 45 12 19 0 5 135.0 126 65 54 8 43 82 1.252 8.4 0.5 2.9 5.5 1.91
1990 23 Knoxville SOUL AA 7 9 3.14 42 12 19 0 5 126.0 111 55 44 7 39 74 1.190 7.9 0.5 2.8 5.3 1.90
1990 23 Syracuse IL AAA 0 1 10.00 3 0 0 0 0 9.0 15 10 10 1 4 8 2.111 15.0 1.0 4.0 8.0 2.00
1991 24 2 Teams 2 Lgs AAA-AA 6 6 3.88 49 1 24 0 9 97.1 94 45 42 3 41 74 1.387 8.7 0.3 3.8 6.8 1.80
1991 24 Knoxville SOUL AA 3 2 3.59 18 1 8 0 3 42.2 42 18 17 1 14 37 1.312 8.9 0.2 3.0 7.8 2.64
1991 24 Syracuse IL AAA 3 4 4.12 31 0 16 0 6 54.2 52 27 25 2 27 37 1.445 8.6 0.3 4.4 6.1 1.37
1992 25 Syracuse IL AAA 6 8 3.13 25 16 3 1 1 120.2 115 46 42 4 41 81 1.293 8.6 0.3 3.1 6.0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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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2000년: LAIM 

Williams는 데뷔 시즌 이후 4년차였던 1996년까지 ML에서 풀타임을 치른 적이 없었다. AAA행은 늘 그에게 고려해야 할 옵션이었고, Williams 정도의 재능은 얼마든지 Replacable 했다. 일각에서는 90년대 초 Blue Jays 투수진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Williams가 마이너리그에서 오래 뛰었어야 했다고 얘기하는데, 이는 절반의 사실이다. 1992-3년 WS 우승 당시 Jays 투수진에는 Jimmy Key, Dave Stewart, Dave Stieb 외에도 David Cone, David Wells, Al Leiter 등 이후 90년대를 주름잡는 (Williams보다 훨씬 높은 ceiling을 보유한) 투수들이 많았다. 허나 1995년 이후의 Jays 투수진을 보면 마치 2007년 Cardinals 투수진을 보는 마냥 착잡하다. 마이너리그에서 Williams의 기록은 (특히 AAA 승격 이후는) 그다지 압도적이지 못했으며, 빅 리그 승격 이후에도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다. (Williams는 1이닝을 압도할만큼의 구위를 지니지 못했으며, 탈삼진 능력이 후진 것에 비하면 컨트롤이 대단한 편은 아니었다. 따라서 데뷔 첫 3년간 그에게 선발등판 기회는 거의 돌아오지 않았다.)

All-around-average 투수였던 Williams가 유일하게 평균 이상으로 해낼 수 있던 것은 그나마 이닝을 꾸역꾸역 먹는 것이었다. 1997년 Williams는 Hentgen과 새로 들어온 Clemens 둘의 원투펀치 뒤에서 31경기 194.2이닝을 던졌고, 이듬해에인 1998년에도 32경기에 선발로 나가 208.2이닝을 소화하며 자신의 장점을 십분 발휘했으나, 2년간 무려 64개의 홈런을 허용했다. Woody는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어떻게든 공을 집어넣는 공격적인 피칭에 익숙해져 있었으나, AAA볼과는 달리 ML 타자들은 이를 쉽게 홈런으로 연결시켰다. FIP는 두 시즌 모두 5점대가 넘었고, 피안타율만큼은 리그 상위권이었다.

참 어색한 Woody의 Jays 시절 모습

 

1998년 오프시즌, Jays는 Woody Williams에 릴리버 Carlos Almanzar, 유망주 Pete Tucci까지 얹어서 Padres의 1라운더 출신 선발투수 Joey Hamilton과 바꾸는 3:1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당시 Pete Tucci는 ML에 데뷔하지 못했기에 생소한 이름이지만, 나름 1996년 드래프트에서 Jay가 1라운드에서 뽑은 외야수이며, 파워와 스피드를 모두 지닌 나름 (폭망한) Tool-guy였다. 특히 1998시즌에서 A+와 AA를 합쳐 30홈런 112타점 .318/.376/.602를 때리며 한창 주가를 올린터라, Jays가 Joey Hamilton에 대한 기대가 꽤 컸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당시 Williams와 Hamilton의 선수 가치가 어느 정도 차이가 났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기도 하다. 

Williams가 이후 NL로 건너가 완전히 '용'이 된 반면, Joey Hamilton (추억이 돋는다 이 이름!) 은 1998년이 사실상 마지막 전성기였다 (그래봤자 WAR 1.6에 그쳤지만...) Hamilton은 당시 1라운더 특유의 Hype에다가 6'4 220Ib의 당당한 하드웨어, 그리고 데뷔 첫 2시즌간 보여준 좋은 모습 (2년간 15승, 300이닝, 3완봉, 평균자책 3.02) 때문에 계속 Padres에서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려 보았던 투수였는데, 하체를 거의 쓰지 않고 상체의 힘만으로 던지던 투구폼과 멘붕 경향 (그로 인한 고질적 제구 불안) 때문에 결국 망하고야 만 케이스다. 그래도 나름 Padres에서는 5년동안 934이닝을 소화해주고 55승 WAR 14.8에 평균자책 3.83을 해줬으니 (기대만큼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 밥값은 했다고 봐야 하겠지만, Blue Jays로 옮기고 나서는 무려 6.52의 평균자책을 기록하며 불펜으로 쫓겨났으며, 3년간 도합 WAR 0을 기록하고 방출되었다. 

이 트레이드는 사실 Woody Williams와 Ray Lankford 의 트레이드만큼 관심을 받지는 않았으나, 돌이켜보면 Jays 입장에서  Home-run-prone인 32세의 오른손 선발투수에다가 불펜투수 + 유망주까지 더해서 뭔가 선발진 강화를 꾀했으나, 당시 28세였던 Hamilton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강화는 커녕 선발진 붕괴를 초래한 굉장히 끔찍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Tucci가 ML에 데뷔조차 못하고, Carlos Almanzar도 2년간 107이닝 WAR -0.2를 찍으면서 전혀 San Padres에 도움이 되지 못했긴 했으나, Williams는 그래도 Padres로 건너간 이후 2년 반동안 500이닝과 30승, WAR 3 이상을 적립해주면서 자신에 대한 Padres의 기대치는 그대로 맞춰주었다. 이 정도면 됐지, 뭘 더 바랬는가. 

재미있는 것은 트레이드 상대였던 Joey Hamilton이 Williams와 마찬가지로 1988년 드래프트 28라운드에서 지명당했었다는 점이다 (물론 Hamilton는 고졸이었고, 계약하는 대신 대학에 진학, 3년후 1991년 드래프트 1라운드 8번으로 지명되었다.) 

Woody Williams: Another name for mediocrity (1997-2001년 전반기) 

Year Age Tm Lg W L ERA GS IP H R ER HR BB SO ERA+ WHIP H/9 HR/9 BB/9 SO/9 SO/BB
1997 30 TOR AL 9 14 4.35 31 194.2 201 98 94 31 66 124 104 1.372 9.3 1.4 3.1 5.7 1.88
1998 31 TOR AL 10 9 4.46 32 209.2 196 112 104 36 81 151 103 1.321 8.4 1.5 3.5 6.5 1.86
1999 32 SDP NL 12 12 4.41 33 208.1 213 106 102 33 73 137 96 1.373 9.2 1.4 3.2 5.9 1.88
2000 33 SDP NL 10 8 3.75 23 168.0 152 74 70 23 54 111 114 1.226 8.1 1.2 2.9 5.9 2.06
2001 34 SDP NL 8 8 4.97 23 145.0 170 88 80 28 37 102 80 1.428 10.6 1.7 2.3 6.3 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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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2013년 HOF 후보들을 다루는 기사에서 Sports Illustrated의 한 기자는 LAIM (League-Average-Inning-Muncher) 라는 표현으로 Woody Williams의 커리어를 설명했다. 사실이다.  Williams는 이닝을 먹어주는 것 말고는 딱히 큰 이거다 싶은 장기가 없었고, 뒤늦은 성장을 꿈꾸기에는 나이도 너무 많았다. 이미 그의 나이는 만 서른 넷, 한국 나이로는 서른 여섯이었다. 

Williams가 Cardinals 이적 후 첫 2년간 보인 성적은 Dizzy Dean에 비교된다.

 


2001년: 운명적인 트레이드

이미 자주 언급되긴 했지만 다시 한 번 돌아보자면, 2001년 7월 29일 Cardinals는 포화 상태인 외야진 정리를 위해 Ray Lankford 트레이드에 나섰다. 그리고 웬만하면 그 댓가로 선발 투수를 물어오길 바랬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단연 Andy Benes였다. DK57-Matty Mo의 훌륭한 원투펀치와 역대 최고의 루키시즌을 만들어내고 있던 Pujols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Cards의 성적은 트레이드 당시 5할에서 2게임 앞선 53승 51패에 불과했는데, 여기에는 역대 선발투수 최악의 시즌을 향해 (Sponsored by TLR) 달려가고 있던 Andy Benes의 "저는 배팅볼을 던진답니다" 캠페인이 큰 역할을 했다.

Andy Benes는 시즌 첫 등판 Coors Field에서 2.2이닝 10자책점의 참사를 떠안은 것으로 시작, 매 경기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다. 패스트볼 구속은 88마일대에서 형성되었으며, 슬라이더는 릴리스 포인트를 완전히 잃어서 자기 공처럼 던질 수가 없었다. 그나마 6월 초에 3경기 연속 QS를 기록한 것 덕분에 전반기를 무려 6.95의 평균자책으로 마무리했으며, 후반기에도 전혀 나아진 모습 없이 평균자책 7점대 벽을 가뿐히 뛰어넘으며 TLR을 당황케했다. Williams 영입이 확정된 다음 날인 8월 3일, TLR은 Marlins와의 홈 4연전 더블헤더 2차전에서 (1차전은 Matt Morris) Benes를 투입해 마지막 기회를 주었고, Benes는 혼신의 힘을 다해 117구를 던지는 역투 속에 6.1이닝 5피안타 3볼넷 4실점으로 패전을 안았다.

다음 날인 8월 4일, 만 35번째 생일을 2주 앞둔 Woody Williams가 생소한 Birds on the bat 유니폼을 입고 Busch Stadium에 섰다. 당시 아무도 Williams가 이후 후반기 리그 최고 선발투수로 군림할 것이라고 생각치 않았었으며, 과연 Cardinals가 6인 로테이션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지도 불분명한 상황이었다. 상대는 전날 Benes에게 패전을 안긴 Marlins, 투수는 Williams와 정반대인 A.J. Burnett이었다. Williams는 6이닝 7피안타 무실점 0BB 5K의 깔끔한 피칭을 한 뒤 Standing-O를 받으며 마운드를 내려왔고 팀이 3:0으로 승리하며 승리투수가 되었다. TLR은 "중요한 경기에서 좋은 인상을 남겼다"며 Williams를 칭찬했고, 이후 Andy Benes는 시즌 내내 불펜에서 뛰었다 (Andy Benes는 Williams가 전체 732번으로 뽑혔던 바로 그 88년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1번이었다. 역시 인생은 오래 살고 봐야하는 것인가..)

Woody's Incredible 2nd Half Stretch

Date Tm Opp Rslt Dec IP H R ER BB SO HR ERA BF Pit
Player went from San Diego Padres to St. Louis Cardinals
Aug 4 STL FLA W,3-0 W(9-8) 6.0 7 0 0 0 5 0 4.77 23 98
Aug 10 STL @ NYM W,7-6 4.0 7 5 5 2 2 1 4.94 20 76
Aug 15 STL CIN W,8-4 W(10-8) 5.0 6 3 3 3 2 2 4.95 23 94
Aug 20 STL @ CIN L,4-5 6.0 7 1 1 1 6 0 4.83 27 97
Aug 25 STL @ CHC L,4-6 L(10-9) 6.0 7 6 5 2 2 1 4.92 26 97
Aug 31 STL @ LAD W,5-1 W(11-9) 9.0 4 1 1 1 3 1 4.72 31 108
Sep 5 STL @ SDP W,2-0 W(12-9) 9.0 2 0 0 0 6 0 4.50 27 101
Sep 20 STL @ PIT W,9-1 W(13-9) 7.0 3 1 1 3 3 1 4.39 26 105
Sep 25 STL @ HOU W,3-2 W(14-9) 9.0 3 2 1 3 9 0 4.24 33 138
Sep 30 STL PIT W,7-3 W(15-9) 7.0 2 3 2 0 8 1 4.18 24 97
Oct 5 STL HOU L,1-2 7.0 6 0 0 4 6 0 4.05 30 125
TOT 220.0 224 110 99 56 154 35 4.05 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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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s는 후반기 11경기에 등판했고, 팀은 그가 등판한 경기에서 8승 3패 (+5)를 만들어냈는데, 이 시즌 90승 72패를 거두었던 San Francisco Giants가 Playoff에 진출하지 못했음을 생각한다면 이 +5가 있고 없고는 굉장한 차이이다. 특히 8월말~9월초에 1실점 완투승에 이어 2피안타 완봉을 거둔 점, 1위 싸움이 치열하던 9월 말 지구 선두팀인 Astros의 Wade Miller와의 맞대결에서 138구 1자책 완투승을 거둔 부분은 도저히 칭찬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전 경기에서 믿었던 Matty Mo가 Astros 타선에게 무지하게 얻어터졌기에 더더욱 필요한 승리였다).

만 35세의 Woody Williams는 빅 리그 데뷔 8년만에 처음으로 Playoff 마운드에 섰는데, 그것도 자타공인 최고 투수였던 Randy Johnson을 상대로 Division Series 2차전을 책임져야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Woody 는 그 경기를 통해 자신이 한 단계 성장했음을 과시했는데, 무려 7이닝 4피안타 1실점 9K (시즌 최다) 라는 엄청난 피칭으로 Randy Johnson에게 포스트시즌 7연패를 안겼다. Woody는 7회까지 한점도 주지 않은채 8회에 마운드에 올랐으나, 첫 타자 Greg Colbrunn에게 안타를 맞자 TLR이 바로 Steve Kline으로 교체했고, 이후 Colbrunn이 땅볼로 홈에 들어오면서 실점을 안았다. 교체될 당시 Woody의 투구수는 무려 133개였다. 

또한 Williams는 이 경기에서 3회초 선두타자로 나서 무려 8구까지 가는 승부끝에 Randy Johnson의 패스트볼을 후려서 센터쪽으로 거의 홈런이 될뻔할만큼 깊은 2루타를 작렬, Polanco의 희생플라이 때 홈에 들어오면서 시리즈 동점을 만드는게 커다란 수훈을 세웠다. (Williams는 커리어 내내 타격으로는 알아주는 투수였다)

Matheny는 Williams의 장점들이 한껏 부각되도록 도와준 은인 중 하나다.

 


 

2002년

Williams가 부상으로 절반을 날려먹은 시즌. Left-Oblique 부상으로 시즌 첫 등판부터 삐걱거렸던 Williams는 복귀 후 7월 초까지 평균자책 2.35를 기록하며 작년의 기세를 그대로 이어갔으나, 올스타 브레이크를 앞두고 다시 왼쪽 Rib-cage 부상으로 DL에 올라 8월말이 되서야 돌아왔다. Williams의 딜리버리는 왼쪽으로 Cross-body Motion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왼쪽 복사근 및 갈비쪽에 무리가 간다는 지적이 있었고, 이게 한창 좋을 시즌인 2002년에 터지면서 아쉽게도 100이닝정도를 놓쳤다.

건강할 때 Williams는 정말 좋았다. 17경기에서 103.1이닝을 소화했고, 팀은 그가 등판한 경기에서 12승 5패였다. 세부스탯에서도 2001년 후반기의 포스를 그대로 이어가면서 완전히 피어났다. 또한 자신감을 얻은 탓인지 전보다 더욱 공격적인 피칭을 이어나갔고, 다양한 구질을 평균 이상의 커맨드로 다룰 수 있었기에 컨디션이 안좋은 날도 데미지를 최소화하는 능력이 있었다. 2002시즌 17경기에서 Williams가 3실점 이상 허용한 경기는 단 한 경기 뿐이었다.

Williams의 성공 요인 중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진 것은 Dave Duncan이 그에게 하사한 Cutter이다. 이미 Padres 시절부터 Williams는 커터를 던질 수 있었으나, Dave Duncan을 만난 이후로 이 커터의 구속을 증강시켜 2001년부터는 커터 구속이 90-92마일까지 이르렀다. 또한 Duncan은 Williams의 피홈런에 크게 이바지하던 커브의 빈도수를 줄이는 대신 Change-up을 크게 발전시켰는데, 이는 Williams의 성공에 있어서 굉장히 큰 공헌을 했다. 커터-체인지업 콤보가 완성 단계에 들어서자 Williams는 리그 내에서 가장 좌타자를 상대로 효과적인 우투수로 거듭났다 (한창 잘 던질 시절의 K-Mac 선발투수 형으로 봐도 괜찮을 것 같다.) 2002년 Woody는 리그 내에서 좌타자 상대 피안타율 3위에 올랐는데 (0.182), 이는 Blue Jays 시절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Williams의 진화에 고무된 Cardinals는 오프시즌이 시작하자마자 바로 2년간 14.9M + 3년차 8M 팀 옵션의 계약으로 Williams를 붙잡았는데, 이제 갓 피기 시작한 노장 투수의 37-38세 시즌을 위해서 쓴 금액 치고는 꽤 훌륭한 계약이었다. DK의 갑작스런 비보 이후 Woody가 제공하던 Veteran Leadership 또한 인정받은 덕이기도 했다.


2003년

Woody의 37세 시즌을 앞두고 스프링 트레이닝 당시 팀 포수였던 Mike Matheny는 "우리 팀에서 가장 Consistent한 투수인 Woody가 건강하지 못하다면 올 시즌은 힘들 것" 이라고 말했다. Matheny의 걱정은 기우였는데, 이 시즌 Woody는 무려 18승을 올리며 팔자에 없던 올스타전까지 출장했으며, 무려 220.2이닝을 소화하며 투구이닝 부문 리그 4위에 랭크되었다. 

필자에게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던 경기는 이 시즌 Williams가 친정팀 Toronto 상대로 노히터에 도전하던 장면이었는데, 찾아보니까 2003년 6월 5일 경기이다.(Boxscore) 이 경기에서 Williams는 첫 타석 무사 만루에서 땅볼로 타점을 올리더니, 2번째 타석에서 TLR의 더블 스틸 지시로 2사 2,3루가 되고 상대 투수가 8번 Matheny를 고의사구로 거르면서 자존심을 건드리자 무려 3타점 3루타를 폭발시켰다. 또한 투수로써도 8회 1사까지 노히터를 이어가다가 (Vernon Wells에게 볼넷), Orlando Hudson에게 안타를 허용하고 바로 다음 타자인 Dave Berg를 GIDP 처리하면서 8이닝 25타자 상대 1안타 무실점 (98구) 정말 압도적인 피칭으로 시즌 8승 째를 거두었다. 이 경기 승리로 Woody는 1.99의 평균자책과 8승으로 2개 부문 모두 리그 선두를 달렸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 이후 Woody는 올스타 브레이크를 전후하여 Dead-arm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후반기에는 6승 6패 평균자책 5.23의 굉장히 평범한 투수로 돌아왔다. Woody의 Cutter는 투구수가 많아질 수록 서서히 구속이 줄어드는 모습을 보였으며 (근 2000이닝을 소화한 만 37세의 투수였으니 그럴만도 하다), 커터의 위력이 줄어들 경우 순식간에 난타당하는 모습을 보였다. 전반기에만 무려 134.2이닝을 소화한 그는 후반기에는 고작 86이닝을 소화하는데 그쳤고, 이는 다른 것 보다 경기 중후반을 갈수록 커터의 무브먼트와 구속이 줄면서 피안타가 늘어나는 증상이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닝별 평균자책: 3회: 2.18, 4회 2.76, 5회 4.02, 6회 4.97)

아쉽게도 이적 후 Woody가 보여준 압도적인 모습은 이 시즌 전반기를 이후로 다시 볼 수가 없었다. 그가 무려 18승을 거두면서 모든 면에서 커리어 최고 시즌을 찍은데에는 1) Rolen-Renteria-Vina-Tino Martinez로 이어진 리그 최고의 내야수비진과 2) 투수친화적, 우타자에게 적대적인 홈구장 (홈에서 3.00, 원정에선 5.04), 3) 리그 최고 수준의 득점 지원 (9이닝당 7.0점, NL 1위) 등 여러가지 부수적인 이유가 함께했으며,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에는 서서히 LAIM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2004년 WS 1차전, 강판되는 Woody.

 2004년

 사실상 혼자 팀 투수진을 이끌어야했던 2003년에 비해 2004년은 훨씬 나았는데, Dave Duncan이 신작 Jason Marquis와 리메이크작 Chris Carpenter, 그리고 Woody의 후속작인 Jeff Suppan까지 모두 발매하면서 로테이션이 굉장히 탄탄해졌다. Woody는 11승 8패 4.18이라는 평범한 성적을 냈고, 189이닝을 소화했다.

NLCS 1차전에 선발로 나서 고향팀 Astros를 상대로 6이닝 4실점 승리를 거둔 Williams는 NLCS 5차전에서 Brandon Backe와 함께 0:0의 팽팽한 투수전을 이어갔다. Woody가 7회까지 1피안타 무실점, Backe가 8회까지 1피안타 무실점으로 버텨내면서 도대체 향방을 알수 없는 투수전이 계속되었다. 당시 Brandon Backe가 누군지 잘 몰랐던 탓에 "쟤는 누군데 저렇게 잘던지나" 하면서 의아해했던 생각이 나는데, 이 경기는 결국 9회 Jeff Kent가 Izzy상대로 쓰리런을  치면서 Astros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 시리즈에서 Williams는 양팀 통틀어 최다인 13이닝을 던지면서 St. Louis 에서의 마지막 시즌에서 투혼을 불살랐다. 아쉽게도 그가 Cards 유니폼을 입고 던진 마지막 경기는 WS 1차전으로, 2.1이닝 8피안타 7실점으로 먼지나게 두들겨 맞았다. 전형적인 Dead-arm 증상이었다.

사족을 달자면 2004년 WS 1차전은 필자가 Cards 팬이 된 이후로 가장 Do-over를 하고싶은 경기 중 하나인데, 이 경기를 이겼다면 이 시리즈의 향방은 완전히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Woody가 무너지면서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한 경기를 (3회 끝나고 점수가 7:2) Larry Walker의 홈런이 터지면서 추격하기 시작했고, 결국 7:7, 9:9까지 만들어서 쫓아가지 않았는가. Mark Bellhorn은 이후 필자가 가장 싫어하는 선수가 되었고, 아직도 그 홈런은 파울이었다고 믿고 싶다. 

Woody and the Cardinals: 아름답고 효율적이었던 우리의 만남 (2001-2004): 

Year Age Tm W L ERA GS CG IP H R ER HR BB SO BF ERA+ WHIP H/9 HR/9 BB/9 SO/9 SO/BB
2001 34 STL 7 1 2.28 11 3 75.0 54 22 19 7 19 52 290 190 0.973 6.5 0.8 2.3 6.2 2.74
2002 35 STL 9 4 2.53 17 1 103.1 84 30 29 10 25 76 412 159 1.055 7.3 0.9 2.2 6.6 3.04
2003 36 STL 18 9 3.87 33 0 220.2 220 101 95 20 55 153 944 106 1.246 9.0 0.8 2.2 6.2 2.78
2004 37 STL 11 8 4.18 31 0 189.2 193 93 88 20 58 131 817 101 1.323 9.2 0.9 2.8 6.2 2.26
STL (4 yrs) 45 22 3.53 92 4 588.2 551 246 231 57 157 412 2463 118 1.203 8.4 0.9 2.4 6.3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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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은퇴

Woody에게 걸린 8M짜리 팀 옵션은 (당연하지만) 행사되지 않았고, 오프 시즌에 Woody는 친정팀 Padres과 3.5M짜리 1년 + 인센티브 및 옵션 계약을 맺고 San Diego로 돌아갔다. 이후 2년간 Woody는 젊은 투수들에게 자신의 지혜와 생존법을 전수하며 성공적으로 2년 계약을 마쳤는데, 특히 두번째 해에는 운빨+PETCO 빨을 곁들여 12승 5패 3.65라는 언뜻 보면 상당히 그럴싸한 성적을 냈다. 이 시즌이 마지막이었어야 하는데, 고향팀 Astros는 Woody에게 40세를 바라보는 Woody에게 2년 12.5M 이라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계약을 안겨주었고, Woody는 만 39세 시즌이었던 2007년, 피홈런 35개로 Livan Hernandez, Jamie Moyer 등 피홈런의 달인들을 무찌르고 당당히 NL 1위를 차지했다.

2008시즌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Woody는 무지하게 난타를 당했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 Astros는 Woody를 방출했고, 그는 미련없이 은퇴를 선택했다 (이에 대해 동료였던 Lance Berkman은 "Woody같은 베테랑에게 시범 경기에서 못한다고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조급하다" 고 지적했으나, Astros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2년 계약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을 이런 식으로 몰고 간 셈이었다)

은퇴 후 그는 고향 Houston에서 살고 있으며,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한편 지역 커뮤니티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University of Houston 동문 야구경기에 참관한 모습이 기록되었다.


총평

SI의 Jay Jaffe 가 LAIM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이유는 Woody가 얼마나 평범한 투수였는지를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며, Cardinals에서의 2년 반을 제외하면 Woody는 평범한 투수로 불리우는게 맞다. 특히나 이 단어가 출몰한 기사가 2013년 HOF 후보들을 다룬 것이었음을 생각하면, Woody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에는 지나치게 서민적이고 평범한 투수였다 (함께 언급된 투수들은 Aaron Sele, Jose Mesa 등이었다)

그러나 글을 쓰면서, 자료를 모으고 스탯을 되짚어보면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Woody가 결국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88년 드래프트 대졸 28라운더. 마이너에서 인고의 세월만 5년. 이후로 풀타임 투수가 된 것은 프로 10년차인 1997년 (그때 나이 만 31세). 빠른 공도 없고, breaking-stuff도 없고, pin-point control도 없고, 그렇다고 왼손잡이도 아니었다. 키가 컸던 것도 아니고 탄력있는 몸도 아니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타자와 싸워서 이기겠다는 아주 기본적인 투쟁심과 근성. 오랫동안 던져온 경험과 생존과정에서 익힌 다양한 구질... 그 정도? Williams는 정말 가진 게 없는 투수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풀타임 선발이 된 1997년부터 2006년까지, 그는 그의 30대를 우직하게 불태웠다. 그냥 그가 제일 잘하는 "Pitching"만 꾸준히 했을 뿐이다. 그냥 5일에 한번씩 나가서 던졌고, 던질 때는 최대한 오래 버텼다. 주자가 나가면 자기가 할 수 있는만큼 최대한 못 들어오게 했다 (통산 LOB% 74.3%, 같은 기간 ML 11위). 이 10년간 프로야구에서 그보다 더 많이 던진 선발 투수는 16명에 불과하다 (1817.1이닝). Kevin Brown (1555이닝), 박찬호 (1618이닝), Mike Hampton (1704.2이닝) 등 훨씬 화려한 투수들이 그의 이름 밑에 있다. (비슷한 순위에 Javier Vazquez, David Wells)

중간에 Cardinals라는 팀으로 이적한 것, 운명적으로 Dave Duncan을 만나서 어떻게 하면 자신이 가진 얼마 안되는 이 무기로 싸울 수 있는 지에 대해 배운 후 잠시나마 가치를 인정받았던 것. 나름 올스타에도 선정되었고, 은퇴 후에는 무려 명예의 전당 투표에 오르기까지 했다 (물론 Woody는 표를 받지 못할 것이다.) 월드시리즈에 올라가보기도 했고, Postseason에서 Randy Johnson을 꺾기도 했다. 이보다 인상적인 커리어는 많고, 우리는 늘 그런 커리어들에 익숙하지만, 누구나 그런 화려한 커리어를 밟는 것은 아니다.

League Average. 맞다. Inning Muncher. 역시 맞다. 그러나 LAIM (Lame) 이라고 발음하지는 않고 싶다. 그러기에 Woody는 정말 오랫동안 던졌고, 버텼다. 그리고 그 하나만으로도 존중받을만 하다.


Did you know...?

  • Woody는 훌륭한 타자였다. 빅 리그 통산 4홈런 43타점에 투수로써는 상당히 높은 .194의 통산 타율을 기록하고 있으며, 25개의 2루타를 기록했다. Woody의 스카우팅 리포트에는 그의 타격 재능에 관한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 유격수 출신인 Woody는 타격을 상당히 즐겼는데, 특히 자신이 등판할 예정이던 2004년 WS 1차전을 앞두고 TLR에게 DH를 쓰지 말자고 제안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 Kevin Towers (트레이드 당시 Padres GM)은 Williams-Lankford 트레이드를 자신의 커리어 최악의 무브로 꼽았다. 그래서인지 Woody가 FA가 되자 주저없이 달려들었다 (2005년) 반면 Jocketty는 Williams 트레이드르 "One of my better moves"로 꼽았다.
  • Padres 시절 시즌 중에 자꾸 오른손이 창백해지고 혈액이 통하지 않는 것을 느낀 그는 팀 의료진에게 몇 차례 치료를 부탁했고, 검사 결과 오른쪽 겨드랑이 밑에 혈관이 무너져서 부어오르는 Aneurysm (동맥류) 이 생긴 것으로 판정받았다. 이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느라 2000시즌 그는 아쉽게도 23경기 등판에 그쳤는데, 이 부상에서 회복하는동안 휴식하고 재활했던 것이 궁극적으로 그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는 과거 Yankees의 David Cone이 받았던 수술이며, 90년대를 풍미했던 1루수 John Olerud는 뇌에 동맥류가 있었다.)
  • 본명인 Gregory Scott 대신 왜 별명이 Woody 로 알려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혹자는 Woody가 발군의 타격 실력 때문에 방망이를 뜻하는 Wood가 별칭처럼 된 게 아닌가, 하는데...이것 역시 확실치는 않다. Texas 출신이라서 이런 카우보이스러운 별칭이 어울리긴 하는데, 혹시 아시는 분 있으면 제보를...

by Doovy





출처: SI, ESPN, Baseball-reference, Fangraphs, STL Post dispatch, Riverfront times, Houston Chronicle, LA Times, Baseball-alman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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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Doovy

이번 주 TLR ERA 시리즈는 90년대말 Cardinals의 핵심멤버이자 근대 Cardinals를 거쳐간 선수들 중 순수 운동능력에 관한 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던 외야수, Brian Jordan이다. TLR 시절에 Tony의 리더십과 그의 스타일에 불화 및 갈등을 겪었던 선수들은 한 두명이 아니었으나, Brian Jordan는 Ozzie Smith, Ron Gant 등과 함께 초창기 반 TLR '살생부' 명단의 일원이었으며, 잘 알려져있지는 않지만 풋볼과 야구를 병행했던 몇 안되는 Dual-Atheletes 중 하나이다. 사실은 다른 선수 포스팅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요새 연속으로 이어지던 2000년대 초반 Cardinals 포스팅 난무 및 중복을 피하기 위해 이번 주는 특별히 90년대 후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Brian "투잡" Jordan



Brian O'Neal Jordan 

Outfielder

DOB: 1967년 3월 29일 

Birth: Baltimore, Maryland

Time with Cardinals: 1988-1998


Draft and Minors

Brian Jordan는 Baltimore 태생으로, 이미 고등학교 (Millford Mill Academy) 때부터 가을엔 풋볼, 겨울엔 농구, 봄에는 야구를 하는 만능 선수였다. 키는 6'0 으로 (183cm) 그다지 특출나게 큰 것은 아니었으나, 순간 스피드와 점프력이 뛰어났으며 모든 스포츠에 있어서 뛰어난 경기 감각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Jordan은 고등학교 시절 농구를 가장 좋아했으나, 어차피 자신이 NBA에서 뛰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풋볼과 야구에서 커리어를 탐색했다. (그도 그럴 것이, 6'0으로 NBA를 꿈꾸는 것은 엄청난 테크니션이 아닌 이상 모든 코치들이 만류할 일이다). 

고등학교 Senior 때 야구에서는 .479의 타율과 40개의 도루, 풋볼에서는 21개의 터치다운과 1,014 러닝야드를 기록하며 지역 내에서 가장 촉망받는 운동선수였던 그는 1985년 드래프트에서 20라운드에 Indians에 지명이 되었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고 University of Richmond에 진학한 그는 대학에서도 풋볼과 야구에서 모두 두각을 나타냈으며, 야구에서는 학교 단일 시즌 최다 도루 기록을 세움과 동시에 풋볼에서는 역대 최다 Punt Return 기록을 세운 뒤 1988년 Sociology (사회학과) 학사를 받고 졸업했다. 

1988년 Draft에서 아직 야구로 갈지 풋볼로 갈지 정하지 않은 Brian Jordan을 Cardinals는 1라운드 Supplement 픽으로 뽑았다. 훗날 Jordan는 "사실 당시 (연고팀이었던) Orioles 쪽에서 나를 2라운드에 뽑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Cardinals가 먼저 채갔다" 고 회고했다. (소스: Baltimore Sun) Cardinals는 드래프트 당시 이미 운동능력과 순수 스피드, 강한 어깨가 검증된 Jordan이 타격에서의 성급함을 가다듬고 특유의 탄력을 살릴 수만 있다면 올스타 외야수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는데, 어찌하면 비슷한 시기에 Cardinals에 들어왔던 Ray Lankford와 비슷한 스타일이었다. 한편 1988년 드래프트에는 훗날 Cardinals 유니폼을 입게 되는 선수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는데, 다음과 같다. (참고로 Orioles는 Jordan을 놓치자 2라운드에서 Arthur Rhodes를 뽑았다 ㅎㅎ)

Cardinals를 거쳐간 1988년 드래프트 1라운더들

Year RdPck

Tm

Pos WAR
1988 1 Padres Andy Benes (minors) RHP 28.5
1988 14 Mariners Tino Martinez (minors) 1B 25.1
1988 15 Giants via Reds *Royce Clayton (minors) SS 16.4
1988 22 Cardinals via Yankees *John Ericks (minors) RHP -0.2
1988 23 Cardinals Brad Duvall (minors) RHP
1988 30 Cardinals *Brian Jordan (minors) OF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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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rdan는 결국 야구와 풋볼 중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기로 하고, 고되고 빡센 (그만큼 돈을 많이 벌수 있는) Dual-Athelete 이 되기로 하여 같은 해 NFL 드래프트에도 참가한다. 7라운드에서 Buffalo Bills에게 지명당한 Jordan은 그 해 트레이닝 캠프에서 엔트리에 들지 못하고 짤렸으나, 방출되자 마자 그를 눈여겨 보고있던 Atlanta Falcons에서 데려가 Defensive Back, 더 구체적으로는 Strong Safety라는 포지션에 그를 기용한다.

※풋볼에서 Safety란 포지션은 Defensive Team의 일원으로, 보통 Defensive Line이 상대 Offensive Line에 맞서 대인마크가 되는 반면 Safety들은 라인 뒤에서 서있다가 그때 그때의 약속된 플레이나 상황에 맞춰서 태클을 걸어야 하며, 상대 와이드 리시버의 움직임 및 러닝백을 마크하는데 있어서 큰 책임을 지고 있는 포지션이다. 뛰어난 운동신경과 순간 판단력은 물론이고, 상대 러닝백이 공을 놓칠만큼  강하고 저돌적인 태클을 걸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Jordan은 1988~1989년에 Cardinals 싱글 A에서 충분히 자신의 재능을 검증받았으며, NFL 시즌이 시작할 무렵에는 Falcons에 합류해 풀 시즌을 치른 뒤 다시 야구에 복귀하는 식의 '투잡'을 뛰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Jordan의 운동능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1989년 그는 BA 선정 Top 100에 이름을 올렸고, 1991년 AAA에서 비교적 성공적인 마이너리그 시즌을 보낸 이후에는 BA 랭킹 67위까지 진입했는데, 이 당시 Cards 팜은 선수층이 얇은 편이어서 (특히 가장 유망하던 Ray Lankford와 Gilkey가 팜을 졸업한 지 얼마 안되던 시점이다) 31위의 Dmitri Young, 35위의 Donovan Osborne, 64위의 Allen Watson을 제외하면 별다른 유망주도 없었다.


Falcons 시절 Brian Jordan


Brian Jordan's Minor League Track Record

YearAgeTmLgLevAffGPAABRH2B3BHRRBISBCSBBSOBAOBPSLGOPS
198821HamiltonNYPLA-STL19817112223141233615.310.388.549.937
198922St. PetersburgFLORASTL114543715412110208.349.378.6281.006
1990232 Teams2 LgsAA-A+STL258380713110102222.163.193.200.393
199124LouisvilleAAAAASTL6123821235561144241031741.264.342.410.752
199225LouisvilleAAAAASTL43169155234531416132821.290.337.400.737
199326LouisvilleAAAAASTL381651442454132535941617.375.442.597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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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결정

1991시즌 Brian Jordan은 AAA에서 비교적 성공적인 시즌을 보냄과 동시에 NFL 올스타전이라고 할 수 있는 Pro Bowl에 NFC (NFL은 NFC와 AFC, 양대 컨퍼런스로 나뉜다) 대표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Jordan이 야구에만 전념하기를 바랬던 Cardinals는 Brian Jordan에게 3년간 2.4M의 비교적 큰 계약을 안겨줬고, 특히 사이닝 보너스로  1.7M을 쏘면서 풋볼을 그만두기를 요청했다. Jordan은 이를 수용했고, 이를 들은 Dual-Athelete 계의 대표 주자이자 Brian Jordan의 팀 (Falcons) 동료였던 Deion Sanders는 "아니 그 정도 돈에 풋볼을 관둔다고?" 하는 반응을 보였다.

"I can't believe he gave up football. Doesn't he realize there are baseball and football players who make $6 million a year?"

-Deion Sanders, on Brian Jordan quitting football

90년대초 당시 NFL 최고 연봉자는 Dolphins QB였던 Dan Marino 였는데, 심지어 Marino 의 연봉도 4M 근처에 불과했다. Sanders의 6M 드립을 들은 Falcons 관계자는 "만약 Sanders가 Jordan을 위해 6M을 받아준다면 우리 구단 대표 협상자로 삼겠다" 며 껄껄 웃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당시 Deion Sanders에게 6M은 그렇게 꿈같은 수치만은 아니었다. 이미 당시에도 수비수로써는 드물게 1M 이상의 연봉을 받던 Sanders는 이후 무려 8년연속 올스타에 2차례 Defensive Player of the Year 상을 받는 등 NFL에서 역대급 커리어를 쌓고 이후 NFL HOF에 들어간다. 당시 Sanders와 Jordan은 하위팀 Falcons Defense의 핵심으로 굉장히 강력한 듀오를 형성했으며, Sanders가 엄청난 순수 스피드를 지녔으며 스타성과 언론의 관심을 즐기는 스타일이었다면, Jordan은 (상대적으로) Sanders보다는 덜 까불거리는 성격이었으나 더 저돌적이고 강한 태클러였다. 이 둘은 1991년 Falcons를 하위권팀 Falcons를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고 둘 다 Pro Bowl에 출전했는데,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Jordan이 NFL을 떠난다고 했으니 Sanders도 섭섭할만 하다. Sanders는 Jordan이 풋볼에 집중한다면 훌륭한 커리어를 쌓을만한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당시 Sanders는 그의 ML 커리어에서도 정점을 찍고 있었는데, 1992년 Braves에서 97경기만에 WAR 3.1을 기록했으며 무려 14개의 3루타로 .304/.346/.495의 아름다운 슬래시라인을 찍는다 (좌타자였던 Sanders는 Turner Field의 깊은 우측 외야의 덕을 제대로 이용했다). Deion "Prime Time" Sanders에게 있어서 당시 MLB와 NFL을 겸업하며 6M을 받는 것은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일이었다.

(Source: LA Times)

앳된 Brian Jordan



1992-1994년: 4th Outfielder

힘든 결정을 하고 야구에 전념한 첫 시즌. 1992년 4월 8일, 개막전 로스터에 이름을 올린 Jordan는 4월 8일 선발 우익수로 데뷔에 성공했으며, 데뷔전에서 5타수 2안타 4타점에 도루까지 기록하는 만점 데뷔전을 치렀다. 그러나 5월 중순 Hamstring 부상으로 DL에 올라가면서 일이 꼬였다. 복귀 후에도 Jordan은 타석에서 너무 뻔하게 수를 읽히는 모습을 노출하며 스트라이크 존 바깥쪽으로 유인구를 매번 쫓아가는 (chase) 모습을 보여 Torre 감독의 신임을 얻지 못해 결국 4th Outfielder로 AAA와 ML를 왕복하며 한 시즌을 보냈다.

이 시기 Cardinals 감독이었던 Joe Torre는 Bernard Gilkey-Ray Lankford-Brian Jordan의 자체생산 외야수 3명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 중 Jordan의 출장기회에 있어서 상당히 인색한 면을 보였다. 풋볼과 야구를 병행하던 Jordan은 타자로써 ML에서 롱런하기 위한 Plate Discipline이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배트 스피드로 Fastball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쳐냈으며, 웬만한 빠른 공에는 눌리지 않는 큰 장점이 있었다. 1993년~1994년 그는 각각 1.0과 1.1의 WAR를 기록하며 벤치에서 충분히 제 역할을 해냈으나,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에 온지라 1994시즌이 끝났을 때 이미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훗날 Jordan은 "이 시절 경기 출장 기회가 적다보니까 매 경기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정말 몸을 사리지 않고 뛰었다" 고 말했다. 뼛속까지 밴 그의 Football Mentality는 그가 웬만한 잔부상은 그냥 참고 뛰도록 만들었고, Jordan은 타구가 날아오면 마치 그 공이 상대 러닝백이나 리시버인 마냥 냅다 달려가 몸을 던졌다. 그리고 그러한 자세로 외야 전 포지션을 모두 소화해냈다.


제스처를 보아하니 그랜드슬램이 터진 것 같은데...이 경기의 날짜를 맞춰보실분?



1995년: 주전 발탁

1995년 4월26일, 느즈막히 열린 개막전에서 Brian Jordan은 주전 우익수로 선발 출장, 첫 타석부터 Curt Schilling을 (이 양반 정말 자주 나온다!) 상대로 적시타를 치며 첫 시즌을 상큼하게 시작했고, 이 경기에서 투런홈런 포함 2안타 3타점으로 팀의 승리를 이끌며 주전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시즌 중 Torre가 경질되고 새로 Mike Jorgensen이 부임하면서 Jordan의 입지는 더욱 굳어져갔다. Jorgensen은 "BJ는 그가 이미 최고 수준의 리그에서 플레이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면서 그를 Lankford와 Gilkey 앞에 3번타자로 투입하는 신뢰를 보였고, Jordan는 자신의 첫 풀시즌에서 525PA에서 22홈런 81타점 24도루, .296/.339/.488에 WAR 4.5를 기록하는 굉장히 훌륭한 시즌을 보냈다.

Jordan의 공/수/주 모든 면에서 경기의 흐름을 바꿀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Lankford가 먼저 자리를 잡았기에 우익수를 맡았을 뿐, 다른 팀이었다면 충분히 CF로 통했을 Range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탁월한 센스와 순발력으로 도루 성공률도 높았다. 7월 25일 Mets전, 1회에 솔로 홈런, 3회에 투런을 친 Jordan은 연장 11회말 1사 1,2루에서 끝내기 안타를 치며 사실상 혼자 힘으로 팀의 8:7 승리를 이끌었는데 (이 경기 WPA+ .609), 이는 2012시즌 초 (결과가 달라서 그렇지) Braves 전에서 혼자 북치고 장구친 현 Cardinals 우익수 (공교롭게도 둘 다 백넘버 3번이다) 가 생각나는 기록이다. 

"I feel like this is really my rookie season. They're finally letting me play all the time. I know they expected Lankford to do it, but they didn't really know what to expect from me."

-Brian Jordan, on becoming a full-time player


1995시즌이 끝남은 곧 Jordan이 1991년에 맺은 3년간 2.4M의 Baseball-Exclusive 계약이 만료됨을 의미했다. 28세의 Jordan은  충분히 이 때도 NFL로 돌아갈 수 있었고, 실제로 그를 다시 NFL로 부르는 구단들도 있었다. 그러나 1995년 말, Cardinals는 Jordan에게 3년간 9M 과 500K의 사이닝 보너스가 추가된 계약을 안겨주면서 다시 그를 야구에 붙들어놓았다.

1996년: Mr. Clutch

TLR 부임 첫 해, Gilkey가 Mets로 트레이드되고 베테랑 Gant가 합류하면서 Ron Gant-Ray Lankford-Brian Jordan의 제1대 '간지외야' 가 탄생했다. 이 해 팀 멤버가 많이 바뀌면서 타순을 어떻게 짤까 고민하던, TLR은 뛰어난 운동능력과 빠른 발을 갖고 있는 Brian Jordan을 Leadoff로 쓸 생각을 했다. 이에 5월말, 6월초에 이르러 Jordan로  Leadoff로 투입하는 실험을 11경기에 걸쳐 진행했는데, Jordan은 1번타자로 나서서는 45타수 10안타 .222/.260/.311의 굉장히 저조한 성적을 냈다. 이에 Jordan은 TLR에게 자신은 Leadoff 타입이 아니라며 이 실험을 그만하자고 말렸고 (그도 그럴 것이, Jordan의 통산 BB%은 6.3에 불과하며, 첫 풀타임이였던 1995년에는 고작 4.2%에 그칠만큼 볼넷을 고르는데 흥미가 없었다), 자신은 무조건 타점을 올릴 수 있는 타순에서 뛰고 싶다고 얘기했다.

결국 Jordan은 시즌 내내 중심타선에서 활약하게 되었는데, 이 시즌을 기점으로 Jordan은 "Mr. Clutch"로 불리며 TLR에게 보란듯이 타점을 쓸어담기 시작했다. 이 시즌 Brian Jordan의 득점권 성적은 다음과 같은데, 우리가 그토록 칭찬했던 2012시즌 Allen Craig의 득점권 성적도 Jordan에 비하면 남루해보일 지경이다. (특히 맨 밑에 만루 성적에 주목하시길;)

Brian Jordan in RISP (1996)

Split G PA AB H 2B 3B HR RBI SB CS BB SO BA OBP SLG OPS TB
RISP 104 173 147 62 11 0 10 93 11 1 13 19 .422 .453 .701 1.154 103
--- 128 303 287 76 22 1 6 6 0 0 12 45 .265 .304 .411 .715 118
Men On 120 257 226 83 14 0 11 98 22 5 17 39 .367 .404 .575 .979 130
123 25 24 19 13 5 0 1 31 0 0 1 1 .684 .625 1.105 1.73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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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rdan은 시즌 초 Wrist Soreness로 첫 2주를 결장한 이후에는 거의 전경기를 소화하며 140경기에서 17홈런 104타점 .310/.349/.483의 성적을 기록하며 팀의 Playoff 진출에 큰 공헌을 했고, 이를 인정받아 MVP 투표에서도 8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Jeff Bagwell보다 높은 순위, WAR은 5.2였다) 당시 Jordan은 득점권에서는 "내 뒤엔 아무도 없다" 는 식으로 파워업, 굉장한 집중력으로 어떻게든 주자를 불러들이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으며, 볼넷을 골라나가나는 데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RISP에서 그가 가진 173PA 중 볼넷은 단 13번이었는데, 그 중 고의사구가 4개였다. Jordan은 "넌 피해라 난 칠테다" 식의 진정한 타점 오타쿠였다.

플레이오프에서도 Jordan의 활약은 훌륭했다. 하이라이트는 1996년 NLDS 3차전. 9회초 5:5 로 맞선 상황에서 상대 클로저 Trevor Hoffman이 던진 슬라이더가 밋밋하게 몰리자 Jordan은 이를 그대로 좌측 담장으로 넘겨버리는 투런홈런으로 7:5 승리를 가져온다. (이 홈런은 Hoffman의 Cardinals 상대 흑역사의 일부분일 뿐이다ㅎㅎ). 

``I wasn't comfortable and happy and I let that affect my game. Whether it's hitting third, fourth or fifth makes no difference to me. As long as I'm going to have an opportunity to drive in runs, I'm going to be comfortable.''

-Brian Jordan, on his return to 4th spot



1997년: 부상

96시즌의 활약으로 Jordan은 Fan-Favorite 위치에 올라섰다. 미친듯한 타점본능과 굉장한 도루능력도 그랬지만, 몸을 전혀 사리지 않으며 이 펜스 저 펜스에 온몸을 던지는 그의 허슬은 어떤 야구팬들도 미워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Jordan의 바로 옆 자리에서 뛰던 중견수 Ray Lankford가 "그렇게 하다간 몸이 남아나지 않는다"며 "You can't keep running into those walls"라고 경고하기도 했었으나, 풋볼 멘탈리티로 무장된 Jordan에게는 동물적인 반사신경이 우선이었다.

1997년 5월 첫째주, Jordan은 스프링 트레이닝부터 자신을 괴롭혀왔던 Low-back 문제로 결국 DL에 오르고, Herniated Disc (추간판 탈출증으로 일종의 허리디스크가 아닐까 싶다), 6월 중순까지 약 6주를 결장한다. 복귀 후에도 2주만에 다시 통증을 호소, 또 DL로 올라가며 1997시즌을 사실상 망쳐버렸다. 허리가 받쳐주질 못하니 그의 장타율은 0.269로 급락했고, 스윙은 무너질대로 무너져서 161PA에서 .234/.311/.269에 그쳤다. Jordan의 공백은 John Mabry와 Willie McGee가 돌려가며 막았다.

맥과이어와 그의 조연들




1998년: 커리어 하이

St. Louis에서의 마지막 시즌. 허리 부상에서 돌아온 Jordan은 5월 한달간 무려 .424의 타율을 기록하면서 커리어 하이 및 FA 대박을 향해 힘찬 스타트를 끊었으나, 언론의 관심사는 오로지 McGwire의 홈런 레이스 뿐이었다.  그의 타율이 6월 중순 한때 .343에 이르며 NL 리딩히터 타이틀의 강력한 후보로 부상했을 때에도 경기 후 Jordan에게 오는 기자는 한 두명에 불과했으며, 그마저도 팀 동료의 신기록 페이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이에 McGwire는 Jordan의 재능과 그의 1998시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He is a great, great player. He's better than Bo Jackson. He's a two-sport player. He was an All-Pro. He's leading the league in hitting. He's in his free-agent year. There are so many things to talk about with him, and I've seen maybe one thing written about him this year.........................He's just learning how to play the game. He's been playing on raw talent. It's scary to think what he can do when he really understands the game.

-Mark McGwire, on Brian Jordan and his superstardom (1998)



이 신기록 드라마에 Ray Lankford와 함께 조연으로 출연하기로 한 Jordan은 Lankford와 함께 이 역할을 사이좋게 나누었다. Lankford가 4번을 칠 때는 Jordan은 보통 2번 타순에서 McGwire 앞에 주자를 안내보내려던 투수들을 심히 응징했고, 그가 4번을 칠 때는 마음놓고 타점 찬스를 즐겼다. Lankford가 전반기보단 후반기에 McGwire의 크게 도왔던 반면, Jordan은 전반기에 무려 .339/.385/.576의 공포스런 성적과 함께 15홈런 56타점을 기록하며 McGwire의 전반기 홈런 쌓기에 크게 일조했다. 비록 7~8월에 월간 타율이 2할대에 머물며 결국 타격왕과는 거리가 먼 성적에 그쳤으나, FA 계약을 따내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성적이었다. (WAR 6.8, 25홈런 91타점 17도루, .316/.368/.534)


Braves로 이적

FA를 앞두고 Jordan은 풋볼로 복귀할 의사가 있음을 언론에서 밝혔는데, 이에 Cardinals 측에서는 "이건 그냥 협상용 뻥카"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Jordan은 1991년 야구에 집중하기로 한 후에도 꾸준히 풋볼에 대한 사랑을 밝혀왔고, St. Louis에 있는 동안에는 St. Louis Rams 풋볼팀을 찾아가 트레이닝을 지켜보기도 하고, 팀이 원정을 떠났을 때는 시간이 날때마다 그 도시에 있는 풋볼팀에 찾아가 구경을 하고 옛 동료들과 조우하곤 했다.  또한 자신의 풋볼 백그라운드를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시즌이 끝난 후 "NFL팀을 물색해볼 생각이 있다" 고 공언했다.

전 정말 풋볼이 좋은걸요?


어차피 드래프트에서 J.D. Drew라는 완성형 대졸 외야수를 뽑아놓은 Cardinals 입장에서는 부상 위험을 안고 있으며 Club-friendly 계약을 맺을 생각이 전혀 없는 Brian Jordan을 굳이 애써가며 붙잡을 이유가 없었다. Jordan은 St. Louis에서의 생활을 즐겼으며, Cardinals 팬들 사이에서 인기도 많았으나, 프로 운동선수로써 큰 계약을 따내고 싶은 의지가 더더욱 강했다. 오프시즌, Jordan은 Orioles와 Braves 두 팀을 놓고 저울질을 했다. Orioles는 자신의 고향 Baltimore 연고팀이었고, 외야수를 보강할 생각이 있는 팀이었으나, 더 강한 어필은 Atlanta Braves로부터 왔다. Atlanta는 대학에서 만난 아내 Pam Jordan (All-conference Team 에 선정된 농구선수이다) 의 고향이었으며, 현재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는 도시였다. 게다가 Jordan은 자신의 커리어 초창기를 Atlanta Falcons에서 보냈기에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Braves 단장이던 John Schuerholz는 처음부터 Jordan을 타겟으로 생각하고 자리를 만들기 위해 Denny Neagle과 Michael Tucker를 묶어서 Bret Boone과 바꾸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그리고 11월 23일, Jordan은 마치 처음부터 원했던 것처럼 Braves과 5년간 40M의 계약을 체결하고 Braves 유니폼을 입는다. 드래프트 때 Jordan을 놓쳤던 Orioles는 Jordan에 관심이 있었으나 Braves가 선수를 치자 곧장 대어 Albert Belle을 질러버리고 만다. 이 당시 Braves 못잖게 Jordan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Mets였는데, 그들은 5년 35M 수준의 선에서 더 이상의 오퍼는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Mets는 이후 Jordan에게 크게 데이게 된다.


1999-2001년: Braves 시절

Braves로 옮긴 첫 시즌 Jordan은 전반기에만 무려 17홈런 71타점을 올리며 팀 공격을 거의 혼자 이끌다시피 했으나, 후반기에 타오르던 방망이가 급격히 식어버렸다. 여전히 그는 득점권에서 무서운 타자였고 (득점권 .316) 붙박이 4번을 치기에 적격이었으나, 나이로 인해 그의 좌투수 상대 장타력과 우투수 상대 장타력은 조금씩 차이가 나고 있었다 (커리어 초기 Jordan의 좌우 스플릿은 상당히 균등한 편이었다). 

비록 후반기에 6홈런을 추가하는 데 그치긴 했으나 Jordan의 방망이는 다시 플레이오프에서 타올랐다. 1999년 Astros와의 NLDS 2차전에서는 결승 희생플라이를 치며 Millwood의 완투승을 도와줬고, 3차전에서 Jordan은 6회초 당시 리그 최고의 좌완투수 반열에 올라있던 Mike Hampton을 상대로 역전 쓰리런을 후리며 4경기에서 1홈런 7타점을 기록해 Braves 팬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Mets와의 NLCS에서도 Kenny Rogers 상대로 결승 투런을 치며 2차전 승리에 크게 일조했으며, 4차전에서는 7회까지 흑마술같은 피칭으로 1:0 완봉을 할 기세이던 Mets 선발 Rick Reed를 상대로 동점홈런을 때렸다 (이어서 Klesko의 Back-to-back으로 역전, 그러나 John Rocker가 불지르면서 패배. 이 NLCS도 정말 재미있었다.)

2000시즌 Jordan은 시즌 내내 허리통증을 안고 싸웠으며, 통증을 줄이기 위해 타격 메카닉과 스탠스에 손을 댔다가 오히려 결과를 악화시키며 실망스러운 성적을 냈다. 17홈런 71타점을 뽑아내긴 했으나 우투수 상대 타율이 0.223에 그치는 등 전체적으로 Braves가 기대했던 모습은 아니었고, 슬래시라인도 .264/.320/.421로 풀타임 외야수가 된 이후 가장 안좋았다. 

2001년 Jordan은 다시 St.Louis 시절로 수정했고 제대로 반등했다 (25홈런 97타점 .295/.334/.496). A. Jones와 C. Jones 사이에서 그는 절대 꿀리지 않는 성적을 냈고, 오히려 Andruw Jones보다 많은 어시스트를 기록하는 작은 위업을 이뤄냈다. 또한 그는 약해진 무릎 때문에 도루를 많이 시도하지는 않았으나, 후속타시 Extra Base를 따낼 확률에서는 71.2%로 NL 1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넘어서, Jordan은 96시즌부터 이어져 온 그의 "클러치" 모드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Rise up to the occasion, Mr. Jordan


9월 23일, 2경기차로 추격중이던 Mets와의 경기. 한때 13경기까지 벌어졌던 차이를 엄청나게 줄인 Mets는 홈에서 벌어진 시즌 막판 Braves와의 3연전을 스윕하기 위해 에이스 Al Leiter를 냈다. Leiter는 8회까지 Braves 타선을 3안타 8K 1실점으로 막았다 (Braves 선발 Glavine) 그리고 4:1로 뒤지던 9회초 Mets 마무리 Benitez가 올라왔는데, 2사 1루에서 Brian Jordan이 보란듯이 투런을 작렬하면서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갔고, 이어서 B.J. Surhoff의 극적인 동점 적시타로 경기가 연장에 접어들었다. 연장 11회 선두타자로 들어선 Jordan이 또 솔로홈런을 치면서 Braves의 5:4 승리. Mets는 이 경기에서의 패배로부터 회복하지 못했다.

6일 후, 이기면 Braves가 10년 연속 지구 우승을 결정짓는 경기가 또 Mets 상대로 벌어졌다. 또 이 경기에서 Mets는 Leiter의 호투에 힘입어 5:1의 리드를 안았고, 9회에 Benitez를 또 투입했다. Benitez는 결국 Marcus Giles에게 2타점 2루타를 허용하면서 멀쩡하던 경기를 드라마로 만들었고, 2사 2,3루에서 마운드를 John Franco에게 넘겼다. Franco는 Wes Helms를 거르고 이 날 4타수 무안타이던 Jordan을 상대했다. 결과는 끝내기 만루홈런, Braves 8:5 승리, 10년 연속 지구 우승 확정. 이 다음 날 Jordan은 또 쓰리런 홈런을 쳤다. 


1999-2001년 3년간 Brian Jordan은 Braves의 중심타선에서 10.3의 WAR를 기록했는데, 같은 기간동안 그의 후계자인 Drew가 Cardinals에서 12.5의 WAR를 찍은 걸 생각하면 (Cards 입장에서는) 수지타산이 맞는 성공적인 세대교체였다. 데뷔가 늦었던 Jordan은 1998년 St. Louis에서의 임기(?) 가 끝났을 때 이미 만 서른 하나의 나이였고, 그가 96년과 98년에 보여준 공격력은 이제부터 조금씩 내리막을 걷는다고 봐야했었다. Jordan은 지역 사회에서의 왕성한 자선활동과 특유의 클러치능력, 그리고 플레이오프에서의 좋은 활약으로 지역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성공적인 시간을 보냈으며, Braves 입장에서도 3년을 잘 써먹고 Dodgers로 보냈으니 결코 나쁜 FA 계약은 아니었다.


Talent-wise, he's a Gold Glove outfielder and a great player. But he plays so hard he abuses himself. To get to that echelon of the top guys in baseball, you have to play 140 games a year. He beats himself up. When he's out there, he puts on a show, but for him to take his place among the elites, he will have to generate enough games."

-Tony La Russa, on Brian Jordan





총평

비록 Bill James가 한때 "Most Inconsistent Player of all-time"으로 뽑긴 했으나, Jordan은 풀타임 주전으로 발탁된 95년부터 2002년까지 단 한 시즌 (폭망했던 1997시즌)을 제외하고는 소속팀을 위해 매해 최소 128경기 515PA 이상을 뛰었으며, 4차례의 90타점 이상 시즌과 6차례의 타율 .280 이상 시즌을 제공했다. 95~2002년까지 Jordan은 8시즌에 걸쳐 30.8의 WAR를 적립했는데, 이는 같은 기간동안 NL에서 15위에 해당하는 수치이며, Barry Larkin과 거의 같은 수준이다. Jordan은 대학 졸업 후 풋볼과 야구를 병행한 기간이 길었기에 드래프트 후 7년만인 1995년 (만 28세)이 되서야 주전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만약 조금 더 일찍 자리를 잡았다면 더욱 화려한 커리어를 보낼 수 있는 재능이 있던 선수였다. Greg Maddux와 Tony Gwynn이 야구를 예술처럼 하는 법을 보여주었다면, Brian Jordan 같은 선수들은 야구의 가장 야성적인 면을 드러냈던 선수들로 기억이 된다. 

Jordan의 최대 약점인 동시에 최대 매력은 공수에서 모두 볼 수 있었던 풋볼 선수 특유의 Aggressiveness 였다. 수비에서 그는 Edmonds 못지않게 멋진 장면들을 많이 연출해냈으며, 엄청나게 뛰어다니면서 몸을 던져 벽에 충돌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또한 그는 "풋볼에서 그렇듯, 내가 몸을 사리기 시작하면 더욱 다칠 것" 이라고 얘기했다 (Jordan은 풋볼 대신 야구를 선택한 결정은 후회하지 않지만, 매 경기 사이의 회복시간이 짧은 야구가 풋볼보다 부상 당하기 더욱 쉬운 종목인 것 같다고 회고했다.)  또한 타석에서도 그는 1995~1999년까지 2000타석 이상 출장한 선수들 중 5번째로 안좋은 BB% (6.3)을 기록할만큼 (1위 Mark Grudzielanek) 극악의 참을성을 보였는데, 본인 또한 이 문제를 알고 있었다.

"There is so much to learn and I am trying to pick up on things. The one thing I haven't learned is patience. I have almost 200 at-bats and I have only five walks. If I took some walks, I could be hitting .400 right now, but I swing at a lot of bad pitches."

-Brian Jordan, on his plate discipline


그러나 Jordan은 자신의 타격 어프로치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것보다 자신의 강점을 최대한 살리는 데 주력했으며, 이 전략은 그대로 먹혔다. 이에 Jordan은 2001년까지 리그에서 가장 Fastball을 잘 치는 타자 중 하나로 꼽혔으며, 초구 공략도 몹시 즐겼다. 또한 몸쪽으로 들어오는 빠른 공들을 빠른 배트스피드로 응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며, 나이를 먹어서도 수비와 주루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고 클럽하우스에서 리더 역할도 발벗고 나섰다 (물론 Cardinals 시절에는 McGwire와 Lankford 앞에서 대장 노릇을 할 순 없었다. 그의 Veteran Leadership은 Braves와 Dodgers에서 크게 가치를 인정받았다.) 

Jordan은 2004년 Rangers와의 계약이 끝난 뒤 2005년과 2006년 Braves로 돌아와서 두 시즌을 더 백업멤버로 뛰고 은퇴했으며, 개인적인 소망이라고 누누히 밝혔던 200홈런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184홈런). NFL와 MLB 에서 모두 올스타에 선정된, 생각해보면 굉장히 대단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그는, 이 두 차례 올스타를 모두 Atlanta 팀 소속으로 했으며 현재 Atlanta에서 Brian Jordan Foundation 이라는 자선기금(주로 아동 교육과 소아복지를 위한) 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Braves 경기 Pre-game Analyst로 활약하고 있으며, Braves AAA팀 중계까지 하고 있다고 하는데, 커리어의 절반인 7시즌을 Cardinals에서 보내고 5시즌만을 Braves로 (게다가 중간에 트레이드까지 한) 보냈음을 생각하면 조금 서운하기도 하다. 


When I hit one, the first thing I feel is relief. Then, I circle the bases, I feel on the top of the world, I've conquered that pitching, I am the king.

-Brian Jordan, on hitting home runs



by Doo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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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ovy

Revisiting TLR ERA [1] Ray Lankford

Revisiting TLR ERA [2] Edgar Renteria

Revisiting TLR ERA [3] Matt Morris

Revisiting TLR ERA [4] Steve Kline

Revisiting TLR ERA [5] J.D. Drew - Part I




2001년: 비상

Drew의 포텐셜이 가장 잘 반영되었던 시즌. 5월 한 달간 10홈런 26타점 .366/.443/.762를 기록한 Drew는 MVP 페이스로 홈런과 타점을 쓸어담았다. 그러나 6월 17일 벌어진 White Sox와의 3연전 마지막 경기 (Bud Smith vs. David Wells) 에서 Drew는 David Wells의 패스트볼에 손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Broken Hand로 DL에 오른다 (전날 쓰리런 홈런을 쳤던 그였기에 더욱 아쉬웠다). 결국 그 경기는 Drew의 전반기 마지막 경기가 되어 버렸다 (전반기 성적 64경기 21홈런 49타점 .330/.426/.688).

7월 31일이 되서야 간신히 복귀한 Drew는 복귀 첫 경기에서 4타수 2안타(3루타) 2득점을 기록하면서 다시 페이스를 끌어올렸으나, 일주일만에 다시 "Lower Back Sprain"으로 DL에 오르면서 또 2주를 결장한다. 8월 20일~21일, 부상에서 복귀하고 난 첫 2경기에서 모두 홈런을 친 Drew는 그러나 이후 꾸준히 장타 페이스가 떨어지면서 결국 27홈런 73타점 .323/.414/.613에 OPS 1.027로 시즌을 마감했다. 이 시즌은 Drew는 데뷔 초 TLR이 "얘는 3할에 40홈런을 칠 수 있는 애다" 라고 평가한 자신의 재능을 그대로 드러냈고, 특히 웨이트로 몸을 불리면서 장타력이 급상승, 무려 .291의 ISO를 찍어냈다. 또한 지난 2시즌간의 경험으로 투수들과의 카운트 싸움에서도 치기 싫은 공은 커트해내는 노련미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좌투수 상대로 성급했던 모습도 많이 줄이면서 .289의 준수한 좌투수 상대 타율을 기록했다. 특히 그는 볼카운트 3-1에서의 타율이 .778에 이르렀는데, 이는 ML 전체에서 1위였다. 
 
Drew는 이 해 108경기 443PA만에 NL 16위에 해당하는 WAR 5.9를 기록했는데, 풀 시즌을 치렀다면 8~9 사이의 WAR를 기록할 페이스였다. 만약 풀시즌을 소화했다면 아마도 당시 57홈런 142타점의 Luis Gonzalez (WAR 9.4, 3위) 와 Larry Walker (38홈런 123타점 WAR 8.0) 사이에 충분히 끼지 않았을까 싶다 (wRC+ 162 (6위) ISO .291 (8위))




2002-2003년: 부상

2002년은 Drew의 커리어에서 가장 초라한 시즌 중 하나였는데, 나름 135경기 496PA로 꽤나 많은 타석을 견뎌내면서 (Drew의 Cardinals 시절 6년간 가장 많은 PA) 역대 최악의 K% (21%, Drew의 커리어 평균은 18.5%)를 기록하면서 BB%는 11.5%에 그쳤고 (커리어 평균은 14%), OPS는 오랜만에 다시 7할대로 복귀했다 (.252/.349/.429).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장타율의 급격한 하락이었는데, 이미 2001년에 Drew가 건강하다면 어떤 걸 해낼 수 있는지 본 팬들에게는 상당히 실망스런 시즌이었다. 장타력 하락의 큰 원인은 Drew가 2002시즌 내내 싸워야했던 무릎 부상 (Patellar Tendonitis)으로, 시즌 종료 후 Drew는 무릎 수술을 받아야했다. 이 시즌 그는 도루 시도도 10번에 그쳤고, 424타수에서 고작 19개의 2루타밖에 생산해내지 못하는 실망스런 모습을 보였다. Arbitration Eligibility가 생기게 되는 시점부터 Drew의 고질적 무릎 부상이 생겼으니, Cardinals 입장에서도 이제 3.1M을 받고 1.9의 WAR를 찍어낸 Drew를 계속 기다려줄 여유가 없었다.

2003년은 2002년에 비해 조금 나았으나 실망스러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오프시즌에 받은 무릎 수술로 시즌 첫 5주를 놓친 Drew는 5월에 팀에 합류했으나 결국 다시 8월에 Oblique 부상으로 풀타임 5년만에 6번째 DL행을 맞는다. 이 시즌에도 Drew는 고작 100경기 출장 (70경기 선발) 에 그쳤는데, 단순히 TLR의 Platoon 기용을 탓하기에는 Drew가 부상으로 놓친 기간이 너무 길었다. 물론 이 와중에도 Drew는 이 시즌 타석에서 한층 더 성장했다는 평을 들었는데, 특히 몸쪽으로 파고 드는 공에 대한 대처가 크게 좋아지고 (추신수가 치는 좌중간 2루타 타구를 생각하시면 될 듯 하다) Breaking stuff에 대한 참을성과 대처력이 개선되었다는 평을 받으며 .289/.374/.512의 여전히 훌륭한 슬래시라인을 찍었다. 무릎 수술 이후로 Drew는 더 이상 누상에서의 큰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물론 Drew의 탁월한 운동신경은 그를 여전히 좋은 주자로 만들었지만, 이제 그에게 누구도 30-30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이미 이 시즌에 이 3.7M짜리 외야수를 두고 구단 측에서는 어느 정도 인내심이 다했으며, 좀 되나 싶으면 다양한 이유로 DL을 들락날락하고, 한 시즌 500 PA를 단 한번도 채워본 적이 없는 이 젊은 외야수를 둘러싸고 트레이드 루머가 무성하게 퍼졌다.
 

"We saw signs from him that made you say, 'This kid is unbelievable.' But teammates ultimately respect guys who go to the post the most. When something keeps happening that prevents you from going out there, they're not forgiving."

-Tony La Russa, on J.D. Drew's Injury-ridden career (2003)





Trade: Good News and Bad News

2003년 12월 13일, 고향인 Georgia에서 조용한 오프시즌을 보내던 Drew는 GM Walt Jocketty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I've got good news and bad news. The good news is, you're moving closer to home. The bad news is, we're trading you." 
Gary Sheffield가 빠진 외야를 지켜줄 수 있으며 중심타선을 맡아줄 수 있는 외야수를 구하던 Braves의 John Schuerholtz가 Drew를 낚아채간 것이었다.

(주인장님의 Jocketty 시리즈에서 곧 다루시겠지만 이 트레이드는 굉장한 성공이었다. Marquis는 Cardinals에 와서 3시즌간 거의 100경기에 등판하고 600이닝을 먹어주며 든든히 버텨주었다. Ray King 역시 Steve Kline의 부담을 덜어주며 TLR의 좌우놀이에 큰 도움을 주었고, Wainwright은 더 말할 것도 없다. Drew가 이후 Break-out Season이 있긴 했지만, 어차피 Franchise Player로 키우지 못할 것이었으며 Marrero 역시 충분히 대체할 수 있던 자원이었다. 이 트레이드의 평점은 Excellent??)

Drew는 트레이드 직후 충격애 빠졌었다. Rasmus와 다르게 Drew는 (믿거나 말거나) St. Louis에 큰 불만이 없었고, TLR과도 그렇게 나쁜 관계가 아니었다. 그러나 Cardinals 수뇌부에서는 Drew에 대한 인내심이 바닥이 났는데다가, 클럽하우스 내에서 Drew의 지나칠 정도로 "열정없어 보이는" 침착함과 건조함, 그리고 (보기에 따라서 부담스러울 수 있는) 신앙심은 인기가 없었다. 심지어 당시 Cards 소속이던 한 선수는 Drew가 트레이드되자 "Do we miss him? I don't think anyone really does." 라고 대답할 정도였다.

"It's funny when you hear about J.D.'s religious convictions as a negative. We're always reading about people who do wrong, be it drugs, crime, whatever. Then when someone comes along with convictions and character, he gets ripped. I think that's unfair. We're talking about a player who came up with great fanfare, has incredible tools, but whose career has been up and down. If anyone will be motivated and intense, I expect it'll be J.D. Drew."

-John Schuerholz, on acquiring J.D. Drew



2004년: 기다리던 Break-out 

그렇게나 고대하던 J.D. Drew의 Break-out 시즌은 고향팀 Braves에서 바로 터졌다. 무려 145경기 645PA (당연히 커리어 하이) 를 DL이나 잔부상 없이 치러낸 Drew의 풀 시즌은 훌륭했다. .305/.436/.569의 무서운 슬래시라인과 31홈런 93타점도 그랬지만, Drew는 어떤 방법으로든 출루를 해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무려 118개의 볼넷을 골라내며 리그 5위에 오른 그는 (BB 18.3%), 이 해 6월 10일부터 7월 27일까지 무려 41경기 연속 출루기록을 세웠고, 145경기 중 133경기에서 출루에 성공했다 (91%). 또한 무릎 부상에서 완연한 회복세를 보이며 8개의 3루타와 12개의 도루까지 기록했고, Sheffield보다 훨씬 나은 우익수 수비로 Braves 팬들의 환호를 받았다. 

Braves의 Bobby Cox는 (당초 5번타자로 영입했던) Drew를 가리켜 "the perfect No.3 hitter"라고 칭찬했는데, 지난 수 년간 Chipper Jones를 3번으로 써왔던 Cox가 이런 말을 할 정도였으니 알만하다. 이 시즌 Drew는 115경기에 3번타자로 출장하며 팀내 거의 모든 공격 카테고리에서 1위를 했고, 그가 기록한 8.9의 WAR는 ML 전체에서 4위, 162의 wRC+는 ML 전체에서 5위의 성적이었다. 당연히 MVP 투표에도 이름을 올렸다.

Dodgers 입단식에서 Drew와 그의 아내 Sheigh, 그리고 Lasorda




2005-2006: Dodgers

오프 시즌에 Braves는 '홈보이' Drew를 잡고 싶어했다. 그도 그럴것이, DL에 한번도 들어가지 않은 Drew의 2004시즌은 공수에서 완벽했으며, 심지어 어떤 이들은 Drew가 Hank Aaron 이후 팀 역사상 최고의 외야수가 (굉장한 설레발이다 고작 한 시즌에...)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바람을 넣었다. 그러나 Braves는 Mike Hampton과 쌍존스 등 고액연봉자들을 여럿 거느리고 있던 팀 사정상 도저히 AAV 10M 이상은 올라갈 수가 없었고, 3년 25M의 오퍼에 그쳤다. 결국 Drew는 이 해 12월 23일, Dodgers와 5년간 55M짜리 계약을 맺고 서부로 건너간다. Dodgers는 당시 Randy Johnson을 중심으로 한 3각 10인 트레이드를 추진했으나, 이 딜이 파토가 난 후 바로 Drew와의 계약에 집중해 결국 딜을 따냈다.

2005시즌도 Drew는 건강하게 시작, 5월말을 기점으로 서서히 방망이가 뜨거워지더니 6월 한달간 .347/.466/.625를 치면서 페이스를 올렸다. 홈인 Dodger Stadium에서 0.331을 쳤고 중견수 알바도 자주 뛰면서 Dodgers 3번타자로 완전히 자리매김을 했다. 7월 초 D-Backs와의 3연전, Drew는 3연전 첫 2경기에서 7타수 4안타 3홈런을 쳤다. 그러나 세번째 경기에서 상대 선발 Brad Halsey의 패스트볼에 Wrist를 얻어맞았고,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2005시즌을 접어야했다. 72경기만에 WAR 2.8을 찍었으니 Drew가 그대로 풀시즌을 뛰었다면 충분히 WAR 5짜리 시즌은 만들었을 것이다.

2006시즌 그는 20홈런 100타점 .283/.393/.498의 준수한 성적을 올리고 Opt-out을 실행한다. 남은 3년 계약 기간을 깨고 다시 FA가 된 것. Dodgers 단장 Ned Colletti는 "분명 LA에서 행복하다고 했는데 이렇게 일이 진행되서 놀랍다" 고 유감을 표시했으며, Drew는 결국 2006시즌을 앞두고 Red Sox과 5년간 70M짜리 계약을 맺는다. 프로야구 선수인 Drew가 법적으로 전혀 문제 없는 수단을 통해서 새로운 팀을 찾아 떠난 것은 태클걸 여지가 없는 부분이지만, 불과 새로운 계약을 하기 며칠 전에 "나는 LA에서 행복하다" 라는 기사를 냈던 터라 그를 향한 시선은 결코 곱지가 않았다. 그리고 이 중심에는 다시 한 번 10년 전 그를 도왔던 Scott Boras가 있었다.

2007-2011: Red Sox

2006년 12월, J.D. Drew의 계약 건수를 앞두고 Boston Globe에서는 지면에 Drew의 계약에 대한 찬/반 Poll을 걸었다. 무려 81%의 독자들이 Drew의 계약을 반대했다. 그러나 Red Sox는 결국 Drew에게 70M짜리 계약을 안겼고, 팬들은 결코 이 무브를 지지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새로운 팀과 새로운 계약을 할때 푸대접받는 경우도 드물다.) 특히 필드에서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빠른 타구판단으로 다이빙 없이 수비하던 Drew의 모습은 Grit과 Hustle로 사랑받던 Red Sox의 전 외야수 Trot Nixon의 모습과 큰 대조를 이뤘다. 

Drew의 Red Sox 커리어는 짧게 얘기하자면 결코 이상적이진 않았으나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은 계약이었다. 2007년 그는 140경기에 출장하면서 고작 1.9의 WAR를 기록했는데, 커리어 로우나 다름없는 .152로 떨어진 ISO 탓이 컸다 (SLG .423, 최저수치). 이는 좌타자에게 인색한 Fenway Park의 여건과 처음으로 AL에서 뛰는 시즌이었다는 점에서 조금 정상참작을 할 수는 있겠으나, 연봉 14M을 받으면서 Replacement Level 의 생산성을 보였으니 욕을 먹을만한 시즌이었다.

Credit: Larry Johnson




데뷔 이후 줄곧 "Future All-Star"라는 마크를 달고 Scouting Report 페이지에 등장했던 Drew는 2008년, 데뷔 10년만에 처음으로 올스타에 선정되고 무려 올스타게임 MVP까지 수상하는데, Drew가 All-Star에 선정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David Ortiz였다. 이적 후 주로 6번에 머물던 Drew는 Ortiz가 부상당한 6월 한달간 4번에 Manny Ramirez를 업고 3번타자 자리로 복귀헀는데, 이 기간동안 12홈런 27타점 .337/.462/.848이라는 괴물급 성적을 냈고, 이 활약에 힘입어 올스타전까지 출장한 것이었다. Drew가 이 시즌 내내 친 홈런은 총 19개밖에 안되는데 그 중 12개가 6월에 3번타순에서 나왔는데 1) Manny를 업는 효과를 제대로 본 것인지 2) 아니면 3번 타순이 편한 것인지 3) 아니면 NL팀들과 많이 붙는 6월달에 스케줄 이득을 본것인지 여러가지 이유를 생각해보게 된다. 결국 이 시즌도 Drew는 8월부터 DL에 올라감으로써 109경기 456PA에 그쳤다.

2008~2009년 두 시즌간 Drew는 9.0의 WAR를 기록했는데, 이는 AL에서 12위에 해당하는 수치로, Mark Teixeira, Carl Crawford보다 높았다. 적어도 이 2시즌은 14M의 밥값을 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범위를 3시즌 (2008-10) 으로 넓혀봐도 (2010년 Drew는 OPS가 .793으로 떨어지면서 Down year를 보냈다) Drew가 기록한 11.4의 WAR는 Robinson Cano, Curtis Granderson보다 높은 수치이며 B.J Upton과 같았다. 2011년 Drew는 286타석에서 4홈런에 그친데다 부상과 부진이 겹치며 최악의 시즌을 보냈고, 그 시즌을 마지막으로 계약이 종료된 뒤 은퇴했다.


J.D. Drew as a Christian

Drew에 관해서 가장 널리 알려진 사실은 "엄청난 재능을 가졌으나 한번도 제대로 꽃피운 적이 없으며, 늘 잔부상을 달고 다녔던 선수" 라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만큼이나 Drew라는 선수를 되돌아보는데 있어서 중요한 부분은 그의 독실한 기독교 생활이다.

FSU 시절, 훗날 자신을 학교 명예의 전당에 헌액시킴과 동시에 "Player of the Century" 투표에 이름을 올리게 할 만큼 화려한 실력을 뽐냈던 Drew는 학교에 재학중이던 3년간 단 한 차례도 술, 마약, 담배, 섹스에 손을 댄 적이 없다고 고백한 바 있다. 많은 State University들이 그렇지만 FSU 역시 노는 걸로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학교인데, 이 학교를 다니면서 이 정도로 깨끗하게 살았다는 것은 대단한 의지나 신념이 아니고서는 힘든 일이다. Drew는 고등학교 때 그 흔한 Prom 에 간 적도 없고, 대학교 1학년 때 딱 한번 팀 선배들의 성화로 Club에 놀러갔었으나 "Miserable"한 시간을 보내고 45분만에 집에와서 성경을 읽고 기도한 뒤 잠을 청했다고 한다. Drew는 신앙심이 없는 여자는 만나고 싶지 않아했으며, 이에 25세 시즌이자 첫 Break-out campaign이었던 2001년 시즌이 끝나고 나서야 교회 Youth Leader (청년부 부장?) 의 딸 Sheigh를 만나 결혼했다. 

J.D. Drew와 그의 가족들



My friends really understand my beliefs, so they'll ask a girl lots of questions before they introduce her to me. It always ends up, 'Well, I'd like to set you up, but he'd never go out with you for these reasons.' In the Bible it says you shouldn't be with nonbelievers. Hopefully one day I'll find a good Christian girl.

-J.D. Drew, in his interview with SI (1998)



모든 일을 "예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던 Drew의 이러한 Attitude와 가치관은 필드 위에서도 그대로 반영이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홈런이나 삼진이나 다 같은 "Thy Lord's will" (주의 뜻) 이며, 자신은 그저 인간 야구선수이기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나아갈 뿐이라고 입버릇처럼 밝혔다. 그랬기에 그는 홈런을 치든 호수비를 하든 삼진을 당하든 거의 늘 같은 표정으로 일관했고, 이에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Drew를 오해하기 십상이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University of Maryland에 원정을 가서 여느 때처럼 그의 5-tool을 모조리 과시하며 FSU의 승리에 크게 일조한 Drew는 어느 선수들보다도 빨리 샤워를 끝내고 원정팀 라커를 비운 뒤 버스에 올라탔다. 이를 수상히 여긴 Mike Martin 감독이 버스에 올라타자 Drew는 고개를 떨구고 의자에 앉아있었다. Martin이 Drew에게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자 Drew는 이렇게 대답했다.

""Hi Coach. Thank-you. I was looking something up that I could not remember after the game today. I wanted to remember it. I found it though. It was about Joshua." 

그제서야 Martin은 Drew가 고개를 떨군 채 버스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음을 알아챘다.

"That sort of talk has come up before, and it really burns me. It's garbage. Yes, I love Jesus. But if you're a true believer, you're gonna be devoted to the ability God has given you. It's your obligation. Anything less than 100 percent is a repudiation of God's gifts. And I can promise you one thing—I give 100 percent.

-J.D. Drew on his reputation as a 'slacker' (2004)



아직도 많은 Sox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2007 ALCS 만루홈런




J.D. Drew in Postseason

Drew의 포스트시즌 커리어는 55경기 206PA 7홈런 25타점 .261/.333/.408  18BB 36SO로 그다지 특출날 것은 없는 성적이다. 다만 2000년대 초 Cardinals와 2000년대 후반 Red Sox같은 강팀에서 뛰었기에 꽤 많은 Playoff 경기를 치렀을 뿐이다. 그러나 표면 성적 이상으로 Drew는 중요한 홈런을 많이 쳤었는데 몇 개만 꼽아보자면 다음과 같다.

1) 2001년 NLDS 1차전 8회초 vs. D-Backs, 상대 선발 Curt Schilling의 공을 당겨서 어린 Drew가 동점을 만든다. 자주 언급했으므로 패스.

2) 2002년 NLDS 2차전 3회초 vs. D-Backs, 또 상대 선발은 Schilling. 개인적으로는 사실 이 홈런이 더 머리에 생생히 남아있는데, 설마 또 칠까 했는데 Schilling의 패스트볼을 그대로 밀어서 또 넘겨버린 Drew의 무서운 스윙이 기억에 남는다 (Drew는 커리어 내내 몸쪽 공에 굉장히 강한 면모를 보였다) 이 홈런 덕분에 Cardinals는 8회까지 리드를 잡았었고, 결국 9회초 Miguel Cairo의 안타로 결승점을 내고 2차전을 가져갔으며, 시리즈 스윕에 성공한다.

3) 2007년 ALCS 6차전 1회말 vs. Indians. 이 시리즈는 개인적으로 Indians가 올라가길 바라면서 정말 열심히 봤던 시리즈였는데, 5차전을 Indians가 패배했을 때 시리즈 전적은 3승 2패로 앞서고 있었는데도 마치 시리즈가 이미 끝난 듯 암울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6차전은 Fausto Carmona 대 Curt Schilling의 대결이었는데, Carmona가 무사 만루에서 Manny를 삼진처리하고 Mike Lowell을 얕은 플라이로 잡아내며 실점 없이 넘어가려는 순간 Drew가 만루홈런을 때려냈다. 이 홈런 한 방에 Fenway는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으며, 이 순간은 Drew는 이 시즌들어 가장 밥값을 제대로 한 순간이었다. 

4) 2008년 ALDS 2차전 9회 초 vs. Angels. 홈팀 Angels가 5:1의 리드를 차근차근 따라와서 8회 동점을 만들었기에 분위기는 Angels 쪽이 더 좋았다. 마운드에는 K-Rod. 그러나 이 당시 포스트시즌에서 Angels는 Red Sox만 만나면 (마치 Twins가 Yankees를 만나는 것처럼) 굉장히 약했고 9회 Drew가 결승 투런을 때리면서 7:5 승리. 9회말 Papelbon이 올라왔을 때 Angels는 이미 경기를 포기한 듯 보였다.





총평

Drew는 당초 Ken Griffey Jr. 프로젝션을 받으면서 드래프트에 입성했으며 (게다가 Drew가 입성한 시즌은 Griffey가 MVP를 탄 시즌이었다) 그와 플레이했던 감독과 동료들 중 그의 재능을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스윙이면 스윙, 주루면 주루, 그리고 그의 우익수 수비는 탁월했으며, 어디 하나 흠잡을데가 없었다. 그의 출루 능력은 특히 발군이었는데, 그가 2000년대 들어 기록한 10년간의 출루율 (.396)은 전체에서 16위로, Carlos Delgado나 Gary Sheffield보다도 높았다. 

또한 "게으른 천재" 라는 오명 역시 조금 깊숙히 들여다봐야 하는데, (3 Nights in August에서 TLR이 Drew가 왜 100% 를 쏟아붓지 않고 75% 정도만 하고 마는지에 대해 열통터져 하던 부분 때문에 유난히 확대 해석이 되었다) 커리어 내내 Drew는 자신의 약점을 고치려는 모습을 보이고 진지한 노력을 했으며, 늘상 "하늘이 내게 주신 재능을 이용해 최선을 다해서 플레이하는 것이 나의 사명" 이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하며 종교적 이유로 자신의 노력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곤 했다. Drew는 또한 탁월한 타구 판단력으로 어느 구장에 가든 어려운 타구들을 힘들이지 않고 잡아내는 Beltran식 외야수비를 펼쳤고 (특히 Fenway의 넓은 우측 외야에서 Drew의 수비는 발군이었으나, 많은 Sox 팬들이 그가 다이빙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과소평가했다), 강하고 정확한 어깨를 커리어 후반까지 유지했다. 

Drew의 부상 이력이 화려한 건 사실이며, 잘 나가던 시즌을 꼭 부상으로 망쳐버린 경력이 (2001년, 2005년, 2008년) 한두번이 아닌 Drew였기에 팬들에게 "유리몸"으로 각인된 것은 사실이다. Drew는 부상으로 얼마나 많은 경기를 놓쳤으며 얼마나 부상을 당했을까?

1999/05/16 - Quad Strain (DL)
2000/07/08 - Ankle Sprain (DL)
2001/06/18 - Right Hand Fracture (DL)
2002/06/28 - Right Knee Inflammation (DL)
2002/10/17 - Right Knee Surgery (Patellar Tendon Debridement)
2003/01/31 - Left Foot Cyst Surgery
2003/03/30 - Surgery Recovery (DL)
2003/08/09 - Oblique Strain (DL)
2005/07/04 - Left Wrist Fracture Surgery (Ulnar Styloid Process) (60-day DL)
2008/08/18 - Herniated Disc Cartilage (DL)
2009/11/19 - Shoulder Surgery
2011/02/06 - Hamstring Tendonisis Surgery
2011/07/20 - Shoulder Impingement (60-day DL)

  • 2000년대 (2000시즌~2009시즌) 에 Drew는 4850의 PA를 기록했다. 이는 ML 전체에서 이 기간동안 62위에 해당하며, 외야수들 중에서는 30위이다. 놀랍게도 Jim Edmonds, Jason Varitek, Carl Crawford 등 Drew보다 더 뛰었을 것 같은 선수들이 Drew보다 낮은 순위에 랭크되어 있다. 물론 Edmonds는 2009시즌을 뛰지 않았고, Varitek은 포수였기에 직접적인 비교는 의미가 없다. 또한 10년간 평균치가 연평균 122게임 485PA라는 것은 어디가서 자랑할 수준은 되지 못하며, Drew가 Durability 에 관한 질타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이긴 하다. 그러나 Drew가 당한 부상 빈도수에 비하면 생각보다 많은 경기를 뛰었다는 생각도 든다. 

From a straight objective standpoint, what he contributes offensively and what he contributes defensively, and add in baserunning, so it’s the total value of the player, on a rate basis he was outstanding, and there aren’t too many outfielders who compare to what he did.

                                                                                    -Theo Epstein on J.D. Drew (2009)


  • Red Sox 팬들은 Drew가 툭하면 잔부상으로 경기를 안뛴다고 믿었으며, 그가 충분히 참고 출장할 수 있는 수준의 부상인데 몸을 사리기에 출장경기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위 Injury Transaction History를 보시면 아시다시피, Drew가 부상으로 가장 고생했던 시절은 Cardinals 시절로, 99-2003년까지 5년간 6차례 DL에 가면서 평균 440PA에 그쳤다. 
  • 2000년대 (2000시즌~2009시즌) 에 Drew는 41.6의 WAR를 기록했는데, 이는 Manny Ramirez의 41.4보다 높은 순위로, 외야수들 가운데 Vladimir Guerrero-Jim Edmonds-Brian Giles에 이어 11위를 기록하고 있다. 물론 10년간 Ramirez의 Offensive Production에 비해서 Drew가 보여준 성적은 귀여운 수준이었으나, 수비와 주루를 포함했을 때 Drew의 가치는 무시받을 수준이 결코 아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또한 wRC+ 순위에서도 Magglio Ordonez, Brian Giles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며 (135) Edmonds (140)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
Drew의 커리어는 결코 후지지 않았다. 다만 그는 사람들이 그를 야구선수로 좋아하는 것에 대해 어쩌면 지나치리만큼 무신경했다. 그는 신이 주신 재능을 발판으로 야구라는 직업을 우직히 수행하는 것만을 생각했으며, 거만한 슈퍼스타라기보단 겸손하고 온화하며 내성적인 선수였으며, Humility의 아이콘이었다. 부상이 없었다면 그는 더 화려한 기록을 세울 수 있었고, 끝내 Ken Griffey Jr. 라기보단 Cliff Floyd에 가까운 커리어를 보냈다. Core Player로 성장할 것이라는 구단의 기대와는 달리 일종의 계륵/미운오리로 전락했기에 TLR 시대와 Cardinals Organization 관점에서 본다면 아쉬움이 더 많지만, 90년대말~2000년대초 Cardinals에서 그의 20대를 모두 바칠 당시 그가 필드에서 보여준 모습이 개인적으로 그리운 것도 사실이다. (여담이지만 당시 High Heat Baseball을 열심히 하던 시절 필자는 늘 Drew를 3번으로 썼었다 ㅎㅎㅎ).


Did you know...?
  • J.D. Drew는 2008년 Fenway에서 무려 500피트짜리 홈런을 쏘아올렸는데, 이는 Fenway Park 개장 역사상 2번째로 나온 500피트 짜리이며 비거리 역대 2위이다. 
  • FSU 시절 Drew는 라커에 "You are not a great player until you learn how to bunt" 라는 Mike Martin 감독의 말을 종이에 써서 붙여놨다고 한다. 
  • 현재 Drew는 은퇴해서 자기가 나고 자란 Georgia의 한 농장에서 5마일 떨어져있는 인근에 큰 농장을 짓고 사냥과 낚시, 교회 일을 보며 가족들과 평화롭게 지내고 있다고 한다.



by Doo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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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ovy

Revisiting TLR ERA [1] Ray Lankford

Revisiting TLR ERA [2] Edgar Renteria

Revisiting TLR ERA [3] Matt Morris

Revisiting TLR ERA [4] Steve Kline


TLR ERA 시리즈의 5번째 주인공은 꽤 오랫동안 카디널스 팬들에게 있어서 '게으른 천재'의 아이콘이었던 (이후 이 자리는 토론토로 간 C모 중견수가 대체한다) J.D. Drew이다. 예쁘고 가지런한 스윙에 뛰어난 외야수비와 주루까지 모든 툴을 갖고 있던 그는 매 시즌을 앞두고 큰 기대를 하게 했으며, 야구에 대해 심도있게 알지 못하던 시절, 시각적인 기쁨을 가장 많이 제공하던, 매력적인 선수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드래프트 당시의 잡음과 "열정 및 의지 부족"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곱지않은 시선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며, ML 입성 전부터 "화이트 그리피"라는 부담스러운 별명을 달고 지나치게 많은 기대를 불러일으킨 탓에 그의 커리어가 필요 이상으로 초라해게 묘사된 부분이 있다. 

이 포스팅은 희대의 재능 J.D. Drew의 아쉬움 많고 탈도 많았던 Cardinals 시절과 1997년 J.D. Drew Draft Fiasco 에 관해서, 그리고 J.D Drew라는 선수의 커리어 전반에 대해서 조금 더 균형있는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의도로 작성되었으며, 2회에 걸쳐 올리도록 한다.


The Natural


J.D. Drew (David Jonathan Drew)

Outfielder

DOB: 1975년 11월 20일 

Birth: Hahira, Georgia

Time with Cardinals: 1997-2003


Rockin' NCAA

고등학교 시절의 Drew의 유망주로써의 Reputation은 Regional한 수준이었다. 물론 시니어 때 Georgia All-Star에 뽑히기는 했으나, 시골 학교 출신 고졸 선수가 State-all-star 에 뽑히는 수준으로 드래프트에서 높은 지명을 받을 수는 없었다. 총 인구 1300명밖에 안되는 Georgia의 농촌에서 형제들과 야구를 하며 자란 Drew는, 1995년 Giants의 20라운드 지명을 뿌리치고 야구로는 전국구인 학교이자 집에서 멀지 않은 Florida State University (Tallahassee, Florida) 으로 진학했는데, 여기서 대학 야구계의 Coach K로 봐도 무방한 Mike Martin  감독을 만나면서 완전히 인생이 바뀐다. Mike Martin은 Drew의 재능을 알아보고 1학년 때부터 많은 출장기회를 주며 그의 성장을 촉진했으며, Drew는 이에 보답하듯 FSU 학교 기록과 ACC 기록까지 총 17개의 기록을 다시 쓴다 (단일 시즌 최고 타율, 커리어 최다 홈런, 컨퍼런스 역사상 최고 장타율 등)

※Coach K는 NCAA Duke의 전설 Coach Krzyzewski의 별칭. 여기서 잠깐 Drew의 은사 Mike Martin을 소개하자면, 1980년 Florida State을 맡은 이후 33년간 College World Series에 팀은 15차례 올려놓았고 ACC (Atlantic Coast Conference) 타이틀을 5차례 따냈으며, Coach of the Year를 7차례 수상한, NCAA College Baseball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감독 중 하나이다. Martin과 FSU가 배출한 Golden Spike Award 수상자만 4명이고, 가장 최근에는 Buster Posey를 배출해냈다.

Cardinals 관련 FSU Seminoles 출신들

40인 로스터: Shane Robinson, Randy Choate, Barrett Browning

팜 시스템: John Gast, James Ramsey

과거: J.D. Drew, Eduardo Perez, Luis Alicea


Drew가 3학년이었던 1997년 시즌은 가히 기록적이었는데, 이 시즌 Drew가 이뤄낸 것들은 다음과 같다.

  • NCAA Division I 사상 최초로 30홈런-30도루 가입 (하이라이트: 단 67경기만에 세운 기록)

  • NCAA 역사상 3번째로 100타점-100도루-100득점 기록 (이것 역시 67경기 만에)

  • Dick Howser Trophy와 Golden Spike Award 동시 수상 (Mike Martin의 감독 커리어에서 유일)

  • BA 선정 Player of the Year, Collegiate Baseball 선정 Player of the Year

  • The Sporting News 선정 Player of the Year, ACC Player of the Year

  • College World Series All-Decade Team

  • BA 선정 Collegiate Player of the Century 투표 8위



FSU 시절의 J.D. Drew


Drew가 대학 시절 보여준 성적의 임팩트는 그를 "Player of the Century" 투표에 랭크를 시킬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4대 스포츠를 통틀어 이 정도의 수식어를 받으면서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한 선수는 쉽게 나오지 않는다. 굳이 비교 대상을 떠올려보자면--최근의 Bryce Harper나 NFL의 Darren McFadden, 혹은 NBA의 Carmelo Anthony (Syracuse) 나 Chris Webber (Michigan) 정도가 생각나는데, 지나친 비교라고 생각하신다면 아래의 Drew의 대학야구 씹어먹기를 참조하시길. (물론 NHL을 열심히 보지 않는 관계로 4대 스포츠라고 말하는 것에는 어폐가 좀 있다ㅎㅎ). 

이 정도 성적을 내고 프로로 진입하던 무렵, 언론에서는 아직 지명도 당하지 않은 Drew를 띄우기에 바빴다. 그리고 Drew의 재능은 그 정도로 띄울만했다.  (Drew는 2003년 FSU Hall of Fame에 들어갔다)

J.D. Drew's College Numbers

YEAR   AVG  GP  GS   AB  R   H   2B  3B  HR RBI  TB   SLG%  BB HBP  SO GDP   OB% SF SH  SB ATT
----------------------------------------------------------------------------------------------
1995  .325  64  56  209  54  68   7   3  17  63  132  .632  36   3  54   2  .430  1  1  11  12
1996  .386  69  69  241  90  93  17   5  21  94  183  .759  55  12  53   4  .508  7  2  10  14
1997  .455  67  67  233 110 106  15   5  31 100  224  .961  84   8  37   3  .604  3  1  32  42
----------------------------------------------------------------------------------------------
Tot   .391 200 192  683 254 267  39  13  69 257  539  .789 175  23 144   9  .521 11  4  53  68


1996: 제 1차 Draft Fiasco

Boras의 악명이 본격적으로 뻗쳐나가게 된 계기는 1996년 Draft였는데, J.D. Drew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1996년 Draft를 간략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일단 아래에 있는 1996년 1라운더 명단부터 보시면...

Year RdPck Tm Pos WAR
1996 1 Pirates Kris Benson (minors) RHP 11.5
1996 2 Twins Travis Lee (minors) 1B 5.3
1996 3 Cardinals Braden Looper (minors) RHP 7.3
1996 4 Blue Jays Billy Koch (minors) RHP 4.9
1996 5 Expos John Patterson (minors) RHP 4.5
1996 6 Tigers Seth Greisinger (minors) RHP -0.3
1996 7 Giants Matt White (minors) RHP
1996 8 Brewers Chad Green (minors) OF
1996 9 Marlins Mark Kotsay (minors) OF 20.6
1996 10 Athletics Eric Chavez (minors) 3B 34.0
1996 11 Phillies Adam Eaton (minors) RHP 3.8
1996 12 White Sox Bobby Seay (minors) LHP 2.7
Provided by Baseball-Reference.com: View Original Table
Generated 1/28/2013.

굵게 표시된 4명은 모두 Boras의 고객들이었고, 이들 중 아무도 15일 내로 지명구단으로부터 계약을 오퍼를 받은 선수는 없었다. Boras는 두꺼운 CBA (Collective Bargain Agreement) 규정집 어딘가에 처박혀있던 조항들 중 "지명권을 가진 팀은 15일 내로 그 지명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이 지명권을 잃는다"는 점을 이용해 드래프트 2주 후 이들을 모조리 FA 신청했고, 어이없게도 Twins, Giants, White Sox, Expos는 모두 소위 "새"가 되어버렸다. White Sox 측에서 유일하게 Boras의 FA 신청 무효 소송을 걸었으나, 당연히 기각되었다 (Rules are rules.)

그 결과는 아시다시피 난장판이었다. 이 신인들은 지명구단과는 상관없이 그냥 가장 좋은 계약조건을 제시한 팀과 사인을 했다. Travis Lee는 신생팀 D-Backs와 4년 11M짜리 계약을 맺었고, Matt White은 역시 신생팀이었던 Devil Rays와 10.2M짜리 계약을 맺는다.  Boras는 갓 드래프트에 들어온 새내기 4명을 통해 거의 30M에 가까운 규모의 계약을 이끌어냈는데, 이는 Boras 커리어 초창기 최고의 무브로 남아있다.


1997년: The J.D. Drew Draft Fiasco

"화이트 그리피" "제2의 켄 그리피 주니어" "대학 야구 사상 가장 완벽한 선수" 등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FSU 3년간 그는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을만큼 올라갔고, 이 선수가 필드에서 할 수 없는 일은 없어보였다. 마이너리그는 형식적으로만 거칠 것이라는, 혹은 ML 직행을 할 지도 모른다는 루머가 다분했다. 1996년 드래프트에서 Travis Lee 정도가 11M짜리 계약을 성사시키는 걸 보고, Drew는 "11M 이하로는 사인하지 않겠다" 고 공공연히 말했다. 이에 쫄은 Tigers는 전체 1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Rice의 클로저였던 파이어볼러 Matt Anderson (제구안되는 103마일을 던졌던 그 분)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2.5M에 계약) Matt Anderson이 워낙 폭망해서 그렇지, Signability에 기안한 이런 무브는 사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물론 Matt Anderson에게는 다른 종류의 Red Flag가 많았지만...)

 리그 최하위권이었던 Philadelphia Phillies의 GM Ed Wade는 "초대어 대졸 야수" J.D. Drew를 전체 2순위로 뽑았다. Drew의 "11M 이상 요구"는 소위 "뻥카" 일것으로 보고 그냥 냅다 지른 것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Drew가 요구하는 액수는 지나칠만큼 현실과 괴리감이 있던 액수였고, 전년도 드래프트 전체 1번이었던 Kris Benson (기억하시는가 이 이름!) 이나 이 해 전체 1번 Matt Anderson이 2.5M에 사인했던 것을 생각하면 Drew의 11M 드립과 Phillies 사이의 입장차는 엄청난 것이었다. 처음부터 Drew는 최소 10M 이상의 액수--("나보다 못했던 Travis Lee가 11M을 받았으니 나도 11M은 받아야지" 식 마인드에 기안한)--를 실제로 바라고 있었고, Phillies는 2.05M 이라는 굉장히 정석적인 "90년대 후반 1라운더들에게 주던 돈"으로 맞받아쳤다. 

I was made aware of my market value before the draft, and it was something I was very upfront and honest about. There are no hard feelings against the Phillies, but I felt very adamant.

-J.D. Drew on his contract and the draft fiasco (Sports Illustrated, December 1998)



Boras는 이렇게 된 이상 지명권을 가진 Phillies와 협상을 할 이유가 없었고, 그랬기에 Drew가 최대한 빨리 FA 자격을 얻는 방향으로 일을 추진했다. 먼저 그는 Drew가 드래프트에 참가하면서 적어낸 집 주소가 Drew의 고향 주소 (Georgia), 즉 일종의 '본적'과도 같은 주소였던 점에 착안, Phillies 측에서 선수 주소를 잘못 써서 보냈으므로 이 Contract offer는 Invalid 하다고 소원서를 제출했다 (실제로 Drew는 당시 Florida 주소를 가지고 있었다...당연하다 -_- 드래프트 당시 Drew는 3학년을 막 마친 상태였다). Drew의 드래프트 Eligibility Card 에 적힌 주소대로 계약서를 보낸 Phillies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노릇이었다. 

Phillies는 재빨리 Drew가 실제로 살고 있는 Florida 주소를 찾아서 Contract Offer를 다시 한 번 보냈으나, 이번에는 등기 우편물을 받은 사람이 물건을 수령했다고 서명하기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이 사람은 FSU의 Assistant Coach였다고 한다. Boras가 우편물 수령 거부를 하라고 시킨 것이 뻔하지만 "서명 거부"는 범법 행위가 아니었기에 다시 한번 Phillies의 Contract Offer는 실패한다. 15일 기한이 거의 다 지나갔을 즈음 Boras는 7M으로 하향조정하며 마지막 "양보 아닌 양보" 를 해보았으나 Phillies의 최종 오퍼액은 3.1M에서 멈췄고(사이닝 2.6M), 결국 계약은 성사되지 않았다. 


중재소 측에서는 "Phillies 측에서는 써있는 주소대로 계약을 제시했을 뿐, 그 주소가 잘못된 것은 Drew의 탓이다" 며 Boras의 소원서를 기각하지만, 이미 Boras는 이렇게 시간을 벌어놓고 Northern Independent League의 St. Paul Saints와 계약을 맺어버린 후였다. 그리고 Boras는 "이미 독립리그 프로팀과 계약을 했으니 J.D. Drew는 더 이상 Amateur 선수에 속하지 않으며, 내년 드래프트가 시작되기 7일 전부터 FA 자격을 얻는다" 고 주장했다. ("Amateur Player"의 법적 정의를 이용한 Boras의 작전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는데, 이미 1994년 Jason Varitek이 한 차례 이를 통해 이득을 본 적이 있었다.) 

MLB 사무국은 이에 맞대응해 조항을 개정해 "독립리그에서 뛰는 선수도 MLB 신인 드래프트 규정에 따른다"고 분명히 명시했고, Drew도 이를 따르기를 요청했다. FA 자격 취득을 노리고 갖은 꼼수를 다 부렸던 Boras 입장에서는 게거품을 물 상황이었고, 여기서 "법률 조항 개정" 건을 가지고 MLB 사무국과 드래프트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버리면 이는 고객 J.D. Drew에게 지나친 악영향이 갈 상황이었다 (게다가 여태까지의 판례로 봐서 Drew가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해보였다). 

여기서 MLBPA (Player's Association), 즉 선수협이 Drew의 편을 들고 나섰다. Drew라는 출중한 선수의 커리어를 보호하는 것보다는 지난 Arbitration을 통해서 세워진 원칙 (Principle)을 보호하고 선수에게 불리한 판례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선수협은 이미 수년간의 투쟁끝에 "MLB는 선수들의 동의없이 드래프트 규칙을 바꿀 수 없다" 는 원칙을 확보해 놓은 상태였으며, 이 원칙을 일관성있게 적용하는 것이 필요했다. 소송이 길어질 경우 Drew는 오리알 신세로 계속 독립 리그에서 뛰어야할 상태였기에, Independent Arbitrator (독립 중재자)를 통해서 1998년 드래프트 전에 Drew 사태가 마감될 수 있도록 일을 추진했다.

1998년 5월 19일, Independent Arbitration의 Ruling은 선수협의 손을 들어주면서 다음과 같은 조건을 달았다. 1) Drew는 선수협 회원이 아니기에 이번 중재의 결과가 적용되지 않는다 (즉 FA로 풀어줄 수는 없다) 2) Drew의 상태가 애매하니 Executive Council에게 최종 결정을 회부한다. Executive Council에서는 Drew가 1998년 드래프트에 다시 나오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이 우여곡절을 거쳐 J.D. Drew는 Cardinals와 3M의 Signing Bonus를 포함해 총액 3년간 7M의 계약 (인센티브 포함해서 총액 8.5M)을 맺는다. 참고로 Cardinals의 97년도 드래프트 1라운더는 전체 20번 Adam Kennedy였다. (1996년도 정규시즌 성적이 좋았던 Cardinals로써는 절대 Drew를 뽑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절묘하게도 Drew가 참가한 1998 드래프트에서는 전년도 73승의 삽질에 힘입어 당당히 5픽을 받았는데, 이 당시 전체 1픽을 갖고 있던 Phillies는 Drew 대신 Pat Burrell을 데려갔다)

When we saw they were going to be selected ahead of us, we decided to go with J.D. Drew. We just felt that he is one of the best players in the draft. He has the ability to play in the big leagues soon. We decided we'd draft him and do the very best to sign him. The ceiling is high on this guy, and sometimes you have to take some risks to succeed.


-Walt Jocketty, on drafting J.D. Drew (Tuscaloosa News, June 2, 1998)


J.D. Drew, (예상대로) 마이너리그를 씹어먹다

Year Age Tm Lg Lev Aff G PA AB R H 2B 3B HR RBI SB CS BB SO BA OBP SLG OPS TB
1997 21 St. Paul NORL Ind 44 203 170 51 58 6 1 18 50 5 3 30 40 .341 .443 .706 1.149 120
1998 22 3 Teams 3 Lgs Ind-AAA-AA STL 75 324 260 60 91 22 4 16 57 11 5 56 65 .350 .478 .650 1.128 169
1998 22 St. Paul NORL Ind 30 141 114 27 44 11 2 9 33 8 1 21 32 .386 .504 .754 1.258 86
1998 22 Arkansas TL AA STL 19 81 67 18 22 3 1 5 11 2 1 13 15 .328 .444 .627 1.071 42
1998 22 Memphis PCL AAA STL 26 102 79 15 25 8 1 2 13 1 3 22 18 .316 .471 .519 .990 41
1999 23 Memphis PCL AAA STL 25 97 87 11 26 5 1 2 15 6 1 8 20 .299 .371 .448 .819 39
Ind (2 seasons) Ind 74 344 284 78 102 17 3 27 83 13 4 51 72 .359 .468 .725 1.193 206
AA (1 season) AA 19 81 67 18 22 3 1 5 11 2 1 13 15 .328 .444 .627 1.071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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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ted 1/28/2013.

Drew가 마이너리그를 씹어먹을 것은 진작에 예견된 일이었다. 이미 그의 스윙은 완성도가 높았으며, Plate Discipline과 Natural Power, Contact, Arm, Range, Baserunning, Raw Speed 등 평가할 수 있는 모든 면에서 Drew는 굉장히 다듬어진 선수였고 흠잡을데가 없었다. Jocketty를 위시한 Cardinals 프론트 오피스도 Drew의 리그 적응같은 것은 걱정하지 않고 신속하게 Drew의 상위레벨 진입을 추진했다. 

유일하게 구단 측에서 걱정한 부분은 바로 J.D. Drew의 (전국적으로 알려진) 드래프트 사태와 "난 11M 정도는 받겠다" 발언이었다. 순식간에 Drew는 "A talented kid with a bad rep"으로 전락한 채 프로야구에 발을 딛게 된 것이다. Arkansas에서 프로야구 첫 경기를 치른 (아...Boras에 따르면 독립야구도 프로야구이므로 이렇게 쓰면 정확하지 못한 걸텐데) 날, 타석에 들어서는 Drew에게 Dire Strait (락밴드) 의 "Money for Nothing"이 울려퍼졌고, 아웃된 뒤 덕아웃으로 돌아올 때는 Beatles의 "Money (That's what I want)"이 나왔으니, Drew를 작정하고 안좋게 보려고 하던 사람들이 어떤 식이었는지 대충 알만 하다.

아직 근육이 붙지 않은 루키 시즌의 J.D. Drew. 이 때는 8번을 달았었다.


1998년: Debut

9월 7일 로스터 확장 J.D. Drew가 콜업되자 우려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시 Cardinals에는 Ron Gant, Ray Lankford, Mark McGwire, Willie McGee, Brian Jordan 등 Drew같은 꼬맹이를 좋게 보지 않을 베테랑들이 가득했다. 특히 Drew Fiasco 당시 외야수 Brian Jordan은 Drew의 11M 요구를 "Outrageous"하다고 표현했으며, McGwire는 신인들의 계약금 액수에 $250K의 상한선을 두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다행히 Drew가 막상 올라왔을 때, BP를 치고 있는 그에게 McGwire와 Gant, Delino DeShields가 먼저 차례로 다가와 "Welcome" 을 전했으며, Drew는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는 큰 갈등 없이) 무사히 빅 리그 락커에 자기 짐을 풀었다. (심지어 TLR 마저  "솔직히 조금 걱정했던 것은 사실이다" 라며 이후에 털어놓았다) 

1998년 9월 8일, 6회말 대타로 나선 Drew는 드래프트된 이후 3개월만에 ML 데뷔전을 치렀다 (데뷔전 상대 Cubs, 상대 투수는 추억의 그 이름 Steve Trachsel). 결과는 루킹 삼진. Drew는 이후 "마지막 공은 체인지업이었다. 너무 긴장해서 그냥 빨리 타석이 끝나기만을 바랬다"며 첫 타석을 회고했다. 이 경기는 공교롭게도 McGwire가 Roger Maris의 단일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깨는 62호 홈런을 날렸던 바로 그 경기로 (혹시 이 홈런 기억하시는지! 빨랫줄처럼 낮게 빠르게 날아가 Busch Stadium에서 가장 짧은 좌측 펜스 끄트러미를 아주 살짝 넘어갔던 바로 그 홈런!), 사람들은 Drew의 데뷔보다는 신기록 수립의 순간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I really hope he means what he says when he says he wants to play the game of baseball. If someone wants to play and is fiddling over $11 million, that shows he doesn't want to play very much. I'm from the old school -- that you've got to prove yourself in the big leagues and that's where you make your money."               

-Mark McGwire, on J.D. Drew (1998)                                                                

 9월 9일, Reds와의 원정 시리즈를 나선 TLR은 선발 라인업에 Drew를 넣지 않았다. 그러나 경기 중 McGwire가 부상으로 빠지면서 3회부터 Drew를 우익수로 출장 시켰고 (대신 우익수였던 Mabry를 1루로), Drews는 8회 Gabe White을 상대로 우중간 담장을 빠르게 넘기는 라인드라이브 홈런을 작렬하며 빅 리그 첫 홈런 신고식을 한다. 

당시 Playoff 진출이 좌절된 St. Louis의 정규시즌 막판은 McGwire의 홈런 레이스로 점철되있었고, Drew의 데뷔는 생각만큼 많은 관심을 끌지 않았다. 콜업 후 첫 며칠간은 주로 대수비, 대타로 벤치에서 머물던 Drew는 9월 15일, 고작 자신의 3번째 선발출장 경기에서 3회와 5회 연타석 홈런을 때리며 멀티홈런 경기를 갖았다. 그러나 그 경기에서 9회 대타로 출전한 McGwire가 본인의 시즌 63호 홈런을 때려내면서 (참 이 양반도 대단하다) 모든 스폿라이트가 McGwire쪽으로 쏠렸고, 각종 소송과 중재, 언론과의 인터뷰로 스트레스를 받던 Drew는 이러한 무관심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9월 25일에는 Expos전에서 4회와 5회 또다시 연타석 투런을 작렬하면서 메이저리그 데뷔 후 첫 28타석만에 홈런을 5개를 때려낸다. 그야말로 명불허전 이었다.

1998시즌 후 Drew는 Arizona Fall League로 보내졌고, 수년간 센터를 지켜온 베테랑 외야수 Ray Lankford는 오프시즌 중 좌익수로 포지션 이동을 할 것을 제안받았다. Drew의 앞길에는 Cardinals의 정규시즌 개막전에서 주전 외야수로 낙점을 받는 일만 남아있었다.

With his extension and his swing, he shouldn't be either a .330 hitter with 15 home runs or a .230 hitter with 45. He should hit for power and average.

-Tony La Russa, on J.D. Drew's potential (1998)



1999-2000년: 주전 중견수로 발돋움

1999시즌 개막전, Drew는 당당히 주전 중견수로 라인업 카드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첫 한 달간 그다지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하며 5월 중순 AAA행을 받아들인다. Memphis에서 한 달간 수련한 뒤 다시 올라온 Drew는 이후 끝까지 중견수 자리를 지키긴 했으나, 확실히 실망스러운 자신의 첫 풀타임 시즌을 보냈다 (13홈런 39타점 72득점 19도루 .242/.340/.424, 50BB 77SO, WAR 2.7, wRC+ 94). 특히 8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한 달간은 홈런을 1개도 기록하지 못하면서 확연히 스윙 리듬을 잃은 모습을 보였으며, 수비나 주루에서는 충분히 훌륭했으나 타석에서는 아직 빅 리그에서 풀 타임을 치러보지 않은 애송이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정도 스탯을 Jon Jay가 찍었다면 모를까, 제2의 Ken Griffey Jr. 프로젝션을 받던 선수치고는 그다지 인상적인 데뷔는 아니었다. 그러나 마이너리그 물을 거의 먹지 않고 팀의 개막전 중견수이자 2번타자로 낙점된 신인의 성적치고 결코 나쁜 성적 역시 아니었다. 누구나 Mike Trout 혹은 Ichiro처럼 데뷔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Phillies 팬들은 정말 어지간하다.


배터리 사건

1999년 8월 10일, Cardinals는 Phillies와의 원정을 위해 Veterans Stadium을 찾는다. Drew가 타석에 들어서자 Phillies 팬들은 욕설과 야유를 시작헀으며, 이미 경기 시작 전부터 "Drew you are a disgrace to baseball" 와 같은 심한 피켓을 들고 와서 설치는 악명높은 Phillies 팬들이 많았다. 이에 굴하지 않았던 Drew는 3회 선두타자로 나서 우중간을 완전히 가르는 3루타를 치며 Phillies 팬들의 심기를 건드렸고, 8회 초에는 1사 1,2루에서 중전안타를 치며 점수를 5:2로 벌리기까지 했다.

급기야 8회말, 센터 필드에 서 있던 Drew를 상대로 관중석에서 배터리가 날아왔고, TLR은 건전지에 맞을뻔한 Drew를 보호하기 위해 심판에게 다가가 경기 중단을 요청했다. 당시 Veterans Stadium의 아나운서였던 Dan Baker가 관중들에게 "더 이상 물건들이 경기장에 난입하면 Phillies가 몰수패를 당할 것이다"고 주의를 준 이후에야 야유가 멈추었다.

참고로 이 경기에서는 5:2로 앞서고 있던 8회말, 그 며칠 전 Phillies로 트레이드되었던 Ron Gant가 Ricky Botallico를 상대로 만루에서 싹쓸이 2루타를 치면서 역전패했다. (이 경기 박스스코어)

“They were throwing batteries. With that history, to me, the first battery that comes out on the field the game's over. I hope that precedent's set. Somebody throws a battery, Phillies lose."

-Tony La Russa, on the battery incident



2000시즌, 드디어 Lankford-Edmonds-J.D.Drew의 황금 외야진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우익수 자리에 정착한 Drew는 정규시즌 3번째 경기에서 Cubs를 상대로 혼자 2홈런 5타점을 치면서 힘차게 출발했고, 전반기에만 11홈런 33타점 .313/.417/.529를 쳤으나, 올스타 브레이크 직전에 당한 부상으로 약 3주간 쉰 이후로는 타격 페이스가 확 떨어진 모습이었다. 그는 2번과 7번 자리를 Renteria와 함께 나눠맡았으며, 가끔은 리드오프로도 출장했고, 6번 타순에서도 쳤으며, 때로는 Edmonds 대신 중견수로 뛰기도 했고 Lankford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 좌익수 알바도 뛰었다. 

이 시즌에 Drew는 결국 .295/.401/.479 18홈런 57타점 WAR 4.0 의 겉으로 보면 확 나아진 성적으로 풀타임 2년차 시즌을 마감한다. 그러나 사실 Drew의 ISO는 전년도와 거의 같았으며, 크게 오른 타율은 .270 --> 0.351로 크게 오른 BAbip와 연관이 있었기에 2000시즌의 Drew가 반드시 1999시즌보다 훨씬 잘 친 것은 아니었다고 봐야했다. 다만 경험이 쌓이면서 점차 상대 투수들과의 카운트 싸움에 조금씩 익숙해져 가고 있었으며 데뷔 2번째 시즌만 4할 출루율을 기록한 그의 Plate Discipline은 그의 미래에 있어서 청신호로 보였다. Drew의 2000시즌에 있어서 가장 슬픈 점은, 아마도 이 시즌이 그가 Cardinals에서 가장 많은 경기와 타석수를 소화한 시즌이었다는 점이다 (135경기 486PA. Drew는 이후 이와 거의 동일한 135경기 496PA를 2002년에 기록한다). 이 때만 해도 Drew의 2번째 시즌은 "어제보다 나은 오늘" 이라는 점에서 고무적이었으며, 많은 이들은 여전히 Drew를 "Future all-star with MVP potential"로 지목했다.


(깨알같은) J.D. Drew vs. Colby Rasmus Comparison I (Rookie Season)          (BB%/K%)

J.D. Drew:13HR 39RBI 72R 19SB .242/.340/.424, 50BB 77SO, WAR 2.7, wRC+ 94, 11.6%/17.9% (24세)

C.Rasmus:16HR 52RBI 72R 3SB .251/.307/.407, 36BB 95SO, WAR 2.8, wRC+ 89, 6.9%/18.3%  (23세)


(깨알같은) J.D. Drew vs. Colby Rasmus Comparison II (Soph. Season)

J.D. Drew18HR 57RBI 73R 17SB .295/.401/.479,  67BB 99SO,  WAR 4.0, wRC+ 126 13.8%/20.4%   (25세)

C.Rasmus: 23HR 66RBI 85R 12SB .276/.361/.498, 63BB 148SO, WAR 4.3, wRC+ 130, 11.8%/27.7%  (24세)



To be continued...

참조: Baseball-reference.com, Sports Illustrated, CNN, Baseball-almanac, Stltoday.com, Riverfront Times, Baseball Prospectus (Kevin Goldstein), Scouting Report, Fangrap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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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Doovy

TLR ERA 시리즈의 4번째 포스팅의 주인공은 Steve Kline다.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깡과 파이터 정신, 구단에 대한 애정과 더러운 모자 때문에 참 인상깊었던 선수이며, 묘한 악동 기질과 특유의 승부근성으로 2000년대 초반 Cardinals 불펜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물론 실력으로도 Izzy와 더불어 TLR 시대 릴리버들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개인적으로 Cards 경기를 보기 시작한 이래로 아직까지도 Kline 이상으로 신뢰를 주던 좌완 릴리버는 본 적이 없다.



TLR 시대를 대표하는 LOOGY



Steve Kline

LHP (Reliever)

DOB: 1972년 8월 22일 

Birth: Sunbury, Pennsylvania

Time with Cardinals: 2001-2004


Draft & Minors

West Virginia 대학에서 뛰던 Steve Kline은 1993년 드래프트 8라운드에서 Cleveland Indians에게 지명을 받고 프로 생활을 시작하는데, 이 당시 Kline은 좌완 선발투수였다. 당시 1994년 21세의 나이로 싱글A Columbus에 올라온 그는 28경기에 선발 등판해 18승 5패 3.01이라는 상당히 훌륭한 성적을 찍으며 Indians 내 최고 투수 유망주에게 주는 상인 Bob Feller Award를 수상하고 구단 내 촉망받는 새싹으로 떠오른다 (이 정도면 요새 우리 팜의 John Gast나 Kevin Siegrist 급의 기대는 받던게 아닐지?) 

AA까지는 무사히 올라왔으나 1996년 그는 AA볼에서 선발투수로 낙제점을 받았다. 그러나 좌완 투수가 부족하던 팀 사정상, 1997년 Indians 불펜의 일원으로 개막 로스터에 진입하는 행운을 맛본다.  1997년 4월 2일, Oakland A's를 상대로 한 정규시즌 개막전에서 Kline은 Charles Nagy에 이은 2번째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데뷔전에서 행운의 구원승을 따내며 가뿐하게 시즌을 시작하지만 이후 내내 두들겨맞았다. 당시 Indians 불펜은 클로저 Jose Mesa를 주축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Whip 1.5에 평균자책 4.38을 기록한, 리그 내에서 가장 후진 불펜 중 하나였다. 빅 리그에서 그다지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자 Indians는 트레이드 마감시한 전에 Kline을 Montreal Expos로 넘기며 선발투수 거구의 우완투수 Jeff Juden을 받아왔다.

AA까지는 선발투수로 수업을 받던 Steve Kline

Year Age Tm Lg Lev Aff W L ERA G GS IP H ER HR BB SO WHIP H/9 BB/9 SO/9 SO/BB
1993 20 Burlington APPY Rk CLE 1 1 4.91 2 1 7.1 11 4 0 2 4 1.773 13.5 2.5 4.9 2.00
1993 20 Watertown NYPL A- CLE 5 4 3.19 13 13 79.0 77 28 3 12 45 1.127 8.8 1.4 5.1 3.75
1994 21 Columbus SALL A CLE 18 5 3.01 28 28 185.2 175 62 14 36 174 1.136 8.5 1.7 8.4 4.83
1995 22 Canton-Akron EL AA CLE 2 3 2.42 14 14 89.1 86 24 6 30 45 1.299 8.7 3.0 4.5 1.50
1996 23 Canton-Akron EL AA CLE 8 12 5.46 25 24 146.2 168 89 16 55 107 1.520 10.3 3.4 6.6 1.95
AA (3 seasons) AA 10 15 4.27 40 39 238.0 254 113 22 86 154 1.429 9.6 3.3 5.8 1.79
A (2 seasons) A 18 5 2.97 30 29 188.0 176 62 14 37 179 1.133 8.4 1.8 8.6 4.84
Rk (1 season) Rk 1 1 4.91 2 1 7.1 11 4 0 2 4 1.773 13.5 2.5 4.9 2.00
A- (1 season) A- 5 4 3.19 13 13 79.0 77 28 3 12 45 1.127 8.8 1.4 5.1 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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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ted 1/23/2013.

1998-2000년: 릴리버로써 정착

Expos로 건너간 Kline은 이 기간동안 완전히 빅 리그에 정착했다. 1998~1999년에는 (얼마전 출소하신) 클로저 Ugueth Urbina의 뒤를 이어 Expos 불펜의 넘버3이자 유일한 좌완 릴리버로 입지를 다졌고, 주로 LOOGY 역할을 담당하며 3시즌동안 평균 81경기에 출장하는 Durability를 과시했다. 2년간의 활약을 인정받아 2000시즌 막판에는 Expos의 클로저로도 발탁되며 14세이브를 올렸고, SO/BB 비율은 3년간 1.85 -> 2.09 -> 2.37로 매년 발전을 거듭했다. 

정말 더럽다 더러워

2000년 12월 4일: Cards 유니폼을 입다

2000시즌이 끝나고 Walt Jocketty는 당시 FA 시장 최대어였던 Mike Hampton을 찔러보았다. 마지막까지 최종 Suitor들 중 하나로 남긴 했으나 Cardinals는 Rockies의 (당시로써는) 기록적이며 또한 충격적이었던 오퍼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으며, FA를 통한 투수진 강화가 실패하자 본인의 전공분야인 트레이드로 눈길을 돌려 Expos의 Dustin Hermanson을 찔러보았다. 당시 Hermanson은 타고투저의 리그 트렌드와 하위팀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4년간 43승 평균자책 3.98을 올리며 가치가 상당히 올라가있던 터였다. 

Expos는 당시 갓 25세 시즌을 마쳤으며 3년동안 300경기에서 홈런 60개 OPS .914에 SLG 0.525를 기록한 젊은 3루수 Fernando Tatis에 Britt Reames까지 원했고, Jocketty는 내구성이 검증된 젊은 좌완 릴리버 Steve Kline을 요구하면서 양측간의 2:2 트레이드가 성사가 되었다. (Britt Reames, Fernando Tatis <--> Dustin Hermanson, Steve Kline)

This is a guy we've been searching for years. He's really the first left-hander we've gotten under the 30 years of age-- actually, under the 40 years of age--since I've been here.

-Walt Jocketty, after trading for Steve Kline in 2000 


2001년: 끝만 빼고 다 좋았다

Cardinals 유니폼을 입은 첫 해, Steve Kline은 89경기 출장해 75이닝을 던지며 3승 3패 17홀드 9세이브 평균자책 1.80 Whip 1.08이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냈고 무려 3년 연속 최다 경기 출장 타이틀을 따냈다. 그가 기록한 1.80의 평균자책은 리그 내 구원투수들 중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으며, 2001시즌 개막전 Cardinals 클로저 자리는 Dave Veres의 것이었으나, 시즌 막판에는 Steve Kline이 클로저였다 (반면 Veres는 8월 이후 거의 세이브 기회에서 등판하지 못했다). 매치업을 중요시하는 TLR에게 Steve Kline의 연투 능력은 불펜진 운용을 한결 수월하게 해주었으며, 시즌 후 발간된 2002 Scouting Report에서는 "이 팀에서 Morris와 Darryl Kile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투수"라고 Kline을 묘사했다. 

그리고 Kline은 클로저가 아닌 불펜 투수로는 이례적으로 2001시즌 MVP 투표에서 표를 받는다 (WAR 1.1, Scott Rolen, Brian Giles, Larry Walker, Vladimir Guerrero와 동률). 당시는 지금보다 더욱 Non-closing Middle-reliever들이 각광받기 힘든 시절이었기에 Kline의 득표는 상당히 기록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해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Giants의 릴리버 Felix Rodriguez 역시 득표했다)

Kline의 주 레퍼토리는 Heavy Sinker 와 Late-breaking, hard Slider였으며, 그의 최대 장점 중 하나는 "공을 꾸준히 낮게 제구할 수 있는 능력" (Consistency down in the zone) 이었다. 당연히 좌타자들은 "마치 탁자 위를 구르다가 떨어지는 것 같은" 그의 싱커를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으며 (피안타율 .149) 우타자들 역시 Kline을 상대로 상당히 고전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릴리버들에게 중요한 "깡" 이 있던 Kline은 후반기에 Dave Veres가 부상으로 이탈한 후 중압감이 더 커졌으나 오히려 후반기에만 1.04의 평균자책을 기록하며 Pressure를 어느 정도 즐기는 모습까지 보여주었고, 시즌 막판들어 Kline은 불펜 에이스로 등극했다.


포스트시즌에서도 Kline의 활약은 훌륭했다. 2001년 NLDS 2차전, Randy Johnson과의 매치업에서 사실상의 판정승을 거둔 Woody Williams가 8회 선두타자 Craig Counsell에게 안타를 허용하자 TLR은 곧장 Steve Kline을 투입했다. Kline은 이후 상대하는 거의 매 타자들에게 땅볼을 유도하며 8,9회를 모두 막아내고 6아웃 세이브를 해냈는데, 이 기록은 2012년 Jason Motte이 갈아치우기 전까지 포스트시즌에서 Cardinals 투수가 기록한 마지막 6아웃 세이브로 남아있었다. 

이어서 펼쳐진 3차전에서도 9회에 등판해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고, 4차전에서도 세이브 상황에서 올라와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으나, 결국 이 시즌 Kline에게 유일한 오점으로 남은 NLDS 5차전에서 Womack에게 끝내기 안타를 허용하며 미들 릴리버가 꿈꿀 수 있는 가장 화려한 시즌을 아쉬움 속에서 접었다.


Kenny Lofton의 끝내기 안타가 터지는 순간의 Steve Kline (2002년 NLCS)



2002년

이 해 5월 Kline는 Left-tricep strain으로 DL에 올라 한 달여를 결장했는데, 복귀 후에도 전반기 내내 피칭 리듬과 투구감을 찾지 못한 모습이었다. 특히 땅볼 유도를 해야하는 그의 싱커가 제대로 듣지 않아 고생하며 전반기를 4.29의 평균자책으로 마감했다. 그러나 후반기에 다시 감을 찾은 Kline은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에만 37이닝을 소화하며 2승 무패 4세이브 평균자책 2.89를 기록했고, 새 클로저이자 이후 자신의 절친이 되는 Jason Isringhausen의 뒤를 굳건히 받쳐주었다. 

NLDS와 NLCS에서 5경기에 나와 한 점도 내주지 않았던 Kline은, 1승 3패로 탈락을 앞둔 NLCS 5차전, Matt Morris가 선발로 나와 9회까지 팽팽한 1:1의 균형을 이어갔다. 투구수가 85개에 불과하던 Morris는 9회말에도 홈팀 Giants를 상대로 등판을 강행했고, J.T. Snow까지 플라이볼로 잡아내면서 2아웃을 잡아냈다. David Bell이 좌중간으로 툭 쳐서 안타를 뽑아낼 때만 해도 별일 없겠지 싶었으나 (그 정도로 Morris는 쉽게 쉽게 잘 던졌다) 후속타자 Shawon Dunston이 다시 안타를 뽑아내면서 홈 관중들을 열광시켰다. 끝내기 위기에서 TLR은 Steve Kline에게 다시 공을 맡겼고, Kline은 첫 타자 Kenny Lofton에게 가장 자신있는 싱커를 던졌으나 Lofton이 이 초구를 때려 우중간에 안타를 만들어내면서 시리즈가 끝나버렸다. 

Morris가 워낙 잘 던지며 반전의 여지를 마련했었기에 (상대 투수는 전병호를 연상시키던 흑마술사 Kirk Rueter) 5차전을 잡아내고 Busch로 돌아간다면 시리즈를 역전할 수 있을 듯 싶었으나, Kline이 2년 연속 자기 손으로 시리즈를 마무리 지으면서 -_- Cardinals는 다시 한 번 주저앉았다. 


2003년

이 시즌 Kline은 5승 5패 3세이브 18홀드, 78경기 출장에 63.2이닝을 소화했다. 그러나 그는 볼넷보다 딱 한 개 많은 삼진을 잡는 데 그쳤고 (30BB/31SO) 평균 자책은 루키 시즌 이후 가장 높은 3.82에 달했다. 무엇보다 좌타자 상대 피안타율이 2년 전에 비해 거의 1할이 올랐던 점이 (.243) 결정적인 성적 악화로 작용했다. 2003년 4월 27일, Cardinals와 Marlins는 무려 20이닝까지 가는 지루한 경기를 펼쳤는데, Kline은 이 경기에서 LOOGY라는 본인의 신분을 잊고 3이닝 퍼펙트를 기록하며 18~20회를 막아내고 승리투수가 되었다. 그러나 이 이후 Kline은 평년만 못한 안정성을 보여주었으며, 특히나 피홈런이 늘어나고 삼진률이 떨어지는 적신호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3년간의 활약과 여전한 내구성에 고무된 프론트는 이 해 12월, Kline을 1년간 1.7M으로 붙잡는다.  


2004년 WS 진출이 확정되던 순간



2004년

2004년은 Steve Kline에게 가장 안타까운 시즌 중 하나로, 이 해 Kline은 9월 초까지 평균자책 1.79를 기록하며 무려 67경기에 등판했고, 이 페이스 대로였다면 3년만에 다시 80경기 출장 및 출장왕 타이틀을 가져올 수 있을 듯 보였다. 특히나 Ray King이라는 또다른 효과적인 좌완 릴리버가 불펜에 들어오면서 경기 중후반 모든 좌타자 매치업을 혼자 상대하던 Kline의 부담이 조금 줄어들었고, Izzy를 위시해 Cal Eldred, Julian Tavarez 등이 좋은 시즌을 보내면서 2004년 Cards 불펜은 간만에 상당히 안정된 모습이었다.

Kline은 이 시즌 홈에서 25.2이닝을 던지는 동안 ERA 0을 찍었으며 (늘 Kline은 홈에서 훨씬 강한 모습이었다) 좌타자 상대로의 위력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피안타율 0.143). 그러나 9월 초 Kline은 Groin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했고 이후에는 "Torn tendon in finger" (손가락 인대 부상)으로 다시 쉰 뒤 포스트시즌을 앞둔 9월 29일에서야 로스터로 복귀했다. 그러나 손가락 부상이 완전치 않은 상태로 복귀한 그를 정규시즌처럼 불펜 에이스로 중요한 상황에 투입할 수는 없었고, 부상이 점점 낫기를 바라면서 Low-Leverage 상황에서 등판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Dodgers 2004년 NLDS 3차전 (그렇다. Jose Lima가 완봉승을 거둔 바로 그 경기이다 -_-)에서 0:4로 뒤진 8회에 나와 공 7개로 1이닝을 삼자범퇴 무실점으로 막아낸 Kline은 사실상 그 경기를 마지막으로 포스트시즌을 접었다. NLCS 2차전, 4:3으로 앞선 6회에 등판한 그는 첫 두 타자인 Vizcaino와 Brad Ausmus에게 연속 안타를 허용한 뒤 이를 Kiko Calero에게 마운드를 넘겼으며, 경기 후 기자들에게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사실상 올 시즌은 끝난 것 같다" 고 말했다. 이후 Kline은 Hand Specialist를 보기 위해 Houston 대신 Indianapolis로 떠나야 했으며, 이 경기는 Kline이 Cardinals 유니폼을 입고 던진 마지막 경기이자 커리어 마지막 포스트 시즌 등판이었다.


훌륭했던 4년간의 Cardinals 시절

Year Age Tm W L ERA G GF SV IP H R ER HR BB SO BF ERA+ WHIP H/9 HR/9 BB/9 SO/9 SO/BB Awards
2001 28 STL 3 3 1.80 89 26 9 75.0 53 16 15 3 29 54 303 241 1.093 6.4 0.4 3.5 6.5 1.86 MVP-24
2002 29 STL 2 1 3.39 66 17 6 58.1 54 23 22 3 21 41 241 118 1.286 8.3 0.5 3.2 6.3 1.95
2003 30 STL 5 5 3.82 78 22 3 63.2 56 29 27 5 30 31 274 108 1.351 7.9 0.7 4.2 4.4 1.03
2004 31 STL 2 2 1.79 67 22 3 50.1 37 12 10 3 17 35 202 238 1.073 6.6 0.5 3.0 6.3 2.06
STL (4 yrs) 12 11 2.69 300 87 21 247.1 200 80 74 14 97 161 1020 156 1.201 7.3 0.5 3.5 5.9 1.66
Provided by Baseball-Reference.com: View Original Table
Generated 1/24/2013.
*1998-2007년까지 10년간 출장 경기수 ML 전체에서 1위 (750경기, 2위는 Mike Stanton 706경기)


장난끼가 많았던 Steve Kline



2005년 이후: 떠나고도 계속되는 Cardinals 사랑

계약이 끝나고 Steve Kline은 프론트에 "내게 재계약 오퍼를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Walt Jocketty는 "우리의 터무니없는 액수로 너에게 모욕을 주고싶지 않다"며 사실상 결별을 선언했다. 이미 Ray King이 건재하고 Randy Flores, Tyler Johnson 등이 올라오고  있던 불펜 사정상 Kline처럼 삼십대 중반을 바라보는 베테랑 LOOGY에게 많은 돈을 주기는 힘든 실정이었던 것이다. Kline은 이후 Orioles와 2년간 5.5M의 딜을 체결한다.

그러나 Orioles로 이적하고 맞는 첫 시즌 첫 주에 Kline은 먼지나게 두들겨맞고, 인터뷰에서는 St. Louis의 팬들과 선수들을 대놓고 공개적으로 그리워하며 Orioles로 온 것이 실수라고 말해버린다. 심지어 "나는 Jim Edmonds, Edgar Renteria 등이 내가 실수하면 뒤에서 받쳐주는 것에 너무 익숙해 있다" 고 말하며 팀메이트들을 깠다. 그만큼 Kline은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고 St. Louis에 대한 애정이 넘치던 선수였다.

There's nothing worse than getting booed at home. St. Louis fans are too good for that. They understand the game more than most people.

-Steve Kline, on St. Louis fans


Orioles에서의 불행한 시간을 보내면서 61이닝만에 무려 11개의 홈런을 허용한 Kline은 (Cardinals에서 4년동안 허용한 피홈런 14개) 결국 LaTroy Hawkins와 1:1 맞트레이드를 당하면서 SF Giants로 이적한다. Giants 이적 첫 해는 72경기에서 3.66의 평균자책으로 밥값은 했으나, K/9이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진 2007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지 못했다. 2008년 시즌 개막과 함께 방출된 Kline은 이후 Phillies와 계약했으나 마이너리그에서 심판과 몸싸움을 벌이며 징계를 받고 방출되었으며, 2008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이 모자는 시즌 초라서 그렇게 더러운 편도 아니다



더러운 모자 (Dirty Hat Tradition)

Steve Kline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더러운 모자이다. Kline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Pennsylvania 에서도 amish 들이 많이 사는 지역의 농부였으며, 이 지역에는 농부들 뿐 아니라 광부들 (coal miner)과 트럭운전수들 (Truckers) 등 전형적인 미국식 blue-collar 노동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동네에서 나고 자란 Kline은 하루 일과가 끝나고 나면 온 몸이 지저분해진 채로 집에 오던 아버지와 같은 노동자들을 기리는 마음에서 더러운 모자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They come home dirty after a hard day's work, and it's a symbol to my dad and others that I'm working hard, too. I've always done it. Everybody changes their hats left and right, but I decided to wear one hat the whole season. I like to see how bad and smelly it gets at the end of the year.

-Steve Kline, on his Dirty Hat idiosyncrasy


Cardinals 구단 측에서 이러한 Steve Kline의 모자 페티쉬를 프로모션의 일환으로 삼아 "Dirty-Cap-Day"를 지정, 2002년 5월 19일 홈관중 선착순 5000명에게 인공적으로 지저분하게 만들어진 "Dirty Hat"을 선물로 주었다. Kline은 또한 거침없고 재미있는 언행과 남자다움으로 여성팬들이 많았는데, 몇 가지 에피소드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에피소드 #1

2004년 개막전에서 당시 미 대통령이었던 George W. Bush가 시구를 하러 나왔다. 구단 측에서는 Bush라고 쓰여진 Cardinals 저지를 선물하며 선수들에게 사인을 하게 했는데, 모두들 제 이름을 쓰는 사이 Steve Kline 혼자 Babe Ruth 라고 썼다.

에피소드 #2

Orioles 시절 Yankees 상대로 던지다가 보크를 선언받은 Steve Kline은 경기 후 이렇게 얘기했다.

"지암비가 타임을 불렀고, 나는 투수판에서 발을 떼었다. 양키즈 벤치에서 "보크"를 외쳤다. 한 번 그렇게 걸리기 시작하면, 심판들이 신경써서 본다. 그 보크 판정은 삽소리였다. 걔한테 (주심 Foster) 코브라 클러치 (레슬링 기술)를 걸지 말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 순간 전까지는 훌륭한 게임이었는데."

"The batter, Jason Giambi, called time. I stepped off the rubber. You could hear the Yankee bench yelling "Balk." Once you get hit for it once, the umpires look for it. That was a bogus call. I was deliberating whether to put him in the Cobra Clutch. It was a great game until that happened."

오프시즌에는 고등학교에서 15년째 레슬링 코치를 한다는 Steve Kline이다. 


에피소드 #3

2004년 7월 Cubs와의 시리즈. Wrigley Field 불펜에서 컵스 팬들이 던지는 조롱과 욕설로 이미 한껏 짜증이 나있던 Kline은 TLR이 몸을 풀라고 지시한 뒤 경기에 투입하지 않는 일을 (불펜 투수들이 제일 싫어한다는 소위 'dry-humping') 두 차례나 하자 카메라에 대놓고 TLR 보란듯이 중지손가락을 날렸다. 이후 TLR은 샤워장까지 가서 Kline을 대면해 상당한 설전을 벌였다고 (알만하지 않은가.) 여기서 웃기는 것은 Steve Kline이 "나한테 손가락으로 욕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하라 (You can flip me off whenever you want, Tony"고 TLR에게 얘기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Kline이 실점을 하고 들어갈때마다 TLR이 덕아웃에서 손가락으로 욕을 해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I loved Tony. People always thought we hated each other but he was probably the best manager I ever had. I never complained about anything too much. I liked to have fun with him and he liked to have fun with me, but once game time hit, he wanted to win and I wanted to win. He doesn't hold grudges. He lets things slide and that's why he is who he is. That's why he is a Hall of Famer.

         -Steve Kline on Tony La Russa, in an interview with Fox



에피소드 #5

2003년 시즌 말, 이미 플레이오프 탈락이 확정된 Cardinals와 Astros의 시리즈를 앞두고 Prior는 "I hope Astros beat their brains in" 이라는 강한 표현을 쓰며 도발했다. 그러자 Mark Prior의 NLDS 3차전 출격을 앞두고 Steve Kline은 지역 TV에 나가 이렇게 말했다.

"I hope Mark Prior takes a line drive to the forehead and we never have to see him again," (Prior가 머리에 라인드라이브를 맞아서 다시 볼 수 없었으면 좋겠다)


에피소드 #6

이 에피소드는 얼마 전 댓글에서 언급된 "2004년 7월 20일경 Cubs와의 난타전 시리즈"와 관련이 있다. Carlos Zambrano가 Jim Edmonds의 다리에 빈볼을 던지며 도발했으나, Edmonds는 꾹 참고 다음 타석에서 홈런을 친 뒤 타구를 잠시 응시하며 Zambrano의 심기를 건드렸다. Zambrano가 이후 화를 내며 매너 운운을 하자 Steve Kline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I just don't think you should yell at guys when they hit home runs when you have one of those guys on your team who hops every time he hits one. You don't see him [Zambrano] yelling at Sammy [Sosa] every time he his one off another pitcher, so I don't think you should yell at your guy  for hitting the ball and watching it. Especially when you just drilled him in the leg." (자기 팀에는 홈런 칠때마다 방방 뛰는 선수가 있는데, 그건 생각 안하고 무조건 홈런 치는 선수한테 큰소리부터 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Sammy Sosa가 홈런 칠때마다 Zambrano가 뭐라고 하진 않지 않는가. 그러니가 우리 팀 선수가 공을 치고 그걸 좀 본다고 해서 뭐라고 하면 안된다. 특히 니가 이 선수 다리에 공을 맞춘 다음에는...)


봤냐 88마일!


에피소드 #7

이 사건은 Kline이 Giants 소속으로 뛸 때 있던 일이지만 소개하지 않기에는 너무 아깝다. 2007년 5월 13일 (하필이면 이 날은 Mother's day 였다), Giants는 Rockies를 상대로 Coors Field를 마음껏 즐기며 15:1의 압도적 리드를 하고 있었다 (선발투수 Matt Cain vs. Taylor Buckholz). 이미 다 이긴 경기를 마무리하기 위해 9회말 Kline이 등판했는데, 1사 후 안타를 치고 나간 Yorvit Torrealba는 2루도루를 감행해 세이프가 되었다 (스탯에는 Defensive Indifference로 기록) 이 사건이 있고 나서 경기 후 Steve Kline은 이렇게 말했다.

"You know what? I'm a dumb hick, and I forget a lot of things, but I'm not gonna forget that."

-Steve Kline, on Torrealaba's steal

Torrealba는 이를 듣고 "어쩔려고? 84마일짜리 패스트볼로 맞출려고?" 라고 응수했고, 그로부터 2주 후인 5월 26일 Rockies와의 홈 시리즈에서 Kline은 이 날 Giants 선발이었던 Matt Morris를 구원해 등판했는데, Tulowitzki에게 이미 안타를 허용해 1사 1루인 상황에서 Torrealba를 다시 상대했다. 그리고 보란듯이 88마일짜리 패스트볼로 Torrealba의 등을 맞춰버렸다. Torrealba는 크게 화를 내며 1루로 걸어나가는 대신 Kline에게 다가갔고, 벤치 클리어링 상황이 벌어졌다. 경기 후 Kline은 "전 그냥 던진건데요. 공이 미끄러워서...야구하다 보면 이런 일도 생기는거죠" 라고 했다. Torrealba는 이후 이 사건이 징계 위원회에 회부되자 "대체 내가 뭘 잘못했냐" 고 물었다.



총평

2001~2004년간 Steve Kline은 무려 300경기에 출장했으며, 팀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역할을 큰 기복없이 수행했다. 특히 그의 연투 능력은 물론이거니와 때로는 LOOGY로, 때로는 2이닝 세이브까지 할 수 있는 유동성은 그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했다. 또한 그는 "볼넷을 내주더라도 내 공을 치게 하지 말자"는 주의로, 커리어 내내 많은 볼넷을 내줬으나 (가장 좋던 Cardinals 시절에도 3.5BB/9IP) 병살타 및 땅볼 유도 능력만큼은 여태껏 Cardinals 불펜을 거쳐간 어떤 투수들에도 꿀리지 않았다. 그러나 Kline의 가장 빛나는 퀄리티는 그의 "competitiveness"와 소위 말하는 "깡다구"로, Rosie, Mujica, Motte 등 순둥이 위주의 우리 불펜 아이들 중에도 이런 캐릭터가 하나 생기면 재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2012년 1월 26일, Steve Kline은 SF 산하 싱글A인 San Jose Giants에서 투수코치로 임명되었으며 성공적으로 코치직을 수행하고 있다. 이제 현역에서 은퇴했기에 더 이상 Dirty Hat을 쓰지는 않는다고 한다.



by Doo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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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ovy



TLR ERA 시리즈 세번째 포스팅의 주인공은 Matt Morris 이다. 1997년 TLR ERA 초창기부터 10여년간 로테이션을 지켜온 Matt Morris는 비록 말년에 배팅볼러로 전락하기는 했으나 20대 시절에는 "묵직한 포심 + 장신에서 내리꽂는 커브" 조합의 전형적인 Cardinals 스타일 에이스로 군림했었다. 한창 타고투저 시절이던 90년대말~2000년대 초, Cardinals에서 한동안 볼수 없었던 리그 상위권의 Front-of-rotation starter로 제몫을 다했으며, 이후 이 계보는 Chris Carpenter-Adam Wainwright 등으로 이어져왔지만 이 중 드래프트를 통해 팀에 들어와 Cardinals 팜시스템에서만 성장한 선수는 Morris가 유일하다.  

여러분들의 폭발적인 댓글 요청으로 인해서 분신술을 실시할 예정이다....는 농담이고 최대한 반영해보도록 할 것을 약속하며, 특히 Craig Paquette이나So  Taguchi, Kerry Robinson 등을 묶어서 다뤄보는 이른바 "쩌리특집"과 "릴리버 모듬" 역시 생각중이다. 일단은 "포스팅 로테이션을 거르지 않고 스프링 트레이닝까지 버텨보는" 것을 목표로 삼고있으며, 옛 생각을 하시며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필자는 더 바랄 게 없다. (매 포스팅마다 스크롤 압박을 드려서 죄송하나 시리즈 특징 상 불가피할 듯 싶다)


자체 생산 에이스


Matt Morris

RHP (Starter)

DOB: 1974년 8월 9일 

Birth: Middletown, NY 

Time with Cardinals:  1995-2005


Draft & Minors

Morris는 1974년 Middletown, NY 출신인데, 공교롭게도 이 도시는 필자가 잠시 거주했었던 동네이며, (Upstate 뉴욕이 다 그렇긴 하지만, 좋게 말하면 Blue-collar 동네, 나쁘게 말하면 상당히 못사는 동네이며, Morris의 아버지는 철광부였다), Morris가 나온 Central Valley High School 역시 그다지 야구로 알려진 학교는 아니다. Morris는 고등학교 때 그냥 조금 잘하는 수준의 유격수였다. 어느 날 친척 결혼식에 가야 했던 Morris는 트라이아웃에 참가할 시간이 없음을 깨닫고 팀 코치에게 부탁, 공식 트라이아웃 전에 공 10개를 던지고 결혼식을 간다. 그러나 코치는 Morris에 공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그를 투수로 발탁하고,, 이게 인연이 되서 Morris는 투수로써의 삶은 시작한다. 고교 졸업 당시 6'5의 큰 키와 91마일에 이르는 빠른 공 덕분에 92년 드래프트에서 Brewers에게 26라운드 지명을 받지만, 낮은 사이닝 보너스를 쌩까고 Seton Hall University로 진학한다. 

대학에 가기로 한 결정은 결과적으로 상당히 잘한 일이었다. Morris는 대학에서 선발투수로 수업을 받으며 투구폼을 가다듬었고, "기복이 있지만 구위는 좋다"는 평가속에 BA 선정 Top College Pitchers로 분류되었으며 1994년 미국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5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12픽, 대졸 투수 중에서는 3번째로 St. Louis Cardinals에 드래프트된다 (계약금 850K). 참고로 Cardinals는 1992~1996년까지 5년 연속으로  아마추어 드래프트 첫 픽을 대학 투수로 뽑았는데, 이는 90년대 초중반 투수난으로 힘겨워했던 구단 사정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1992년 Sean Lowe, 1993년 Alan Benes, 1994년 Bret Wagner, 1995년 Matt Morris, 1996년 Braden Looper, 이 중 Wagner는 Stottlemyre 트레이드 때 사용되었고 Looper로는 Renteria를 데려왔으니 이 정도면 성공인 듯 싶다)


추억이 돋는 1995년 드래프트 1라운드 (필자는 정말 Ben Davis가 엄청나게 클 줄 알았다 ㅎㅎㅎ;;)

Year OvPck Tm Pos WAR Type Drafted Out of
1995 1 Angels Darin Erstad (minors) OF 29.8 4Yr University of Nebraska at Lincoln (Lincoln, NE)
1995 2 Padres Ben Davis (minors) C 2.3 HS Malvern Prep HS (Malvern, PA)
1995 3 Mariners Jose Cruz (minors) OF 17.1 4Yr Rice University (Houston, TX)
1995 4 Cubs Kerry Wood (minors) RHP 26.2 HS Grand Prairie HS (Grand Prairie, TX)
1995 5 Athletics Ariel Prieto (minors) RHP 2.9
1995 6 Marlins Jaime Jones (minors) OF HS Rancho Bernardo HS (San Diego, CA)
1995 7 Rangers Jonathan Johnson (minors) RHP -1.1 4Yr Florida State University (Tallahassee, FL)
1995 8 Rockies Todd Helton (minors) 1B 58.4 4Yr University of Tennessee (Knoxville, TN)
1995 9 Brewers Geoff Jenkins (minors) OF 20.0 4Yr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Los Angeles, CA)
1995 10 Pirates Chad Hermansen (minors) SS -4.0 HS Green Valley HS (Henderson, NV)
1995 11 Tigers Mike Drumright (minors) RHP 4Yr Wichita State University (Wichita, KS)
1995 12 Cardinals Matt Morris (minors) RHP 18.6 4Yr Seton Hall University (South Orange, NJ)
1995 13 Twins Mark Redman (minors) LHP 7.9 4Yr University of Oklahoma (Norman, OK)
1995 14 Phillies Reggie Taylor (minors) OF -0.6 HS Newberry HS (Newberry, SC)
1995 15 Red Sox Andrew Yount (minors) RHP HS Kingwood HS (Kingwood, TX)
1995 16 Giants Joe Fontenot (minors) RHP -0.9 HS Acadiana HS (Lafayette, LA)
1995 17 Blue Jays Roy Halladay (minors) RHP 62.3 HS Arvada West HS (Arvada, 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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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Florida State League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한 Morris는, A볼에서 말그대로 날라다니며 타자들을 씹어먹었는데, 20살에 처음 프로야구를 경험하는 선수치고 상당히 "Polished"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대학 시절 보여준 모습보다 더욱 완성도가 높은 투수라는 평을 받았다.  (Michael Wacha도 올 해 비슷한 평가를 받지 않았는가!)  1996년 ML 스프링 트레이닝에 초대를 받은 Morris는, Grapefruit League 초반 타자들을 압도하는 구위를 선보였고, 당시 Cards 로테이션의 주축 투수들이 부상을 당하면서 파격적인 "AA도 스킵하고 바로 빅리그 진출"을 이룩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시범경기 막판에 부진하면서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Duncan의 조언에 따라 결국 1996시즌을 AA볼에서 시작하게 되는데, 이 역시 Morris에게는 상당히 결과적으로 좋은 결정이었다. 은사이자 당시 Arkansas의 투수코치, Marty Mason을 만나게 된 것이다. 


1994년 미국 국가대표팀 시절


Matt Morris' Minor League Track Record

Year Age Tm Lg Lev Aff W L ERA GS CG SHO IP H R ER HR BB SO BF WHIP H/9 HR/9 BB/9 SO/9 SO/BB
1995 20 New Jersey NYPL A- STL 2 0 1.64 2 0 0 11.0 12 3 2 1 3 13 45 1.364 9.8 0.8 2.5 10.6 4.33
1995 20 St. Petersburg FLOR A+ STL 3 2 2.38 6 1 1 34.0 22 16 9 1 11 31 134 0.971 5.8 0.3 2.9 8.2 2.82
1996 21 Arkansas TL AA STL 12 12 3.88 27 4 4 167.0 178 79 72 14 48 120 711 1.353 9.6 0.8 2.6 6.5 2.50
1996 21 Louisville AA AAA STL 0 1 3.38 1 0 0 8.0 8 3 3 0 1 9 32 1.125 9.0 0.0 1.1 10.1 9.00
AA (3 seasons) AA 12 12 3.89 29 4 4 178.0 190 84 77 14 52 129 759 1.360 9.6 0.7 2.6 6.5 2.48
A+ (2 seasons) A+ 3 3 3.30 8 1 1 43.2 34 23 16 1 13 46 177 1.076 7.0 0.2 2.7 9.5 3.54
A- (1 season) A- 2 0 1.64 2 0 0 11.0 12 3 2 1 3 13 45 1.364 9.8 0.8 2.5 10.6 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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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Arkansas에서 Morris의 성적은 (Texas League에서 던졌다는 사실을 감안해도) 사실 그다지 Impressive할 게 없었다. 그러나 이 시즌 그는 Mason 코치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얻으며 본격적인 "Hurler --> Pitcher" 로의 진화를 감행했고,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투수로써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1997년 Morris를 다시 만난 Duncan는 작년과 비교해 "It's like day and night" 이라며 Morris의 성장을 높이 평가했다.

"When I got sent down, I thought I would dominate [in the Texas League]. What happened was, though, is that I learned more last year than in ten years of pitching...learning how to face adversity...Marty Mason (Arkansas' pitching coach) was a big help...and after a while I starting learning how to pitch."

-Matt Morris, on his Double-A experience 

 1996년 BA Prospect 랭킹 56위였던 Morris는 AA에서의 풀 시즌을 마치고 BA 랭킹 25위에 랭크되었으며, 명실상부 Cardinals 팜 시스템 최고 기대주로 떠올랐다. 스카우팅 리포트에서는 "a consistent 92-95 MPH fastball, along with an above-average curve and rapidly improving changeup"으로 Morris를 묘사했으며, John Sickels는 Morris를 전미 7번째 투수 유망주로 꼽았다. 특히나 훌륭한 패스트볼, 느린 Overhand delivery, 큰 키와 Arm swing을 들면서 무려 Jim Palmer Projection까지 나왔다 (Jim Palmer는 70년대를 씹어드신 Orioles 레전드로, 사이영 3회 수상에 통산 268승 HOF 멤버이다). 추억이 돋는 이 랭킹을 잠깐 살펴보도록 하면...

1997년 Baseball America's Top Prospects

23. Roy Halladay, rhp, Blue Jays
24. Jose Guillen, of, Pirates
25. Matt Morris, rhp, Cardinals
26. Aramis Ramirez, 3b, Pirates
27. Carlos Guillen, ss, Astros
28. Chris Carpenter, rhp, Blue Jays
29. Dmitri Young, 1b, Cardinals
30. Adrian Beltre, 3b, Dodgers
31. Mike Cameron, of, White Sox
32. Braden Looper, rhp, Cardinals
33. Neifi Perez, ss, Rockies
34. Jay Payton, of, Mets
35. Mike Drumright, rhp, Tigers
36. Juan Melo, ss, Padres
37. Eli Marrero, c, Cardinals

1997년-1998년: 성공적인 데뷔

1997년 시즌 개막을 앞두고 Morris는 스프링 트레이닝에 다시 한 번 초청되었고, 이번에는 한 단계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며 당당히 로테이션 한 자리 (4선발)를 꿰찼다. "마이너를 씹어잡수신 1라운더 출신 대졸 투수"에 HOF 투수 컴패리즌까지 나오면서 Morris에 대한 구단의 기대는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었다. Morris는 4월 4일 Astros 원정에서 빅 리그 데뷔를 앞두고 구단의 배려로 하루 먼저 Houston에 가서 대기했으며, 잠을 설쳐가며 기다린 끝에 Astrodome 마운드에 올랐다. 

1회 선두타자 Biggio가 안타를 치고 나가고 2루를 훔쳤으며, Bagwell의 적시타로 1실점. 그러나 이후 Morris는 추가 실점 없이 5이닝 7피안타 1실점 (투구수 79개)의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렀으며, TLR은 경기 후 Morris의 데뷔전을 어떻게 지켜봤냐는 질문에 "Outstanding. He did a good job under tough circumstances. He'll do a better job each time out." 이라며 이 신인 투수의 기를 북돋아주었다. 이 시즌 Morris는 12승 9패 ERA 3.17 (FIP 3.51)을 기록하며 리그  신인왕 투표에서 Scott Rolen에 이은 공동 2위를 차지했으며, 149개의 탈삼진을 잡는 동안 69개의 볼넷을 허용하고 Whip 1.28을 찍었다. 가장 고무적이면서도 우려되었던 부분은 무려 217이닝을 소화하며 데뷔 첫 시즌에 팀내에서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는 점이다.


1997년 루키 시절의 Matt Morris.


1997년 ROY 투표 결과: 공동 2위는 억울하다

Voting Results Batting Stats
Rank Tm Vote Pts 1st Place Share WAR
1 Scott Rolen PHI 140.0 28.0 100% 4.3
2 Livan Hernandez FLA 25.0 0.0 18% 1.7
2 Matt Morris STL 25.0 0.0 18%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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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시즌 4월, Morris는 시즌 첫 등판 후 어깨 부상으로 3개월을 쉬었다. 후반기에 돌아온 그는 이후 3개월동안 무려 108이닝을 던지며 ERA 2.53으로 시즌을 마감했는데, 언뜻보면 이 시즌에 엄청난 성장을 이룩한 것같지만 FIP는 전년도보다 크게 높아진 3.85였다. 잔루율 (LOB%)가 무려 80.9%에 달할만큼 유난히 적은 실점을 헀을 뿐, 세부스탯 (K%, K/BB, HR/9 등) 측면에서는 1997년과 비슷한 시즌을 보냈다 (물론 빅리그 2년차 투수에게 이 정도면 충분히 성공적인 시즌이다). 9월 22일 Astros전에서는 5피안타 무사사구 10K 완봉승으로 본인의 커리어 첫 shutout을 기록했다. 커리어 첫 2년간의 Morris는 아직 스트라이크 존 내에서의 커맨드가 완전히 잡히지 않아있었으며, 위에서 아래로 냅다 꽂는 그의 패스트볼을 믿고 힘으로 압도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1999년-2000년: TJS, 그리고 배움의 시간

1999년 4월 8일, 전년도 신인왕 수상과 20K에 빛나는 Cubs의 Kerry Wood는 James Andrews 박사로부터 Tommy John Surgery를 받는다. 그리고 5일 후인 4월 13일, 1995년 드래프트 동기이자 (위에 1라운더 명단 참조) 라이벌 Cardinals의 기대주 Matt Morris 역시 이 분야의 권위자 Frank Jobe 박사로부터 팔꿈지 인대 접합 수술을 받는다. 거의 같은 시기에 대수술을 받았으나, 이 둘의 이후 향방은 사뭇 달랐다.

수술에서 복귀한지 정확히 12개월이 되는 2000년 스프링 트레이닝부터 Wood는 로테이션에 복귀하기 위해 준비하기 시작했고, 무리해서 페이스를 끌어올린 끝에 5월 1일 시즌 첫 선발 등판, 그리고 그 경기에서 6이닝 1실점의 호투로 깔끔하게 복귀했다. 그러나 여름을 못 넘기고 다시 탈이 났고, 시즌 중 57일을 DL에서 보내면서 8승 7패 ERA 4.80의 그답지 않은 성적을 냈으며, K/9은 극히 평범한(?) 수치로 떨어졌다 (12.7 --> 8.6). Wood가 이 시기를 인내하며 보냈다면 그의 커리어가 조금은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본다.

"We felt it wasn't in anyone's best interest. Matt was still testing himself. He needed to answer the question, Am I O.K.? He didn't need the additional test of having to worry about starting."

-Dave Duncan, on spot-starting Matt Morris during 2000 season


 

반면 Morris는 TLR와 Duncan의 보호 아래 천천히 빅리그 연착륙을 시도했다. 1999시즌을 힘겨운 재활속에 보낸 그는 2000시즌 DK-Hentgen-Benes-Ankiel-Stephenson으로 이어지던 로테이션에 합류하는 대신, 불펜에서 릴리버로 뛰게 된다. 5월 30일 D-Backs 전에서 선발 Ankiel이 6이닝을 던지고 물러나자 Morris는 무려 20개월만에 빅 리그 마운드에 다시 섰고, 초구로 96마일짜리 싱커를 뿌렸다. 3이닝 무실점 세이브. Morris는 이후 투구수 관리를 받으며 주로 7~8회에 2이닝 미만을 던졌으며, 31경기 중 4경기를 제외하고는 40개 미만의 투구수를 기록했다. 중간 중간 선발투수들의 잔부상으로 Spot-starter가 필요했을 때 Morris의 이름이 가장 먼저 올라왔으나, Duncan과 TLR은 Morris를 철저히 보호하며 단 한 번도 선발 등판시키지 않았다. (땜빵 임무는 주로 Britt Reames에게 돌아갔다)

매일같이 구장에 출근하면서도 지루한 재활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던 1999시즌, Morris는 타팀의 에이스 투수들을 연구하고 배우는 노력을 부단히 했다고 한다. 특히 Greg Maddux, Randy Johnson, Tom Glavine, Kevin Brown, Mike Hampton 등 당대 최고의 투수들은 거의 다 NL 소속이었고, 이들이 던지는 모습은 선발투수로써 부활을 꿈꾸던 Morris에게 진부한 표현을 빌리자면 "살아있는 교과서" 였다. 

 

"I remember seeing Kevin Brown pitch against us, and his attitude and aggressiveness screamed, I'm coming at you! It was a prime example of how presence can dominate. He psyched us out..... I started paying attention to pitchers. I learned how to compete. Kevin Brown came out one game, you could hear him grunting, we couldn't touch him. Five days later, he was less intense. We hit him. It taught me a lot about presence on the mound. You see guys out there hanging their head after giving up a homer. You can't do that.

-Matt Morris, on how he studied his contemporaries in 1999 (SI interview)



 

2001년-2002년: 전성기 그리고 The Duel

인고의 세월 끝에 선발투수로 돌아온 Matt Morris의 2001시즌은 역대 Cardinals 선발 투수들이 보낸 시즌 중에 손에 꼽을만큼 훌륭한 것이었다. 만 26세 시즌의 Morris는 패스트볼+커브+체인지업을 적절히 섞어쓰며 무려 22승을 따냈으며 (물론 Albert Pujols의 등장과 함께 물오른 Cards 타선 덕도 많이 보았지만), 이 기록은 1950년대 이후로 구단 역사상 공동 2위의 기록이다 (1위 1970년 Bob Gibson 23승). 세부스탯에서도 20.4%의 K%, FIP 3.05, 그리고 무엇보다 5.9%로 확 끌어내린 BB% (이전까지 7.7~9.0% 사이) 등 모든 면에서 커리어 최고 기록을 찍었다. (3.16 ERA, 185K/54BB, 조정 ERA+ 137 , WAR 6.0) TJS로부터의 적절한 회복, 절정의 구위 (Morris는 당시 95마일의 포심과 리그 최고 수준의 커브, 체인지업을 구사했다) 당대 최고의 수비형 포수였던 Matheny와의 조합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커리어 최고 시즌이었다. 


2001시즌 캠페인을 통해 순식간에 TJS 홍보대사가 되어버린 Matty Mo


아무래도 Morris의 2001시즌을 얘기하면서 빼먹을 수 없는 부분이 NLDS에서 Curt Schilling과 펼친 두 차례의 투수전이다. 

2001년 10월 9일, D-Backs 대 Cardinals의 NLDS 1차전이 Bank One Ballpark에서 열렸다. 사실 정규시즌 22승 투수 두 명이 맞붙는 매치업에서 한 쪽을 "underdog"으로 표현하는 것이 어색하긴 하다. 그러나 (Morris가 커리어 최고 시즌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 Schilling은 거의 모든 면에서 Morris보다 나은 시즌을 보냈으며, 이미 포스트시즌의 강자로 명성을 떨친 바 있는 승부사였다 (반면 Morris는 포스트시즌 첫 선발등판). 게다가 원정에서의 시리즈 1차전 (이 시즌 Morris의 원정 평균자책은 5.15였다). 다음 경기 상대 선발은 Randy Johnson. 더 이상 부담스럽기도 힘든 경기였다.   

 1차전 1회말, Morris는 무사 2,3루의 위기에 몰렸으나 상대 클린업 Luis Gonzalez를 삼진, Sanders를 파울플라이, Grace를 1루땅볼로 유도하며 실점하지 않고 이닝을 넘어갔다. 4회에도 1사 1,3루의 위기를 무실점으로 넘어가면서 5회까지 0:0. 그러나 5회말 선두타자 Damian Miller가 종아리에 공을 맞고 나갔고, Schilling이 2스트라이크 이후에 절묘하게 1루측으로 번트를 성공시키며 1사 2루를 만들었다. Morris는 무사히 Womack을 잡아냈으나 결국 Steve Finley에게 중전안타를 허용했고, 이 점수가 결승점이 되었다. 계속된 2사 1루에서 Luis Gonzalez가 Morris의 커브 실투를 제대로 후려쳐 워닝트랙쪽으로 타구를 띄웠으나 중견수 Edmonds가 Leaping catch로 홈런 타구를 걷어내면서 추가실점 없이 이닝 종료. 중계를 보면서 감탄과 동시에 "아, 이 수비를 기점으로 분위기가 바뀌겠구나" 하고 헛꿈을 꾸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러나 Schilling은 이닝이 거듭될수록 힘을 내는 듯 했으며, 101개의 공으로 3피안타 완봉승을 거둔다. 


Curt Schilling vs. Matt Morris. 둘 중 한 판만 이겼어도...


Morris는 이 경기에서 무려 122개의 투구수를 기록하면서 혼신의 힘을 다했고, 위기때마다 집중력을 잃지않고 최소한의 실점으로 막아내며 제몫을 다했다. 경기 후 TLR, McGwire, Bob Brenly 등은 양측 투수를 모두 칭찬했으며, 특히 McGwire는 "Probably the best pitcher's duel I've seen" 이라고 했는데, 이 양반은 아무때나 "best"를 갖다붙이니 뭐...

Division Series는 2차전에서 Woody Williams가 Randy Johnson을 상대로 승리투수가 되면서 전혀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DK57이 등판한 3차전은 졌으나 Bud Smith (참으로 오랜만이다 이 이름!) 가 등판한 4차전은 승리하면서 결국 5차전에서 다시 똑같은 매치업으로 경기가 열렸다. Morris는 4회말 선두타자 Reggie Sanders를 상대로 엄한 커브를 스트라익존에 걸치다가 솔로홈런을 허용했으나, 이를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1차전보다 더 나은 투구내용을 보여주며 7회까지 0:1 경기를 유지했다. 그리고 8회초 2사 주자 없이 J.D.Drew가 근 17이닝만에 Schilling으로부터 처음 점수를 뽑아내는 솔로 홈런을 치며 마침내 경기를 동점으로 만들었다 (Schilling은 4년 전 Drew가 Phillies와 계약하지 않았을 때 Drew를 대놓고 Punk라고 부르면서 도발한 바 있다) 

He's an elite pitcher. I'm honored to sit back and watch how he executed in a situation like this. That's not easy for a guy that's been here 100 times, and he's still a young pitcher.

-Woody Williams, on Matt Morris' performance in NLDS

8회말, Morris는 투구수 103개에서 다시 마운드에 올랐고, 2사 후 안타-볼넷으로 1,2루 위기에 몰린 상태로 좌타자 Mark Grace와 맞섰다. TLR은 Morris를 믿고 교체하지 않았고, Morris는 7구만에 Grace를 삼진처리하면서 투구수 130개를 채우고 내려왔다. 

에이스의 투혼으로 위기를 벗어난 상황에서 맞는 9회초, 이제 점수도 동점이고 분위기는 오히려 Cards쪽이 좋았다. 선두타자 Edmonds가 안타를 치고 나가면서 벤치도 슬슬 에너지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 때 다음타자인 McGwire 대신 TLR은 Kerry Robinson을 대타로 투입하고 번트를 대게하며, 번트 성공으로 1사 2루가 된 상황에서 후속 Renteria와 Matheny는 Schilling의 98마일 패스트볼에 방망이가 잇따라 허공을 가르며 삼진으로 물러난다. (TLR의 Kerry Robinson 드립은 이후 one of the most controversial moves of his career 로 남게된다. 당시 McGwire의 타격 슬럼프는 공공연히 알려진 바였고, Renteria가 Schilling을 상대로 1차전에 안타 2개를 친 바 있긴 했으나, 이게 과연 맞는 콜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이후 시리즈의 결말은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Tony Womack의 walk-off-bloop-single로 허무하게 막을 내린다.


“To be sitting on the bench and watching Curt Schilling and Matt Morris, that isn’t major league, it’s a league above this one. I’m not a betting man, but 15 innings, two runs (for Morris), you would have thought he would have won both.”

-Tony La Russa, after NLDS was over 


결과적으로 Morris는 두 차례 등판에서 모두 Schilling에게 패배했으나 (5차전은 비긴 셈 쳐도 되지 않을까 싶다) 전국구 에이스로 크게 발돋움하는 퍼포먼스를 무려 두 차례나 선보였으며, Curt Schilling의 아성에 전혀 꿀리지 않는 모습과 2경기에서 무려 252구를 던지는 투지로 크게 어필을 했다. 팀은 아쉽게 DS에서 탈락했으나, 2001년 포스트시즌은 Morris 커리어의 최정점으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Morris는 플레이오프 이후 3년간 27M의 계약을 체결, St. Louis에 그의 20대를 바치기로 한다.

2002년에도 Morris는 17승 9패 ERA 3.42 (FIP 3.32) 210.1이닝 171삼진 64볼넷으로 2001년과 비슷한 레벨의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정규시즌에 Curt Schilling과 다시 대결한 Morris는 이번에는 7이닝 4실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Schiling이 엄청나게 두들겨맞으며 (6이닝 9피안타 6실점) 승리투수가 되었다. 또한 이 해 NLDS에서 다시 D-Backs를 만났고, 다시 1차전 투수로 낙점되어, 이번엔 Randy Johnson을 상대로 7이닝 2실점 승리투수가 되며 작은 복수를 한다.  

이렇게 2년간 Morris는 ML 전체 투수들 중 9위에 해당하는 WAR 10.6을 기록했으며 (Greg Maddux와 Rocket이 10.5, 1위 Randy Johnson 19.4 -_-), 그가 거둔 39승은 전체 투수들 중 5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쉴링, 존슨, 페드로, 로켓 등 괴물 및 거물들이 너무 많던 시대여서 그렇지 Morris가 이 당시 기록한 성적도 상당히 뛰어난 것이었다. 2002년 시즌 중반, 멘토이자 절친한 동료였던 Darryl Kile의 죽음은 유난히 Morris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Morris는 원정을 가면 Kile과 함께 주변의 학교, 동물원이나 공원 (San Diego 동물원, Denver의 Estes Park, UCLA 캠퍼스 등) 으로 쏘다니며 함께 많은 추억을 쌓았다고 한다.   


Morris는 승부사 기질이 강했고, 클럽하우스에서도 인기 있는 선수였다.



2003년-2005년: 잃어버린 패스트볼, 그리고 내리막

Morris의 커리어는 2001~2002년을 정점으로 서서히 decline을 시작하는데, 2003시즌에 Morris의 나이가 고작 28세였음을 생각하면 상당히 내리막이 빨리 시작한 편이다. 2003년, 커리어 내내 0.5~0.6 수준이었던 Morris의 HR/9은 드디어 1을 넘어갔고, 이 수치는 결국 내려오지 않았다 (1.04-->1.56-->1.03).  구속 저하 트렌드도 벌써 시작해서 2002년 91.6마일이었던 패스트볼 구속은 2003년 90.6 --> 2004년 89.4 --> 2005년 89.2로 서서히 떨어졌다. 

2003년 Morris는 6월들어 어깨에 불편함을 느끼며 자꾸 투구 메카닉이 흔들렸고, Dave Duncan과 함께 이를 고치려 노력했으나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6~7월 두 달간 거의 매 경기 무너지던 그는 결국 7월 21일에는 라인드라이브 타구를 맞고 오른손이 부러졌었고, 부러진 와중에 팀 동료들과 호텔에서 말뚝박기 비슷한 놀이를 하다가 발목이 부러졌다. 그나마 9월에 복귀한 후 한 달간 5경기에서 35이닝을 던지고 3승 2패 ERA 2.83을 찍으며 아직 죽지 않았음을 과시했는데, 이게 사실상 Morris가 Morris답게 던진 마지막 한 달이었다.

"Whether it was due to shoulder weakness or mechanical troubles, Morris was no longer the power pitcher who could blow any opponents with his hard stuff. A tell-tale sign that he often could not get his shoulder loose was that three times in second half, he was knocked out within the first two innings. Except on rare occasions, his fastball rarely topped 90-92 mph level. As a result, Morris had to rely more on his breaking stuff and sinker. 

- Scouting Notebook 2005, on Matt Morris

2004년 그의 패스트볼은 구속과 구위를 동시에 잃으며 -13.4의 Pitch Value (구종가치)를 찍었는데, 이 시즌을 기점으로 Morris는 사실상 커브와 체인지업, 그리고 싱커와 커터에 의존하는 투수로 변신해야했다. Morris가 개인적으로는 최악의 시즌 (ERA 4.72, 피홈런 리그 2위 35개) 을 치르면서 "세월의 무게"와 '내 공의 한계" 깨닫는 사이, Cardinals는 Murder's Row의 위엄을 앞세워 WS까지 진출한다. 

Morris는 WS 2차전에서 3년 전 만났던 Schilling과 운명처럼 다시 한 번 대결하는데, Morris는 3년 전 그 투수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미 DS와 CS에서 더 이상 그 정도 구위로는 플레이오프에서 버틸 수가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매 이닝 고전한 끝에 Varitek에게 2타점 3루타 (Varitek에게 3루타라니 참 -_-) Bellhorn에게 2타점 2루타를 맞았고, 5회말 1사 1루에서 Cal Eldred에게 공을 넘기며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WS 등판을 마감했다. 그리고 필자는 눈물을 머금고 TV를 껐던 기억이 난다. (당시 Morris는 3일 휴식만에 등판한 것 치고는 나쁘지 않은 구위를 보여주었으나, 커리어 첫 3일 휴식 등판을 하필 Fenway에서 Red Sox를 상대로 했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인정은 하지만 좋아하긴 힘든 양반


이 해 11월 어깨 Labrum 수술을 받은 Morris는, 이로 인해 조금 시즌을 늦게 시작했으나, 커리어 로우인 4.5%의 BB%를 기록하면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다. 떨어지는 구속을 커버하려면 공격적이면서 보다 정교한 제구력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 Morris는 커브, 체인지업, 싱커 위주의 레퍼토리로 완전히 돌아섰다. 

시즌 첫 8번의 decision을 모두 승리로 따내며 8연승을 구가한 Morris는 전반기를 10승 2패 3.10으로 마무리하며 Carpenter-Mulder 원투펀치의 뒤를 잘 받쳐주었는데, 후반기에는 크게 고전하며 4.11의 (나쁘지는 않은) 평균자책으로 시즌을 마무리한다. 2004년 장기계약이 끝나고 Morris는 Cardinals과 인센티브가 많이 포함된 1년 2.5M의 계약을 했는데, 2005년의 활약은 그 수준의 연봉을 합리화하기에는 충분한 수치였다 (운빨이 있든 없든간에). 그의 K/9와 패스트볼 구속은 2001년을 기점으로 꾸준히 떨어지고 있었고, 2005년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7.70 --> 7.32 --> 6.27 --> 5.84 --> 5.47)

2005년 NLDS에서 Morris는 한 수 아래 전력으로 평가된 Padres를 상대로 PETCO Park에서 자신의 커리어 마지막 플레이오프 승리를 거두며 (6이닝 2실점) 시리즈 클린처에서 승리투수가 된다. 그리고 이 등판이 Morris의 커리어에 있어서 가장 마지막으로 빛난 순간이었으며, Morris는 NLCS에서 Astros를 상대로 한 차례 더 등판한 후 그의 Cardinals 시절을 마감한다. 


2006년-은퇴: 

2005시즌을 성공적으로 보내면서 Morris의 시장 가치는 "한 물 갔지만 그래도 아직은 쓸만한 3선발 내지는 Back-of-the-rotation guy" 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Morris의 현저한 구위 저하로 인해 어떤 팀도 Morris에게 장기 계약을 안겨주지는 않을 것으로 보였다.  

 Morris는 2006년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를) Giants와 3년 26M에 계약했고, 5.5M의 연봉을 받았던 첫 해 10승 15패 ERA 4.98로 리그 패전 부문 2위를 기록했으며, K/9는 이제 5.02로 더욱 떨어졌다. 2007년 시즌 Morris의 연봉은 10M이 넘어갔고, Sabean은 Morris를 처분하기 위해 수많은 팀들에게 오퍼를 했으나 (많은 연봉 부담을 하기로 약속하고) 어떤 팀도 이제 Morris를 데려가려고 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던 중 Pirates가 Morris를 데려가는데, 필자가 굳이 사족을 다는 것보다 "최악의 트레이드" 포스팅에서 FreeRedbird님이 쓰신 코멘트를 한번 돌이켜보도록 하자.

20. The Pittsburgh Pirates traded Rajai Davis(CF) and Steve MacFarland(RHP) to the San Francisco Giants for Matt Morris(RHP). (2007년 7월, Pirates GM: Dave Littlefield, Giants GM: Brian Sabean)
이 리스트의 모든 트레이드가 어처구니없는 일방적인 딜이긴 하지만, 사실 대부분 시간이 지나고 나서 결과를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며, 딜 당시만을 생각하면 한쪽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기는 약간 어려운 경우도 많다. 심지어 Pedro Matinez-Delino DeShields와 같은 트레이드도 딜 당시에는 어느정도 이해가 가는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이 트레이드만큼은 어떻게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이 트레이드는 데드라인 직전인 7월 31일에 일어났는데, 당시 Pirates는 42승 62패로 1위에 14.5게임 뒤져 있었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가능성은 제로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Littlefield는 무슨 생각인지 Rajai Davis같은 유망주를 내주고 노쇠한 Matt Morris를 영입한 것이다...!! 당시 Morris는 2008년까지 무려 13M이 넘는 연봉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는 Pirates에서 16게임에 선발 등판하여 7.04 ERA를 기록하고는 2008년 4월 말에 방출되었으니, Pirates는 그의 선발등판 1회 당 1M에 가까운 돈을 지불한 셈이다. Morris는 Pirates에서 방출된 후 은퇴하였다.

              -FreeRedbird, in "최악의 트레이드 25선"


2008년 스프링캠프에서 Morris는 18.2이닝동안 39피안타 20자책점을 기록하면서 먼지나게 두들겨 맞았다. 그리고 정규시즌이 시작하자 4월 한 달간 다음과 같은 처참한 등판일지를 기록하고 4월 28일 방출되었으며, 며칠 후 은퇴했다. 선수생활 막판의 Morris의 모습은 자신감과 의욕을 모두 잃은듯한 모습이었고,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는 의지도 없어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구위는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Morris가 방출이 된 직후 바로 은퇴를 해버리면서, Pirates는 잔여 연봉 10M을 Morris에게 지불해야 했다. 이를 두고 한 측에서는 "어차피 은퇴할 거였으면 그냥 은퇴를 했었어야지 치사하게 연봉 받을려고 방출되기를 기다렸냐" 는 비난이 나왔고, 이로 인해 커리어 내내 신사같은 이미지로 사랑받았던 Morris의 가는 길이 조금 지저분해졌다. 

Matt Morris' Final Month of his career

Rk Date Opp Rslt Dec IP H R ER BB SO HR ERA Pit GB FB GSc
1 Apr 4 FLA L,4-5 5.0 8 4 3 2 2 1 5.40 98 7 15 37
2 Apr 10 CHC L,3-7 L(0-1) 7.0 11 7 4 2 3 2 5.25 113 12 18 34
3 Apr 15 LAD L,2-11 L(0-2) 4.2 7 6 6 1 1 0 7.02 79 8 10 26
4 Apr 21 FLA L,4-10 L(0-3) 4.0 9 8 8 1 2 2 9.15 99 9 9 13
5 Apr 26 PHI L,4-8 L(0-4) 1.2 6 6 3 1 1 1 9.67 71 3 9 25
22.1 41 31 24 7 9 6 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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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Russa 영구결번식에 참석한 Matt Morris. 아직 살이 찌지 않아서 보기 좋다.


총평

Morris는 TLR ERA와 거의 동시에 커리어를 시작했으며, TLR 시절의 Cardinals를 대표하는 투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꽤 오랜 기간동안 Morris가 없는 Cards 로테이션은 상상하기 힘들었으며, 전성기 시절 12-6 커브는 많은 감독들과 선수들로부터 극찬을 받았고, 2004년의 갑작스런 쇠퇴 전까지는 매년 "Cy Young stuff" 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비록 28세 시즌부터 급격히 쇠퇴하게 된 것은 정말 아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찍 데뷔했기에)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을 표방했던 투수들 중 하나로 볼 수 있으며, 특히 Cardinals 역사에 있어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훗날 Chris Carpenter나 Adam Wainwright과 같은 역사적 상징성을 가질 투수이다. 포스팅을 하면서 다시 곱씹어보았을 때 아쉬운 부분이 한 두개가 아니었는데, 1) 28세 시즌부터 그렇게 급격한 구위하락을 겪게 된 것과 2) TLR ERA에서 일궈낸 2차례 우승 중 한번도 끼지 못했다는 점이다. 

At his peak, Morris was one of the best pitchers in baseball, but his body couldn't sustain dominance past the age of 28, and by the end he was surviving with mirrors and moxy. Although the Jim Palmer comps he got in college didn't pan out, he was a very good pitcher.

-John Sickels, on Matt Morris' Career

All-time Cardinals Strikeouts Leaders

Rank Player Strikeouts IP
1. Bob Gibson 3117 3884.1
2. Dizzy Dean 1095 1737.1
3. Chris Carpenter 1085 1348.2
4. Bob Forsch 1079 2658.2
5. Matt Morris 986 1377.1
6. Jesse Haines 979 3203.2
7. Steve Carlton 951 1265.1
8. Bill Doak 938 2387.0
9. Adam Wainwright 908 1073.0
10. Larry Jackson 899 1672.1



Did you know...?

  • Morris는 2004년 6월 20일 Busch Stadium에서 Ken Griffey Jr.에게 그의 개인통산 500호 홈런을 허용했다.

  • 2002년 Morris는 NL 올스타에 선발되었는데, 당시 Darryl Kile의 사망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Morris는 올스타전에서 던지지 않을 것을 요청했으며, Braves의 릴리버 Mike Remlinger가 그를 대신해 들어갔다. 그리고 2002년 올스타전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전무후무한 "무승부" 올스타전으로, 연장 11회에 양팀을 통틀어 뛰지 않은 선수는 Matt Morris 단 한 명이었다. 

  • 2001시즌 Busch Stadium에서 Morris는 가히 Unbeatable이었다. 그는 홈에서 15승 2패 1.62의 평균자책을, 원정에서 7승 6패 5.15의 평균자책을 기록했다. Jaime Garcia는 이거에 비하면 양반이다.

  • 2004시즌 Morris는 원정에서 무려 6.02의 평균자책을 기록했다. 홈 보이인줄은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 Morris는 현재 부인인 Heather Reader를 2000년 불펜에서 (TJS 수술 때문에 릴리버로 뛸 당시) 만났다고 한다. 2000년 9월 당시 Cubs 원정에 가있던 그는 원정팀 불펜 옆에 앉아있던 MLB.com의 Cubs 담당 리포터 Reader에게 말을 걸게 된다(Morris는 당시 곁에 있던 Alan Benes에게 "저 여자 정도면 결혼해도 되겠다" 는 진부한 드립을 쳤다). 결국 둘은 2002년에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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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ovy


TLR ERA 시리즈의 두번째 포스팅의 주인공으로는 Edgar Renteria를 꼽아보았다. 참고로 이 시리즈에서 다룰 선수들은 전혀 미리 정해진 바가 없으며, 그때 그때 필자가 기분에 따라서 그냥 맘대로 하고 있다. 혹시 다뤘으면 하는 선수가 있다면 댓글에 말씀해주시길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옛 스타들을 돌아보자"는 취지에 걸맞게 Albert Pujols나 현 Cards 멤버들은 다루지 않을 생각이다)

다들 동의하실 것이라고 믿는데, Edgar Renteria는 Cardinals에서 근 20년간 뛰었던 유격수들 중 가장 뛰어난 공격력을 자랑했던 선수로, AL의 3대 유격수 (Jeter, Nomar, A-Rod)가 군림하던 시절 홀로 NL에서 군계일학과도 같은 모습을 보였다. Edgar Renteria 이후로 Cardinals의 SS 포지션은 David Eckstein, Brendan Ryan, Ryan Theriot, Rafael Furcal 등이 돌려막고 있지만, 이들 중 누구도 공수를 모두 갖춘 Renteria에 근접하지 못했다.




Edgar Renteria

Shortstop

DOB: 1976년 8월 7일 

Birth: Baranquilla, Colombia 

Time with Cardinals:  1999-2004


Recruit & Minors

Renteria는 Marlins의 중남미 지역 전문 스카우트이자 당시 Venezuela에 있었던 Levy Ochoa의 눈에 띄었다 (이후 Ochoa는 Hanley Ramirez, Alex Gonzalez, Anibal Sanchez 등 쟁쟁한 선수들을 발굴한다). 1992년 1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는 Marlins와 계약을 맺었고 그 해 GCL Marlins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계약 당시 그의 나이는 15세 5개월밖에 되지 않아서 MLB 사무국의 제재를 받을 상황이었고(규정은 최소 16세), 75년생으로 한 살을 올려서 등록하는 꼼수를 써서 Ochoa가 Marlins에 입단시켰다 (물론 ML 데뷔후에 76년생으로 정정했다)

 중남미 야구 유망주들에게 흔한 스토리이긴 하지만, Renteria 역시 애통터지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Renteria의 아버지 Francisco Renteria는 Edgar가 한 살때 고혈압으로 사망했고, 그의 홀어머니가 길거리에서 복권과 군것질 거리를 팔면서 혼자 8남매를 키웠다고 한다. 어렸을 때 Edgar는 야구보다 축구에 더욱 재능이 있었으며, 원래는 축구 선수를 하려고 했었다고 한다 (게다가 Colombia는 야구보단 축구 열기로 더욱 후끈한 나라이지 않은가).

그러나 Edgar의 형인 Edinson Renteria가 동생이 웬만하면 야구를 하도록 권유했고, Edgar는 형의 추천과 "좀 덜 뛰어도 된다" 는 참으로 공감가는 이유로 야구를 선택했다고 후에 인터뷰에서 밝혔다. Edgar의 큰 형이자 멘토였던 Edinson은 Astros 산하 팜에서 2루수/3루수로 뛰면서 AAA까지 올라갔으나 끝까지 메이저리그를 밟지는 못했다.  

"I picked baseball because there's a lot less running. My brother always got on me, trying to convince me to pick baseball over soccer. If I didn't think I'd make it to the major leagues, I would have played soccer. I was a stud in soccer."

-Edgar Renteria, on his decision to play baseball

Edgar Renteria's Minor League Track Record

Year Age Tm Lg Lev G PA AB R H 2B 3B HR RBI SB CS BB SO BA OBP SLG OPS TB
1992 15 Marlins GULF Rk 43 175 163 25 47 8 1 0 9 10 6 8 29 .288 .329 .350 .679 57
1993 16 Kane County MIDW A 116 428 384 40 78 8 0 1 35 7 8 35 94 .203 .268 .232 .500 89
1994 17 Brevard County FLOR A+ 128 478 439 46 111 15 1 0 36 6 11 35 56 .253 .307 .292 .598 128
1995 18 Portland EL AA 135 558 508 70 147 15 7 7 68 30 11 32 85 .289 .329 .388 .717 197
1996 19 Charlotte IL AAA 35 143 132 17 37 8 0 2 16 10 4 9 17 .280 .326 .386 .713 51
6 Seasons 459 1788 1630 200 423 54 9 10 167 63 40 121 281 .260 .310 .322 .632 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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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 함께 야구를 하고 싶어서 시작했으나, Edgar의 재능은 정말 장난 아니었다. 15세의 나이로 프로야구를 시작해 매년 상위 레벨로 승격했으며, Marlins도 Renteria에 대한 기대가 컸다. 물론 루키 시즌에는 41게임에서 에러를 24개나 저지르는 혹독함을 맛보았지만, 그것보단 "15세짜리 선수가 루키리그에서 Gulf Coast League에서 .288을 쳤다"는 사실이 더욱 부각되었고, GCL 내에서 3위의 유망주로 평가를 받았다. 93년에는 슬럼프를 겪었으나 구단은 그를 과감히 FSL로 승격시켰고 (사실 그것보단 Marlins 팜이 얇았던 탓이 크다), 94년 Renteria는 FSL 올스타에 선정되면서 보답을 했다. 

이듬해 AA로 올라왔을 무렵 그의 수비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고 (134경기 33에러) 타고난 운동 신경과 강한 어깨까지 증명하면서 AA를 씹어먹었는데, 특히 깡마른 체구를 보완하기 위해 20파운드의 체중 증량을 했던 것이 공/수 모든 면에서 슬슬 효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1995시즌이 끝나고 BA에서는 Renteria를 전미 33위 유망주이자 Marlins 팜내 1위 유망주로 인정했으며, Renteria는 구단 내 올해의 마이너리거로 (Organizational Player of the year) 뽑힘과 동시에 A-Rod의 아성을 위협할 수준의 유격수 유망주 레벨로 올라섰다. 당시만 해도 "공격력을 갖춘 유격수"라는 컨셉이 워낙 희귀할 때였기에, Renteria 정도의 재능은 정말 찾기 힘든, 요즘으로 치면 한창 천재 소리 들을 당시의 Hanley Ramirez와 비슷한 느낌이었다고 사료된다. 실제로 Renteria와 Han-Ram을 모두 발굴한 Levy Ochoa 는 Hanley Ramirez를 보고 "마치 내가 Renteria를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라고 한 바 있다.

 Renteria is a defensive whiz. He had the instincts the day he signed, and despite growing he has gotten quicker and developed more arm strength. He's going to make all the routine plays and throw in the dazzlers too. 

-Baseball America, December 1995, on Edgar Renteria

1996년: 화려한 데뷔 

1996년 5월 8일, Marlins는 기존 유격수 Kurt Abbott에게 경미한 부상이 생기자 바로 AAA로 강등시키고 Edgar Renteria를 승격시켰다. Kurt Abbott이 굉장한 스타 플레이어는 아니었으나 당시 Abbott은 딱히 타격 슬럼프가 있던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평년보다 잘치고 있었다) 그렇다고 부상이 심각한 것도 아니었으니, 당시 Marlins 프론트가 얼마나 만 18세의 Renteria를 써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는지 대충 알만하다. Renteria는 승격 후 2주만에 주전 유격수 자리를 꿰찼고, Kurt Abbott은 복귀 후에 2루수로 밀려났다. Renteria는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334의 타율과 .807의 OPS를 기록했고, 7월 25일부터 8월 16일 사이에는 22게임 연속안타를 기록하기도 했다.

Renteria에게는 두고두고 아쉬울 1996년 신인왕 투표

Voting Results Batting Stats Pitching Stats
Rank Tm Vote Pts 1st Place Share WAR G AB R H HR RBI SB BB BA OBP SLG OPS
1 Todd Hollandsworth LAD 105.0 15.0 75% 0.9 149 478 64 139 12 59 21 41 .291 .348 .437 .785
2 Edgar Renteria FLA 84.0 10.0 60% 3.1 106 431 68 133 5 31 16 33 .309 .358 .399 .757
3 Jason Kendall PIT 30.0 1.0 21% 1.4 130 414 54 124 3 42 5 35 .300 .372 .401 .773
4 F.P. Santangelo MON 15.0 1.0 11% 3.1 152 393 54 109 7 56 5 49 .277 .369 .407 .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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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WS Game 7 Walk-Off

아직도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본 월드시리즈로 기억에 남는 1997년 Indians vs. Marlins의 시리즈. 7차전 Charles Nagy가 마운드에 올라왔을 때, 그리고 끝내기 타구가 내야를 빠져 나가면서 Craig Counsell이 홈으로 치닫던 순간의 희열이 아직도 짠하다.  이 끝내기 안타의 주인공은 어린 콜롬비아 출신 유격수였고, Edgar Renteria라는 이름은 도저히 잊을 수가 없는 이름이 되었다. 특히 Renteria의 모국인 콜롬비아는 Renteria가 빅 리그 로스터에 포함될 때부터 국민적 응원을 보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콜롬비아 출신 빅 리거는 Renteria가 4번째라고 한다 (그리고 이 정도의 임팩트있는 커리어도 당연히 Renteria가 처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1997년 Renteria는 팀의 주전 유격수로 완전히 자리를 잡긴 했으나, 사실 포스트시즌에서는 부진한 편이었다. NLDS 1차전에서 Giants를 상대로 Walk-off single을 치며 좋은 출발을 보였으나, 이후 WS 7차전까지 가는 동안 딱히 이렇다 할 활약은 없었다 (그러나 수비에서 당시 Renteria는 훌륭했다). Marlins는 고대하던 Latin-America 출신의 프랜차이즈 스타를 얻은 듯 보였다. 그러나...


1998년 12월 14일, [드디어] Cardinal 유니폼을 입다

1996~1998년 사이 Cardinals 주전 유격수였던 Royce Clayton은 시즌 중 Rangers로 옮겨갔고, 12월 초에는 Rangers와 재계약까지 마쳤다. 이미 파이어세일에 돌입했던 Marlins 단장 Dave Dombrowski는 22세의 나이에 올스타에 선정된 유격수 Renteria를 빨리 처분할 생각이었다. 12월 14일, Marlins는 1996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3번 출신인 우완 Braden Looper, 릴리버 Armando Almanza, 유격수 Pablo Ozuna를 받고 22세의 젊은 유격수를 Cardinals로 넘겼다. 이후 Braden Looper는 Marlins를 위해 5년간 388이닝을 소화하며 조정ERA 115를 기록했으며, Almanza는 5년간 199이닝을 소화하고 조정ERA 89에 그쳤다. Pablo Ozuna는 Marlins에서 48게임을 뛰는 데 그쳤으니, 이 정도면 "18승 투수와 Adam Kennedy를 주고 휴먼 하이라이트 필름을 받아왔던 바로 그 트레이드" 못잖게 뛰어난 "Walt Jocketty's Best Moves 컬렉션"에 낄만 하지 않은가? (물론 Braden Looper는 누구나 저것보단 더 잘할 것으로 생각했다...)

"This is a deal we've been talking about for quite a while. We think we got the No. 1 guy we wanted.''

-Walt Jocketty, after trading for Edgar Renteria 


1999년-2004년: NL에서는 적수가 없다

Renteria는 Cardinals에서 뛰는 6시즌동안 뛴 경기는 903경기, 그 기간동안 기록한 WAR는 19.4이다. 이는 같은 기간동안 전체 NL 선수들 중 27위에 해당하는 성적이며 (Cards 선수들 중에서는 Edmonds가 7위, Pujols가 12위) 유격수 중에서는 Renteria가 유일하게 30위 안에 든다. 말할 것도 없이 Renteria는 STL 유니폼을 입고 있는 동안 NL 유격수 부문에서는 독보적인 행보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2위 Rich Aurillia, WAR 18.1)

Edgar Renteria (1999-2004)

Year Age Tm G PA AB R H 2B 3B HR RBI SB CS BB SO BA OBP SLG OPS OPS+ TB GDP SH SF IBB Awards
1999 22 STL 154 653 585 92 161 36 2 11 63 37 8 53 82 .275 .334 .400 .734 84 234 16 6 7 0
2000 23 STL 150 643 562 94 156 32 1 16 76 21 13 63 77 .278 .346 .423 .770 93 238 19 8 9 3 AS,SS
2001 24 STL 141 549 493 54 128 19 3 10 57 17 4 39 73 .260 .314 .371 .685 77 183 15 8 6 4
2002 25 STL 152 609 544 77 166 36 2 11 83 22 7 49 57 .305 .364 .439 .803 113 239 17 7 5 7 MVP-20,GG,SS
2003 26 STL 157 663 587 96 194 47 1 13 100 34 7 65 54 .330 .394 .480 .874 130 282 21 3 7 12 AS,MVP-15,GG,SS
2004 27 STL 149 642 586 84 168 37 0 10 72 17 11 39 78 .287 .327 .401 .728 88 235 14 6 10 5 AS
STL (6 yrs) 903 3759 3357 497 973 207 9 71 451 148 50 308 421 .290 .347 .420 .768 98 1411 102 38 44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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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ted 1/4/2013.

2000시즌 Renteria는 다시 한 번 올스타에 뽑힘은 물론이거니와, 유격수로써는 평균 이상인 93의 조정OPS를 찍으면서 선전했고, 표면 성적에서도 16홈런 76타점에 OPS .770, 팀내 타점 2위, 도루 1위 등 모든 면에서 커리어 하이를 찍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기록한 .770/93의 OPS 수치는 이 팀내에서 9위에 해당되는 수치였다 (그만큼 Cards 타선은 강했고 리그내 타고투저 경향도 셌다). 그가 기록한 16홈런은 역대 Cards 유격수 최고 기록이다.

2001시즌은 여러가지 면에서 슬럼프였는데, 초반부터 극심한 슬럼프에 빠진 Renteria의 타율은 간신히 2할에 턱걸이를 한 상태로 6월까지 이어졌다. 당시 Renteria의 부진은 지나치게 "장타에 맛을 들여" 공을 띄우는데 집중하다가 스윙이 커지고 리듬을 잃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Renteria는 생각보다 괜찮은 파워를 지니고 있지만 결코 파워히터가 아니며, Line-Drive 타구를 노리는 스윙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평가가 마이너 시절부터 따라왔었다. 2001시즌은 그런 의미에서 Renteria에게 큰 경험이 된 해였다. 스윙이 커지자 고작 39개의 볼넷을 골라내는데 그쳤고, 출루율은 간신히 3할을 넘었다. 


멍 때리지 않을 때 Renteria의 수비는 훌륭했으며, 어려운 타구도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재능이 있었다 (Photo Credit: Barry Taylor)


2002시즌들어 Renteria는 점차 숙성해가는 모습을 보이며 공격과 수비에서 모두 큰 발전을 이룩했다. 수비에서는 이전에 보였던 "Careless lapses" 혹은 "집중력 부족" 문제를 눈에 띄게 줄였고 (이전의 Renteria는 우리가 종종 Starlin Castro에서 발견하는 종류의 멍때림 현상을 보여주곤 했다), 특히 Cuba 출신 2루수 Fernando Vina와의 호흡에 완숙미가 더해지면서 둘의 Middle-infield 는 다른 팀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상전벽해라는 말이 실감난다).

또한 타석에서도 Renteria는 스윙을 많이 컴팩트하게 줄여서 변화구 대처 능력을 크게 키웠고, Opposite-field power를 위해 오프시즌에 근육량을 더 늘렸다. 결과적으로 삼진은 줄었고 (73->57) 볼넷은 늘었으며 (39->49) 리그 내 득점권 타율 3위를 기록했다.  

2002시즌 중반에 Jocketty가 (역시 이 시리즈에서 다루고 싶은 인물인) Scott Rolen을 데려오면서 Cards는 Scott Rolen-Edgar Renteria-Fernano Vina-Tino Martinez로 이어지는 매력적인 내야진을 구성하게 되는데, 이 시즌 3루수 Rolen-유격수 Renteria-2루수 Vina 3명은 모두 각 포지션에서 골드 글러브를 수상하게 된다. (사실 Tino Martinez도 1루 수비로는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선수인데, 당시는 Todd Helton의 아성을 넘기 힘들었다). 그리고 Jim Edmonds야 뭐 늘 받는 상이고....이리하야 Cards는 4명의 골드글러버를 배출하고 97승으로 지구 우승을 먹었으며, 이듬해인 2003년에도 4명의 골드 글러버를 배출한다 (Vina 대신 Matheny)


2003시즌: Renteria는 모든 면에서 커리어 최고 수치를 찍었다. (13홈런 100타점 .330/.394/.480, 2루타 47개, 65BB 54SO) 2001시즌의 슬럼프를 기점으로 기량이 완숙해진 Renteria의 라인드라이브 히팅은 시즌 절정에 달했고, 특히 Albert Pujols와 Jim Edmonds, Scott Rolen이 모두 동시에 좋은 시즌을 보내면서 Renteria의 생산력 역시 큰 부스트를 받았다. 이 시즌 Renteria는 주로 6번 혹은 7번 타순에서 (앞에는 Pujols-Edmonds-Rolen을 놓고) 뛰며 100타점을 기록했는데, NL 유격수가 세자릿수 타점을 기록한 것은 1985년 Hubie Brooks 이후 무려 18년만에 처음 있던 일이며, MVP 투표에서도 15위에 랭크되었다.

월간 최저 타율이 9월에 기록한 무려 .309에 이를만큼 꾸준한 모습을 보여주며 NL 배팅 타이틀 4위에 (.330) 랭크되었다. 좌투수 상대로 기록한 성적은 .390/.503/.670으로 리그 내에서 1위였고, 무려 8개의 3루 도루를 성공 시켰는데 이는 리그 2위의 기록이며 (Renteria는 하위타순에 배치되었기에 그가 출루할 경우 부담없이 도루를 할 수 있었다), 안타 6개만 더 쳤으면 무려 90년만에 처음으로 200안타/100타점 시즌을 치른 NL 유격수가 될 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3 Cards는 말라붙은 선발 투수 자원에 시즌 내내 고전하며 85승-지구 3위에 그쳤는데, 아래 랭킹에서 보시다시피 무려 4명의 선수가 Offensive WAR 에서 리그 10위에 들었으나, 투수진에서는 WAR 1.0이 넘는 선수가 딱 한 명 뿐이었다 (Woody Williams 1.1)

(Renteria를 부각시켜줄 수 있는 스탯을 찾다가) 새삼 느끼게 되는 Murderer's Row의 위용

2003시즌 NL Offensive WAR Ranking s c a p y

1.Bonds (SFG)8.4
2.Pujols (STL)8.3
3.Helton (COL)6.9
4.Sheffield (ATL)6.8
5.Lopez (ATL)6.2
6.Giles (ATL)5.7
7.Renteria (STL)5.4
8.Thome (PHI)5.1
9.Edmonds (STL)5.0
10.Rolen (STL)4.9


2004시즌: 재계약 실패

결과적으로 St. Louis에서의 마지막 시즌이 된 2004년 Renteria는 지난 2년에 보여준 기량에 비해 다소 실망스런 성적을 남겼는데(OPS .728, 1999시즌 이후 최저치), 첫번째 이유로는 시즌 중 재계약 협상 드립에 따른 스트레스 및 집중력 저하를 들 수 있다. Renteria는 시즌 내내 지속된 재계약 협상에서 서운함을 표시했고, 이러한 감정은 필드에서 그의 퍼포먼스에 영향을 미쳤다. 사실 Renteria는 커리어 초창기의 어린 시절 이후로는 "조용한 카리스마" 내지는 "Softspoken" 이란 단어로 대표되었으나, "Moody" (분위기를 탄다) 하다는 평가도 늘 따라다녔으며, 감정적 기복이나 상태가 경기 집중력에 영향을 많이 끼치는 선수로 분류되었다. 

Renteria의 2004시즌 성적 하락의 두번째 이유는 타순이다. 시즌 초에 2번 타자 자리 (2002~2003년에는 주로 하위타순) 적응을 하지 못하며 타격에 슬럼프가 찾아왔고, Larry Walker의 영입 이후에는 다시 클린업 뒤인 5번과 6번 자리를 왔다갔다했으며, 포스트시즌에서는 리드오프를 쳤다. Renteria는 타순 변경으로 인한 타격 어프로치 변화를 상당히 불편해했으며, 결론적으로 이는 그의 BB/SO 수치 하락이라는 안좋은 결과를 가지고왔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라인업에 많은 변화를 주는 TLR 스타일에는 걸맞지 않는 선수였다. 타율은 3할 밑으로 떨어졌고, BB/SO 수치는 0.5로 Marlins 시절 수준으로 돌아갔다. 28차례 도루시도를 해서 17도루 11실패를 기록하며 베이스러닝에서도 하락세를 보였는데, 이 역시 스피드 저하나 부상 때문이 아닌 집중력 저하 탓이었다. 여전히 좌투수를 상대로는 잘 쳤으나 (.366의 타율, 리그 2위) 우투수 상대로는 0.264에 그쳤고, 짧은 스트로크로 라인드라이브를 쳐내는 모습보다는 급한 마음에 공을 띄우려는 경향이 다시금 나왔다. 


필자가 Anti-Red Sox의 길을 걷게 만들었던 2004년 WS


2004년 말 Red Sox 이적

NL 최고의 유격수로 군림하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마친 Renteria에게 장기 계약을 안겨주는 것은 당연한 일로 보였다. Renteria는 풍부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이제 28세 시즌에 접어들었고, 공격과 수비에서 지난 5년간 NL 최고의 유격수였으며, 3개의 Silver Slugger 와 2개의 Gold Glove 상을 받았었다. 게다가 Clubhouse에서의 그의 조용한 카리스마는 (물론 좋은 면만 있던 것은 아니었으나) 팬들뿐 아니라 팀메이트들 사이에서도 그를 인기있는 선수로 만들었다. 단장 Walt Jocketty 역시 지난 5시즌동안 평균 151게임에 출장했으며 앞으로도 적어도 3~4년정도는 충분히 이 레벨의 퍼포먼스를 해줄 수 있는 Renteria를 묶어놓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85M의 Payroll 제한을 가지고 오프시즌을 맞이한 Walt Jocketty가 처음부터 Renteria가 원하는 초대박 계약을 맞춰줄 수는 없었다. 특히나 그 경쟁상대가 Payroll 140M대의 Red Sox였다면 더더욱이나...

"I don't know what else we could have done to make Edgar feel appreciated. We'd been trying for a long time to get him signed. We tried in spring training, and he didn't want to talk about a contract at that time. We tried again at midseason, and he didn't want to negotiate then. We've stayed in contact with him. Tony (La Russa) talked to him several times this week. We made every attempt to negotiate a deal. I don't know what else we would have done to show him we want him back."

-Walt Jocketty, after Renteria signed with the Red Sox


Cards는 Renteria에게 4년간 36M을 제안했으나, Renteria는 이 액수에 섭섭함을 느꼈고, Cardinals가 막판에 4년간 39M을 제안했으나 (Holliday 계약처럼 Deferred money를 포함해서) 이를 거부하고 4년간 40M + 5년째 옵션을 넣은 Red Sox를 선택했다 (Boston Globe의 Dan Shaughnassey는 Renteria가 Respect를 원한다는 것은 허울뿐 사실상은 돈만 밝힌다고 대놓고 까기도 했다). Renteria가 Cardinals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Red Sox를 선택했는지는 모르겠으나, Cards front office가 장기 계약을 앞두고 선수에게 "섭섭하다"는 소리를 들은 것은 그다지 새롭지가 않다. 그리고 Jocketty와 St. Louis의 마켓 사이즈를 고려하면 마지막에 4년간 36M을 베팅한 것이 "(사실상 Renteria의 마음이 떠났으니) 팬들로부터 욕을 먹지 않으려면 이 정도는 성의 표시를 해야겠다" 는 식의 offer였는지 아니면 정말 "어떻게서든 붙잡고 싶다"는 열망의 표현이었는지, 지금으로써는 알 길이 없지만 왠지 모르게 2011년 한 1루수의 장기 계약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USA Today의 보도에서는 Cardinals가 4년 32M을 오퍼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Post-Dispatch의 Bernie 는 4년36M으로 기술하고 있다)

"I know the St. Louis team and fans wanted me to stay, but [management] didn't try hard to keep me -- that's what I felt in the negotiations. I could hardly sleep. I played six years with St. Louis and I considered it my home. This is the first day I wake up and I'm not with St. Louis.

                                                           -Edgar Renteria, on his decision to play for the Red Sox

2005시즌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갈 사람은 간 것인데, Red Sox로 가는 결정을 결과적으로 그의 커리어에 있어서 정말 안 좋은 결정이었다. Renteria는 리그 .276/.335/.385, OPS .721, 조정 OPS 89의 지극히 평범한 성적을 내었는데, 이와 거의 비슷한 슬래쉬 라인으로 그는 2004년 NL 유격수들 중 거의 모든 공격 카테고리에서 1위를 차지했으나, AL에서의 이 성적은 말 그대로 "평범한" 성적이었다. 특히 더 욕을 먹은 부분은 수비였는데, Cards 시절에서도 종종 나왔던 "집중력 부족" 및 "멍떄림 현상"이 다시 나오면서 무려 30개의 에러를 하고 당당히 실책 리그 1위 타이틀을 먹었다. Renteria는 Gold Glove 수상권 및 Discussion에 포함되기 부족함이 없는 수비력을 갖춘 선수였으나, 그 상을 수상하기에는 솔직히 커리어 내내 실책이 너무 많은 선수였다. 그런 그였으나 실책 1위를 먹은 것은 2005년이 처음이었고, 시즌 중 그는 Fenway Park의 필드 컨디션을 탓하는 드립을 쳤으나, 그의 실책의 절반 이상이 원정경기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 때문에 언론의 비아냥과 질타를 받아야했다. (UZR -8.5)

2005시즌이 끝나고 Red Sox는 Braves에게 Andy Marte를 받고 Renteria를 넘겼다. 처음부터 잘못된 만남이었고, 빨리 헤어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2006-2008시즌: 역시 NL 체질

비록 부진하긴 했으나 Renteria는 아직 기량이 녹슬기에는 너무도 젊은 29세의 나이였다. Braves로 옮겨간 그는 Chipper Jones를 뒤에 업고 다시 익숙한 NL 구장들에서 플레이하기 시작했으며, 더운 Atlanta는 추운 Boston보다 훨씬 나은 조건이었다. NL로 복귀하자마자 그는 다시 올스타에 뽑혔고, 에러도 30개에서 13개로 크게 줄였으며, Atlanta에서의 2년간 7.9 WAR에 조정 OPS 113을 기록하며 연봉 9M의 값을 톡톡히 해냈다. 특히 2007년에는 발목 부상이 아니었으면 200안타와 타격왕에 동시에 도전해볼만한 페이스였다 (결국 타율 .332를 치고 4위로 마감)  Yunel Escobar가 빅 리그 진입을 앞둔 2007년 말, Braves는 Guillen을 3루로 밀어낼 유격수를 찾고 있던 Tigers 단장 Dave Dombrowski에게 Renteria를 넘겨주고 외야수 Gorkys Hernandez와 Jair Jurrjens를 받아온다 (공교롭게도 Dave Dombrowski는 Renteria가 Marlins에서 크던 시절의 단장으로, 파이어세일을 해야했던 구단 사정 때문이었지 Renteria의 재능을 가장 일찍 알아보았던 야구인 중 하나이다) . Renteria는 Tigers에서의 조금은 실망스런 시즌을 뒤로 한 채 다시 한번 FA가 된다.


이른 나이에 데뷔한 Renteria가 만약 계속 Cardinals에서 뛰었다면 3000안타를 칠 수 있었을까?


2009-2010시즌: 또다시 WS 우승, 그리고 은퇴

San Francisco와 2년간 18.5M짜리 계약을 했을 때 Renteria는 아직도 빅 리그에서 몇 안되는 "3할에 두 자릿수 홈런"을 기대해봄직한 유격수였다. 그러나 2009시즌 5월 햄스트링 부상을 당하면서 급격히 기량이 저하되었다 (Renteria는 커리어 내내 정말 잔부상이 없는 선수였는데, 특히 Cards에서 뛸 때 그의 내구성은 정말 최고 수준이었다),  결국 2009년 그는 bicep tendonitis, AC joint, 팔꿈치 뼛조각 제거 등 커리어 내내 없던 별의 별 부상들을 전부 겪으면서 -1.6의 WAR를 기록했고, 2010년에도 비슷하게 Groin, Hamstring과 Bicep 부상으로 DL를 왔다갔다했다. 2010년 9월, Renteria가 DL에서 돌아왔을때 Bruce Bochy는 당시 뜬금포가 절정이던 Juan Uribe를 계속 주전 유격수로 쓰면서 Renteria를 벤치로 밀어냈다. 9월 당시 Padres와 치열하게 NL West 다툼을 벌이던 상황에서 Renteria는 "이 시즌이 나에게 마지막 시즌이 될 지도 모르니 꼭 플레이오프에 올라가자" 며 팀을 단결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Renteria의 WS MVP 수상으로 행복하게 종결된다. (Renteria는 WS 2차전에서 C.J.Wilson을 상대로 솔로홈런을 쳤는데, 좌완투수의 패스트볼은 Renteria가 커리어 내내 가장 좋아하던 공이었다. 또한 Giants에게 챔피언의 영광을 갖다준 (Renteria에게 MVP 트로피를 가져다준) WS 5차전 쓰리런 홈런 역시 좌완 Cliff Lee를 상대로 친 것이었다.)

Renteria는 이미 2010시즌 내내 은퇴할 속내를 숨기지 않았으며, 특히 시즌 후반기에는 부상 때문에 팀에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특히 Bicep tendon이 부분적으로 찢어지는 바람에 스윙시 엄청난 고통이 따랐다고 한다. 2010년 NLDS 2차전, Braves와의 경기에서 연장10회에 대타로 나간 Renteria는 이미 찢어져있던 tendon을 다시 찢어버렸고, Renteria는 이로 인해 풀스윙을 할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번트를 댔다고 밝혔다 (이 번트는 결국 내야안타가 되었다). 부상부위를 완전히 찢어먹고 며칠 후 Renteria의 통증은 사라졌으며, 이후 Renteria는 NLCS 2차전에 선발 출장하면서 다시 스윙을 하기 시작했고, 결국 WS에서는 전경기에 선발 출장하며 5경기에서 7안타 6타점을 기록했다.

MVP 수상 후 Renteria는 "Giants 팬들과 구단에 해준 게 없는데 이걸로써 마음에 짐을 덜었다"고 했으며, 한 시즌을 더 뛰기로 마음 먹었다고 발표했다. 2010시즌 후 Reds와 계약해서 2011시즌을 보낸 Renteria는 그 후 은퇴를 선언했으며, 이후 Brewers가 몇 차례 찝적거렸으나 응하지 않았다.



Renteria의 저주?

Renteria가 2004년을 마지막으로 Cardinals를 떠난 이후, 무려 7명의 선수가 등번호 3번을 돌려입었으나 이들 중 제대로 Cardinals에 정착한 선수는 아무도 없었으며, 이 7명이 7년간 합산해서 700경기도 채우지 못했다 (Renteria는 6년간 900경기 이상 소화). Beltran이 오면서 이 저주는 끝난 것으로 보여지지만, 아직 섣부른 판단은 이르다.

Image credit to JoeSportsFan


역대 Cardinals 유격수 WAR Ranking

  1. Ozzie Smith 61.0
  2. Edgar Renteria 19.4
  3. Gary Templeton 18.1
  4. Dick Groat 12.9
  5. Dal Maxvill 10.5
  6. Breandan Ryan 6.2
  7. Royce Clayton 5.9
  8. David Eckstein 5.8


Did you know...?

  • Renteria는 2010년 WS에서 2개의 결승홈런을 쳤는데, 한 시리즈에서 결승 홈런을 두 개 친것은 Yoggi Berra, Lou Gehrig, Joe DiMaggio 이후로 Renteria가 4번째라고 한다. Renteria가 받은 우승 반지 2개 중 Cardinals에서 받은 것은 없다는 점이 조금은 아쉽다. 그러게 왜 하필 Red Sox로;;
  • Renteria는 97년 11월 4일, Colombia 대통령으로부터 월드시리즈 우승과 끝내기 안타로 국위선양을 한 공로를 인정받아 자국 내 최대의 영예인 "San Carlos Cross of the Order of the Great Knight"라는 훈장을 받았다. 또한 같은 해 El Espectador 라는 콜롬비아 내 유력지에서 올 해의 인물 (Man of the Year)과 올 해의 운동선수 (Athlete of the year)에 모두 선정되었다.
  • 1999년 Renteria는 조국에 야구 아카데미를 세웠고고, 2003시즌 후에는 형 Edinson Renteria와 함께 콜롬비아에 야구리그를 세웠다. 또한 Renteria는 2013년 WBC에 콜롬비아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 Renteria에 이어 콜롬비아 출신 빅리거 5호가 된 Orlando Cabrera는 2004년 Renteria의 이적 당시 Cardinals가 차기 유격수 후보로 진지하게 고려했었다. Cabrera의 아버지 Jolbert Cabrera는 Renteria의 빅 리그 진출 당시 큰 도움을 주었으며 유년기부터 둘은 친구였다고 한다.
  • Renteria는 타격에 제대로 눈을 뜬 2002년부터 2009년 사이에 좌완투수들을 상대로 0.332의 타율을 기록했는데, 이는 무려 8시즌간의 합산 기록임을 생각하면 상당히 높은 수치이며, 같은 기간동안 (1000타석 이상) Renteria보다 더 높은 좌투수 상대 타율을 기록한 선수는 Derek Jeter, Albert Pujols, Ichiro Suzuki 3명 뿐이다. 
  • Renteria는 커리어 내내 어떤 에이스급 좌투수들을 상대로라도 웬만하면 꿀리지 않았다 (밑 표를 참조). CJ Wilson과 Cliff Lee가 조금만 더 조심했더라면 2010년 WS가 더 재미있었을 뻔 했다.
  • PA AB H 2B 3B HR RBI BB SO BA OBP SLG OPS
    Randy Johnson 67 55 15 4 0 2 5 11 15 .273 .394 .455 .848
    Tom Glavine 66 59 23 5 0 0 7 6 8 .390 .439 .475 .914
    Mike Hampton 53 46 14 5 0 0 5 4 7 .304 .353 .413 .766
    Dontrelle Willis 30 26 9 3 0 0 0 4 5 .346 .433 .462 .895
    Al Leiter 28 23 11 3 0 0 4 3 1 .478 .519 .609 1.127
    Ted Lilly 25 22 6 1 0 2 2 2 3 .273 .360 .591 .951
    Cliff Lee 23 22 5 2 0 2 6 1 2 .227 .261 .591 .852
    Wandy Rodriguez 22 20 6 0 0 3 6 2 3 .300 .364 .750 1.114
    Mark Buehrle 19 18 8 3 0 0 1 1 2 .444 .474 .611 1.085
    Scott Kazmir 18 18 5 1 0 1 4 0 4 .278 .278 .500 .778
    Barry Zito 15 11 5 1 0 0 0 4 2 .455 .600 .545 1.145
    CC Sabathia 13 12 5 1 0 1 6 1 1 .417 .462 .750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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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nerated 1/7/2013.




By Doo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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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ovy


유망주 리스트 시리즈도 끝이 났고, 크리스마스에 신정까지 다 끝났다. 뻥카의 황제 Strauss까지 땡깡을 부릴 정도로 지루한 오프시즌이다. 스프링 캠프때까지의 답답함을 덜어보는 의미로 잠깐씩 TLR 시절 (1996-2011) 의 추억의 선수들을 돌아보는 시리즈를 준비해보았다. 첫 포스팅의 주인공은 과소평가된 추억의 외야수, Ray Lankford이다.



Ray Lankford

Outfielder

DOB: 1967년 6월 5일 

Birth: Los Angeles, CA 

Time with Cardinals: 1987 - 2001, 2004


Draft & Minors

Lankford는 1986년 1월 3라운드에서 Cubs에게 지명당했으나 계약하지 않고 1987년 6월 드래프트에서 다시 3라운드에 뽑혔다. 대학 시절부터 소문난 'Tool-guy' 였으며, 굉장히 탄력있는 스윙과 대학 풋볼팀에서 러닝백 (한 시즌에 1000야드를 돌파했다고 한다) 을 볼만큼 뛰어난 운동능력을 자랑했다. 

87년 Johnson City로 들어와서 프로 생활을 시작헀는데, 아래 트랙 레코드를 보시면 알다시피 정석적으로 한 단계 한 단계 씹어먹으면서 올라왔다. 무엇보다 마이너리그 3년간 거의 부상이 없었으며, 주목하셔서 볼 부분은 매년 엄청나게 터뜨린 3루타 숫자와 도루 숫자이다. Lankford의 주력은 이미 마이너 시절부터 유명했으며, Cardinals는 1989년 AA에서 성공적인 시즌을 보낸 Lankford가 Willie McGee를 조만간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Ray Lankford's Minor League Track Record

Year Age Tm Lg Lev G PA AB R H 2B 3B HR RBI SB CS BB SO BA OBP SLG OPS TB
1987 20 Johnson City APPY Rk 66 278 253 45 78 17 4 3 32 14 11 19 43 .308 .367 .443 .810 112
1988 21 Springfield MIDW A 135 605 532 90 151 26 16 11 66 33 17 60 92 .284 .366 .455 .821 242
1989 22 Arkansas TL AA 134 574 498 98 158 28 12 11 98 38 10 65 57 .317 .395 .488 .883 243
1990 23 Louisville AA AAA 132 552 473 61 123 25 8 10 72 30 7 72 81 .260 .362 .410 .772 194
6 Seasons 480 2065 1802 302 521 97 40 38 277 116 46 223 288 .289 .373 .451 .823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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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Louisville에서의 성적 하락을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다. 당시 Louisville 팀이 쓰던 홈 구장은 University of Louisville 풋볼팀과 함께 쓰던 구장으로, 무려 33,500석의 규모를 자랑하지만 인조 잔디에다가 우측 펜스가 312피트에 불과했다. 좌타자였던 Lankford는 홈런을 의식한 스윙을 했고, 이는 출루율의 하락으로 이어졌다. 또한 Cardinals는 당시 Lankford에게 홈런타자보다는 빠른 발로 많은 도루를 할 수 있는 리드오프 형 선수를 기대했으며 (Michael Bourn이나 Carl Crawford와 같은), 이에 주루 코칭에 상당히 신경을 많이 썼었다. 비록 AAA 레벨에서 약간의 성적 하락이 있긴 했으나 그가 기록한 30개의 도루와 72개의 타점, 그리고 .772의 OPS는 팀내 최고 수준이었다. Lankford가 마이너 3년 반동안 보여준 모습은 충분히 인상적이었으며, BA는 Lankford를 전미 19위의 유망주로 평가했다 (1990년).  

1990년 8월 21일, Lankford는 선발 중견수로 데뷔전을 치렀다. 당시 Cards 라인업은 1번 Vince Coleman, 2번 Ozzie Smith, 3번 Willie McGee, 4번 Todd Zeile, 5번 Terry Pendleton 등 이름만 들어도 빡센 베테랑들이 가득했는데, 이 경기에서 Lankford는 꼬꼬마 6번으로 나와서 2루타 포함 4타수 2안타 1득점 1타점으로 성공적인 데뷔전을 마쳤다 (상대 투수 John Smoltz). 그리고 며칠 후인 9월 6일, Expos전에서 Mark Gardner를 상대로 데뷔 첫 홈런을 때려냈다. 

아래는 1991년 시즌을 앞두고 Baseball Digest가 Lankford에게 내린 평가로, Willie McGee의 Clone(복제품) 으로 표현한 부분이 눈에 유독 띈다. 

Ray Lankford: "Willie McGee's replacement in center field at Busch Stadium will be Lankford, who appears to be a McGee clone. The 23-year-old sparkles on defense; he was the run-away leader in total chances in the Texas League in 1989 and in the American Association last season. He also has a lefthanded bat with explosive potential and can steal a base. Lankford, a third-round draft pick in June 1987, has a career minor league .290 average with 96 doubles, 40 triples, 35 homers and 115 stolen bases in 1756 minor league at-bats."


왼쪽부터 Ray Lankford, Ozzie Smith, Bernard Gilkey, 위쪽은 Geronimo Pena


1991-1992년: Leadoff에서 3번타자로

주전 중견수 자리를 꿰찬 1991년 시즌, Lankford는 무서운 스피드로 리그 3루타 1위(15개)에 44도루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NL ROY 투표 3위에 올랐으나 (1위 Jeff Bagwell) .301의 OBP와 114개의 삼진은 문제가 있었다 (사실 Lankford의 Plate Discipline은 마이너리그에서 칭찬을 받았던 부분이었기에 조금은 의외인 부분이었다). NL 신인이 리그 3루타 1위에 오른 것은 1984년 Juan Samuel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Lankford는 Cardinals Rookie가 세울 수 있는 기록들은 웬만하면 갈아치우면서 (1950년 이후 신인 첫 멀티홈런, 신인 첫 60타점+40도루 시즌 등) 성공적인 루키 시즌을 보냈다. 

"Lankford doesn't scare. You may get him out, but he doesn't give."

-Joe Torre, after Lankford has hit for cycle

이듬해인 1992년 Lankford는 무려 20개의 홈런을 때려내고 Leadoff에서 3번타자로 전업을 하게 되는데 (3번타자로 84경기 출장), 이는 빠른 배트스피드와 몸의 탄력을 이용한 그의 스윙 메카니즘이 완성 단계로 올라서게 된 탓이 크다. Lankford의 배트스피드는 전성기 시절 Soriano를 연상시킬 수준으로, 그의 5피트 11인치의 작은 frame을 충분히 메꿀만큼 뛰어난 운동능력과 힘을 자랑했으나, 다만 스윙이 길다는 단점 때문에 삼진이 너무 많았다. 만 1992년 그는 147개의 삼진으로 리그 1위에 올랐고, 그 이후에도 2001년까지 11년연속 매년 110개 이상의 삼진을 적립했다. 

※ Cardinals 삼진 역사에서 Lankford가 차지하는 위엄

RankPlayerStrikeoutsYear
1.Jim Edmonds1672000
2.Ron Gant1621997
3.Mark McGwire1551998
4.Ray Lankford1511998
5.Jim Edmonds1502004
6.Ray Lankford1482000
 Colby Rasmus1482010
8.Ray Lankford1471992
9.Ryan Ludwick1462008
10.Mark McGwire1411999


1993-1995년: Under-appreciated Outfielder

1993년 Lankford는 시즌 초 어깨 부상, 6월과 7월에는 Wrist 부상으로 DL을 갔다오면서 굉장히 고생을 했고 (두번 모두 수비 중에 당한 부상이었다), 전년도에 .851을 찍었던 OPS가 .713으로 크게 떨어졌다. 그러나 1994년 다시 생산력을 OPS .847까지 끌어올렸고, 이 수치는 2001년 Cardinals를 떠날 때까지 8년간 떨어지지 않았으며, 부상으로 고생을 한 적도 거의 없었다. Lankford는 그만큼이나 꾸준했으며, 특히 TLR 이전 시대에 Cardinals를 맡았던 Joe Torre는 Lankford의 뛰어난 수비와 파워풀한 스윙을 칭찬했다. 이 기간동안 Lankford는 공/수/주를 겸비한 리그 최고 수준의 중견수로 발돋움했으며, 개인적으로는 먹튀가 되기 전의 Vernon Wells나 왕년의 Raul Mondesi에 비해 전혀 꿀리지 않는 기량 및 Tool을 과시했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Tool-guy들이 빅 리그에서 그 툴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스러지는 것에 반해, Lankford는 굉장히 탄탄한 커리어를 밟았다.  


Lankford는 우완을 씹어먹고 Gant는 좌완을 씹어먹었다



1996년: TLR 등장

사실 1996년은 TLR의 부임도 부임이지만, TLR식 인사 이동이 생김으로써 가장 활발하고 공격적인 전력 보강이 있었던 해이기도 하다. 1995년 시즌이 끝난 시점부터 프론트 오피스의 행적을 돌아보면...

  • FA로 풀린 Jose Oquendo 재계약

  • Willie McGee 재영입

  • 베테랑 3루수 Gary Gaetti FA 영입

  • Yankees로부터 Rick Honeycutt 계약 매입

  • 유망주 내주고 Todd Stottlemyre 영입

  • (Lankford와 마이너리그에서 함께 성장한) 주전 외야수 Bernard Gilkey를 트레이드로 Mets에 넘김 

  • A's에 Steve Montgomery를 보내고 Dennis Eckersley 데려옴

  • FA로 Andy Benes, Ron Gant, Pat Borders 영입

  • Red Sox에서 웨이버로 공시된 Luis Alicea 데려와서 주전으로 써먹음

  • 전 1라운더 유격수 Royce Clayton 트레이드로 영입

젊은 선수들을 보내고 베테랑들을 영입하는 방식은 팀의 평균 연령을 30.8세로 올려놓은 상태로 1996년 개막전을 맞게 했다. 그러나 이 영입들은 대체로 좋은 결과를 낳았으며, Ron Gant-Ray Lankford-Brian Jordan의 강력한 외야진이 가동되며 공격력이 이전에 비해 훨씬 나아졌다.5할에서 10승이 부족하던 팀은 5할에서 7승을 더한 88승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Lankford 역시 커리어 처음으로 Playoff 타석에 서는 영광을 안았으나 DS와 CS를 합쳐 15타수 1안타의 극심한 부진을 보였는데, 원인은 시즌 막판 경기 중 다이빙 캐치를 하다 다친 왼쪽 Rotator Cuff (회전근) 부상에 있었다. 어깨 수술이 확정된 NLCS 3차전 이후 Lankford는 벤치에 앉아서 경기를 지켜볼 수 밖에 없었고 (4차전부터 중견수 자리에는 Willie McGee가 들어갔다) 결국 Cardinals는 Braves에게 3승 4패로 패배한다. 플레이오프 출장 기록이 미미한 수준인 그의 커리어로 보나, 월드시리즈 우승을 눈앞에 뒀던 Cardinals 팬 입장에서 보나 안타까운 순간이다.

1997년: All-Star Game, 그리고 전형적 용두사미 시즌

Lankford는 드래프트된 이후 2001년 트레이드 되기 전까지 내내 Cardinals의 핵심 선수 중 하나였으며, Joe Torre에서 TLR로 집권이 넘어가는 과도기에서도 팀에서 기둥으로 여긴 선수였다. 20-20을 자주 찍을 수 있는 운동능력은 누구나 인정했으나, 누구도 Lankford에게 MVP급 활약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허나 1997년 Lankford는 MVP에 대한 Serious push를 하면서 자신의 기량을 알아봐준 Joe Torre를 흡족하게 했고, 전반기에 17홈런 61타점 15도루 .333/.427/.646/1.073의 폭발적인 성적을 내면서 올스타에 선정되며 몬스터 시즌을 기대하게 했다. 그러나 7월 31일 Mark McGwire가 트레이드되어 팀에 합류했고, 그 이후로 이상하게 Lankford의 타율은 계속 떨어졌다 (반면 후반기 홈런수는 14개로 페이스가 별로 떨어지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Lankford가 McGwire의 영향으로 한 방만 노리게 되었다는 루머도 있었으나 이는 동의하지 않는 바이다)

Lankford는 커리어 내내 정말 상복이 없는 선수였는데, 특히 이 정도로 exciting한 플레이를 할 능력이 있으면서 올스타에 달랑 한 번 선정된 부분은 참 아쉽다. 1997년 NL 올스타 팀 감독이었던 Bobby Cox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He's a great center fielder. I know he's hurt (shoulder surgery) but he's having a great year with the bat, he can steal bases, and he can go get the ball. When Joe Torre was managing St. Louis, he said Ray Lankford could be an MVP and he's getting close to that now."  

-Bobby Cox on Ray Lankford



1998년: 홈런 레이스의 조연, 그리고 연장계약

Mark McGwire는 이 해 Sammy Sosa와 홈런 레이스를 벌이며 야구 시청률을 높이는 데 큰 공헌을 했고, Ray Lankford는 McGwire의 바로 뒤에서 그가 홈런왕을 차지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McGwire는 한 인터뷰에서 Lankford를 일컬어 "the best hitting protection I had ever had in my career" 로 불렀다. Lankford는 2번도 가끔 쳤지만 주로 4번 (82경기) 자리에서 McGwire를 받치며 본인도 31홈런 105타점 .293/.391/.540 26도루의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특히 후반기에만 20홈런을 몰아치며 .321/.397/.624의 "바티스타 모드"를 선보였는데, 이런 부분들은 McGwire가 후반기 홈런 레이스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데에 적지않은 도움이 되었다.

McGwire가 말한 "Protection"의 한 예를 들자면, 99년 5월 16일, 9회말 무사 1루에서 4:3으로 앞선 Dodgers의 마무리 Jeff Shaw (아 정말 추억 돋는다!) 가 McGwire를 "고의아닌 고의사구"로 걸렀다. 이어서 나온 타자는 Lankford가 투런을 치면서 5:4 역전 끝내기. 이런 Lankford가 뒤에서 받쳐주니 McGwire가 꽤나 든든했나보다.

1998년 4월 16일, Lankford는 5년간 34M의 (2003년은 팁 옵션) 굉장히 구단친화적인 계약을 맺었다. 성공적인 어깨 수술과 Lankford의 인기, 또 구단과 St. Louis에 대한 Lankford의 배려와 애정이 없이는 나오기 힘든 계약이었다. 당시 Lankford는 계약 조항에 매년 $75,000을 구단 자선단체인 Cardinal Care에 기부하기로 하는 조항을 넣기도 했으며, 인터뷰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A lot of guys go other places, But I don't think I could play for a better organization, for a better crowd. Why leave?

-Ray Lankford, on his contract extension

St. Louis Cardinals All-time Home Run Ranking

RankPlayerHome RunsPA
1.Stan Musial47512717
2.Albert Pujols4457433
3.Ken Boyer2557050
4.Jim Edmonds2414356
5.Ray Lankford2286290
6.Mark McGwire2202251
7.Rogers Hornsby1936716
8.Jim Bottomley1816007
9.Ted Simmons1726450
10.Johnny Mize1583581


1999년: 바톤 터치, 무릎 부상, 그리고 퇴보

(나중에 이 시리즈에서도 한 번 다뤄줘야 하는) 화이트 그리피 J.D Drew가 드디어 빅 리그에 입성하면서 Lankford는 좌익수로 이동한다. 이는 9년 전 팜 시스템에서 성장한 Lankford가 Willie McGee를 밀어내고 신인 중견수로 데뷔했던 것과 거의 같은 패턴으로, 묘한 세월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다. Lankford의 운동 신경은 여전히 훌륭한 편이었으나 젊은 시절에 비해 불어난 체중 (180-->200파운드), 32세라는 나이,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1999년 시즌 시작 전에 받은 무릎 수술이 결정적이었다. TLR이 그를 좌익수로 돌린 것에 대해 Lankford는 "If I had my choice, I'd stay here (left field)" 라며 웃으면서 수용했고, 스프링 트레이닝까지도 통증이 남아있었기에 Lankford는 시즌 첫 한 달을 거의 결장하다시피 했다.

Lankford는 이 해 5월부터 좌익수이자 4번타자로 복귀했으나, TLR은 Lankford에게 꾸준히 휴식을 주면서 무릎을 배려했고, 수비 부담이 줄은 덕분에 Lankford의 공격 슬래시 라인은 1999년에도 여전히 수준급이었다 (476PA 15홈런 63타점 .306/.380/.493/.873, 49BB 110SO).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Lankford의 하락세는 사실상 이 때부터 시작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306의 고타율은 .381의 지나치게 높은 BAbip에 기인한 것이었으며, 본격적으로 '좌상바'로써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 이때였다. 그는 (무릎에 부담이 많이 가는) 강력한 배트스피드와 탄력을 통해 커리어 내내 좌타자 치고 좌투수 상대로 크게 약한 모습은 아니었는데, 1999년은 그가 우투수 상대로 .968, 좌투수 상대로 .614의 OPS를 찍으면서 스플릿이 상당히 벌어진 해이다. (1995년 시즌: 우투수 상대 .905, 좌투수 상대 .797) 그리고 예상대로 Lankford는 시즌 막판에 무릎 통증을 호소했다.



2000년: 마지막 플레이오프

Jim Edmonds가 들어오면서 이 팀은 이제 Lankford-Edmonds-Drew로 이어지는 정말 간지나는 외야진을 보유하게 되었고, 이 3명은 1996년 Ron Gant-Lankford-Brian Jordan 이후로 가장 생산력 있으며 공수에서 어느 쪽도 뒤쳐지지 않는 뛰어난 외야진을 구성했다 (90년대에서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이 두 차례 외야진에 모두 Lankford가 포함되있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29세의 Matheny, 그리운 Renteria, 아직도 아린 그 이름 Ankiel 등 정말 추억돋은 이름들이 많은 이 2000년도 Cards는 95승으로 당당히 지구 우승을 차지하고 Playoff에 진출. 그러나 Lankford의 입지는 많이 좁아져있었다; 좌상바 경향은 더욱 심해져서 (좌투수 상대 .135/.286/.284) 사실상 플래툰 외야수에 가까운 처지가 되었다. 무릎 부상 때문에 도루는 더 이상 노리기 힘들었으며, 수비 범위 역시 많이 줄어 있었다. 

그래도 Lankford의 인기는 식지 않았는데, 이는 Busch Stadium에서 유난히 강했던 그의 타격 성적의 특징과도 관련이 있다. 기량이 퇴보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한 2000시즌에도 26홈런 중 18홈런을 홈에서 넘겼고 타율도 홈에서는 3할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St. Louis 홈 관중들 앞에서 그 에너지를 흡수해 더욱 열심히 하는 선수로 팬들에게 사랑을 받지 않았는가.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2000년 NLDS 2차전, Tom Glavine과의 맞대결이었는데, Lankford의 극히 심해진 '좌상바' 경향과 TLR의 좌우놀이 경향을 생각하면 좌익수로 Lankford가 출장한 것 자체가 의외인 부분이었다. 이미 Will Clark에게 쓰리런을 맞고 제정신이 아니었던 Glavine은 3회 5:2로 뒤진 1사 1,3루에서 상황에서 이미 '한물 간듯한' Lankford를 상대로 위기를 모면하기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규시즌 좌완 상대 OPS .570에 빛나는 Lankford가 여기서 우중간을 깊숙히 가르는 2타점 2루타를 후리면서 점수는 7:2가 되었고, 이 공을 마지막으로 Glavine은 Andy Ashby (아 이 이름도 추억이 돋는다) 에게 공을 넘겼고, Cards는 Maddux-Glavine-Millwood를 상대로 스윕까지 달성하고 NLCS로 진출한다. 


※ 사족이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Lankford가 커리어 내내 가장 많이 상대해본 좌완투수는 Glavine 이었으며 (72PA), 통산 Glavine 상대 타율이 .308에 이른다. 당시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TLR은 이것까지 고려해서 Lankford를 굳이 라인업에 넣었던 것 같다.


2001-2002년: 트레이드, 그 후

Lankford는 2001년 6월 한달간 .179/.340/.403의 기대 이하의 성적을 남겼고, 구단에서의 입지는 점점 좁아져왔다. 8월 1일에는 Lack of respect를 이유로 불만을 표시, Leave of absence를 신청했고 트레이드 거부권을 풀 의향을 밝혔으나 좀처럼 트레이드 상대는 찾아지지 않았다. 사실상 결별 수순을 밟게 되자 어수선함을 피하기 위해 구단 측은 최대한 빨리 Lankford를 옮기려 노력했고, 결국 8월 3일에 Padres에게 연봉 보조를 해주면서 Woody Williams와 Ray Lankford를 맞트레이드했다. 그리고 Woody는 TLR 시대에서 빼먹지 못할 이름으로 기억에 남게 된다.  당시 Lankford와 TLR 사이의 관계가 부드럽지 못하다는 언론 보도가 많았고 실제로도 그랬다고 생각되지만, 돌이켜보면 96년에 부임한 TLR 같은 감독 아래 1990년부터 팀의 주축으로 이 팀에서만 11년간 뛰어온 베테랑 외야수 사이의 긴장감과 불편한 기류는 불가피했던 것이라고 사료된다.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으나 마치 제갈량과 관우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게다가 Lankford의 기량은 이미 이 시점에서 현격히 떨어진 상태였으니...

물론 한 가지 아쉬운 점은 Lankford가 2001년 전반기에 사실 그렇게 못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타율이 크게 떨어진 것은 맞았으나 5할에 가까운 장타율과 3할5푼대의 출루율을 기록하고 있었고, Craig Paquette이나 Kerry Robinson에게 출장시간을 나눠야 한다는 점이 11년차 올스타 베테랑에게는 자존심상하는 일일 수가 있었다. TLR과의 Power Game에서 밀린 Lankford는 Padres로 가서 Tony Gwynn에게 타격에 대한 지도 및 조언을 받고 8월 한달간 다시 맹타를 몰아치며 살아나지만, 이 역시 일시적 현상이었다. 2002년 당시 Padres 라인업은 Lankford 정도의 Pop이 있는 선수라도 감사히 썼어야 했기에 플레잉 타임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전반기 막판 Hamstring 부상을 당하면서 사실상 시즌을 접어야했다. Lankford의 연장계약은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2004년: 복귀, 그리고 마지막 타석에서 홈런

37세의 나이로 $650K의 염가에 Cardinals와 재계약을 맺은 Lankford는 처음부터 시즌 후 Cardinal 유니폼을 입고 은퇴할 생각이었다. 사실 당초 John Mabry, Roger Cedeno, So Taguchi 등이 있는 마당에 4th Outfielder 역할도 버거워보이긴 했지만, 의외로 전반기에는 벤치에서 나쁘지 않은 활약을 해주었다. 그러나 2004년 Cards는 Lankford가 은퇴무대로 삼기에는 너무도 화려한 팀이었고, 시즌 중 Larry Walker가 합류하면서 Lankford는 후반기에 달랑 22타석에 들어서는데에 그쳤다.

2004년 10월 3일, 지구 우승을 확정 짓고 Randy Flores를 선발로 내며 (-_-) 선수들에게 휴식을 주던 시즌 최종전, Brewers와의 홈 3연전 마지막 경기에서 TLR은 Lankford에게 Busch Stadium을 마지막으로 느낄 기회를 주었다. 9월 중순 이후 출장 기회 자체가 거의 없던 Lankford는 6회말 투수 Dan Haren을 대신해 타석에 들어섰고, 상대 투수 Josh Bennett을 상대로 시원한 투런홈런을 날렸다. 이것은 Lankford의 커리어 마지막 경기이자 마지막 타석이었으며, Busch Stadium에서의 123번째 홈런이자 Cardinals 유니폼을 입고 날린 228개 째의 홈런이었고, 이 경기의 9:4 승리는 Cardinals의 정규시즌 105번째 승리였다.

It might be my last regular-season game, period. I thought about all of that. It was great just to go up there and hear the fans cheering for me.

-Ray Lankford, after his last game


이 사진에 나온 Marlins 좌완 투수는 누구일까?


All-time Home Run Leader at Busch Stadium (Old)

 Ray Lankford    123

 Mark McGwire    119

  Jim Edmonds    111

   Albert Pujols      94

  Ted Simmons     81



총평

사실 TLR 시대를 대표한다기에는 Lankford의 전성기가 너무 일찍 시작해버렸다. 그가 정점을 찍던 시점에 TLR이 부임했고, TLR이 본인의 스타일대로 팀을 구성해서 2000년대를 열어갈 즈음에 Lankford의 기량 저하는 생각보다 너무도 빨리 찾아왔다. Lankford의 커리어는 생각보다 훌륭한 부분이 많으며, 야구 선수로써의 재능은 정말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이 선수는 상복도 유달리 없었고, 중견수로써의 수비도 Edmonds급은 아니지만 충분히 훌륭했던 선수이다. 무엇보다 막판에 조금 안좋아지긴 했으나 자기가 드래프트된 팀에서 은퇴하기 위해 돌아오는 뭉클한 모습과 구단에 대한 애정, 팬들과의 유대감 등은 Lankford를 좋게 기억하고 싶게 하는 이유들이다. 아쉽게도 Lankford가 이 팀에서 뛰는 동안 포스트시즌에 달랑 2번 나간 점 (2004년은 엔트리 제외)과 본인이 한창 젊을 시절 팀 타선이 약했던 점 (Lankford가 완연한 하향세에 접어들고 나서 Edmonds와 Pujols 등이 등장했으니)은 Lankford가 시대를 잘 만났다면 300-300도 달성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미없는 의문을 갖게 만든다.

은퇴 후 Lankford는 본인의 공식 웹사이트 raylankford16.com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 사이트에 따르면 Lankford는 딱히 야구 관련 직종에 종사하고 있지는 않는 것으로 보이며, 그냥 celebrity golf tournament 같은데에 celebrity 혹은 전직 프로야구선수로 출연하는 정도만 하고 있는 것 같다. 2005년 옛 Busch Stadium 을 기리는 행사에 참석한 이후로는 딱히 중요한 공식석상에 모습을 비치지는 않았으나, 야구계로 돌아오고 싶어한다는 뜻은 밝힌 바 있다.


All-time Cardinals Power-Speed # Leader

RankPlayerPower-Speed #PA
1.Ray Lankford238.56290
2.Lou Brock225.39932
3.Rogers Hornsby146.56716
4.Albert Pujols141.37433
5.Ken Boyer140.57050
6.Stan Musial134.012717
7.Willie McGee104.26100
8.Julian Javier97.06097
9.Edgar Renteria96.03759
10.Enos Slaughter89.07713

한 가지 사족을 더 달아보자면, Lankford는 필자가 Cards 팬이 된 이후로는 거의 마지막으로 보는 주전 "African American Cardinal"이었다. 이것은 비단 Cardinals에만 있는 트렌드가 아니라 ML 전체적으로 흑인 비율이 점차 줄어가는 추세이지만 (8.5%), St. Louis에는 언젠가부터 정말 흑인 선수가 없어지고 있다 (Latino 선수들 제외). 그런 면에서 Ron Gant-Ray Lankford-Brian Jordan이 합쳤던 96년 외야진은 정말 다시 보기는 힘든 컴비네이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Did you know...?

  • Lankford는 1994년 4월 3일 개막전이자 그 날 열린 유일한 경기에서 1회초 첫 타석이자 1994시즌의 첫 경기 첫 타석 홈런을 쳤다.
  • Lankford는 신시내티의 옛 홈구장인 Riverfront Stadium에서 유일하게 Upper Deck 홈런을 2개 날린 선수이다. 
  • 현역시절 Lankford는 오랜 기간 16번을 달고 뛰었으며, SB Nation에서는 Willie McGee보다 Lankford의 번호가 더 먼저 영구결번 되야한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Bryan Andersen이 16번을 달고 뛰었다.
  • Ray Lankford는 현역 시절 박찬호에게 홈런을 3개를 뽑아냈다. 생각해보니 Cards 경기 보기가 힘들던 이 시절 이 홈런들은 다 중계로 봤었던 것 같다.
  • Lankford가 현역 시절 가장 많이 상대한 투수는 순서대로 Greg Maddux-Tom Glavine-John Smoltz이다 (재밌지 않은가?). Maddux를 상대로 통산 109타수를 상대해 29안타 4홈런 20타점 2루타 7개 볼넷 4개 삼진 33개를 기록했으며, (.266/.302/.477), Smoltz를 상대로도 .283의 타율을 기록했다.  
  • Lankford는 Cardinals 역사상 유일하게 200-200 클럽에 가입하고 있으며, 유일하게 20-20을 3번 이상 달성했다 (총 5회, 92, 95-98)



by Doovy




참조: ESPN, Baseball-Reference, Fangraphs, Wikipedia, Retrosheet, Baseball Almanac, SB 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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