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ott Boras'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4.02.06 Revisiting TLR ERA [12] Rick Ankiel - Part I 21
  2. 2013.01.31 Revisiting TLR ERA [5] J.D. Drew - Part I 8

많은 투수들이 빅 리그에 올라오기 전에 각자 소속한 하위 레벨의 마이너리그들을 소위 "초토화" 시키면서 올라오고, 그 과정에서 "예전의 어떤 사이영상 투수와 비슷하다"느니, 조금만 다듬으면 누구보다 낫겠다더니, 별 소리를 다 들으면서 올라온다. 그렇지만 Sandy Koufax 에 대한 비교는 흔하지 않다. 2014년 시즌 개막을 앞둔 현재, 사이영상 3차례에 빛나는 현존 최고의 투수 (Wain아 미안하구나) Clayton Kershaw만이 무리없이 Sandy Koufax 컴패리즌을 소화해낼 수 있다. 심지어 아직도 Kershaw가 Koufax에 비교되기는 시기상조라며 향수에 젖어계신 올드 팬들도 많다.

Raw Talent로 밀어붙이는 폭발적인 잠재력을 지닌 유망주에 대한 갈증에 아직 목말라하는 2014년의 Cardinals 팬들에게는 참으로 믿기 힘들겠지만. 16년 전, 우리 팜에는 Sandy Koufax 컴패리즌이 유효하다는 고졸 좌완 투수가 있었다. 

오랜 Cardinals 팬으로써, 오랜 야구팬으로써, 머리에 떠올릴 때마다 정말이지 만감이 교차하는 선수, Rick Ankiel 을 돌아본다. Part I 에서는 투수 Ankiel을, Part II 에서는 타자 Ankiel을 다뤄보려 한다.


Rick Ankiel (Richard Alexander Ankiel Jr.)

RHP / Outfielder

DOB: 1979년 7월 19일 

Birth: Port St. Lucie, Florida

Time with Cardinals:  1997-2009

Childhood

훗날 한 스카우트로부터 "여태 내가 본 최고의 좌완 투수들 중 하나" ("one of the best left-handers I've ever seen") 라는 극찬을 받은 Rick Ankiel이지만, Ankiel이 투수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11학년이 (고2)  되고 난 후였다. 그 전까지 Ankiel은 남들보다 늘 작은 키에 그다지 대단할 게 없는 재능이었고, 리틀리그 시절에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Ankiel의 정신적 성숙함과 마운드 위에서의 차분함, 소위 "멘탈" 만큼은 유난히 훌륭했다. 지금 2000년 포스트시즌에서 역대 최악의 "멘붕" (Melt-down) 을 보였던 선수의 멘탈을 얘기하는게 맞냐고 물으신다면, 그렇다.

Florida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자란 Ankiel은 고등학교 이전까지 "실수에 대한 두려움" 으로 꽁꽁 싸매진, 소심하고 겁이 많은 소년으로 자랐다. Ankiel 은 야구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야구는 나의 길" 이라고 생각할만큼의 열정은 없었다. Ankiel보다 야구를 잘하는 아이들은 많았다. 팀에서 키도 덩치도 가장 작았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Rick Ankiel Sr. 는 아들에게 반강제로 야구를 시켰다.

그의 아버지 Rick Ankiel Sr. 는 화려한 전과를 자랑한다.1975년 대마 소지 혐의로 체포된 것이 시작으로 이후 25년간 그는 14차례 체포 당했으며, 6차례 구속당했고, 전과의 종류도 마약 밀수, 총기 은폐, 강도, 특수강도, 음주 운전 이후 경찰로부터 도주 등 정말 다양했다. 범죄자 테크를 타기 전까지 아버지의 직업은 낚시 가이드였으나, 이 업계에서 일하던 중 마약 밀매단과 엮이게 되면서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고 말았다. Ankiel이 자란 작은 마을에서 아버지의 과거와 전과, 그리고 심심찮게 일어나던 범법 행위들과 불안한 가정 분위기는 지역 사회와 이웃들의 지나친 관심과 손가락질을 불러왔고, Ankiel이 성장하면서 이로 인한 스트레스는 어린 소년이 감당하기 힘들 수준으로 부풀어올랐다. 








아버지는 어린 Ankiel에게 가혹하게 훈련시켰다. 리틀야구 선수였던 어린 아들에게 기합과 엄포는 물론이고 미국 아버지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따뜻한 부정은 전혀 없었다. 강압적이었던 아버지는 본인이 결코 아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어린 Ankiel을 더더욱 강하게 몰아붙였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던 아버지 밑에서 Ankiel은 아버지의 폭언을 피하기 위해서 야구를 했고, 늘 실수하면 안된다는 공포에 떨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 때문에 늘 소위 "군기"가 바짝 들어있었던 Ankiel은 훗날 고교야구에서 보기 드문 성숙함과 인성, 그리고 근면함으로 칭찬을 받는다.

"My dad was hard on me all the time. If I swung at a bad pitch in Little League, he'd make me run wind sprints when I got home. It was always, I could've done better. But maybe if he wasn't hard on me, I would've gone down the wrong path. He always said, 'Do what I say, not what I do."                                                                                                                                          

   -Rick Ankiel, on his father


14세가 되던 해, 어린 Ankiel은 야구를 그만두고 그냥 친구들처럼 서핑이나 낚시를 하면서 놀고 싶다고 얘기했으나, 이런 푸념을 들어줄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들이 "나는 어차피 메이저리그에 갈 재능은 안되요" 라고 하자 "If you love the game, good things will happen." 이라며 정말 무식하게 아들을 몰아붙였다. 10학년 때, 될성부른 떡잎이라면 지금쯤 고교 야구를 씹어먹고 있어야 할 그 시기에 Ankiel의 패스트볼 구속은 84마일이었다. 야구팀 코치 Messina는 "필드 밖에서 정말 훌륭한 아이지만 그다지 Exceptional 한 선수인지는 모르겠다" 라고 Ankiel을 표현했다. 

Ankiel 이 11학년 때, 갑자기 키가 급성장하면서 몸집이 커졌다. 꼬마였던 Ankiel이 6피트가 넘는 키에서 특유의 다이내믹한 투구폼으로 패스트볼을 꽂자 92마일이 넘게 찍혔다. 무브먼트도 장난이 아니었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모인 한 경기에서 Ankiel은 첫 15타자 중 14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이제야 뭔가 희망이 보였다. 그 경기 이후 Ankiel이 던지는 경기마다 스카우트들이 몰려서 구속을 측정했다. 아버지가 말한 "Good things will happen" 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아버지의 강압에 못이겨 어쩔 수 없이 야구를 지속했지만 자신의 재능에 대해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Ankiel은 순식간에 그 지역의 자랑으로 떠올랐다. 에이전트 Scott Boras와 계약한 것도 이맘때였다. 한때 Ankiel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던 코치들은 스위치히터였던 Ankiel이 혹시라도 왼팔에 HBP를 당할까봐 이제부터 우타석에 서지 말라고 했다. 가장 좋아했던 것은 아버지였다. 아들이 던지는 경기마다 그의 아버지는 관중석이 아닌 포수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커브를 던져라" "직구를 던져라" Game-Calling을 했다. 한번은 6회까지 노히트를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Throw him the funk!" 라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Ankiel은 그 말을 듣고 너클볼 (Funk가 Knuckleball 이라고 한다) 을 던졌으나 홈런을 맞았다. 

코치들은 동네 깡패 / 건달 같은 Rick의 아버지가 와서 시끄럽게 구는 것도 모자라 팀 에이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못마땅했으나, 또 한편으로는 Ankiel의 아버지였기에 쉽게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아들 Ankiel은 이런 와중에서도 삼자범퇴로 이닝을 끝낼 때는 혹시라도 칭찬을 들을까 해서 어머니가 앉아있는 관중석보다는 백스톱 뒤의 아버지를 흘깃흘깃 쳐다보며 마운드를 내려왔다.  

1997년, 고등학교 마지막 야구시즌이 끝나고 Rick Ankiel은 USA Today 선정 올 해의 고교 선수 (High School Player of the Year) 로 선정되었다. 그의 마지막 고교 시즌 성적은 11승 1패 평균자책 0.47, 74이닝 162탈삼진이었다. 


배우 Zach Efron을 닮았다는 의견도 있다.

1997년 드래프트에서 Ankiel을 2라운드 20픽, 전체 72번으로 뽑은 Cardinals가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접근해왔다. 2년 전만 해도 Ankiel은 University of Miami 진학이 최종 목표였으나, 패스트볼 구속과 함께 그의 기대치도 높아진 상황이었다. Scott Boras는 Ankiel이 마치 당장이라도 Miami 대학에 진학할 것처럼 Letter of Intent를 작성해 Cardinals의 애를 태웠고, 결국 $2.5M의 계약금을 받으며 계약한다. 프로 데뷔 전에 받는 계약금으로는 당시 역대 5위에 랭크되는 정도의 큰 규모였다. 

Ankiel과 계약이 성사된 후, Cardinals는 아직 고등학생에 불과한 Ankiel을 홈 구장으로 불러 클럽 하우스를 구경시켜주고, 그의 이름이 적힌 유니폼을 선사했다. 그리고 그가 곧 서게 될 Busch Stadium 마운드에 서서 공을 던지게 했다. Tony La Russa, Dave Duncan은 물론 프론트 직원들부터 구장 잔디 관리인들까지 다들 나와서 이 열 여덟살 짜리 투수가 시범 피칭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포수의 미트에 공이 Pop! 하고 꽂히며 모두들 그의 구위에 경악했다. 95마일의 구속도 구속이었지만, 부드러운 투구폼과 플레이트 근처에서의 매서운 무브먼트, 그리고 우타자 바깥쪽 낮게 떨어지는 싱커는 이미 아마추어 수준이 아니었다. 그 날부터 Ankiel은 Cardinals의 금송아지였다.

"They got excited because a lefty like that comes up once in a millenium. He was the real deal, and the world, the entire world, was Rick Ankiel's, blowing away the game with that arm born and bred in the Florida sun, able to do whatever he wanted to do whevnever he wanted to do it and nothing more Wild West in all of sports, a pitcher on a mound simply blessed with it."

 -Excerpt from 3 Nights in August, page 77

Rick Ankiel's Minor League Track Record

YearAgeTmLgLevWLERAGSCGSHOIPHERHRBBSOHBPWPWHIPHR/9BB/9SO/9SO/BB
1998182 Teams2 LgsA+-A1262.632810161.01064785022214110.9690.42.812.44.44
199818PeoriaMIDWA302.0670035.015801241210.7710.03.110.53.42
199818Prince WilliamCARLA+962.792110126.0913983818112101.0240.62.712.94.76
1999192 Teams2 LgsAAA-AA1332.352411137.29836962194961.1620.64.112.73.13
199919ArkansasTLAA600.9181149.125521675200.8310.42.913.74.69
199919MemphisPCLAAA733.16160088.17331746119761.3470.74.712.12.59

Ankiel의 마이너리그 시절은 그다지 언급할 부분이 없다. 너무 짧았고, 너무 일방적이었다. 흔히 말하는 "마이너리그에서 스스로를 다듬는 시간들" "교정" "세련" 이런 단어들은 Ankiel의 사전에 없었다. 그냥 Ankiel은 있는 그대로 압도적이었다. 첫 프로팀이었던 Peoria를 단 7경기만에 졸업. 이후 나머지 시즌은 A+ 레벨에서 126이닝 181탈삼진을 기록한다. 1999시즌은 AA레벨의 Arkansas에서 출발했는데, 8경기 49.1이닝 5실점이었다. AAA로 안보내기도 힘든 성적이다. 넘어져봐야 일어날 줄도 아는데, Ankiel은 차마 넘어질까 하는 우려를 표시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빠르게 달려나가고 있었다. 

보통 프로에 첫 입문해 고달픈 마이너리그 생활을 시작하는 어린 선수들, 특히 대학을 맛보지 않고 프로로 직행한 고졸 선수들은 고향과 가족,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정신적으로 힘들어하게 마련이다. 강압적이었던 아버지와 결코 행복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일까. Ankiel은 집을 떠나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마냥 즐거웠다. 매 경기 사람들은 그의 놀라운 구위에 감탄과 칭찬을 연발했고, 함께 마이너리그에 입문한 1라운더 Adam Kennedy 등 동료 선수들도 그저 Ankiel에게 좋은 말밖에 해주질 않았다. 

Cardinals는 Ankiel의 어마어마한 성장 속도에 불안함을 느꼈고, 이에 경기당 투구수 100개의 제한을 두었다. 마이너리그 투수코치들은 Ankiel에게 팔꿈치에 무리가 가는 슬라이더를 가르쳐주면 안된다는 지령을 받았고, 이런 정도의 관심을 받는 투수를 함부로 조련하려고 하는 코치들은 아무도 없었다. Ankiel이 혹시라도 어이없는 폭투 (마이너리그 성적에서도 유난히 폭투가 많은 것을 보실 수 있다)를 던진 뒤 자문을 구하면, 코치들은 "그냥 하던대로 해라 잘하고 있으니" 라며 넘겼다. Ankiel이 답답해서 재차 물어보면 그들은 "우린 널 건드리면 안돼" ('I'm not allowed to mess with you") 라고 대답했고, Ankiel은 그제서야 자신을 향한 구단의 특별대우의 이면에 그림자가 있음을 알게 되지만, 19살의 Ankiel이 그렇다고 질주를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해 그는 마이너리그 탈삼진 1위 타이틀과 함께 Player of the Year 상을 수상했고, 올스타전에 선발로 등판했다. 1999시즌을 앞두고 Baseball America 는 Ankiel을 전미 유망주 랭킹 2위에 올랐다.

마이너리그에서 어떤 조련도 받지 않은 Ankiel은 키가 조금 더 컸을 뿐이지 사실상 Port St. Lucie 고등학교 시절과 투수로써의 기량이 거의 다를 바가 없는 상태에서 메이저리그 콜업을 받는다.

"If you've got a race car that's leading the Daytona 500, you don't bring it in for a tune-up. All we did was fine-tune a couple of things with his motion, but nothing major. We have a pitch count for all pitchers in the minor leagues."

-Mike Jorgensen, the Cardinals' director of player development (1999)


Pitching Mechanic

유일하게 아버지 Ankiel이 아들 Ankiel에게 전수한 것들 중 좋은 것이 있다면 바로 그의 투구폼인데, 사실 이 부분도 따져보면 악영향이 더 크다. Ankiel이 성공 가도를 달리던 시절에도 그의 제구는 결코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 (2000시즌 BB/9 = 4.63, 1999시즌 BB/9= 4.1), 이는 그의 딜리버리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간지가 나는 딜리버리 치고 문제없는 경우를 거의 못보지 않았는가. Ankiel 역시 마찬가지이다. 위 Ankiel의 투구폼 사진을 참조하시면, Ankiel은 투구시 앞발 (Front-foot, 즉 오른발) 보다 머리가 먼저 타자쪽으로 나가는 (Out), 소위 Out-in-front 증상을 보이고 있으며, 이 증상은 Tim Lincecum에게도 종종 볼 수 있다. 몸은 아직 준비가 안되어 있는데 머리가 먼저 예전 Okajima 마냥 3루 쪽으로 가고 있으니, 당연히 Pitching Arm이 앞으로 차근차근 나오지 못하고 급작스럽게 나오게 되고 릴리즈 포인트가 굉장히 높아진다. 무게 중심의 이동이 부드럽지 못하니 팔꿈치, 어깨에 무리가 가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릴리즈 포인트가 너무 앞에서 형성되거나 높이 형성되면서 포수 머리 위, 혹은 바닥에 패대기 치는 듯한 공이 나올 수밖에 없다. 실제로 마이너리그에서나 빅 리그 데뷔 이후에나 Ankiel은 릴리즈포인트가 흔들릴 경우 포수 머리 위로 던지는 폭투의 비율이 다른 투수들에 비해 월등히 높았는데, (Ankiel 본인도 인정한 부분이다) 이는 부드러운 듯 보이지만 사실은 팔 스윙이 너무 급작스럽게 이뤄지는 그의 투구폼 탓이 컸다. 

설령 포스트시즌에서의 Melt-down이 없었더라도 이런 투구폼으로 그가 롱런을 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으며, 필자도 동의하는 부분이다. 피칭 메카닉에 대한 심도있는 이해가 바탕이 된 코치들이 용기있게 쓴 소리를 해주었다면 Ankiel의 데뷔가 좀 늦어질 지 언정 조금 더 투수로 오래 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Call-Up

"최대한 그에게 압박을 주지 않으며 천천히 콜업할 것" 이라는 한 구단 관계자의 말이 무색하게 Ankiel은 1999년 8월 23일, 만 20세의 나이로 ML 마운드를 밟았고, Adrian Beltre를 제치고 리그 최연소 선수로 등재된다 (2위는 벨트레). 데뷔전 상대는 묘하게 외인구단 느낌을 주던 추억의 팀 Expos 였는데, 선발로 등판한 그는 괴수(V. Guerrero) 에게 솔로홈런을 허용하긴 했으나 5이닝 5피안타 3실점으로 무난히 데뷔전을 마쳤고, 이후 4차례 정도 더 선발 등판을 한 뒤 불펜에서 시즌을 마감했다. 평균자책 3.27에 33이닝 39탈삼진. 약간의 제구불안이 있긴 했지만 선발 로테이션에 들어가기에 충분히 합격점인 투구였다. 

아들 Ankiel이 찬란하게 데뷔하던 이 시기, 아버지 Ankiel은 다시 한 번 체포당했다. Florida에서 멀지 않은 섬나라 Bahamas의 마약 밀매단과 연계되어 있던 Ankiel의 아버지는 마리화나와 코카인을 (미국 시장에 유포할 목적으로) 소지한 혐의로 1999년 시즌 도중에 검찰에 기소되었다. 이 때 최대 80년형의 징역과 $4M의 벌금형을 선고받게 되면서 Ankiel의 어머니는 남편과 이혼하게 된다. 이제 막 피어나려는 20살짜리 어린 투수에게, 그것도 전미 최고의 유망주 투수의 아버지가 State도 아니고 연방 검찰에 구속되었으니 언론이 가만 있지를 많았다. 

슬프게도 Ankiel은 이런 관심들이 익숙했다. 마운드에서 본인이 흔들리지 않으면 이런 일들은 결국 지나갈 것이라는게 Ankiel의 비정상적으로 강인한 정신력이었다. 자라는 내내 "너의 아버지는 뭐하는 분이시니?" "왜 너네 집 앞에는 경찰차가 와있니?" 같은 질문들에 익숙해져있던 Ankiel은 아버지의 옥살이와 부모님의 이혼, 가족의 분열 (형과 누나도 뿔뿔히 흩어졌다) 을 그저 삼켜버렸다. 가슴 복받치는 자신의 풀타임 첫 정규시즌 개막전을 한 달 여 앞둔 2000년 3월, Ankiel은 아버지 Ankiel의 재판을 위해 Florida 연방 법원에 출두해서 그의 아버지가 징역 6년형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한 달 후, 4만여 관중 앞에서 당당히 Cardinals 로테이션의 일원으로 선발 등판을 했다. 아버지와 가족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어린 투수답지 않게, 마운드 위에서 Ankiel은 흔들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재능있는 투수들 특유의 보기좋은 건방진 아우라까지 풍겼다.

씁쓸하게도 "마운드 위에서 감정을 컨트롤하라" 는 그의 아버지가 Ankiel을 코치하면서 가장 강조하던 부분이었다. 


2000년 NL Central 우승을 확정 짓고.

2000시즌

드디어 정식 발매된 Ankiel의 황금팔은 확실히 강력했다. Ankiel은 시즌 첫 선발 등판 Brewers전에서 6이닝 10K 2실점 승리를 따내면서 쾌조의 출발을 했고, Coors Field에서 3피홈런을 맞으며 주춤했으나 이후 Padres전 5이닝 무실점, Brewers 전 7이닝 무실점을 잇따라 승리투수가 되었다. 5월 13일에는 한국 야구팬들에게 잘 알려진 박찬호와의 맞대결을 펼쳤는데, 당시 박찬호가 워낙 잘 던져서 (8이닝 1실점 12K) 묻히긴 했지만 7이닝동안 무려 118구를 던지면서 4피안타 9K 무실점을 기록한 Ankiel 역시 칭찬받을만 했다. (언론은 앞날이 창창한 두 젊은 투수들의 Pitcher's Duel로 관심을 모았으나, 사실 정말 관심가는 부분은 나란히 고질적 제구 불안병을 앓고 있는 두 투수가 도대체 몇 구나 던질 것인지였다.)

Ankiel의 구위는 베테랑 포수 Mike Matheny와의 호흡이 부드러워지면서 더더욱 강화되었다. 어린 투수들의 응석을 받아주지 않던 Matheny는 구위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부족했던 Ankiel에게 딱 맞는 포수였다. 그는 리그 내에서 가장 뛰어난 블로킹 능력을 지녔기에 Ankiel의 제구 불안 데미지를 최소화 할 수 있었고, Ankiel의 구위와 구질에 대해서 투수 본인보다 훨씬 뛰어난 이해도를 지니고 있었다. 5월 7일 Reds전에서 Ankiel이 5이닝만에 볼넷 4개 폭투 4개를 기록하며 유난히 "Wild' 했던 날, Matheny는 플레이프 앞에서 흙을 튀기는Ankiel의 원바운드 공들을 전부 막아내고 마운드에 올라가 "내가 다 막을 테니 넌 똑바로 던지기만 해라" 라고 말했다. 다음 경기에서 Ankiel은 Matheny의 리드를 그대로 따르며 7이닝 무실점을 기록한다 (박찬호 경기.) 이어서 6월 20일, Ankiel은 당시 Jeff Kent와 Barry Bonds를 위시한 Giants 강타선을 상대로 6이닝 8K 2실점의 압도적인 피칭을 하고 승리투수가 된다. 당시 Giants 감독이었던 Dusty Baker는 "저런 20살 짜리는 흔하지 않다. 20살에 저 정도라면 앞으론 대체 뭘 이루려고 하는가" 며 상대팀 신인을 칭찬했다.

Ankiel의 피칭 레퍼토리는 93-95마일의 패스트볼, 그리고 88~90마일에서 형성되었던 싱커, 그리고 마이너리그에서 수많은 탈삼진을 솎아내게 해준 그의 플러스 커브였다. 특히 우타자들은 5마일의 구속 차이와 함께 탁월한 무브먼트를 동반한 그의 싱커에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으며, 어느 카운트에서나 낙차 큰 커브가 아웃피치로 들어올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Ankiel 공략을 굉장히 힘겨워했다. (2000시즌 우타자 상대 피안타율 .213) TLR은 Ankiel이 장기적으로 체인지업만 장착한다면 리그를 오랜 기간 지배할 선수라고 표현했고, 이는 결코 과찬이 아니었다.

정규시즌 후반기, Ankiel을 제외하면 대부분 노땅들로 채워진 Cardinals 로테이션은 슬슬 힘에 부쳐하기 시작했다. 팀내 최고령 투수이자 6'6피트의 장신이었던 Andy Benes는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후반기 컨디션이 이미 정상이 아니었고, 노장 Pat Hentgen는 8월이 되자 체력적인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Garret Stephenson 는 8월달에 혼자 4승 평균자책 2.63을 기록했으나 9월달이 되자 피로 누적으로 차차 구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정규시즌 마지막 한 달간, 사실상 Cardinals 로테이션은 Darryl Kile-Rick Ankiel 두 투수가 이끌기 시작했다.  그리고 Ankiel 은 신인답지 않게 시즌이 진행될수록 더 구위와 제구가 나아지며 구단의 기대에 부응했다. 그는 최종 7경기에서 4승 무패 평균자책 1.97. 45.2이닝 54탈삼진을 기록했고 이 기간동안 팀은 6경기를 이겼다. (평균 103구, 경기당 6.2이닝). 

정규시즌 종료 후 Ankiel의 성적은 11승 7패 평균자책 3.50, 175이닝 194K. 신인왕 투표에서 그는 Braves의 Rafael Furcal에 이어서 2위에 올랐다. 만 20세 시즌에 규정이닝을 소화하면서 K/9이 9.0을 넘었던 투수는 (그 때까지) 역사상 단 2명에 불과했다. (1984년 Dwight Gooden, 2000년 Rick Ankiel)

Ankiel's Last 5 Games (2000)

DateOppIPHRERBBSOERAPitStrStLStSGBFB
SeptemberOppIPHRERBBSOERAPitStrStLStSGBFB
Sep 3NYM7.0211583.8011166221249
Sep 8@MIL6.0411253.7110664171179
Sep 13@PIT6.27420113.6710671161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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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 27@SDP6.0500283.5096601715410
175.01378068901943.50


순식간에 조롱거리로 전락하기에 그의 재능은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그 날 (2000년 10월 3일) - NLDS Game 1

Atlanta Braves와의 NLDS를 앞둔 상황, TLR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5인 로테이션에서 건강한 투수는 20승을 올린 에이스 Kile와 약관의 신인 Ankiel 달랑 2명 뿐이었고, 이들에게 많은 경기를 맡기고 싶어하는 것은 5전3승제 단기전을 앞두고 감독으로써 당연한 어프로치였다. 게다가 Ankiel은 4일 휴식을 줘야했지만 Darryl Kile은 3일 휴식으로 등판할 수 있었다. 즉 (정상적인 로테이션 순서대로) Kile이 1차전, Ankiel이 2차전을 던질 경우 Ankiel은 시리즈에 한 번 밖에 나올 수 없지만, Kile이 2차전을 던지고 Ankiel이 1차전을 던지게 된다면 이 시리즈에서 두 투수를 2번 쓸 수 있다는 소리였다. 정규시즌 마지막 한 달간 Ankiel 이 보여준 모습까지 감안했을 때, TLR의 결정은 "도박" 이라고 불리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TLR은 전국에 중계되는 첫 포스트시즌 선발이 이 젊은 투수에게 어떤 중압감으로 다가올 지에 대해 충분히 경계하고 있었다. 게다가 상대 투수는 지난 10년간 리그를 지배했던 베테랑 Greg Maddux. 호들갑을 떨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시리즈가 시작하기 전날, TLR은 불펜 피칭을 하고 나오는 Ankiel을 재빨리 언론 접촉없이 클럽하우스에서 내보냈다.  그리고 베테랑 투수 Kile에게 인터뷰실로 들어가서 마치 그가 당연히 1차전을 던지는 양 언론을 상대하도록 했다. Kile은 당시 기자들의 질문에 충실히 대답하면서도 단 한 차례도 자신이 1차전에 던질 것이라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언론에서도 이미 Kile이 1차전을 던질 것이라는 게 너무 당연했기에 물어보지 않은 것이다. 인터뷰가 다 끝나고 미디어팀이 철수하자 그제서야 TLR은 1차전 선발이 Ankiel임을 발표했다. 수많은 리포터들이 그 날 TLR에게 얼마나 욕을 퍼부었을지 자명하다.

TLR의 머릿속이 복잡한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NLDS가 열리기 며칠 전인 9월 28일, Darryl Kile의 정규시즌 20승 경기가 있었던 바로 그 날, 주전 포수 Mike Matheny가 생일 선물로 받은 사냥용 칼 (Hunting Knife) 을 잘못 놀려 자기 손을 크게 베어버리고 만 것이다. (MM의 생일은 9월 22일이다.) 이 부상으로 인해 정규시즌 잔여 경기는 물론 Matheny의 플레이오프 출장 기회도 날아가버렸다. 투수 리드와 호흡에 있어서 Ankiel에게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짝꿍이던 Matheny가 결장한 것도 문제였지만, 제구가 불안한 Ankiel과 등 부상으로 인해 활동폭이 좁던 포수 Carlos Hernandez의 조합은 결코 이상적이지 않았다. 


Hernandez가 아닌 Matheny였다면, 뭔가 달랐을까?


Braves와의 1차전이 시작했고, 마운드에 Ankiel이 올랐다. 1회 2사 후 Chipper Jones와 Andres Galarraga에게 연속 볼넷을 허용했지만 Brian Jordan을 파울 플라이로 잡아내면서 무실점. 주자를 3명이나 허용하긴 했으나 뭐 경기 초반 Ankiel의 제구 난조가 그다지 특별할 일은 없었다. 오히려 1회말 Cards 타선이 Maddux를 상대로 타자일순하며 6득점한게 더 신기할 일이었다. TLR은 훗날 이 날 Maddux를 상대로 뽑아낸 6득점은 "말도 안되는 숫자 ("Crooked Number") 라고 회상했다.

2회에도 Reggie Sanders를 삼진으로 잡으면서 시작한 Ankiel은 무실점으로 무사히 이닝을 마쳤다. 그리고 마의 3회... 

Score Out RoB Pit(cnt) R/O @Bat Batter Pitcher wWPA wWE Play Description
0-6 0 --- 4,(3-0)  ATL G. Maddux R. Ankiel -2% 91% Walk
0-6 0 1-- 4,(1-2)  O ATL R. Furcal R. Ankiel 2% 93% Foul Flyball: 1B
0-6 1 1-- 2,(0-1)  ATL A. Jones R. Ankiel -0% 92% Wild Pitch; Maddux to 2B
0-6 1 -2- 4,(2-1)  ATL A. Jones R. Ankiel -1% 92% Wild Pitch; Maddux to 3B
0-6 1 --3 5,(3-1)  ATL A. Jones R. Ankiel -2% 90% Walk
0-6 1 1-3 5,(2-2)  ATL C. Jones R. Ankiel -1% 89% Wild Pitch; Jones to 2B
0-6 1 -23 7,(3-2)  O ATL C. Jones R. Ankiel 3% 93% Strikeout Looking
0-6 2 -23 7,(3-2)  R ATL A. Galarraga R. Ankiel -3% 90% Walk; Maddux Scores/Wild Pitch; Jones to 3B
1-6 2 1-3 1,(0-0)  R ATL B. Jordan R. Ankiel -4% 85% Single to LF; Jones Scores; Galarraga to 2B
2-6 2 12- 3,(1-1)  ATL R. Sanders R. Ankiel -1% 84% Wild Pitch; Galarraga to 3B; Jordan to 2B
2-6 2 -23 5,(3-1)  ATL R. Sanders R. Ankiel -1% 82% Walk
2-6 2 123 2,(0-1)  RR ATL W. Weiss R. Ankiel -12% 71% Single to LF; Galarraga Scores; Jordan Scores; Sanders to 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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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ted 2/6/2014.

강판된 후 덕아웃으로 돌아온 Ankiel에게 아무도 위로의 말을 쉽게 건내지 못했다. Ankiel은 Andy Benes에게 다가가 "A joke. You've got to laugh." 라며 자신이 저질러놓고도 도대체 믿을 수가 없는 이 상황에 허탈해했다. 이 때만해도 Ankiel의 투수로써의 커리어가 이 경기를 기점으로 사실상 재생 불가능 상황이 될 것이라고 상상한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Mets와의 NLCS를 앞두고 Ankiel은 자신의 문제가 투구폼 관련된 Mechanical한 문제라며 이제 해결책을 찾았다고 이야기했다. NLCS 2차전에 Ankiel이 등판했고, 초구 91마일 패스트볼이 상대 타자 Timo Perez의 머리를 향했다 (Perez는 가까스로 피했다). 삼진-볼넷-폭투-볼넷-희생플라이-볼넷-2루타. 20구 중 5개가 포수 뒤로 날아갔다. Duncan 은 볼만큼 봤다고 생각했는지 Ankiel을 내렸는데, 질책성이라기보다는 보호 차원의 강판이었다. Duncan은 경기 후 지금 Ankiel에게 필요한 것은 쉽게 한 이닝을 던지고 감을 회복하는 것 ( "have a nice easy inning and probably get back on track") 이라고 얘기했고, Low-leverage 상황에서 Ankiel을 등판시켜 감각을 회복하도록 도와주기로 한다. 시리즈 최종전인 NLCS 5차전 7회, 0:6으로 크게 뒤져 있던 상황에서 Ankiel이 올라왔다. 볼넷-번트-삼진-폭투-폭투-볼넷. 

시리즈가 끝난 후 Rick Ankiel은 감옥에 있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경기를 본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쳤냐고 물어봤고, 아들은 괜찮다고 대답하자 이에 "아니 그럼 대체 뭐하는 짓이야!" 라고 말했다. 이 경기를 TV로 지겨보던 Ankiel의 고등학교 팀 투수코치 Charlie Frazier는 "Ankiel에게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Mechanical한 문제들이 많았으며, 딜리버리 막판의 Follow-Through 단계에서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며 어이없어했다. 동영상을 보시면 릴리즈 포인트에 신경을 쓰고 있던 Ankiel 의 상체가 부자연스럽게 거의 직선으로 서있는 모습을 보실 수 있다. 동영상 링크 


그 날이 있던 후 Ankiel이 웃고 있는 사진을 찾는 것은 굉장히 힘들어졌다.


"I never saw him lose his motion like that before. I saw mechanical flaws. He was throwing across his body; he was standing up in his follow-through. I asked him what his pitching coaches told him. He said, "They don't tell me anything!"

-Charlie Frazier, Ankiel's high-school pitching coach

NLCS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Ankiel에게 Boras가 연락이 왔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Florida를 떠난 적이 없는 Ankiel에게 그는 "지금 당장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캘리포니아로 떠나라"고 설득했다. 다른 곳에 가서 머리를 식히라는 것 빼고는 딱히 어떤 이유가 있지는 않았다. Boras는 Ankiel에게 "모든 것을 그대로 놔두고 그냥 떠나라. 내가 도와주겠다" 고 했다. Ankiel은 잠시 Florida 집에 들려 짐을 싼 뒤 그 길로 Boras의 사무실이 있던 캘리포니아 Newport Beach로 떠났다. 마이너리그 때부터 같이 올라온 드래프트 동기 Adam Kennedy (당시 Angels로 이미 옮겨가있던) 가 기꺼이 숙소를 제공했다. 둘은 야구 관련된 일은 일체 하지 않았으며, 바닷가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했다. Ankiel은 이 기간 동안 자신의 멘토이기도 했던 Darryl Kile과만 꾸준히 연락했을 뿐 은둔한 상태로 5주를 보냈다. 

5주간의 휴식이 지나고 12월 중순 Ankiel이 Florida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의 연락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스포츠 심리학계의 거장인 Harvey Dorfman 박사였다. Dorfman은 3일간 심도있게 Ankiel의 어린 시절과 그를 둘러싼 공포들, 무의식을 분석하기 위해 상담했다. Dorfman 박사와 Ankiel의 두터운 관계는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there's a lot of things in his life that could have triggered what happened in the playoffs. You're raised in that kind of environment, anything can happen. He's a very sensitive guy, and he had to be mature awfully quick. These things can have a very calamitous potential . I've seen it happen to other players where it became career threatening. So the best thing we can do is listen, understand and cover all of the possibilities."        

-Scott Boras, on Rick Ankiel's recovery (2001)

2001년 4월 8일, Ankiel은 Chase Field 원정에서 Randy Johnson과 D-Backs 라인업을 상대로 시즌 첫 등판을 치루었다. 1회 Matt Williams에게 투런 홈런을 맞았으며, 제구불안 문제도 여전했다. 그러나 전반적인 구위에 있어서 만큼은 Ankiel은 예전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5회에는 세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기세등등했고, 6회에 투구수 100개를 채우고 강판되었다. 5이닝 3피안타 3볼넷 2실점 8탈삼진. Cardinals는 Big Unit을 상대로 홈런 3개 포함 11안타를 쳤다. 9:4 승리. Ankiel의 커리어 마지막 선발승이었다. 

그러나 이 경기 이후 Ankiel 이 보여준 모습은 2000년 플레이오프와 비슷했다. 도저히 봐주기가 힘들 정도로 아무데로나 가는 공들. 잦은 폭투. 24이닝에서 볼넷 25개, 폭투 5개, 사사구 3개. 2001년 5월 홈에서 Pirates 상대로 등판한 Ankiel은 Pat Meares를 상대로 다시 포수 뒤 스크린에다가 공을 던졌다. Duncan이 올라오자 Ankiel은 고개를 떨구었다.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Cardinals 구단 측에서는 Ankiel의 커리어를 "리셋" 하겠다는 의도로 그를 루키리그로 보냈고, 세간의 관심이 없는 이 곳에서 Ankiel은 신기할만큼 빠르게 영점을 잡았다. 그리고 제구가 되는 이상 ML에서 이닝당 한 개 이상의 삼진을 잡아내던 Ankiel의 구위는 루키리그 타자들이 건드릴만한 것이 아니었다. 14경기에서 87.2이닝동안 탈삼진 158개 (K/9 = 16.2) 평균자책 1.33. 이 정도면 괜찮다 싶어서 Memphis로 승격시키자 다시 병이 도졌다. 4.1이닝동안 3피안타, 17볼넷, 10실점, 폭투 12개. 공이 미친듯이 백스톱 뒤로 날아가자 상대적으로 작은 마이너리그 구장에서 관중들의 웃음소리가 Ankiel의 귀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2004년, TJS를 받고 돌아온 Ankiel에게 아직도 Cardinals는 희망을 놓지 않고 않았다. A+ 볼에서 시즌을 시작한 Ankiel은 3차례의 선발 등판에서 8.2이닝 0볼넷 11탈삼진을 기록했고, AA볼로 승격된 이후에는 2경기에 걸쳐 9이닝 3피안타 1실점 2볼넷을 기록했다. 이어서 Memphis로 올라와서 선발 등판한 경기에서는 6이닝 1피안타 1실점. 역시 볼넷은 없었다. "그 날" 이 있기 전에도 Ankiel이 마이너리그에서 이렇게까지 좋은 제구력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드라마틱한 부활이 가시권에 있었다.

2004년 9월 7일, Ankiel이 무려 3년 6개월만에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섰다. 1이닝 무실점. 15구 중 12구가 스트라이크였다. 4일 후 Dodgers 전에 다시 구원등판한 그는 19구 중 14구를 스트라이크 존에 꽂았다. 9월 19일에는 재앙이 시작되었던 Busch Stadium 마운드에 참으로 오랜만에 섰고, 관중들은 돌아온 Ankiel을 기립박수로 환영했다. 2이닝 4K 무실점. 5차례의 등판에서 10이닝을 던지는동안 Ankiel은 삼진 9개를 잡고 볼넷은 Chad Tracy에게 내준 한 개가 유일했다. 구속은 3년 전 그의 모습에 비해 확실히 떨어진 90마일 선에 그쳤으나, 커브는 여전히 리그 정상급 낙차를 보였고, 싱커도 여전했다. 

2000시즌 이후 제대로 된 정규시즌을 치루어 본 적이 없는 이 투수는 수년 간의 방황에도 불구하고 아직 24세였다. 오프시즌에 그는 Puerto Rico 에서 열린 윈터리그에서 한층 발전된 모습을 보였고, 구단 수뇌부에서는 Matt Morris 의 자리를 Ankiel이 대신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까지 품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간신히 ML에서 통할 수 있는 수준의 상태로 기어올라온 Ankiel은 시뮬레이션 피칭에서 Edmonds, Rolen 등 Cardinals 중심타자들을 배팅 케이지에 세워놓고 다시 한 번 "나는 누구고 여긴 또 어딘가" 식의 붕괴를 겪는다. 23구를 던졌으나 스트라이크는 3개. 원바운드성 폭투는 물론이고 배팅 케이지 밖으로 아예 나가는 공도 여러개였다. 2005년 3월, Ankiel은 "더 이상 던지지 않겠다"며 투수 포기를 선언한다. 

Sandy Koufax의 재림은 신기루였다.

"I just lost it right there on the mound. I don't know what I was thinking. I'd go blank before I'd throw the ball, and then after I'd say to myself, 'How the hell did that happen?' It was definitely weird. I mean, I'd been doing it so many times in my life, and suddenly I can't throw a ball?"

-Rick Ankiel, on his melt-down (2001)


2003년 스프링캠프를 앞두고 Walt Jocketty는 Ankiel의 진로를 결정할 순간을 맞이한다.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에 참여시킨 뒤 이후 마이너리그로 보내서 다시 재활하게 하는 것이 잠재적 방안이었는데, 과연 어느 레벨의 마이너리그로 그를 보내느냐는 정해지지 않았다. TLR의 사무실에 Duncan이 찾아와 Jocketty의 결정을 알리자 TLR이 물었다. "무슨 레벨로 가는지에 대해 우리가 어느 정도의 영향력이 있지?" Duncan 이 대답했다. "뭐 어느 정도 input은 있겠지." TLR은 버스 이동거리가 많은 AA 레벨보다 조금 더 이동이 수월한 Memphis로 Ankiel을 보내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자 Duncan은 Ankiel을 Double-A 레벨의 Tennessee로 보내는 게 좋겠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덧붙였다. 

"He's 23-years old. He should be in Double-A."

(Excerpt from 3 Nights in August, page 82)


(Part II에서 계속)

자료 출처: Hardball Times, New York Times Magazine, USA Today, Palm Beach Post, STL Post-Dispatch, 3 Nights in August, Baseball-Reference, ESPN, Fangrap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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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ovy

Revisiting TLR ERA [1] Ray Lankford

Revisiting TLR ERA [2] Edgar Renteria

Revisiting TLR ERA [3] Matt Morris

Revisiting TLR ERA [4] Steve Kline


TLR ERA 시리즈의 5번째 주인공은 꽤 오랫동안 카디널스 팬들에게 있어서 '게으른 천재'의 아이콘이었던 (이후 이 자리는 토론토로 간 C모 중견수가 대체한다) J.D. Drew이다. 예쁘고 가지런한 스윙에 뛰어난 외야수비와 주루까지 모든 툴을 갖고 있던 그는 매 시즌을 앞두고 큰 기대를 하게 했으며, 야구에 대해 심도있게 알지 못하던 시절, 시각적인 기쁨을 가장 많이 제공하던, 매력적인 선수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드래프트 당시의 잡음과 "열정 및 의지 부족"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곱지않은 시선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며, ML 입성 전부터 "화이트 그리피"라는 부담스러운 별명을 달고 지나치게 많은 기대를 불러일으킨 탓에 그의 커리어가 필요 이상으로 초라해게 묘사된 부분이 있다. 

이 포스팅은 희대의 재능 J.D. Drew의 아쉬움 많고 탈도 많았던 Cardinals 시절과 1997년 J.D. Drew Draft Fiasco 에 관해서, 그리고 J.D Drew라는 선수의 커리어 전반에 대해서 조금 더 균형있는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의도로 작성되었으며, 2회에 걸쳐 올리도록 한다.


The Natural


J.D. Drew (David Jonathan Drew)

Outfielder

DOB: 1975년 11월 20일 

Birth: Hahira, Georgia

Time with Cardinals: 1997-2003


Rockin' NCAA

고등학교 시절의 Drew의 유망주로써의 Reputation은 Regional한 수준이었다. 물론 시니어 때 Georgia All-Star에 뽑히기는 했으나, 시골 학교 출신 고졸 선수가 State-all-star 에 뽑히는 수준으로 드래프트에서 높은 지명을 받을 수는 없었다. 총 인구 1300명밖에 안되는 Georgia의 농촌에서 형제들과 야구를 하며 자란 Drew는, 1995년 Giants의 20라운드 지명을 뿌리치고 야구로는 전국구인 학교이자 집에서 멀지 않은 Florida State University (Tallahassee, Florida) 으로 진학했는데, 여기서 대학 야구계의 Coach K로 봐도 무방한 Mike Martin  감독을 만나면서 완전히 인생이 바뀐다. Mike Martin은 Drew의 재능을 알아보고 1학년 때부터 많은 출장기회를 주며 그의 성장을 촉진했으며, Drew는 이에 보답하듯 FSU 학교 기록과 ACC 기록까지 총 17개의 기록을 다시 쓴다 (단일 시즌 최고 타율, 커리어 최다 홈런, 컨퍼런스 역사상 최고 장타율 등)

※Coach K는 NCAA Duke의 전설 Coach Krzyzewski의 별칭. 여기서 잠깐 Drew의 은사 Mike Martin을 소개하자면, 1980년 Florida State을 맡은 이후 33년간 College World Series에 팀은 15차례 올려놓았고 ACC (Atlantic Coast Conference) 타이틀을 5차례 따냈으며, Coach of the Year를 7차례 수상한, NCAA College Baseball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감독 중 하나이다. Martin과 FSU가 배출한 Golden Spike Award 수상자만 4명이고, 가장 최근에는 Buster Posey를 배출해냈다.

Cardinals 관련 FSU Seminoles 출신들

40인 로스터: Shane Robinson, Randy Choate, Barrett Browning

팜 시스템: John Gast, James Ramsey

과거: J.D. Drew, Eduardo Perez, Luis Alicea


Drew가 3학년이었던 1997년 시즌은 가히 기록적이었는데, 이 시즌 Drew가 이뤄낸 것들은 다음과 같다.

  • NCAA Division I 사상 최초로 30홈런-30도루 가입 (하이라이트: 단 67경기만에 세운 기록)

  • NCAA 역사상 3번째로 100타점-100도루-100득점 기록 (이것 역시 67경기 만에)

  • Dick Howser Trophy와 Golden Spike Award 동시 수상 (Mike Martin의 감독 커리어에서 유일)

  • BA 선정 Player of the Year, Collegiate Baseball 선정 Player of the Year

  • The Sporting News 선정 Player of the Year, ACC Player of the Year

  • College World Series All-Decade Team

  • BA 선정 Collegiate Player of the Century 투표 8위



FSU 시절의 J.D. Drew


Drew가 대학 시절 보여준 성적의 임팩트는 그를 "Player of the Century" 투표에 랭크를 시킬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4대 스포츠를 통틀어 이 정도의 수식어를 받으면서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한 선수는 쉽게 나오지 않는다. 굳이 비교 대상을 떠올려보자면--최근의 Bryce Harper나 NFL의 Darren McFadden, 혹은 NBA의 Carmelo Anthony (Syracuse) 나 Chris Webber (Michigan) 정도가 생각나는데, 지나친 비교라고 생각하신다면 아래의 Drew의 대학야구 씹어먹기를 참조하시길. (물론 NHL을 열심히 보지 않는 관계로 4대 스포츠라고 말하는 것에는 어폐가 좀 있다ㅎㅎ). 

이 정도 성적을 내고 프로로 진입하던 무렵, 언론에서는 아직 지명도 당하지 않은 Drew를 띄우기에 바빴다. 그리고 Drew의 재능은 그 정도로 띄울만했다.  (Drew는 2003년 FSU Hall of Fame에 들어갔다)

J.D. Drew's College Numbers

YEAR   AVG  GP  GS   AB  R   H   2B  3B  HR RBI  TB   SLG%  BB HBP  SO GDP   OB% SF SH  SB ATT
----------------------------------------------------------------------------------------------
1995  .325  64  56  209  54  68   7   3  17  63  132  .632  36   3  54   2  .430  1  1  11  12
1996  .386  69  69  241  90  93  17   5  21  94  183  .759  55  12  53   4  .508  7  2  10  14
1997  .455  67  67  233 110 106  15   5  31 100  224  .961  84   8  37   3  .604  3  1  32  42
----------------------------------------------------------------------------------------------
Tot   .391 200 192  683 254 267  39  13  69 257  539  .789 175  23 144   9  .521 11  4  53  68


1996: 제 1차 Draft Fiasco

Boras의 악명이 본격적으로 뻗쳐나가게 된 계기는 1996년 Draft였는데, J.D. Drew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1996년 Draft를 간략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일단 아래에 있는 1996년 1라운더 명단부터 보시면...

Year RdPck Tm Pos WAR
1996 1 Pirates Kris Benson (minors) RHP 11.5
1996 2 Twins Travis Lee (minors) 1B 5.3
1996 3 Cardinals Braden Looper (minors) RHP 7.3
1996 4 Blue Jays Billy Koch (minors) RHP 4.9
1996 5 Expos John Patterson (minors) RHP 4.5
1996 6 Tigers Seth Greisinger (minors) RHP -0.3
1996 7 Giants Matt White (minors) RHP
1996 8 Brewers Chad Green (minors) OF
1996 9 Marlins Mark Kotsay (minors) OF 20.6
1996 10 Athletics Eric Chavez (minors) 3B 34.0
1996 11 Phillies Adam Eaton (minors) RHP 3.8
1996 12 White Sox Bobby Seay (minors) LHP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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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ted 1/28/2013.

굵게 표시된 4명은 모두 Boras의 고객들이었고, 이들 중 아무도 15일 내로 지명구단으로부터 계약을 오퍼를 받은 선수는 없었다. Boras는 두꺼운 CBA (Collective Bargain Agreement) 규정집 어딘가에 처박혀있던 조항들 중 "지명권을 가진 팀은 15일 내로 그 지명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이 지명권을 잃는다"는 점을 이용해 드래프트 2주 후 이들을 모조리 FA 신청했고, 어이없게도 Twins, Giants, White Sox, Expos는 모두 소위 "새"가 되어버렸다. White Sox 측에서 유일하게 Boras의 FA 신청 무효 소송을 걸었으나, 당연히 기각되었다 (Rules are rules.)

그 결과는 아시다시피 난장판이었다. 이 신인들은 지명구단과는 상관없이 그냥 가장 좋은 계약조건을 제시한 팀과 사인을 했다. Travis Lee는 신생팀 D-Backs와 4년 11M짜리 계약을 맺었고, Matt White은 역시 신생팀이었던 Devil Rays와 10.2M짜리 계약을 맺는다.  Boras는 갓 드래프트에 들어온 새내기 4명을 통해 거의 30M에 가까운 규모의 계약을 이끌어냈는데, 이는 Boras 커리어 초창기 최고의 무브로 남아있다.


1997년: The J.D. Drew Draft Fiasco

"화이트 그리피" "제2의 켄 그리피 주니어" "대학 야구 사상 가장 완벽한 선수" 등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FSU 3년간 그는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을만큼 올라갔고, 이 선수가 필드에서 할 수 없는 일은 없어보였다. 마이너리그는 형식적으로만 거칠 것이라는, 혹은 ML 직행을 할 지도 모른다는 루머가 다분했다. 1996년 드래프트에서 Travis Lee 정도가 11M짜리 계약을 성사시키는 걸 보고, Drew는 "11M 이하로는 사인하지 않겠다" 고 공공연히 말했다. 이에 쫄은 Tigers는 전체 1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Rice의 클로저였던 파이어볼러 Matt Anderson (제구안되는 103마일을 던졌던 그 분)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2.5M에 계약) Matt Anderson이 워낙 폭망해서 그렇지, Signability에 기안한 이런 무브는 사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물론 Matt Anderson에게는 다른 종류의 Red Flag가 많았지만...)

 리그 최하위권이었던 Philadelphia Phillies의 GM Ed Wade는 "초대어 대졸 야수" J.D. Drew를 전체 2순위로 뽑았다. Drew의 "11M 이상 요구"는 소위 "뻥카" 일것으로 보고 그냥 냅다 지른 것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Drew가 요구하는 액수는 지나칠만큼 현실과 괴리감이 있던 액수였고, 전년도 드래프트 전체 1번이었던 Kris Benson (기억하시는가 이 이름!) 이나 이 해 전체 1번 Matt Anderson이 2.5M에 사인했던 것을 생각하면 Drew의 11M 드립과 Phillies 사이의 입장차는 엄청난 것이었다. 처음부터 Drew는 최소 10M 이상의 액수--("나보다 못했던 Travis Lee가 11M을 받았으니 나도 11M은 받아야지" 식 마인드에 기안한)--를 실제로 바라고 있었고, Phillies는 2.05M 이라는 굉장히 정석적인 "90년대 후반 1라운더들에게 주던 돈"으로 맞받아쳤다. 

I was made aware of my market value before the draft, and it was something I was very upfront and honest about. There are no hard feelings against the Phillies, but I felt very adamant.

-J.D. Drew on his contract and the draft fiasco (Sports Illustrated, December 1998)



Boras는 이렇게 된 이상 지명권을 가진 Phillies와 협상을 할 이유가 없었고, 그랬기에 Drew가 최대한 빨리 FA 자격을 얻는 방향으로 일을 추진했다. 먼저 그는 Drew가 드래프트에 참가하면서 적어낸 집 주소가 Drew의 고향 주소 (Georgia), 즉 일종의 '본적'과도 같은 주소였던 점에 착안, Phillies 측에서 선수 주소를 잘못 써서 보냈으므로 이 Contract offer는 Invalid 하다고 소원서를 제출했다 (실제로 Drew는 당시 Florida 주소를 가지고 있었다...당연하다 -_- 드래프트 당시 Drew는 3학년을 막 마친 상태였다). Drew의 드래프트 Eligibility Card 에 적힌 주소대로 계약서를 보낸 Phillies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노릇이었다. 

Phillies는 재빨리 Drew가 실제로 살고 있는 Florida 주소를 찾아서 Contract Offer를 다시 한 번 보냈으나, 이번에는 등기 우편물을 받은 사람이 물건을 수령했다고 서명하기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이 사람은 FSU의 Assistant Coach였다고 한다. Boras가 우편물 수령 거부를 하라고 시킨 것이 뻔하지만 "서명 거부"는 범법 행위가 아니었기에 다시 한번 Phillies의 Contract Offer는 실패한다. 15일 기한이 거의 다 지나갔을 즈음 Boras는 7M으로 하향조정하며 마지막 "양보 아닌 양보" 를 해보았으나 Phillies의 최종 오퍼액은 3.1M에서 멈췄고(사이닝 2.6M), 결국 계약은 성사되지 않았다. 


중재소 측에서는 "Phillies 측에서는 써있는 주소대로 계약을 제시했을 뿐, 그 주소가 잘못된 것은 Drew의 탓이다" 며 Boras의 소원서를 기각하지만, 이미 Boras는 이렇게 시간을 벌어놓고 Northern Independent League의 St. Paul Saints와 계약을 맺어버린 후였다. 그리고 Boras는 "이미 독립리그 프로팀과 계약을 했으니 J.D. Drew는 더 이상 Amateur 선수에 속하지 않으며, 내년 드래프트가 시작되기 7일 전부터 FA 자격을 얻는다" 고 주장했다. ("Amateur Player"의 법적 정의를 이용한 Boras의 작전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는데, 이미 1994년 Jason Varitek이 한 차례 이를 통해 이득을 본 적이 있었다.) 

MLB 사무국은 이에 맞대응해 조항을 개정해 "독립리그에서 뛰는 선수도 MLB 신인 드래프트 규정에 따른다"고 분명히 명시했고, Drew도 이를 따르기를 요청했다. FA 자격 취득을 노리고 갖은 꼼수를 다 부렸던 Boras 입장에서는 게거품을 물 상황이었고, 여기서 "법률 조항 개정" 건을 가지고 MLB 사무국과 드래프트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버리면 이는 고객 J.D. Drew에게 지나친 악영향이 갈 상황이었다 (게다가 여태까지의 판례로 봐서 Drew가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해보였다). 

여기서 MLBPA (Player's Association), 즉 선수협이 Drew의 편을 들고 나섰다. Drew라는 출중한 선수의 커리어를 보호하는 것보다는 지난 Arbitration을 통해서 세워진 원칙 (Principle)을 보호하고 선수에게 불리한 판례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선수협은 이미 수년간의 투쟁끝에 "MLB는 선수들의 동의없이 드래프트 규칙을 바꿀 수 없다" 는 원칙을 확보해 놓은 상태였으며, 이 원칙을 일관성있게 적용하는 것이 필요했다. 소송이 길어질 경우 Drew는 오리알 신세로 계속 독립 리그에서 뛰어야할 상태였기에, Independent Arbitrator (독립 중재자)를 통해서 1998년 드래프트 전에 Drew 사태가 마감될 수 있도록 일을 추진했다.

1998년 5월 19일, Independent Arbitration의 Ruling은 선수협의 손을 들어주면서 다음과 같은 조건을 달았다. 1) Drew는 선수협 회원이 아니기에 이번 중재의 결과가 적용되지 않는다 (즉 FA로 풀어줄 수는 없다) 2) Drew의 상태가 애매하니 Executive Council에게 최종 결정을 회부한다. Executive Council에서는 Drew가 1998년 드래프트에 다시 나오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이 우여곡절을 거쳐 J.D. Drew는 Cardinals와 3M의 Signing Bonus를 포함해 총액 3년간 7M의 계약 (인센티브 포함해서 총액 8.5M)을 맺는다. 참고로 Cardinals의 97년도 드래프트 1라운더는 전체 20번 Adam Kennedy였다. (1996년도 정규시즌 성적이 좋았던 Cardinals로써는 절대 Drew를 뽑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절묘하게도 Drew가 참가한 1998 드래프트에서는 전년도 73승의 삽질에 힘입어 당당히 5픽을 받았는데, 이 당시 전체 1픽을 갖고 있던 Phillies는 Drew 대신 Pat Burrell을 데려갔다)

When we saw they were going to be selected ahead of us, we decided to go with J.D. Drew. We just felt that he is one of the best players in the draft. He has the ability to play in the big leagues soon. We decided we'd draft him and do the very best to sign him. The ceiling is high on this guy, and sometimes you have to take some risks to succeed.


-Walt Jocketty, on drafting J.D. Drew (Tuscaloosa News, June 2, 1998)


J.D. Drew, (예상대로) 마이너리그를 씹어먹다

Year Age Tm Lg Lev Aff G PA AB R H 2B 3B HR RBI SB CS BB SO BA OBP SLG OPS TB
1997 21 St. Paul NORL Ind 44 203 170 51 58 6 1 18 50 5 3 30 40 .341 .443 .706 1.149 120
1998 22 3 Teams 3 Lgs Ind-AAA-AA STL 75 324 260 60 91 22 4 16 57 11 5 56 65 .350 .478 .650 1.128 169
1998 22 St. Paul NORL Ind 30 141 114 27 44 11 2 9 33 8 1 21 32 .386 .504 .754 1.258 86
1998 22 Arkansas TL AA STL 19 81 67 18 22 3 1 5 11 2 1 13 15 .328 .444 .627 1.071 42
1998 22 Memphis PCL AAA STL 26 102 79 15 25 8 1 2 13 1 3 22 18 .316 .471 .519 .990 41
1999 23 Memphis PCL AAA STL 25 97 87 11 26 5 1 2 15 6 1 8 20 .299 .371 .448 .819 39
Ind (2 seasons) Ind 74 344 284 78 102 17 3 27 83 13 4 51 72 .359 .468 .725 1.193 206
AA (1 season) AA 19 81 67 18 22 3 1 5 11 2 1 13 15 .328 .444 .627 1.071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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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w가 마이너리그를 씹어먹을 것은 진작에 예견된 일이었다. 이미 그의 스윙은 완성도가 높았으며, Plate Discipline과 Natural Power, Contact, Arm, Range, Baserunning, Raw Speed 등 평가할 수 있는 모든 면에서 Drew는 굉장히 다듬어진 선수였고 흠잡을데가 없었다. Jocketty를 위시한 Cardinals 프론트 오피스도 Drew의 리그 적응같은 것은 걱정하지 않고 신속하게 Drew의 상위레벨 진입을 추진했다. 

유일하게 구단 측에서 걱정한 부분은 바로 J.D. Drew의 (전국적으로 알려진) 드래프트 사태와 "난 11M 정도는 받겠다" 발언이었다. 순식간에 Drew는 "A talented kid with a bad rep"으로 전락한 채 프로야구에 발을 딛게 된 것이다. Arkansas에서 프로야구 첫 경기를 치른 (아...Boras에 따르면 독립야구도 프로야구이므로 이렇게 쓰면 정확하지 못한 걸텐데) 날, 타석에 들어서는 Drew에게 Dire Strait (락밴드) 의 "Money for Nothing"이 울려퍼졌고, 아웃된 뒤 덕아웃으로 돌아올 때는 Beatles의 "Money (That's what I want)"이 나왔으니, Drew를 작정하고 안좋게 보려고 하던 사람들이 어떤 식이었는지 대충 알만 하다.

아직 근육이 붙지 않은 루키 시즌의 J.D. Drew. 이 때는 8번을 달았었다.


1998년: Debut

9월 7일 로스터 확장 J.D. Drew가 콜업되자 우려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시 Cardinals에는 Ron Gant, Ray Lankford, Mark McGwire, Willie McGee, Brian Jordan 등 Drew같은 꼬맹이를 좋게 보지 않을 베테랑들이 가득했다. 특히 Drew Fiasco 당시 외야수 Brian Jordan은 Drew의 11M 요구를 "Outrageous"하다고 표현했으며, McGwire는 신인들의 계약금 액수에 $250K의 상한선을 두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다행히 Drew가 막상 올라왔을 때, BP를 치고 있는 그에게 McGwire와 Gant, Delino DeShields가 먼저 차례로 다가와 "Welcome" 을 전했으며, Drew는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는 큰 갈등 없이) 무사히 빅 리그 락커에 자기 짐을 풀었다. (심지어 TLR 마저  "솔직히 조금 걱정했던 것은 사실이다" 라며 이후에 털어놓았다) 

1998년 9월 8일, 6회말 대타로 나선 Drew는 드래프트된 이후 3개월만에 ML 데뷔전을 치렀다 (데뷔전 상대 Cubs, 상대 투수는 추억의 그 이름 Steve Trachsel). 결과는 루킹 삼진. Drew는 이후 "마지막 공은 체인지업이었다. 너무 긴장해서 그냥 빨리 타석이 끝나기만을 바랬다"며 첫 타석을 회고했다. 이 경기는 공교롭게도 McGwire가 Roger Maris의 단일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깨는 62호 홈런을 날렸던 바로 그 경기로 (혹시 이 홈런 기억하시는지! 빨랫줄처럼 낮게 빠르게 날아가 Busch Stadium에서 가장 짧은 좌측 펜스 끄트러미를 아주 살짝 넘어갔던 바로 그 홈런!), 사람들은 Drew의 데뷔보다는 신기록 수립의 순간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I really hope he means what he says when he says he wants to play the game of baseball. If someone wants to play and is fiddling over $11 million, that shows he doesn't want to play very much. I'm from the old school -- that you've got to prove yourself in the big leagues and that's where you make your money."               

-Mark McGwire, on J.D. Drew (1998)                                                                

 9월 9일, Reds와의 원정 시리즈를 나선 TLR은 선발 라인업에 Drew를 넣지 않았다. 그러나 경기 중 McGwire가 부상으로 빠지면서 3회부터 Drew를 우익수로 출장 시켰고 (대신 우익수였던 Mabry를 1루로), Drews는 8회 Gabe White을 상대로 우중간 담장을 빠르게 넘기는 라인드라이브 홈런을 작렬하며 빅 리그 첫 홈런 신고식을 한다. 

당시 Playoff 진출이 좌절된 St. Louis의 정규시즌 막판은 McGwire의 홈런 레이스로 점철되있었고, Drew의 데뷔는 생각만큼 많은 관심을 끌지 않았다. 콜업 후 첫 며칠간은 주로 대수비, 대타로 벤치에서 머물던 Drew는 9월 15일, 고작 자신의 3번째 선발출장 경기에서 3회와 5회 연타석 홈런을 때리며 멀티홈런 경기를 갖았다. 그러나 그 경기에서 9회 대타로 출전한 McGwire가 본인의 시즌 63호 홈런을 때려내면서 (참 이 양반도 대단하다) 모든 스폿라이트가 McGwire쪽으로 쏠렸고, 각종 소송과 중재, 언론과의 인터뷰로 스트레스를 받던 Drew는 이러한 무관심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9월 25일에는 Expos전에서 4회와 5회 또다시 연타석 투런을 작렬하면서 메이저리그 데뷔 후 첫 28타석만에 홈런을 5개를 때려낸다. 그야말로 명불허전 이었다.

1998시즌 후 Drew는 Arizona Fall League로 보내졌고, 수년간 센터를 지켜온 베테랑 외야수 Ray Lankford는 오프시즌 중 좌익수로 포지션 이동을 할 것을 제안받았다. Drew의 앞길에는 Cardinals의 정규시즌 개막전에서 주전 외야수로 낙점을 받는 일만 남아있었다.

With his extension and his swing, he shouldn't be either a .330 hitter with 15 home runs or a .230 hitter with 45. He should hit for power and average.

-Tony La Russa, on J.D. Drew's potential (1998)



1999-2000년: 주전 중견수로 발돋움

1999시즌 개막전, Drew는 당당히 주전 중견수로 라인업 카드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첫 한 달간 그다지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하며 5월 중순 AAA행을 받아들인다. Memphis에서 한 달간 수련한 뒤 다시 올라온 Drew는 이후 끝까지 중견수 자리를 지키긴 했으나, 확실히 실망스러운 자신의 첫 풀타임 시즌을 보냈다 (13홈런 39타점 72득점 19도루 .242/.340/.424, 50BB 77SO, WAR 2.7, wRC+ 94). 특히 8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한 달간은 홈런을 1개도 기록하지 못하면서 확연히 스윙 리듬을 잃은 모습을 보였으며, 수비나 주루에서는 충분히 훌륭했으나 타석에서는 아직 빅 리그에서 풀 타임을 치러보지 않은 애송이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정도 스탯을 Jon Jay가 찍었다면 모를까, 제2의 Ken Griffey Jr. 프로젝션을 받던 선수치고는 그다지 인상적인 데뷔는 아니었다. 그러나 마이너리그 물을 거의 먹지 않고 팀의 개막전 중견수이자 2번타자로 낙점된 신인의 성적치고 결코 나쁜 성적 역시 아니었다. 누구나 Mike Trout 혹은 Ichiro처럼 데뷔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Phillies 팬들은 정말 어지간하다.


배터리 사건

1999년 8월 10일, Cardinals는 Phillies와의 원정을 위해 Veterans Stadium을 찾는다. Drew가 타석에 들어서자 Phillies 팬들은 욕설과 야유를 시작헀으며, 이미 경기 시작 전부터 "Drew you are a disgrace to baseball" 와 같은 심한 피켓을 들고 와서 설치는 악명높은 Phillies 팬들이 많았다. 이에 굴하지 않았던 Drew는 3회 선두타자로 나서 우중간을 완전히 가르는 3루타를 치며 Phillies 팬들의 심기를 건드렸고, 8회 초에는 1사 1,2루에서 중전안타를 치며 점수를 5:2로 벌리기까지 했다.

급기야 8회말, 센터 필드에 서 있던 Drew를 상대로 관중석에서 배터리가 날아왔고, TLR은 건전지에 맞을뻔한 Drew를 보호하기 위해 심판에게 다가가 경기 중단을 요청했다. 당시 Veterans Stadium의 아나운서였던 Dan Baker가 관중들에게 "더 이상 물건들이 경기장에 난입하면 Phillies가 몰수패를 당할 것이다"고 주의를 준 이후에야 야유가 멈추었다.

참고로 이 경기에서는 5:2로 앞서고 있던 8회말, 그 며칠 전 Phillies로 트레이드되었던 Ron Gant가 Ricky Botallico를 상대로 만루에서 싹쓸이 2루타를 치면서 역전패했다. (이 경기 박스스코어)

“They were throwing batteries. With that history, to me, the first battery that comes out on the field the game's over. I hope that precedent's set. Somebody throws a battery, Phillies lose."

-Tony La Russa, on the battery incident



2000시즌, 드디어 Lankford-Edmonds-J.D.Drew의 황금 외야진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우익수 자리에 정착한 Drew는 정규시즌 3번째 경기에서 Cubs를 상대로 혼자 2홈런 5타점을 치면서 힘차게 출발했고, 전반기에만 11홈런 33타점 .313/.417/.529를 쳤으나, 올스타 브레이크 직전에 당한 부상으로 약 3주간 쉰 이후로는 타격 페이스가 확 떨어진 모습이었다. 그는 2번과 7번 자리를 Renteria와 함께 나눠맡았으며, 가끔은 리드오프로도 출장했고, 6번 타순에서도 쳤으며, 때로는 Edmonds 대신 중견수로 뛰기도 했고 Lankford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 좌익수 알바도 뛰었다. 

이 시즌에 Drew는 결국 .295/.401/.479 18홈런 57타점 WAR 4.0 의 겉으로 보면 확 나아진 성적으로 풀타임 2년차 시즌을 마감한다. 그러나 사실 Drew의 ISO는 전년도와 거의 같았으며, 크게 오른 타율은 .270 --> 0.351로 크게 오른 BAbip와 연관이 있었기에 2000시즌의 Drew가 반드시 1999시즌보다 훨씬 잘 친 것은 아니었다고 봐야했다. 다만 경험이 쌓이면서 점차 상대 투수들과의 카운트 싸움에 조금씩 익숙해져 가고 있었으며 데뷔 2번째 시즌만 4할 출루율을 기록한 그의 Plate Discipline은 그의 미래에 있어서 청신호로 보였다. Drew의 2000시즌에 있어서 가장 슬픈 점은, 아마도 이 시즌이 그가 Cardinals에서 가장 많은 경기와 타석수를 소화한 시즌이었다는 점이다 (135경기 486PA. Drew는 이후 이와 거의 동일한 135경기 496PA를 2002년에 기록한다). 이 때만 해도 Drew의 2번째 시즌은 "어제보다 나은 오늘" 이라는 점에서 고무적이었으며, 많은 이들은 여전히 Drew를 "Future all-star with MVP potential"로 지목했다.


(깨알같은) J.D. Drew vs. Colby Rasmus Comparison I (Rookie Season)          (BB%/K%)

J.D. Drew:13HR 39RBI 72R 19SB .242/.340/.424, 50BB 77SO, WAR 2.7, wRC+ 94, 11.6%/17.9% (24세)

C.Rasmus:16HR 52RBI 72R 3SB .251/.307/.407, 36BB 95SO, WAR 2.8, wRC+ 89, 6.9%/18.3%  (23세)


(깨알같은) J.D. Drew vs. Colby Rasmus Comparison II (Soph. Season)

J.D. Drew18HR 57RBI 73R 17SB .295/.401/.479,  67BB 99SO,  WAR 4.0, wRC+ 126 13.8%/20.4%   (25세)

C.Rasmus: 23HR 66RBI 85R 12SB .276/.361/.498, 63BB 148SO, WAR 4.3, wRC+ 130, 11.8%/27.7%  (24세)



To be continued...

참조: Baseball-reference.com, Sports Illustrated, CNN, Baseball-almanac, Stltoday.com, Riverfront Times, Baseball Prospectus (Kevin Goldstein), Scouting Report, Fangraphs



Posted by Doo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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