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Doovy

이번 편에서는 블로그 출범 후 가장 욕을 많이 먹은 인물, Mike Matheny 를 돌아보도록 한다. 사실 현 감독 위치에 앉아있는 인물을 옛 사람처럼 돌아보는게 좀 꺼려지긴 했으나, TLR 시대 (더 정확히는 Pre-Yadi 시대의) 포수 Matheny는 2000년대 초 Cardinals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었기에 도저히 뺄 수가 없었다. Teammate로써, 인간으로써, 리더로써의 Matheny는 TLR 시대가 추구했던 가치관을 가장 잘 반영하는 선수였기에 비난(?)을 무릅쓰고 Matheny의 커리어를 돌아본다. 



Michael "The Toughest Man Alive" Matheny

Catcher

DOB: 1970년 9월 22일

Birth: Reynoldsburg, Ohio

Time with Cardinals: 2000-2004


Pre-Draft

Matheny가 자란 Ohio 주 Reynoldsburg는 주도 Columbus 근처의 황량하고 특징없는 Mid-west Suburb 동네로, 가족 모두가 OSU (Ohio State Univ) 풋볼 팬이었다. 이에 당연히 Matheny도 OSU 진학을 꿈꾸며 자랐고, 8년간의 리틀리그 경험을 쌓으면서 점차 동네를 대표하는 선수가 되어갔다. 집에서 4년제 대학을 나온 사람이 없었던 Matheny 가문에서는 늘 "운동도 운동이지만 일단 교육"을 중시했고, 이에 Matheny 는 학창시절 내내 운동선수치고 상당히 학점관리를 훌륭히 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고교시절 Matheny는 풋볼 팀과 야구 팀에서 모두 캡틴을 지냈으며, 철저한 Christian 가정에서 자라서 사생활도 깨끗했다. 무엇보다 리더로써의 자질은 Mike를 만난 사람 모두 칭찬하는 바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MidWest Elite Athlete의 교과서라고 볼 수 있는 Scott Rolen의 유년기가 생각난다. 


그러나 2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첫번째는 일단 타격이 너무 안됐으며 (본인도 인정), 두번째는 키가 작았다 (고교 마지막 학년 당시 177cm). 이 명백한 약점 때문에 OSU, University of Ohio 등 지역 연고학교에서는 Matheny에게 크게 신경쓰지 않았고, Matheny 본인도 고교 졸업반이었던1988년 드래프트에 본인의 이름을 넣기는 했으나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무렵, Michigan 야구팀의 전설적인 감독인 Bud Middaugh[각주:1]가 Matheny에게 선뜻 장학금을 제시하면서 Matheny는 (학벌과 운동을 모두 잡을 수 있는) Michigan으로 진학하기로 결정한다. 프로 선수를 목표로 하고 있던 Matheny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드래프트 3일 내내 전화기 옆에서 기다렸으나, 한 통의 전화도 오지 않았다.

드래프트가 다 끝나고 나서 이틀 후, 뒤늦게 Blue Jays 측에서 Matheny를 뽑았다고 연락이 오긴 왔으나, Matheny는 이미 Michigan 진학으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1988년 여름 끝자락, Ohio 집을 떠나 Ann Arbor (Michigan 대학 소재지) 로 떠나기 이틀 전, Matheny의 집으로 당시 Blue Jays 단장 Pat Gillick이 직접 찾아왔다. 능수능란한 Gillick은 "우리가 너를 드래프트에서 지명했고, 학교 수업이 시작하기 전까지 우리가 너와 계약할 독점권이 있다. 프로에 들어오고 싶지 않느냐" 면서 만 17세의 Matheny[각주:2]와 계약 조건을 논의하기 시작했고, "수업 시작하기 전에 꼭 연락을 달라" 고 당부하고 떠났다. Gillick은 "우리가 너를 31라운드에 지명했지만, 2라운드급 계약금을 주겠다" 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I’m driving up (to Ann Arbor) and I’m trying not to act distracted, but a lot of us have had dreams of playing professional baseball and mine was sitting right in front of me. I’m sitting up in my dorm room in West Quad and my phone keeps ringing and they keep upping the ante and I’m thinking, ‘I’m really not that good.’ ”

- Mike Matheny, on his decision to attend Michigan 

(Michigan Daily, 06/05/2011)


혼란 속에 Michigan에 도착한 Matheny는 개강 첫 날 아침, 수업에 들어가기 직전 Gillick에게 전화를 걸어 Michigan 잔류를 알렸고, 이리하여 어렵게 Blue Jays의 구애를 뿌리쳤다. 그리고 이 결정은 훗날 선수 Matheny뿐 아니라 감독 Matheny를 있게 하는 계기가 된다.

스탠스만 보면 굉장히 잘 칠 것 같다.

[각주:3]

Bud Middaugh 감독의 판단은 정확했다[각주:4]. Big-10 Athelete 치고 덩치가 작은 편이던 Matheny는 대학 진학 후 6'2 (188cm) 를 훌쩍 넘는 키로 성장했으며, 흔치않은 Matheny의 Defensive 탤런트와 Make-up은 대학 레벨에서도 빛났다. 여전히 방망이는 부족했지만 노력으로 어느 정도 극복할만 했고, 1학년 때 이미 Connie Mack National Championship에서 전국구 우승을 맛보는 운도 따랐다. Freshman 시즌 후 Matheny를 스카우트해온 Middaugh 감독이 "풋볼 쪽에서 나는 수익을 야구 선수들 스카우트 비용으로 돌린다" 는 일종의 "공금횡령" 스캔들 속에 사임하면서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이것도 Matheny에게는 상당히 운이 따른 일이었다. 


Middaugh의 후임으로 온 새 Michigan 감독이 바로 60~70년대 Detroit Tigers의 대표 포수이자 통산 11회 올스타에 빛나던 Bill Freehan[각주:5]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현역 시절 골드글러브 5차례 수상에 빛나던 Freehan은 Matheny가 대학 레벨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캐칭 인스터럭터였고, Freehan 또한 Matheny로부터 "빅 리그 포수뿐 아니라 훗날 Manager가 될만한 자질이 보인다"며 특별히 아꼈다. 이 때 Freehan은 Matheny를 불러 "이 바닥(MLB)에 오래 있고 싶으면 (현역 은퇴 후에도) 무조건 스페인어를 해야한다. 지금 당장 너의 모든 교양과목을 (Electives) Spanish로 바꿔라[각주:6]" 고 조언했으며, Matheny는 이를 철저히 따랐다.[각주:7] 3학년 Matheny에게 주장 완장을 직접 채워준 것도 Bill Freehan이었고, Matheny가 Michigan에서의 마지막 시즌에 MVP를 수상했을 때 가장 기뻐했던 것도 Bill Freehan이었다.  

Draft and Minors

1991년 드래프트에서 Matheny는 Brewers의 지명 (8라운드 전체 208번[각주:8])을 받고 프로에 들어온다. 프로에 와서도 Matheny의 프로필은 한결같이 "All glove, No bat" 의 전형적인 수비형 포수였고, 다만 Defensive Talent가 워낙 출중해서 빅 리그로 올라가면 백업으로 분명히 쓸모가 있을 것이라는 게 전반적인 평이었다. 일단 아래는 Ko-모 유격수를 떠올리게 하는 안타까운 Matheny의 Brewers 산하 Minor 시절 타격 성적이다

Mike Matheny's Minor League Track Record

Year Lev G PA AB R H 2B 3B HR RBI BB SO 1991 Rk 64 284 253 35 72 14 0 2 34 19 52 .285 .348 .364 .711
1992 A+ 106 379 333 42 73 13 2 6 46 35 81 .219 .297 .324 .621
1993 AA 107 372 339 39 86 21 2 2 28 17 73 .254 .292 .345 .638
1994 AAA 57 203 177 20 39 10 1 4 21 16 39 .220 .299 .356 .655
7 Seasons 362 1336 1193 143 293 65 5 18 141 90 270 .246 .307 .354 .661


Matheny의 마이너 시절은 사실 스탯으로 보는게 큰 의미는 없다. 다만 Matheny는 훗날 감독이 된 후 Brewers 마이너리그 스태프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포수로써 갖춰야 할 수많은 Intangible 들 (특히 수치화시킬 수 없는 Game-Calling, Framing, Game-Reading 등) 을 갈고 닦을 수 있는 기회였다고 회고한다. 특히 10년간 (1984-94) Brewers 에서 Player Development Coordinator 자리를 지키던 Bob Humphreys의 지도와, Catching Instructor였던 Del Crandall (현역시절 골드글러브 4회 수상[각주:9])의 개인레슨은 Matheny의 커리어 황금장갑 수집에 기초를 닦아주었다.

"When I came up through the organization, I think it was very much like how the Cardinals have their philosophy. I was very fortunate to have a very disciplined Minor League development that really focused on the fundamentals and playing the game hard, playing the game right. I was fortunate in that regard."             

- Mike Matheny, on Brewers farm system (4/6/2012, MLB.com)



1994년 4월, 프로 입문 3년만에 빅 리그에 데뷔한 Matheny는 백업포수로 빅 리그와 AAA를 전전하다가 1996년 개막전에서는 Brewers의 주전 포수 마스크를 썼다. 물론 타격이 워낙 안됐던 탓에 주전이라기엔 조금 부족한 연평균 340~350PA 정도를 받는데 그쳤으나, Matheny의 Brewers 시절 OPS가 평균 .600대를 간신히 웃도는 수준이었음을 감안하면 (Tony Cruz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다) 오히려 Brewers가 꽤나 참을성이 많았구나 싶다. 1998년까지 4시즌간 Brewers의 백스톱을 책임지던 Matheny는 1999시즌을 앞두고 자신을 드래프트해주었던 Blue Jays로 옮겨갔는데, 당시 Darrin Fletcher의 백업으로 뛰면서 57경기 출장에 그쳤기에 더 이상 주전 포수가 되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2000시즌: Cardinals로 이적

1999년 시즌이 끝나고 Cardinals는 당시 팜에서 가장 기대를 모으던 "운동형 포수" Eli Marrero를 주전 포수로 낙점한뒤, Marrero의 뒤를 받쳐줄 베테랑 백업 포수를 구하고 있었고, Matheny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 당시 Matheny 영입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던 이는 베테랑 투수 Pat Hentgen이었다. Blue Jays에서의 마지막 시즌 (1999)에 Matheny와 한솥밥을 먹었던 Hentgen은 Matheny의 게임콜링, 도루저지 능력과 리더십을 몹시 높이 평가했으며, 이에 Jocketty와 TLR에게 직접 Matheny를 천거했다. 사실 Hentgen 본인도 Cardinals와 계약한지 갓 1달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99년 11월에 계약), 불과 3년 전에 CYA를 수상했던 빅 리그 10년차 투수의 추천서는 다른 어떤 낙하산보다도 강력했다. 그리고 Hentgen이 이어준 인연은 무려 5시즌이나 이어진다.

“He was pretty vocal about it. He was on my side. That’s just the ultimate compliment - for a pitcher with as much experience and success as Pat has had thinks that highly of me to put his name on the line.”

-Mike Matheny, on Hentgen's Recommendation (May 2000, AP)

스프링캠프에서 이미 Matheny 효과를 톡톡히 느낀 TLR은개막전 선발투수에 DK57을, 포수에 Matheny를 선정했다. 이 둘에게 2000시즌 개막전은 Cardinals 유니폼을 입고 처음 치르는 공식 경기이자 처음으로 호흡을 맞춰보는 경기였는데, 이 경기에서 두 선수는 나란히 크게 활약하며 Cubs를 박살했다.[각주:10] 모범적인 팀메이트였던 동시에 TLR이 원하는 스타일의 리더였던 이 배터리는 Cardinals 유니폼을 입음과 동시에 클럽하우스 리더로 부상했으며, 이후 DK57의 급사 전까지 둘은 뗄 수 없을만큼 친한 사이로 지냈다. 이후 2년 반동안 Darryl Kile과 Mike Matheny는 76경기 500이닝을 함께 했으며, Kile은 Matheny만큼 지능적이고 재능있는 포수를 백스톱에 앉혀놓고 던지는 것을 더할 나위 없는 행운으로 여겼다. Kile은 Matheny가 공을 받아줄 경우 K/BB 비율이 2.74에 이르렀는데, 이는 커리어 수치 (1.82) 보다 현격히 높은 수치이다. 포수의 Game-calling과 프레이밍은 f/x 데이터 없이 수치화하기 쉽지 않지만, 이 정도면 무시할 수 없는 차이이다.


Matheny는 Cards에 Yadi를 선사했고, Chris Carpenter를 갖다주었다.


There are few catchers in the game more solid defensively than Matheny. He frames pitches very well, and blocks pitches in the dirt as well as anyone. He has textbook mechanics, with his quick release that makes runners go reluctant to attempt a steal against him. Mike also has grown as a handler of pitchers under Cardinals pitching coach Dave Duncan.

-Scouting Report 2004, on Matheny's defense

계약 당시만 해도 Matheny는 Depth Chart에서 Eli Marrero의 백업플랜 수준이었으나, 정규시즌에서 Matheny의 타격 성적이 커리어 하이를 찍으면서 두 선수의 입지는 크게 달라졌다. Matheny는 빠른 속도로 Cardinals 투수진의 신임을 얻었으며, 꾸준한 플레잉타임을 얻으면서 .261/.317/.362의 슬래시라인을 기록했다. 비록 BABIP신의 가호를 받긴 했으나 (.323) 좌투수 상대로는 생각보다 쓸만한 타격을 보였고, 득점권에서는 유난히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서 그럭저럭 사람 구실을 하는 모습이었다[각주:11]. 수비에서 Matheny는 자신의 개인 첫 골드글러브를 수상했으며, 시즌 내내 단 1개의 3루도루도 허용하지 않았고 (2루도루 44저지 43실패), Defensive WAR로 무려 2.4를 적립했다 (Andruw Jones에 이어서 ML 2위). 

이 시즌 Mike Matheny의 유일한 오점은 딱 하나. 시즌 막판 Matheny는 San Diego 원정에서 생일 선물(9/22) 로 받은 사냥용 칼을 뜯어보다가 오른손을 크게 베이는 사고를 쳤고, 이로 인해 포스트시즌을 모조리 결장하는 삽질을 했다. 별 거 아닌 듯 보였던 이 사건은 Rick Ankiel 의 포스트시즌 Melt-down으로 다시 재조명을 받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TLR 시리즈 Ankiel 편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Matheny가 Semi 사람다운 공격력 + 골드글러브 수비를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 고무된 Cardinals는 2001년 4월, Matheny에게 3년 연장계약의 선물을 안겨준다. 그러나 Matheny의 커리어 하이 시즌은 BABIP 빨 플루크였다는 게 증명이 되었고, 좌투수 상대 타율이 0.184까지 내려가는 고생 끝에 Matheny는 wRC+ 50, .218/.276/.304 라는 처참한 성적으로 2001 시즌을 마감한다. 



2002시즌: Mike Matheny and DK57

Matheny가 Cardinals 유니폼을 입고 남긴 업적 중 가장 큰 일을 꼽으라면 3차례의 GG 수상도, 2004년 NLDS에서의 깜짝 활약도 아닌, 2002시즌 Darryl Kile의 시즌 중 급사를 수습한 일을 꼽겠다.

거의 같은 시기에 Cardinals 유니폼을 입게 된 이 둘 (Darryl Kile and Mike Matheny)은 2000시즌 개막전을 시점으로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Coors Field에서 고생을 하다 내려온 Kile은 본인의 구질을 본인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는 Matheny 에게 던지는 것을 몹시 즐겼고, Matheny 역시 자신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이는 Kile의 공을 받기 원했다. 2000시즌 마지막 등판에서 Kile은 Matheny를 앉혀놓고 정규시즌 20승째 승리를 따냈고, 경기 후 샤워를 마친 Matheny가 라커룸에 돌아왔을 때 의자에는 Kile이 갖다준 Rolex 시계가 놓여있었다. 뉴욕을 원정 방문할 때마다 짝퉁 15불짜리 Rolex를 사 모으던 Matheny에게 Kile이 진품을 선물한 것이었다. 

2002시즌 전반기는 Matheny에게나 Kile에게나 결코 즐거운 시간들이 아니었다. Matheny는 타율 2할대 유지를 버거워하는 타격 슬럼프를 겪고 있었으며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Kile은 5월 말 Astros 전에서 2경기 연속 잘 던지고도 승리를 얻지못해 (6IP 2ER, 6IP 1ER) 약이 올라있는 상태였다. 평소같았으면 늘 경기 시간 3시간 전부터 클럽하우스에 나와서 Kerry Robinson과 체스를 두고, Matty Mo와 박물관에 가고, Matheny와 비디오 분석에 몰두하며 클럽하우스 분위기를 주도했던 Kile은 이 당시 그답지 않게 우울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TLR이 넌지시 Kile에게 다른 포수들과 호흡을 맞춰볼 것을 제안하자 Kile은 "Matheny가 아니면 던지지 않겠다" 는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 며칠 후인 6월 18일, Kile은 Matheny를 앉혀놓고 그 해 최고의 퍼포먼스인 7.2IP 1ER 의 호투로 Angels 타선을 잠재웠다.

2002년 6월 22일, Chicago의 Westin Hotel에서 Darryl Kile이 사체로 발견되었던 그 날은 Kile이 선발등판하기로 되어있었던 날이었다. 모두가 DK를 잃은 슬픔으로 침묵해있던 그 날 오후, TLR은 Matheny에게 경기를 뛸 것을 요구했다. Matheny는 "Kile이 던지지 않는다면 저도 안 뛰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출전을 거부했고, TLR은 하는 수 없이 Simontacchi-Difelice 조합으로 나서서 1시간 47분 (1981년 이후 최단시간 경기) 만에 경기를 끝낸 뒤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선수단을 거둬서 숙소로 돌아갔다. 

라커룸에서 Rolex 시계를 만지작거리며 침묵으로 일관하던 Matheny는 슬픔은 미뤄두고 그 다음 날 경기부터 다시 출장을 강행했으며, 한 순간에 리더이자 친구, 동료이자 롤 모델을 동시에 잃어버린 투수진을 다독이는데 집중했으며, 후반기에는 .280에 가까운 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DK와 유난히 각별했던 Matheny는 시즌이 끝날 때까지 단 한 차례의 DK 관련 공식 인터뷰도 하지 않았다. 시즌이 끝나고 Matheny는 교회 Grief Session에서 Kile에 대해 입을 처음 열었다. 그리고 5개월간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We went out and played the game. We had an edge to us. Nobody had to say anything. We wanted to represent what he believed in, which is just going out and doing your job."                                                                       

 - Mike Matheny, on 2002 season after Kile's death


2002 NLDS에서 Cardinals의 기세는 무서웠다. 이 팀은 6월 말에 에이스를 잃은 후 57승을 거두었고, 그 중심에는 Mike Matheny가 있었다.


2005시즌: Giants로 이적

2004 WS가 허무하게 막을 내리고 Matheny는 다시 FA로 풀렸다. Cards 입장에서는 리그 최고의 수비형 포수이자 필드 위에서는 코치, 클럽하우스 안에서는 리더로 추앙받는 Matheny를 재계약할 의도가 있었으나,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던 젊은 포수 Yadi의 존재와 Matheny의 어쩔 수 없는 공격력 부재 때문에 도저히 장기 계약을 줄 수는 없었다. 게다가 Cardinals 유니폼을 입고 숱한 기록을 세우고 Gold Glove를 3개나 수상한 탓에 Matheny는 시장에서 꽤나 인기가 있었으며, 수비 하나만으로 3년 계약을 받고 Giants로 이적한다. 10년 전만해도 지금처럼 수비력이 시장에서 쉽게 인정받지 않던 시절이었으며, 이렇게 All-Glove, No Bat 프로필의 만 34세 포수가 3년 계약을 따낸 것은 Matheny 의 시장 내 Reputation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케이스이다.

"Mike is one of the toughest competitors that we have ever witnessed and a true leader. As a player, he will be missed not only on the field, but in the clubhouse, the scouting meetings and on the road with his teammates. On behalf of the Giants, I wish Mike and his family all the best. He'll always be a Giant."


-Brian Sabean, on Matheny's retirement (02/01/2007, MLB.com)


Giants 이적은 Matheny에게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2005시즌, Matheny는 862차례의 기회에서 단 1개의 실책만을 범하며 Giants의 길고 풍성한 역사에 길이 남을 가장 완벽한 Defensive Performance를 선보였으며, 뿐만아니라 홈런 (13), 2루타 (36) 타점 (59) 에서 모두 커리어 하이를 찍었고, 득점권에서는 무려 .311이라는 해괴한 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물론 이 사이 Matheny의 wRC+는 76에 그쳤으나 (비교를 원하신다면 올해 Descalso의 wRC+가 88이었다), 이마저도 Matheny 커리어에서 찾아보기 힘들 수준의 Best Offensive 시즌이었다. 

Matheny as a Catcher

우리는 근 10년째 Yadier Molina라는 걸출한 포수의 플레이를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어서 웬만한 포수들에게 쉽게 감동하지 않지만, 포수 Mike Matheny의 수비는 동시대 최고 수준이었다. 잠깐 Matheny 의 업적들을 돌아보자면...

  • Gold Glove 4회 수상 (2000, 2003, 2004, 2005) 
  • 통산 수비율 Career Fielding Percentage .994 (1,285 games, 43 errors in 7,774 total chances)
  • 252 연속경기 무실책 (8/1/02 - 8/4/04) (ML 최장기록)
  • 1565 연속 수비기회 (Chances) 무실책 (2004) (ML 최장기록)
  • 단일시즌 100+ 경기 무실책 (2003, 역대 단 3명)[각주:12]
  • 단일시즌 138경기 연속 무실책 (2003, 823 total chances)
  • Giants 프랜차이즈 사상 단일시즌 최고 수비율 (2005) (0.9988, 1112이닝 1실책)
  • 리그 최다 도루저지 1위 (2000, 2005)
  • 포수로 10,000이닝 소화 (1994-2006, 같은 기간 10,000이닝 소화한 포수는 13년간 8명[각주:13])

Matheny는 투수들에게 가장 인정받는 포수였다. 게임콜링와 블로킹, 피치 프레이밍, 타자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 Matheny는 늘 두텁게 준비가 되어있었다. Matheny는 백스톱 자리에서 가장 필요한 "Understanding of the Game,"  경기 자체에 대한 이해도에 있어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던 포수였다. Blocking은 Charles Johnson이 나았을 지 모르고, Throwing Arm은 Ivan Rodriquez가 더 나았을 수도 있겠으나, 이 모든 것을 포함한 Overall 퍼포먼스에서 Matheny를 뛰어넘는 포수는 동시대에 없었다고 봐도 좋다. 지금의 Yadi가 Liliquist를 대신해서 투수코치를 하고 있다면, Matheny는 Duncan의 Proxy로 뛰었다고 봐도 좋다.

“I can sum up what happened in two words: Mike Matheny. He got hurt, and I started to lose confidence. I’m not the only guy who struggled there after he got hurt.”                             

- Jamey Wright, on Matheny's impact on him (2007, Dallas Morning News)



Matheny as a Hitter

칭찬을 많이 했으니 좀 까도록 해보자.

어떤 과정을 거치든 ML 레벨까지 올라오는 선수들은 다들 고교/대학/마이너시절 최소 Contact/Power 둘 중 하나는 보여주게 마련이다. 심지어 Defense-oriented 선수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Matheny는 고교시절부터 타율 .280을 버거워했으며, 대학에서도 딱히 Offensive Prowess로 알려진 일은 없었다. 마이너리그 시절, Matheny는 루키레벨 이후 OPS .700을 기록한 적이 없으며, Brewers 마이너에서의 4년을 Hard-stuff와 바닥에 패대기쳐지는 Breaking-stuff에 모두 약점을 드러냈다. 직구도 못치고 변화구도 못치는 타자였는데다가, 탄탄한 체격이 아까울만큼 파워도 없었고 쓸데없이 스윙 스트로크가 길어 배트 컨트롤도 엉망이었다 (Minor 4시즌간 루키레벨 위에서 OBP .300을 넘긴 적이 없다.) Matheny 본인도 고교시절 자신의 모습에 대해, "나는 타격은 영 젬병인데 그래도 잡고 던지는 건 좀 했었다" ("I couldn’t hit my way out of a wet bag, but I could catch and throw a little bit") 고 회고했다. 

(wRC+ 기준) 역대 최고 물방망이 포수들 (1871-2014, 최소 4000PA 이상)

  1. Malachi Kittridge (59)

  2. Mike Matheny (62)

  3. Joe Girardi (71)

  4. Luke Sewell

  5. Red Dooin

  6. Rollie Hemsley

  7. Jim Hegan

  8. Cy Perkins

  9. Brent Mayne (74)

  10. Brad Ausmus (76)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All Glove, No Bat 포수였기에, Matheny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Video-Junkie 라는 별명이 붙을만큼 미친듯이 비디오 룸에서 상대 투수 분석에 시간을 투자했다. 또한 Cardinals 이적 후에는 특히나 방망이를 더 짧게 잡아 브레이킹볼 대처능력을 키웠고, 배트 스피드를 증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스윙을 컴팩트하게 만드는 것에 주력했다. 이렇게 열심히 타격 메카니즘을 교정했음에도 불구하고 Matheny의 공격 생산력은 "거의 매 시즌" Replacement Level 수준 그 이하였다. 긴 설명이 필요없이, 역대급 물방망이를 보여주었던 Matheny의 위엄은 위 랭킹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그 모든 물방망이 포수들보다 Matheny가 머리 하나는 앞서있다)

Matheny as a "Toughest Man Alive"

이미 잘 알려진 에피소드이긴 하지만 간단하게 복기해보자. 

1998년 5월 26일, Pirates와의 홈 경기에서 Matheny가 2:1로 9회말 1사 1,2루에서 타석에 들어섰다. Ball-in-the-dirt에 극히 약점이 있었던 Matheny는 (대체 무슨 구질에 약점이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골프광이었던 당시 Brewers 감독 Phil Garner와 "변화구에 삼진 당할 때마다 골프공 한 박스씩을 조공으로 바칠 것"을 약속하고 변화구 대처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삼진을 당하지 않아야겠다는 심정으로 타석에 들어섰다. 상대 투수는 빠른 공 + 엉망인 제구로 이미 잘 알려져있던 Rich Loiselle[각주:14] 이었는데, 이 허접한 투수가 2구째 패스트볼을 Matheny의 얼굴 (정확히는 왼쪽 입가)를 맞춰버린 것이다. 이 공의 구속이 95마일이었다는 보도도 있고, 90마일이었다는 기사도 있으나, 뭐 몇 마일이었든 간에 "작정하고 던진 우투수의 Up-and-in 패스트볼" 이었음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동영상 링크)

"He was a catcher, so it's kind of weird for an outfielder to say this, but I emulated him. I looked up to him. He was a guy who taught us the right way to play the game. You keep your mouth shut and do your job. 

And, man, Mikey was tough."

- Geoff Jenkins, on Matheny's toughness (10/20/2012, MLB.com)

경기 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찢어진 입가를 꼬맨 Matheny는 그 길로 곧장 Phil Garner를 찾아가 "If you can do me a favor, I want to play tomorrow" 라고 말했고, 결국 다음 날도 경기에 출장해 Matheny 다운 방법으로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4타수 무안타, 8회 상대 득점권에서 도루저지 성공). Matheny는 이 에피소드에 대해 "내가 공을 맞고 쓰러지지 않은 걸 기억하기보단 내가 HBP로 살아나가서 우리가 끝내기 안타로 이겼음을 기억해야 한다[각주:15]" 고 말했다.  당시 Brewers 의 백업포수였던 Bobby Hughes는 "저 인간이 얼굴에 공을 맞았는데도 나는 선발 출장을 못하나" 고 한탄했는데, 이 친구는 Tony Cruz와 만나면 말이 잘 통할 것 같다.



Matheny and Concussion

Matheny가 뇌진탕 후유증으로 조기 은퇴를 했고, 야구계에서 손꼽히는 Anti-Homeplate Collision 캠프의 주동 인물이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있다. 대체 어느 정도로 뇌진탕의 아픔을 겪은 것일까?

마스크에 튕기는 파울팁, 주자와의 홈 플레이트 충돌 등으로 마이너 시절부터 뇌진탕은 Matheny에게 익숙한 친구같은 존재였다. Brewers 산하 AA팀의 경기를 라디오중계하던 Vaspersian은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홈 플레이트에서의 충돌 후 Matheny 뇌진탕 증세를 겪었던 날에는 밤새도록 팀 닥터와 트레이너들이 Matheny의 숙소에 들어가 이 질문 저 질문을 하며 Matheny의 뇌가 정상인지 확인했다고 회고했다.

2006년 5월 29일, Matheny는 Marlins와의 홈 경기에 선발 포수로 출장했다. 이미 며칠간 유난히 많은 파울 볼들을 마스크에 맞아서 정신이 혼미하던 Matheny는 특유의 Grit으로 선발 출장을 강행했다. Giants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Cards 시절부터 Matheny 의 미트 안으로 수천개의 공을 던졌던 오랜 친구 Matt Morris였다. 도저히 Miguel Cabrera에게 정면승부를 할 수 없었던 이 Ex-Cards 배터리는 6회 2사 2루에서 Cabrera를 고의사구로 걸렀고, Matheny는 2루 주자 (Dan Uggla)가 혹시나 사인을 훔칠까봐 마운드로 직접 올라가 다음 타자인 Josh Willingham에게 패스트볼로 승부할 것을 이야기했다. 

"As my catcher and as a person he just meant so much to me. On the field he taught me how to be a professional. Off the field he taught me to be a man and a respectful person. He's going to be sorely missed by everybody. Unfortunately through his head trauma and concussions, it's just ending a little abruptly to him. He was a guy so hard-nosed and he wanted to play every day, so for it to end this way is unfortunate. After the blows to the head, he wasn't the same. We want the old Mike Matheny back, baseball player or not."

-Matt Morris, when Matheny retired (2007)

마운드에서 다시 내려와 플레이트 앞에 쪼그려앉은 Matheny는 불과 몇 초 전 Morris와 나눴던  대화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자신의 뇌가 뭔가 정상이 아니란 것을 깨달은 Matheny는 (자신이 요구했던) 다음 구질이 무엇일지 Guess해서 잡아야했고, Matheny는 커브를 예상하며 블로킹 자세를 취했다. Morris는 당연히 아까 상의한대로 패스트볼을 던졌고, 이에 당황한 Matheny는 스트라이크존으로 들어오는 패스트볼을 어이없이 놓쳐버렸다. Passed Ball. 평정심을 잃은 Morris는 이닝 종료 후 Matheny에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냐 화를 냈고, Matheny도 Matheny대로 shin-guards(종아리보호대)를 벗어서 Morris에게 던지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그리고 이틀 후인 5월 31일, Matheny는 자신의 커리어 마지막 경기를 치르게 된다.

쇠파이프도 씹어먹을 것 같은 강인한 이미지의 Matheny였지만,  10년간 25~30건의 뇌진탕은 견디기 힘든 수준의 고통이었다. Matheny의 열렬한 지지자이던 Giants 단장 Brian Sabean은 Matheny의 상태 호전을 위해 Pittsburgh 대학의 뇌진탕센터에 Matheny를 보내 프로그램을 따르게 했으나, 의사들의 의견은 "한 번만 더 뇌에 충격을 받으면 영구적으로 뇌에 손상을 입을 수 있다" 며 Matheny에게 선수생명 종료를 선고했다. 

뇌진탕의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Matheny는 꾸준한 단기 기억 상실증 때문에 운전 중에도 몇 차례씩 부인 Kristen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지금 어디를 가고 있고, 왜 가고 있는지" 를 물어봤으며, 심박수가 120을 넘어가게 되면 지독한 현기증에 시달렸기에 늘 Heart Monitor를 달고 다녔다. 심지어 계단을 오를 때도 한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끔찍한 두통과 현기증으로 구토증세에 시달렸으며, 이에 Matheny이 5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계단을 오를 때에는 최소 45분이 걸렸다고 한다. 주유소에서 자동차 주유구에 호스를 꽂아놓은 것을 까먹고 그냥 운전해서 나오다가 주유기를 망가트리는 일이 한 달에 3번 이상 있었다고 하니, 일상 생활에 큰 어려움이 있었음이 자명하다. 

더 이상 야구를 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린 Matheny는 이후 Giants의 미래에 누를 끼치지 싫다며 2007년 2월 1일을 앞두고 은퇴를 선언했으며, 자신과 같은 케이스가 더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에 홈 플레이트 충돌 반대 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로부터 몇 년 후 Giants 백스톱이 된 Buster Posey가 "Posey Rule"을 만들어주면서 Matheny의 바람은 어느 정도 실현이 되었다.



총평 - Natural-born Leader

(하키, 농구, 풋볼에 비해) 직접적 육체 충돌 (No Contact Sports) 이 적다는 종목 특성을 감안한다면, 야구선수에게 "Toughest Man Alive" 라는 별칭은 약간 사치스러워 보이긴 한다. 90마일을 상회하는 공을 얼굴로 이겨내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핏덩이를 "풰" 하고 뱉어내는 장면은 여전히 ESPN 혹은 MLB Network에서 All-time "Ouch" Top 50 쯤에 선정될만큼 분명 자극적이며, 스포츠 저널리스트들이 그냥 묻어버리기 아까울 소재이긴 하다. 그러나 Matheny가 단순히 이 에피소드 하나로 "무식하게 강한 맷집과 물방망이를 자랑하던 수비형 포수" 로 기억된다면, 그것 또한 억울한 일일 것이다.  

감독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선수시절의 Mike Matheny 역시 리더였다. Matheny는 개인으로써는 절대 빛나지 않는 선수였고, 타석에서의 그는 당당한 체구와 다르게 한없이 작아보였다. 그러나 8명의 팀메이트들을 눈앞에 두고 플레이트 뒤에 자리를 잡으면 Matheny의 진가가 발휘되었고, 그는 투수들 뿐 아니라 야수들까지 본인들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있는 힘껏 도왔다. 필드 안에서나 밖에서나 Matheny의 가치는 그가 주변에 미치는 영향으로써 증명되었고, 결국 마지막까지 많은 투수들을 "내 사람" 으로 만들고 은퇴했다. 수차례의 충돌과 마스크를 울리는 파울팁에 두들겨 맞으면서도 그는 무려 10,000이닝을 포수로 소화했고, 수백명의 투수들을 안심시켰으며, 그 기간동안 훌륭한 팀메이트, 훌륭한 포수, 모범적인 가장이자 인간으로 인정을 받았다. Toughest Man Alive 라는 별명은 어쩌면 95마일짜리 공을 맞고 안아픈척 쿨한척 해서 어울리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2015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Old-School 멘탈리티로 무장한 Mike Matheny는 "시대에 맞는 스타일의 리더"로 보이지는 않을 수 있다.  이미 자주 드러낸 바 있지만, 필자는 "Playing the game the right way" 를 무식할 정도로 외치는 선수들에게 어쩔 수 없는 호감을 갖게 된다. 물론 Matheny의 불펜 운용에 육두문자를 내뱉은 적도 있지만 이 양반의 리더십에 감탄한 적도 생각보다 많다. 개인의 취향에 맞는지 여부를 떠나서, Matheny가 Natural-born 리더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 않나 싶다.

“The job of a catcher is often undervalued as to the success he brings to the team as a whole; it’s constant managing. People talk about why so many catchers are managers. That’s because they’re managing people. Catchers are managing not just the pitchers, but they’re also managing other position players as well. They’re trying to get everyone on the same page. The best catchers typically do that sort of thing.”                                                                                                      
    - Mike Matheny (9/10/2010, Interview with Anna McDonald, Hardball Times)

Did you know...?

  • 2월 3일, Mike Matheny의 자서전 Matheny Manifesto가 출시된다. 요새 출판 행사 때문에 정신이 없는 것 같다.
  • Brewers는 1993년부터 "Mitch Harris Award"라는 상을 제정, 구단 내에서 가장 사회 봉사에 이바지한 선수를 특별히 표창했다. Brewers 팀내에서 주는 일종의 소규모 Roberto Clemente 상이라고 봐도 무난할만큼 비슷한 상이다. 1996년 Brewers는 26세의 백업포수 Matheny를 수상자로 정했다. 
  • 2003년, 존경받던 베테랑 투수 Darryl Kile의 안타까운 요절을 기리고자 Cardinals/Astros에서 Darryl Kile Award를 제정했다. 이 상은 그 해의 "a good teammate, a great friend, a fine father and a humble man" 에게 주어지는데, 이 상의 첫번째 수상자는 Mike Matheny였다. 
  • 2005년 말, Giants에서는 구단 내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타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는 (Inspirational) 사람에게 주는 Willie McGee Award 수상자로 Mike Matheny를 정했다. Giants 유니폼을 입은 첫 해에 이 상을 수상한 인물은 Matheny가 처음이고, 당분간 이런 케이스는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 3개의 다른 구단에서 각각 Performance 가 아닌 Character로 표창을 받는 선수는 Matheny가 처음이 아닐까 싶다.


by Doovy



Sources: SI, ESPN, MLB.com, Baseball-reference, Fangraphs, STL Post dispatch, LA Times, Baseball-almanac, Viva El Birdos, The Michigan Daily, The Hardball Times, Dallas Morning News



  1. Bud Maddaugh는 Michigan 감독직을 10년간 지켰는데, 이 기간동안 올린 성적이 무려 465승 146패, 승률이 .761에 달한다. Big-10 Conference에서 이렇게 장기간 집권하는 것은 종목을 가리지 않고 어려운 일이다. [본문으로]
  2. 고등학생 Matheny는 당시 General Manager가 "단장" 이 아닌 "팀 장비 관리자" 쯤 되는 줄 알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또한 남편 Matheny를 있게 하는 계기도 되는데, Gillick과의 통화 때문에 수업을 늦게 들어가게 되면서 현재 부인인 Kristen을 만나게 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본문으로]
  4. Middaugh 감독은 Matheny 아버지의 우람한 체구를 보고 "저걸 보면 아들녀석도 확실히 더 클 수 있다" 는 생각에 장학금을 제시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Freehan 본인도 Michigan을 나왔으며, 대학 시절 All-American Catcher 로 선정되기도 했었던 엘리트 포수이다. [본문으로]
  6. "If you’re going to be in this game for a long time, even after your playing days, you need to change all your electives to learning Spanish." [본문으로]
  7. 결국 Spanish 부전공으로 졸업. [본문으로]
  8. 이 라운드에서는 Jason Schmidt, Derek Lowe, Steve Trachsel 등 훗날 꽤 성공적인 커리어를 밟게되는 투수들이 많았다. [본문으로]
  9. 골드 글러브를 4회 이상 받은 포수는 Mike Matheny를 포함해 역대 9명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중 Matheny를 가르친 포수가 2명 (Bill Freehan, Del Crandall), Matheny가 가르친 포수가 1명 (Yaider Molina) 이다. [본문으로]
  10. 7:1 승리, Kile 6IP 2H 1ER, Matheny 2-for-4 [본문으로]
  11. Matheny의 통산 득점권 타율은 .270,OPS는 .752으로 비득점권 타율 .232에 비해 훨씬 높은 수치이다. [본문으로]
  12. Matheny 말고 다른 2명은 Phillies의 포수 Buddy Rosar (1946) 와 Marlins 역사상 최고의 포수였던 Charles Johnson (1997) 뿐이다. [본문으로]
  13. 다른 7명은 각각 Mike Piazza, Jason Kendall, Pudge Rodriguez, Brad Ausmus, Dan Wilson, 그리고 Jorge Posada 뿐이다. [본문으로]
  14. 잘 모르는 선수라서 찾아봤는데, 통산 200경기에 넘게 등판해서 BB/9이 5.0에 달한다. 2002년에는 Cardinals 마이너에서 잠시 뛰었었다. [본문으로]
  15. 다음 타자 Jose Valentin이 Walk-off 2-run single을 치면서 Matheny의 희생이 승리를 불러왔다. [본문으로]
Posted by Doovy+
:

Walt Jocketty Years(8)

Transactions of 2001-02 Offseason, 2002 Season

2002 Season: 97승 65패, NL Central 1위

Postseason: NLDS vs Diamondbacks 3-0 승, NLCS vs Giants 1-4 패

(Baseball-Reference 2002 시즌 페이지)


비록 2001 시즌이 Big Unit과 Schilling이 이끄는 DBacks에 막혀 NLDS에서 끝나긴 했고, Big Mac이 갑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했지만, 여전히 마운드에는 Matty Mo, Kile, Woody Williams가 있었고, 타선에는 JIm Edmonds, Pujols, J.D. Drew 등이 포진하고 있었다. 팀의 미래는 밝아 보였고, Big Mac을 대신할 주전 1루수만 찾으면 이 팀은 2002년에도 컨텐더로서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2001/11/04  FA Mike Difelice 계약(1yr/750K)   Average

Marrero가 사실상 외야수로 전업하면서, 백업포수가 필요해진 Jocketty는 Difelice와 계약했다. Difelice는 Matheny의 부상으로 인해 2002 시즌 개막전에 선발 출장하기도 했다. 이후의 백업포수들(Einar Diaz, Gary Bennett 등)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었다고 본다.


2001/12/11  FA Jason Isringhausen 계약(4yr/27M)   Good

과거 Kevin Brown, Mike Hampton 영입전에 뛰어들었다가 물을 먹었던 Jocketty는 마침내 FA시장에서 투수를 잡아 오는데 성공했는데, 바로 Izzy였다. Izzy는 당시 Rangers로부터 약간 더 큰 규모의 계약을 제안받았으나 고향팀인 Cardinals를 선택했다고 한다. Izzy는 이 4년의 계약기간 동안 5.7 fWAR(bWAR은 5.0)을 기록했는데, 당시 FA시세 및 일반적으로 클로저에 붙는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그럭저럭 밥값을 해줬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FA 클로저를 비싼 연봉으로 데려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나, 이 시기 Cards 팜에는 hard-thrower가 거의 전무했으므로, Izzy가 없었다고 할 때 마땅히 클로저를 맡길 만한 투수도 없었다. 한편, Cards는 이 계약으로 2002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을 잃었다. 팀이 Win-Now 모드에 있음을 확고히 한 계약이라고 하겠다.

(Jason "Izzy" Isringhausen)


2001/12/15  트레이드: Red Sox에 Dustin Hermanson(RHP)을 보내고 Dustin Brisson(1B), Luis Garcia(1B/OF), Rick Asadoorian(OF)을 받음    Bad

Jocketty는 2001년 실망스런 성적을 냈던 Hermanson을 Red Sox에 보내고, 유망주 셋을 받아왔다. 그동안 여러 번 강조했듯이, Jocketty는 이런 유형의 트레이드에 전혀 소질이 없다. 받아온 유망주 셋 모두 메이저리그 구경도 못해보고 사라진 것이다. 그나마 Garcia가 이후 7월에 다시 트레이드 베잇으로 활용된 것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형편없는 트레이드가 무려 Bad 라는 관대한 점수를 받게 된 것은, Hermanson이 완전히 폭망했기 때문이다. Hermanson은 Red Sox의 2선발로 시즌을 시작했지만, 폭우 속에 등판한 이적 후의 첫 경기에서 투구 도중 미끄러져 부상을 당했고, 그대로 7월 말까지 DL에 드러누웠다. 복귀해서 한 게임을 던진 후, Hermanson은 집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또 미끄러져 다시 한 달을 더 DL에서 보냈다. 그는 2002 시즌에 고작 22 이닝을 던졌고, 7.77 ERA를 기록했다.


2001/12/18  FA Tino Martinez 계약(3yr/21M)   Terrible

Jocketty가 Hermanson을 트레이드 한 것은, 사실 이 계약을 위해 페이롤 유동성을 확보한 측면이 있었다. 은퇴한 Big Mac을 대신할 1루수로, 34세의 Tino Martinez와 계약한 것이다. 당시 팬들과 지역 언론은 1루수 감으로 Jason Giambi를 많이 거론했고, 심지어 Big Mac도 Giambi에게 Cards로 오라고 로비를 했지만, Giambi는 이미 5일 전인 12월 13일에 Yankees와 7년 120M의 메가 딜을 체결한 뒤였다. 당시의 Cards는 이런 규모의 계약을 할 여력이 없었다. 고작 이 3년 21M의 계약을 하기 위해 5.5M의 연봉이 남아 있던 Hermanson을 트레이드하지 않았는가...! 당시 나 개인적으로는 수비가 좋은 1루수를 원했기에, Giambi 대신 훨씬 저렴한 가격에 Tino를 잡은 것을 환영했었다. 더군다나 Tino는 소위 "proven winner"이고 "mr. clutch"가 아니었던가. Sabermetrics의 S자도 모르던 그 시절, 이런 Tino를 잡아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이 계약으로 인해, Cards는 2002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지명권까지 잃어버렸다.

이 계약은 이후 Jocketty의 최악의 무브 중 하나로 꼽히게 되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나쁜 계약은 아니었다. Tino는 Big Mac과는 차원이 다른 좋은 1루 수비로 내야진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고, 트레이드 되기 전까지 2년 동안 3.1 WAR을 기록했다. 사실 14M에 3.1 WAR이면 그렇게 심한 것도 아닌, 약간 오버페이한 정도인 것이다. TLR과 싸우고 "clubhouse cancer"라는 오명 속에 팀에서 쫓겨난 것은, 분명 그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TLR과 싸우고 나간 선수는 너무나도 많기에... 하지만, 성적보다 더 문제였던 것은, Tino는 팬들에게 너무나도 인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2년 동안 그저 그런 성적을 내고 트레이드 되었을 때, 그를 변호하는 팬이나 언론은 거의 아무도 없었다. 좀처럼 홈팀 선수들에게 야유를 보내지 않는 세인트루이스의 팬들이지만, Tino에게는 꽤 자주 야유를 퍼부었다. (다만, 동료들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Matty Mo는 STL Today의 Tino 비난 기사를 반박하는 이메일을 직접 보내기도 했다.) 하필 Big Mac의 후임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가 Yankees의 오랜 주전이었다는 것이 아마도 문제였던 것 같다.


사족을 달자면, Yankees의 단장 Cashman은 원래 Tino를 단기 계약으로 잡고, 이후에는 유망주 Nick Johnson에게 1루를 맡기고 싶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돈으로 뭐든 해결할 수 있었던 구단주 George가 Giambi와 계약하도록 압력을 넣어서, 결국 Giambi과 계약을 체결하고 말았다. Giambi는 계약 후 2시즌 동안 12 WAR을 기록했으나, 이후 부상과 스테로이드 파문 등으로 성적이 하락하여 결국 먹튀에 가까운 레벨로 추락하고 말았다.

(Tino Martinez)


2002/01/02  FA Jason Simontacchi 계약(마이너)    Excellent

Simontacchi는 5월에 콜업되어, 첫 선발 등판에서 7이닝 2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되었고, 이후 시즌 내내 로테이션에서 머무르면서 143.1이닝을 던졌다. 그의 4.02 ERA는 4.85 FIP, 4.85 xFIP를 감안하면 거의 뽀록에 가까웠고, 실제로 이 시즌 이후 그의 성적은 매우 안좋아졌지만... 마이너 계약을 한 무명 선수가 143.1이닝을 던지며 0.6 WAR을 기록했다고 하면 충분히 성공한 계약이 아닌가?

(Jason Simontacchi)


2002/01/05  Matt Morris 연장계약(3yr/27M)    Good

Jocketty는 연봉조정 마지막 해였던 Morris와 3년 27M의 연장계약을 체결했다. Morris는 2002년에 4.6 WAR의 꽤 훌륭한 투구를 했으나, 2003년 2.9 WAR을 거쳐 2004년에는 4.72 ERA/4.93 FIP, 1.1 WAR로 추락했다. 2년 계약만 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게 입맛대로 자유롭게 계약이 될 리는 없는 것이다. 앞의 2년은 분명히 연봉 이상의 활약을 해 주었고, 전체 기간으로 봐도 3년 27M에 도합 8.6 WAR라면 이것은 적어도 팀이 손해본 계약은 아니라고 본다. 더구나 Morris는 2001년에 6.0 WAR을 기록하며 사이영 투표에서 3위에 올랐던 직후였다. 이보다 더 싸게 계약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2002/01/29  FA So Taguch 계약(3yr/3M)    Excellent

계약 당시에는 뭐 이런 계약을 하나 싶었다. Taguchi는 일본에서도 스타 플레이어가 아니었고, 이런 선수를 3년씩이나 계약한다는 것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실제로 구단은 그를 AA에 보내 "육성" 했는데, Taguchi는 군소리 하지 않고 그저 열심히 뛰었고, 결국 2년이 지난 2004년에서야 메이저리그 벤치에 확실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 이후 2007년까지, 그는 Cards 벤치의 핵심 멤버로 활약하게 되는데, 매우 우수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특히 수비와 주루에서 많은 기여를 해 주었으며, 타석에서도 근성있는 모습을 보이다가 가끔 뜬금없는 2루타를 날려서 팬들을 기쁘게 하였다. 개인적으로 참 좋아했던 선수이며, everyday grinding을 강조하는 TLR의 스타일에도 참 잘 맞았던 선수였다.

(So Taguchi)


2002/07/19  트레이드: Indians에 Luis Garcia, PTBNL(Coco Crisp(CF))을 보내고 Chuck Finley(LHP)를 받음    Excellent

Darryl Kile의 죽음은 팀의 로테이션에 거대한 블랙홀을 만들어 놓았고, Jocketty는 결국 39세의 Chuck Finley를 영입하여 선발진을 보강하였다. Finley는 트레이드 이후 마치 전성기를 방불케하는 위력적인 피칭(8.75 K/9, 3.17 FIP)을 선보이며 2개월여 동안 무려 2.0 WAR을 적립, Cards가 지구 1위를 차지하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데 공헌하였다. 비록 PTBNL로 건너간 Coco Crisp이 above-average regular로 성장하여 배가 아프긴 했지만(이후 외야유망주라는 게 사라진 우리는 Juan Encarnacion이나 Preston Wilson을 외야에서 보게 되지 않는가... -_- ), 어쨌든 로테이션의 안정과 플레이오프 진출이라는 본연의 목적은 확실히 달성했기에, Excellent를 주었다.

사실 Finley는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다가 시즌 초반 와이프(Tawny Kitaen)에게 하이힐로 얻어맞고 이혼 소송을 제기하는 등 사생활이 엉망이었기 때문에(게다가 Tawny는 이혼 소송의 진행 과정에서 Finley가 평소에 스테로이드와 마리화나를 애용했다고 폭로하기까지 했다), 영입 당시에는 뭐하러 이런 넘을 데려오나 싶었다. 하지만, Finley는 복잡한 가정사에도 불구하고 프로답게 잘 던져 주어서, 시즌이 끝날 무렵에는 한 시즌 더 남아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는 이 시즌 후 은퇴하였다.

(Chuck Finley)


2002/07/29  트레이드: Phillies에 Placido Polanco(3B), Bud Smith(LHP), Mike Timlin(RHP)을 보내고 Scott Rolen(3B), Doug Nickle(RHP), 현금을 받음     Excellent

이 시즌 Jocketty는 정말 올인의 끝을 보여 주는 것 같다. Kile에게 월드시리즈 우승을 헌정하고 싶었던 것일까? Jocketty는 트레이드 마감시한을 앞두고 Scott Rolen을 영입하는 승부수를 던졌는데, 이게 또 훌륭한 트레이드가 되었다. Rolen은 공수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여 남은 두 달 동안 무려 3.3 WAR을 쌓았다. 한편, Phillies의 입장에서는 Bud Smith가 폭망해 버렸으나, Polanco가 상당히 우수한 3루수로 성장하여 그럭저럭 선방한 트레이드가 되었다. (이후 5년간 Rolen은 25 WAR, Polanco는 19 WAR을 기록하였다. 여기에 둘의 연봉 차이까지 감안하면 Phillies도 밑진 것이 별로 없을 정도이다.)


2002/08/25  트레이드: Cubs에 2 PTBNL(Jared Blasdell, Jason Karnuth)을 보내고 Jeff Fassero(LHP)를 받음    Good

39세의 Fassero는 당시 워낙 Cubs에서 삽질중이어서 아무 기대를 안 했었는데, 트레이드 후 의외로 18이닝에서 3.00 ERA를 기록하며 불펜에서 활약하였다. 물론, FIP는 5.35였고, 순 뽀록이었지만... 어쨌든 결과는 좋았고, 보낸 두 넘이 모두 망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2002/08/29  트레이드: Brewers에 Chris Morris(OF), PTBNL(Mike Matthews(LHP))을 보내고 Jamey Wright(RHP), 현금을 받음    Bad

이번엔 우완 불펜도 보강을 시도했는데... 앞의 Fassero와 달리 Wright는 뽀록조차 터져주질 않았다. 15이닝에서 8 K/12 BB, 4.80 ERA, 6.30 FIP의 허접한 성적을 낸 것이다. 차라리 Mike Matthews를 그냥 데리고 있는 것이 나았다.


2002/09/01  Scott Rolen 연장계약(8yr/90M)    Excellent

Jocketty는 당시 FA를 앞두고 있던 Rolen과 8년 90M의 대형 연장계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계약은 당시로서는 구단 역사상 최대 규모의 계약이었다. AAV 11M은 당시 시장시세를 고려할 때 상당히 저렴한 편이었으나, 8년이라는 계약기간은 상당히 긴 것이었다. 이후 Rolen은 2003, 2004년에 눈부신 활약을 했지만, 2005년과 2007년에는 부상으로 평균 이하의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여 inconsistent한 모습을 보이다가 역시 TLR과 싸우고 팀을 떠났다. 금액 대비 효율이라는 면에서는 S까지는 아니고 A학점 정도 줄 수 있는 계약이 아니었나 싶다.

(Scott Rolen. 정말 그림같은 수비를 밥먹듯 보여주던 3루수였다.)


이 시즌은 6월에 Darryl Kile이 사망하는 초대형 악재가 있었으나, 그의 빈자리는 트레이드로 영입한 Chuck Finley와 부상에서 돌아와 흑마술 피칭의 진수를 보여주었던 Andy Benes가 잘 메꿔 주었고, 팀은 97승으로 지구 1위를 차지하여 플레이오프에 3년 연속 진출하였다. NLDS에서 다시 만난 Diamonbacks를 3-0으로 스윕해 버렸을 때는 정말 이 팀이 월드시리즈에 가는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아쉽게도 NLCS에서 Giants에게 1승 4패로 패하고 탈락해 버렸다. 이전의 Kile 추모 포스팅에서 많이 언급했으니 여기서 또 다시 자세히 쓰지는 않겠지만, 당시 선수들이 플레이하는 모습은 엄숙함을 넘어서 경건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지었을 때, 그리고 NLDS 3차전을 이겼을 때 그라운드에 나부끼던 Kile의 저지를 보고 눈시울을 붉혔던 기억은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Doovy님께서는 가장 Do-over를 하고 싶은 경기로 2004 WS 1차전을 꼽으셨는데, 주인장은 이 2002 NLCS를 꼽고 싶다. 5차전에서 좌완 똥볼러 Kirk Rueter와 불펜에 막혀 단 1점밖에 내지 못하고 탈락했을 때의 그 먹먹한 심정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 팀은 월드시리즈에 반드시 갔어야만 하는 팀이었다. 월드시리즈 마운드에 Kile의 저지를 다시 한 번 꽂았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시즌에 Jocketty가 ML Executive of Year 상을 한번 더 받았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던 시즌이라고 본다. 그는 잘 준비된 팀으로 시즌을 맞이했고, Kile의 죽음이라는 돌발상황도 훌륭하게 대처하였다. 또한, TLR은 그야말로 애증의 캐릭터이지만, 이 시즌에 멘붕 상태의 선수들을 추스려서 97승을 거두고 지구 1위를 차지한 그의 리더쉽은 정말 칭찬할 만하다. TLR의 16년 Cards 감독 역사에서 가장 훌륭했던 시즌이 아니었을까 싶다.


TO BE CONTINUED...

Posted by FreeRedbird
:

Walt Jocketty Years(6)

Transactions of 1999-2000 Offseason, 2000 Season

2000 Season: 95승 67패, NL Central 1위

Postseason: NLDS vs Braves 3-0 승, NLCS vs Mets 1-4 패

(Baseball-Reference 2000 시즌 페이지)


96년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후, 팀은 3년 동안 플레이오프에 나가지 못했다. 물론 Big Mac 덕분에 흥행 성적은 좋았지만, 그래도 Mac을 비롯하여 Tatis, Drew, Lankford 등 타선에 훌륭한 코어를 보유한 입장에서는 기대치에 성적이 다소 못 미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99 시즌 종료 후, Jocketty는 95-96 오프시즌 이상으로 활발하게 선수를 영입하여 완전히 바뀐 모습의 팀으로 2000 시즌 개막을 맞이하게 된다. 너무 무브가 많아서 정리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_-


평가 등급은 Atrocious - Terrible - Bad - Average - Good - Excellent - Outstanding 순이다.



1999/11/11  Blue Jays에 Alberto Castillo(C), Matt DeWitt(RHP), Lance Painter(LHP)를 보내고 Pat Hentgen(RHP), Paul Spoljaric(LHP)을 받음    Excellent

마이너 계약을 제외하면, 이 트레이드가 오프시즌 무브의 시작이었다. 로테이션을 보강하기 위해, Blue Jays로부터 똥볼 흑마술 이닝이터 Pat Hentgen을 데려온 것이다. Hentgen은 1년 뒤에 FA가 될 예정이었고, 6M이라는 당시 기준으로는 제법 비싼 연봉을 받을 예정이었다. 당시 시세로 가격대 성능비가 썩 좋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Hentgen은 194.1이닝을 소화하며 4.72 ERA, 4.95 FIP로 1.9 WAR의 성적을 기록하여, 이닝이터로서의 역할을 해 주었다. (이정도 FIP로 1.9 WAR라니 이 무렵의 타고투저가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클럽하우스에서 Ankiel 등 어린 선수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같이 넘어온 Spoljaric은 스프링캠프 종료와 함께 방출되었다.


한편, 캐나다로 넘어간 3인방을 보면, Castillo는 2년간 .534 OPS의 아름다운 성적을 기록한 후 방출되었고, Matt DeWitt은 40이닝을 던지고 메이저리그에서 사라졌다. Painter가 그나마 1년 반 동안 0.5 WAR를 기록하여 유일하게 replacment level을 상회하는 활약(?)을 해 주었다. Hentgen이 로테이션의 일원으로 리그 평균에 가까운 활약을 해 준 반면, 저쪽으로 보낸 3명은 변변한 넘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이것은 꽤 훌륭한 딜이다.

(Pat Hentgen)


1999/11/16  Rockies에 Manny Aybar(RHP), Brent Butler(2B), Rich Croushore(RHP), Jose Jimenez(RHP)를 보내고 Darryl Kile(RHP), Luther Hackman(RHP), Dave Veres(RHP)를 받음    Outstanding

Blue Jays로부터 Hentgen을 강탈한 Jocketty는 이번엔 Rockies를 상대로 더 크게 한탕 해먹게 된다. Kile은 2000-01 2년간 무려 459.2 이닝을 던졌고, 2002년 시즌 도중 안타깝게 세상을 떠날 때까지 2년 2개월 동안 9.1 WAR을 기록했다. Veres는 Bottalico를 대신하여 클로저가 되었는데, 2000년 2.85 ERA, 29 SV로 준수한 투구를 하였고, 이후 2002년까지 불펜에서 활약하였다. Hackman은 성적이 썩 좋진 않았으나, 어쨌든 2002년까지 불펜의 일원으로 이닝을 먹어 주었다.


보낸 선수들을 보면, Aybar는 2000시즌 개막 직후 Gabe White와 트레이드 되었고, 이후에도 별볼일 없었다. 당시 22세의 유망주 Butler는 Rockies에서 3년간 597 PA를 기록한 후 영영 사라졌다. Croushore는 단 16이닝을 던진 후 메이저에서 사라졌다. 그나마 Jose Jimenez가 Rockies의 클로저가 되어 4년간 5.1 WAR의 릴리버로서는 준수한 활약을 해 주었다. 사실상 Jimenez 한 명을 주고 Kile 및 릴리버 2명을 얻은 딜이어서, 대박이라고 봐도 될 듯 하다.

(Dave Veres & DK57. 사진: Stltoday)


1999/11/24  Heathcliff Slocumb(RHP) 재계약(1yr/1.6M)    Terrible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이 딜은 완전히 실패였다. Slocumb은 -0.4 WAR로 삽질하다 7월 31일에 트레이드 되었다. Slocumb은 믿고 쓰기에는 볼질이 너무 많은 투수였다.


1999/12/15  FA Mike Matheny(C) 계약(1yr/750K)     Excellent

Jocketty는 Blue Jays에서 방출된 Matheny를 저렴한 연봉에 데려왔는데, 탁월한 선택이었다. Matheny는 53%의 CS%를 기록하여 골드글러브를 받을 만큼 인상적인 도루저지 실력을 보여주며 내야수비를 안정시켰던 것이다. 그가 2000년 타석에서 기록한 .261의 타율도 커리어 하이였다.


1999/12/20  Brewers에 Juan Acevedo(RHP), 2 PTBNL(Eliezer Alfonzo, Matt Parker)을 보내고 Fernando Vina(2B)를 받음   Outstanding

이번에는 Brewers가 제물이 되었는데, Acevedo와 유망주 2명을 주고 Fernando Vina를 받아온 것이다. Vina는 .380의 OBP로 아주 훌륭하게 리드오프 역할을 수행해 주었다. 한편, Acevedo는 Brewers 불펜에서 1년 무난하게 던진 뒤에 다시 트레이드되었고, 두 유망주는 망했다. Parker는 아예 메이저리그에 올라오지 못했고, Alfonzo는 2006년이 되어서야 Giants 유니폼을 입고 빅리그에 데뷔할 수 있었다. 이것도 Kile이나 Edmonds, Big Mac 등에 비해 임팩트가 좀 적었을 뿐이지, 사기에 가까운 트레이드이다.

(Fernando Vina. n 위에 틸데(물결표시)가 붙어있어 발음은 "비냐" 이다. 저 수염이 참 멋있었다.)


1999/12/22  Thomas Howard(OF) 재계약(1yr/650K)    Bad

35세의 Howard는 99시즌에 좋은 활약을 해준 덕분에 재계약이 되었으나, 2000 시즌에는 .646 OPS로 부진하였다.


2000/01/07  FA Andy Benes(RHP) 계약(3yr/18M)    Terrible

Benes는 이 3년 계약 기간 동안 도합 0.3 WAR을 기록했는데, 특히 2001년에는 7.38 ERA, 7.10 FIP의 엽기적인 피칭을 하여 팬들의 피를 바싹바싹 말렸다. (2001 시즌에 이런 넘을 19번이나 선발등판 시키고 107이닝을 던지게 한 TLR은 진짜 강적이다.) 이정도면 Atrocious가 딱 맞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2000 시즌 로테이션의 일원으로 나름 팀을 플레이오프에 올리는 데 공헌한 것을 인정하여 Terrible로 한 단계 내렸다. 그는 2000 NLCS 3차전에서 Mets를 상대로 8이닝 2실점의 호투를 하여 승리투수가 되었는데, 이 경기는 NLCS에서 유일하게 Cards가 승리한 경기였다.


2000/02/01  Edgar Renteria(SS) 연장계약 체결(4yr/20M, 6.5M option for each of 04, 05)    Outstanding

Jocketty는 연봉조정 2년차였던 Renteria와 남은 연봉조정 기간과 FA 2년을 커버하는 4년 계약을 맺었다. 여기에는 옵션이 2개 달려 있었는데, 구단은 나중에 04년 옵션만 실행하게 된다. 어쨌거나, 말할 것도 없이 훌륭한 계약이었다. Renteria는 이후 5년간 18 WAR을 적립하며 팀이 매년 컨텐더가 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2000/02/03  FA Shawon Dunston(UT) 계약(1yr/600K)     Good

99시즌 중 트레이드되었던 Dunston은 FA가 되어 다시 Cards로 돌아왔다. 이번에도 투수, 포수를 제외한 거의 전포지션을 소화하며 231 PA에서 12홈런, 250/278/486 으로 벤치 플레이어로는 괜찮은 활약을 해 주었다.


2000/03/11  Fernando Tatis(3B) 연장계약 체결(4yr/14M)     Good

연봉조정 1년차였던 Tatis는 계약 마감시한이었던 이날 4년의 연장계약에 도장을 찍었다. 99시즌 34홈런 21도루 107타점으로 폭발한 Tatis였기에, 이정도면 당시 시세를 고려할 때 적절한 규모의 계약이었던 것 같다. Tatis는 2002 시즌부터 확 맛이 갔으므로, 계속 데리고 있었다면 아마도 이 계약은 망작이 되었겠지만, Jocketty가 시기적절하게 팔아치운 덕에, Cards는 전혀 피해를 보지 않을 수 있었다. 


2000/03/18  Mets에 Joe McEwing(UT)을 보내고 Jesse Orosco(LHP)를 받음    Terrible

Jocketty는 fan favorite이었던 유틸리티맨 Super Joe를 팔고 43세의 LOOGY Orosco를 데려왔는데, Orosco가 팔꿈치 부상으로 단 2.1이닝을 투구하는 데 그치면서 폭망으로 끝났다. McEwing은 이후 5년간 Mets 벤치에서 활약하였다.


2000/03/23  Angels에 Kent Bottenfield(RHP), Adam Kennedy(2B)를 보내고 Jim Edmonds(CF)를 받음    Outstanding

이 딜은 그간 여러 차례 언급했기에 생략하고자 한다. 솔직히 설명이 필요한가?

(Jimmy Baseball. Jimmy!! Jimmy!! Jimmy!!)


2000/05/03  Fernando Vina(2B) 연장계약 체결(3yr/15M+4.5M option)    Good

이정도면 향후 몇 년 컨텐더로 손색이 없다고 판단한 Jocketty는 굳히기 작업에 들어갔다. Renteria, Tatis에 이어 FA를 앞두고 있던 Vina와도 연장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Vina는 연장계약 첫해인 2001년에도 303/357/418, 3.4 WAR로 좋은 활약을 했으나, 이후 급격히 기량이 하락하여 2002-03 2년간 도합 1.3 WAR에 그쳤다. 비용 대비 평타 수준의 계약이 된 셈인데, Adam Kennedy와 Super Joe 등을 모두 트레이드하여 2루에 대안이 없었음을 감안하면, 그래도 계약을 하는 쪽이 올바른 선택이었던 것 같다.


2000/05/12  Jim Edmonds(CF) 연장계약 체결(6yr/57M+10M option)     Outstanding

Cards로의 이적 후, 열정적인 홈 팬들과 Angels 시절에 비해 자신에게 친근하게 다가왔던 클럽하우스의 분위기에 흠뻑 빠진 Edmonds는 시즌 개막 한 달여 만에 아주 행복하게 6년의 연장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 계약에는 상당한 금액의 디퍼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장 시세에 비하면 아주 저렴한 딜이었으나, 정작 Edmonds 본인은 전혀 불만이 없었다. Jocketty는 "이렇게 smooth하게 진행된 협상은 처음"이라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참고로 2000-01 오프시즌에는 A-Rod가 10yr/252M, Manny Ramirez가 8yr/160M, Mike Hampton이 8yr/121M 계약을 맺었다. Edmonds가 그냥 FA가 되었다면 7yr/100M 정도까지도 노려볼 수 있지 않았을까? 결과를 놓고 보면 Edmonds는 이후 6년간 연평균 6 WAR 이상의 엄청난 활약을 했으므로, 심지어 7yr/100M이었더라도 연봉이 아깝지 않았을 정도이니... 6yr/57M의 계약이 얼마나 team-friendly한 것이었는지는 더이상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2000/07/29  Orioles에 Chris Richard(OF), Mark Nussbeck(RHP)을 보내고 Mike Timlin(RHP)과 현금을 받음    Good

4년만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눈앞에 둔 Jocketty는 유망주 2명을 내주고 Timlin을 데려와서 불펜을 보강하였다. Timlin은 2002년 7월 트레이드로 팀을 떠날 때까지 2년 동안 불펜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다. 한편, Chris Richard도 트레이드 후 약 2년간 Orioles에서 외야수 및 1루수로 기용되며 2 WAR의 활약을 한 뒤 사라졌고, Nussbeck은 메이저리그에 올라오지 못했다. 결과를 놓고 보면 대략 비긴 트레이드로 생각되는데, 팀이 필요한 부분을 잘 보강했으므로 Good을 주었다.


2000/07/29  Pirates에 Jack Wilson(SS)을 보내고 Jason Christiansen(LHP)을 받음    Atrocious

같은 날 Jocketty는 역시 유망주 Wilson을 내주고 좌완 릴리프 Christiansen을 데려왔는데, 이 트레이드는 앞의 Timlin 영입과 달리 폭망으로 끝났다. Christiansen이 replacement level 수준으로 29.1이닝을 던지고 다시 트레이드된 데 반해, Wilson은 수비가 좋은 리그 평균 유격수로 성장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리그 평균 유격수라는 것은 상당히 귀한 자원인데, 이렇게 쉽게 내다버린 것은 참 아쉬운 일이다.


2000/07/31  Orioles에 Jose Leon(3B)을 보내고 Will Clark(1B)과 현금을 받음     Outstanding

무릎 부상으로 더 이상 수비가 불가능하여 DL에 올라간 Big Mac을 대신하여, Jocketty는 유망주 Leon을 내주고 Will "The Thrill" Clark을 영입했다. 이 무브는 신의 한 수가 되었는데, 36세의 Will Clark이 커리어 마지막을 하얗게 불태우며 1.081 OPS, 170 wRC+로 단 51게임에서 2.2 WAR을 기록하는 괴력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Clark은 포스트시즌에서조차 1.062 OPS, 165 wRC+로 크레이지 모드를 이어갔는데, 덕분에 시즌이 끝날 때까지 적어도 Big Mac의 공백은 거의 느낄 수 없었다. Orioles로 보낸 Leon은 당연히, 망했다.

01065871_display_image

(Will The Thrill)


2000/07/31  Padres에 Ben Johnson(OF), Heathcilff Slocumb(RHP)을 보내고 Carlos Hernandez(C), Nate Tebbs(SS)를 받음   Average

Jocketty는 백업포수까지 보강했는데, 손가락 부상으로 DL에 간 Eli Marrero의 시즌아웃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9월에 돌아오긴 했다.) Padres에서 Carlos Hernandez를 영입했는데, 사실 Jocketty는 지난 오프시즌에도 Hernandez의 영입 가능성을 타진한 적이 있었을 만큼, 예전부터 맘에 들어하던 포수였다. 이틀 전 Timlin을 영입했으므로, Jocketty는 Slocumb을 매물로 활용했는데, 개인적으로는 맨날 볼질을 일삼던 Slocumb을 처분했다는 것이 좋았다. 두 팀은 마이너리거도 1명씩 주고 받았는데, Johnson은 그래도 나름 유망주였고, Tebbs는 그냥 마지막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던진 throw-in에 가까웠다. 결국 Tebbs는 메이저에 올라오지 못했고, Johnson도 Padres의 기대와는 달리 파트타이머로 253 PA를 기록한 후 사라졌다. 어쨌거나 팀의 필요한 부분을 채운 무브였고, Slocumb의 모습을 안 보게 되었다는 것 까지는 좋았는데... Hernandez는 2001 시즌에 3.25M의 꽤 큰 연봉이 남아 있었으나, 부상으로 인해 2001 시즌을 통째로 날리고 말았다.




2000 시즌은 주인장이 메이저리그를 이전보다 훨씬 열심히 보게 되고, 그러다가 Cards의 팬이 되었던 해였기 때문에, 여러모로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특히 트리플 크라운을 노렸던 Edmonds와 괴물루키 Ankiel의 기억은 꽤 생생하다. 기존의 Big Mac, Lankford, Drew, Renteria 등과 더불어 새로 영입한 Edmonds, Vina로 초호화 라인업을 구성한 Cards는 타선의 파괴력과 Kile/Ankiel 듀오를 앞세워 이미 6월 말에 2위 Reds에 8.5게임이나 앞서 있었고, 이후 Big Mac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Will Clark이 훌륭하게 공백을 메꿔 주면서 95승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그 뒤는 뭐 다들 아시는 대로... Ankiel의 meltdown에도 불구하고 Braves를 스윕하고 NLCS에 올라가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결국 Piazza와 Mike Hampton, Al Leiter, Edgardo Alfonzo 등이 이끈 Mets를 넘지 못했다. Ankiel과 Leiter가 맞붙었던 2차전, NLDS에 이어 또다시 Ankiel이 볼넷과 폭투를 남발하며 1회를 넘기지 못하고 무너졌던 것은 정말 안타까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1차전 선발 Hampton은 어쩔 수 없더라도, 2차전을 패한 것이 결국 시리즈의 분수령이 되었던 것 같다. 부상당한 Garrett Stephenson에 이어 Ankiel까지 더이상 기용할 수 없게 된 TLR은 4차전에서 3일 쉰 Kile을 등판시키는 승부수를 던졌으나 실패하였고, 5차전은 다시 Hampton에게 틀어막혀 결국 1승 4패로 탈락하였다.


이 시즌 Jocketty의 무브들은 그야말로 Jocketty식 운영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들이었는데, 팜을 탈탈 털어 올인을 했지만 내준 유망주들은 거의 모두 망했고, 반면 영입한 베테랑들은 매우 훌륭한 활약을 하여 5할 승률 미만의 팀을 단숨에 컨텐더로 바꾸어 놓았다. 또한, Edmonds, Vina, Renteria 등과 장기계약에 성공하여, 단발성 성공에 그치지 않고 팀이 롱런할 수 있는 밑바탕을 닦았다. 물론, 이러한 올인 무브들이 Drew와 Ankiel의 팜 졸업과 맞물리면서 팜 시스템은 매우 황폐화되었고, 이러한 팜의 상태는 허접한 드래프트까지 겹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비참해져 갔다. 하지만 대신 2000년대 내내 컨텐더였으니, 그것도 그것대로 좋지 아니한가... 적어도 응원하는 팬의 입장에서는, 맨날 팜을 바라보며 "Wait Till Next Year!!"나 외치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고 본다.


시즌이 끝난 후 Jocketty는 ML Executive of the Year로 선정되었으며, Cardinals 구단과는 4년 연장 계약을 맺으면서 VP에서 Senior VP로 승진하였다.

Posted by FreeRedbird
:

United Cardinal Bloggers 에서는 Jack Buck과 Darryl Kile의 사망 10주기를 맞아 이들에 대한 추억을 함께 나누는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렇다. 이들이 며칠 사이의 간격으로 세상을 떠난 것도 벌써 10년이 지났다. 시간은 정말 빠르게 흘러간다.


나는 2000년 무렵부터 Cardinals의 팬이었기에, 솔직히 Jack Buck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그가 매우 오랜 세월동안 Cardinals 게임을 중계했으며, 단순히 한 사람의 방송인이 아니라 St.Louis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지역사회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여 지역 팬들에게 아주 깊은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그에게 특별한 감정적 유대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 Darryl Kile의 경우는, 비록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가 Cardinals 유니폼을 입고 뛰었던 2년 반을 지켜보았기에, 조금 달랐던 것 같다.


Darryl Kile (1968-2002)


2000년대의 Cardinals는 대충 세 시기 정도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Big Mac과 Fernando Vina, Jim Edmonds, Matt Morris, Darryl Kile 등이 주축이었던 2000년대 초반과, MV3과 Chris Carpenter로 대표되는 2000년대 중반, 그리고 MV3이 해체된 후  Pujols와 Adam Wainwright가 투타의 핵이 되고 Matt Holliday가 가세한 2000년대 후반이 그것이다. 개인적으로는 2000년대 초반 팀에 가장 큰 애착을 가지고 있는데, 뭐라고 딱 꼬집어서 이유를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이 팀이 가장 보는 재미가 있었던 팀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팀을 하나 꼽으라면, 역시 2000년의 팀이다.


2000년 팀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유력한 트리플 크라운 후보였던 Jim Edmonds와 타자들을 압도하는 강력한 구위로 뛰어난 탈삼진 능력을 선보이며 새로운 에이스로 등극하는 듯 했던 Rick Ankiel이다. 당시 타선은 Edmonds 외에도 Big Mac, Fernando Vina, Edgar Renteria, Fernando Tatis, Ray Rankford, J.D. Drew 등이 포진하여 2004년의 Murderer's Row나 2012 시즌 초반(Berkman 부상 이전)의 타선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모습이었다. 비록 Big Mac이 시즌아웃 되는 불행한 사고가 있었으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영입된 Will Clark이 거의 Big Mac과 비슷한 레벨의 활약을 해 주었다. 이 시즌은 당대 최고의 수비형 포수였던 Mike Matheny의 첫 시즌이기도 했다. 로테이션에는 화려한 탈삼진 쇼를 벌이던 Rick Ankiel과 대조적으로 묵묵히 많은 이닝을 소화하며 버팀목 역할을 하던 투수가 있었으니, 바로 Darryl Kile이었다. 그는 좀처럼 튀지 않는 캐릭터를 가지고 있었고, 팀의 수많은 스타 플레이어들에 가려서 언론의 주목을 많이 받지는 못했으나, 팀 내에서의 위치나 중요도는 어느 선수 못지 않았다고 본다.



Kile은 Houston Astros에 의해 1987년 드래프트에서 고졸 유망주로 30라운드에 지명되어 프로 무대를 밟게 되었다. 4년 뒤인 1991년에 Astros에서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그는 이후 1997년까지 Astros에서 뛴 후 FA가 되어 Rockies와 계약하였다. 많은 투수들이 그러했듯이, Kile도 Coors Field에서 변화구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으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FA계약 2년째였던 1999년에 그가 제구력을 잃어버리면서 거의 1:1의 K:BB 비율을 기록한 뒤, Rockies는 오프시즌에 그를 Cardinals로 트레이드했다. 이 트레이드는 Kile/Dave Veres/Luther Hackman과 Manny Aybar/Jose Jimenez/Brent Butler/Rick Crousehore를 맞바꾼 3대 4 트레이드였는데, Aybar와 Jimenez가 그저 그런 불펜투수 이상 되지 못했고 나머지 둘은 존재감이 없었음을 생각하면, Walt Jocketty의 걸작 트레이드였다고 봐도 될 것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해서 산에서 내려온 Kile은 커브의 무브먼트와 함께 제구력을 되찾았는데, 그냥 되찾은 정도가 아니라 BB/9를 커리어 최저 수준인 2.25까지 끌어내리면서 단숨에 staff ace로 올라섰다. 2000시즌에 그는 무려 5번이나 완투승(완봉 1회 포함)을 거두며 232.1이닝을 던지고 20승을 기록,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던 것이다. 당시 NLDS에서 Kile 대신 Ankiel을 1차전 선발로 기용한 TLR의 결정은 지금 생각해도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있지만... 이 부분은 여기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도록 하겠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맞이한 2001년 시즌에서도, Kile은 특유의 12-6 커브와 훌륭한 제구력을 바탕으로 227.1이닝을 던지며 로테이션의 버팀목 역할을 하였다. 2000년 플레이오프 이후 다시는 이전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한 Ankiel 대신 이번에는 Matt Morris가 그와 함께 로테이션을 이끌었고, 타선에서는 트레이드로 팀을 떠난 Tatis를 대신하여 Albert Pujols라는 무명 선수가 나타나 단숨에 리그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으로 자리를 잡았다. 당시 Edmonds-Big Mac-Drew-Pujols의 중심타선은 컨택/출루/파워 모든 면에서 리그 최고의 수준이었다. 비록 NLDS에서 Big Unit과 Curt Schilling 두 괴물이 이끄는 Diamondbacks와 숨막히는 명승부를 벌인 끝에 2승 3패로 탈락하였지만, Edmonds, Kile이 전성기를 보내고 있고, Morris와 Pujols, Drew등 젊은 스타 플레이이들이 새롭게 떠오르고 있었으므로, 이 팀이 계속해서 컨텐더로 남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2002년에도, Kile은 묵묵히 자기 역할을 하고 있었다. 6월 22일이 되기 전까지 말이다. 그 날은 Cubs를 상대로 한 원정 경기였는데, 늘 경기 시작 시간 4시간 전에 경기장에 오곤 했던 Kile이 아침에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호텔 방에서 숨을 거둔 모습으로 발견되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고,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당시 Cubs의 선수 대표였던 Joe Girardi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경기가 취소되었음을 발표하였는데, 지금 들어도 가슴 한켠이 아련해진다. (링크)


당시 나는 mlb.tv 계정도 없었고(mlb.tv 자체가 그당시에 존재했었는지 잘 모르겠다), 우리나라의 중계방송은 공중파나 케이블이나 하나같이 한국인 메이저리거들이 소속되어 있는 Rangers(박찬호), Diamondbacks(김병현), Red Sox(김선우) 등의 경기만 줄창 중계해 주었으므로, 주로 ESPN에 접속해서 ESPN Gamecast로 게임을 보고 나중에 mlb.com의 하이라이트를 보며 아쉬움을 달래곤 했었다. 그날도 별 생각없이 아침에 ESPN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첫 화면에 걸려있는 "KILE FOUND DEAD"라는 타이틀을 보고 경악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Cards는 물론이고 그와 한때 팀 동료였던 Astros나 Rockies 선수들까지 울먹이며 인터뷰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루 종일 우울한 기분이었던 것 같다.



그의 사망 후, 그의 유니폼은 Cardinals 덕아웃에 계속 걸려 있게 되었다. 로테이션에서의 빈자리는 트레이드로 합류한 Chuck Finley가 메꾸었다. 모자에 "DK57"을 새긴 선수들은 스포츠를 한다기보다는 전쟁터에 나가는 것 같은 엄숙함과 진지함으로 남은 시즌을 플레이하였고, 결국 또다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다. 개인적으로 TLR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고, 특히 2000년대 후반에 보여준 꼰대스러운 모습들은 정말 맘에 들지 않았지만, 2002 시즌에 팀을 잘 추스려서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던 공로만큼은 절대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2002년 9월 20일, Astros를 9-3으로 꺾고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지은 날, 선수들은 Kile의 저지를 꺼내 들고 그라운드에 나왔다. 그것은 플레이오프 진출을 자축한다기보다 차라리 종교 의식 같은 모습이었다. 아... 다시 한 번 가슴이 짠해진다.


이 저지는 NLDS에서 Diamondbacks를 3-0으로 스윕한 뒤에도 또 그라운드에 나왔다.

CARDINALS Photo: DIANE L. WILSON / SF


당시 이 장면은 참 이상한 느낌을 주었는데.. 선수들은 기뻐한다기보다도 마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의무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쉽지만, 이 저지는 더이상 그라운드에 나오지 못했는데, NLCS에서 Giants에게 4-1로 패하여 탈락했기 때문이다. 2000년이나 2004, 2005년 등의 플레이오프 탈락도 아쉬웠지만, 이 때만큼 아쉬운 때는 없었던 것 같다.




그 후, 그를 기리기 위하여 Darryl Kile Award라는 것이 생겨났다. 이 상은 "a good teammate, a great friend, a fine father and a humble man"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매년 Cardinals와 Astros 선수 각 1명에게 수여되고 있다. 2003년 최초로 이 상을 수상한 Cardinals 선수는 바로 현 감독인 Mike Matheny이다. 지금까지 Cardinals의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2003 Mike Matheny

2004 Woody Williams

2005 Cal Eldred

2006 Chris Carpenter

2007 Russ Springer

2008 Adam Wainwright

2009 Skip Schumaker

2010 Matt Holliday

2011 Lance Berkman



가끔 잊어버리곤 하는 것이 있는데, 야구는 사람이 하는 스포츠이고, 엄청난 연봉을 받는 메이저리그 선수도 결국은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Darryl Kile은, 무척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덤으로 실력도 참 괜찮았던 투수였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Cardinals > St. Louis Cardinals'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2 시즌 종료.  (18) 2012.10.24
트레이드 데드라인  (16) 2012.07.30
Spring Camp에서의 Mike Matheny  (32) 2012.03.05
Cardinals Winter Warm-Up Recap  (16) 2012.01.18
Cardinals, 월드시리즈 우승!!!  (21) 2011.10.30
Posted by FreeRedbir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