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Doovy

이번 주 TLR ERA 시리즈는 90년대말 Cardinals의 핵심멤버이자 근대 Cardinals를 거쳐간 선수들 중 순수 운동능력에 관한 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던 외야수, Brian Jordan이다. TLR 시절에 Tony의 리더십과 그의 스타일에 불화 및 갈등을 겪었던 선수들은 한 두명이 아니었으나, Brian Jordan는 Ozzie Smith, Ron Gant 등과 함께 초창기 반 TLR '살생부' 명단의 일원이었으며, 잘 알려져있지는 않지만 풋볼과 야구를 병행했던 몇 안되는 Dual-Atheletes 중 하나이다. 사실은 다른 선수 포스팅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요새 연속으로 이어지던 2000년대 초반 Cardinals 포스팅 난무 및 중복을 피하기 위해 이번 주는 특별히 90년대 후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Brian "투잡" Jordan



Brian O'Neal Jordan 

Outfielder

DOB: 1967년 3월 29일 

Birth: Baltimore, Maryland

Time with Cardinals: 1988-1998


Draft and Minors

Brian Jordan는 Baltimore 태생으로, 이미 고등학교 (Millford Mill Academy) 때부터 가을엔 풋볼, 겨울엔 농구, 봄에는 야구를 하는 만능 선수였다. 키는 6'0 으로 (183cm) 그다지 특출나게 큰 것은 아니었으나, 순간 스피드와 점프력이 뛰어났으며 모든 스포츠에 있어서 뛰어난 경기 감각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Jordan은 고등학교 시절 농구를 가장 좋아했으나, 어차피 자신이 NBA에서 뛰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풋볼과 야구에서 커리어를 탐색했다. (그도 그럴 것이, 6'0으로 NBA를 꿈꾸는 것은 엄청난 테크니션이 아닌 이상 모든 코치들이 만류할 일이다). 

고등학교 Senior 때 야구에서는 .479의 타율과 40개의 도루, 풋볼에서는 21개의 터치다운과 1,014 러닝야드를 기록하며 지역 내에서 가장 촉망받는 운동선수였던 그는 1985년 드래프트에서 20라운드에 Indians에 지명이 되었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고 University of Richmond에 진학한 그는 대학에서도 풋볼과 야구에서 모두 두각을 나타냈으며, 야구에서는 학교 단일 시즌 최다 도루 기록을 세움과 동시에 풋볼에서는 역대 최다 Punt Return 기록을 세운 뒤 1988년 Sociology (사회학과) 학사를 받고 졸업했다. 

1988년 Draft에서 아직 야구로 갈지 풋볼로 갈지 정하지 않은 Brian Jordan을 Cardinals는 1라운드 Supplement 픽으로 뽑았다. 훗날 Jordan는 "사실 당시 (연고팀이었던) Orioles 쪽에서 나를 2라운드에 뽑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Cardinals가 먼저 채갔다" 고 회고했다. (소스: Baltimore Sun) Cardinals는 드래프트 당시 이미 운동능력과 순수 스피드, 강한 어깨가 검증된 Jordan이 타격에서의 성급함을 가다듬고 특유의 탄력을 살릴 수만 있다면 올스타 외야수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는데, 어찌하면 비슷한 시기에 Cardinals에 들어왔던 Ray Lankford와 비슷한 스타일이었다. 한편 1988년 드래프트에는 훗날 Cardinals 유니폼을 입게 되는 선수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는데, 다음과 같다. (참고로 Orioles는 Jordan을 놓치자 2라운드에서 Arthur Rhodes를 뽑았다 ㅎㅎ)

Cardinals를 거쳐간 1988년 드래프트 1라운더들

Year RdPck

Tm

Pos WAR
1988 1 Padres Andy Benes (minors) RHP 28.5
1988 14 Mariners Tino Martinez (minors) 1B 25.1
1988 15 Giants via Reds *Royce Clayton (minors) SS 16.4
1988 22 Cardinals via Yankees *John Ericks (minors) RHP -0.2
1988 23 Cardinals Brad Duvall (minors) RHP
1988 30 Cardinals *Brian Jordan (minors) OF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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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rdan는 결국 야구와 풋볼 중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기로 하고, 고되고 빡센 (그만큼 돈을 많이 벌수 있는) Dual-Athelete 이 되기로 하여 같은 해 NFL 드래프트에도 참가한다. 7라운드에서 Buffalo Bills에게 지명당한 Jordan은 그 해 트레이닝 캠프에서 엔트리에 들지 못하고 짤렸으나, 방출되자 마자 그를 눈여겨 보고있던 Atlanta Falcons에서 데려가 Defensive Back, 더 구체적으로는 Strong Safety라는 포지션에 그를 기용한다.

※풋볼에서 Safety란 포지션은 Defensive Team의 일원으로, 보통 Defensive Line이 상대 Offensive Line에 맞서 대인마크가 되는 반면 Safety들은 라인 뒤에서 서있다가 그때 그때의 약속된 플레이나 상황에 맞춰서 태클을 걸어야 하며, 상대 와이드 리시버의 움직임 및 러닝백을 마크하는데 있어서 큰 책임을 지고 있는 포지션이다. 뛰어난 운동신경과 순간 판단력은 물론이고, 상대 러닝백이 공을 놓칠만큼  강하고 저돌적인 태클을 걸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Jordan은 1988~1989년에 Cardinals 싱글 A에서 충분히 자신의 재능을 검증받았으며, NFL 시즌이 시작할 무렵에는 Falcons에 합류해 풀 시즌을 치른 뒤 다시 야구에 복귀하는 식의 '투잡'을 뛰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Jordan의 운동능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1989년 그는 BA 선정 Top 100에 이름을 올렸고, 1991년 AAA에서 비교적 성공적인 마이너리그 시즌을 보낸 이후에는 BA 랭킹 67위까지 진입했는데, 이 당시 Cards 팜은 선수층이 얇은 편이어서 (특히 가장 유망하던 Ray Lankford와 Gilkey가 팜을 졸업한 지 얼마 안되던 시점이다) 31위의 Dmitri Young, 35위의 Donovan Osborne, 64위의 Allen Watson을 제외하면 별다른 유망주도 없었다.


Falcons 시절 Brian Jordan


Brian Jordan's Minor League Track Record

YearAgeTmLgLevAffGPAABRH2B3BHRRBISBCSBBSOBAOBPSLGOPS
198821HamiltonNYPLA-STL19817112223141233615.310.388.549.937
198922St. PetersburgFLORASTL114543715412110208.349.378.6281.006
1990232 Teams2 LgsAA-A+STL258380713110102222.163.193.200.393
199124LouisvilleAAAAASTL6123821235561144241031741.264.342.410.752
199225LouisvilleAAAAASTL43169155234531416132821.290.337.400.737
199326LouisvilleAAAAASTL381651442454132535941617.375.442.597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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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결정

1991시즌 Brian Jordan은 AAA에서 비교적 성공적인 시즌을 보냄과 동시에 NFL 올스타전이라고 할 수 있는 Pro Bowl에 NFC (NFL은 NFC와 AFC, 양대 컨퍼런스로 나뉜다) 대표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Jordan이 야구에만 전념하기를 바랬던 Cardinals는 Brian Jordan에게 3년간 2.4M의 비교적 큰 계약을 안겨줬고, 특히 사이닝 보너스로  1.7M을 쏘면서 풋볼을 그만두기를 요청했다. Jordan은 이를 수용했고, 이를 들은 Dual-Athelete 계의 대표 주자이자 Brian Jordan의 팀 (Falcons) 동료였던 Deion Sanders는 "아니 그 정도 돈에 풋볼을 관둔다고?" 하는 반응을 보였다.

"I can't believe he gave up football. Doesn't he realize there are baseball and football players who make $6 million a year?"

-Deion Sanders, on Brian Jordan quitting football

90년대초 당시 NFL 최고 연봉자는 Dolphins QB였던 Dan Marino 였는데, 심지어 Marino 의 연봉도 4M 근처에 불과했다. Sanders의 6M 드립을 들은 Falcons 관계자는 "만약 Sanders가 Jordan을 위해 6M을 받아준다면 우리 구단 대표 협상자로 삼겠다" 며 껄껄 웃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당시 Deion Sanders에게 6M은 그렇게 꿈같은 수치만은 아니었다. 이미 당시에도 수비수로써는 드물게 1M 이상의 연봉을 받던 Sanders는 이후 무려 8년연속 올스타에 2차례 Defensive Player of the Year 상을 받는 등 NFL에서 역대급 커리어를 쌓고 이후 NFL HOF에 들어간다. 당시 Sanders와 Jordan은 하위팀 Falcons Defense의 핵심으로 굉장히 강력한 듀오를 형성했으며, Sanders가 엄청난 순수 스피드를 지녔으며 스타성과 언론의 관심을 즐기는 스타일이었다면, Jordan은 (상대적으로) Sanders보다는 덜 까불거리는 성격이었으나 더 저돌적이고 강한 태클러였다. 이 둘은 1991년 Falcons를 하위권팀 Falcons를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고 둘 다 Pro Bowl에 출전했는데,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Jordan이 NFL을 떠난다고 했으니 Sanders도 섭섭할만 하다. Sanders는 Jordan이 풋볼에 집중한다면 훌륭한 커리어를 쌓을만한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당시 Sanders는 그의 ML 커리어에서도 정점을 찍고 있었는데, 1992년 Braves에서 97경기만에 WAR 3.1을 기록했으며 무려 14개의 3루타로 .304/.346/.495의 아름다운 슬래시라인을 찍는다 (좌타자였던 Sanders는 Turner Field의 깊은 우측 외야의 덕을 제대로 이용했다). Deion "Prime Time" Sanders에게 있어서 당시 MLB와 NFL을 겸업하며 6M을 받는 것은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일이었다.

(Source: LA Times)

앳된 Brian Jordan



1992-1994년: 4th Outfielder

힘든 결정을 하고 야구에 전념한 첫 시즌. 1992년 4월 8일, 개막전 로스터에 이름을 올린 Jordan는 4월 8일 선발 우익수로 데뷔에 성공했으며, 데뷔전에서 5타수 2안타 4타점에 도루까지 기록하는 만점 데뷔전을 치렀다. 그러나 5월 중순 Hamstring 부상으로 DL에 올라가면서 일이 꼬였다. 복귀 후에도 Jordan은 타석에서 너무 뻔하게 수를 읽히는 모습을 노출하며 스트라이크 존 바깥쪽으로 유인구를 매번 쫓아가는 (chase) 모습을 보여 Torre 감독의 신임을 얻지 못해 결국 4th Outfielder로 AAA와 ML를 왕복하며 한 시즌을 보냈다.

이 시기 Cardinals 감독이었던 Joe Torre는 Bernard Gilkey-Ray Lankford-Brian Jordan의 자체생산 외야수 3명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 중 Jordan의 출장기회에 있어서 상당히 인색한 면을 보였다. 풋볼과 야구를 병행하던 Jordan은 타자로써 ML에서 롱런하기 위한 Plate Discipline이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배트 스피드로 Fastball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쳐냈으며, 웬만한 빠른 공에는 눌리지 않는 큰 장점이 있었다. 1993년~1994년 그는 각각 1.0과 1.1의 WAR를 기록하며 벤치에서 충분히 제 역할을 해냈으나,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에 온지라 1994시즌이 끝났을 때 이미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훗날 Jordan은 "이 시절 경기 출장 기회가 적다보니까 매 경기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정말 몸을 사리지 않고 뛰었다" 고 말했다. 뼛속까지 밴 그의 Football Mentality는 그가 웬만한 잔부상은 그냥 참고 뛰도록 만들었고, Jordan은 타구가 날아오면 마치 그 공이 상대 러닝백이나 리시버인 마냥 냅다 달려가 몸을 던졌다. 그리고 그러한 자세로 외야 전 포지션을 모두 소화해냈다.


제스처를 보아하니 그랜드슬램이 터진 것 같은데...이 경기의 날짜를 맞춰보실분?



1995년: 주전 발탁

1995년 4월26일, 느즈막히 열린 개막전에서 Brian Jordan은 주전 우익수로 선발 출장, 첫 타석부터 Curt Schilling을 (이 양반 정말 자주 나온다!) 상대로 적시타를 치며 첫 시즌을 상큼하게 시작했고, 이 경기에서 투런홈런 포함 2안타 3타점으로 팀의 승리를 이끌며 주전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시즌 중 Torre가 경질되고 새로 Mike Jorgensen이 부임하면서 Jordan의 입지는 더욱 굳어져갔다. Jorgensen은 "BJ는 그가 이미 최고 수준의 리그에서 플레이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면서 그를 Lankford와 Gilkey 앞에 3번타자로 투입하는 신뢰를 보였고, Jordan는 자신의 첫 풀시즌에서 525PA에서 22홈런 81타점 24도루, .296/.339/.488에 WAR 4.5를 기록하는 굉장히 훌륭한 시즌을 보냈다.

Jordan의 공/수/주 모든 면에서 경기의 흐름을 바꿀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Lankford가 먼저 자리를 잡았기에 우익수를 맡았을 뿐, 다른 팀이었다면 충분히 CF로 통했을 Range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탁월한 센스와 순발력으로 도루 성공률도 높았다. 7월 25일 Mets전, 1회에 솔로 홈런, 3회에 투런을 친 Jordan은 연장 11회말 1사 1,2루에서 끝내기 안타를 치며 사실상 혼자 힘으로 팀의 8:7 승리를 이끌었는데 (이 경기 WPA+ .609), 이는 2012시즌 초 (결과가 달라서 그렇지) Braves 전에서 혼자 북치고 장구친 현 Cardinals 우익수 (공교롭게도 둘 다 백넘버 3번이다) 가 생각나는 기록이다. 

"I feel like this is really my rookie season. They're finally letting me play all the time. I know they expected Lankford to do it, but they didn't really know what to expect from me."

-Brian Jordan, on becoming a full-time player


1995시즌이 끝남은 곧 Jordan이 1991년에 맺은 3년간 2.4M의 Baseball-Exclusive 계약이 만료됨을 의미했다. 28세의 Jordan은  충분히 이 때도 NFL로 돌아갈 수 있었고, 실제로 그를 다시 NFL로 부르는 구단들도 있었다. 그러나 1995년 말, Cardinals는 Jordan에게 3년간 9M 과 500K의 사이닝 보너스가 추가된 계약을 안겨주면서 다시 그를 야구에 붙들어놓았다.

1996년: Mr. Clutch

TLR 부임 첫 해, Gilkey가 Mets로 트레이드되고 베테랑 Gant가 합류하면서 Ron Gant-Ray Lankford-Brian Jordan의 제1대 '간지외야' 가 탄생했다. 이 해 팀 멤버가 많이 바뀌면서 타순을 어떻게 짤까 고민하던, TLR은 뛰어난 운동능력과 빠른 발을 갖고 있는 Brian Jordan을 Leadoff로 쓸 생각을 했다. 이에 5월말, 6월초에 이르러 Jordan로  Leadoff로 투입하는 실험을 11경기에 걸쳐 진행했는데, Jordan은 1번타자로 나서서는 45타수 10안타 .222/.260/.311의 굉장히 저조한 성적을 냈다. 이에 Jordan은 TLR에게 자신은 Leadoff 타입이 아니라며 이 실험을 그만하자고 말렸고 (그도 그럴 것이, Jordan의 통산 BB%은 6.3에 불과하며, 첫 풀타임이였던 1995년에는 고작 4.2%에 그칠만큼 볼넷을 고르는데 흥미가 없었다), 자신은 무조건 타점을 올릴 수 있는 타순에서 뛰고 싶다고 얘기했다.

결국 Jordan은 시즌 내내 중심타선에서 활약하게 되었는데, 이 시즌을 기점으로 Jordan은 "Mr. Clutch"로 불리며 TLR에게 보란듯이 타점을 쓸어담기 시작했다. 이 시즌 Brian Jordan의 득점권 성적은 다음과 같은데, 우리가 그토록 칭찬했던 2012시즌 Allen Craig의 득점권 성적도 Jordan에 비하면 남루해보일 지경이다. (특히 맨 밑에 만루 성적에 주목하시길;)

Brian Jordan in RISP (1996)

Split G PA AB H 2B 3B HR RBI SB CS BB SO BA OBP SLG OPS TB
RISP 104 173 147 62 11 0 10 93 11 1 13 19 .422 .453 .701 1.154 103
--- 128 303 287 76 22 1 6 6 0 0 12 45 .265 .304 .411 .715 118
Men On 120 257 226 83 14 0 11 98 22 5 17 39 .367 .404 .575 .979 130
123 25 24 19 13 5 0 1 31 0 0 1 1 .684 .625 1.105 1.73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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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rdan은 시즌 초 Wrist Soreness로 첫 2주를 결장한 이후에는 거의 전경기를 소화하며 140경기에서 17홈런 104타점 .310/.349/.483의 성적을 기록하며 팀의 Playoff 진출에 큰 공헌을 했고, 이를 인정받아 MVP 투표에서도 8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Jeff Bagwell보다 높은 순위, WAR은 5.2였다) 당시 Jordan은 득점권에서는 "내 뒤엔 아무도 없다" 는 식으로 파워업, 굉장한 집중력으로 어떻게든 주자를 불러들이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으며, 볼넷을 골라나가나는 데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RISP에서 그가 가진 173PA 중 볼넷은 단 13번이었는데, 그 중 고의사구가 4개였다. Jordan은 "넌 피해라 난 칠테다" 식의 진정한 타점 오타쿠였다.

플레이오프에서도 Jordan의 활약은 훌륭했다. 하이라이트는 1996년 NLDS 3차전. 9회초 5:5 로 맞선 상황에서 상대 클로저 Trevor Hoffman이 던진 슬라이더가 밋밋하게 몰리자 Jordan은 이를 그대로 좌측 담장으로 넘겨버리는 투런홈런으로 7:5 승리를 가져온다. (이 홈런은 Hoffman의 Cardinals 상대 흑역사의 일부분일 뿐이다ㅎㅎ). 

``I wasn't comfortable and happy and I let that affect my game. Whether it's hitting third, fourth or fifth makes no difference to me. As long as I'm going to have an opportunity to drive in runs, I'm going to be comfortable.''

-Brian Jordan, on his return to 4th spot



1997년: 부상

96시즌의 활약으로 Jordan은 Fan-Favorite 위치에 올라섰다. 미친듯한 타점본능과 굉장한 도루능력도 그랬지만, 몸을 전혀 사리지 않으며 이 펜스 저 펜스에 온몸을 던지는 그의 허슬은 어떤 야구팬들도 미워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Jordan의 바로 옆 자리에서 뛰던 중견수 Ray Lankford가 "그렇게 하다간 몸이 남아나지 않는다"며 "You can't keep running into those walls"라고 경고하기도 했었으나, 풋볼 멘탈리티로 무장된 Jordan에게는 동물적인 반사신경이 우선이었다.

1997년 5월 첫째주, Jordan은 스프링 트레이닝부터 자신을 괴롭혀왔던 Low-back 문제로 결국 DL에 오르고, Herniated Disc (추간판 탈출증으로 일종의 허리디스크가 아닐까 싶다), 6월 중순까지 약 6주를 결장한다. 복귀 후에도 2주만에 다시 통증을 호소, 또 DL로 올라가며 1997시즌을 사실상 망쳐버렸다. 허리가 받쳐주질 못하니 그의 장타율은 0.269로 급락했고, 스윙은 무너질대로 무너져서 161PA에서 .234/.311/.269에 그쳤다. Jordan의 공백은 John Mabry와 Willie McGee가 돌려가며 막았다.

맥과이어와 그의 조연들




1998년: 커리어 하이

St. Louis에서의 마지막 시즌. 허리 부상에서 돌아온 Jordan은 5월 한달간 무려 .424의 타율을 기록하면서 커리어 하이 및 FA 대박을 향해 힘찬 스타트를 끊었으나, 언론의 관심사는 오로지 McGwire의 홈런 레이스 뿐이었다.  그의 타율이 6월 중순 한때 .343에 이르며 NL 리딩히터 타이틀의 강력한 후보로 부상했을 때에도 경기 후 Jordan에게 오는 기자는 한 두명에 불과했으며, 그마저도 팀 동료의 신기록 페이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이에 McGwire는 Jordan의 재능과 그의 1998시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He is a great, great player. He's better than Bo Jackson. He's a two-sport player. He was an All-Pro. He's leading the league in hitting. He's in his free-agent year. There are so many things to talk about with him, and I've seen maybe one thing written about him this year.........................He's just learning how to play the game. He's been playing on raw talent. It's scary to think what he can do when he really understands the game.

-Mark McGwire, on Brian Jordan and his superstardom (1998)



이 신기록 드라마에 Ray Lankford와 함께 조연으로 출연하기로 한 Jordan은 Lankford와 함께 이 역할을 사이좋게 나누었다. Lankford가 4번을 칠 때는 Jordan은 보통 2번 타순에서 McGwire 앞에 주자를 안내보내려던 투수들을 심히 응징했고, 그가 4번을 칠 때는 마음놓고 타점 찬스를 즐겼다. Lankford가 전반기보단 후반기에 McGwire의 크게 도왔던 반면, Jordan은 전반기에 무려 .339/.385/.576의 공포스런 성적과 함께 15홈런 56타점을 기록하며 McGwire의 전반기 홈런 쌓기에 크게 일조했다. 비록 7~8월에 월간 타율이 2할대에 머물며 결국 타격왕과는 거리가 먼 성적에 그쳤으나, FA 계약을 따내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성적이었다. (WAR 6.8, 25홈런 91타점 17도루, .316/.368/.534)


Braves로 이적

FA를 앞두고 Jordan은 풋볼로 복귀할 의사가 있음을 언론에서 밝혔는데, 이에 Cardinals 측에서는 "이건 그냥 협상용 뻥카"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Jordan은 1991년 야구에 집중하기로 한 후에도 꾸준히 풋볼에 대한 사랑을 밝혀왔고, St. Louis에 있는 동안에는 St. Louis Rams 풋볼팀을 찾아가 트레이닝을 지켜보기도 하고, 팀이 원정을 떠났을 때는 시간이 날때마다 그 도시에 있는 풋볼팀에 찾아가 구경을 하고 옛 동료들과 조우하곤 했다.  또한 자신의 풋볼 백그라운드를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시즌이 끝난 후 "NFL팀을 물색해볼 생각이 있다" 고 공언했다.

전 정말 풋볼이 좋은걸요?


어차피 드래프트에서 J.D. Drew라는 완성형 대졸 외야수를 뽑아놓은 Cardinals 입장에서는 부상 위험을 안고 있으며 Club-friendly 계약을 맺을 생각이 전혀 없는 Brian Jordan을 굳이 애써가며 붙잡을 이유가 없었다. Jordan은 St. Louis에서의 생활을 즐겼으며, Cardinals 팬들 사이에서 인기도 많았으나, 프로 운동선수로써 큰 계약을 따내고 싶은 의지가 더더욱 강했다. 오프시즌, Jordan은 Orioles와 Braves 두 팀을 놓고 저울질을 했다. Orioles는 자신의 고향 Baltimore 연고팀이었고, 외야수를 보강할 생각이 있는 팀이었으나, 더 강한 어필은 Atlanta Braves로부터 왔다. Atlanta는 대학에서 만난 아내 Pam Jordan (All-conference Team 에 선정된 농구선수이다) 의 고향이었으며, 현재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는 도시였다. 게다가 Jordan은 자신의 커리어 초창기를 Atlanta Falcons에서 보냈기에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Braves 단장이던 John Schuerholz는 처음부터 Jordan을 타겟으로 생각하고 자리를 만들기 위해 Denny Neagle과 Michael Tucker를 묶어서 Bret Boone과 바꾸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그리고 11월 23일, Jordan은 마치 처음부터 원했던 것처럼 Braves과 5년간 40M의 계약을 체결하고 Braves 유니폼을 입는다. 드래프트 때 Jordan을 놓쳤던 Orioles는 Jordan에 관심이 있었으나 Braves가 선수를 치자 곧장 대어 Albert Belle을 질러버리고 만다. 이 당시 Braves 못잖게 Jordan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Mets였는데, 그들은 5년 35M 수준의 선에서 더 이상의 오퍼는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Mets는 이후 Jordan에게 크게 데이게 된다.


1999-2001년: Braves 시절

Braves로 옮긴 첫 시즌 Jordan은 전반기에만 무려 17홈런 71타점을 올리며 팀 공격을 거의 혼자 이끌다시피 했으나, 후반기에 타오르던 방망이가 급격히 식어버렸다. 여전히 그는 득점권에서 무서운 타자였고 (득점권 .316) 붙박이 4번을 치기에 적격이었으나, 나이로 인해 그의 좌투수 상대 장타력과 우투수 상대 장타력은 조금씩 차이가 나고 있었다 (커리어 초기 Jordan의 좌우 스플릿은 상당히 균등한 편이었다). 

비록 후반기에 6홈런을 추가하는 데 그치긴 했으나 Jordan의 방망이는 다시 플레이오프에서 타올랐다. 1999년 Astros와의 NLDS 2차전에서는 결승 희생플라이를 치며 Millwood의 완투승을 도와줬고, 3차전에서 Jordan은 6회초 당시 리그 최고의 좌완투수 반열에 올라있던 Mike Hampton을 상대로 역전 쓰리런을 후리며 4경기에서 1홈런 7타점을 기록해 Braves 팬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Mets와의 NLCS에서도 Kenny Rogers 상대로 결승 투런을 치며 2차전 승리에 크게 일조했으며, 4차전에서는 7회까지 흑마술같은 피칭으로 1:0 완봉을 할 기세이던 Mets 선발 Rick Reed를 상대로 동점홈런을 때렸다 (이어서 Klesko의 Back-to-back으로 역전, 그러나 John Rocker가 불지르면서 패배. 이 NLCS도 정말 재미있었다.)

2000시즌 Jordan은 시즌 내내 허리통증을 안고 싸웠으며, 통증을 줄이기 위해 타격 메카닉과 스탠스에 손을 댔다가 오히려 결과를 악화시키며 실망스러운 성적을 냈다. 17홈런 71타점을 뽑아내긴 했으나 우투수 상대 타율이 0.223에 그치는 등 전체적으로 Braves가 기대했던 모습은 아니었고, 슬래시라인도 .264/.320/.421로 풀타임 외야수가 된 이후 가장 안좋았다. 

2001년 Jordan은 다시 St.Louis 시절로 수정했고 제대로 반등했다 (25홈런 97타점 .295/.334/.496). A. Jones와 C. Jones 사이에서 그는 절대 꿀리지 않는 성적을 냈고, 오히려 Andruw Jones보다 많은 어시스트를 기록하는 작은 위업을 이뤄냈다. 또한 그는 약해진 무릎 때문에 도루를 많이 시도하지는 않았으나, 후속타시 Extra Base를 따낼 확률에서는 71.2%로 NL 1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넘어서, Jordan은 96시즌부터 이어져 온 그의 "클러치" 모드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Rise up to the occasion, Mr. Jordan


9월 23일, 2경기차로 추격중이던 Mets와의 경기. 한때 13경기까지 벌어졌던 차이를 엄청나게 줄인 Mets는 홈에서 벌어진 시즌 막판 Braves와의 3연전을 스윕하기 위해 에이스 Al Leiter를 냈다. Leiter는 8회까지 Braves 타선을 3안타 8K 1실점으로 막았다 (Braves 선발 Glavine) 그리고 4:1로 뒤지던 9회초 Mets 마무리 Benitez가 올라왔는데, 2사 1루에서 Brian Jordan이 보란듯이 투런을 작렬하면서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갔고, 이어서 B.J. Surhoff의 극적인 동점 적시타로 경기가 연장에 접어들었다. 연장 11회 선두타자로 들어선 Jordan이 또 솔로홈런을 치면서 Braves의 5:4 승리. Mets는 이 경기에서의 패배로부터 회복하지 못했다.

6일 후, 이기면 Braves가 10년 연속 지구 우승을 결정짓는 경기가 또 Mets 상대로 벌어졌다. 또 이 경기에서 Mets는 Leiter의 호투에 힘입어 5:1의 리드를 안았고, 9회에 Benitez를 또 투입했다. Benitez는 결국 Marcus Giles에게 2타점 2루타를 허용하면서 멀쩡하던 경기를 드라마로 만들었고, 2사 2,3루에서 마운드를 John Franco에게 넘겼다. Franco는 Wes Helms를 거르고 이 날 4타수 무안타이던 Jordan을 상대했다. 결과는 끝내기 만루홈런, Braves 8:5 승리, 10년 연속 지구 우승 확정. 이 다음 날 Jordan은 또 쓰리런 홈런을 쳤다. 


1999-2001년 3년간 Brian Jordan은 Braves의 중심타선에서 10.3의 WAR를 기록했는데, 같은 기간동안 그의 후계자인 Drew가 Cardinals에서 12.5의 WAR를 찍은 걸 생각하면 (Cards 입장에서는) 수지타산이 맞는 성공적인 세대교체였다. 데뷔가 늦었던 Jordan은 1998년 St. Louis에서의 임기(?) 가 끝났을 때 이미 만 서른 하나의 나이였고, 그가 96년과 98년에 보여준 공격력은 이제부터 조금씩 내리막을 걷는다고 봐야했었다. Jordan은 지역 사회에서의 왕성한 자선활동과 특유의 클러치능력, 그리고 플레이오프에서의 좋은 활약으로 지역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성공적인 시간을 보냈으며, Braves 입장에서도 3년을 잘 써먹고 Dodgers로 보냈으니 결코 나쁜 FA 계약은 아니었다.


Talent-wise, he's a Gold Glove outfielder and a great player. But he plays so hard he abuses himself. To get to that echelon of the top guys in baseball, you have to play 140 games a year. He beats himself up. When he's out there, he puts on a show, but for him to take his place among the elites, he will have to generate enough games."

-Tony La Russa, on Brian Jordan





총평

비록 Bill James가 한때 "Most Inconsistent Player of all-time"으로 뽑긴 했으나, Jordan은 풀타임 주전으로 발탁된 95년부터 2002년까지 단 한 시즌 (폭망했던 1997시즌)을 제외하고는 소속팀을 위해 매해 최소 128경기 515PA 이상을 뛰었으며, 4차례의 90타점 이상 시즌과 6차례의 타율 .280 이상 시즌을 제공했다. 95~2002년까지 Jordan은 8시즌에 걸쳐 30.8의 WAR를 적립했는데, 이는 같은 기간동안 NL에서 15위에 해당하는 수치이며, Barry Larkin과 거의 같은 수준이다. Jordan은 대학 졸업 후 풋볼과 야구를 병행한 기간이 길었기에 드래프트 후 7년만인 1995년 (만 28세)이 되서야 주전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만약 조금 더 일찍 자리를 잡았다면 더욱 화려한 커리어를 보낼 수 있는 재능이 있던 선수였다. Greg Maddux와 Tony Gwynn이 야구를 예술처럼 하는 법을 보여주었다면, Brian Jordan 같은 선수들은 야구의 가장 야성적인 면을 드러냈던 선수들로 기억이 된다. 

Jordan의 최대 약점인 동시에 최대 매력은 공수에서 모두 볼 수 있었던 풋볼 선수 특유의 Aggressiveness 였다. 수비에서 그는 Edmonds 못지않게 멋진 장면들을 많이 연출해냈으며, 엄청나게 뛰어다니면서 몸을 던져 벽에 충돌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또한 그는 "풋볼에서 그렇듯, 내가 몸을 사리기 시작하면 더욱 다칠 것" 이라고 얘기했다 (Jordan은 풋볼 대신 야구를 선택한 결정은 후회하지 않지만, 매 경기 사이의 회복시간이 짧은 야구가 풋볼보다 부상 당하기 더욱 쉬운 종목인 것 같다고 회고했다.)  또한 타석에서도 그는 1995~1999년까지 2000타석 이상 출장한 선수들 중 5번째로 안좋은 BB% (6.3)을 기록할만큼 (1위 Mark Grudzielanek) 극악의 참을성을 보였는데, 본인 또한 이 문제를 알고 있었다.

"There is so much to learn and I am trying to pick up on things. The one thing I haven't learned is patience. I have almost 200 at-bats and I have only five walks. If I took some walks, I could be hitting .400 right now, but I swing at a lot of bad pitches."

-Brian Jordan, on his plate discipline


그러나 Jordan은 자신의 타격 어프로치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것보다 자신의 강점을 최대한 살리는 데 주력했으며, 이 전략은 그대로 먹혔다. 이에 Jordan은 2001년까지 리그에서 가장 Fastball을 잘 치는 타자 중 하나로 꼽혔으며, 초구 공략도 몹시 즐겼다. 또한 몸쪽으로 들어오는 빠른 공들을 빠른 배트스피드로 응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며, 나이를 먹어서도 수비와 주루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고 클럽하우스에서 리더 역할도 발벗고 나섰다 (물론 Cardinals 시절에는 McGwire와 Lankford 앞에서 대장 노릇을 할 순 없었다. 그의 Veteran Leadership은 Braves와 Dodgers에서 크게 가치를 인정받았다.) 

Jordan은 2004년 Rangers와의 계약이 끝난 뒤 2005년과 2006년 Braves로 돌아와서 두 시즌을 더 백업멤버로 뛰고 은퇴했으며, 개인적인 소망이라고 누누히 밝혔던 200홈런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184홈런). NFL와 MLB 에서 모두 올스타에 선정된, 생각해보면 굉장히 대단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그는, 이 두 차례 올스타를 모두 Atlanta 팀 소속으로 했으며 현재 Atlanta에서 Brian Jordan Foundation 이라는 자선기금(주로 아동 교육과 소아복지를 위한) 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Braves 경기 Pre-game Analyst로 활약하고 있으며, Braves AAA팀 중계까지 하고 있다고 하는데, 커리어의 절반인 7시즌을 Cardinals에서 보내고 5시즌만을 Braves로 (게다가 중간에 트레이드까지 한) 보냈음을 생각하면 조금 서운하기도 하다. 


When I hit one, the first thing I feel is relief. Then, I circle the bases, I feel on the top of the world, I've conquered that pitching, I am the king.

-Brian Jordan, on hitting home runs



by Doo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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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ovy

Revisiting TLR ERA [1] Ray Lankford

Revisiting TLR ERA [2] Edgar Renteria

Revisiting TLR ERA [3] Matt Morris

Revisiting TLR ERA [4] Steve Kline

Revisiting TLR ERA [5] J.D. Drew - Part I




2001년: 비상

Drew의 포텐셜이 가장 잘 반영되었던 시즌. 5월 한 달간 10홈런 26타점 .366/.443/.762를 기록한 Drew는 MVP 페이스로 홈런과 타점을 쓸어담았다. 그러나 6월 17일 벌어진 White Sox와의 3연전 마지막 경기 (Bud Smith vs. David Wells) 에서 Drew는 David Wells의 패스트볼에 손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Broken Hand로 DL에 오른다 (전날 쓰리런 홈런을 쳤던 그였기에 더욱 아쉬웠다). 결국 그 경기는 Drew의 전반기 마지막 경기가 되어 버렸다 (전반기 성적 64경기 21홈런 49타점 .330/.426/.688).

7월 31일이 되서야 간신히 복귀한 Drew는 복귀 첫 경기에서 4타수 2안타(3루타) 2득점을 기록하면서 다시 페이스를 끌어올렸으나, 일주일만에 다시 "Lower Back Sprain"으로 DL에 오르면서 또 2주를 결장한다. 8월 20일~21일, 부상에서 복귀하고 난 첫 2경기에서 모두 홈런을 친 Drew는 그러나 이후 꾸준히 장타 페이스가 떨어지면서 결국 27홈런 73타점 .323/.414/.613에 OPS 1.027로 시즌을 마감했다. 이 시즌은 Drew는 데뷔 초 TLR이 "얘는 3할에 40홈런을 칠 수 있는 애다" 라고 평가한 자신의 재능을 그대로 드러냈고, 특히 웨이트로 몸을 불리면서 장타력이 급상승, 무려 .291의 ISO를 찍어냈다. 또한 지난 2시즌간의 경험으로 투수들과의 카운트 싸움에서도 치기 싫은 공은 커트해내는 노련미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좌투수 상대로 성급했던 모습도 많이 줄이면서 .289의 준수한 좌투수 상대 타율을 기록했다. 특히 그는 볼카운트 3-1에서의 타율이 .778에 이르렀는데, 이는 ML 전체에서 1위였다. 
 
Drew는 이 해 108경기 443PA만에 NL 16위에 해당하는 WAR 5.9를 기록했는데, 풀 시즌을 치렀다면 8~9 사이의 WAR를 기록할 페이스였다. 만약 풀시즌을 소화했다면 아마도 당시 57홈런 142타점의 Luis Gonzalez (WAR 9.4, 3위) 와 Larry Walker (38홈런 123타점 WAR 8.0) 사이에 충분히 끼지 않았을까 싶다 (wRC+ 162 (6위) ISO .291 (8위))




2002-2003년: 부상

2002년은 Drew의 커리어에서 가장 초라한 시즌 중 하나였는데, 나름 135경기 496PA로 꽤나 많은 타석을 견뎌내면서 (Drew의 Cardinals 시절 6년간 가장 많은 PA) 역대 최악의 K% (21%, Drew의 커리어 평균은 18.5%)를 기록하면서 BB%는 11.5%에 그쳤고 (커리어 평균은 14%), OPS는 오랜만에 다시 7할대로 복귀했다 (.252/.349/.429).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장타율의 급격한 하락이었는데, 이미 2001년에 Drew가 건강하다면 어떤 걸 해낼 수 있는지 본 팬들에게는 상당히 실망스런 시즌이었다. 장타력 하락의 큰 원인은 Drew가 2002시즌 내내 싸워야했던 무릎 부상 (Patellar Tendonitis)으로, 시즌 종료 후 Drew는 무릎 수술을 받아야했다. 이 시즌 그는 도루 시도도 10번에 그쳤고, 424타수에서 고작 19개의 2루타밖에 생산해내지 못하는 실망스런 모습을 보였다. Arbitration Eligibility가 생기게 되는 시점부터 Drew의 고질적 무릎 부상이 생겼으니, Cardinals 입장에서도 이제 3.1M을 받고 1.9의 WAR를 찍어낸 Drew를 계속 기다려줄 여유가 없었다.

2003년은 2002년에 비해 조금 나았으나 실망스러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오프시즌에 받은 무릎 수술로 시즌 첫 5주를 놓친 Drew는 5월에 팀에 합류했으나 결국 다시 8월에 Oblique 부상으로 풀타임 5년만에 6번째 DL행을 맞는다. 이 시즌에도 Drew는 고작 100경기 출장 (70경기 선발) 에 그쳤는데, 단순히 TLR의 Platoon 기용을 탓하기에는 Drew가 부상으로 놓친 기간이 너무 길었다. 물론 이 와중에도 Drew는 이 시즌 타석에서 한층 더 성장했다는 평을 들었는데, 특히 몸쪽으로 파고 드는 공에 대한 대처가 크게 좋아지고 (추신수가 치는 좌중간 2루타 타구를 생각하시면 될 듯 하다) Breaking stuff에 대한 참을성과 대처력이 개선되었다는 평을 받으며 .289/.374/.512의 여전히 훌륭한 슬래시라인을 찍었다. 무릎 수술 이후로 Drew는 더 이상 누상에서의 큰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물론 Drew의 탁월한 운동신경은 그를 여전히 좋은 주자로 만들었지만, 이제 그에게 누구도 30-30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이미 이 시즌에 이 3.7M짜리 외야수를 두고 구단 측에서는 어느 정도 인내심이 다했으며, 좀 되나 싶으면 다양한 이유로 DL을 들락날락하고, 한 시즌 500 PA를 단 한번도 채워본 적이 없는 이 젊은 외야수를 둘러싸고 트레이드 루머가 무성하게 퍼졌다.
 

"We saw signs from him that made you say, 'This kid is unbelievable.' But teammates ultimately respect guys who go to the post the most. When something keeps happening that prevents you from going out there, they're not forgiving."

-Tony La Russa, on J.D. Drew's Injury-ridden career (2003)





Trade: Good News and Bad News

2003년 12월 13일, 고향인 Georgia에서 조용한 오프시즌을 보내던 Drew는 GM Walt Jocketty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I've got good news and bad news. The good news is, you're moving closer to home. The bad news is, we're trading you." 
Gary Sheffield가 빠진 외야를 지켜줄 수 있으며 중심타선을 맡아줄 수 있는 외야수를 구하던 Braves의 John Schuerholtz가 Drew를 낚아채간 것이었다.

(주인장님의 Jocketty 시리즈에서 곧 다루시겠지만 이 트레이드는 굉장한 성공이었다. Marquis는 Cardinals에 와서 3시즌간 거의 100경기에 등판하고 600이닝을 먹어주며 든든히 버텨주었다. Ray King 역시 Steve Kline의 부담을 덜어주며 TLR의 좌우놀이에 큰 도움을 주었고, Wainwright은 더 말할 것도 없다. Drew가 이후 Break-out Season이 있긴 했지만, 어차피 Franchise Player로 키우지 못할 것이었으며 Marrero 역시 충분히 대체할 수 있던 자원이었다. 이 트레이드의 평점은 Excellent??)

Drew는 트레이드 직후 충격애 빠졌었다. Rasmus와 다르게 Drew는 (믿거나 말거나) St. Louis에 큰 불만이 없었고, TLR과도 그렇게 나쁜 관계가 아니었다. 그러나 Cardinals 수뇌부에서는 Drew에 대한 인내심이 바닥이 났는데다가, 클럽하우스 내에서 Drew의 지나칠 정도로 "열정없어 보이는" 침착함과 건조함, 그리고 (보기에 따라서 부담스러울 수 있는) 신앙심은 인기가 없었다. 심지어 당시 Cards 소속이던 한 선수는 Drew가 트레이드되자 "Do we miss him? I don't think anyone really does." 라고 대답할 정도였다.

"It's funny when you hear about J.D.'s religious convictions as a negative. We're always reading about people who do wrong, be it drugs, crime, whatever. Then when someone comes along with convictions and character, he gets ripped. I think that's unfair. We're talking about a player who came up with great fanfare, has incredible tools, but whose career has been up and down. If anyone will be motivated and intense, I expect it'll be J.D. Drew."

-John Schuerholz, on acquiring J.D. Drew



2004년: 기다리던 Break-out 

그렇게나 고대하던 J.D. Drew의 Break-out 시즌은 고향팀 Braves에서 바로 터졌다. 무려 145경기 645PA (당연히 커리어 하이) 를 DL이나 잔부상 없이 치러낸 Drew의 풀 시즌은 훌륭했다. .305/.436/.569의 무서운 슬래시라인과 31홈런 93타점도 그랬지만, Drew는 어떤 방법으로든 출루를 해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무려 118개의 볼넷을 골라내며 리그 5위에 오른 그는 (BB 18.3%), 이 해 6월 10일부터 7월 27일까지 무려 41경기 연속 출루기록을 세웠고, 145경기 중 133경기에서 출루에 성공했다 (91%). 또한 무릎 부상에서 완연한 회복세를 보이며 8개의 3루타와 12개의 도루까지 기록했고, Sheffield보다 훨씬 나은 우익수 수비로 Braves 팬들의 환호를 받았다. 

Braves의 Bobby Cox는 (당초 5번타자로 영입했던) Drew를 가리켜 "the perfect No.3 hitter"라고 칭찬했는데, 지난 수 년간 Chipper Jones를 3번으로 써왔던 Cox가 이런 말을 할 정도였으니 알만하다. 이 시즌 Drew는 115경기에 3번타자로 출장하며 팀내 거의 모든 공격 카테고리에서 1위를 했고, 그가 기록한 8.9의 WAR는 ML 전체에서 4위, 162의 wRC+는 ML 전체에서 5위의 성적이었다. 당연히 MVP 투표에도 이름을 올렸다.

Dodgers 입단식에서 Drew와 그의 아내 Sheigh, 그리고 Lasorda




2005-2006: Dodgers

오프 시즌에 Braves는 '홈보이' Drew를 잡고 싶어했다. 그도 그럴것이, DL에 한번도 들어가지 않은 Drew의 2004시즌은 공수에서 완벽했으며, 심지어 어떤 이들은 Drew가 Hank Aaron 이후 팀 역사상 최고의 외야수가 (굉장한 설레발이다 고작 한 시즌에...)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바람을 넣었다. 그러나 Braves는 Mike Hampton과 쌍존스 등 고액연봉자들을 여럿 거느리고 있던 팀 사정상 도저히 AAV 10M 이상은 올라갈 수가 없었고, 3년 25M의 오퍼에 그쳤다. 결국 Drew는 이 해 12월 23일, Dodgers와 5년간 55M짜리 계약을 맺고 서부로 건너간다. Dodgers는 당시 Randy Johnson을 중심으로 한 3각 10인 트레이드를 추진했으나, 이 딜이 파토가 난 후 바로 Drew와의 계약에 집중해 결국 딜을 따냈다.

2005시즌도 Drew는 건강하게 시작, 5월말을 기점으로 서서히 방망이가 뜨거워지더니 6월 한달간 .347/.466/.625를 치면서 페이스를 올렸다. 홈인 Dodger Stadium에서 0.331을 쳤고 중견수 알바도 자주 뛰면서 Dodgers 3번타자로 완전히 자리매김을 했다. 7월 초 D-Backs와의 3연전, Drew는 3연전 첫 2경기에서 7타수 4안타 3홈런을 쳤다. 그러나 세번째 경기에서 상대 선발 Brad Halsey의 패스트볼에 Wrist를 얻어맞았고,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2005시즌을 접어야했다. 72경기만에 WAR 2.8을 찍었으니 Drew가 그대로 풀시즌을 뛰었다면 충분히 WAR 5짜리 시즌은 만들었을 것이다.

2006시즌 그는 20홈런 100타점 .283/.393/.498의 준수한 성적을 올리고 Opt-out을 실행한다. 남은 3년 계약 기간을 깨고 다시 FA가 된 것. Dodgers 단장 Ned Colletti는 "분명 LA에서 행복하다고 했는데 이렇게 일이 진행되서 놀랍다" 고 유감을 표시했으며, Drew는 결국 2006시즌을 앞두고 Red Sox과 5년간 70M짜리 계약을 맺는다. 프로야구 선수인 Drew가 법적으로 전혀 문제 없는 수단을 통해서 새로운 팀을 찾아 떠난 것은 태클걸 여지가 없는 부분이지만, 불과 새로운 계약을 하기 며칠 전에 "나는 LA에서 행복하다" 라는 기사를 냈던 터라 그를 향한 시선은 결코 곱지가 않았다. 그리고 이 중심에는 다시 한 번 10년 전 그를 도왔던 Scott Boras가 있었다.

2007-2011: Red Sox

2006년 12월, J.D. Drew의 계약 건수를 앞두고 Boston Globe에서는 지면에 Drew의 계약에 대한 찬/반 Poll을 걸었다. 무려 81%의 독자들이 Drew의 계약을 반대했다. 그러나 Red Sox는 결국 Drew에게 70M짜리 계약을 안겼고, 팬들은 결코 이 무브를 지지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새로운 팀과 새로운 계약을 할때 푸대접받는 경우도 드물다.) 특히 필드에서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빠른 타구판단으로 다이빙 없이 수비하던 Drew의 모습은 Grit과 Hustle로 사랑받던 Red Sox의 전 외야수 Trot Nixon의 모습과 큰 대조를 이뤘다. 

Drew의 Red Sox 커리어는 짧게 얘기하자면 결코 이상적이진 않았으나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은 계약이었다. 2007년 그는 140경기에 출장하면서 고작 1.9의 WAR를 기록했는데, 커리어 로우나 다름없는 .152로 떨어진 ISO 탓이 컸다 (SLG .423, 최저수치). 이는 좌타자에게 인색한 Fenway Park의 여건과 처음으로 AL에서 뛰는 시즌이었다는 점에서 조금 정상참작을 할 수는 있겠으나, 연봉 14M을 받으면서 Replacement Level 의 생산성을 보였으니 욕을 먹을만한 시즌이었다.

Credit: Larry Johnson




데뷔 이후 줄곧 "Future All-Star"라는 마크를 달고 Scouting Report 페이지에 등장했던 Drew는 2008년, 데뷔 10년만에 처음으로 올스타에 선정되고 무려 올스타게임 MVP까지 수상하는데, Drew가 All-Star에 선정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David Ortiz였다. 이적 후 주로 6번에 머물던 Drew는 Ortiz가 부상당한 6월 한달간 4번에 Manny Ramirez를 업고 3번타자 자리로 복귀헀는데, 이 기간동안 12홈런 27타점 .337/.462/.848이라는 괴물급 성적을 냈고, 이 활약에 힘입어 올스타전까지 출장한 것이었다. Drew가 이 시즌 내내 친 홈런은 총 19개밖에 안되는데 그 중 12개가 6월에 3번타순에서 나왔는데 1) Manny를 업는 효과를 제대로 본 것인지 2) 아니면 3번 타순이 편한 것인지 3) 아니면 NL팀들과 많이 붙는 6월달에 스케줄 이득을 본것인지 여러가지 이유를 생각해보게 된다. 결국 이 시즌도 Drew는 8월부터 DL에 올라감으로써 109경기 456PA에 그쳤다.

2008~2009년 두 시즌간 Drew는 9.0의 WAR를 기록했는데, 이는 AL에서 12위에 해당하는 수치로, Mark Teixeira, Carl Crawford보다 높았다. 적어도 이 2시즌은 14M의 밥값을 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범위를 3시즌 (2008-10) 으로 넓혀봐도 (2010년 Drew는 OPS가 .793으로 떨어지면서 Down year를 보냈다) Drew가 기록한 11.4의 WAR는 Robinson Cano, Curtis Granderson보다 높은 수치이며 B.J Upton과 같았다. 2011년 Drew는 286타석에서 4홈런에 그친데다 부상과 부진이 겹치며 최악의 시즌을 보냈고, 그 시즌을 마지막으로 계약이 종료된 뒤 은퇴했다.


J.D. Drew as a Christian

Drew에 관해서 가장 널리 알려진 사실은 "엄청난 재능을 가졌으나 한번도 제대로 꽃피운 적이 없으며, 늘 잔부상을 달고 다녔던 선수" 라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만큼이나 Drew라는 선수를 되돌아보는데 있어서 중요한 부분은 그의 독실한 기독교 생활이다.

FSU 시절, 훗날 자신을 학교 명예의 전당에 헌액시킴과 동시에 "Player of the Century" 투표에 이름을 올리게 할 만큼 화려한 실력을 뽐냈던 Drew는 학교에 재학중이던 3년간 단 한 차례도 술, 마약, 담배, 섹스에 손을 댄 적이 없다고 고백한 바 있다. 많은 State University들이 그렇지만 FSU 역시 노는 걸로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학교인데, 이 학교를 다니면서 이 정도로 깨끗하게 살았다는 것은 대단한 의지나 신념이 아니고서는 힘든 일이다. Drew는 고등학교 때 그 흔한 Prom 에 간 적도 없고, 대학교 1학년 때 딱 한번 팀 선배들의 성화로 Club에 놀러갔었으나 "Miserable"한 시간을 보내고 45분만에 집에와서 성경을 읽고 기도한 뒤 잠을 청했다고 한다. Drew는 신앙심이 없는 여자는 만나고 싶지 않아했으며, 이에 25세 시즌이자 첫 Break-out campaign이었던 2001년 시즌이 끝나고 나서야 교회 Youth Leader (청년부 부장?) 의 딸 Sheigh를 만나 결혼했다. 

J.D. Drew와 그의 가족들



My friends really understand my beliefs, so they'll ask a girl lots of questions before they introduce her to me. It always ends up, 'Well, I'd like to set you up, but he'd never go out with you for these reasons.' In the Bible it says you shouldn't be with nonbelievers. Hopefully one day I'll find a good Christian girl.

-J.D. Drew, in his interview with SI (1998)



모든 일을 "예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던 Drew의 이러한 Attitude와 가치관은 필드 위에서도 그대로 반영이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홈런이나 삼진이나 다 같은 "Thy Lord's will" (주의 뜻) 이며, 자신은 그저 인간 야구선수이기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나아갈 뿐이라고 입버릇처럼 밝혔다. 그랬기에 그는 홈런을 치든 호수비를 하든 삼진을 당하든 거의 늘 같은 표정으로 일관했고, 이에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Drew를 오해하기 십상이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University of Maryland에 원정을 가서 여느 때처럼 그의 5-tool을 모조리 과시하며 FSU의 승리에 크게 일조한 Drew는 어느 선수들보다도 빨리 샤워를 끝내고 원정팀 라커를 비운 뒤 버스에 올라탔다. 이를 수상히 여긴 Mike Martin 감독이 버스에 올라타자 Drew는 고개를 떨구고 의자에 앉아있었다. Martin이 Drew에게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자 Drew는 이렇게 대답했다.

""Hi Coach. Thank-you. I was looking something up that I could not remember after the game today. I wanted to remember it. I found it though. It was about Joshua." 

그제서야 Martin은 Drew가 고개를 떨군 채 버스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음을 알아챘다.

"That sort of talk has come up before, and it really burns me. It's garbage. Yes, I love Jesus. But if you're a true believer, you're gonna be devoted to the ability God has given you. It's your obligation. Anything less than 100 percent is a repudiation of God's gifts. And I can promise you one thing—I give 100 percent.

-J.D. Drew on his reputation as a 'slacker' (2004)



아직도 많은 Sox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2007 ALCS 만루홈런




J.D. Drew in Postseason

Drew의 포스트시즌 커리어는 55경기 206PA 7홈런 25타점 .261/.333/.408  18BB 36SO로 그다지 특출날 것은 없는 성적이다. 다만 2000년대 초 Cardinals와 2000년대 후반 Red Sox같은 강팀에서 뛰었기에 꽤 많은 Playoff 경기를 치렀을 뿐이다. 그러나 표면 성적 이상으로 Drew는 중요한 홈런을 많이 쳤었는데 몇 개만 꼽아보자면 다음과 같다.

1) 2001년 NLDS 1차전 8회초 vs. D-Backs, 상대 선발 Curt Schilling의 공을 당겨서 어린 Drew가 동점을 만든다. 자주 언급했으므로 패스.

2) 2002년 NLDS 2차전 3회초 vs. D-Backs, 또 상대 선발은 Schilling. 개인적으로는 사실 이 홈런이 더 머리에 생생히 남아있는데, 설마 또 칠까 했는데 Schilling의 패스트볼을 그대로 밀어서 또 넘겨버린 Drew의 무서운 스윙이 기억에 남는다 (Drew는 커리어 내내 몸쪽 공에 굉장히 강한 면모를 보였다) 이 홈런 덕분에 Cardinals는 8회까지 리드를 잡았었고, 결국 9회초 Miguel Cairo의 안타로 결승점을 내고 2차전을 가져갔으며, 시리즈 스윕에 성공한다.

3) 2007년 ALCS 6차전 1회말 vs. Indians. 이 시리즈는 개인적으로 Indians가 올라가길 바라면서 정말 열심히 봤던 시리즈였는데, 5차전을 Indians가 패배했을 때 시리즈 전적은 3승 2패로 앞서고 있었는데도 마치 시리즈가 이미 끝난 듯 암울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6차전은 Fausto Carmona 대 Curt Schilling의 대결이었는데, Carmona가 무사 만루에서 Manny를 삼진처리하고 Mike Lowell을 얕은 플라이로 잡아내며 실점 없이 넘어가려는 순간 Drew가 만루홈런을 때려냈다. 이 홈런 한 방에 Fenway는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으며, 이 순간은 Drew는 이 시즌들어 가장 밥값을 제대로 한 순간이었다. 

4) 2008년 ALDS 2차전 9회 초 vs. Angels. 홈팀 Angels가 5:1의 리드를 차근차근 따라와서 8회 동점을 만들었기에 분위기는 Angels 쪽이 더 좋았다. 마운드에는 K-Rod. 그러나 이 당시 포스트시즌에서 Angels는 Red Sox만 만나면 (마치 Twins가 Yankees를 만나는 것처럼) 굉장히 약했고 9회 Drew가 결승 투런을 때리면서 7:5 승리. 9회말 Papelbon이 올라왔을 때 Angels는 이미 경기를 포기한 듯 보였다.





총평

Drew는 당초 Ken Griffey Jr. 프로젝션을 받으면서 드래프트에 입성했으며 (게다가 Drew가 입성한 시즌은 Griffey가 MVP를 탄 시즌이었다) 그와 플레이했던 감독과 동료들 중 그의 재능을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스윙이면 스윙, 주루면 주루, 그리고 그의 우익수 수비는 탁월했으며, 어디 하나 흠잡을데가 없었다. 그의 출루 능력은 특히 발군이었는데, 그가 2000년대 들어 기록한 10년간의 출루율 (.396)은 전체에서 16위로, Carlos Delgado나 Gary Sheffield보다도 높았다. 

또한 "게으른 천재" 라는 오명 역시 조금 깊숙히 들여다봐야 하는데, (3 Nights in August에서 TLR이 Drew가 왜 100% 를 쏟아붓지 않고 75% 정도만 하고 마는지에 대해 열통터져 하던 부분 때문에 유난히 확대 해석이 되었다) 커리어 내내 Drew는 자신의 약점을 고치려는 모습을 보이고 진지한 노력을 했으며, 늘상 "하늘이 내게 주신 재능을 이용해 최선을 다해서 플레이하는 것이 나의 사명" 이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하며 종교적 이유로 자신의 노력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곤 했다. Drew는 또한 탁월한 타구 판단력으로 어느 구장에 가든 어려운 타구들을 힘들이지 않고 잡아내는 Beltran식 외야수비를 펼쳤고 (특히 Fenway의 넓은 우측 외야에서 Drew의 수비는 발군이었으나, 많은 Sox 팬들이 그가 다이빙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과소평가했다), 강하고 정확한 어깨를 커리어 후반까지 유지했다. 

Drew의 부상 이력이 화려한 건 사실이며, 잘 나가던 시즌을 꼭 부상으로 망쳐버린 경력이 (2001년, 2005년, 2008년) 한두번이 아닌 Drew였기에 팬들에게 "유리몸"으로 각인된 것은 사실이다. Drew는 부상으로 얼마나 많은 경기를 놓쳤으며 얼마나 부상을 당했을까?

1999/05/16 - Quad Strain (DL)
2000/07/08 - Ankle Sprain (DL)
2001/06/18 - Right Hand Fracture (DL)
2002/06/28 - Right Knee Inflammation (DL)
2002/10/17 - Right Knee Surgery (Patellar Tendon Debridement)
2003/01/31 - Left Foot Cyst Surgery
2003/03/30 - Surgery Recovery (DL)
2003/08/09 - Oblique Strain (DL)
2005/07/04 - Left Wrist Fracture Surgery (Ulnar Styloid Process) (60-day DL)
2008/08/18 - Herniated Disc Cartilage (DL)
2009/11/19 - Shoulder Surgery
2011/02/06 - Hamstring Tendonisis Surgery
2011/07/20 - Shoulder Impingement (60-day DL)

  • 2000년대 (2000시즌~2009시즌) 에 Drew는 4850의 PA를 기록했다. 이는 ML 전체에서 이 기간동안 62위에 해당하며, 외야수들 중에서는 30위이다. 놀랍게도 Jim Edmonds, Jason Varitek, Carl Crawford 등 Drew보다 더 뛰었을 것 같은 선수들이 Drew보다 낮은 순위에 랭크되어 있다. 물론 Edmonds는 2009시즌을 뛰지 않았고, Varitek은 포수였기에 직접적인 비교는 의미가 없다. 또한 10년간 평균치가 연평균 122게임 485PA라는 것은 어디가서 자랑할 수준은 되지 못하며, Drew가 Durability 에 관한 질타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이긴 하다. 그러나 Drew가 당한 부상 빈도수에 비하면 생각보다 많은 경기를 뛰었다는 생각도 든다. 

From a straight objective standpoint, what he contributes offensively and what he contributes defensively, and add in baserunning, so it’s the total value of the player, on a rate basis he was outstanding, and there aren’t too many outfielders who compare to what he did.

                                                                                    -Theo Epstein on J.D. Drew (2009)


  • Red Sox 팬들은 Drew가 툭하면 잔부상으로 경기를 안뛴다고 믿었으며, 그가 충분히 참고 출장할 수 있는 수준의 부상인데 몸을 사리기에 출장경기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위 Injury Transaction History를 보시면 아시다시피, Drew가 부상으로 가장 고생했던 시절은 Cardinals 시절로, 99-2003년까지 5년간 6차례 DL에 가면서 평균 440PA에 그쳤다. 
  • 2000년대 (2000시즌~2009시즌) 에 Drew는 41.6의 WAR를 기록했는데, 이는 Manny Ramirez의 41.4보다 높은 순위로, 외야수들 가운데 Vladimir Guerrero-Jim Edmonds-Brian Giles에 이어 11위를 기록하고 있다. 물론 10년간 Ramirez의 Offensive Production에 비해서 Drew가 보여준 성적은 귀여운 수준이었으나, 수비와 주루를 포함했을 때 Drew의 가치는 무시받을 수준이 결코 아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또한 wRC+ 순위에서도 Magglio Ordonez, Brian Giles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며 (135) Edmonds (140)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
Drew의 커리어는 결코 후지지 않았다. 다만 그는 사람들이 그를 야구선수로 좋아하는 것에 대해 어쩌면 지나치리만큼 무신경했다. 그는 신이 주신 재능을 발판으로 야구라는 직업을 우직히 수행하는 것만을 생각했으며, 거만한 슈퍼스타라기보단 겸손하고 온화하며 내성적인 선수였으며, Humility의 아이콘이었다. 부상이 없었다면 그는 더 화려한 기록을 세울 수 있었고, 끝내 Ken Griffey Jr. 라기보단 Cliff Floyd에 가까운 커리어를 보냈다. Core Player로 성장할 것이라는 구단의 기대와는 달리 일종의 계륵/미운오리로 전락했기에 TLR 시대와 Cardinals Organization 관점에서 본다면 아쉬움이 더 많지만, 90년대말~2000년대초 Cardinals에서 그의 20대를 모두 바칠 당시 그가 필드에서 보여준 모습이 개인적으로 그리운 것도 사실이다. (여담이지만 당시 High Heat Baseball을 열심히 하던 시절 필자는 늘 Drew를 3번으로 썼었다 ㅎㅎㅎ).


Did you know...?
  • J.D. Drew는 2008년 Fenway에서 무려 500피트짜리 홈런을 쏘아올렸는데, 이는 Fenway Park 개장 역사상 2번째로 나온 500피트 짜리이며 비거리 역대 2위이다. 
  • FSU 시절 Drew는 라커에 "You are not a great player until you learn how to bunt" 라는 Mike Martin 감독의 말을 종이에 써서 붙여놨다고 한다. 
  • 현재 Drew는 은퇴해서 자기가 나고 자란 Georgia의 한 농장에서 5마일 떨어져있는 인근에 큰 농장을 짓고 사냥과 낚시, 교회 일을 보며 가족들과 평화롭게 지내고 있다고 한다.



by Doovy








Posted by Doovy+
:

Chris Carpenter가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에 시즌을 접을 것 같다고 한다.

이대로 은퇴할 가능성도 상당히 높아 보인다.


ESPN 기사


특히 아래의 문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After speaking with him on the phone you certainly get a sense that he's more concerned about life after baseball," Mozeliak said.


야구는 고사하고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을지 걱정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면, 상황이 꽤 심각한 것이다.


오프시즌 중 공을 던져 본 결과, 어깨에서 손끝까지 마비가 오고 멍까지 생겼다고 한다. 그동안 여러 차례 그를 괴롭혀 온 신경 문제가 작년에 갈비뼈를 절제하는 대수술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돌아온 것이다.


Mo에 의하면 올 시즌 그를 마운드에서 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Carp이니 또 모르지 않을까... 솔직히 작년에도 그가 돌아올 거라고 믿은 사람은 거의 없없지만, 그는 기적적으로 9월에 나타나 정규시즌에 세 번 선발 등판하고, 포스트시즌에도 세 번 더 등판했다. 다만, 확실히 그의 공에 예전과 같은 위력은 없었다. NLDS에서 승리투수가 되긴 했지만, 그건 구위에 의한 승리라기 보다는 이상하게 안타를 맞지 않는 흑마술 같은 피칭이었다.


메이저리그 역사에 이렇게 injury - rehab - dominance 를 몇 차례나 반복한 투수는 별로 없었다. John Smoltz 정도가 생각나는데, Smoltz도 팔꿈치 2회, 어깨 1회 정도로 수술 횟수는 Carpenter에 비하면 얼마 되지도 않는다. -_-;; Carpenter가 겪은 다양한 부상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이야기한 적 있지만, 날짜순으로 정리해 보면...


Chris Carpenter Injury History

(자료 출처: Baseball Prospectus)


1999/06/03  right elbow inflammation (DL)

1999/08/28  right elbow soreness (DL)

1999/09/12  right elbow bone spurs, 팔꿈치 수술(09/16) (out for season)

2000/09/17  face contusion (라인드라이브 타구에 얼굴을 맞아 18바늘 꿰맴. 12일 후 다시 선발 등판)

2002/04/02  shoulder inflammation (DL)

2002/04/22  shoulder inflammation (DL)

2002/08/14  right shoulder torn labrum, 어깨 수술(09/02) (DL, out for 1+ year)

2003/08/07  right shoulder scar tissue, 어깨 수술(07/29) (DL, out for season)

2004/08/11  lower back spasms (DTD)

2004/09/19  right upper arm, musculocutaneous nerve injury (out for season)

2005/09/18  lower back tightness (DTD)

2005/10/04  dehydration (DTD)

2006/05/20  right shoulder inflammation, scapulothoracic bursitis (DL)

2006/08/04  right thumb contusion (DTD) (타구에 손가락 맞음)

2007/04/02  right elbow born spurs, 팔꿈치 수술(05/08) (DL)

2007/07/24  right elbow torn UCL, 팔꿈치 TJ 수술(07/24) (DL, out for 1+ year)

2008/08/11  right shoulder strain(teres major) (DL)

2008/09/03  right shoulder nerve(brachial plexus) injury (out for season)

2008/11/04  right elbow ulnar nerve transposition, 팔꿈치 수술(11/04)

2009/03/30  lower leg strain

2009/04/15  left rib cage strain (DL)

2010/06/28  right forearm contusion (DTD) (타구에 오른팔을 맞음)

2010/08/09  back abrasion (DTD) (난투극 중 Cueto의 발에 찍혀 부상)

2010/09/15  right hamstring cramps (DTD)

2011/03/02  left hamstring strain

2012/03/10  neck neurological injury (DL, out for first half of season)

2012/03/25  neck cartilage injury, bulging disc

2012/07/19  thoracic outlet syndrome, 갈비뼈 절제 수술 (DL, out for 2 months)


여지껏 공을 던져왔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기적일지도 모르겠다. 본인의 초인적인 노력과 의지가 있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커리어를 이어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저 수많은 부상과 수술 사이에 Carpenter는 2005년 NL 사이영 상을 수상했고, 2006년에는 사이영상 투표 3위, 2009년에는 다시 사이영상 투표 2위에 올랐다. 비교적 건강을 유지했던 2004-06, 2009-11의 6년 동안, Carpenter는 평균 5 WAR을 기록한 에이스였다. 그는 포스트시즌에서 더욱 빛났는데, 2006년 WS 3차전에서의 8이닝 무실점 승리, 2011 NLDS 5차전에서 Doc을 상대로 한 완봉승, 3일 쉬고 나와 6이닝 무실점으로 우승을 확정지은 WS 7차전 등은 모두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다. 마운드에서의 퍼포먼스 뿐 아니라, 리더로서 클럽하우스에서의 역할도 꽤 컸던 것 같다.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니, 다시 마운드에 서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Carpenter이니까. 어쩌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World Series postgame speech

(2011 WS 우승 후. 사진: St. Louis Post-Dispatch)


이제 로테이션이 문제인데... 갑자기 허전한 모습이 되었다.

Wainwright

Garcia

Westbrook

Lynn

Miller/Rosenthal/Kelly


Lynn의 로테이션 진입은 거의 확정적이라고 생각되며, Miller/Rosie/Kelly 중 한 명이 5선발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Garcia의 어깨 상태는 스프링캠프가 되기 전까지는 알 수 없으며, 괜찮다고 해도 시즌 중에 언제 또 망가질 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상태이다. Westbrook도 이제 나이가 35세로, 내구성을 장담하기 어려운 투수이다.


그동안 "아끼면 똥 된다"를 외치며 선발자원을 팔아 미들인필드를 보강할 것을 주문해 왔으나, 이제는 투수진의 depth 유지가 매우 중요한 상황이 되었다. 당장 패닉에 빠져 Lohse와의 재계약을 밀어붙일 필요는 없으나, 스프링캠프에서 Garcia의 어깨에 이상이 발견될 경우에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것 같다. Lohse에게 연말에 qualifying offer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 주고 1yr/10M 정도 제안하면 어떨까 싶다. 34세의 Lohse와 3년 장기 계약 같은 것을 맺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바람직하지 않다. 혹 Garcia, Westbrook까지 다 뻗어 버리더라도, Lohse와의 장기계약은 피하기를 바란다.

Posted by FreeRed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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