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 모듬 Part II 도 준비해보았다. 

이번 조연 모듬의 기준을 잠시 설명하자면, (1) TLR 시대의 서비스 타임 (웬만하면 3년 이상) (2) 최소 3개 포지션 이상 소화 (혹은 기본적인 마당쇠ness) (3) TLR식 관리를 통한 스스로의 재발견 여부 (4) 거부할 수 없는 쩌리 본능 정도를 들 수 있겠다. 이번 모듬은 잊고 지냈던 Unsung Hero들 및 마당쇠들을 돌아보자는 취지가 강하기에, Bo Hart, J-Rod, Jason Simontacchi 등 서비스 타임이 적었던 선수들은 아쉽게도 제외했다. 나중에 "반짝 특집" "광분 특집" 같은 걸로 다뤄볼 예정이다. 


Aaron Miles

Infielder, Outfielder, Pitcher

DOB: 1976년 12월 15일 

Birth: Antioch, California

Time with Cardinals:  2006-2008, 2010


고졸 유격수로 Astros에 16라운드에 지명된 Aaron Miles는, 루키리그에서 5'8 인치의 작은 키 때문에 2루로 포지션을 바꿨고, 이후 5년간 Astros 마이너 시스템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파워가 전무하고 그렇다고 발이 빠르지도 않은 언더사이즈 2루수. 드래프트 이후 5년이 지난 2000년에도 그는 A+볼에 머물러 있었다. 이후 Miles는 Rule 5 드래프트 때 White Sox에 지명되어 이적했는데, 이 때 타격에 눈을 떠 2003년 AAA에서 .304/.351/.445에 11홈런 50타점을 기록하고 26세의 나이로 프로 입문 8년만에 메이저리그 데뷔를 이루어낸다. 그 해 오프시즌, Juan Uribe 트레이드 떄 Rockies로 건너간 Miles는 Rockies의 주전 2루수로 뛰면서 6홈런 47타점 .293/.329/.368의 기대 이상의 성적을 내며 신인왕 투표에서 4위에 올랐다.


그는 2005년 오프시즌 Ray King 트레이드 떄 Cardinals 로 건너왔는데, David Eckstein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뭔가 클럽하우스에 Grit 이 부족함을 느끼던 TLR에게 오아시스같은 존재였다.  그는 뭘 시켜도 기꺼이 하는 충성스러운 팀 플레이어였으며, 마이너리그에서 8년간 고생을 하고 올라온데다 본인 기량의 Ceiling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어서 자존심을 앞세우는 선수가 아니었다. Eckstein의 부상 때 Miles는 기꺼이 (빅 리그에서 맡아본 적 없는) 유격수 자리를 맡았고, 모두의 예상대로 아주 열심히 평균 이하의 수비를 보여주었다. 이게 기특했던 TLR은 2006년 7월 18:4로 지고 있던 경기에서 Dave Duncan에게 "우리 팀에서 가장 작은 구원투수가 누구더라?" 라면서 Miles를 내보냈고, 그는 "까짓 거 해보죠 뭐" 하고 올라가서 기꺼이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내려왔다. Miles의 "안 하는 거 빼고 다해" 본능은 2008년에 그 정점을 찍었는데, 이 시즌에 그는 기존 전공이던 2루수와 부전공이던 유격수, 3루수는 물론 선택과목인 좌익수, 우익수, 중견수, 그리고 투수로도 모두 출장했다. 


Miles는 투수로써 뛰어난 기록을 남기긴 했지만 (-_-) 벤치에서 클러치 히트를 제공하기도 했다. 2006년 전반기 마지막 경기에서 Cardinals는 당시 순위 싸움이 치열하던 Astros를 상대로 Chris Carpenter의 호투를 발판 삼아 거의 경기를 다 잡아놨었는데, 하필 이 시즌에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못하던 Izzy가 블론세이브를 하면서 경기가 연장전으로 넘어갔다. 연장 12회에 Eckstein과 달구지 형이 Astros 마무리 Lidge를 흔들었으나 Pujols와 Rolen이 잇따라 범타로 물러났는데, 여기서 TLR은 Juan Encarnacion 대신 Aaron Miles를 대타로 기용했고, Miles가 역전 2타점 2루타를 치면서 결국 이 경기를 잡아냈다. 2006년 정규시즌 막판 순위싸움을 생각해보면, 이 날 경기의 Miles의 결승타는 생각보다 큰 의미가 있었다.


Miles의 Scarppiness와 "깡"을 상징하는 일화로 Astros 마이너 시절의 총기 강도 사건이 있다. 당시 마이너리거 신분으로 스프링 캠프에 참여하고 있던 Miles는 팀 동료들과 근방의 숙소 Holiday Inn에 머물고 있었는데, 숙소 한 층을 통째로 빌려서 있던 터라 서로 다들 방문을 열어놓고 TV를 보거나 비디오 게임을 하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 때 Miles의 옆 방에 총기 강도가 들이닥치더니 방에 있는 5명의 선수들과 그 중 한 명의 여자친구까지 모조리 묶고 테이프로 입을 막은 뒤 금품을 갈취했고, 이후 Miles가 혼자 있던 방에 들이닥쳐서 그를 총으로 위협하고 금품을 요구했다. Miles는 처음에는 협조하는 척 하다가 잠시 강도가 방심한 사이 달려들어 억지로 총을 빼앗으려고 덤볐고, 강도는 그런 Miles의 얼굴이 계속 주먹질을 했으나 결국 Miles는 강도로부터 총을 빼앗은 뒤 경찰이 올 때 까지 강도들을 제압하고 동료들을 구했다고 한다. 5'8인치 (172cm) 일반인 중에서도 결코 큰 덩치가 아닌데, 총을 든 강도에게 맨손으로 덤벼 총을 빼앗은 이 브루스 윌리스 같은 캐릭터가 이후 좋은 주군을 만나 (TLR) 그를 호위하는 전위같은 캐릭터가 된다는 것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이 당시 함께 있던 인질 5명 중 한 명은 이후 Astros 중심타선에서 활약하게 될 Morgan Ensberg이기도 하다.)


받아라 나의 강속구


기량은 부족했지만 그는 중요한 순간에 집중력을 발휘했고, 실수나 패배를 당할 때 그냥 대충 넘기는 순둥이가 아니라 Fiesty하게 전의를 불태우는 벤치의 투사였다. 14살 때 이후 처음으로 올라가본다는 마운드에서도 그는 최선을 다해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상대로 묵직한 70마일짜리 속구를 뿌렸고, 그런 Aaron Miles의 모습은 결국 유명한 Cardinals 블로그인 Aaron Miles' Fastball 의 탄생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지금까지도 Miles는 David Eckstein, Skip Schumaker와 함께 2000년대 Cardianals 클럽하우스 역사에서 빼먹을 수 없는 인물로 회자되고 있다. Miles는 늘 "I want to play the game the right way" 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는데, 이 말 한 마디에 그에 대한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다.


TLR 밑에서 Miles가 "유틸리티 플레이어의 꽃" 으로 피어나는 것을 본 Cubs는 이를 벤치마킹해 2008년 Mike Fontenot, Ryan Theriot 등 고만고만한 미들 인필더들로 내야진을 꾸려보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Aaron Miles에게 2년 계약을 선사했다. 그러나 2009시즌이 끝난 후 Miles의 2.7M이나 되는 연봉이 부담스러웠던 Cubs는 2년을 못 채우고 Miles를 A's로 트레이드했고, A's에서 다시 Reds로 옮겨갔으며, Reds에서는 방출을 당했다. Miles를 떠나보낸 후 그리움에 사무쳤던 TLR은 옳거니 하고 다시 Miles를 데려왔고, 2010년의 Miles는 타자로써는 79경기에서 타율 .281과 투수로써 2이닝 무실점을 기록했으며, 2루, 3루, 유격수 자리에 구멍이 날 때마다 들어가서 막았다. 이 시즌 Miles의 연봉은 전적으로 (방출 결정을 내린) Reds와 Cubs에서 전부 부담했으니, TLR 입장에서는 제일 좋아하는 선수를 디비전 라이벌들의 돈으로 사용한 셈이었다. 


통산 Cardinals 시절 성적 - 4시즌 481경기 1479타석 8홈런 102타점, .288/.332/.359

                                                  5경기 5이닝 5피안타 2실점, Whip 1.00




Randy Flores

Left-Handed Pitcher

DOB: 1975년 7월 31일 

Birth: Bellflower, California

Time with Cardinals:  2004-2008


Cardinals 팬들에게 Randy Flores는 TLR의 "Go-To Guy" 이자 천상 잡초같은 LOOGY 느낌이 있지만, Randy Flores는 야구 명문 USC의 투수 관련 기록들을 거의 다 가지고 있는, USC Trojans의 전설같은 존재의 선발투수였다다. 당초 Walk-on으로 팀에 들어왔으나 (즉, 고교 시절에 스카우트 된 것이 아니었으며, U of Florida 출신 David Eckstein도 같은 식으로 팀에 들어왔다) Flores는 입학 이후 4년간 한 차례도 All-Pac-10 팀 (Pacific Coast 지역의 학교 10개를 모아부르는 NCAA 디비전 이름으로, 지금은 PAC-12로 확장되었다) 을 놓치지 않았으며, 3차례 All-American 팀에 선정되었고 1995년에는 USC를 대학 월드시리즈에 진출시키며 Pac-10 Pitcher of the Year 상을 수상했다. (13승 3패 3.24).  Flores는 4년간 USC를 대표해 484.1이닝을 던지며 42승 10패 평균자책 3.29의 성적을 거두었고, 22차례의 완투를 해냈는데, 다승/이닝/완투 모두 USC 역사상 최고 기록이다. (484.1이닝은 PAC-12 디비전 내에서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은 기록이며, 대학 야구에서 4년 내내 이렇게 뛰어주는 투수가 별로 없어지는 추세라서 당분간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화려한 대학 야구 생활을 뒤로 하고 Flores는 1997년 드래프트에서 Yankees에 9라운드에 지명되며 프로 생활을 시작했는데, 대학에서 무려 4년을 뛰고 프로에 간 터라 빨리 뭔가 보여주지 않으면 빅 리그로 올라가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2001년에 그가 양키즈 산하 AA볼에서 14승 평균자책 2.78을 기록할 때까지만 해도 빅 리그에 선발로 올라갈 수 있을 듯 싶었으나, 양키즈는 당시 유망주들에게 기회를 줄 여력이 없었다. 그러던 중 Texas, Colorado로 잇따라 트레이드되면서 Flores는 방황했고, 2004년 Cardinals와 계약했을 때 이미 만 28세이던 Flores는 구원이든 선발이든 가릴 사정이 아니었다. 


2004년 9월 로스터 확장 때 Cardinals 유니폼을 입고 데뷔한 Flores는 9경기에서 평균자책 1.93 (14이닝 3실점) 으로 호투했고, 선발로 오래 뛴 터라 멀티이닝도 너끈히 소화함은 물론,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에서는 선발투수들을 아끼려는 TLR의 의도대로 선발등판해 3이닝 1실점으로 호투했다. Flores가 등장하자 Cardinals는 그 때까지 불펜의 핵심 좌완투수이던 Steve Kline을 굳이 붙잡지 않았으며, 2005년 Randy Flores-Ray King 체제 하에서 Flores는 본격적인 LOOGY로써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다. Flores는 2005년에 주로 원포인트 릴리프로 50경기에 등판해서 41.1이닝을 소화하며 평균자책 3.46을 기록하면서 비교적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고,  2006년에는 정규시즌에서 부진했지만 NLCS에서 4차례 등판, 3.2이닝을 3K 무실점으로 막아내면서 시리즈 승리에 일조해 어느 정도 밥값은 했다. (2006 NLCS의 7차전 승리 투수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시즌 이후로 Flores는 "조연"에서 "쩌리"로 전락해버린다.


생긴 것에 비해 참 못했던 투수.

Randy Flores vs. LHB 

2005 : .173/.253/.338 

2006 : .253/.337/.335

2007 : .320/.385/.432

2008 : .302/.422/.549

  2009 : .265/.286/.472 (at Rockies)


Flores는 90마일을 간신히 넘기는 패스트볼과 80마일 초반대의 슬라이더, 70마일대의 커브를 구사하는 투수였고, 나름 Deceptive 한 딜리버리에 꽤나 예리한 슬라이더를 지니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LOOGY로 충분히 효과적일 수 있는 프로필인데, 이상하게 2006년 이후 Flores는 좌타자들을 상대로 아예 위력을 잃어버렸고, 특히 Cardinals에서의 마지막 2년간은 한 때의 Salas 혹은 Boggs 수준의 핵실험으로 많은 팬들을 분노케 했다. 좌타자를 잡으라고 데려다놓은 선수가 좌타자를 잡아내질 못하니 Flores는 순식간에 구단의 짐으로 전락했다. 단순한 패스트볼 구속 저하만이 문제는 아니었으며, 슬라이더가 Zone 바깥으로 Break-away 하지 못하면서 많은 피안타를 양산했고, Flores의 자신감은 계속 하락했다.


이후 미네소타로 이적했을 때, 당시 포수였던 Joe Mauer가 슬라이더를 요구하자 이를 Shake-off 하고 패스트볼을 냅다 던졌는데, Flores의 88마일짜리 패스트볼은 뭐 거의 Meatball 수준이었다. 이에 Gardenhire는 "좌타자에게 패스트볼을 던질 것이었으면 좌투수가 아니라 우투수를 올렸을 것" 이라며 Flores를 비난했고, 이렇게 Flores는 한 때 USC의 전설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다. 그는 2011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했으며, 이후 ESPN의 대학 야구 애널리스트 및 USC 경기 해설가로 활동하던 Randy FLores는 2013년 3월, 모교 USC 야구팀의 어시스턴트 코치로 임명되었다. 이제 Flores는 자기 자리를 찾은 듯 싶다.


통산 Cardinals 시절 성적 - 5시즌 237경기 9승 2패 3세이브 178이닝 154탈삼진 73볼넷, 평균자책 4.35, Whip 1.56




So Taguchi

Utility Infielder, Outfielder

DOB: 1969년 7월 2일 

Birth: Fukuoka, Japan

Time with Cardinals:  2002-2007


이번 조연 특집을 시작할 때부터 가장 마음에 담고 있던 선수이자 조연의 꽃, 소 다구치 형이다. 이빨을 훤히 드러내던 사람좋은 웃음이 트레이드 마크이던 다구치는 인성 뿐 아니라 Grit과 Hustle 그리고 클러치 히팅으로 많은 Cardinals 팬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특히 2006년 NLCS 2차전에서 당대 최고의 마무리 Billy Wagner의 패스트볼을 드라마틱한 결승 홈런으로 만들어내며 모든 이들을 경악케했다. 이 장면은 Cardinals의 2000년대 포스트시즌 역사에서 손에 꼽히는 홈런이며, 이걸 쳐낸 선수가 성실하고도 열과 성을 다해 플레이했던 다구치였다는 사실에 팬들은 더더욱 기뻐했었다.


1992년부터 2001년까지 10년간 오릭스의 붙박이 3루수로 뛴 다구치는 2001년 시즌이 끝나고 32세의 나이로 메이저리그에 도전하는 용기를 냈다. 2002년 1월 29일, 그는 Cardinals와 계약을 하며 구단 역사상 최초의 일본인 선수로 (아직까지는 유일한) 입단하는 영광을 안았는데, 이치로나 마쓰이처럼 일본 프로야구를 제패하고 왔던 선수가 아니었기에 다구치에게는 주전 자리가 보장되지 않았다. 다구치는 입단 이후 첫 2년간인 2002~2003년간 주로 Memphis에서 뛰며 미국 야구에 적응했고, 2003년 8월에 J.D. Drew가 부상을 당하자 그제서야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후 다구치는 이렇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2002년에 그가 처음 미국야구를 접했을 때 많은 전문가들이 AAA 레벨의 많은 파이어볼러들의 강력한 패스트볼에 다구치의 방망이가 밀린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구치는 일본에서도 장타력이 뛰어난 선수가 아니었고, (10년간 장타율 4할 이상은 3번 뿐이었으며, 두 자릿수 홈런도 1번 뿐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엄청난 스피드가 이치로급 컨택트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다구치는 꾸준한 웨이트로 근육을 증량해 패스트볼 대처력을 키우는 한편, 스윙을 최대한 짧게 가져가며 자신의 강점인 변화구 대처력을 높였다. 또한 성실하고 근면한 자세, 겸손한 태도로 마이너리그에서부터 코치들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궂은 일이나 백업 역할을 맡겨도 굉장히 성심성의껏 임했다. 2004년 메이저리그에서 첫 풀타임 시즌을 치르면서 다구치는 TLR, 코치들, 팀 동료들로부터 무한한 신뢰를 얻었다. 특히 TLR은 다구치를 Sam & Dave의 노래 "Soul Man" 을 빗대 다구치를 "So Man"으로 부르면서 애정을 보였고, 특히 누상에서 한 베이스라도 더 가려는 그의 집중력과 기본기에 충실한 그의 수비를 칭찬, 곧 있을 2루 기용을 넌지시 암시했다. 



난 자네가 마음에 든다네. 자넨 어떤가.



2004년 다구치는 팀의 4th OF로 무난히 자리를 잡았으며, 이치로도 밟아보지 못한 월드시리즈 무대에 올라가서 타점도 올리자, 이를 어여삐 여긴 Cardinals에서는 다구치에게 3년간 2.25M의 계약을 던져주었다. 다구치는 계약 첫 해인 2005년부터 경기수(143) 타석수 (424) 홈런 (8개) 타점 (53) 등 모든 기록면에서 커리어 최고 기록을 세우며 WAR 1.1을 기록하는 효율성을 보였고, 외야에 빈 자리가 날 때마다 탄탄한 수비로 메워주었다.. 8월 3일 Marlins 전에서는 4:2로 뒤진 7회 1사 1,2루에서 상대 투수 Beckett을 상대로 TLR이 John Mabry를 대타로 기용했는데, 이에 Marlins 의 Jack McKeon 감독이 좌완 Ron Villone을 투입해 TLR의 매치업 놀이를 저지하려고 하자, TLR은 너무도 당연하게 Mabry를 빼고 다구치를 대타로 투입했다. 결과는 경기를 5:4로 뒤집는 역전 쓰리런이었고, 이후 다구치는 외야수로 경기에 남아있었다. 이러니 TLR이 어찌 다구치를 예뻐하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2006년 정규시즌에서 6월 21일 이후 단 한 개의 홈런도 치지 못하며 홈런 3개로 시즌을 마감한 다구치는 NLDS 3차전에서 Scott Linebrink를 상대로 자신의 포스트시즌 첫 홈런을 쏘아올렸는데, 정작 이것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NLCS 2차전, 6:4로 뒤진 7회 당시 빨간 턱수염을 휘날리던 Scott Spiezio가 2타점 3루타를 치면서 동점을 만들었고, 9회 Billy Wagner가 올라왔을 때 상대한 선두타자는 9회초 대수비로 들어온 다구치였다. 다구치는 극강의 패스트볼과 슬라이더를 던지던 Wagner에게 0-2 카운트로 몰렸으나, 불안불안하게 억지로 Wagner의 98마일 패스트볼들을 커트해내고, 존 바깥쪽에 걸치는 슬라이더를 요리조리 골라가며 풀 카운트까지 끌고갔다. 그리고 9구째 Wagner의 패스트볼을 때려 Shea Stadium을 순식간에 조용하게 만들었는데, 경기 후 "누가 내가 홈런을 칠 거라고 예상했겠어요. 나도 몰랐는데" 라면서 겸연쩍어하던 다구치의 상기된 인터뷰가 기억난다. 동영상 링크


다구치 일본으로 돌아간 이후 NHK에서 야구 해설자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성공적으로 한 시즌을 이미 마쳤다. 다구치는 아직도 St. Louis에 집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며, 이번 2014년 스프링 트레이닝 캠프에도 Larry Walker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다구치 형 블로그 링크 


통산 Cardinals 시절 성적 - 5시즌 578경기 1409타석 19홈런 154타점, .283/.336/.391




Chris Duncan

Corner Outfielder, First Baseman

DOB: 1981년 5월 5일 

Birth: Tucson, Arizona

Time with Cardinals:  1999-2009


Dave Duncan 투수코치의 아들인 Chris Duncan은 고등학교 시절 이미 지역에서 소문난 파워히터였으며, 6'5인치의 거구를 바탕으로 한 힘이 돋보이는 타자였다 (지금의 Matt Adams도 Duncan에 비하면 그다지 커보이지 않는다). 아버지 Dave Duncan은 구단 측에 자기 아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으나, 그런 혈연 낙하산이  없이도 프론트 오피스는 만 18세의 나이에 이미 Upper-Deck으로 홈런을 꽝꽝 때려댈 수 있는 Chris Duncan에게 충분히 매력을 느꼈다.  1999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46번에 뽑힌 Duncan은 프로 입문 첫 2년간은 잠재된 힘을 타구에 싣지 못했으나 (2000시즌 Peoria에서 494타석 8홈런), 2001년에는 훨씬 나아진 모습을 보이며 337타석에서 홈런 13개 2루타 23개를 때리면서 한 단계 크게 나아갔다. 하이A Potomac으로 승격된 후에는 몸쪽 패스트볼에 약점을 드러내며 잠시 부진했으나 (49경기 타율 0.179), 이후 천천히 발전을 계속하며 만 24세 시즌이었던 200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AAA 멤피스에서 21홈런 73타점을 기록하며 마이너리그를 졸업했다.


2006년 Chris Duncan은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자리를 잡지 못한 채 멤피스에서 시즌을 시작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5월 셋째주 (지명타자를 쓸 수 있는) Royals와의 인터리그 시리즈를 앞두고 콜업된다. 시즌 데뷔전에서 투런 홈런을 친 Duncan은 고작 3홈런으로 전반기를 마감했으나, 후반기에 무려 19홈런을 쏘아올리며 후반기 Cardinals 루키 최다 홈런 기록 (종전 Pujols)을 경신한다. 특히 8월달에는 타율 .361에 9홈런 14타점으로 이 달의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경기에 출장하지 않는 날에는 대타 홈런까지 2개나 기록했다. Duncan의 분전 속에도 Cardinals는 이 시즌 후반기에 5할에서 6게임이 모자란 성적을 거두었는데, Duncan이 없었으면 이마저도 힘들었을 것이다. (2006년 후반기 성적 19홈런 34타점 .295/.374/.604). 우투수들의 패스트볼 승부에는 어느 정도 자신있던 Duncan은 Pujols 앞에서 2번타자로 출장해 많은 정면 승부를 했고, 이를 최대한으로 활용해 아주 공격적으로 빠른 카운트에서 풀스윙을 구사, 많은 초구 홈런 혹은 2구 홈런들을 생산해냈다.


Duncan이 이렇게까지 파워 포텐셜을 터뜨리자, 그의 어쩔 수 없는 좌상바 기질에도 불구하고 (2006시즌 좌타자 상대로 2홈런, 타율 .170) TLR도 그를 2007 시즌 외야 구성에서 제외하기가 힘들었다. 전반기에는 72경기에 출장하며 16홈런 .288/.380/.547의 뛰어난 활약을 했던 Duncan은 후반기에 급격히 페이스가 떨어지며 타율 .209에 홈런 5개를 추가하는 데 그쳤으며, 좌상바 기질은 더욱 심해져 좌투수를 상대로는 90타석에서 삼진을 31개나 당하고 장타율은 .313에 그쳤다. Duncan은 2006년 시즌 후반기~2007년 시즌 전반기 사이에만 35홈런을 쳤는데, 이는 그의 통산 홈런수인 55개 중 무려 63%에 달하는 수치이다. 화려한 몇 달을 보내긴 했지만 이 이외의 기간에 Duncan은 반쪽 선수, 조연 혹은 쩌리에 지나지 않았다.




2008년, Duncan은 예년과 마찬가지로 Pujols 라는 최고급 우산을 쓰고 그 앞에서 좋은 공들을 받았지만 전혀 생산성을 보이지 못했고, Memphis로 강등당했다 (추억의 Joe Mather가 대신 올라온다.) Duncan은 승격된 이후에도 계속 빌빌거리다가 7월 셋째주 Nerve Injury로 시즌을 마감했으며, 2009년 수술 후 복귀했으나 전혀 예전 모습을 되찾지 못했다. 이후 Duncan은 팬들의 짜증만 돋구다가 295타석에서 삼진 63개를 당하며 팬들의 짜증만 돋구다가 7월 22일, Red Sox의 유격수 Julio Lugo (역시 허접한 경기력으로 그 지역 팬들의 짜증을 돋구고 있던 선수였다) 와 맞트레이드 되었다. 


공격에서 5할 장타율과 25+ 홈런을 기대할 수 있었다면, Duncan은 그의 좁아터진 수비 범위와 좀 심한 좌상바 기질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메이저리그에서 커리어를 이어나갈 수 있는 선수였다. 그러나 2007년 후반기를 기점으로 그는 완전히 다른 선수가 되었고, 중간중간 있었던 부상들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1루수로써나 좌익수로써나 평균 이하의 수비수였으며, 특히 2006년 월드시리즈에서 Magglio Ordonez의 평범한 플라이볼을 떨구고 이 실책이 다음 타자 Sean Casey의 투런홈런으로 이어지는 장면은 2009년 Matt Holliday의 낭심캐치 장면만큼이나 충격적이고도 감정적으로 힘든 (이 선수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못왔을 것을 알기에) 순간들이었다. 다행히 2006년 월드시리즈는 결과가 좋게 끝났지만...


2010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Duncan은 2011년부터 St. Louis 지역의 야구 라디오쇼에서 야구 애널리스트로 활동했는데, 선수 출신만이 제공할 수 있는 생생한 정보와 꽤나 날카로운 분석력과 유머러스한 입담으로 오후 시간대 지역 라디오 최고 청취율을 기록했었다 (필자도 St. Louis에 다시 갔을 때 잠시 들어본 적이 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이게 Chris Duncan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Duncan은 이후 Fox Mid-West의 Post-game Analysis에서도 활약하면서 방송 쪽에 자리를 잡나했으나, 2012년 10월, 돌연 누구에게도 이유를 말하지 않고 그냥 "개인적인 사정" 이라고 뭉뚱그린 뒤 사라졌다. 많은 이들이 그가 어머니의 투병 떄문에 그러는 게 아닌가 했으나 (Dave Duncan 투수코치 역시 St. Louis에서는 못잖게 중요한 인물이기에 많은 이들이 이를 알고 있었다) 결국 Chris Duncan 본인이 Brain Tumor, 즉 뇌종양 진단을 받고 수술을 했다는 충격적인 사실로 드러났다.


Duncan은 뇌수술 이후 고통스런 Chemo-therapy (약물치료)를 거친 끝에 지금은 일단 MRI 상으로 보이는 종양은 모두 걷어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의학쪽 지식이 없기에 함부로 말할수 없으나) 한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Duncan의 갖고 있던 종양은 유난히 악성종양으로 (Grade IV Glioblastoma), 이 종양은 다시 돋아날 수 있다고 한다. Duncan은 현재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남은 생 내내 암과 투병할 것이며, 진단 이후 평균 수명은 10년 내외라고 한다. 언제 다시 암이 재발할 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나이 서른 셋이 채 안된 젊은 Duncan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바로 라디오 쇼를 통해 "암 투병을 하고 있으나 의료 보험이 없어 적절한 치료를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을 위해 기금을 모으는 일이라고 한다. 


* 사망 선고와 가까운 암을 이겨낸 동생 Chris에 못잖게 형인 Shelley Duncan (Yankees와 Indians에서 뛰던 외야수) 도 강력한 멘탈로 치면 뒤지지 않는다. 그는 원정경기 도중 (2013년 6월) 어머니가 오랜 투병 생활 끝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으나, 곧장 짐을 챙기는 대신 무려 일주일 동안 남은 원정 경기 스케줄을 모두 치르고 휴식일을 기다린 뒤 장례를 치르러 갔다. 이 당시 Shelley가 뛰던 팀은? 다름아닌 Rays 산하 마이너 팀인 Durham Bulls였다.


통산 Cardinals 시절 성적 - 5시즌 389경기 1317타석 55홈런 175타점, .257/.348/.458


by Doo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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